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 신화섭 씨의 특별한 ‘약손봉사’

                           [인터뷰] 타인과 세상을 향해 건네는 따뜻한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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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나눌 것이 많은 사람은 좋겠다. IT 신화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된 빌게이츠는 죽기 전에 자신이 가진 재산의 95%를 나누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은 “내 인생의 후반부는 주로 의미 있게 돈을 쓰는 일에 바칠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이런 인생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사람이란 없을 것이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참으로 많다. 그러니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당연하고도 지지받아 마땅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돈이란 인간이 생존을 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이 많다고 해서 다 행복한 것도 아니고, 가난하다고 해서 다 불행한 것은 아니다. 이웃끼리 오가는 따뜻한 인정 속에 꽃피는 공동체 의식이나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서도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바치는 선을 향한 봉사행위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인간 본연의 실천행위이다.

‘약손봉사’라는 말을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이는 듣기만 해도 힐링과 치유의 개념이 물신 풍기는 말이라서 언제 들어도 몸과 마음에 보탬이 되는 유익한 말이다. 신화섭 그녀는 ‘약손봉사’자다. 오로지 기공으로 단련된 손놀림으로 몸이 아프고 육신이 힘든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위로와 치유를 건네는 사람이다. 신화섭씨를 만나서 그녀가 하는 일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본다.

신화섭 씨는 도봉구 ‘국학평화봉사단’ 팀장이다. 그녀가 하는 일은 우리역사 강의를 비롯해서 ‘약손봉사’와 ‘환경교육’ 등이 주를 이룬다. 역사 강의는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또는 교사모임이나 어른모임 등을 찾아다니면서 하는데 우리가 잘 아는 일본의 역사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이 수면위로 떠올라 우리 모두가 역사에 대한 자각이 새롭게 일기 시작하던 2002년경부터 시작됐다. 이에 비해서 ‘약손봉사’는 주로 문화센터와 노인정과 독거노인들을 찾아다니면서 하는 봉사인데 봉사경력 30여년이 다 되가는 지금까지 쉬지 않고 상시적으로 하고 있는 일에 속한다.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몸이 아파 단전호흡을 시작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지요. 제가 운동을 하게 된 동기는 제 아픈 몸을 고쳐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집이 가난하여 시집을 가면 좀 괜찮을까 싶어서 22살의 이른 나이에 시집을 갔지만 결혼생활은 더 심한 고생길이었어요.”신화섭 씨는 가난한 종가집의 맏며느리였던 것이다. 시집살이가 아무리 고달프다 하지만 그중 가장 큰 시집살이는 가난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식솔 많은 가난한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겪었을 고충이 여간 아니었던 모양이다. 둘째 딸을 낳고서 병을 얻어 몸져눕게 됐을 때도 손쉽게 병원 한 번 못 갔던 설움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때 붙잡은 것이 국학기공이다. 허리가 아파 서있기도 힘든 처지에서 발걸음 떼어 간 곳이 구민회관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동사무소나 구민회관에서 하는 운동프로그램은 기껏해야 일주일에 2~3회가 전부다. 신화섭씨는 국학기공을 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몸이 좋아지는 것을 느끼면서 이왕에 운동을 하려면 매일 같이 제대로 해야겠구나 싶었다. 그때부터 단학선원을 찾았고 크고 작은 집중수련회에 참석하며 본격적으로 몸 살리기를 시작했다.

특히 자아수련프로그램은 그녀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수련원에서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과정을 거치면서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훨훨 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 무렵부터 “국학강사는 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는 것을 남에게 전달하는 사람이다.”는 말에 봉사자로 나설 용기를 내게 됐다.

하긴 신화섭 씨에게 있어 봉사의 DNA는 오래 전부터 형성된 것이었다. 첫 봉사는 동네 마을문고부터 시작됐다. 아이들이 훌쩍 큰 뒤로는 봉사의 대상이 자연스럽게 성인으로 옮겼을 뿐이다.

‘내 몸 살린 건강비법’을 남들과 나누자. 그녀는 이 결심을 곧바로 실천으로 옮겼다. 그해 가을날 드디어 A4 용지에 전화번호와 함께 ‘매일아침 10시에 국학기공 봉사를 시작합니다.’라고 쓴 전단지 10장을 만들어서 등나무그늘이 있는 동네 일대에 붙였다. 봉사 전단지를 붙이고 돌아와 ‘내일 한 사람도 안 오면 어쩌나?’하는 걱정에 잠을 설치기도 했지만 약속장소에 갔을 때는 10명쯤 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며 괜한 기우를 떨칠 수가 있었다.

국학기공봉사자로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배꼽 밑 단전치기 30번 하겠습니다! 자 그럼 하나, 둘, 셋...서른! 단전치기 다 했지요? 다음은, 음 다음은(?)”

처음에는 떨려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순서가 생각나지 않아서 숨 들여 마시고 내쉬고를 스무 번은 더 했을 것이다. 동작의 순서를 챙겨가며 구령 부르기가 쉽지 않았다. 휴우~ 40여 분을 겨우 채우고 나서 생각해 보았다. “아하~ 머리서부터 시작해서 발끝으로 내려가면 순서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하는 깨달음이 번득 스쳐왔다. 한 번의 수업은 다음 시간을 위한 답을 제시해줬다. 요령과 지혜를 터득하는 재미도 좋고 국학기공봉사를 하며 사람들과 소통하는 시간도 보람을 더했다. 신화섭 씨의 삶은 그렇게 점차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신화섭씨의 구령에 맞춰 운동을 잘 따라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동작을 멈추는 것이었다. 뒤를 돌아다보니 한 남자가 쓰러져서 있었다. 그걸 본 신화섭 씨는 남자에게 다가가서 손을 뻗었다. “공심空心으로 금소를 짚어 활공을 시도했지요.” 공심이란 잡념 없는 깨끗한 마음이고, 활공이란 십전혈(穴) 즉 손끝에 기를 모아 급소를 짚어가며 하는 경락마사지를 말한다. 신화섭씨의 급소를 찌르는 활공봉사가 서너 차례 반복되자 남자의 눈에서는 초점이 잡히고 입에서는 한숨이 터지기 시작했다.

국학기공은 단학선원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비해서 훨씬 대중화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국학기공과 ‘약손봉사자’로서 일로매진하는 그녀의 꾸준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연륜과 실력을 겸비한 배테랑 봉사자의 위치에 서게 했다. 주민 센터에서의 강사 활동이나 구청과 학교 각종 복지기관에서 인기초청강사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역사 강의에도 열심이시던데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역사 공부는 저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지요. 저의 봉사경력 30여년 중 후반부는 주로 역사 강의가 차지 하고 있어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귀를 쫑긋하고 있는 아이들만 생각하면 힘이 절로 솟구칩니다.”초등생들 수업은 주로 독도이야기, 국경일이야기 같이 주제를 정해서 이루어진다. 우리 역사는 일제탄압을 비롯해서 해방 이후엔 서구사상문화의 우세로 인해서 수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유신과 군부독재가 득세하던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부터 우리 것에 대한 자각이 일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서 단학계열이 선도수련의 대중화를 선도하고 또 역사복원을 위한 노력으로‘국학원’을 설립했다. 국학원은 그야말로 종교와 직업에 상관없이 기공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2002년에 설립한 역사연구 단체인데 이를 근간으로 전국의 3천여 군데에서 무료봉사로 첫 활동을 시작했다.

국학기공은 오늘 날 전국의 주민센터에서 생활체육의 몫을 담당하면서 몸 수련에 걸 맞는 이론적 토대로서 우리 민족 최고의 경전인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근간으로 신인합일(神人合一)을 비롯한 천지인(天地人)사상, 단군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과 제세위화와 같은 철학적인 토대를 복원하기에 열심이다.

 

-신화섭 씨의 강의현장과 약손봉사 시범

지난 주 일요일 본 기자는 종로구에 있는 국학원 교육장에서 중.고생들을 상대로 봉사교육을 하는 현장을 참관했다. “어르신들의 약봉지는 중요한 정보일 수 있기 때문에 함부로 버리면 안 된다. 개인적으로 털어놓은 이야기를 잘못 옮기지 말아야한다. 우리 눈에는 낡은 것으로 보이지만 어르신이 지니고 있는 소지품들은 사랑하는 아들딸을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의 보고일 수 있는 것이다.” 말벗봉사, 청소봉사, 약손봉사 등에서 필요한 실제요령도 뒤따랐다.

신화섭 씨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심기혈정(心氣血精)이란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다. 마음이 가는 곳에 에너지가 흐르고 에너지가 흐르면 생명의 변화를 일으켜 물질의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뜻이 담긴 말이다. 그녀는 봉사를 하면서 전에는 누가 알아봐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렇지만 “국학(國學)을 알고 나서 달라졌다. 내 뿌리에 대해서 알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나니까 스스로 바뀐 것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렇다. 봉사는 그러니까 인간이 인간을 향해 건네는 따뜻한 햇살이자 싱싱한 바람이다. 그리고 봉사란 그냥 홍익이다. 신화섭 그녀에게서는 따뜻한 에너지 바로 그 치유의 기(氣)가 흐른다.

 

*인터뷰어(박정례 )/ 기자, 르포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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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7 10:56 2014/07/2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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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이후, 국가와 정당이란 무엇인가?

                                     [단독 인터뷰] 정동영, 국가와 정당에 대해서 말하다 !!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당신들은 매우 특별한 사람들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이라서 그렇다. 아니 청마의 해 갑오년 봄, 당신들은 뜻하지 않게 세월호를 타고 진도 팽목항을 지나던 사람들이라서 그렇다. 대한민국은 당신들과 함께 한숨과 비탄을 씹으면서 한여름에 다가선 지금까지 여전히 숨 가쁜 비명을 토해내고 있다. 왜 그런가. 대체 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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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기자가 묻고 새정치민주연합 정동영 고문이 대답한다.

정동영 고문은 그동안 팽목항에 세 번 다녀왔다고 한다. 두 번은 전략공천 발표가 나기 전에, 한 번은 그 후 일이다. 7.30 재보선을 앞두고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동작을 지역구 등 15개 선거구의 공천문제로 예민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정 상임고문도 전략공천의 대상자 중 한 사람이었기에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으로 비칠까봐 측근에게도 알리지 않고 잠행을 하다시피 다녀온 팽목항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시민행동 ‘가만히 있지 않겠다’에서 세월호 침사 희생자와 실종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유가족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전국 도보순례단을 꾸린지 마지막 날인 12일 오후 정동영 고문은 다시 팽목항에 있었다. 그날 먼발치에서나마 정동영 고문의 모습을 보았기에 이튿날 그의 사무실로 찾아가서 인터뷰를 청하기에 이르렀다.

피터펜의 작가 제임스 메튜 베리는 ‘인생은 겸손에 대한 오랜 수업이다’라고 말했다. 인기와 지명도에서 수많은 시청자들을 쥐락펴락하던 그 유명한 앵커가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10년을 집권여당의 정치인으로 있었다. 그 한복판에서 누구보다도 각광을 받던 정동영 고문이었다. 헌데 그는 지금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민초들과 함께 호흡을 같이 하고 있다.

“왜 팽목항에 가신 겁니까?”하고 기자가 물었을 때 “그냥 같이 있어주고 싶었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지난 수년 동안 그가 ‘비정규직이나 소외되고 억울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서민의 정치가’라는 소문이 결코 허명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대답은 진솔했고, 정국현안에 대한 내용들 또한 솔직하고도 정직했기에 말이다.

-헌법 30조를 보면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로부터 구조를 받을 수 있다.’는 조항이 있는데요. 정 고문님이 생각하는 국가란 무엇입니까?

“오늘이 세월호 참사가 난지 90일째 되는 날인 데요 우리 대한민국은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눠봐야 한다고 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날 국가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대통령도, 국가도, 시스템도 없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가 일어 난지 90일째 되는 오늘 현재도 달라진 게 무엇입니까? 답은 ‘그 어느 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입니다.

세월호 유족들이 단식하는 사태가 이를 말해주고 있어요. 도무지 달라진 것이 없기에 답답한 거고, 그래서 국회와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서 단식을 하는 거라고 봅니다. 우리가 생떼 같은 자식들을 300명 넘게 잃고도 교훈도 못 얻고 성찰이 없는 사회에서 살게 된다면 그들의 죽음이 헛된 거지요. 이번 사건도 일과성, 일회성 사고로 그냥 지나가는 사건이란 말인가요? 304명이나 되는 목숨이 희생된 의미를 찾을 수 없단 말인가요? 지금 돼 가는 모습을 보면 희생의 의미가 실종되고 있기에 그래요.”

-국회에서 세월호 참사 국정조사특별위원회까지 열리고 있는 상황인데 무엇이 진짜 문제일까요?

“국정조사를 하는 의미를 살려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야당의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지요. 지금 정부는 모든 사태를 해결해야하는 책임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진범을 청해진해운이나 이준석 선장으로 몰아가고 있지만, 정부는 간접 진범 아닌가요? 앞에서 야당의 역할을 강조했는데 정부여당의 견제세력으로서 책임추궁을 단호하게 해서 진실을 밝히고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 소임이 야당에게 있는 것입니다. 근데 흐물흐물 대고 있어요. 초점을 흐리게 하는데 오히려 앞장서고 있는 측면이 있단 말이요.

책임을 면피하려는 정권 앞에서 여당이 실패했을 때 대안세력이 돼야 합니다. 이는 야당이 제 역할을 수행하면서 국민에게 희망이 돼줄 때 가능해요. 권위주의 독재시대 때 우리 야당은 민주세력으로 존재함으로서 대안세력이 됐고 그래서 정권을 잡았습니다. 지금이 절반의 민주주의 상태라면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세력에 맞서서 죄 없는 생명이 쓰러질 때 듬직한 대안세력으로서 그 같은 참상이 왜 일어났는지, 책임은 누구에게 어느 정도씩 있는지 밝혀내야 합니다. 왜 대통령은 8시간 이상이나 연락이 안 됐는지, 무슨 근거로 청와대가 컨트롤 타워가 아니라고 책임 없는 듯이 말하는지를 밝혀내야 합니다.”

-강한 야당으로서 대안세력, 견제세력이 되려면 어떠해야 합니까?

“철학이 있는 정당이어야겠지요. 철학과 노선이 있어야 구체적인 대안이 나오게 되는 거니까요. 인체에서 척추가 곧게 설 때 반듯한 자세도 나오고 제대로 걷고 뛸 수 있지 않습니까? 감히 말하지만 정당의 척추는 바로 노선과 이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당임에도 불구하고 여당과 차별성이 없고. 경제 사회 적으로 약자와 억울한 사람을 대변하는 대안이 없다면 야당이 아닌 것이지요. 여당과 다르다는 이유가 한참 더 드러나야 합니다.

국회 농성장에 가보니 정말로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제헌절 행사를 알리는 펼침 막 아래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 반별로 티셔츠 색깔을 달리해서 등판에 이름을 새긴 것을 입고 있었어요. 2학년 7만 같은 곳은 희생자가 무려 32명이었습니다. 2학년 3반은 26명이었고요. 이분들이 단식농성에 들어간 이유를 알면 정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도대체 진상조사를 하고 대책마련을 함에 있어서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있는지요? 기본에 속하는 것도 안 이루어지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 아니겠냐 말이지요. 이런 것이 왜 정쟁거리가 되냐는 것이죠. 

유가족들의 주장은 <무늬만 특별법>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지고 확실하게 진상규명을 하고 죄가 드러나면 그에 맞는 처벌을 하자는 것입니다.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는 이런 일이 지금 정쟁거리가 돼 있습니다.”

-팽목항에 갔던 이유는 ‘세월호 유족들과 같이 있어주고 싶어서.’라고 하셨는데, 국회 단식농성 장에서도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과 한쪽에 앉아계시는 모습이던데요. 앞에 나서지는 않았더라도 유가족들과는 어떤 교감을 나누셨나요?

“304명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산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4.16 진상규명 특별법’이 통과돼서 독립적인 권한과 함께 충분한 조사기간을 확보하고 성역 없는 수사를 하자는 것입니다. 이래야 참사 재발방지대책이 지속적으로 시행될 수 있고 다시는 참사가 없는 안전한 사회를 지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기회에 국민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안전대책을 확실하게 마련하자는 것이 저와 세월호 유가족 들의 일치된 생각입니다.

정부 여당은 이번 사건을 금전으로 보상하고 대충 끝내려고 하는데, 유족들이 원하는 특별법은 첫째도 둘째도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장치마련을 하는 겁니다. 희생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요. 정부와 각 정당들은 이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 곧 제헌절입니다. 제대로 된 <세월호 특별법> 통과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저는 그들과 교감하면서 그들 곁에 함께 있어줄 것입니다.”

국기란 무엇인가. 남들이 두려워하는 길을 가는 것이다. 양심이란 또 무엇인가. 내부에 깃는 명예이다. 이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자는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 양심의 불꽃을 쉽게 꺼트리지 않는다. 정동영 그를 다시 보게 된다.

박정례/ 기자, 르포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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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6 09:10 2014/07/16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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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팽목항’,, 세월호 도보순례단 마지막 추모제

                               -‘16박17일 동안 노란 깃발에 11명의 실종자 이름 새기고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오늘 진도 팽목항에서 추모제가 있었다. 팽목항에서 열린 이날(12일 6시) 추모제는 ‘시민행동 가만히 있지 않겠다’에서 세월호 침몰사고 희생자와 실종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유가족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전국 도보순례단을 꾸린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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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을 향한 도보순례단은 지난 달 26일 저녁 7시 30분 서울 대한문에서 약 1000여명의 인원이 참석하여 발대식 겸 출정식을 가졌다. 이들은 각각 서울, 안산, 대구, 부산 등지에서 출발하여 16박 17일의 여정 끝에 팽목항에 다다랐다.

순례단 단장 이동인씨는 출정식에서 "엄마 품을 찾고 있을 어린 별들을 찾으러 간다, 구조를 기다리는 "한 걸음 한 걸음 가는 길마다 세월호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서러움과 슬픔을 새기면서 분노하면서 가겠다."는 말로 참석자들 앞에서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이들의 일정은 출정식 다음 날인 6.27일에 안산합동분향소를 찾아 분향을 한데 이어 닷새 만에 대전에 도착하여 제1차 추모제를 가졌다. 다시 열하루 만인 7일 오후 2시께는 광주 서구 5·18공원에 집결을 하였다. 도보순례단은 곧바로 광주 동구 금남로로 이동해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활동을 벌여나갔으며 오후 7시 경에는 금남공원에서 추모문화제에 참석하는 것으로 광주 일정을 마쳤다.

2시간가량 진행된 광주 추모문화제에서는 세월호 침몰사고 유가족 20여 명과 '세월호 3년 상(喪)을 치르는 광주시민상주모임' 등 광주시민 100여 명이 모였다. 도보순례단, 시민상주, 광주시민은 유가족을 향해 "힘내세요!"라고 소리쳤고, 유가족은 이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고맙다는 답례를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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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의 발언내용을 보면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할게. 사랑한다! '반짝이는 별들'에게라는 메시지를 전하는가 하면 ‘미안하고 보고 싶어서, 아직도 못 온 아이들 손잡고 걸어서 떠납니다. 사랑합니다.’ ‘하늘에서는 별과 같이 빛나길. 가만히 있지 않을게.’ 등의 위로가 주룰 이뤘다.

이후 세월호 도보순례단들은 오늘 7월 12일인 토요일 오후 6시에 팽목항에 도착하게 된다. 기착지인 팽목항에서 마지막 추모제를 거행하기 위해서였다. 이날은 특히 아직 돌아오지 못하는 11사람의 실종자들인 조은화, 윤민지, 허다윤, 황지현, 남현철, 광영희, 안중근, 윤희나 선생님, 양승진 선생님, 고창석 선생님 등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들이 속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길 빌었다.

도보 순례 객들의 손에는 ‘별들과의 동행’이라고 쓴 대형 펼침막과 실종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11개의 노란 깃발이 들려 있었다. 이들의 도착과 함께 팽목항에는 다시 노란깃발이 펄럭였다. 실종자의 이름을 한사람씩 부르면서 남은 실종자들이 어서 가족의 품에 돌아올 수 있도록 염원하는 사람들의 절규 때문이었다.

늦은 밤이 되었다. 순례단은 진도체육관으로 이동하였고, 남아 있는 실종자 가족들과 조우를 하기 위해서였다. 순례단은 이곳에서 해단 식을 하며 16박17일 동안 팽목항을 향한 긴 여정을 끝마치고 있었다.

그런데 세월호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든가’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잊지 말아 달라!”였다. 이는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철저한 원인조사와 대책 마련이 없는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망각증세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다. 벌써 세월호 참사가 잊혀지는 분위기다. 정부당국의 관심이 썰렁하다. 대충 끝내려는 빛이 역력하다. 팽목항을 찾던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갔을까. 그 많던 유명 정치인들은 다 어디 있을까.

한 시민단체에서 주관한, 16박17일이라는 긴 도보여행의 끝이자 마지막 추모제가 열리는 날이다. 하기에 언론의 관심은 물론 책임 있는 정치가나 정부관계자들이 얼굴을 내밀 법도 한 곳이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랬다.

헌데 유독 정동영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한 사람이 눈에 띌 뿐이었다. 그는 왜 그처럼 긴 시간을 도보순례단과 함께 팽목항을 헤매고 있을까. 늦은 밤 왜 혼자서 남은 실종자 가족들 곁을 지키고 있을까.

 

*박정례/ 기자, 르포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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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4 08:22 2014/07/14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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