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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렁 울렁

 

말도 안 되는 스케줄도 시간이 지나면 끝이 난다는 걸

알게 해준 한 주가 지나가고 있다.

천하에 쓸데 없는 강의안, 계획서 따위를 만들고 인쇄하느라

tex을 치고 아까운 A4 용지를 수십장 까먹기도 했다.

 

아무튼 느긋한 토요일 오후.

연우 보다는 우리를 위해서 산 도미노 중에서 스무 개쯤 꺼내서

어떻게든지 연우의 방해를 무릅쓰고 종을 울리려 애쓰고 있던 중이었다.

 

옆집, 아니면 윗집에서 갑자기 머리로 생각할 새 없이도

가슴을 먼저 울렁 울렁하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와 여자 목소리인데 한쪽은 겁에 질려서 비명 지르면서 비는 소리,

한 쪽은  다른 사람을 공포에 몰아 넣는 목소리. (잘 묘사를 못하겠다.

사람마다 다르겠지..)

튕겨 일어나 주변을 살펴 보니 바로 우리 옆집 404호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 집 현관 앞에 가 보니

여자 목소리는 그 집에 사는 중학교 다니는 여자애가 내는 소리였다.

현관 앞에 서 있는 나에게 전해오는 겁에 질린 목소리.

 

" 제발 그러지 마요.."

 

내장이 밖으로 나올 것 같았다.

 

참지 못하고 현관 문을 주먹으로 쾅쾅 두들기고

ZL한테 나오라고 해서 다 들리게끔

" 안에서 막 죽는 소리 났어. 신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쩌구 큰 소리로 말하고 관리실에 가서 물어 봤다.

(그 집에 어른 드나드는걸 못 봤고 그 여학생과

대학생 정도 돼 보이는 남자애들 둘만 봤기에

걱정이 말도 못하게 됐다.)

 

아저씨는

" 그 집, 굉장히 점잖은 사람들이 사는 집이라

그런 소리 날 리가 없는데...

*** 상무인 아버지하고 어디서 어린이 집 하는 어머니랑

(이게 점잖다는 근거인가 보다)

아들들은 기숙사 살아서 주말에만 왔다 갔다 하고

딸만 같이 사는디."

라 한다.

 

남자 소리는 그 애 아빠였나 본데

참 이상한게 처음에 그 소음을 들었을 때는

분명 성인 남녀 간에 나는 소리 같았던 거다.

보통 아빠가 화를 폭발하는 상황이라면

--이것도 토할 것 같긴 마찬가지 이지만--

막 큰 목소리로 야단치고 애는

잘못했어요, 앞으로 잘 할께요. 안 그럴께요 등등

이런 소리가 들려야 할 것 같은데.

 

그 뒤론 조용하다.

 

계속 속이 울렁 울렁하고

철렁 내려 앉은 가슴이 진정이 되질 않았다.

부모같이 어린 자식한테 전권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온통 폭력이 넘쳐나는 세상에 절대적인 공포란 걸

부모를 통해서 먼저 경험하는구나.

만일 내 맘 속 깊은 곳의 의심처럼

(반복되는) 성폭력 같은게 있었다면.

 

사람들에게 있는 어두운 그림자, 파괴적인 모습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양면이라고

자기 안에 그런 부분을 수긍하고 다독여 가야

성숙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내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사람은

그런 모습을 대면하는 걸 정말 힘들어 한다.

그래서  오늘 오후의 사건이 구체적인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앎을 넘어서서  나의 감정적인 근간을 흔드는 것 같다.

이건 내 문제고.

 

아무튼  저녁에 놀러온 슈아한테 얘기하고서 좀 진정이 되었다.

내 마음이 하도 멀미가 나서 미처 생각지도 못했는데

슈아 말대로

그 여학생이 정말 도움이 절실한지

엘레베이터에 타고 내리는 걸 잘 봐두었다가

말을 걸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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