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유우상종
분류없음 2014/03/01 12:29이 나라에 온 첫 해와 이듬해에는 인컴택스보고를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이 나라에 오래 머무를 생각도 없었고 한국에 있을 때부터 나라에서 뭘 하라고 하는대로 한 적이 없어서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풀타임 학생이 되고 일자리를 구하고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인컴택스보고, 즉 연말정산 보고를 하지 않으면 받는 불이익이 "너무" 컸다. 온전히 감당하기에는 '이주노동자'인 내가 짊어질 그 산이 너무 컸다.
정신을 조금 차리고 우선 한국인을 대상으로 그런 일을 돕는 사무실을 찾았다. 읍내 다방처럼 생긴 그 곳은 이 나라가 이른바 '선진국'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상스럽게 시대에 뒤쳐진 느낌을 줬다. 어쩐지 일하는 사람들이나 분위기가 딱 한국의 7-80년대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학교에서 배운 것, 지하철을 타고, 평소에 어울리던 사람들, 그런 아우라를 "전혀" 느낄 수 없는 그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이건 뭔가 아니다, 싶은 느낌을 받았지만 이미 늦었다. 달라는대로 서류를 전하고 이 나라 돈으로 오십 달러, 한국 돈으로 약 오만 원가량의 돈을 지불하고 이 년치 인컴택스보고를 의뢰했다. 그게 끝이었다.
상황을 제대로 깨달은 것은 학교를 일 년 마친 뒤, 이 나라 사회복지시스템을 어느 정도 공부하고, 커뮤니티 자원활동을 하고 난 뒤였다. 다음 해 인컴택스보고는 학교 학생회의 서비스를 받아 '무료'로 진행했고 나의 권리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회계(accounting)를 공부하던 그 서비스 공급자(자원활동가)는 나에게 친절히 그 과정을 설명해주었고 "너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라며 다음부터는 나 혼자 할 수도 있음을 알려주었다. 아뿔싸, 아까운 나의 오십 달러.
그 다음 해. 이 나라의 국세청에서 진행하는 인컴택스보고자원활동 프로그램에 등록을 했다. 저임금 혹은 사회지원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텀택스보고를 돕는 자원활동 프로그램인데 누구나 등록할 수 있고 약간의 교육만 받으면 어렵지 않게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제는 에이전시를 선택할 순서. 이왕이면 한국인을 돕는 일을 하자, 그래서 한국사람들의 정착을 돕는 에이전시에 신청서를 냈다. 그리고 그 일을 지난해 3월, 4월 두 달 동안 했다.
그 때 만났던 그 업무의 담당자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미국 국적의 백인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인데 한국의 Y 어학당에서 인연을 맺어 한국어와 한국사회를 공부한 그는 한국의 '매력'에 흠뻑 빠져 한국과 인연을 맺는 일을 계속하게 된 것. 자원활동이 끝난 어느 여름. 디브리핑, 이른바 평가자리에 참여해 그이를 다시 만났다.
"어르신들이 오시면 자리도 안내해주고 친절하게 모셔야죠.", "인컴택스보고만이 아니라 다른 것을 물어봐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대답해야죠", "저는 몸이 부서지게 일할 거예요."
아니 이게 뭥미? 한국에서도 듣지 못한 차원의 이야기를 백인아저씨에게 그것도 한국어로 듣다니? 이 나라에 온 뒤 십여 군데가 넘는 에이전시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이 나라 사람들을 만났지만 저런 싸다구없는 이야기는 듣도보도 못했다. 게다가 인텀택스보고 자원활동은 국세청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이고 개별 에이전시는 각 클라이언트들의 요구에 따라 대행을 할 뿐이다. (그러나 요구가 많을 경우 다음 해 정부지원을 요청할 때에 유리하다). 너무나 기가 막혀서 그 백인 아저씨에게 한국어로 따졌다.
"선생님의 에이전시에서 제공한 설명서를 보면 그건 선생님들의 역할이지 저희 자원활동가들의 역할이 아니에요. 그런 걸 원한다면 선생님들이 하시든가, 애초에 트레이닝을 할 때 미리 말씀하셨어야죠."
돌아온 말은,
"한국 사람이 그렇게 한국의 전통과 정서를 모르냐"는 것이었다.
같은 한국인에게 이런 말을 들어도 기가 찰텐데 백인 아저씨에게 이런 말을 한국어로 듣고 앉아 있으니 그야말로 멘붕.
샘 해밍턴이라는 호주 출신의 백인 남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저 백인 아저씨를 떠올렸다. 샘 해밍턴이 뭐가 좋아서 한국에 정착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에-충 알 것 같기는 하다.
재미난 것은 이른바 후(중)진국, 제3세계로 카운트되는 나라에 인연을 맺은 백인남자들이 그 나라의 근대적인 젠더롤과 전통에 유화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거다. 순종적인 (동)아시안 여성을 흠모하는 백인남성들, (세계요리인 타이요리를 눈감고도 해내는) 타이출신 아내를 둬 직장동료들의 부러움을 한껏 사는 백인남성들, 그리고 남존여비의 유교쓰레기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일부 백인(역시 쓰레기)남성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런 백인남성들을 찬양하는 데에 지칠 줄 모르는 사회와 미디어. 쓰레기는 쓰레기를 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