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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1/07/12
    운동 20여일...
    득명
  2. 2011/06/25
    사랑해요.. 꽃별씨(2)
    득명
  3. 2011/05/28
    마음의 고향, 주성이발관
    득명

운동 20여일...

 

 

 

[03 - Cadenza - Andante con Moto.mp3 (5.72 MB) 다운받기]

 

 

권투 20일여만에..  첨에 땀만 존나 흘리다가..  다시 한 시간정도 뛸 수 있는 체력이 되었다.

 

몸이 정말로 많이 망가져 있었다.

 

왜 이렇게 좋은 운동을 하지 않았을까?

 

땀 흘리는 운동을 하지 않고 그 어떤 일을 하더래도 다 거짓말, 가라다.

 

가장 심들때면..  습관처럼 찾았던 체육관.  관장님. 

 

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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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요.. 꽃별씨

 

 

 

  안녕하셨어요?  비가 참 많이 오고 있어요.  집앞 냇가도 물이 불어 엄청난 소리와 함께 누런 황토물이 흘러가고 있어요.   냇가에 살구나무서 빗방울에 떨어진 살구를 한 봉다리 주워다 슈퍼서 사온 숏다리, 막걸리 한 병과 함께 먹었어요.  밤이면 괙괙 울어대던 냇가의 두꺼비들도, 맑은 물아래 어슬렁거리던 붕어때들도 물난리에 모두 떠내려간 것 같고.. 빗소리에 폭포같은 물소리만 들려오는 밤이예요.  꽃별씨 해금곡을 듣가가..  노래보다도 꽃별씨를 더 좋아하게 된것 같아요. 뭐랄까..  꽃별씨 곡안엔 따뜻함과 인간적 고민..  사람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고할까요. 해금이란 악기는 연주자의 맘씨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악기잖아요? 그래서인지..  꽃별씨가 마구 좋아진 것 같아요.  

 

  오늘은 출근해서 괜히 왔다갔다 하는데 제가 언제부터 해금을 하게 되었나 문득 생각이 드는거예요.  첨에 해금을 배우려 맘먹었던건..  본드공장에 다닐 무렵이었어요.  당시 집에서 할수있는 국악기를 찾아봤었는데.. 왜 해금이었나는 잘 생각나진 않아요.  아마도 고딩때 북소리에 홀린듯 사물놀이를 할 무렵 우연히 동네 녹음기가게서 샀던 김영재 해금테이프가 생각났던건지도 모르겠어요. 아니면 피리소리랑 해금소리랑 구분을 못한것 같아요. 그래서 해금카페를 가입해서 어떡하면 배울수있나 알아보려고..  아뒤를 맨든게 별많다 였어요.  본드 한 솥 끓이고 12시가 다되어 퇴근하려는데 하늘에 별이 엄청나게 많은거예요.  그렇게 많은 별은 난생처음 처음 본것만 같았죠. 논산훈련소서 야간행군하다 보았던 별보다 훨씬 더 많았어요.  그래서 별많다란 아뒤를 맨들어 해금을 배울수 있을 것만 같은 인터넷 까페를 찾아봤었죠. 벌써 10년전 얘기예요. 아..

 

  그렇게 또 까맣게 잊고있다가 2005년 가을 며칠을 뒤적거리다  인터넷으로 해금을 하나 무턱대고 사버렸죠. 그 해금은 임자가 따로 있는듯 하여 지금은 다른 곳에 가있고요.  택배로 받은 해금을 열어보니..  정말 신기했어요.  활로 안줄바깥줄을 쓱쓱 문대보고는 '소리가 뭐 이래?' 하다..  안에 들어있는 송진을 보고는 어떻게 쓰는 물건인지 한참을 고민했었죠.  ^^   해금이 있으면 뭐 어떻게 되겠지 하다가 교본도 어렵게 구해서 배워보려다..  책보고 할수 있는게 아니라는걸 알아채고는 결국 초대 사부님인 놀이마당 울림 출신의 당시 국악대학 학생선생님을 소개받아 3달인가를 배웠어요. 그러다 난생처음 파업이란걸 하게되어 해금배우는걸 중단하게되었죠.  저는 혼자떨어져서 특수근로자? 뭐 이런거라 전적으로 하진 않았지만 쉬는날 제가 대니고있는 회사에 다른분들과 잠깐 찾아갔다는 이유로 주거침입? 이런 죄목으로 우리 점장님한테 난생처음으로 형사고발을 당했죠.  그리고는 빨갱이로 죄인으로 걍..  낙인찍는 경찰,검찰조사를 받고는 그때즈음부터 제가 좀 이상해졌어요.  작은 일에도 막 화내고..  잠도 잘 못자고..  막 우울하고 답답하고요.

 

  혼자서 마음 많이 끓였던 길었던 파업이 끝나고는 별다른 치료 없이 제 스스로를 병든 마음을 추스르고자 해금에 전념하게 되었어요.  마침 동네의 시립국악단 무료 초급강좌가 있었고..  그리고는 이어서 평생교육원 해금 중급과정을 한 2년 배우게 된거예요.  해금을 통해 마음을 있는그대로 드러내는 법도 배웠고, 슬픔을 어루만지며 바라볼 수 있는 여력도, 기쁨을 절재하는 방법도 알게된 것 같아요. 언젠가 꽃별씨가 얘기하셨듯이 나에게 위안이되는 사람목소리같은 또다른 나인 친구같은 해금. 이란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직도 우리 조합원 어머님들은 치료받지 못한 크고 작은 맘의 상처들로 힘들어하시는 분이 많이 계시는데요..  모르긴 몰라도 요즘 tv에 가끔나오는 두들겨 맞고 파업하시는 분들도 나중에 어떻게 끝나게 되건 일상으로 돌아오기위해서는 상처받은 마음 치료를 받으셔야만 될거예요.

 

  한밤 중 해금얘기하다보니 얘기가 길어지고 무거워진것 같어요.  낼 출근하면 꼬박꼬박 졸것도 같구요.

 

  꽃별씨..  고마워요.   사랑해요.  건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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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고향, 주성이발관

 

 

 

 

 

  

 

 

 

  

  "...  바쁜 꿀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

 

  이 말이 어디 적혀있는 글인지 아세요?  별많다 아저씨가 어려서부터 가고 있는 주성이발관 머리 깜켜주는데 바로 위에 액자에 걸린 글이예요.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명희아저씨는 회색 조리개를 바가지로 쓰고 계시고..  여전히 세수할때엔 조용히 주먼지에 수건을 찔러 넣어 주시고 있어요.

 

  난생처음 이발소라는 곳을 가본게 국민학교 4학년 때인가 명절 즈음으로 기억나는 것 같아요.  그리고는 중핵교 가면서 주성이발소라는 곳을 줄 ㅣ곧 갔어요.  별많다 아저씨 머리는 주로 누나가 깍아줬었어요.  보자기를 빨래집게로 망또같이 둘러쓰고 의자에 앉으면..  누나가 싹둑싹둑 잘라주었죠.  그러면 동그랗게 되는거예요.  깍아줘놓고 놀리는건 뭔지..  아무튼 한 30여년전 또랑이 흐르는 주성국민한교 구석에 주성이발관이 처음 생겨났죠.

 

  명희형님은 우리동네 골목에 살던형인데.. 난생 첨으로 이발소라는델 갔더니 머리를 깜겨주고 계신거예요.  그때나 지금이나 명희형님의 머리는 스포스머리라고 짤게 자른 머리 항상 똑같은데요. 지금은 짧은 머리가 듬성듬성 하얗게 변해있어요. 아직 장가를 못가시고 이발소에 혼자 사시는 것 같아요.  명희형님은 위로 형이 한 분 계시고..  여동생이 한 명 있어요.  같은 골목에 살았었거든요. 다운 증후군이라고 하나요?    무슨 장애가 있으신것 같은데..   동네 언니들과 몰려다니다가 명희형님을 보면 바보같다고 막 놀리고는 했어요.  그럴때마다 명희형님은 수줍은 듯 웃기만 하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도 같이 놀아주지 않았는데.. 어찌되었건 누군가 말을 걸어준다는게 좋으셨던 것 같기도 해요. 

 

  왜..  갑자기 오래된 이발소 얘기냐고요?  평소엔 몰랐는데 30여년 이상 함께 살아오다보니 별많다 아저씨에게 전혀 다른 의미의 장소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예요. 누가 알았겠어요?  제가 지금 동네 이발소 얘길 기를 쓰고 쓰게될줄을요.  그 무엇이 되었건간에 지나온 세월만큼 소중해지는 것도 같아요. 

 

  주성이발관은 첨에 주성초등학교 운동장 구석즈음에 있었는데요.  거기엔 커다란 은행나무가 두그로 서있었고요.  겨울이면 난로에 물을 덥히느라고 연탄냄새가 나고는 했었죠.  첨엔 이발소라고 불렀는데..  언제부터인가 이발관이라 불렀죠.  명절 때나 되어 가서 커다란 의자에 앉을때는 키높이 나무를 의자에 깔고 앉았죠.  바리깡에 뒷머리가 따꼼거리기도 했는데..  이발소도 왔겠다 꾹 참았죠. 

 

  주성이발관에 들어서면 이발하는 커다란 거울 위로 항상 500원짜리 지폐가 많이 붙ㄴ어있었어요.  그 위로는 까맣게 생긴 돌멩이들이 잔뜩 진열되있었죠.  전보다는 많지 않지만 지금도 지폐와 돌멩이들이 진열되어 있어요.  그리고는 빼놓을 수 없는게..  라디오예요.  ^^  항상 구수한 메들리들이 흘러나오는 오래된 라디오예요.  얼마전 이발관소 근처인 한국관이란 중년 나이트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명희 형님이 지나가시는거예요. 이발소를 안간지 10여년이 넘었는데 저를 보더니 금새 알아보시며 어쩔줄을 몰라하셨습니다.

 

   ".... 어?  으유.. 지금 워디에 있어유" 

 

   "아이구..  워티기 알어보시네유"

 

  "그람~ 알지...  지금 워디있는겨? 왜 안왔어?"

 

  "복대동으로 이사 갔어유.  청주서 회사 대니고 있어유"

 

  "아유..  그려.. 저기 사장님..  몇년전 돌아가셨어."

 

  "왜유?"

 

  "머리 때메 쓰려졌어. 머리가 다쳤댜"

 

  "나이도 얼마 안되셨을거 같은데.."

 

  "그럼 젊지..  명함하나줘."

 

  "명함 없는...  아! 여기..  있어요"

 

  "응~ 노래 테이프 사야하는데 잘됐네..  좋은 메들리 테프 하나 사야되는데"

 

  "찾아보고 말씀드릴께요..  어디 가시는길예요?"

 

  "응..  먹을거 사러 중앙슈퍼가는겨"

 

  "담에 뵈유"

 

  "그려..  담에 꼭 보자구"

 

  지난 세월만큼인지..  한쪽 눈이 반쯤 감겨 안경을 쓰신  명희형님은 부지런히 슈퍼로 발길을 돌리셨습니다. 

 

며칠이 지나 운명처럼 주성이발관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야.. 너 몰라볼뻔했다.  지금 어디있어?"

 

  "예..  청주서 회사대녀요.  복대동으루 이사갔어유. 알어보시네유"

 

  "그럼..  보믄 몰러?"

 

  "근데 한 십년전과 그대루이신거 같네유"

 

  "그려? ㅋㅋ 요즘 이쪽 머리가 하도 아퍼 귀를 뚫벘어.  귀 뚫는게 치매예방도 되고 참 좋와"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요..  근데 연세가 워티기 되시는데유?"

 

  "올해 67"

 

  "예..  전엔 머리깩을라면 저기 의자에 두줄로 기대리고 있다 깍곤 했는데.. 그래두 공고학생들 많이 오지 않나유? "

 

  "그지? ㅋㅋㅋ 그랬지..  ^^  요즘은 다들 미장원가서 그르치는 않어.  청주 있음 자주 와라.. 반갑네."

 

  "예..  기억 못허실줄 알었는데..  다 격하시네유 ^^"

 

  "앞면도는 안할껴?"

 

  "예.."

 

 

  중핵교때 머리 움직거린다고 깍다가 뒈지게 혼났었던 이발사님이십니다. 정말로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습니다.ㅋㅋ  언제듯 친구처럼 반겨주시던 '명희'형님은 일하시는 중이라 묵묵히 말씀을 애끼시며 늘 그래왔듯이 아무일 없었다는 듯 바보처럼 머리를 감겨주셨슴다.   흰머리가 늘은 만큼..  전에 머리알이 아릴정도로 박박 문질러주시던게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그러나 누르시는 힘은 예전만 같으십니다.  잘못해서  코를 세면대에 박을뻔 했죠 ^^ 조그만 푸라스틱 조리게로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세수물을 떠주셨고요..  찬물도 괜찮은데..  오랫만에 찾은 까닭인지..  난로위 빠께스에 뜨신물이 있다고 몇번이고 알려주셨습니다.   물론 세수하는 중에 주머니에 쑥~ 수건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넣어주셨고요.

 

  "명희야.. 커피 한 잔 뽑아드려라."

 

  "예..  고맙습니다. 이르키 기억해주시니까유. "

 

  "몰러볼뻔 했다니까..  그람 또와"

 

  "예..  그람유.  여긴..  맘에 고향같은 곳이니까유.  안녕히계세유."

 

  "..."

 

 

  명희형님은 저를 알고계시고 하고싶은 많은 얘기를 속에 담아두셨지만 바보스럽게 일하시는 역할에 충실하셔서 별얘길 않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올때 꾸벅 인사드리니 따라나오셨습니다.

 

  "워디있는겨? 명함하나줘"

 

  "명함은 웂는데..  요기 마트대녀유.  노래테입 괜찮은거 찾아볼께유.  지금 여기서 주무시는거여유?"

 

  "사장님 돌아가시고.. 여기 혼자서 먹고자고 하는겨."

 

  "여동생도 있지않으셨어유?"

 

  "결혼해서 애낳고 잘살어.. 청주서 살어. 얼매전에도 애덜 봤어"

 

  "근데.. 형님 이름이 워티기 되세유?"

 

  "김ㅇㅇ여..  호적이름은 못배꾼댜. 내 이름은 김ㅇㅇ여."

 

  "예..  안녕히계세요. ^^"

 

  "그랴.. "

 

 

  예전 일본집이 있던 골목을 지나..  잠업협동조합 자리를 지나..  우신쌀가게 자리 앞을 지나..  평화약국 자리를 지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습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아..  차를 탔는데도 눈물은 한없이계속해서 쏟아지다..  통곡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울며울며 무심천 옆 용하사 앞에 서서야 엉엉 울고서야 조금 진정이 되었습니다.  굵어져버린 왕벗나무옆 뚝방길을 서성거리다 부은 눈을 가라앉히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 '복대동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느새 또 머리가 길었습니다.  늘 그렇게.. 바보처럼..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40여년 가까이 머리를 감겨주시는 '명희'형님을 만나러 주성이발관에 가겠습니다.  명희형님도 뵙고..  나도 명희형님처럼 살고 싶은 바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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