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우범지대이자, 사각지대 대학내 교수 성폭력을 말하다>(5)

4회의 기획기사가 연재되는 동안에도, 변함없이 또다른 교수 성폭력 사건들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2년이 넘는 시간동안 고통 속에 살아온 서강대의 피해자는 여전히 교원징계위원회에 나가 가해 교수와 다시 대질을 해야하는 어려운 상황들에 직면하면서 힘겹게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교수 성폭력 사건들이 빈번하게 언론에 등장하면서 수많은 비판과 성토의 목소리가 터져나왔음에도 여전히 대학 당국들과 교수 집단, 대학 사회의 모습은 혹여 사건 하나라도 외부로 유출될 새라 감추고 억누르기에만 바쁠 뿐, 어디에도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들은 보이지 않는다.
대학 사회가 하루빨리 진지하고 성숙한 성폭력 정책을 마련하고, 새로운 문화를 구축하기를 바라며 마지막으로 성폭력 없는 대학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마련되어야 할 대학 사회 문화와 성폭력 정책들을 제안한다.

대학에 성폭력 정책 수립을 의무화해야 한다.

각 대학의 정관과 학칙에 준하여 성폭력 정책이 별도로 수립되고 적용될 수 있도록 의무화해야 한다. 외국의 경우, 별도의 성폭력 정책이 구체적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사건이 발생했을 시 이를 정관이나 학칙과 동일하게 적용하여 가해자에 대한 명확한 징계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부분 대학의 경우 학칙은 처벌 조항 등이 보다 구체적인 데 반해 정관 상의 교원 및 직원에 관한 처벌 규정은 상대적으로 매우 모호하게 되어 있어 대학 당국의 임의대로 적용할 수 있으며, 하기에 악용되는 사례도 많다.
성폭력과 관련한 문제에 있어서도 2000년 이후 몇몇 대학에 학칙이 마련되기는 했으나 대학의 전 구성원을 대상으로 한 구체적 신고 및 사건 처리 절차와 피해자에 대한 보호책 등을 담은 구체적 정책의 수준은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기에 이제는 전국의 대학이 대학에 소속된 전체 구성원을 대상으로 하는 구체적 성폭력 정책을 마련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대학의 각 구성원이 정책 수립 논의에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적으로 이를 의무화하여 전체 대학에서 성폭력 사건이 형사법상의 처벌 원칙과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난 연재글에서 살펴 본 미국 각 대학의 경우에도 각 대학의 성폭력 정책은 대학이 소속된 연방 주의 법률에 따라 동일하게 적용되도록 하고 있다.
대학 내에서의 성폭력 사건들도 범죄 행위와 동일하므로 각 대학에서는 이를 기준으로 한 처벌 원칙을 세우고 의무적으로 성폭력 정책을 마련하도록 하여야 한다.

성폭력 정책은 대학의 일상적 교육과 문화까지 다루는 구체 내용이어야 한다.

성폭력 정책은 결코 가해자에 대한 처벌과 이를 위한 기술적인 처리 과정을 기술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성폭력 정책은 대학에서의 일상적인 성폭력 예방 교육과 대학 문화 전체를 지속적으로 평가하고 개선해가기 위한 내용들을 담고 있어야 하며 아주 구체적이고 세심하게 성폭력 사건의 신고 및 처리 과정과 관련한 지역 센터들과의 연계망 설정, 피해자 보호 정책, 징계위원회의 구성 원칙 등을 담아내야 한다.
앞서도 검토해 보았듯이, 성폭력은 구조적 문제이다.
성폭력 사건의 발생은 결코 개인만의 문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소속되어 있는 사회의 특수한 문화와 그 안에서 지닌 그들의 위치가 성폭력 사건의 발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하기에 성폭력 문제의 책임을 여전히 개인에게만 남겨 놓는다면 결코 성폭력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각 대학은 성폭력 정책을 마련하기 전에 반드시 대학 문화와 특히 교수 학생 간 관계에 관하여 구성원 상호간에 명확하게 성찰하고 반성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며 정책 수립 이후에도 향후 시행할 지속적인 예방 교육과 대학 문화 개선을 위한 내용들을 담아내고 시행하여야 한다.

성폭력 사건의 처리는 대학 구성원 외의 전문 카운슬러가 담당하여야 한다.

성폭력 사건이 접수된 순간부터 사건은 외부의 전문 카운슬러에게 전적으로 위임되어야 한다. 많은 사례들에서 보듯이 대학 내 구성원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학교 당국의 권위와 입장이 관여될 수 있으며 이에 피해자는 이중의 고통을 당하게 된다.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진행되는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피해자는 문제제기를 하기 어렵게 된다. 하기에 대학 내 성폭력 사건의 처리는 전적으로 외부의 카운슬러에게 맡겨져야 하며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학교 당국이나 가해자가 개입했을 경우에도 이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대응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어야 한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세밀하고 광범위한 보호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대학 내의 성폭력 피해자는 사건의 발생부터 처리 과정 및 그 이후까지도 이중, 삼중의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하기에 대학의 성폭력 정책에서는 무엇보다도 피해자를 중심으로 한 세밀하고도 다양한 보호책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대학이 성폭력 발생에 대비한 체계적인 시스템을 마련해 놓아야 하는데 가장 기본적으로 지역의 병원, 경찰서, 상담소 등과 상시적으로 연계망을 구축해 놓아야 하며 언제든 신고와 상담을 할 수 있는 상담센터가 설치되어야 한다. 그리고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의 2차 성폭력을 피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되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사건의 발생 후 피해자가 정신적, 신체적 상담과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여건을 대학 당국이 책임지고 제공해 줄 수도 있어야 한다. 또한 사건의 처리 이후에 피해자가 별도의 부담 없이 다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필요한 여건을 조성하는 등의 배려가 필요하다.

마지막 제언, 학생에 대한 교수 1인의 영향력을 줄여야..

대학 전공 교수의 학생에 대한 영향력은 실로 막대하며 특히 대학원 지도 교수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교수 1 인이 학생의 인생을 뒤흔들 수 있는 상황은 성폭력 뿐만 아니라 교수의 학생에 대한 각종의 폭력을 가능케 하는 구조라 할 수 있다.
이에, 성폭력 대응책으로서의 제안을 포함하여 대학 사회의 전반적인 권위적 구조와 문화를 타파하기 위한 제안으로써 학생 평가에 대한 교수 영향력의 분산을 제안한다.
1인의 지도 교수가 아니라 관련 학과의 다양한 교수진이 학생에 대해 평가하고 조력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어야 학생-교수간에 보다 협력적이고 비 권위적인 문화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며 학문적 토양도 보다 다양화되고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제가 문화연대의 주간 문화정책 뉴스레터 <문화사회> (http://weekly.culturalaction.org)에 게재했던 기사입니다. (2003.8.6)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우범지대이자, 사각지대 대학 내 교수 성폭력을 말하다>(4)

미국의 경우, 70년대부터 대학 성폭력 문제가 본격적으로 이슈화되고, 제도화되었다. 그러나, 오랜 노력을 기울여 온 이들 대학의 경우에서도 아직까지 성폭력 문제의 신고와 해결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지적되고 있으며, 이에 미국의 대학들은 성폭력 사건의 체계적 대응과 해결을 위한 방책들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이와 같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사례로 미국 하버드의 '성폭력 대응 연합'의 사례와 로렌스 대학의 성폭력 정책을 살펴보고 이들이 지적하고 있는 문제들과 성폭력 정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를 찾아보고자 한다.

하버드 '성폭력 대응 연합'이 노력하고 있는 것들.

하버드의 '성폭력 대응 연합'에서 학생들로부터 자주 들어오는 성폭력에 관한 질문과 이에 대한 답변을 모아 놓은 글을 보면 대학 보건국의 조사 결과 2000년에만 128명의 학생이 유사 성폭력을 경험했으며, 52명의 학생이 성폭행을 당했음이 밝혀졌다고 한다. 심지어 사법부가 2000년 12월에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1000명 중 27.7 명의 여성이 강간을 당했으며, 이 수치를 하버드에 적용한다면 3000명의 여학생 중 한 해에 거의 83명이 강간을 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 심각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하버드에서는 2000년에서 2001년 사이에 128명의 학생이 강간 시도를 당하고, 52명이 강간을 당했으며, 21명의 학생이 신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 행정위원회는 이 중 오직 7건만 다루었고, 그나마 가해자 중 한 학생만 퇴학 조치되었다. 그러나 그 학생마저 2002년 가을 학기에는 다시 복학하였다.
하버드의 '성폭력 대응 연합'은 이와 같은 문제들이 대학의 행정 당국이 사건과 관련한 증거들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사건 처리 과정이 체계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로 보고,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대학의 행정 당국에 대하여 성폭력 사건의 사례들과 해결을 위한 증거들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구체적이고 충분한 해결 과정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버드의 이와 같은 사례는 대학 내에 성폭력 정책이 수립되고 집행되더라도 제대로 된 사건 해결을 위해서는 대학 당국의 사건에 대한 철저한 집중과 체계적 집행이 뒷받침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로렌스 대학(Lawrence University)의 성폭력 정책

위스콘신 주 로렌스 대학의 성폭력 정책은 그간 대학 당국과 구성원이 많은 논의와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대학의 성폭력 정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들을 몇 가지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대학 내 모든 구성원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가해자는 대학에서 퇴출 된다.

로렌스 대학의 성폭력 정책은 이 대학이 소유 또는 임대하거나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는 모든 장소의 학생, 교수, 직원 또는 방문자 모두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정책에 따르면 로렌스 대학은 피해자가 자신에게 성폭행을 가했다고 믿고 있는 사람과 성폭력 행위가 고발된 사람 모두를 대학에서 퇴출시키도록 되어 있다. 또한 사건을 고발한 이에 대한 보복 행위와 그에 동참하는 행위 또한 금지하며, 학생과 교수, 직원 중 서로 신분이 동등하지 않은 이들간에 성폭행이 자행된 경우, 이들이 서로 사랑하는 관계라는 것이 명백하게 입증되지 않는 이상 정책을 위반한 것으로 하고, 처벌은 동일하게 적용한다. 그리고, 적용 대상에 대한 마지막 절에서는 특별히 교수와 학생, 행정 책임자와 아르바이트 학생간의 관계에서 자신의 가진 권위를 이용하여 성폭력을 행한 경우에는 더욱 엄중히 처벌할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 성폭력 사건의 신고와 처리에 관한 체계적 방법과 충분한 환경 조성

우선은 긴급한 상황에 대비한 시스템이 충분하게 갖추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대학 내에서는 보안처와 의료센터, 병원, 성폭력 센터가 긴급한 성폭력 상황에 대비하여 언제든 신고를 접수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신고가 접수되면 경찰서와 병원 등으로 바로 연결될 수 있는 시스템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피해자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학생처나 보안처에서는 피해자를 위한 공간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총장은 최대한 빨리 피해자의 보호와 사건에 대하여 대학 당국이 취할 행동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또한 행동이 요구될 경우에는, 총장의 권한으로 관련자를 대학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행동을 포함하여 즉각적으로 필요한 행동들을 취할 수 있다.
피해자가 공식적인 고발 절차를 진행하지 못한 상태라 하더라도 해당 상황에 대한 청문회와 토론을 거쳐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내릴 수도 있다. 대학 당국은 공식적으로 고발된 사건의 모든 경우에 대해서 피해자의 기소 여부의 결정에 필요한 각종 정보, 의학적 원조, 내부 고발 절차, 대안 공간, 자신감 회복을 위한 심리 상담, 학과 공부를 지속할 수 있는 환경 등을 제공하며, 사건의 기소를 위한 증거의 확보와 보안 유지 등을 위해 대학 경찰 또한 피해자를 위해 제공하도록 되어 있다.

◎ 사건의 처리 과정에 대해 전문성을 보장하며, 처리 과정 중에도 다양한 경로로 대학 당국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로렌스 대학의 성폭력 정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내부 고발 과정에 대한 설명 부분에서는 사건의 해결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들에 대한 대책들을 설명하고 있으며, 사건의 해결에 전문성과 객관성을 기하기 위한 대책들을 제시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대학 내 성폭력 사건의 접수와 해결은 대학의 정규 직원이 아닌 관련 분야에서 전문적 교육을 받고 경험을 쌓은 전문 상담가가 책임지고 진행한다. 이는 사건의 해결이 대학 당국의 관련자에게 맡겨지게 될 경우, 악덕한 총장이나 학장, 부처장 등에 의해 피해 학생이나 교수, 직원 등이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전문 상담가는 대학 내의 모든 교수, 학생, 직원 및 방문자를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하게 된다. 또한 고발된 사건에 대한 청문회는 교수, 학생, 직원이 동수로 참여하며, 결과에 따라 가해자는 상담이나 경고의 수준에서부터 정직 또는 파면 수준의 처벌까지 받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반드시 공지된다.

◎ 대학의 성폭력 정책에 대한 일상적 교육과 모든 대학 구성원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예방 교육의 실시

마지막으로, 로렌스 대학은 정책적으로 대학의 성폭력 정책에 대해 전 구성원에게 핸드북을 통하여 숙지하도록 하고 정기적으로 교수, 학생, 직원을 포함한 대학 내의 전 구성원에게 성폭력 예방 교육을 실시하며 이에 필요한 면담과 수업, 관련 프로그램의 개설과 출판 등을 상시적으로 제공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 이 글은 제가 문화연대의 주간 문화정책 뉴스레터 <문화사회> (http://weekly.culturalaction.org)에 게재했던 기사입니다. (2003.7.30)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우범지대이자 사각지대, 대학 내 교수 성폭력을 말하다>(3)

연줄과 권위가 지배하는 사회, 대학

대학에는 학문 연구의 기능 외에도 다양한 기능이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사람들을 죽자 사자 대학에 매달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중요한 기능이 또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연줄'을 만드는 기능이다.
같은 학교, 같은 학부 출신을 넘어 같은 학계, 같은 학회, 같은 지도교수로 이어지는 수도 없는 연줄에 연줄이 대학 사회와 나아가 이 사회를 거미줄처럼 얽어매고 있다. 게다가 지나치게 기능화 되고, 세분화 된 분과학문 체계는 대학 사회의 이러한 병폐에 풍부한 토양이 되어주고 있다. 이러한 대학 사회의 특수한 배경이 있기에, 대학 내에서 한 교수의 권위란 연륜이 쌓일 수록 절대적인 것이 되며 소속된 학계나 학회의 힘이 클수록 그 위치는 안정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그 만큼 교수의 위치란 불안정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칫하다가는 '왕따'가 되거나 심지어 교수직을 잃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기에 이런 상황에서 '원하는 연구'를 하고 그것을 발표하기란 그리 녹녹치 않은 일이다. 나아가 입바른 말이라도 한 마디 하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크나큰 결심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학과 대학원 역시 이와 같은 문화의 영향권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대학원의 경우 각종 학계 행사나 학회 행사를 준비하거나 교수들과의 프로젝트를공동으로 수행하게 되는 일도 잦기 때문에 교수 사회 또는 학계, 학회에서 발생하는 온갖 문제들에도 자연스럽게 연관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논문 심사 등에 있어서 지도교수의 영향력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지도교수가 학생에 대하여 가지게 되는 권위도 그만큼 절대적이다. 이번 호에서는 교수 성폭력 사건의 발생에서부터 해결 과정까지에서 보여지는 특징들이 이러한 대학 사회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교수 성폭력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하는 대학 사회 문화의 발동.

나이 많은, 학계의, 대 선배이자, 남성, 교수인 가해자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나이 어린, 학계에 막 진입하려는, 까마득한 후배인, 여성, 학생 피해자에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상당한 압력으로 작용한다. 특히 잦은 행사와 프로젝트 등으로 교수와 술자리를 함께 '해야하는' 일이 많은 대학원생들에게는 더욱 이와 같은 상황이 일상에서 매우 신경 쓰이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2차, 3차까지 암묵적 반 강제로 이어지는 술자리 뒷풀이 문화는 자주 곤혹스러운 상황을 발생시키는데, 여학생들에게 술을 따르게 하거나 노래방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손을 잡는 등의 행위는 학부와 대학원을 막론하고 사실상 흔히 있는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남녀공학이나 여학교를 불문하고 이루어진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이에 대해 제대로 판단하고 대처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바로 상대가 나이 많은, 남성, 교수이기 때문이다.
나이 많은 어른이니까 술 좀 따라드릴 수도 있고, 교수니까 제자와 친근하게 지내고 싶어서 손 한 번 잡고, 어깨에 손 좀 올릴 수도 있지 않느냐는, 오랜 세월 머리와 몸으로 길들여져 온 관념들이 우선 머리를 스친다. 기분이 나쁘지만 다음 순간, 우선 피해자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문제제기 후 자신에게 돌아올 상황들에 대하여...
'교수가, 어른이 함께 즐기는 술자리에서 그런 걸 가지고 뭘 그러느냐', '그러니까 여자들이 사회에서 도태되는 거다', '어디 다음부터는 신경 쓰여서 여학생들하고 술자리 할 수 있겠느냐' 는 등의 뻔한 말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입을 연 다음 순간부터, 상황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그대로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사진/유뉴스

특히 사건이 '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우리의 현실은 처음부터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사건에 대한 1차적 관심은 가해자가 한 행동보다 '여자가 왜 밤 늦게까지 술자리에 함께 있었는가'에 맞춰지고, 이 때문에 가해자가 사건에 대하여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기억나지 않는다'고 부인해도 남성이자 교수인 가해자의 행위는 '우선 교수이고' '술에 취해 있었으므로 그럴 수도 있는 것'이 되고, 여성이자 학생인 피해자가 당한 상황은 '여자가 조심하지 못하고, 밤 늦게까지 술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당한 일'이 된다. 하기에 사건에 대하여 언급한 이후부터 피해자는 이와 같이 자신에 대해 불합리한 시선들부터 감당해내야 한다.
많은 사건들이 학생들과의 MT 자리나 술자리에서 발생하지만, 사건이 술자리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적인 자리에서도, 교수라는 권위를 이용하여 대학원생 조교나 학생들에게 언행을 함부로 하는 사례가 흔히 발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매일, 너무나도 익숙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더더욱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다.
여하간 이러한 어려움을 감수하고 문제제기를 하더라도 피해자에게 이중, 삼중의 고통을 가하는 상황들은 사건이 교수 사회와 학교, 학계에 알려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학교는 우선 '학교의 명예'를 생각하기에 바쁘다.
혹여라도 사건이 외부로 새나갈까 두려워 인터넷과 학보 등의 학내 여론부터 차단하려 애쓰고 사건을 빠른 시일 내에 마무리하기 위하여 피해자에게 일방적으로 합의를 요구한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학생들에게 의도적으로 유포되는 '이러다가는 학교의 명예가 실추된다'는, 위기의식을 조장하는 이데올로기는 또다시 화살을 피해자에게 돌려 고통을 가하며 이와 더불어 각종 루머로 피해자에게 '모종의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혐의를 덮어씌운다.

사건이 발생하면 학교 당국과 교수 사회, 학계는 삼위일체가 된다.
피해자의 인권에 앞서 교수로서의 위치를 사수하기 위한 '교권'이 이들에게는 보다 중요하게 부각되기 때문에 가해자가 어떠한 행동을 했던지 간에 우선 그가 교수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앞 뒤 가리지 않고 힘을 모으며 여기서 '연줄'이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한다.
가해자가 지도교수인 경우, 가해자는 '학점'을 무기로 2차 성폭력을 가하고 다른 교수들과 학교 당국 역시 피해자에게 합의를 요구하며 이 때, 가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나오는 논리들이 '가해자 교수가 학교와 학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학생들과 함께 몇 년을 노력해 왔는지 '따위 들이다. 하기에 학내에서 징계위원회가 열리더라도 이와 같은 논리로 맞서는 교수 사회와 학계 측의 압력으로 인해 사실상 가해자에게는 '징계'를 가장한 '연구년'이나 '휴가'가 주어지고 마는 것이다.
설령, 정직 처분이 내려진다 하더라도 동국대의 경우처럼 교수들과 학계가 나서서 막무가내로 서명운동을 벌여 복직시키기까지 하며, 이미 보았듯이 그 과정에서 '서명'을 하는 행위는 서명 목적의 옳고 그름에 앞서 학계의 '연줄'에서 '의리를 지키고', '왕따 당하지 않기 위한' '의무감'에서 발로되는 것이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하여

문제제기 되지 않았을 뿐, 크고 작은 교수 성폭력은 대학 사회에서 빈번히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뿌리 깊은 교수 사회의 권위의식과 '연줄'과 '명예'를 기반으로 한 대학 사회의 만만치 않은 문화가 피해자에게는 이중, 삼중의 고통을 가하면서 문제의 해결 또한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하기에 교수 성폭력을 뿌리뽑기 위해서는 '성폭력 학칙 제정'에서 나아가 대학 사회의 '연줄 '문화와 학생/교수 간의 권위적 관계를 해체하기 위한 노력 등이 다각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호에서는 우리의 대학 문화와는 다른 외국 대학의 교수/학생간 관계와 대학 문화, 그리고 교수 성폭력과 대학 내 성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그들의 구체적 사례들을 살펴본다.

 

** 이 글은 제가 문화연대의 주간 문화정책 뉴스레터 <문화사회> (http://weekly.culturalaction.org)에 게재했던 기사입니다. (2003.7.23)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우범지대이자 사각지대, 대학 내 교수 성폭력을 말하다>(2)

성폭력 사건은 사건 당시부터 그 사건을 제기하고 증명하여 해결하기까지의 과정 자체만으로도 피해자에게 전적으로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따르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사건을 다시 기억해내는 순간, 피해자의 온몸은 사건 당시의 고통을 그대로 재현해낸다. 같은 크기만큼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사건을 다시 언급할 때마다 피해자에게 다가오는데 그것도 모자라 피해자는 사건의 공개 이후부터는 그 배에 달하는 비난과 압박 또는 동정의 눈길 속에서, 가해자와 그 주변 인물들로부터 가해지는 현실적 피해(2차 성폭력에 해당되는) 속에서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가해자의 뻔뻔함은 시간이 갈수록 극에 달하고, 처음에는 "미안하다", "한 번만 봐달라" 하다가도 자신이 불리해질 상황에 처할 것 같으면 어김없이 사건을 부정하고 심지어 피해자에게 사건의 책임을 돌리기까지 한다.
이 때, 가해자의 '남성' 이라는 사회적 위치는 그가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 '취해서 그런 걸 가지고', '여자가 오죽했으면'하는 논리들이 가해자를 감싸고, 피해자는 '얼마나 극적으로 가해자의 행위에 반항하려 노력했는지', '왜 피해자가 술에 취했는데도 같이 있었는지' 증명해야 하며, 심지어는 '피해자가 원했던 건 아닌지', '가해자를 음해하기 위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인격모독적인 의심의 눈초리까지 감내해야 한다.
'남자'라는 위치만으로도 이럴진데, 하물며 그 당사자가 '교수'임에랴.
'교수'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이 시대 최고의 지성' 이자, '국가와 학교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식인', '학생을 위해 헌신해 온 사람' 이기에 한낱 '술취해 저지른 실수에 불과한' 성폭력 사건 한 번 때문에 피해자의 말만 믿고 그를 해임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국가적, 교육적 손실이며 '교수'인 그에게 가혹한 행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번 기사에서는 이와 같은 교수 성폭력 사건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 사례 두 가지를 살펴보고 그 심각성을 진단한다.

동국대 사회학과 K 교수 사건의 경우
- 교수사회와 학교당국, 교육부의 교권 수호를 위한 강고한 합체!


2000년 7월. 연구차 일본에 가 있던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 K는 같은 학교의 졸업생이자 일본인인 피해자와 재일교포 학생 1인을 만나 술을 마시고, 3차로 노래방에 갔다. 그는 만취한 상태에서 노래방에서 피해자를 붙잡고 억지로 춤을 추려 하였으며, 피해자의 가슴과 다리 사이를 더듬고 강제로 키스를 시도했다. 놀란 피해자는 가해자를 거부하고 뛰쳐나와 집으로 돌아간 후 다음날 피해자에게 전화를 해서 사과를 요청했다. 그러나 가해자는 기억이 안 난다며 그저 '교수로서 학생을 실망시킨 것에 대한' 사과만을 하고 사실을 부인했으며 피해자에게 사건을 잊어줄 것을 부탁했다. 이후 피해자는 함께 같던 재일교포 학생과 상의하고 그달 말 경, 동국대 사회학과 학과장과 전 학생회장에게 메일을 보내 사실을 알렸다.
이후 비대위가 결성되고 학교에서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가해자는 처음에는 "학생들이 원한다면 사퇴할 의사도 있다"며 사태를 마무리지으려 하다가 사태가 커지자 도리어 피해자를 음해하기 시작했다. 가해자 K 교수는 사건의 공론화 이후 제출한 해명서에서 '피해자가 한국인 유학생과 파혼을 하여 제자의 상심을 달래주고자 술을 마시다가 피해자의 요청으로 노래방에 가자고 하여 노래방에 갔고 만취해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자신이 어떻게 피해자의 몸을 더듬었겠냐'며 도리어 '피해자가 방조하지 않았으면 있을 수 없는 일' 이라면서 억지 논리를 펴고 있다. 심지어 그는, '피해자가 그렇게 취한 자신을 왜 여관으로 바래다 주지 않았는지' 의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가해자 해명서에 대한 반박글을 보면 '피해자는 약혼도, 파혼도 한 적이 없고, 노래방에 가자고 한 것도 가해자'였다. 우리는 경험 상, 술에 취한 사람은 혼자서 잘 쓰러지더라도 억지를 부리거나 폭행을 하면 말릴 수 없을 만큼 힘이 세진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여관으로 왜 바래다주지 않았냐니! 피해자가 그 상황에서 여관까지 바래다 주었으면 더 큰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교수'인 가해자는 자신의 해명서에서 도무지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기가 막힌 상황은 그 다음의 일이다.
결국 K교수는 학교에서 해임되었으나 이번에는 사회학과 동문들과 학계, 동료 교수들이 K 교수 구명운동에 나선 것이다. 그 탄원서의 요지는 'K 교수가 학계와 학교의 발전에 공헌한 바가 지대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피해자' 의 말만 믿고 '학생들의 인민재판식 여론몰이에 밀려' K 교수를 해임하기까지 한 것은 가혹한 처벌' 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동국대 여교수들까지도 이러한 논지의 탄원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에 이 구명운동은 '같은 학계'이자 '같은 교수'라는 명분만으로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되는 교권을 수호하기 위해' 동일 학계와 교수직에 있는 이들에게 내용확인도 없이 무작위로 진행된 것임이 밝혀졌다. 이에 동아대 사회학과 한석정 교수와 서울대 사회학과의 김진균 교수는 자신이 제대로 된 내용확인 없이 서명에 동참한 것을 반성하며 서명을 철회하는 성명을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K 교수는 교육부 ‘교원징계재심위원회’에 재심을 청구하여 ‘정직 1개월’ 처분을 받고 학교 당국의 침묵을 발판 삼아 복직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사랑하는' 제자들 앞에 서서 '사회학'을 강의하고 있다.


사진/스포츠 투데이


서강대 대학원 영상미디어학과 K 교수 사건의 경우
- '학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피해자 죽이기


서강대의 경우는 교수에 의한 성폭력 사건에 대한 학교측의 대응 양태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서강대 측은 '학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사건의 공론화에 대응하여 학내 언론 등 학생들의 자치활동을 심각하게 탄압하였다.
서강대 사건의 가해자 K교수는 학과 간담회 행사 후 가진 1차 회식 자리에서 학과 남학생들에게 고기 집게를 들고 "이걸로 네 배를 확 쑤셔서 내장이 딸려 나오면 내가 그걸 씹어먹겠다"는 등의 폭언을 하고, 2차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해 피해자에게 본격적인 성폭행을 가했다. 그는 피해자의 머리와 얼굴을 쓰다듬고, 러브샷을 강요하였으며, "너를 여인으로 만들어주겠다"며 피해자의 입술에 강제로 키스를 시도했다. 피해자는 이후 서강대 여성위원회에 사실을 알리고 가해자에게 사과를 요구했으나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양 놀랍군, 앞길이 구만리 같은 자네가"라는 발언을 하여 피해자를 간접적으로 협박하기까지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건의 공론화 이후 서강대 측의 대응과정이다.
서강대 여성위원회는 사건을 접수받고 총장 면담을 신청하였으나 거절당했으며, 이후 학교측은 인터넷 게시판에서 성폭력 사건과 관련하여 올라오는 글들을 삭제하고, 학보사에 관련 기사 삭제를 요구하였다. 서강대 측은 여성위원회와 공동대책위 주도의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한 달 후에야 겨우 부총장 면담을 진행하고 '교내성차별진상규명위원회' 회의를 '비공개'로 진행했다. 다음 해 1월, 교원징계위원회가 소집되었으나, 학교측은 교원징계위원회의 내용 일체를 공개하지 않았으며, 결과도 공고하지 않았고, 여성위원회 및 피해자에게조차 결과를 통보하지 않았다. 결국 여성위원회가 수차례 전화통화를 시도해서야 '3개월 정직 처분' 이라는 결과를 알았지만 가해자 K 교수는 이미 연구년을 신청해 놓은 상태였다.
결국 말이 징계이지 가해자에게는 '정식 연구년'으로 잠시 쉬고 돌아오는 것에 불과한 처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는 이후 법정 싸움을 시작하였고 올해 2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재판에서 승소하여 2천만원 배상 판결을 받아냈다.
그러나 2천만원이라는 돈이 결코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년이 넘는 사건의 해결 과정에서 피해자는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킨 댓가로 사건 당시보다 더욱 심한 이중, 삼중의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사건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총장은 도리어 일부 교수에게 "뒤에서 누가 조종한 것 아니냐"고 물어보았고, 학과장은 학생들을 불러 침묵을 강요했다.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해지자 K교수는 사과문을 게재했지만 사과문이 나오자 일부 교수는 "BK21 평가가 있는데 이런 사실이 밖으로 알려지면 좋을 게 없다"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고, 학생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학교측은 게시판에 올려지는 글들의 IP 주소를 추적하기까지 했다.
이후 '학교의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수많은 루머를 만들고, 피해자를 음해하기 시작했다. 피해자가 학교를 떠난 교수들의 종용을 받아 대학원에 진학하여 K 교수를 음해할 목적으로 일을 벌인 것이라는 둥, 원래 헤픈 여자였다는 둥, 정신이 원래 이상한 사람이라는 둥 피해자가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비난과 음해가 피해자에게 가해졌고, 이에 피해자는 스트레스로 인한 심각한 위장장애와 알레르기 등 신체적 고통까지 겪어야 했다.
그러나 피해자의 고통은 승소 이후 복학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오랜만에 들어간 수업의 다른 교수마저도 다시 피해자를 불러 "학생이 학교를 위해 이제 K 교수를 용서하라"는 말을 해 피해자에게 2차 성폭력을 가한 것이다.
이제 대학원 마지막 학기이지만,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학위를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조차 불안하기만 하다. 피해자의 상처는 이렇게 계속되고 있다.

 

** 이 글은 제가 문화연대의 주간 문화정책 뉴스레터 <문화사회> (http://weekly.culturalaction.org)에 게재했던 기사입니다. (2003.7.16)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우범지대이자, 사각지대 대학 내 교수 성폭력을 말하다> 1

예부터 '난 사람 이전에 된 사람이 되라'고 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소위 '진리의 상아탑' 이라는 대학에 책만 열심히 팠지 미처 사람이 되지 못한 '교수'라는 신분의 사람들이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죄책감을 가지고 자신의 죄가를 반성하기는커녕, 자신의 신분과 학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방패막에 둘러싸여 문제를 일으키고도 버젓이 '휴가'를 받고, 다시 돌아와 수업을 하는 뻔뻔스런 작태들을 보이고 있다.
이번 기획을 굳이 대학 내 '교수' 성폭력으로 정한 이유도 특별히 그들이 '교수'이기 때문에 피해의 심각성이 더 크고, 해결도 어려울뿐더러 2차 성폭력의 발생 가능성 등 그 후유증 또한 크기 때문이다.

지난 98년 서울대 '신 교수 사건'(피해자의 이름으로 사건명을 언급하는 '우조교 사건'이란 말대신 '신 교수 사건' 이라 하겠다.) 이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면서 대학가에서는 성폭력 학칙' 이 제정되는 등 가시적인 노력들이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아직 '성폭력 학칙'이 제정· 시행된 학교는 소수에 불과하고, 그나마 제정된 학칙도 '학칙'에 불과할 뿐 대학 특유의 권력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을 제대로 예방하고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가해자가 '교수'이며, '어른'이기 때문에 피해자인 '어린' '학생'은 막상 성폭력 상황이 발생했을 때 다른 상황에서보다 더욱 제대로 대처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는 피해자가 대학원생일 경우 더욱 심각하다. 서강대 'K 교수' 사례처럼 대학원생 피해자의 피해 정도는 지도교수와 특수한 관계에 놓여 있는 '대학원생'이라는 위치 때문에 성폭력 발생 당시에 받는 고통과 상처를 넘어서 인생 전체를 뒤바꾸어 놓을 수 있을 정도로까지 확장된다.
이렇게 막대한 정신적, 신체적 피해에도 불구하고 가해자 교수는 보통 징계 기간 동안 '연구년'으로 처리되어 공식적으로는 '휴직' 상태가 되거나, 잠시 쉬고 있다가 잠잠할 쯤 되면 복직하는 것이 보통이다. 학교 당국 역시 사건이 외부로 유출되고 확산되면 학교의 명예가 실추될 것을 우려하여 피해자 학생에게 대충 이해와 합의를 요구하거나 심하게는 되려 피해자 학생을 불러 다그치고, 협박하기까지 한다. 게다가 교수들간의 연대의식이란 굳이 정당치도 못한 일들에서 자신들의 신분에 불안감이 느껴지면 어찌나 강하게 발휘되는 지 동국대에서는 성폭력을 자행하고 징계 당한 교수를 동료 교수들이 서명운동으로 복직시키기까지 했다.
이러한 대학 사회의 모순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모두 서울대에 있다.
서울대는 '최초로' 대학 내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운 '신 교수 사건' 이후 '최초로' '성폭력 학칙'을 제정하여 '최초로' 성폭력을 저지른 '학생'을 제명 시켰지만 바로 지난해까지, 총장은 심심하면 '신 교수 옹호 발언'을 하여 많은 이들을 분노케 했다.
'학생'은 당연히 제명시키면서 더욱 심한 행동을 저지른 '교수'는 사회적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총장이 나서서 '옹호' 해주고, 복직시켜주는 이 모습이 바로 대학 내 '교수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올해 들어서만도 벌써 수 차례 대학 내 교수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폭로되었다.
이제 대학 내 교수 성폭력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학칙 제정'이나 '제도 마련'의 차원을 넘어 교수와 학생, 선배와 후배, 교수자와 연구자 사이의 권력 관계가 권위적 상하관계로 놓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다각도의 대책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 이 글은 제가 문화연대의 주간 문화정책 뉴스레터 <문화사회> (http://weekly.culturalaction.org)에 게재했던 기사입니다. (2003.7.9)**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영화 속의 ‘인터내셔널’

영화 속의 ‘인터내셔널’

지금은 하늘에서 편히 쉬고 계실 정은임 아나운서가 어느 날엔가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영화음악이라면서 ‘인터내셔널’ 가를 들려주었다죠.
비도 오는데 유난히 어디선가 “국가보안법 수호”“국가보안법 수호”하며 거리를 배회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지라 그들 들으라고, 더욱 크게 ‘인터내셔널’을 불러보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글을 시작하려니 새삼 ‘인터내셔널’ 앞에서 부끄러워지네요.
나의 삶을 돌아보며, 우리의 현재를 돌아보며 영화 속에 등장했던 ‘인터내셔널’을 꺼내어보려 합니다.

노동자, <단스(Daens)>, <랜드 앤 프리덤(Land and Freedom)> 그리고 ‘인터내셔널’

<단스>라는 영화를 처음 본 건 대학 2학년 때 ‘연극영화감상’이라는 교양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님은 영화를 틀어 놓고 자리를 뜨셨고 불이 꺼진 후 자리에 앉아 있던 저는 슬슬 졸음이 밀려오던 참이었죠. 오래된 듯한 화면색과 지루한 듯한 첫 화면에 실망하고 잘 준비를 하던 즈음, 영화 속에서는 점점 게으른 제 머리와 몸을 깨워 일으키는 사건들이 진행되었습니다. 어느 신부가 사람들과 격렬히 토론하는 듯 하더니 곧 바뀐 장면에서는 수많은 민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인터내셔널’을 부르며 행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행진 대열 옆을 지나는 마차 안에는 돈 많은 부호들이 앉아 행진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혀를 차지만, ‘인터내셔널’을 부르며 행진하는 이들의 표정에는 분노와 함께 자신감이 가득 차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인터내셔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아동들은 중노동에 시달리고 열두세 살 여자아이는 임신한 채로 시달리다 목숨을 잃어 쓰레기처럼 버려지던 1893년 벨기에의 공업도시.
작가 루이스 폴이 실존 인물 아돌프 단스의 삶을 소재로 쓴 소설 《피에테르 단스 Pieter Daens》를 바탕으로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참혹한 노동 현실과 자본가들의 비정하고 야비한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비춥니다. 그 잔인한 현실 속에서 급기야 한 어린아이가 사망하고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의 결의에 찬 행진 속에서, ‘인터내셔널’이 울려 퍼졌던 것입니다.
비록, 봉기는 곧 잔인한 경찰에 의해 진압 당했지만 노동자들의 ‘인터내셔널’은 최초로 그들의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영화 <랜드 앤 프리덤>에는 또 하나의 감동적인 ‘인터내셔널’이 있습니다.
파시스트의 반동에 맞서기 위한 스페인 내전의 민병대에 자원하여 스페인으로 향하던 영국인 데이빗은 기차 안에서 프랑스인 베르나르와 여러 민병대원들을 만나 POUM(품 - 맑스주의 통일 노동자당)의 민병대원으로서 프랑코 파시스트들과의 투쟁대열에 동참합니다.
어느 날 새벽, 부대는 파시스트들이 점령하고 있던 한 마들을 공격해 탈환하지만 그 전투에서 IRA출신의 쿠간이 파시스트 사제의 저격으로 사망하고 그의 장례식을 치른 후 누군가의 조용한 선창을 시작으로 '인터내셔널'이 울려 퍼집니다.



한 명의 목소리로 조용히 시작되어 마침내는 우렁찬 합창이 되는 <랜드 앤 프리덤>의 ‘인터내셔널’은 동지의 무덤 앞에서 다시 한 번 결의를 다지는 힘찬 노래와 구호로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감동적인 ‘인터내셔널’이 있는 한편, ‘인터내셔널’을 사랑하는 이들의 뒷통수를 날리는 한 방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바로바로...<에어 포스 원>!!

<에어 포스 원>, ‘인터내셔널’을 비웃다.

아... 잊을 수 없는 <에어 포스 원>의 추억!
위대한 미국 대통령님께서 러시아 테러리스트들을 물리치기 위한 작전으로 그들의 장군을 석방해 주는 장면. 감옥에 갇혀 있던 그들의 동지들이 장군의 석방과 동시에 한 목소리로 부르던 ‘인터내셔널’ 위로 곧 자랑스런 미국의 총탄이 날아들더군요.
‘인터내셔널’을 가비압게! 무시하고 테러리스트들을 진압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는 멋진 헤리슨 포드 대통령님이 어찌나 주먹 떨리도록 존경스럽던지요!!!
오늘날도 그 헤리슨 포드 대통령님처럼 전 인류를 구원하고자 밤잠 못 이루고 계실 저 미국의 부시 대통령님, 여하간 수고가 많으시겠습니다. 그려.

자본의 ‘인터내셔널’을 넘어 민중의 ‘인터내셔널’ 그 날까지!!


우리의 현실에는 그 영화 속의 현실들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저 오래전 <단스>가 있던 시대 벨기에 노동자들의 현실이, <랜드 앤 프리덤>의 현실과 <에어 포스 원>의 현실까지도. 그래서 여전히 지구 한 쪽에서는 열 서너 살 어린 아이들이 축구공을 꿰메거나 100원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이루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의 자본이 국가와 국가 사이를 넘나들며 어떤 이들의 배를 채우고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날마다 폭격과 테러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죠.
이제 정말로 ‘인터내셔널’을 현실로 불러내야 하겠습니다.
자본의 ‘인터내셔널’이 아닌, 노동자, 민중의 ‘인터내셔널’을 말입니다.


이 문장을 누르시면 '인터내셔널' 러시아 합창곡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사>의 ‘Bachianas Brasileiras No.5’ 그리고 ‘Manha De Carnival’

<정사>의 ‘Bachianas Brasileiras No.5’ 리고 ‘Manha De Carnival’

 
 
 

<밀애>의 미흔, <디 아워스>의 브라운 부인 그리고 <정사>의 서현.
이들은 모두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평범하고 안정적인 가정에서 살고 있다. 어느 정도 능력 있는 남편과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아이가 있고 삶은 평온하다.
그러나 지겨우리만치 평온한 일상은 점점 건조해지고, 그저 남편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인 지루한 남편과 그저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로서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인 주인공은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게 된다.
‘나는 왜 이 자리에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Bachianas Brasileiras No.5'


한 때는 그녀(들)도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였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돌아본 어느 순간, 그녀(들)은 어느 새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자신에게 더 이상의 신선한 사랑의 감정이나 아름다움, 행복이란 ‘사치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포기하고 살아갈 무렵, 그녀(들)에게, 자신이 억지로, 억지로 깊숙이 가두어 놓았던 그 욕망과 감정들을 다시 깨워 일으키는 사건이 찾아온다.
그렇게 시현에게는 ‘동생의 남자’ 우인이 나타났다.
우울한 모노톤의 화면 위에서 서현과 우인은 점차 서로에게 빠져들어 가고, 결국 서현이 우인에게로 찾아간 첫 날, 서로를 감싼 서현과 우인의 불안한 몸 위로 ‘Bachianas Brasileiras No.5'가 흐른다.
느리고 낮게 시작되는 첼로의 선율, 그리고 그 위로 흐르는 클라리넷의 숨소리와 라틴 풍으로, 조금은 격앙된 듯 흐르는 기타의 스트로크.
서현과 우인의 불안하면서도 격정적인 사랑이 선율을 따라 화면 위에서 흐른다.
브라질 출신의 작곡가 에이토르 빌라로보스(Heitor Villa-lobos)의 음악을 조성우가 편곡한 이 곡은 영화 <밀애>에서도 미흔과 인규의 첫 베드신에 등장하는데 <밀애>에서는 현악기의 선율만으로 보다 무겁고 우울한 느낌으로 느리게 연주되어 우울증에 갇혀 있던 미흔의 감정을 표현하면서 두 사람의 불안한 시작을 암시한다.
이렇게 ‘Bachianas Brasileiras No.5'은 단조롭고도 무거운 바흐와 우울하면서도 서정적인 남미의 감성이 만나 의미 없는 일상과 가정과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갇혀있던 그녀들의 첫 해방을 조용히 쓰다듬어 주고 있다.

‘Manha de Carnaval'



Manha Tao Bonita Manha
Ee Um Dia Feliz Que Chegou
O Sol, O Ceu Surgiu E Em Cada
Cor Brilhou Voltou O Sonho Entao

Ao Coracao Depois De Este Dia
Feliz Nao Sei Se Outro Dia
Vera Em Nossa Manha Tao
Bela Fimal Manha De Carnaval
Canta Ao Meu Coracao
Alegria Voltou Tao Feliz A Manha
Desse Amor

카니발의 아침, 너무나 아름다운 아침
다가왔던 행복한 날 태양과 하늘이
높이 솟았고 그것은 모든 현란한 색채로 빛을 내지
희망(꿈)이 가슴 속에 다시 파고들었지

이러한 행복한 날 뒤에 나는 또 다른 이를 그가 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
우리의 아침에 오, 너무나 아름다운 끝
카니발의 아침 내 마음에 노래가...
행복은 되돌아왔어 오, 너무나 행복한 사랑의 아침


<정사>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에 이 음악은 세 가지의 버전으로 수록되어 있다.
첫 번째는 가장 잘 알려진 Astrud Gilberto의 버전이고 두 번째는 Al DiMeola, John McLaughlin & Paco DeLucia의 버전, 그리고 마지막은 조성우의 버전이다.
여러 영화에서 영화의 분위기와 가장 잘 맞아 떨어지는 음악을 영상 위로 실어 보낸 조성우는 <정사>에서 역시 'Manha de carnaval'을 그만의 감각으로 새롭게 편곡하여 서현과 우인의 사랑을 표현해 냈다.
허밍으로 시작되는 조금은 우울한 분위기의 원곡과는 달리 재즈적 감성이 묻어나는 보사노바 리듬의 조성우의 곡에서는 ‘Manha de carnaval'의 가사에서와 같은 사랑의 기운이 오히려 원곡보다 더 짙게 묻어난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사랑, 아니 두 번은 있을 수 없다 믿었던 그 사랑, 있어서는 안 된다며 감추고 가둬왔던 그 사랑의 감정 앞에서 결국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마는 서현. 그리고 우인.
이미 이룬 가정과 앞으로 이루어야 할 가정 앞에서 두 사람은 결국 서로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렇게, 두 사람의 ‘너무나 아름다운 카니발의 아침’은 시작되었다.

**이 문장을 누르시면 <정사>의 OST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Cucurrucucu paloma' in <Happy together>, <그녀에게>

'Cucurrucucu paloma' in , <그녀에게>


 

그는 수많은 긴긴 밤을 술로 지새었다 하네.
밤마다 잠 못 이루고 눈물만 흘렸다고 하네.



<해피투게더(춘광사설)> 의 보영과 아휘.
동경하던 이구아수 폭포를 향해 무작정 달려가던 중 길 위에서 차를 멈추고 싸워버린다.
사랑의 감정이란 것은 늘 사람을 민감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아서 아주 오묘하고 작은 일로도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고 만다.
보영은 늘 떠난다.
아휘는 그런 보영에게 매번 상처받으면서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어쩌지 못하고 결국 또 다시 자신의 필요가 충족되기만 하면 그를 훌쩍 떠나고 말아버릴 보영을 받아들이고 만다.
보영이 곁에 있어도, 보영이 그의 곁을 떠나도 아휘에게 남는 것은 늘 일상적인 불안과 상처 뿐이다.


그러던 아휘가 장을 만난다.
장이 건넨 녹음기에 보영에 대한 아픈 메시지를 남기고 아휘는 혼자서 이구아수 폭포를 찾는다.
그들을 아르헨티나까지 오게 한 그 곳.
그들이 헤어지게 되었던 계기.
그런 와중에도 아르헨티나에서의 아픔과 상처를 견디고 희망을 가지게 해 주었던 그 폭포.
쏟아지는 물줄기 위로 ‘Cucurrucucu paloma'가 흐른다.

Dicen que por las noches
Nomas se le iba en puro llorar,
Dicen que no comia,
Nomas se le iba en puro tomar.......

이 문장을 누르시면 <해피투게더(춘광사설)>의 'Cucurrucucu paloma' 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세상의 끝을 찾아 떠난 장, 혼자서 이구아수 폭포를 찾은 아휘, 그리고 사실은 가장 상처 투성이로 덮인 보영.
폭포는 끝에서 찾은 새로운 시작이고, 'Cucurrucucu paloma'의 애절함을 상처를 씻고 희망을 담는 애수의 분위기로 만들어내고 있다.

그의 눈물에 담아낸 아픔은 하늘을 울렸고
마지막 숨을 쉬면서도 그는 그녀만을 불렀네



스페인의 가장 유명한 여자 투우사 리디아.
그리고 그녀의 지독한 사랑을 취재하다 그녀에게 빠져버린 여행 저널리스트 마르코.
그러나 리디아는 그만 경기 도중 머리를 크게 다쳐 식물인간이 되고 만다.
그녀의 옆 방에는 발레리나 알리샤와 언제나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던 베니그노가 있다.
베니그노는 알리샤에게 자신의 존재조차 알리지 못했었지만 알리샤가 식물인간이 된 후로는 4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알리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말을 걸며 그녀를 돌본다.
반면 마르코는 리디아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리디아와 서로의 상처를 나누며 결국 리디아를 사랑하게까지 되었지만 정적 리디아가 병상에 눕게 된 후로는 그녀와 더 이상 무엇도 나눌 수 없음에 혼란스러워 한다.
베니그노의 알리샤에 대한 사랑과 행동은 조각상을 만들어 놓고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린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을 떠올리게 한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 지치지 않고 애정과 사랑을 쏟아 붓는 피그말리온과 베니그노의 모습은 아름답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고, 소통을 시작하게 될 때 시작될 상처가 두려운 그들의 내면을 생각하게 한다.
한편 많은 것을 공유했기에 더더욱 그 단절이 두려운 마르코의 모습은 ‘사랑이라는 감정은 무엇을 통해 지속되는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한 번도 자신을 그녀에게 드러낸 적 없지만 꾸준히 그녀를 사랑하는 베니그노의 희생적이면서도 소극적인 사랑. 그리고 많은 것을 나누었지만 소통이 단절되자 혼란스러워하는 마르코의 사랑.
결국 우리는 사랑의 무엇 때문에 울고, 웃게 되는가...
마르코의 혼란 속에 회상되는 장면에서 리디아와 함께 찾아간 노천 까페 앞에서는 Caetano Veloso 가 직접 연주하는 ‘Cucurrucucu paloma'가 울려퍼지고 각자 사랑의 아픔을 안은 리디아와 마르코는 ’Cucurrucucu paloma'의 슬픈 사랑의 노래에 빠져들어 눈물을 흘린다.

Juran que el mismo cielo
Se estremecia al oir su llanto;
Como sufrio por ella,
Que hasta en su muerte la fue llamando...

이 문장을 누르시면 <그녀에게>의 'Cucurrucucu paloma' 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Cucurrucucu paloma'

Dicen que por las noches
Nomas se le iba en puro llorar,
Dicen que no comia,
Nomas se le iba en puro tomar,
Juran que el mismo cielo
Se estremecia al oir su llanto;
Como sufrio por ella,
Que hasta en su muerte la fue llamando

Ay, ay, ay, ay, ay,... cantaba,
Ay, ay, ay, ay, ay,... gemia,
Ay, ay, ay, ay, ay,... cantaba,
De pasion mortal... moria

Que una paloma triste
Muy de manana le va a cantar,
A la casita sola,
Con sus puertitas de par en par,
Juran que esa paloma
No es otra cosa mas que su alma,
Que todavia la espera
A que regrese la desdichada

Cucurrucucu... paloma,
Cucurrucucu... no llores,
Las piedras jamas, paloma
¡Que van a saber de amores!
Cucurrucucu... cucurrucucu...
Cucurrucucu... paloma, ya no llores

그는 수많은 긴긴 밤을 술로 지새었다 하네.
밤마다 잠 못 이루고 눈물만 흘렸다고 하네.

그의 눈물에 담아낸 아픔은 하늘을 울렸고
마지막 숨을 쉬면서도 그는 그녀만을 불렀네.

노래도 불러보았고 웃음도 지어봤지만
뜨거운 그의 열정은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네.

어느 날 슬픈 표정의 비둘기 한 마리 날아와
쓸쓸한 그의 빈집을 찾아와 노래했다네.

그 비둘기는 바로 그의 애달픈 영혼
비련의 여인을 기다린 그 아픈 영혼이라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밀애>, 무상한 것을 위하여.

<밀애>, 무상한 것을 위하여.

<밀애>.

영화 <밀애>의 포스터가 극장에서 내려지는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지자, 나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 더 늦기 전에 ‘오늘만은 꼭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날, 영등포 연흥극장에서 간신히 표를 한 장 구할 수 있었다. 영화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이는 4,50대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듬성듬성 자리한 썰렁한 극장에 혼자 어색하게 앉아서 나는 두 시간 내내 미흔의 감정을 따라가느라 참으로 힘든 감정의 노동을 버텨내야 했다.
힘겨운 두 시간을 보내고 극장을 나온 후 뒤늦게 참석한 회의 자리에서는 어떠한 논의가 이루어지는지 집중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멍하게 회의를 끝내고 나오자 어느 새 연흥극장에는 <밀애> 대신 새로운 영화의 포스터가 걸려있었다.
나는 그렇게 마지막 <밀애>의 상영장에서 미흔의 삶과 사랑 그리고 상처에 짓눌린 가슴을 받아 안았다.

여자, 엄마, 남자

이혼 후 한결 밝고 씩씩해진 우리 엄마는 어느 날 우리 앞에 ‘좋아하는 사람’이라며 한 아저씨를 데리고 왔다. ‘엄마의 새로운 남자’. 그건 분명 환영할만한 일이면서도 솔직히 매우 불편한 일이었다. 엄마의 이혼 후 엄마와 우리 세 딸. 이렇게 여자만 넷이서 살던 집에 익숙치 않은 남자가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그랬고, 그 남자가 풍기는 석연치 않은 분위기는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보다 더 결정적인 불편함은 그 남자에 대한 엄마의 태도였다.
엄마는 그 새로운 남자에게 독상을 차려주고, 바쁘다고 우리에게는 해주지도 않던 반찬을 새로 만들어 주었으며, 따끈따끈한 밥을 사기그릇에 담아 정성스레 내어 주었다.
나는 엄마의 그런 태도에 매우 짜증이 났다.
왜! 도대체 왜! 엄마는 남자라는 존재에게 그렇게 당해놓고도 또 새로운 남자를 데려와 저렇게 지극정성을 보인단 말인가! 질리지도 않았나, 그렇게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아직도 남자라는 존재에 대한 사랑이 남았는가, 도대체 남자에 대한 믿음이란 게 다시 생기냔 말이다. 그날 이후, 나는 엄마에게 짜증이 나서 집에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엄마는 그 남자와 헤어졌다. 엄마의 의지가 아닌, 그 남자에 의해서.
엄마는 한 동안 매우 슬퍼했다. 자식들 앞이라 티는 내지 않으려 했지만 부쩍 우울해하고 외로워하며 신경질적이 된 엄마는 온몸으로 다시 자신의 빌어먹을 팔자를 원망하고 있었다.


미흔.

나는 미흔을 보며 내내 엄마의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아무것도 아닐 마음의 사치’에 불과한 그 알량한 사랑이라는 감정에, 더 이상 상처받거나 구속당하기 싫은 미흔과 인규의 게임이 오히려 가슴 아프도록 안타까워보였다.
요즘은 쿨한 사랑법이 워낙 유행이라 모 잡지에서는 ‘친구끼리 섹스를 즐기는 법’ 같은 것까지 소개하기도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쿨한 사랑을 하겠다는 명분 좋은 구실에는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에 굳이 구속되기도, 상처받기도 싫은 이들의 회피 전략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 가족, 결혼.
인간의 삶에서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이 골치 아픈 주제들로 인해 오늘도 어딘가에서는 또 다른 미흔이 지치고 상처받은 영혼을 짊어진 채 억눌려왔던 욕망의 탈출구를 찾고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인규가 사랑과 욕망 사이에서의 줄타기 게임을 아슬아슬하게 즐기고 있을 것이다.

‘쉼터’의 여자

매일 맞으면서도 그 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구멍가게 ‘쉼터’의 여자.
미흔과 ‘쉼터’의 여인 사이에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감정에 깊숙이 공감할 수 있는 두 여인은 아쉽게도 도로변에서 헤어졌다.
미흔이 차라리 인규가 아니라 ‘쉼터’의 여인과 훗날을 함께했다면 둘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독사진. 그리고 ‘무상한 것을 위하여’

혼자 남은 미흔은 빨간 옷을 입고 사진관을 찾아가서 웃는 얼굴로 자신의 독사진을 필름에 남긴다. 나는 두 시간 가량의 이 영화에서 이 장면만이 유일하게 편하고 가장 아름답게 보였다. 미흔은 이제 새로운 자신을 찾고 자신 있고 당차게 홀로서기를 해나갈 것이다.
물론, 미흔은 또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 때쯤 미흔에게는 이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랑과 욕망과 관계에 관한 새로운 힘이 생성되어 그녀의 사랑을 신선하게 해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지는 아마도 이 영화를 보고 미흔에게 공감을 느꼈던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엄마가 지금 다시 한 번 찾아온 사랑에 그 힘을 적극 활용해 행복한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듯이.
영화 마냥 내내 우울한 OST의 마지막 트랙처럼, 결국 나 역시 사랑, 그 ‘무상한 것을 위하여’ 새롭게 도전하는 그들의 선택을 응원하고 축복할 수밖에...

<밀애> OST 들으러 가기! (이 문장을 누르세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배틀로얄>, ‘Requiem'-&quot;인생은 게임이다. 끊임없이 싸워서 생존하라!”

<배틀로얄>, ‘Requiem'

-"인생은 게임이다. 끊임없이 싸워서 생존하라!”

 


실업자 1천만 명에 등교거부 학생 80만 명, 교내 폭력에 의한 순직교사가 1,200만 명에 달하게 된 미래의 혼란스러운 일본. 급기야 일본정부는 일 년에 한 번씩 무작위로 한 학급을 선발하여 무인도에서 3일 간 단 한 명만 생존하도록 ‘진짜’ 서바이벌 게임을 시키는 이른 바 ‘BR' 법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전투 규칙.
첫째, 처음 각자에게 주어진 무기만을 가지고 출발하여 상대방을 죽이고 새로운 무기를 획득해 나가야 한다.
둘째, 목에 장착된 목걸이를 통해 중앙 통제실에서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것이며, 목걸이를 빼려 하거나 함부로 수상한 짓을 하면 목걸이는 자동 폭파될 것이다.
셋째, 매일 정해진 시간에 새로운 제한구역을 발표할 것이며 그 시간 이후에 제한구역에 남아있는 사람의 목걸이 역시 자동으로 폭발하게 될 것이다.
넷째, 제한시간은 3일. 3일 후에는 반드시 한 명만 남아야 하며 한 명 이상이 남게 되면 모두 죽는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 앞에 당황하여 웅성거리던 아이들 사이로 규칙을 설명하던 선생이 던진 칼 한 자루가 날아들고 정수리에 칼을 맞은 학생은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더 이상 선생과 이성적으로 소통을 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이제 선택의 여지는 없다. 냉엄한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무엇이든 겨눠야 한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이것이 바로 ‘진짜’ 세상이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 본다면 실업자가 1천만 명에 이른 시대를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미 우리는 인간의 노동이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돈이 돈을 모으는 세상, 돈의 가치가 인간의 생존보다 우위에 서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실업자 1천만 시대에 이른 상상속의 미래 일본 사회에서 학교 폭력으로 1,200만의 교사가 사망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현실성 있는 가정일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이것은 가정이 아니라 현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경쟁과 탐욕으로 인한 죽음의 행렬은 계속되고 있고 그 현실은 <배틀로얄>의 학생들에게 던져진 극단적인 상황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영화의 첫 부분에서 주인공 슈야의 아버지는 ‘슈야, 힘내라’는 유언 한 마디만을 남겨 놓고 목을 매어 자살한다. 서로를 끊임없이 밟고 죽여야 간신히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을, 그는 더 이상 극복해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미처 극복하지 못한 세상 속에서 혼자 살아갈 아들에게 그는 ‘힘내라’는 한 마디밖에 남길 것이 없었다.
전쟁과도 같은 잔혹한 현실에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어떤 말로도 소통이 되지 않는 무책임한 어른. 아이들은 어차피 소통조차 되지 않는 무능력하고 보수적이기만 한 기성세대들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단절하며, 기성세대들은 자신들이 정해놓은 잣대에서 자꾸만 벗어나는 아이들을 버릇없다 여기고 자신들의 뜻대로 길들여 복종시키려고만 한다.
버릇없고 철없는 아이들에게 기성세대가 택한 방법은 단 한 가지.
냉혹한 현실을 직접 체험하게 함으로써 아이들을 무장시키는 것이다.
이리하여 배틀은 시작되고, 서로를 믿자던 아이들은 일순간에 상대방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현실에서 도피하려던 두 친구는 서로를 의심하다 함께 죽음을 맞이하며, 서로의 힘을 모아 본부를 해킹하고 탈출을 감행하려던 아이들은 결국 날아드는 총탄에 모두 목숨을 잃고 만다.


한편, 중앙 본부에 서서 아이들의 전쟁을 지켜보는 선생(기타노 다케시)는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의 칼에 찔리고, 자신의 딸에게는 멸시를 당하며 도무지 소통할 수 없는 10대들에게 자신이 받은 깊은 상처를 배틀로얄을 통해 아이들에게 되돌려주려 한다.
그러나 결국 그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서로의 모습이 안타깝게 보이고 마는 것은 그렇게 치열한 전투의 와중에서 가장 절박해 지는 마음이란 모순적이게도 ‘진정한 사랑’, ‘진정한 믿음’,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고마워’라고 말할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감독 후카사쿠 긴지는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영화속의 주인공들과 같은 나이인 15세에 미군의 사격으로 죽은 30여명의 친구들의 시체를 처리해야 했다. 이러한 경험으로 그는 한 인터뷰에서 “전쟁 후 모든 어른들을 불신하게 되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결국 <배틀로얄>에는 이러한 감독의 경험이 그대로 투사된 셈이다.
영화의 말미에서 기타노 다케시는 죽으면서 “이제 어른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중얼거린다.


불신의 세상, 탐욕의 세상, 경쟁의 세상을 만들어 놓은 무책임하고 잔혹한 어른들은 이제 영문도 모른 채 어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서로를 죽이며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 앞에서 어떻게 그 책임을 질 수 있을까.
<배틀로얄>은 질문하고 있다.

‘Requiem', 잔혹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바치는.

각종 종류의 총기는 물론 낫과 도끼를 비롯한 동원 가능한 모든 무기가 등장하는 피 튀기는 전쟁의 현장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음악은 당황스럽게도 요한 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이거나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다.
때때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웅장한 오케스트라풍의 아마노 마사미치의 음악이 관객을 영화의 긴장감과 잔혹한 분위기에 잔뜩 몰입시키지만 사실 소통 부재의 냉혹한 경쟁 사회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어딘지 모르는 곳을 향해 일단 손을 잡고 달려가는 마지막 두 아이들의 뒷모습이 보여주듯, 결국 '살아남고', '달려나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영화의 진짜 메세지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나 ‘G 선상의 아리아’가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아이의 달려가는 뒷모습 뒤로 남겨진 주검으로 가득찬 황폐한 섬과 그 섬의 밖에서도 똑같이 서로를 죽이며 살아가야 하는 모두를 위해, 베르디의 ‘Requiem' 이 울려퍼진다.

* <배틀로얄> OST 들으러 가기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