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타령아냐

분류없음 2014/03/11 12:57

우리 여성들은 같은 여성들에게 더 냉정할 때가 있다. 같은 여성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같은 약자의 처지에서 겪어내는, 관통하는 억압의 구체를 더 잘 알기 때문이다. 때로는 세상의 '표준'에 들어맞지 않는 나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그 억압의 구체를 억압자보다 더 잘 내면화하기도 한다. 간혹 장삼이사들이 읊는 '피해의식'은 그 내면화의 대표적인 예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 이나 '망상'은 아니다. '피해' 그 자체에 가깝다. 아니, 피해, 손해이다. 불평등이다. 그러나 이 피해의 컨텐츠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피해망상에 젖었다'든지 '유난을 떤다'며 그 힘든 고백을 가소롭게 만든다, 만들기 위해 애를 쓴다.

 

오늘 무척이나 고단한 하루를 보냈다. 우선 그동안 맡았던 한 클라이언트가 예정보다 일찍 프로그램을 떠났다. 내 계획에 없던 일이었고 나를 대하는 태도와 다른 워커(들)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달랐기 때문에 나로선 무엇이 그이의 진짜인지 잠깐 혼란스러웠다. 그이를 진단한 어떤 이는 보더라인퍼스널리티디스오더(BPD)인 것 같다고 하는데 의당 의사들이나 씹쭈구릴 그런 병명 따위엔 사실 관심이 없다. 나는 그것보다 그이의-여성의- 말을 제대로 청취하지 못하는, 못하는 것 같은 이 환경에 화가 났다. 같은 말을 해도 남성들의 이야기는 쉬이 전달된다. 남성들의 언어가, 그들의 삶이 표준인 까닭이다. 그러나, 그이의 말은 몇 번이고 필터링됐고 이따금 '거짓말'로 취급받기도 했다. 물론 이건 나의 소견이다. 나는 아마도 카운터트랜스퍼런스를 겪고 있는지도 모르고 제대로 클라이언트를 옹호하지 못했다는 자책을 할 수도 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이 사건과 이 현실과 거리를 두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게 가장 필요하다. 어쨌든 그녀는 차디찬 거리를 향해 따뜻한 곳을 스스로 박차고 나갔다. 떠나는 그이를 창문을 통해 바라보며 속이 쓰렸다. 인간에 대한 실망감과 더불어 나에 대한 무력감, 그리고 나는 죽어도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알아낼 수 없다는 요령부득의 절망감.

 

또 하나 다른 일. 이 와중에 끊임없이 앞선 그이에게 추파를 던지던 다른 남성 클라이언트가 부적절한 언사를 내게 했다. 전화번호를 줄테니 자기가 이 프로그램을 나가거든 연락을 하란다. 참 나. 너와 나 사이에 네가 한 그 말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니,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니. 네 생각을 얘기해봐. 하고 물었더니 농담이란다. 농담이겠지. (나는, 네 농담을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어, 이 씹짱생아. 왜냐고. 그런 네가 나였고 그런 내가 너니까. 우리 인간은 그냥 백지 한 장 차이야.) 한 번만 더 그런 이야길 하면 너는 이 프로그램을 바로 떠나야 해. 아무도 널 도울 수 없어. 이것만 기억해, 라고 구두경고를 했다. 알았단다. 알아줘서 고마워, 라고 대화를 마친 뒤 썩은 양파 같은 기분을 수습해야했다. 날이 풀리면서 우울증이나 조울증을 심하게 앓는 사람들이 더 곤란을 겪고 있다. 안다. 나도 그렇다. 아프지. 나도 아퍼. 도리가 없구나. 거리를 둬야 해. 눈을 똑바로 뜨고 현상 너머를 봐야 해. 그게 힘들면 현상 그 자체만이라도 제대로 보자꾸나. 냉정하게. 다만 날씨가 풀린 것 뿐이야. 봄이니까.

2014/03/11 12:57 2014/03/11 12:57
tags :
Trackback 0 : Comment 0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ys1917/trackback/980

Writ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