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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한 감시의 공간인 감옥에서 벗어났지만 도피자의 생활은 물론 이들에게 곧바로 자유를 안겨주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네 여자는 이들의 유일한 낙이자 희망인 음악과 함께 들판을 달리고 대중의 한 가운데에서 호흡한다. 이들이 가는 곳마다 대중이 환호하고, 대중이 환호하는 곳에는 경찰이 따라다닌다. 그 와중에 약삭빠른 자본가 음반 기획사 사장은 이들의 노래를 음반으로 만들어 신나게 장사를 해댄다.
유명해 질수록 수사의 범위는 좁혀져 오고, 함께 연주를 하며 도피 생활을 하는 동안 네 여자의 지난한 삶이 하나 둘씩 드러난다.
“애인 하나 잡아서 새처럼 살고 싶다”는 앤젤리카는 허영심 많고 혼인 사기를 저지르고 다녔지만 사실은 진정한 사랑에 목마른, 의리 있는 여자, 정신분열로 남편을 죽인 ‘살인범’ 마리는 클래식 연주자였다. 마리는 그녀에게 언제나 ‘늘 곁에 있겠다고’ 했던 남편 오토를 잊지 못해 매번 자살을 기도한다. 그녀는 그 죄책감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자신이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는 순간, 그녀는 살 자격을 잃는 것이다.
한편 이성적인 성격으로 밴드의 맡 언니 역할을 하는 엠마 역시 애인에게 맞아서 뱃속에 있던 아기를 잃은 상처를 안고 있다. 그리고 매사에 거칠고 즉흥적인 루나는 사회의 고정관념과 질서에 따라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인간이다.
결국 네 여자의 삶에서는 감옥이 곧 구속을, 감옥 밖의 세상이 자유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줄에 묶인 개’ (puppet on a string)에 불과했던 그녀들의 삶이 곧 구속이자 감옥이요, 음악과 동료들을 통해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받았던 상처들을 드러내며 자신들을 구속하고 있던 사회의 시선과 고정관념,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해방시키고, 치유하는 과정이 곧 진정한 자유인 것이다.
Now, hear my song
도피 중 마리는 경찰의 속임수에 걸려든 엔젤리카 때문에 다리 위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마리를 보낸 남은 세 명의 멤버는 바닷가 항구 앞의 옥상에 서서 붉은 노을을 뒤로 하고 경찰들 앞에서 마지막 연주를 시작한다. 팬들의 아우성 속에 한 편의 뮤직비디오와 같은 연주를 마치고 군중 속으로 다이빙하는 세 여자는 마침내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듯 보인다. 다음 순간, 항구를 향해 달려가는 그들의 모습 뒤로 몇 발의 총성이 울리고 엔딩 크레딧과 함께 그들이 진정으로 남기고자 했던 메시지, ‘Puppet'이 흐른다.
.
.
.
You keepin' me , just hangin on
Now hear my song
Just like a puppet on a string
Now can't you see you're killing me
.
.
For end this game you always win
당신은 나를 구속하고, 묶어 두고 있지만.
이제 내 노래를 들어요.
줄에 묶인 개와 같은 나의 노래를.
이제 당신이 죽이고 있는 내가 보이지 않나요.
.
.
언제나 당신이 이기는 이 게임의 끝을 위해...
어느덧 몇 년이 흘렀다.
그 날, 극장에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보면서 무언가 마음속에 응축되고 있던 것들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 자막에 이르러서 결국은 강하게 결집하여 나의 가슴 깊숙이 자리를 잡고야 말았다.
도움을 준 이들의 이름들 속에 또렷이 새겨져 올라가던 ‘풍문여자 고등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3년 만에, 다시 찾아온 내 고교시절의 기억들.
나는 실제로 수많은 효신과 시은과 민아와 지은이와 연안이....그리고 그 영화 속의 아이들과 똑같은 많은 아이들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다사다난한 18세를 보냈다.
영화 속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내 친구들의 모습들이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고, 그들을 보며 나는 때론 어떤 죄책감에 가슴 아프다가 때론 어떤 즐거운 추억들을 떠올리며 웃음 짓기도 했다. 어쨌든, 그것은 내게 성큼 다가와서 크게 남겨진, 또렷한 충격이었다.
여고, 열여덟
스무 살이 되고도 우리 더 나이를 먹을 수 있을까. 열여덟!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어떨까? 너무 지겨울까? 죽음이 있기에 짧은 인생이 의미 있는 걸까?
- 효신과 시은의 교환일기 중에서-
열여덟. 열여덟은 성장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나이이다.
열여덟에 세상은 갑자기 성큼 다가오지만 어릴 적에는 그렇게도 하루빨리 끼어들고 싶던 세상의 모습은 상상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자라면서 보다 현실적으로, 적나라하게 마주하게 되는 어른들의 모습은 추하고, 편견으로 가득 차 있으며, 학교에서 배워왔던 도덕적인 삶의 모습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어느새 그렇게도 혐오하던 어른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가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어떤 친구는 자신을 더욱 혐오하였고, 어떤 친구는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고 남에게는 철저하게 적용되는 이중의 잣대를 세워가면서 닮아가던 모습 그대로 어른들의 모습을 내면화해 갔다.
우리들은 이렇게 달라져 가는 서로를 목격하고, 혼란 속에 서로 충돌하고는 했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한 편으로는 빨리 현재에서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사실은 그 속으로 뛰어들기가 두려워지는 것이 바로 열여덟 우리의 세상에 대한 감정이 아니었을까.
아마 나도, 나의 친구들도 그랬던 것 같다.
여고에서 동성 커플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감정과 관계가 깊다. 여고에 커플이 많은 것은 흔히들 생각하듯이, ‘여자 아이들만 있어서 남자 같은 아이들이 인기를 얻게 되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정말 중요한 이유는 비로소 이 시기에 남자들과 나눌 수 없는 세밀한 감수성의 영역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여자 아이들 간의 감수성의 연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교환일기는 그 연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이다.
우리는 교환일기를 통해서 나의 혼란과 감정을 끊임없이 친구들과 공유하고, 확인하고자 했고 그 안에는 남자 아이들은 오로지 ‘남자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할 우리만의 감수성과 고민이 솔직하게 담기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환일기를 통해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
‘같은 여자이기에’ 보다 편하게 나눌 수 있는 감수성과 이야기들이 있기에, 여고에서의 커플 친구는 이상적 남자 친구를 대체하기 위한 대상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하지만 열여덟이 영원할 수는 없었다.
세상을 따라 그때까지의 순수한 감수성과 연대에서 벗어나기를 끊임없이 요구받으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갈등해야 했다. 세상에 길들여지기 위해, 세상이 금기하고 거부하는 현재의 내 감정, 내 삶과 단절할 것인가 그대로 버텨서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볼 것인가.
아무도 없다. 아무도 있다. 그러나 없다. 아닌가 있나?
없는 것 같아. 아니야 있어. 없다고 했지?
그것은 진실. 진실은 있다. 있다는 거짓. 거짓은 있다. 있다는 진실.
아무도 몰라. 아무도 없어. 그래서 몰라. 아무도 있어. 그래도 몰라.
정답은 있다. 아니다 없다.
있다는 진실. 없다는 진실. 없다는 거짓. 있다는 거짓. 진실은 거짓.
거짓은 진실.
나는야 몰라. 아무도 나야. 나는야 아무다.
누구도 나도 나는야 누구도 될 수 있다.
진실이 거짓이 되듯...
효신의 시는 열여덟의 갈등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리고 결국, 진실이 거짓이 되고 나는야 누구도 될 수 있는 세상임을 애써 가리면서 세상에서 규정한 진실과 거짓의 잣대에 맞추어, 세상에서 주어지는 자신에 대한 호명에 따라 길들여져 살아가기를 강요하는 어른들의 논리를 거부한 효신은 결국 죽음을 택했다.
하지만 시은은 갈등했고, 그래서 효신과의 관계를 단절하려 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처럼. 시은은 함께 빠져들어 가던 물 속에서 둘의 다리를 묶고 있던 끝을 풀고 혼자 물 위로 올라온 것이다.
효신이 모든 아이들을 학교에 가두고, 시은에게 끊임없이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열여덟에 주어진 갈등의 상황에서 세상에 길들여지기를 택한 친구들에 대한 원망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나도, 영화를 보면서 같은 죄책감에 빠졌었다.
영화를 보면서 응어리졌던 그것의 실체가 바로 그 죄책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여고’‘괴담’일 수 있는 진짜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성장의 발걸음.
효신과 시은의 다정하던 한 때. 옥상위에서 맨발로 뛰어다니며 둘만의 교감을 나누던 두 아이의 모습 위로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듯한 피아노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지는 햇살, 초록색 지붕, 아무렇게나 입은 교복과 행복한 웃음.
마냥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에 반해 그들이 행복한 한 때를 보내고 있는 공간인 지붕 위는 너무나도 아슬아슬해 보이듯, 음악은 평온하지만 왠지 슬픈 듯, 불안하다.
그래서 이 장면과 음악은 그들과 같은 열여덟, 여고에서의 한 시기를 보낸 우리에게 그 때의 순수한 감수성과 거친 혼란을 잊지 말라는 듯 오랫동안 마음의 울림을 전달하고 있는 것만 같다.
시은아, 드디어 새날이 밝았구나. 어때, 기분이? 널 만나기 위해 걸었던 그 길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아니? 새해 첫날에 내 얼굴도 보고 영화도 보고 손잡고 말야 헤헤... 눈이 왔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야.. 넌 어땠니? 난 감동 그 자체였다... 밤공기가 차가웠지만... 그리고는 하루가 얼마나 길고 덧없는지를 느끼지 않아도 좋은 그 다음 날이 왔고 그날은 오래 잊혀지지 않았다. 붉은 잎, 붉은 잎 하늘에 떠가는 모든 붉은 잎들의 모든 흐름이 나와 더불어 움직여가고 또 갑자기 멈춘다. 여기 이 구름들과 끝이없는 넓은 강물들... 어떤 섬세하고 불타는 삶을 나는 가지려고 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졌었다, 그렇다. 다만 그것들이 얼마나 하찮았던가... 여기 붉은 잎 붉은 잎들 허공에 떠가는 더 많은 붉은잎들 바람은지고 물도 맑은날에 나의 외로움이 구름들을 끌어당기는 곳. 그것들은 멀리 있다.. 더 멀리에.. 그리고 때로는 것잡을 수 없는 흐름이 그것들을 겨울하늘 위에 소용돌이치게 하고 순식간에 차가운 얼음 위로 끌어내린다. 겨울 숲에서 노려보는 여우의 눈처럼 잎뒤에 숨은 붉은 열매들처럼 나를 응시하는 것이 있다 내 삶을 지켜보는 것이 있다... 서서히 얼어붙은 수면에 시선을 박은 채 돌틈에 숨어 내다보는 물고기의 눈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건방진 새처럼.....
물론 <영웅본색>은 ‘의리’를 폭력과 짝짓고, 그것을 ‘남자들의 상징’이자 ‘전유물’이며 심지어 ‘남자의 존재 이유’로 만든 대표적 영화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영웅본색>을 보았던 우리 대부분은 남녀를 불문하고 이 영화에 대한 왠지 모를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 시대에 <영웅본색>이, 10대들에게는 주윤발, 장국영, 유덕화로 대표되던 여타의 홍콩 영화들과 함께 ‘화려한 홍콩’을 대표하는 하나의 문화적 코드였으며, 혼란과 격변의 거리에서 최루탄에 눈물 흘리던 한국의 20대 젊은이들에게는 ‘의리’와 거침없는 청춘을 상징하는 무엇이었기 때문이리라.
2003년의 오늘, <영웅본색>을 새삼 추억하게 되는 것은 ‘홍콩 정통 느와르의 부활’이라는 <무간도> 시리즈가 우리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나는 지금, 악의 무리로부터 세계를 구원하겠다며 당치도 않은 영웅을 자처한 이들이 벌인 무자비한 전쟁과 그 앞에서 ‘의리’를 가장한 비굴이 판을 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보며 그들의 순수한 ‘의리’가 차라리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스무 살의 몽상.
태희는 ‘세상을 모른다’.
‘돈도 못 벌면서’ 장애인 글 쓰는 거나 도와주고, 동남아시아에서 온 노동자들이랑 ‘겁도 없이’ 놀자고 한다. ‘여자 애가’ 바다로 나가는 배를 타겠다고 하질 않나 쪽배 위에 누워 책이나 읽으며 세상을 떠돌아다니고 싶다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한다.
하지만 태희는 이미 ‘세상을 뛰어넘었다’.
세상에 길들여져서 자신을 잃고 세상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지지 않고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고양이처럼 자유롭게 자신만의 방법으로 편견 없이 세상을 두루 아우를 것이기 때문이다.
스무 살은 수많은 미래와 가능성이 존재하는 시간이다.
대학에 갈 스무 살도, 회사에 갈 스무 살도, 공부를 더 할 스무 살도, 여행을 갈 스무 살도,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스무 살도, 지금 꿈을 꾸고 있는 스무 살도... 모든 스무 살들이 2004년에는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고 더욱 자유롭기를!
( 더불어 이미 스무 살을 보낸 우리도 아직 늦지 않았기를! )
또 한 가지, 이 드라마에는 그 청춘을 보낸 그들의 부모 세대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있다.
복수와 전경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들의 현재 모습 속에는 그들이 보낸 청춘의 모습이 담겨 있다. 우리는 흔히 ‘그들처럼 되지는 않을 거야’라고 다짐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그들의 과거, 내가 그렇게도 증오해 마지 않았던 그들의 모습을 닮은 나의 현재를 발견하고야 만다.
그들 역시 나름의 무게를 견디며 숱한 고민과 방황 끝에 한 청춘을 보내왔을 것이다. 하기에 그 청춘을 똑같이 겪고 있는 현재, 우리가 그들에게 가지는 애증은 한층 깊고도 복잡해진다.
그래서 때로는 그들을 한없이 원망하다가도 어느 순간 그들의 모습이 안타까워지고 이내 가슴 아픈 슬픔으로 남는 것이다.
이들은 꿈을 꾼다.
부모가 얹어준 무게가 삶에 고통을 더하고,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이 힘들고, 때론 길을 잘못 들어 원치 않은 길을 경험하게 될지라도 이들은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선택하고 후회없이 그 길을 간다.
자신에게 단 한 번 주어진 삶이기에.
‘단 한 번 꿈만으로 모든 걸 뒤엎을 순 없어’도,
‘단 한 번 아름답게 변화하는 꿈’, ‘천만번 죽어도 새롭게 피어나는 꿈’을 꾸며...
‘꿈꾸는 나비’
노래. 3호선 버터 플라이
나비야 두터운 니 과거의 슬픔을 뚫고
가볍게 아주 가볍게 날아라
깊은 밤길에 나앉은 여인의 눈물
자욱한 담배 연기를 마시고
꿈을 꿔도 모든 걸 뒤엎을 순 없어
그래도 넌 꿈을 꿔
단 한 번 아름답게 변화하는 꿈
천만번 죽어도 새롭게 피어나는 꿈
돌고 돌아와 다시 입맞추는 사랑
눈물 닦아주며 멀리 멀리 가자는 날개짓
꽃가루 반짝이며 밝고 환하게
한 번의 꿈만으로 모든 걸 뒤엎을 순 없어
그래도 넌 꿈을 꿔
단 한 번 아름답게 변화하는 꿈
천만번 죽어도 새롭게 피어나는 꿈
돌고 돌아와 다시 입맞추는 사랑
눈물 닦아주며 멀리 멀리 가자는 날개짓
꽃가루 반짝이며 밝고 환하게
나비야 깊은 밤 달리는 택시의
부릅뜬 눈을 잠 재우고서
날아올라 깊은 밤 멀리 멀리..
나에게는 굳이 그 내용이나 영화적 완성도를 따지지 않아도 분위기에 취해 몇 번이고 보게 되는 영화들이 있다. (그렇다고 이 영화들이 영화적 완성도가 낮다는 뜻은 아니다.)
<해피투게더(춘광사설 혹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벨벳 골드마인>, <헤드윅>이 그렇고, 여기에 최근 <장화, 홍련>이 추가되었다.
이들 영화가 가진 공통점이 몇 가지 있는데 여기서 그것들을 꼽을 필요는 없겠고 우선 한 가지는 이 영화들이 앞으로 내가 쓰고자 하는 OST 목록에 모두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들 모두는 어떤 결정적인 장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그 순간, 보는 이의 마음을 한 순간에 동화시키는 음악을 지니고 있다.
장화와 그 가족의 ‘돌이킬 수 없는 걸음’
영화 <장화, 홍련>은 원작에서 무능하면서도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 있는 가부장과 그 가부장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는 여성들끼리의 대립 구도라는 봉건적 소재를 그대로 가져온 반면 사또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대신, 장화를 통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을 뗀 모든 구성원에게 죄책감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도록 함으로써 원작을 배신하고 있다.
영화에서 장화는 장화이자 계모이자, 친 엄마이며 홍련을 사랑하지만 홍련을 계속 죽이는 존재이다. 장화가 지닌 죄책감은 자신의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홍련을 끔찍이도 아끼게 하지만 지나간 잘못을 돌이킬 수 없듯 여전히 자신은 결정적 상황에서 홍련과 함께하지 못하는 과오를 반복한다. 그 와중에 친엄마는 계속 장화의 곁에 나타나 장화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고 장화는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계모가 앗아간 친엄마의 자리를 대신하고자 스스로 계모가 되어 아버지의 곁에 머물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장화의 행동은 장화 혼자만의 고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이 있던 그 날,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이들은 장화를 통해 끊임없이 죄책감의 고통을 맛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도, 계모도, 사건이 있던 날 놀러왔던 삼촌과 외숙모도 모두 장화로 인해 그 날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화는 혼잡하고 분열된 장화의 정신 상태처럼 완전히 일그러져 버린 이들 가족이 지닌 죄책감의 근원을 후반부에 가서야 시간을 거슬러 올라 보여주고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돌이킬 수 없는’ 그 날, 집을 나서던 수미가 잠시 멈칫했다가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복받치듯 음악이 흘러나온다.
‘자장가’, ‘돌이킬 수 없는 걸음’
<장화, 홍련> OST 앨범에는 같은 곡조로 이루어진 음악이 하나는 ‘자장가’로, 하나는 ‘돌이킬 수 없는 걸음’으로 실려 있다.
어쩌면 따사롭게 햇살이 비치는 평화로운 창가에서 엄마가 수미에게 들려주었을 이 ‘자장가’가 무책임한 아버지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을 뗀 수미에게 너무나도 무겁고 힘든 죄책감의 짐이 되어 남겨진 것이다. 그래서 이 음악은 더욱 더 마지막 장면의 수미의 모습을 안타까워보이게 하고 있다.
<해피엔드>와 <피아니스트> 그리고 슈베르트의 피아노 3중주 2번
해피엔드
최보라. 그녀는 지쳤다. IMF로 직장인들이 무더기로 실직하던 해, 그녀의 남편 서민기 역시 실직했고 그녀는 영어학원을 운영하며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성생활도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고 남편이 그녀에게 살갑고 사랑스럽게 구는 것도 아니었다. 삶은 지루하고 생활은 힘들 때 그녀 앞에 대학시절의 애인 김일범이 나타난다. 그녀는 일범을 만나게 되면서 무기력하고 힘들던 결혼 생활에서 일탈하여 새로운 삶의 쾌락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은 해피엔드가 되지 못했다. 불안한 그녀의 일상 속으로 민기의 어긋난 욕망과 분노가 파고들고 그녀의 불안한 그림자 뒤로 슈베르트의 피아노 3중주 2번이 흐른다.
피아니스트
에리카. 그녀는 강박 속에 살고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오로지 딸을 피아니스트로 키우기 위해 사랑이라는 허울 속에 그녀를 가두어 왔고 나이 40이 되도록 쇼핑 리스트와 귀가시간까지 일일이 간섭하고 있다. 왜곡된 어머니의 사랑은 그녀를 사회에서는 이름 있는 피아니스트이자 까다로운 피아노 교수로 만들었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하고 행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울타리에 갇혀 사랑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그녀는 포르노 샵에서 남자들이 자위 후 버린 휴지를 들고 냄새를 맡거나 자해를 하고 야외 극장에서 카섹스를 하는 연인들을 보며 소변으로 오르가즘을 해결한다. 포르노를 본 것이 사랑에 관해 이해하고 있는 것의 전부인 그녀는 비로소 사랑하게 된 제자 클레머를 만나서까지 자신을 때려달라고 요구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녀가 매저키스트이기 때문이 아니다.
고고하고 차가운 모습을 지녔지만 사랑을 할 줄 모르는 그녀의 황량하고 처연한 모습 뒤로, 역시 슈베르트의 피아노 3중주 2번이 흐른다.
에리카와 최보라는 불안하고 우울하다.
그녀들은 사랑을 찾지만 이미 여성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부터 반쯤 찌그러져 주어지는 이 세상에서 여성이 온전히 자신만의 사랑의 방식을 찾고, 자신의 열정과 욕망에 따라 사랑을 하며 행복을 느끼기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프랑스와 한국이라는 머나먼 정서적, 공간적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에서 그녀들의 안타깝고 불안한 모습 위로 슈베르트의 피아노 3중주 2번 ‘안단테 콘모토’가 흐르도록 선택된 것은 두 작품의 음악 감독 모두가 그 선율이 마치 그녀들의 억눌린 욕망으로 인한 우울과 불안을 대변하듯, 그녀들의 심리를 드러내며 그것을 그대로 보는 이의 마음속으로 가져다 놓게 되리라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리라.
살인자들은 들으라! 'Marilyn Manson',
과거에는 무언가를 보다 낫게 바꾸고 운영하고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다. 하지만 이제 미국은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 되어 버렸고 인터넷과 과학기술 때문에 어디로 벗어난 길이 없다. 사람들은 어디에도 똑같다. 때때로 음악이, 영화가, 책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이 우리처럼 느낀다는 것을 알게 하는 유일한 매체가 된다. 나는 항상 지배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지 않는 것이 괜찮거나 더 낫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고 노력해왔다.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라. … 의지력과 창의성을 지니고 있기만 하다면 당신이라고 해서 안 될 이유가 있겠는가?
-99년 5월 28일, Marilyn Manson, in
Marilyn Manson, Ginger Fish, John 5, Madonna Wayne Gacy, Tim Skold 로 이루어진 밴드 ‘Marilyn Manson'.
89년 '마릴린 맨슨 앤 더 스푸키 키즈' 라는 팀으로 음악계에 나타나 ‘나인 인치 네일스’ 공연에서 오프닝을 맡으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이들은 92년 경 그룹명을 정식으로 '마릴린맨슨‘이라 바꾸고 그들의 사상 (주로 보컬 ’마릴린 맨슨‘의 사상)을 전파시켜 왔다.
밴드 결성 이후 줄곧 Satanist 로 불리우며 심지어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 때는 청소년에게 폭력과 살인을 종용하는 ‘악의 축’ 취급을 받아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어왔던 그들은 그들 스스로, 또는 그들의 공연을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이들 (주로, 기독교도들과 청소년 보호론자들 또는 정부와 공권력)에 의해 매 공연 때마다 이슈의 대상이 되어왔다.
스테이지에서 닭을 비틀어 죽인다든가 성경책을 북북 찢어버리는 그들의 쇼가 선량한 세계 시민들의 간장을 조여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교적 법통과 기독교계의 포스가 막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이 땅, 대한민국에서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이들은 공연을 위해 '각서‘를 써야하는 매우 간지 떨어지는 행위를 해야만 했다. 이런 사태에 대해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과 메시지를 공연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답했으나 여하간 정부 어르신들과 선량한 시민 분들의 잠 못 이루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올 해 공연에서는 그다지 대단한 헤프닝은 벌이지 않고 얌전히 돌아갔다.
마릴린 맨슨, 그들의 미학.
인터뷰에 의하면 ‘오지 말라는 데는 더 가고 싶어져서 몇 번의 무산에도 불구하고 굳이 한국에 왔다’는 그는 1920년대 후반의 독일 표현주의 미술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때문에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다는 그의 음악 세계에서는 ‘아름다움’의 가치가 완전히 전복된다. 대표적으로, ‘Sweet Dreams' 뮤직비디오를 보면 보컬 마릴린 맨슨이 깡마른 맨 몸에 눈, 코, 입을 구분할 수 없는 분장을 한 채로 발레복을 입고 진흙탕에서 뒹굴던 돼지 한 마리를 타고 다니는 모습이 나온다. 그의 미적 가치는 그러한 것이다. 그의 음악 속에서 ’The Beautiful People'은 곧 ‘The Horrible People'이 되고 그의 세계에서 인류는 폭력과 섹스가 난무하는 “온갖 더럽고 추잡스러운”(보들레르) 것들 가운데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앨범
특히, 공격적이면서도 도발적인 맨슨의 보컬, 전자 음향과 일렉 기타의 노이즈가 기이하게 결합한 ‘The Nobodies’의 각기 다른 버전들을 통해서는 ‘기계를 먹여 살리면서 병적인 신앙을 토해내는’ 현대 사회의 인간들을 적나라하게 비웃고 있으며, 일본 발매 앨범의 보너스 트랙인 'The not so beautiful people' 에서는 ‘약한 놈들이 그저 힘이나 자랑하려 한다’며 ‘나무를 보느라 숲을 보지 못하는’ 이들을 반복되는 ‘Nowhere'라는 중얼거림과 전자음을 통해 강렬하게 조롱하고 있다.
전쟁과 신자유주의에 동참하는 일이라면 그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대한민국 공연에 앞서, 어쩌면 그들은 ‘Dope (마약) show'에 빠져 미친 폭력과 광기의 환락에 조응하고 있는 이 나라, 대한민국을 위해 이
살인자들은 들으라!
지금 이 시각에도, 각기 제 나라의 국민들로부터 정당성을 부여받았다고 착각하고 ‘인류의 구원자’이자 ‘평화의 전도사’임을 자처하는 희대의 살인마들은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아 수천 명의 목숨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진정한 악마의 아들, 딸은 바로 당신들 아닌가!
살인자들은 들으라! 'Marilyn Manson'의 메세지를!
당신들이야 말로, ‘The Horrible People'임을 반드시 명심하기를!
And I don't want you and I don't need you
Don't bother to resist or I'll beat you
It's not your fault that you're always wrong
The weak ones are there to justify the strong
The beautiful people, the beautiful people
It's all relative to the size of your steeple
You can't see the forest for the trees,
And you can't smell your own shit on your knees
There's no time to discriminate,
Hate every motherfucker that's in your way
Hey you, what do you see?
Something beautiful, something free?
Hey you, are you trying to be mean?
If you live with apes, man, it's hard to be clean
The worms will live in every host
It's hard to pick which one they eat the most
The horrible people, the horrible people
It's all anatomic as the size of your steeple
Capitalism has made it this way,
Old-fashioned facism will take it away
상큼한 라운지,
지난 주말, ‘새싹 보리밥’을 먹었다. 파릇파릇한 봄나물들이 보리밥과 함께 오돌오돌, 아삭아삭 씹히는 느낌과 입 안 가득 퍼지는 새싹들의 향기가 따뜻한 초봄의 주말 낮을 한층 싱그럽게 해주었다.
이름도 특이한 ‘이지린’이 직접 작사, 작곡, 연주, 프로듀싱까지 혼자 뚝딱거려 세상에 내놓은 음반
사락사락 하는 보사노바 리듬도 좋고, 경쾌하게 울리는 피아노 소리도 신난다. 샹송을 듣고 있는 듯한 보컬의 음색은 싱그럽고, 가볍게 튕겨 오르는 기타의 음색도 마음을 설레게 한다. 선선하고 따뜻한 봄날, 풀밭 위를 휘파람 불며 걷는 느낌.
참, 좋다.
흥얼흥얼.
사실 제목에 ‘라운지’라고는 해 놓았지만 ‘허밍’의 음악을 명확히 어떤 장르로 규정짓기는 어렵다. 전반적으로 라운지의 분위기가 깔려 있기는 하지만 보사노바 리듬도 함께 있고, 애시드 재즈나 하우스의 곡들도 있다. 여하간 명확한 건, 장르를 무엇이라 부르든 간에 그들의 음악이 대게 라운지 음악이 갖는 특성처럼 편하게 흥얼거릴 수 있는 감성을 지녔다는 점이다. 곡 중에 흘러나오는 새의 지저귐이나 남녀의 중얼거림, 벨소리 등은 이런 가볍고 흥겨운 감성과 어울려 곡의 분위기를 한층 생기 있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고 보컬 시나에(본명 송지영)의 코맹맹이 같은 귀엽고도 묘한 목소리는 마치 샹송과도 같은 신비함과 호소력 있는 섹시한 감성을 더하고 있다.
가사 역시 일상에서 얻은 소소한 느낌과 감정들을 담은 곡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의 음반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샐러드 기념일’이나 ‘Banana shake'의 가사는 이런 특징을 잘 보여준다.
너가 좋아했던 살구빛 샐러드
그 날은 샐러드 기념일 우후~나나나나나
너가 좋아하던 멜로디언 소리
그 날은 멜로디 기념일..우~ 라라라나나나
너가 예뻤었다고 했던 조그만 고양이
귀여워서 또 보고 싶어
너가 좋아했던 것들을
나에게 자그마한 고양이들 방에 한가득하게
채워지네 채워지네,, Yeah~ 나나나나나나
-‘살구빛 샐러드’ 중-
바나나 껍질을 5개로 벗기면 사람이고
4개로 벗기면 원숭인걸,
원숭이라도 좋아 귀엽기만 하면 귀여운 바나나나~
우유가 가득한 한 컵 la la la la ~
달디 단 바나나 쉐이크 하나도 안 남길 바나나 쉐이크
휘저어 휘저어 휘저어 휘저어 마음을 담아서
휘저어 휘저어 휘저어 휘저어 힘차고 조심히
휘저어 휘저어 바나나 쉐이크
-Banana shake-
무슨 말인지 정확히 해석할 수 없어도 나열된 단어들과 곡의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히 그 감정이 전달되는 ‘허밍’의 곡들은 그래서 더욱 친근하고 즐겁다.
아쉬움.
최근에는 ‘허밍’을 비롯하여 전자양, 라이너스의 담요 등 라운지나 시부야 케이 계열의 가볍고 편안한 분위기를 지닌 음반이 꾸준히 발매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라운지 음반
‘Humming Urban Stereo'의 상큼한 시도가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져 새로운 자기만의 라운지를 탄생시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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