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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1/28
    조중동 중학교 국어교과서 좀 읽어라.
    유이
  2. 2009/01/23
    감정이라는 것(4)
    유이
  3. 2009/01/19
    사람들.(3)
    유이
  4. 2009/01/16
    비타 악티바(Vita Activa) - 인권(2)
    유이
  5. 2009/01/14
    운동의 전망?(3)
    유이
  6. 2009/01/14
    간밤에 눈이 내렸다.
    유이
  7. 2009/01/14
    새해맞이 여행 사진 몇장
    유이
  8. 2009/01/07
    지속가능한 데모질(7)
    유이
  9. 2009/01/05
    [블로그파업]장기하 파업지지 선언
    유이

조중동 중학교 국어교과서 좀 읽어라.

중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 있는 글이다.

 

-----------------------------

 

⑴ 신문과 진실


  길가에서 택시 운전사들이 다투고 있었다. 차가 서로 스쳐 차체가 우그러졌는데 누구에게 잘못이 있느냐로 시비를 벌

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말이 다 일리가 있어 어느 쪽 말이 옳은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일상생활에

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신문에는 날마다 몇 건의 교통 사고가 보도되고, 우리는 의심 없이 그 기사 내용을 사실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위의 예에서 보이는 것처럼 하찮게 보는 교통 사고 보도에서조차, 엄격히 따져 보면, 진실 보도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이 진실이냐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단순한 교통 사고조차 진실 보다가 어렵다면, 진실 보다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나 큰 문제는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심지어

신문 기자 자신들조차 진실 보도를 자명한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있으나, 문제를 좀더 파고들어가 생각해 보면, 진실

보도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통감하게 된다.

  ‘진실’이란, 어떤 사건이나 문제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란 무엇인가? 존재하는 모

든 사실은 그 존재가 다원적(多元的)이다. 진실을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일수록 그 존재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일면만

보고서는 진실을 이해할 수 없다. 앞에서 인용한 교통 사고의 경우도 시비하는 두 운전자의 말을 다 듣지 않고서는 공

정하고 옳은 판단을 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언론에 있어 ‘진실’이란, 첫째, 사물의 부분만 보지 말고 전체를 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진실’이 알려지

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신문이 사건이나 문제의 전모(全貌)를 밝히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자기들에게 유리한

부분만을 과장하여 선전하기도 하고, 불리한 면은 은폐하여 알리지 않으려고 한다. 이와 같이, 부정확한 보도는 일방적

이며 편파적이다.

  논평에 있어서도 진실한 논평을 하려면 이런 측면 저런 측면을 다 같이 검토하고, 그 바탕 위에서 공정한 판단과 결론

을 내려야 한다. 공정한 논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사고의 자유로운 활동이다.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해서 문제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거나, 이 문제는 이런 방향, 이런 각도로만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이 곧 진실과 반대되는 곡필(曲筆) 논평(論評)이 된다. 곡필을 하려면 그들은 사고(思考)를 포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곡필은 어느 선 이상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자유롭게 다각도로 사고를 하

면 진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둘째, 언론에 있어 ‘진실한 보도와 논평’을 하기 위해서는 사물을 역사적으로 관찰할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어

떠한 사물을 옳게 보도하거나 논평할 수 있으려면, 그 사물의 의미 또는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사물

의 가치는 역사의 발전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에 인정받았던 가치가 내일에는 부정되기도 하고, 오늘에 부정된 가치가

내일에는 새롭게 평가받기도 한다. 따라서, 사물을 옳게 평가하려면 항상 새로운 가치, 발전하는 새 날을 위한 가치의

입장에서 평가해야 한다.

  어떠한 가치에 서서 사물을 보느냐에 따라 사람의 안목은 결정된다. 안목이 있는 사람이란, 발전하는 새로운 가치의

입장에서 사물을 볼 줄 아는 사람을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치고 누가 발전하는 입장의 가치를 거부하겠느냐고 말

할 사름이 있겠지만, 사회적 가치란 사회적 이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기의 이해 관계에 따라 사물을 보는 태도가

달라진다. 이것은 이해 관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자기의 입장, 자기의 이해 관계와 관련된 처지에서 사물을 보기

때문에 같은 사물, 같은 문제인데도 보는 관점이 서로 달라 견해 차이가 생긴다. 따라서, 사물을 볼 때에는 소수의 이익

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 퇴보의 가치가 아니라 발전하는 가치라는 원칙에  따라 판단하고 평가해야 한다.

  셋째, 사물을 볼 때에는 어느 면이 더 중요하고 어느 면이 덜 중요하지를 똑똑히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존재는 다원

적이라고 했다. 교통 사고가 발생했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가이다. 버스가 전복했을 때에 차체

가 얼마나 파손됐느냐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 가장 중요한 면이 사건의 근거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사건의 조건이 된다. 따라서, 사물을 옳게 이해하려면 사물의 어떤 측면이 근거가 되고, 또 어떤 측면이 조건이

되는가를 예리하게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근거와 조건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그 사건에 대한 이해가 크게 달라진

다.

  보도 기사에는 ‘리드(lead)’라는 것이 있다. 그 보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리드’로 하여 기사를 작성한다. 그런데 기

사의 어느 부분을 ‘리드’로 잡느냐에 따라 기사가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게 달라진다. 사물의 어느 면이 중요한가

는 관심도에 따라 다르며, 관심도는 이해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외신을 다루어 보면, 같은 사건인데도 입장에 따

라, 즉 기자의 국적에 따라 ‘리드’가 제각기 다른데, 이는 곧 사건을 보는 눈에 묘한 차이가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베트남의 최후를 보도했던 각국의 신문을 보면 이것을 더욱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반공 진영의 나라와 공산 국가의 신

문 사이에서 베트남 사태를 보는 눈이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반공 진영의 나라에서도 보도에 역점을 두는 측

면이 나라마다 달랐다.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하려면 기사를 객관적으로 써야 한다는 말이 있다. 조금도 주관을 섞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사

를 써야만 정확한 보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이라는 표현은 주의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 하면, 정확

하고 올바른 보도일수록 객관적이라기보다 오히려 훌륭한 의미에서의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사태를 정확하게 알리는

보도일수록 주관적이 되어야 한다는 이론은,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조금도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윤봉길 의사가 1931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일본 시라카와 대장 등을 폭사(暴死)시킨 사건을 예로 들어 보자. 만

약, 정확한 보도라는 것이 주관을 전혀 개입시지키 않고 거울처럼 보이는 그대로를 보도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윤봉길

의사는 일본군의 엄숙한 대식전을 피바다로 물들인 엄청난 사건의 ‘테러리스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문은 마땅히

윤 의사를 규탄하는 보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도가 사건을 정확히 알리는 보도가 될 수 없

다는 것은 분명하다. 윤 의사의 장거(壯擧)는 우선 역사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있으며, 식민지 제도라는 것이 인류 역사상 배격, 규탄돼야 할 역사적 유제(遺制)라는 판단이 앞서야 한다. 또, 윤 의사

의 장거 당시 우리 삼천만 동포가 일제의 착취와 탄압 아래에서 얼마나 신음하고 있었느냐를 윤 의사의 행위와 관련시

켜 보아야 한다. 사건을 전체적, 역사적 근거와 조건을 식별하는 입장에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판단이 서야만

이 사건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비로소 파악할 수 있다.

  윤 의사의 폭탄 투척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에 이 같은 수많은 사실이 횡적으로 종적으로 얽혀 있다는

점을 우선 알아야 한다. 한 사건을 정확히 보도하는 데 만약 이와 같은 풍부한 지식이 필요하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주

관적 보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확한 보도를 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사회 과학적 소양과 문학적, 철학적 소양이 필

요하다.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대기자 올솝 형제가 “훌륭하고 정확한 보도는 본래 가장 주관적인 것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러

한 점을 지적해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윤 의사의 의거와 같은 극단적인 예를 든 것이 적절치 못하다고 할는지

모르나, 정확한 보도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실일수록, 오히려 고도의 주관적 보도를 통해 진실의 전달이 가능하다

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신문이 진실을 보도해야 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울 설명이 필요 없는 당연한 이야기이다. 정확한 보도를 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전체적으로 보아야 하고, 역사적으로 새로운 가치의 편에서 봐야 하며, 무엇이 근거이고, 무엇이 조건인가를 명

확히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준칙을 강조하는 것은 기자들의 기사작성 기술이 미숙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해

관계에 따라 특정 보도의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기사가 보도되게 하려는 외부 세력이 있

으므로 진실 보도는 일반적으로 수난의 길을 걷게 마련이다. 양심적이고자 하는 언론이이 때로 형극의 길과 고독의 길

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문은 스스로 자신들의 임무가 ‘사실 보도’라고 말한다. 그 임무를 다하기 위해 신문은 자신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

진실을 왜곡하려는 권력과 이익 집단, 그 구속과 억압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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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라는 것

난 원래 눈물을 잘 흘리지 않는다.

지금은 그래도 가끔 눈물을 흘리곤 하지만, 예전에는 특히 더욱 그랬다.

아무리 슬픈 상황이 나더라도, 누군가가 죽더라도 슬프다라는 생각은 들지만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머리 속은 슬픈데, 눈물이 흐르지 않아서 내가 뭐가 잘못된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2003년 김주익 열사가 돌아가셔서 한진중공업을 방문한 적이 있다.

집회현장에서 관련동영상을 보다가 앉아서 말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무척이나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내가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용산 철거민 참사를 접하고 난 뒤에도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냥 허망한 느낌이 들었다. 일부러 관련된 영상이나 사진도 잘 보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거나 짜증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애써 담담해지려고, 냉정해지려고 하는 중이다.

저 추악한 자본과 정권 앞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슬프게 보이고 싶지 않다.

 

오히려 당당하게 말을 하는 경찰과 정권에게 분노만을 느낄 것이다.

뻔뻔하게 과격시위 때문에 희생되었다고 거짓말을 하는 그들에게 눈물따위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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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람들과 저렇게 모여서 책을 읽으며 수다를 떠는 것도 무척 재미있는 일이지.

 

 

집에 이런 액자들이 많이 걸려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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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 악티바(Vita Activa) - 인권

 

'행동하는 삶'이란 뜻의 라틴어인 비타 악티바(Vita Activa)라는 이름을 가지고 "책세상"출판사에 5권의 책이 나왔다.

개념사를 서술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앞으로 계속 나올 예정이라는데, 현재 나와있는 5권은 인권, 아나키즘, 시민, 계급, 아방가르드 이다. 사실 이 책을 산 이유는 단순한데, 한겨레에서 처음 책소개를 보고 디자인이 참 괜찮다는 생각을 했고, 매우 얇아보여서 심심풀이로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왠지 이런데에 순서에 얽매이기도 하는 성격이거니와 요즘 가장 관심있는 분야인 "인권"을 먼저 살펴보았다. 130여 페이지 밖에 안되는 매우 얇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작정하고 읽지 않아서 그런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지하철 같은 곳에서만 잠깐 잠깐 읽어서 그런지 내용도 사실 잘 생각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느낌은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요즘 내가 인권에 대한 부정적인 논의(인권의 한계, 딜레마 등등)에 대해서만 들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인권에 대해서 긍정적이고, 순수하게 서술한 부분이 많다고 해야 할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또한 워낙 방대한 내용을 얇은 책에 집어넣다보니 읽기에는 쉽지만 그 내용은 전혀 쉽지 않다. 인권에 대해서 공부하고 연구하는데 사용하기 보다는 인권에 대해서 수박 겉핡기 식으로 소개받는데 유용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책의 편집은 매우 훌륭(?)하게 되어 있는데, 각주에 대해서 매우 이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라던가 중간 중간에 삽입된 사진들은 책이라기보다는 잡지를 읽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얇은 책인데, 편집이 글씨로만 되어있지 않다보니 들어있는 내용이 그리 많지는 않다.(물론 이 말이 가벼운 내용이라던가, 생각해볼 꺼리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순히 글씨의 양적인 부분만을 이야기한 것이다.)

결국 자신이 인권에 대해서 진지하게 공부하거나 연구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절대 비추천할 만한 책이라는 것이다. 인권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다던가(이런 사람은 거의 어, 인권에 대해서 살짝 맛보고 싶은 사람에게 적합한 책이 될 것이다.

 

목차 
1장ㅣ인권과 시민권이란 무엇인가 왜 인권인가
인권
시민권
시민권과 함께 발전한 인권
─ 깊이 읽기ㅣ<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2장ㅣ근대 이전의 인권과 시민권-고대 자연법사상과 시민권의 형성
1. 자연법사상
자연법사상의 출발, 《안티고네》
자연법사상의 철학적 발전-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학파
자연법사상의 실정법 적용-키케로와 만민법
2. 고대의 시민권
고대 시민-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시티즌십
시민 지위의 변화-자연법사상과 만민법의 적용
시민지위의 구체화-가이우스
─ 깊이 읽기ㅣ공화주의와 키케로의 《공화국에 관하여》

3장ㅣ근대 인권 사상 및 시민권 제도의 발전
1. 근대 인권 사상 및 시민권 제도의 사회적·역사적 조건
상공업과 도시의 발달
봉건 제도와 가치관의 붕괴
2. 근대 인권 사상의 발전
자연법에서 자연권으로
근대적 인간관의 형성
홉스-자연법은 자연권에서 나온다
로크-자연법에서 다시 자연권으로
루소-일반 의지로 혁명을 싹틔우다
근대 인권 사상과 사회 계약의 핵심
3. 근대 시민권 제도의 발전
근대 이전의 시민권
시민권 제도의 탄생 조짐
국민 국가와 시민권 제도의 등장
가. 근대 국민 국가와 민족주의
나. 프랑스 혁명과 시민권 제도
국민 국가와 시민권 제도의 확산
국제기구-시민권 확장을 위한 노력
─ 깊이 읽기ㅣ홉스, 로크, 루소의 질서와 권리

4장ㅣ현대 인권-시민권 이론의 발전
1. 영국 시민권의 발전 과정-사회권의 탄생
개인주의 시민권의 한계
사회 통합의 매개가 된 시민권
영국의 시민권의 세 단계
사회권의 근거와 내용
2. 여성의 인권과 시민권
남성과는 다른 여성의 권리-집단 인지적 시민권
더 많은 소수자를 보호하는 집단 인지적 시민권
3. 문화적 권리의 문제와 다문화 시민권
다문화 시민권의 필요성
가. 지구화, 다양성의 승리
나. 종족 갈등과 다문화 시민권
다문화 시민권의 주요 내용
다문화 시민권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
다종족·다문화 국가의 통합을 위해
─ 깊이 읽기ㅣ한국 사회의 시민권

5장ㅣ지구 공동체의 지구 시민권을 꿈꾸다
인권과 시민권의 범위
지구화와 지구 시민권
─ 깊이 읽기ㅣ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하는 근대적 시민권

개념의 연표─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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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의 전망?

오랜만에 부모님과 대화(?)를 좀 했다.

사실 대화라고 하기에는 뭔가 좀 그런 대화였는데.

이유는 부모님들이 다 그렇듯이 설득이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포기를 시키는 게 낫지.

앞으로 언론관련 시민단체에서 일한다고 하니, 절대로 안된단다.

솔직히 말한 내가 잘못한 건지.

그냥 이번에는 좀 떳떳해지고 싶어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반대하는 이유는 전망이 없단다. 앞으로 전망과 계획없이 어떻게 살 것이냐고 말한다.

사실 금전적으로 막막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는데 너무 금전적인 것만 이야기를 한다.

근데, 사실 그게 내 눈에는 자식자랑 못한다는 이유로 들렸다. 계속 다른 사람들 이야기만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떳떳한 직장을 구하란다. 내가 부끄러운건가.(좀 오버된 생각일 수도)

회사를 다니는 형도 그러는데, 너도 그러냐는 반응으로 봐서는 그 떳떳하다는 기준을 대충 알것 같다.

결국 자식자랑을 하고 싶으신 게다. 심정적으로 이해는 되지만 슬슬 짜증이 몰려온다.

 

결국엔 맘대로 하란다.(결코 좋지 않은 반응)

마음 속이 갑갑하다.

 

그런데, 내일은 계절학기 시험이다 젠장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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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눈이 내렸다.

블로그에도 눈이 내리고, 현실에도 눈이 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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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맞이 여행 사진 몇장


요상하게 생긴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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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데모질

장기하가 속해있는 레이블의 모토(?)가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이란다.

그래서 그들은 싱글음반은 직접 cd를 굽고 그런다.

문득, 지속가능한 데모질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먼저 생각이 난건 "돈"이었다. 어떤 데모질을 하던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인물 하나를 찍어내려 해도 "돈"이 필요하고, 사실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고 하더라도 데모질을 하는 사람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돈"은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돈"은 어디에서 나오려나. 사실 시민단체에서 일한다고 하더라도 그 수입은 대부분 후원회원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에 어지간히 규모가 큰 단체가 아니면 그 "돈"은 먹고 살기에 충분하다고 볼 수 만은 없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이제 사회운동을 하려는 사람들이나, 하고 있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데모질을 할 수 있으려면 그놈의 "돈"을 어찌해야 할 것 같다. 단순히 운동에 대한 열의만으로 대충때우려는 것으로는 곤란하다.

 

두번째로 생각난 것은 흔히 말하는 운동에 대한 열의 혹은 열정이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운동이 올바르다고 하더라도 자기 싫으면 그만이다. 자기가 죽어도 하기 싫은데 그 운동은 해서 무엇하며, 누구에게 도움이 되겠는가. 결국 지속가능한 데모질을 위해서는 운동에 대한 열정을 계속적으로 키워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단지 스스로 결의를 불사르는 노력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열정을 줄 수 있는 분위기랄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모르겠고, 표현도 못하겠지만, 좀더 깊게 생각해볼 일이다.

 

두번째의 열정과 관련되어서 생각난 것은 "취미"이다. 혹은 운동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는 "좋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하나 쯤은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과 만나서 술마시며 수다를 떠는 것이던, 쇼핑을 하는 것이던, 사진을 찍는 것이던 좋아하는 것이 하나쯤은 필요하다는 생각이 얼마 전부터 들었다. 데모질을 하다보면 짜증나는 일이 엄청 많기 마련인데 그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하다. 더구나 그 스트레스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일 때에는 혼자서 풀어야 할 때도 많다. 물론 결국에는 그 사람과의 관계를 풀기 위해서 직/간접적으로 만나서 풀어야 하지만, 사람이 어찌 그렇게 이성적일 수만 있는 동물이던가. 감정의 선이 정리될때까지는 자신이 몰입하며 즐길 수 있는 무언가의 도구가 필요하다.

 

또 무엇이 있을까 억지로 생각을 해보니 "관심"이라는 것도 필요하겠다. 스스로에 대한 관심일 수도 있고, 타인에 대한 관심일 수도 있고, 데모질과 관련된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일 수도 있다. 스스로에 대한 관심은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나는 아직도 나에 대한 애정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타인에 대한 관심은 무척이나 어렵고 중요하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기도 쉽지 않은데 남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또하나의 스트레스가 될지도 모르지만, 데모질은 언제나 모두 함께 하는 것에 재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상투적인 표현을 하자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까 -_-; 데모질과 관련되니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은 앞으로 점점 늘어날 것이다. 예전에는 소위 글 좀 쓸 줄 알고, 책 좀 읽고, 대자보 좀 끄적거릴 줄 알면 데모질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인터넷도 알아야 하고 웹자보도 좀 만들 줄 알아야 하고, 노래가사도 바꿀 줄 알아야 하고, 할 줄 알아야 하는 일이 어찌나 많은 지...갈수록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영역도 넓어지고, 사람들과 접근하는 방법도 여러가지이기에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각자 할 수 있는 것을 잘 나누어서 활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건 또 이렇게 되면 몇몇사람에게 역할이 과중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스스로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거다. 당장은 쉽게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조금씩 배워나가면 얼마나 좋을까..(이러고 보니 또 욕하고 있다-_-)

 

지속가능한 데모질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 지는 대충 알 것 같기도 한데, 문제는 그것들을 어떻게 만들어가는가이다. 특히, "돈"문제는 어찌해야 한단말인가...배굶어가며 하는 건 아니지만, 참 어려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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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파업]장기하 파업지지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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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하...역시 맘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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