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있어

분류없음 2014/05/12 00:58

어제 (10일) 일터에서 긴급상황이 발생해 대처를 해야 했다. 간혹 일어나는 일이니 교육받은대로, 절차대로 하면 된다. 그리고 나는 이제 어지간한 물리적 상황에서는 당황하지 않는다. 아니, 당황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화재와 대형정전 사태로 장시간 피난을 경험한 탓도 있지만 일상에서-일터에서 비상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몸이 알아서 반응한다고 해야 하나.

 

조현증 (정신분열증의 새로운 말) 같은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 중 일부는 망상 (paranoia) 을 경험할 때 자신을 방어할 목적으로 평소보다 더 과도하게 행동-말하는 경우가 있다. 어제 그 케이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이가 감옥에서 경험한 폭력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교정시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상상 이상이다.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가 언제나 일어난다. 마치 2000년대 이명박근혜 정권 아래서 일어나는 일처럼 말이다. 시쳇말로 '멀쩡'했던 이이에게 갑자기 그 상황 (episode) 이 왔다. 그런데 정도가 좀 심했다. 커뮤니티의 안전을 위협할 정도였고, 나에게 혹은 나의 근무파트너에게 폭력을 휘둘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써 놓고도 한국에서 내가 저지른 혹은 내가 겪은 그리고 오늘날 한국에서 일어나는 폭력적인 상황을 떠올리면 '여기서 겪는 일은 별 것 아닌데' 싶어서 큰일이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는 일단 판단을 해야 한다. 완력으로는 그이를 제압할 수도 없고 제압해서도 안되니 나머지 사람들이 부엌이나 레크리에이션 룸과 같은 공동 공간에 머물러도 되는 건지-안전할지 그걸 먼저 판단해야 한다. 어제 상황은 "그렇지 않다" 였다. 그럴 땐 사람들에게 각자 방에 들어가 다음 안내가 있을 때까지 머무르라고 해야 한다. 일일이 찾아다니며 말할 수 없으니 방송을 해야 한다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을 해야 한다. 맙소사. 이런 말을 해야 한다니.

 

그러나 해야 한다. 그게 내 일이니까.

다음 안내가 있을 때까지 니들 방에 들어가 가만히 있으세요 remain in your unit til further notice

 

설겆이를 하던 사람도, 패티오에서 담배를 피우던 사람도, 보드게임을 하던 사람도 차분히 일어나 자기 방으로 향한다. 뛰거나 서두르지도 않는다. 불평도 질문도 없다. 딱 한 사람, 분노조절장애가 심각한 한 남자가 뭔 일이냐고 묻는다. "나중에 이야기할테니까 일단은 네 방으로 가, 이건 우리 모두의 안전에 관한 거야, 그건 말해줄 수 있어. 오래 걸리지 않아" 맙소사. 이런 말까지 해야 한다.

 

911을 통해 부른 경찰과 엠뷸런스가 이윽고 도착했고 그 사이 경찰을 부른 것을 눈치 챈 이 남자는 줄행랑을 놓아버렸다. 자기 방 책상에 인종차별-호모포빅한 코멘트를 남겼다가 지우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한 그 '자취'를 남긴 채 말이다. CCTV를 통해 이 사내가 서쪽으로 급하게 걸어가는 것을 목격했으므로 도착한 경찰에게 이 사내에 관한 자세한 묘사를 전달했다. 경찰은 이 남자를 찾으러 차를 몰고 서쪽으로 갔다가 십여 분 뒤 다시 돌아와 이 남자에 관한 정보를 더 얻어서 현장을 떠났다.

 

모든 일이 종료된 뒤 복도를 돌아다니며 이제 괜찮다, 고 말했다. 그 사이 잠든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 다시 방송을 하는 것보다 그게 나을 것 같았다. 레크레이션 룸으로 내려와 티비를 보는 사람, 각자 방에서 계속 잠을 청하는 사람, 끝내지 못한 저녁식사를 다시 시작하는 사람. 그리고 나와 파트너는 컴퓨터 앞에 앉아 서류작업을 시작했다. 커뮤니티 구성원 모두 한 시간 안에 일상으로 복귀했다.

 

절차대로, 교육받은대로, 배운대로 하면 불행할 일이 없는데 그 절차와 교육, 배운 것과 원칙이 아예 없거나 무너지고, 무엇보다 중요한 '신뢰'가 사라지면 우리 모두 슬픈 일을 겪어야 한다. 서로를 신뢰하지 못해 "가만히 방에 들어가 있으라"는 나의 방송을 그들이 무시했다면, 경찰만 보면 자지러지는 그들이 만약 방에서 나왔다면. 지금 나는 이 포스팅을 아마도 다른 방식으로 쓰고 있을 것 같다. 

 

2014/05/12 00:58 2014/05/12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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