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침에 추위에 깨서 파카를 입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아침에 세명이 나가고 이제 넓은 방에 호주인 클린턴과 나 둘이다. 자리를 저쪽 구석으로 옮기고 이불도 두개 끌어다 놓았다. 면도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쌀국수를 사먹고 야체만두도 사먹고 등산용 깔판을 살려고 둘러보는데 어떤건 무겁고 어떤건 비싸다. 그냥 좀 자보자.

 

2.

큰 슈퍼에 들렀다. 중국은 과일을 그대로 말린 과자가 많다. 당도가 아주 높다. 오랜지와 복숭아 절임을 샀다. 600미리에 2.2원하는 야체주스와 1원짜리 오랜지 주스를 샀다. 중국 주스는 잘못사면 물에 가루탄 맛이 난다. 한 번 쓸 것이 남아있는 하이타이 작은 거 한 봉지와 치약을 샀다. 안내하는 아줌마가 적당한 걸 골라준다. 골라주는걸 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포테토칩하나 해서 모두 13원이 나왔다. 쇼핑은 재미가 있다.

 

3.

오늘은 어디 돌아다니지 말자. 숙소에 들어와서 인터넷을 시작했다. 이제 중국관련 책들은 조만간 서울로 부쳐야 한다. 가지고 온 진순신의 중국문화기행을 그냥 떠나보내기 아쉬워 의미있다고 생각되는 문장을 블로그에 남기기로 했다. 일기도 쓰고 책 발췌도 하고 오후시간이 흘러간다. 어제 지갑 분실의 악몽에서 벗어나 대책을 세우고 있는 한국친구와도 옆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4.

저녁이 되어 한국인 2, 호주인1, 뉴질랜드 커플 이렇게 다섯이서 숙소 근처 식당으로 갔다. 내가 꿍바오지딩(닭고기 야체 볶음)과 마파두부를 시키고 호주친구가 가지요리를 시켰다. 호주에서도 가지요리를 잘 먹는다 한다. 그리고 뉴질랜드 친구가 소고기 고추 볶음을 시켰다. 맥주 한 병씩을 시켜 먹기 시작했다. 뉴질랜드 커플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란다. 내가 최근에 잡지만드는 일을 했다고 하니 묻는다. 레프트나 라이트냐? 레프트라고 하니 또 묻는다 부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여기 싼 게스트하우스에 묵는 사람치고 레프트 아닌 사람이 없을 거 같다.

 

5.

호주는 3년마다 대통령인지 수상인지를 뽑는데 90년대 후반부터 한 사람이 계속 해먹고 있단다. 호주인 클린턴 말로 아주 별로 란다. 전에 말지에 정성일씨가 미국 좌파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에 대한 일화를 쓴 것이 기억에 남는다. 마이클 무어가 칸느에서 뭔 상을 받게되어 수상소감을 얘기했단다. 그 특유의 유머로 부시를 비판할때 유럽사람들 박수를 치며 동감했단다. 마이클 무어가 마지막 한마디를 했는데 너희들도 똑같다라고 했다나... . 하여튼 누가 말은 못하나?

 

6.

유럽식으로 돈을 나눠서냈다. 이런건 부담도 없고 참 편하다. 그런데 한국같이 좀 엉기는 맛은 없다. 숙소 라운지로 와서 한 잔씩 더 했다. 프랑스 여자가 합세했다. 최근 한국에서 잘 팔리는 프랑스 소설 작가, 아멜리 노통 얘기를 했더니 자긴 싫어한단다. 투신자살한 프랑스 철학자 질르 들뢰즈는 모른단다. 다른 사람들도 모른단다. 요즘 한국 철학계에서만 좀 인기인가 보다. 그렇게 그렇게 대화가 흘러갔다. 호주친구가 홍명보를 좋아한단다. 호주친구 아까 대화할때 내가 10대때 에어서플라이, ACDC를 들었다하니 나보고 몇 살이냐고 묻는다. 헤비메틀 오 리얼리?하며 장난끼 어린 표정이 마음에 든다. 내가 호주의 역사를 물으니 200년이 되었단다. 영국과의 관계에서 호주의 정체성을 물으니, 단호하게 있다고 한다. 자긴 영국을 싫어한단다. 자기 조상은 스코트랜드, 아이리쉬, 영국계가 섞었단다. 그 피 때문일까? 아주 개방적인 마인드다. 유럽인 특유의 자만심도 보이지 않는다. 두 뉴질랜드 커플도 스타일이 굿이다. 자연에서 오는 것도 있을 거 같다. 유러피안과는 다른 특성들이 좋게 느껴진다.

 

7.

좀 있다가 대화에서 슬그머니 빠져 인터넷을 했다. 영어권 사람들이 신나게 대화를 이어나간다. 이곳 다리는 시간이 슬금슬금 잘 지나간다. 내일은 산에 오르리라.

 

 

* 050122 (토) 여행58일차

 

(잠) MCA빈관 1950원 (15원)

(식사) 아침 쌀국수, 야체만두 650원 (5원)

          저녁 중국음식 2600원 (20원)

(간식) 슈퍼 생필품, 먹을것들 1690원 (13원)

 

............................................ 총 6,89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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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6 18:41 2005/01/26 18:41

1.

새벽에 방에 사람들이 들이닥친다. 아침에 일어나 인사를 하니 한국 복학생들이다. 그중 한 친구가 베이징에서 공부를 하고 있단다. 내 숙소 창문으로 바라보이는 정원 풍경이 멋지다. 박들이 탐스럽게 열려있다. 체크아웃을 했다. 주인이 어느쪽으로 가냐고 묻는다. 그냥 내려가서 생각 좀 해보고 결정한다고 했다. NO3주인은 내가 아는 을지로의 노동시인과 너무나 닮았다. 처음 인사할때 내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라고 하니 그냥 이렇게 삽니다라고 대답할때 약간 수줍어 하는 것 부터 화낼때 톤이 올라가면서 나오는 목소리까지... . 세상에는 닮은 사람들이 있다.

 

2.

어제 먹었던 쌀국수 집에 갔다. 맛이 어제만 못하다. 맥주도 첫잔을 목으로 넘길때의 맛이 최고다. 새로운 숙소인 MCA쪽으로 걸어갔다. 중간에 즉석만두집에서 하나를 사먹었다. 체크인을 했다. 5일치 도미토리 비용을 지불했다. 영어를 잘 하는 직원과 몇 마디 나눴다. 한국여자들이 이쁘단다. 내가 반론을 폈다. 코리안걸 메이크업 뷰티, 차이나걸 내츄럴 뷰티. 이 말은 듣기 좋으라고 한 말도 있지만 사실도 있다. 자전거를 즐겨 타고 몸을 잘 움직이는 중국여자들에게 풍겨나오는 건강미는 보기 좋다.

 

다리 삼탑사 입장권

 

3.

드디어 날씨가 풀렸다. 오늘은 큰 세개의 탑이 있는 사원으로 가보자. 고성의 윗쪽길로 접어들었다. 큰 호떡을 하나 사먹으면서 걸었다. 사원에 도착했다. 아침에 만났던 방친구들이 자전거를 타고 온다. 사진을 찍어주었다. 이 곳의 입장료가 52원이다. 하루 잠 자는데 15원인데 52원이라 그래도 볼 건 봐야된다. 탑과 사원이 공간은 아주 넓다. 이 곳에서 바라보는 얼하이우의 풍경은 군더더기 없이 꽉 찬 맛이있다. 그런데 여긴 불경소리가 안들린다. 맨 위까지 가보니 절 공사를 하고 있다. 그쪽을 갈 수 가 없다. 대형불상이 있는 당의 안내문에는 이곳이 문화대혁명때 없어졌다가 1997년 복원되었다고 나온다. 절은 오래될 수록 맛인데 여긴 새로만든 티가 난다.

 

4.

출구로 나오는데 한 마차주인이 애처로운 눈으로 날 쳐다보며 다가온다. 마차를 타란다. 고성까지 별 거리도 아닌데, 얼마냐 물으니 5원이란다. 좋다했다. 여기저기에 손님을 기다리는 마차들이 있다. 얼마안가 고성입구에서 내렸다. 치즈빵에 시럽을 입혀 둘둘 말아 꼬치에 껴주는 전통과자를 하나 사 먹었다. 고성안에도 작은 시장이 몇 개있다. 이쪽 시장골목에는 큰 도가니에 술을 담궈 팔고 있었다. 0.5원부터 1.5원 3원까지 여러 종류의 술인가 보다. 저걸 한 번씩 맛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할려면 술여행이 되버린다.

 

5.

물 한통을 사고 숙소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세탁기를 돌렸다. 수동 분리형 세탁기이고 물 호수가 빠져 잡고 있어야 된다. 이곳 게스트하우스의 라운지는 근사하다. 인터넷도 여러대가 있다. 쓰기는 안된다. 검색을 좀 하다. 옆에 붙어있는 레스토랑에서 소고기카레라이스를 시켰다. 값도 적당하다. 음식이 나오는데 아주 푸짐하다. 파오차이를 달라해서 같이 먹고 있는데 아까 인사한 호주 친구가 들어온다. 이름이 크린턴이다. 멜버른에 산단다. 고등학교 역사 선생이란다. 그가 CD한장을 들고왔다. 투 러브 어쩌구 하는데 알고보니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CD이다. 장만옥을 좋아한단다. 서로 취향이 통하는군. 

 

6.

장만옥은 한 40대 중반 쯤, 50 가까이되었을까? 어떻게 나이를 먹어야 되는지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장만옥에게서 풍긴다. 몇년전 술자리에서 각자의 3대 트로이카에 대한 수다를 떤 적이있다. 난 그때 이보희, 배종옥, 강성연을 얘기한 적이 있다. 이보희는 고등학교때 영동사거리의 2류극장에서 본 바보선언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중학교때 애마부인 시리즈가 힛트를 쳐 부산 사상의 신영극장에서 상영될때 난 안 갔는데 하여튼 수십명이 보다 걸렸다. 한 몇주 동안 걸린 친구들은 애마부인 본 애, 그렇게 좋더냐라고 선생님에게 놀림을 당했다. 그 이후에도 뼈와 살이 타고, 서울에서 탱고를 추고, 그랬는데 이보희는 그런 육감적인 몸매가 전혀 아닌 캐릭터였다. 배종옥에게서는 내가 한때 열광했던 노희경 극본 드라마 거짓말에서 보인 절제된 사랑속의 열정같은 것을 좋아했다. 그 드라마는 소유욕을 기초로한 전통적인 삼각관계와는 약간 다른 뉘앙스를 풍겼다. 물론 그 드라마는 해피앤딩으로 끝났다. 강성연은 어떤 드라마인지는 모르지만 좀 강한 여성상이 인상에 남았다. 이 세명 다 지금은 좀 아쉽다. 이보희는 드라마에서 푼수 아줌마로, 배종옥도 드라마로 너무 굳어지고, 강성연은 지금 어디가 있는지 모른다.

 

7.

하여튼 장만옥은 아직 뭔가를 유지하고 있다. 아니 나이 들수록 매력이 더해간다. 내가 화양연화보다가 졸았다고 하니 그가 놀란다. 오 리얼리? 그때 좀 피곤했었다-아임 소 타이어드- 고 변명을 했다. 내가 영화를 보다 조는 사람이 아닌데 하여튼 졸았다. 7번 트랙인가 유명한 노래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 가 나온다. 클린턴이 어깨를 들썩인다. 음 이 레스토랑의 분위기와 노래가 잘 어울린다.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 .

 

8.

한대의 컴이 한글쓰기가 된다. 또 밀린 일기를 치고 있는데 전인권 머리 스타일의 한 한국남자가 부산히 이곳 사장과 대화를 한다. 뭔 문제가 있나보다. 지갑을 잃어버렸단다. 거기에 모든게 다 들어있단다. 밥을 먹었나고 물으니 안 먹었단다. 200원을 빌려주었다. 나도 앞으로 이런일을 당할지 모른다. 방으로 들어왔는데 저쪽 편에 두 여자가 있다. 스웨덴에서 왔고 학생이란다. 내일 숙소를 옮긴단다. 각각 생명공학, 군사학을 공부한단다. 군사학이라 호기심이 생기는데 숙소직원이 온다. 한국사람이 나를 찾는단다.

 

9.

알고보니 부산사람이고 나와 생일이 몇개월 차이가 난다. 사진을 찍는 일을 한다고 한다. 맥주 한잔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한국인 커플이 온다. 그 남자도 여행을 많이 다녔나 보다. 조근조근 자기의 경험을 늘어놓는다. 이제 좀 자야겠다. 방으로 들어갔다. 아까 선심으로 일본남자에게 두꺼운 이불을 주고 이제 얇은 이불밖에 없다. 따뜻하다던 윈난, 왜 이리 춥나? 안되겠다. 파카를 덮고 솜바지를 입고 잤다. 밤새 뒤척였다.

 

 

* 050121 (금) 여행 57일차

 

(잠) 다리 MCA게스트하우스 7인 도미토리  1950원 (15원) 

(식사) 아침 쌀국수 260원 (2원)

          점심 비프카레라이스 1560원 (12원)

(이동)  마차 650원 (5원)

(입장) 세 개의 탑 사원 입장료 6760원 (52원)

(간식) 즉석야체만두 130원 (1원)

         계란 160원 (1.2원)

         치즈빵시럽 260원 (2원)

          물 130원 (1원)

          물 1.5L 230원 (1.8원)

(기타) 어머니에게 부칠 윈난성 사진집  10140원  (78원)

          한국여행자에게 빌려줌 26000원 (200원)-- 돌려받음 26일

 

......................................................... 총 22,23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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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5 15:19 2005/01/25 15:19

다리고성. 중국발음으로 다리구청이다

 

1.

오늘도 새벽에 사람들 들어오는 꿍꽝소리에 잠을 깼다. 역시 오래 묵을 곳은 못된다. 오늘 다른 곳을 알아보리라. 좀 더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보다 비가 더 온다. 가이드들도 조금 당황한다. 오늘마저도 방에 쳐박혀 있을 수는 없다. 우산도 안가지고 모자만 쓰고 밖으로 나갔다. 우선 멀좀 먹어야 겠다. 죽 내려가서 사람이 많은 국수집으로 들어갔다. 옆테이블에서 먹고있는 걸 달라했다. 국수가 나온다. 면발이 환상이다. 쌀떡볶이 같이 아주 찐득하지도 않고 밀가루 떡볶이 같이 미끈하지도 않은 절묘한 중간 맛이다.  

 

2.

조금 힘이 난다. 조금더 밑으로 내려가니 즉석 만두노점이 있다. 밀가루를 둥그렇게 숫불에 부치고 양념과 파오차이를 넣어 말아준다. 기름이 안 들어가 좋다. 계속 먹어야 겠다. 나온김에 걸어서 얼하이호수까지 가보자. 고성을 빠져나갔다. 차길을 넘어 논길을 걸었다. 바람이 세고 비가 내린다. 하지만 얼하이호수 위 하늘은 맑다. 호수 앞 동네 골목으로 들어갔다. 한 집에 상을 당했는지 잔치를 하는 지 사람들이 모여있다. 들어가 구경하고 싶었지만 안좋은 일일 경우 좀 그래서 지나쳤다. 저기 호수가로 가는 조금 큰 길이 보인다. 호수가에 다다르는데 한 중국 사람이 헬로우한다. 자기 배를 타란다. 한시간에 30원이란다.

 

3.

배를 탔다. 배는 수풀을 헤치고 호수가로 나갔다. 이 배 주인 이름은 뚜레첸이란다. 나이는 44살이고 두 딸이 있단다. 어제는 여섯명의 서양인을 태우고 맞은 편 섬 사원까지 갔단다. 동력없이 손으로 노를 저으며 6명을 나르는 일이 쉽지 않아 보인다. 이 얼하이호수는 그 넓이가 250제곱킬로미터란다. 하여튼 넓다. 1미터가 넘는 물고기도 잡힌단다. 섬 쪽의 맑은 하늘을 쳐다보며 가는데 먹구름이 점점 세력을 확장한다. 비가 세차고 물결이 거칠어진다. 원래 코스는 좀 더 가서 돌아오는데 바로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갈때는 좀 더 호수 중간으로 가자고 했다. 마치 물결이 파도처럼 넘실댄다. 이 배에는 아무런 안전장비가 없기에 노를 조심스럽게 저으며 물결을 탄다. 중간의 깊이는 한 20미터 정도란다.

 

4.

배를 탔던 곳에 도착했다. 그의 딸이 나와서 뭐라고 한다. 돈을 지불하고 인사를 하고 다시 고성쪽으로 걸었다. 내가 걸어가는 지점이 먹구름과 맑은 하늘이 대결하는 그 위치다. 맑은 하늘쪽이 힘이 강해보이다가도 어느덧 구름이 세력을 넓힌다. 비가 그칠 상황이 아니다. 고성으로 들어와서 다리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작고 아담한 박물관이다. 특히 2층이 연작인형시리즈가 눈에 들어온다. 15세기경에 만들었는데 인형 하나하나의 손놀림 몸놀림이 아주 생동적이다.

 

5.

다른 숙소를 찾아갔다. 고성 바로 밖에 있는 MCA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갔다. 시설이 괜찮다. 영어를 잘 쓰는 중국인 직원이 안내를 한다. 싱글룸을 보여달라 했더니 2층으로 안내하는데 100원인데 60원에 해주겠단다. 60원은 너무 비싸다. 도미토리룸을 보여달랬더니 이 친구 별로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다. 하여튼 도미토리룸을 보았는데 그동안 묵었던 도미토리 중 최고의 시설이다. 퀸사이즈 매트가 7개가 놓여있는 넓은 방이다. 오늘은 체크아웃시간이 지나버려 NO3에서 묵고 내일 여기오리라.

 

6.

비가 그치지 않는다. 라운지에서 조금 있다가 길을 나섰다. 또 다른 즉석 만두 집이다. 여긴 재료는 비슷한데 초승달 모양의 만두를 빚어 굽는 방식이다. 구워진 안의 소스맛이 더 살아있다. 크기는 저집보다 좀 작지만 이집이 맛은 더 있다. 지나갈때마다 사먹어야 겠다. 숙소에 돌아오니 페키지 여행객들이 들어와있다. 다들 비를 맞았나 보다. 오늘 밤 쿤밍행 기차를 탄단다. 가이드가 기차 좌석표를 미리 배정하고 있다. 이쪽 4자리는 선생님 네 분... . 다시 나와서 중국 식당에 3일째 갔다. 야체탕을 시켜 밥과 먹었는데 밍밍한 맛이다. 식당을 나와 거리를 걸었다. 한 왕빠에 들어갔는데 윈도우 XP컴이 한대있다. 제어판을 암호처리해서 그냥 한글 읽기만 했다.

 

7.

숙소에 돌아오니 가이드들 출발했나보다. 오늘밤은 4인실에서 혼자자게 되었다. 내일은 날이 맑아야 할텐데... .

 

 

 

* 050120 (목) 여행56일차

 

(잠) NO3 2600원 (20원)

(식사) 아침 원난식쌀국수 260원 (2원)

          저녁 야체탕 2080원 (16원)

(이동)  얼하이우 배 3900원 (30원)

(입장)  다리박물관 650원 (5원)

(간식)  즉석군만두 2개 260원 (2원)

           빵 160원 (1.2원)

(기타) 왕빠 330원 (2.5원)

 

...................................... 총 10,24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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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4 15:13 2005/01/24 15:13

1.

물을 갈아서 그런지 배탈이 났다. 새벽에 한국사람들이 들이닥친다. 쿤밍에서 밤기차를 타면 이곳에 도착하는 시간이다. 이 곳 오래있을 곳은 아니다. 끼리끼리 오는 대학생 친구들하고 대화하기도 그렇고 여기있으면 더 외로워진다. 이곳은 보통 하루이틀 정도 머물고 위쪽 리장으로 가는 여행자들이 대부분이다. 아침에 십여명되는 페케지 여행자들이 들어왔다. 가이드 남자가 둘이다.

 

2.

날씨가 춥다. 식당의 난로가에 앉았다. 어제 호도협에서산 호두를 먹으며 기행문을 읽었다. 책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 춥다. 방으로 들어가야 겠다. 이쪽 윈난성은 난방이란 개념이 없는 것 같다. 전기장판을 5원에 빌렸다. 숙소로 들어갔다. 가이드 둘이 아침에 체크아웃한 체코중국학생자리에 들어왔다. 한 친구는 부산사투리를 쓴다. 전기장판을 깔고 앉아있는데 열기가 안 느껴진다. 다시 가져가서 안된다고 하니 이리저리 찾아보더니 지금은 없단다. 가이드 들이 신경을 써 준다. 다른 전기장판을 가져왔다. 이제야 좀 따뜻하다. 따뜻한 기운에 잠이 들었다.

 

3.

일어나니 3시가 넘어간다. 날씨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굳은 날씨다. 같은 방의 가이드가 어디 아프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했다. 아직 밥도 안먹어서 그런지 몸이 쳐저있다. 방에 앉아서 쉬고 있다가 저녁을 먹으러 갔다. 어제 갔던 그 중국인 식당에서 쇠고기 철판요리를 먹었다. 고기가 좀 얇아 씹히는 맛이 덜하다. 어쨌든 먹으니 좀 생기가 돈다. 밥을 먹고 나와 고성중심가로 들어서는데 발안마 해주는 상점이 보인다. 그래 한번 받아보자. 들어가서 가격을 물으니 한 시간에 40원이란다. 아니 계림에서는 25원한다고 알고 있다고 하니 여긴 다 40원이란다. 전신안마도 40원이란다. 여기저기 누르면 아픈 곳이 있는데 이왕이면 전신안마를 받자. 2층으로 올라오란다.

 

4.

안마사는 작은 체구의 인도 남자였다. 인사를 하고 여러 배드중 하나로 가서 점퍼만 벗고 누웠다. 사람의 몸 전체의 혈이 299개인가, 하여튼 이 친구 나의 뒷판의 머리부터 눌러 나간다. 체면에 아프다고 소리지를 수도 없다. 아픈곳은 뭐가 뭉쳐있는 곳이다. 아픈곳을 더 눌러 푸는게 안마다. 하여튼 무지 아프다. 점점 시원한 느낌도 든다. 몸의 뒷판을 발까지 다 했다. 이젠 앞으로 누우란다. 급소를 제외한 부분을 또 샅샅이 눌러나간다. 그리고 서서 허리를 굽히고 누르고 다리를 꺾고 머리를 위로 당기고... . 안마해주는데 성의가 느껴진다. 안마사라는 직업도 쉬운 직업이 아니다. 몸의 혈을 파악하고 누르는 기술부터 힘까지 모든 것이 요구된다. 한 시간 남짓 안마가 끝났다. 그 성의에 고마워서 5원을 주었다. 인도남자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민다.

 

5.

그동안 중국 도시의 밤거리를 걸을때마다 마사지 받으라는 끈질긴 제안을 뿌리치곤 했다. 베이징에서는 한 여자가 근 100이상을 계속 따라오면서 받으라 했었다. 그건 아마 여성이 해주는 안마일 것이다. 여성이 해준다고 다 불건전한것은 아닐 것이다. 당면한 문제는 무엇을 파느냐이다. 건강을 파느냐 성을 파느냐? 여하튼 난 오늘 인도 남성에게서 정통건전건강안마를 받았다. 안마소를 나오는데 몸이 가뿐해진 느낌이다. 그 인도 안마나 나에게 명함을 건낸다. 그는 40원중에 얼마를 받을까?

 

6.

다리 고성을 걸었다. 여기도 리장의 쇼핑가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2층으로된 큰 슈퍼에 들어갔다. 할인하는 토마토 주스, 리츠 크랙커, 미니휴지, 비빔사발면, 꽈베기 빵을 샀다. 역시 먹어야 한다. 우울할때 과식한다는 것은 꼭 나쁜것은 아니다. 먹으면서 잇몸운동을 하면서 영양분을 보충하며 우울함을 날려보내는 것도 한 방법이다. NO3컴은 고장이 나있다. 찾아간 왕빠들은 한글을 읽을 수가 없다. 영어책들이 있는 서점에 들렸다. 캄보디아. 태국 영문 론리플래닛이 있다. 베트남 호지민에 가서 사면 된다. 괜히 짐을 늘리지 말자.

 

7.

숙소 식당에는 페키지 여행자들이 술을 먹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한 가이드가 책을 보고 있다. 조금 있으니 형뻘 되는 가이드가 술에 좀 얼큰해져 들어온다. 동생뻘 가이드가 말한다. 도저히 그 분위기에 못있겠더라. 이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기분상태인가 보다. 그쪽도 15박의 여행 마무리 시기이다. 나도 중국을 마무리 하는 시점이다. 여행 가이드 한다면 모르는사람들은 여행도 하면서 돈도 벌고 참 좋겠다고 말할 것이다. 실제 그 여행과정에서 사람들 이끌면서 때때로 비위도 맞출려면 이 직업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다. 나도 그 동안 활동하면서 넌 너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서 좋겠다는 말을 듣곤 했다. 물론 사실이다. 내가 하고싶은 일이다. 하지만 이 일도 정말 하고 싶은 일로 유지하고 만들기 위해서는 만만치 않은 노력과 감내가 필요하다. 간혹 활동가의 의지를 넘어서는 고통스런 일들이 다가오기도 한다. 그동안 나에게는 앞으로는... .  모를일이다. 

 

8.

이럴때는 전기장판이 친구다. 뜨끈하다. 아니 뜨거울 정도다. 내일은 날씨가 맑아야 할텐데... .

 

 

* 050119 (수) 여행 55일차

 

(잠) 다리 NO3 전기장판포함 2600원 (20원)

(식사) 저녁 쇠고기철판, 야체볶음 2600원 (20원)

(간식) 슈퍼 주전벌이 소모품  1660원 (13.6원)

(기타) 전신안마 5850원 (45원)

 

.......................................... 총 12,71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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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4 14:05 2005/01/24 14:05

호랑이가 단숨에 건넜다는 호도협 입장권

 

1.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났다. 세면을 하고 8시경 주인방 앞으로 갔다. 콜랙트 콜을 해주겠다던 주인은 겨우 일어난다. 한국에서 가져온 노가다용 목장갑 두개를 주었다. 그리고 다시 만나자고 했다. 1번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갔다. 후타오샤가는 버스는 리장 버스 중간에 내리면 된다. 올라가서 아무자리나 앉았다. 나중에 서양인과 중국인으로 이루어진 3명의 여행객이 올라와 자기 자리란다. 자기들끼리만 앉으면 어디 여행인가? 좀 중국인들하고도 껴서 안고 몸짓으로 대화도 하고 해야 맛이지. 여행은 우연이다. 내 좌석번호인 10번에 앉았다. 30인승 이베코 버스라 간격이 좁아서 다리가 들어가지 않는다. 다리를 대각선으로 내놓다가 겨우 끼어서 넣다가를 반복했다.

 

2.

내려가는 버스에서 바라보는 설산들의 풍경은 또 근사하다. 상그릴라는 꼭 다시 와보고 싶은 곳이다. 상그릴라에서 티벳으로... . 버스는 호도협(후타오샤)에 도착했다. 자기차를 타라고 여러명이 따라 붙는다. 호도협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가는 10원짜리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보이지가 않는다. 버스가 없단다. 봉고차 가격을 물으니 80원을 부른다. 일단 주변을 돌아보자. 한 젊은 친구가 영어를 쓰며 계속 따라온다. 60원이란다. 일단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밥을 먹기로 했다. 그 젊은 중국인 차가 주차해있는 바로 옆 식당이다.

 

3.

식당에서 차오판(볶음밥)을 주문했다. 냉장고 쪽으로 와보란다. 볶음밥 종류도 가지가지다. 계란을 가리킨다. 싫다고 했다. 고기를 가리킨다. 싫다고 했다. 야채들을 가리켰다. 저거. 야체볶음밥 먹을 만 했다. 중국을 보통 음식에 기름이 떡이다. 조금 덜 넣으면 좋으련만. 운전사에게 50원에 가자고 했다. 그가 60원에는 입장료 30원이 포함되어있다고 버틴다. 몇번 실강이 끝에 내가 55원을 불렀다. 그가 오케이한다. 12시가 다 되어 봉고차에 탔다.

 

4.

가는데 30분, 전망대에서 한시간, 오는데 30분 총 2시간 코스란다. 이 코스에서는 5500미터 대의 위룽설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친구 나이가 21살이다. 독학으로 영어를 배웠단다. 이곳에서 태어나 살아왔단다. 차에서 바라본 위룽설산의 모습은 정말 웅장하다. 저길 한 번 올라가 주어야 하는데... . 앞으로 북부인도의 히말라야, 네팔도 내 코스에 있다.  

 

5.

타이거 무슨 포인트에 도착했다. 이 계곡을 호랑이가 단숨에 뛰어넘었단다. 그래서 이름이 호도협이다. 티벳 서쪽 곤륜산맥의 빙하가 언 물이 티벳을 거쳐 이곳에서 자기 이름을 얻었다. 이곳이 내가 3일동안 배를 탔던 장강삼협의 시작 부분이다. 길고긴 장강의 시작이다. 이 물이 상하이로 해서 바다로 빠져나간다.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깊은 계곡이라고 이름을 갖다 붙이는 곳이 바로 이곳 후타오샤이다. 계곡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운전사 친구 계단을 내려가 계곡물을 감상하고 오란다.  

 

6.

계단을 내려갔다. 서서히 물결이 보이기 시작한다. 계곡이 깊기는 깊다. 난 아래쪽 차길로 왔는데 높은 도보로 걸으면서 보면 더 깊어보이기는 할 거 같다. 유명한 이곳의 트랙킹 코스는 1박 2일이나 2박 3일을 잡아야 한다. 거의 내려가는 데 안장이 있는 소 한마리가 보이고 꼬마 남녀아이가 있다. 날 보더니 바삐 소를 계곡쪽으로 끌어온다. 계곡 난간에 도착했다. 계곡물을 보고 있는데 전통복장을 차려입은 한 7살쯤 되어보이는 여자아이가 와서 슬픈표정을 지으며 머라한다. 남자아이도 와서 있는데로 미소를 지으며 소를 타라한다. 얼마냐 물으니 5원이란다. 하오하니 내 손을 잡고 나를 소 있는데로 끌고 간다. 소는 뿔이 그대로 나있지만 아주 순한 눈이다.

 

7.

소에 올라탔다. 생각보다 안정감이 있다. 아이는 소 고삐를 잡고 두 세 바뀌 돌더니 저 계단으로 올라갈까 하고 묻는다. 가자고 하니 소를 끌고 계단을 올라가 전망 난간 끝까지 소를 끈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오고 내렸다. 5원을 주려고 하자 10원이란다. 내가 아까 5원이라고 하지 않았니라 하자 저기까지 갔다 왔기 때문에 10원이란다. 이 아이의 돈 버는 방법같다. 아이하고 계속 실강이 할 수 없어 10원을 주고 나왔다. 물결이 가장 쎈 전망대로 왔다. 여기가 타이거 포인트인가 보다. 겨울이어서 물이 많이 줄었음에도 물결은 포효하듯하다. 이물이 충칭에서 다른 강줄기와 만나 커져 삼협을 굽이치고 상해로 빠져나간다. 한참을 쳐다보고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멀리있는 그 소모는 아이들과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조금 올라가니 깐 호두를 팔고 있다. 한 봉지에 10원인데 난 5원어치 달라고 말했는데 이 아줌마 깎는 줄 알았나 보다. 그냥 5원에 가져가란다.

 

8.

계단을 올라오니 운전사 볼 만큼 보았냐고 묻는다. 내가 위룽설산 잘 보이는 곳에 잠깐 서자고 하나 알았단다. 가까이서 보는 5천미터대의 산이다. 겨울에는 한 둘 태우기 힘들단다. 하여튼 버스 내린 곳으로 와서 돈을 주었다. 약간 아쉬워하는 눈치인데 나도 줄만큼 준거다. 볶음밥 먹었던 곳에 앉아 다리가는 버스를 기다리면 된다. 맥주를 한 병 시켰는데 슈퍼에 사러가나보다. 그런데 버스가 왔다. 다리의 신도시인 사관으로 바로 가는 버스다. 언제 또 올지몰라 배낭을 매고 맥주 한 박스 들고 오는 식당종업원에게 미안하다하고 버스를 탔다.

 

9.

다리에 거의 도착해가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기분도 따라서 축축해진다. 터미널에 내려 다리고성가는 4번 버스를 탔다. 차는 다시 오던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한 그리스 학생이 같이 탔다. 같이 고성에 내려 몇마디 나누고 헤어졌다. 이 곳 다리에는 MO3라는 유명한 한국인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마당이 이쁘다는데 한 번 묵어보자. 물어물어 NO3를 찾아갔다. 문을 여니 한 열대여섯명의 한국 대학생들이 앉아있다. 여행중 이렇게 많이 한국사람을 만나기도 처음이다. 아주 쑥쓰럽다. 도미토리 방을 달라해서 방에 들어갔다. 완전한 집이 아니라 임시 가옥인 느낌이다. 원래 그런지 이날 따라 그런지 한국 대학생 팀들이 여렀이다.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10.

이곳 다리는 동양의 스위스라는 이름이 붙어있단다. 뒤의 높은 산과 앞의 시원한 얼하이 호수를 끼고 있다. 날씨도 아주 좋다는데 오늘은 아니다. 한 중국식당에 들어갔다. 주인 인상이 마음에 든다. 형은 바로 붙어있는 여행사를 하고 동생이 음식 주방장이다. 마파두부와 콩볶음을 먹었다. 형이 담근 매실주 한잔도 사서 마셨다. 내일 다시 오기로 했다.

 

11.

숙소에 돌아와서 앉아 있는데 4인실 도미토리의 세명이 들어온다. 중국어를 배우는 건지 영어를 배우는 건지 중국 청두 대학생 둘과 체코여자가 들어온다. 체코여자는 요피라느 체코이름의 강아지를 데리고 다닌다. 중국 대학생 영어를 곧잘한다. 나에게 중국어를 배우지 않겠냐고 묻는다. 이 중국학생의 영어발음은 너무나 듣기 어렵다. 체코 여자가 다시 말해준다. 중국대학생 한국인 학생을 만나나 보다. 나에게 계속 이 말의 한국 발음은 무었인지 물어본다. 한 12시까지 한시간동안 중국어 영어 한국어 기본 문장 배우기를 서로 했다. 아주 재미있어 하는 눈치다. 아마 임시가옥이라서 우리의 공부가 전 객실에 퍼져 소음이 되었을 것이다.

 

 

 

* 050118 (화) 여행54일차

 

(잠) 다리 한국인 여관 NO3  1950원 (15원)

(식사) 점심 야체볶음밥 650원 (5원)

         저녁 마파두부 콩볶음 1300원 (10원)

(이동 입장) 시내버스 2번 260원 (2원)

                중덴-후타오샤 버스 1950원 (15원)

                후타오샤 유람 봉고차(입장료 30원포함) 7150원 (55원)

               소 타기 1300원 (10원)

                후타오샤-다리 4550원 (35원)

(간식) 깐 호두 한봉지 650원 (5원)

         매실주 한잔 650원 (5원)

 

........................................... 총 20,41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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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4 10:40 2005/01/24 10:40

 

 

* 남경 - 천연의 요새

 

1.

지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남경에 와보면 절로 아 이곳은 정말 천연의 요새로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남경시는 중국 최대의 강인 양자강이 파양호 근처에서 북동으로 흘러 안휘성을 가로질러, 강소성으로 들어가, 동쪽으로 휘어지는 지점의 남동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양자강과 접해있는 북쪽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구릉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초보자가 보아도 천연의 요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당연히 옛날부터 이 지방은 중요한 거점이 되어왔다.

 

2.

옛날에는 남경에서 양자강을 건너려면 양자강 연안에서 출발하는 연락선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는데 해방 뒤에 남경장강대교가 만들어진 덕분에 기차를 타면 눈 깜짝할 사이에 양자강을 넘어갈 수 있다. 남경에서 포진까지 철로와 고속도로로 된 이중 다리가 완성된 것이다. 철도가 놓인 다리의 전체 길이는 6700여미터이고, 고속도로가 뻗은 다리의 길이는 4500미터에 이른다. 남경장강대교는 중국이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준 공사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특수강을 입수하는 것도 어려웠는데, 기술자와 노동자의 독창적인 생각으로 특수강 생산에 성공해 마침내 준공하게 되었다. 지금 이 다리는 남경의 새로운 상징이 되었다.

 

3.

1842년 8원 영국 함대는 양자강을 거술러올라가서 진강을 무너뜨렸다. 남경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신세가 되자, 청조도 의지가 꺾여 굴욕적인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것이 아편전쟁의 서막을 알린 남경조약이다. 그 당시에는 강녕조약이라 했다. 홍콩을 할양할 것, 다섯개 항(광주, 복주, 하문, 영파, 상해)을 개항할 것, 아편 배상금을 지불할 것, 실질적인 치외법권을 인정할 것, 군사비용을 배상할 것 등 영국이 일방적인 요구를 내세운 것이 이 조약이었다. 그렇지만 이 조약은 그 때부터 계속해서 맺어지게 될 불평등조약의 시작일 뿐이다.

 

4.

이렇게 해서 열강의 중국 침략이 시작되었다. 청조는 부패하고, 인민은 도탄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편전쟁 뒤에 전국의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인민이 살아가기 위한 궐기였다. 수많은 반란군 속에서 가장 크고, 가장 확실한 혁명이념을 가지고 일어난것이 태평천국이었다. 1851년 금전촌에서 굴기한 태평천국군은 무창을 공격하고 성난파도와 같이 세력을 몰아 양자강을 남하했다. 태평천국군이 남경을 장악한것은 1853년 3월 19일이었다. 태평천국은 이곳에 수도를 정하고 유명한 천조전무제도를 간행해 건국의 이상을 분명하게 밝혔다. 국가의 원수는 천왕인 홍수전이었다. 그리고 남경은 천경이라 바뀌었다.

 

5.

태평천국은 11년동안 남경을 유지했다. 강남 일대에 병사를 배치하고 각지의 기점을 확보했지만 북벌은 실패로 돌아갔다. 증극번의 상군, 이홍장의 화군, 골든의 외인부대에게 격렬하게 공격당하면서도 태평천국군은 몇 번이나 적에게 타격을 주었다. 증극번이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태평천국운동 진압에 실패해서 너무나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기도했던 일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6.

남경은 강남의 아름다운 산수에 둘러싸여 있다. 고도 남경을 찾은 사람들은 역사 속으로 자연스럽게 끌려든다. 역사는 흐르고, 아편전쟁으로 맺은 남경조약에서 태평천국 운동의 비극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우화대에 서면 슬픔은 극치에 달하게 된다. 그래도 사람들은 남경장강대교가 상징하는 미래를 향한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오른다. 남경은 기복이 많은 지형처럼, 역사도 수없이 기복을 겪은 곳이다. 여행자들은 남경을 찾으면 많은 것을 느끼게 되고 다시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 소주. 양주 - 물의도시, 정원의 도시

 

7.

소주는 오래 된 도시이며, 물의 도시라고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두보나 이백처럼 유명한 시인은 아니지만 당대에 시를 썼던 장계의 풍교야박이라는 시가 있다.

 

달은 지고 까마귀는 우는데 천지 가득 서리가 내리네

풍교에는 고깃배 등불 마주하여 시름 속에 졸고

고소성 바깥 한산사에

한밤중 종소리 울릴 제 객선이 닿았네

 

이 시에서 말하는 고소란 바로 소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당대에 이 지역의 장관을 지낸적이 있는 백거이는 이렇게 읊었다.

 

푸른 파도 동서남북의 물

묽은 난간 삼백 구십 개의 다리

 

8.

사람들이 지금 소주거리를 걷다보면 어쩐지 부드러운 인상을 받게 된다. 사람에 따라서는 소주를 여성적인 도시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19세기 초에 출판된 석계산인의 오문화방록은 청대의 명기전인데 소주는 미인의 고향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주의 단면이고, 그 이면에는 격렬한 저항정신과 강인한 생명력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9.

양주는 운하의 기점이며, 종점이기도 한 곳이다. 내륙 수로가 가장 좋은 운송방법이었던 시대에 양주가 번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수 양제는 대운하를 열고 이곳에 강도라는 지명을 붙였다. 수나라의 수도는 장안이었지만, 양제는 강도를 좋아해 이곳에 오랬동안 머물렀으며 반란이 일어나 우문화급에게 살해당한 곳도 양주였다.

 

 

* 상해 - 중국 근대사의 중심지

 

10.

당시 청조는 무역활동을 광주(광저우)에서만 하도록 제한했다. 청조의 중반까지는 그곳만으로도 괜찮았지만, 훨씬 전에 산업혁명의 세례를 받았던 영국은 이제까지의 비좁고 답답한 광주 무역에 만족할 수 없었다. 중국 전체를 상대로 장사하기에 광주는 너무 남쪽에 치우쳐 있었다. 영국은 만약 중국의 긴 해안선 중앙부에 좋은 항구가 있다면 그곳을 교역기지로 삼고 싶어했다. 1756년 영국 동인도 회사의 사원하나가 상해를 무역항으로 삼자고 제안했다. 회사는 상해를 조사해보고 그곳이 이상적인 항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청조는 원칙적으로 쇄국주의를 내세웠기 때문에 상해를 외국무역에 개방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외국무역은 광주의 13행이라는 특허상사가 담당했으며, 국가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청조의 태도였다. 영국은 어떻게 해서든지 청조와 직접 교섭하고 싶어했다.

 

11.

영국인 제독 파커가 원정 함대를 이끌고 북상하기 위해 홍콩을 출발한 것이 1842년 6월 6일의 일이었다. 같은 달 16일 이른 아침에 영국의 함대는 오송의 청군기지를 공격했다. 오송의 입구를 지키던 청군은 강남의 제독 진화성의 지휘아래 있었다. 그러나 진화성은 이미 70세가 넘은 노장군이었다. 진화성은 열심히 싸웠으나 화력에서 너무 큰 차이가 났다. 마침내 노장군 전화성은 장렬히 전사했다. 당시 사람들은 전사한 진화성 제독을 깊이 애도했다. 진제독의 영정을 안치하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영국군은 상해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입성했다. 그들은 부호들의 정원이나 사당을 병사들의 기지로 사용하고, 목상들을 때려부수어 취사용 연료로 썼다고 한다. 상해를 나온 영국 함대는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진강을 점령하여 포학의 극치에 달했다.

 

12.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날때 상해에서는 소도회가 궐기했다. 소도회란 일조으이 비밀결사 조직으로 삼합회이 한 분파였다. 회원은 단검을 차고, 붉은 천을 둘렀다. 1853년 9월 7일 상해의 소도회는 봉기를 일으켜 눈 깜짝할 사이에 현성을 점령했다. 회원 중에는 뱃사람, 상인, 직인이 많았으며 멸청복명, 탐관초멸을 표어로 내세웠다. 이 시대의 청조의 관리들이 얼마나 심하게 부패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으며, 소도회는 그것에 대한 반항이었다.

 

13.

상해의 예원안에는 점춘당이라는 건물이 있다. 소도회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진아람이 지휘한 사령부가 있는 곳이다. 상해 특별시 안에 있는 가정현은 당시의 격전지로 회룡담이라는 연못의 물이 피로 붉게 물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 연못 주변에 소도회의 혁명투쟁을 기린 혁명열사기념비가 서 있다. 상해 소도회의 싸움은 열강이 무력 간섭으로 청조를 도와주자 가까스로 진압되었다. 소도회사건을 계기로 열강은 조계를 독립국가로 만들었지만, 중국인민은 그것에 대항해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 저항의 전통이 상해를 지극히 혁명적인 땅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상해 전체가 혁명의 커다란 유적지라고 할 수 있다.

 

14.

소보사건은 20세기 들어와 일어났던 일이다. 상해에서 발행된 소보에는 반청적인 혁명문구가 자주 실렸다. 1903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추용이 혁명군이라는 혁명사상 선전 문장을 소보에 발표했고, 민족주의적 혁명지도자인 장태염이 그 서문을 썼다. 청조가 조계에서 이와 같은 반청적인 활동을 두려워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조계 경찰에게 장태염과 추용을 체포해달라고 의뢰했다. 조계의 주인인 열강도 중국에 혁명이 일어나면 단물을 빨수 없게 된다. 조계 경찰은 두 사람을 체포해 재판에 회부했다. 장태염은 3년, 추용은 2년 금고형을 받았다. 추용은 옥사했지만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1905년 4월 3일에 죽은 그의 나이는 겨우 21세였다. 장태염음 금고 3년뒤에 조계로부터 추방한다는 처분을 받고 출옥하는 날 일본으로 탈출했다. 그는 일본에서 쑨원의 동맹조직에 들어가 그 기관지 민보편집을 맡았다.

 

15.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상해에서 일어난 혁명적인 사건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외국인이 경영하는 공장이 늘어나 그런 곳에서 자주 쟁의가 발생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1925년 5월 30일에 일어났던 이른바 오주운동일 것이다. 이 운동에는 노동자 뿐만 아니라 학생 지식인도 참가했다. 남경로를 피로 물들였던 오주운동은 중국의 근대사에서 5.4운동과 같이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반제국주의 애국운동이었지만, 운동이 일어나자마자 중국공산당이 앞에서 지도했다.

 

16.

중국공산당의 탄생지는 바로 상해였다. 중국의 노동자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결합된 데는 역시 5.4운동의 힘이 가장 컸을 것이다. 5.4운동은 1919년에 일어나 계속 이어져 중국 곳곳에 작은 공산주이자 집단을 탄생시켰다. 그리하여 마침내 1921년 7월 1일 중국 전역의 공산주의자들이 대표12명을 파견해 상해에서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회의를 열었다. 각지 대표 중에는 마오쩌둥, 동필무, 진담추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그들은 여기서 중국공산당 강령을 통과시키고 중국공산당이 성립되었음을 선포했다. 그 장소는 상해의 흥업로76호로 현재는 혁명기념유적이 되었다.

 

17.

상해에는 문필의 힘으로 혁명을 추진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루쉰은 불멸의 빛을 발한다. 1936년 루쉰은 상해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지는 현재 홍구공원에 있다. 상해를 찾는 사람이라면 홍구공원 안에 있는 루쉰의 묘에 참배하리라. 그곳에선 느긋하게 허리를 굽힌 루쉰의 동상이 마치 부드러운 눈길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듯하다. 묘 앞에는 헌화가 끊이질 않는다.

 

 

 

* 항주 -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도시

 

14.

소동파는 30대 중반이었을때 항주의 통판(부지사)으로 부임했고 50대 중반에 지사로 근무한 것까지 합하면 이곳에 두 번이나 온 것이 된다. 백거이보다 항주에 더욱 정이 든 사람이다. 소동파가 쌓은 제방이 길게 보인다. 아치모양 다리를 몇개나 건너야 한다. 서호의 중심에 호심정이 있고 남쪽에는 삼담인월이 있는데 이곳은 여행자가 반드시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삼담인월은 물이 병탑 세 개가 서 있어 달 그림자가 달 세 개로 비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소동파가 호수의 진흙을 캐낼 때 표시 삼아 세워놓은 곳이라고 한다.

 

15.

뇌봉탑은 1924년 9월 25일에 무너졌다. 뇌봉탑은 오월국의 왕비 황씨가 세웠다고 전해지기 때문에 넘어지기까지 약 1000년 동안 서호의 남쪽에 있었던 셈이다. 뇌봉탑이 쓰러진 데 대해서 루쉰은 글 두편을 발표했다. 팔각 5층짜리 뇌봉탑은 확실히 노후해서 위험한 상태에 있었지만, 탑의 기와를 집에 두면 집안이 평안하고 모든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미신이 있어서 사람들이 기와를 몰래 가져갔기 때문에 균형을 잃어 쓰러졌다고도 한다.

 

와력의 들판에 있는 것이 슬픈 일만은 아니다.

와력의 들판에서 옛날 관습을 고치는 것이야말로 슬픈일이다.

우리들은 혁신적인 파괴자를 원한다.

그의 마음에는 이상의 빛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뇌봉탑이 넘어졌을 때 루쉰이 적었던 문장의 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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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3 23:35 2005/01/23 23:35

 

* 낙양 - 중국역사의 축소판

 

1.

낙양을 도읍으로 삼은 북위는 선비족의 탁발부족이 세운 왕조로 그들이 한족의 고향과 같은 중원으로 몰려들었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민족간의 융화를 이루어야만 했다. 성도 한인식으로 바꾸고, 한족과 결혼하는 것을 장려했으며, 호인의 옷차림과 말을 금지하는 과감한 정책을 취했다. 민족간의 융화를 꾀하기 위해서는 그 정신적인 지도원리로 불교에 의지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컸다. 북위가 낙양에 불교사원을 1367개나 지었다는 건 그만큼 불교장려에 힘써 노력했다는 증거다. 북위가 용문에 국가적인 사업으로 석굴사원을 지으려고 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2.

소림사가 불교사원이라는 점은 새삼 설명할 필요 없는 사실이다. 인도에서 온 달마대사가 이곳에서 9년동안이나 면벽수행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소림사라는 절 이름은 소실산의 기슭인 소림에 세워졌기 때문에 붙어졌다. 말하자면 이곳은 선종의 발상지인 셈이다. 소림사는 495년에 효문제가 인도의 승려 발타를 위해 세운 절이다. 그곳으로 남조의 양에게 실망한 인도의 승려 달마가 찾아온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소림사의 가람은 1928년 군벌항쟁기에 석우삼이라는 군벌에게 파괴되어 불타버리고 옛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 서안 - 2천년 황릉의 비밀을 간직한 곳

 

3.

봄추위를 녹이기 위한 화청지

온천수로 매끈매끈하게 지방 덩어리를 씻는다

 

백거이의 이 시로 온천이 더욱 유명해져 여산 기슭의 온천을 화청지라 부르게 되었다. 양귀비를 총애했던 현종은 여산에 모란을 심고, 마음에 드는 가신들에게 별장을 만들어주는 등 사치스러운 궁전이나 누각을 여기저기에 지었다. 어느새 여산은 육문, 십전, 사루, 삼각, 오탕이 있는 규모가 큰 별궁지대가 되었다. 현종은 화청지에서 정무를 보는 일이 잦아졌다. 호화로운 생활을 좋아했던 현종다운 행동이었다. 이윽고 정치는 부패하고 재능도 없는 양귀비 일가가 관직에 올라 정치싸움도 많이 일어났다. 결국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고 현종은 서안에서 탈출해야 했다.

 

4.

만주사변 뒤 전중국에서 일본의 침략에 항의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런데 장제스는 항일운동을 탄압하고 공산당과 대결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중국 공산당 쪽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이 그와는 반대로 항일민족통일전선 정책을 햇다. 장세스는 장쉐량을 서북사령관으로 임명해 계속 공산당과 싸우도록 했다. 장쉐량의 군대는 동북군으로 지난날 일본군과 싸웠던, 항일의식이 굉장히 높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연안의 공산군과 대치해 있는 동안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장쉐량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의문을 품고 자신들이 싸워야 할 대상은 같은 동포가 아닌 일본군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공산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에 공감하게 되었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구국을 위해 활동하라고 충고했다. 장제스는 물론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대 공산군 작전이 진행되지 않은 것에 화가 나 스스로 서안에 들어와버렸다.

 

5.

서안에 도착한 장제스는 1936년 12월 12일 화청지의 숙소에서 머물렀다. 장쉐량 일행은 장제스를 감금하고 내전 중지와 항일구국을 요구했다. 장제스도 드디어 장쉐량의 요구를 받아들여 12월 25일에 풀려났다. 이 일을 계기로 이른바 제2차 국공합작이 맺어졌다. 다음해인 1937년 항일통일전선에 의해 중국공산군은 국민혁명국 제팔로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국공합작으로 당시 국민당이 지배하던 서안 시에도 중국공산당이 사무실을 차리게 되엇다. 그곳에는 국민혁명군 제18집단군 주섬서병사처라는 간판이 내걸렸다. 합작이라지만 국민당은 엄중하게 공산당을 감시했으며, 사무소 가까이에 있는 인력거군들도 사실은 국민당에서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 감숙 - 실크로드의 시발점

 

6.

실크로드라는 말은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19세기 말에 만들어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말이 널리 보급되어 중국에서도 그대로 번역해 사주지로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대에 동쪽에는 중국이, 서쪽에는 로마 문명권이 있었다. 동서 대문명국의 수도를 이어주는 교역로, 장안에서 로마에 이르는 길을 넓은 의미에서 실크로드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실크로드라 하면 동서 두 문명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지역의 교역로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금의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서 내륙 아시아 지방을 통해서 유럽으로 돌어가기까지의 사이다. 그러면 황하의 서쪽, 즉 하서 지방이 중국쪽에서 보면 실크로드의 입구에 해당된다.

 

7.

옛날부터 백년 하청을 기다린다는 말이 있었다. 이 말은 황하는 탁하기 때문에 백년을 기다려도 맑은 물이 될 리 없다는 뜻으로 가능성이 없는 일을 기다릴 때 하는 말이다. 황하가 탁한것은 토사가 흘러들기 때문인데 그 흐름을 막으면 황하도 맑아질 것이다. 유가협댐은 황하를 막기위해 만든 것이다. 댐 높이가 147미터, 제방의 길이가 840미터로 지하발전소에는 발전기가 여러 대 설치되어 있다. 댐으로 인해 생긴 인공호수 비파호는 장소에 따라서 폭이 다르지만, 길이가 65키로나 되기 때문에 거의 바다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수심도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 100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돈황 막고굴은 오랜 역사와 미술의 보물창고와 같은 곳이지만 유가협댐은 새로운 중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 신강 - 동서양을 연결하는 통로

 

8.

신강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은 우루무치다. 당대는 정주의 관할 아래 윤태현에 속해 있었지만 아직까지 서역의 중심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보다 오래전 한대에는 차사국에 속했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우루무치를 홍묘자라고 부른 적이 있었는데, 홍산이라는 언덕에 붉은 울타리를 친 묘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전설에 따르면 아주 오랜 옛날에 서왕모가 이 지방의 물을 천지로 끌어올렸는데도 머리가 셋인 용이 다시 바다로 갔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용을 잠재우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 전설은 우루무치 강이 옛날부터 자주 범람해 주민들이 끊임없이 재해와 싸웠던 사실을 반영한다. 당대에 세워진 탑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9.

서유기에는 화염산이라는 가공의 산이 등장하는데, 손오공이 파초선으로 이 산의 불을 끄는 장면이 나온다. 투루판분지에는 실제로 화염산이 있는데 산의 표면이 붉고 침식의 흔적이 세로로 나란히 나 있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불이 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 화염산 안을 헤치고 들어가면 유명한 베제크리크의 천불동이 나온다. 베제크리크라는 말은 그림으로 장식된 장소를 뜻한다. 그곳에는 석굴이 모두 57개 있으며 그 중에서 석굴 20개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10.

서역은 무엇보다도 실크로드라는 이름으로 익숙하다. 그러나 허텐 지방 사람들은 실크로드보다 실크타운이라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곳은 단지 비단이 지나갔던 길만은 아니었다. 이 지방에서는 옛날부터 비단을 생산해왔다. 지금 허텐에는 굉장히 커다란 견직물 공장이 있다. 이곳은 자치구에 유일한 비단 생산지이기도 하다. 옛날 한나라 땅에서 이곳으로 시집왔던 여와잉 모자 안에 누에를 숨겨서 비단 생산 기술을 전해주었다는 전설도 있다. 이 주변에 있는 유적지에 그러한 사실을 이야기 해 주는 유명한 벽화가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영국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사천 - 제갈공명을 말한다

 

11.

전란으로 인해 중원이 살기 힘들어지자 사람들은 풍요로운 땅 사천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삼국시대에 이르자 이 지방은 북방의 위나라, 남방의 오나라와 더불어 천하를 다스린 3대 세력의 한 거점이 되었다. 천하가 중국의 솥처럼 세 발로 서 있게 되자, 그 가운데 한쪽 다리 구실을 하던 사천은 당연히 중요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천하를 세 부분으로 나눌 계획을 세웠던 것은 제갈공명이었다고 한다. 유비는 그 계획에 따라 211년에 촉으로 들어갔다. 제갈공명은 유비가 촉으로 들어간뒤에도 얼마 동안은 형주에 있다가, 21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성도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서 20년동안 제갈공명은 촉한의 황제가 된 유비와 그의 아들 유선곁에서 사천 경영에 노력을 다했다.

 

12.

삼국이 서로 대립한 시기라고 하지만, 위나 오에 비하면 촉한은 작은 나라였다. 두 나리에 대항하기 위해 영내를 정비하고, 부국강병을 꾀해야 했다. 영내에 살던 서남이란 소수민족은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의 수장은 맹획이라는 인물로 제갈공명은 그를 포로로 잡았는데,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풀어주었다고 전한다. 이것은 제갈공명이 강경책을 취하지 않고, 소수민족을 감동시켜 그들의 협력을 얻으려고 했음을 말해준다.

 

13.

그때까지 두보는 애수의 시인이었지만, 사천에 와서부터 너그러움이 생기게 되었다. 사천의 풍토를 닮아 여유가 생겼을 지도 모른다. 두부초당에서 그는 문학 활동의 절정에 이르렀다. 다음시는 한가로운 강촌의 풍경을 그린 강촌이다.

 

긴 여름의 대낮

강물에 안기어 마을을 조는 듯 한가롭다

제비는 멋대로 처마를 나들고

갈매기는 가까이 가도 날아갈 줄 모른다

할멈은 종이에 바둑판을 그리고

애놈은 바늘을 두들겨서 낚시를 만들고 있다

나는 우두커니 앉아 아무 바라는 바 없다

그저 약이나 좀 먹었으면 할 뿐

 

14.

사천분지의 또 다른 중심지인 중경은 근대적인 공업도시다. 똑같은 역사라고 해도 고대보다는 근대의 것들이 풍부한 곳이다. 중경은 성도에서 690키로, 장강과 가릉강이 한데 만나는 곳에 있다. 하천만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성투철도도 이곳에서 만난다. 중국은 1876년에 맺어진 지부조약에 따라 개항이 되었다. 강강과 기릉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튀어나온 반도처럼 바위산을 깎아 세운 도시다. 중경이 깎아지른 벼랑위에 있는 도시라 자주 산성이라 불리기도 했다.

 

15.

중경 근교에 있는 화룡교의 홍암촌에는 항일전쟁 중에 중국공산당 중앙의 남방국과 팔로군 주재 사무소가 있었다. 현재는 혁명유적으로 거의 원상태로 보존되어 일반인이 참관하고 있다. 아무리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이 합작했던 시대였다고는 해도, 이 홍암촌을 휘감은 산 곳곳에는 국민당의 특수요원이 숨어 있던 집이 있어 끊임없이 중국공산당을 감시했다고 한다. 시가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중미 합작소라는 기괸이 있었다. 이름처럼 중국과 미국이 협력하기 위한 기관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국민당정부가 반정부적인 지식인을 체포하고 감금하던 장소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 마오쩌둥이 연안에서 중경으로 와서 장제스와 이른바 쌍십협정을 맺었다. 장소는 중경 시의 규원이라는 곳이었다. 이곳도 지금은 근대사의 유적으로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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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2 19:39 2005/01/22 19:39

 

 

* 북경 - 고동치는 중국의 심장부

 

1.

1279년 남송이 멸망하면서 마침내 원나라가 전중국을 지배하게 되고, 비로소 북경은 처음으로 중국 전체의 도읍으로서 중국의 중심이 된다. 당시 북경은 대도라고 불렀다.

 

2.

북경을 찾는 사람들은 반드시 고궁을 보러 가게 된다. 고궁은 봉건왕조의 지배자들이 살앗던 궁전을 의미한다. 북경의 내성안에 황성이라는 구역이 있는데, 그곳도 과거에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황제가 사는 자금성은 바로 그 황성안에 만들어졌다. 옛날 전제황제는 3중으로 둘러싸인 땅에 궁전을 지었다. 그들의 화려한 생활이나 어마어마한 권위는 일반 백성들을 착취해 이룩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백성들이 반기를 들고 봉기를 일으킬까 봐 이처럼 조심조심 몸을 사리며 자신을 지켰다.

 

3.

1900년에 일어났던 의화단운동때에는 천안문 앞에서 싸움의 불꽃과 연기가 피어올랐다. 1919년의 5.4운동때에는 이곳에서 북경의 학생과 지식인들이 일본이 내민 21개 조항의 요구에 굴복한 군벌정부에 항의하는 행동을 시작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알린것도 천안문광장에서 였다. 천안문은 옛날 위정자가 일반 사람들에게 알리는 조서를 발표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그곳은 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이 자신들의 혁명적인 사상을 전국에 호소하는 장소로 쓰였다. 천안문은 그런 의미에서 중국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힘차게 고동치는 중국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4.

겨울이 되면 북해는 얼어붙는다. 18세기 청대의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이 쇠이빨이 붙은 구두를 신고 얼음 위를 달렸다는데, 아마도 지금의 스케이트와 비슷한 것이었나 보다. 이를 보면 중국의 스케이트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북해가 고궁바깥에 있었다고 해도 황성안이엇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출입할 수 없었다. 아무리 오랜 역사를 지녔다고 해도 북해의 스케이트는 일부 특권 계급만이 누릴 수 있는 스포츠였다.

 

5.

경산 혹은 북해의 백탑산에서 북경 시가지를 바라보면 지금은 고층 건물이 가득 들어차 있지만, 옛날에는 그처럼 높은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지역에 따라서 2층 이상의 건물의 짓지 못하도록 금지해 놓은곳도 있었다. 봉건왕조의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궁전이나 관청따위를 크게 짓고는 이들 건물이 더 커 보이도록 주변에 민간인이 커다란 건축물을 짓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주변이 낮고 작아야 그들이 세운 건축물이 가장 거대해 보인다는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 만리장성 - 중국인의 마음을 이어주는 장성

 

6.

장성이 거대한 구축물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산맥이 갈기처럼 길게 이어져있는 장성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마치 역사의 한가운데 우뚝 서 잇는 듯한 착각에 바져들게 한다. 장성을 만든 것은 전국의 군주들이었고 진시황이었으며 한무제였지만, 실제로 흙을 나르고 쌓아올리는 공사는 이름도 없는 가난한 백성들이 맡아 했다. 누구도 좋아서 그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라에서 내린 엄명에 따라 부모형제나 처자와 헤어져 삭풍이 몰아치는 장성의 공사장으로 끌려왔던 것이다. 강제노동이었기 때문에 공사를 감독하는 관리가 그들을 노예처럼 부렸으리라는 것도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만리장성의 그늘에는 백성의 피와 눈물과 땀이 서려 있으며, 많은 사람의 목숨이 묻혔을 것이다. 그것은 갖가지 비극을 낳았다.

 

7.

임조에서 시작해 요동에 이르는 원망과 한탄의 만여 리,

이곳을 흐르는 황하를 건너 양산을 거쳐 꼬불꼬불 구부러져 북으로 향한다.

 

8.

진시황의 대공사는 만리장성뿐만이 아니었다. 국도로 정한 함양 축조, 아방궁, 그리고 자신의 묘지로 쓸 여산능 이 있었다. 아방궁과 여산 공사에는 70만명 남짓한 죄수를 동원했다고 사기는 적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어마어마한 죄수가 있을 수 있었을까? 당시 진의 법률이 너무나 엄해,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이 없듯이 누구라도 갖다 붙이면 죄수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대공사중에는 원하는 만큼 인원수를 채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죄수라고는 해도 그 대부분은 지금 우리들이 생각하는 범죄자가 아니었다. 군대, 징용인부, 범죄자가 아닌 죄수들이 관리의 채찍 아래에서 신음하며 쌓은 것이 바로 만리장성이다.

 

 

* 산동 - 바다와 녹음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땅

 

9.

태산은 오악의 으뜸이라고 하여 역대의 황제드은 이곳에서 국가적인 행사 가운데 가장 장엄한 의식이었던 봉선을 올렸다. 봉선은 황제가 태평세계의 실현을 신에게 보고하는 의식이었다. 황제라고 누구든지 태산에서 봉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덕이 있는 황제만이 이를 허락받았다. 여러가지 설이 있기는 하지만, 태산의 정상에서 흙을 돋우어 단을 만들고 그곳에서 하는에 제사를 올리는 것이 봉이고 태산의 기슭인 소산에서 땅을 물리친 산천을 모시는 곳이 선이라 한다. 태산은 대산이라고도 쓰며, 그 산 아래에 옛날 봉선 의식을 거행하던 대묘라는 곳이 있다. 대묘의 문물들은 잘 보존되어 있는데 이것은 문화혁명에 처했을때 묘 담당자들이 냉정하고 현명한 조치를 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10.

언제부터인지 태산의 신은 여자를 지켜주는 신이라고 해서 낭낭묘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그런 탓인지 나이 든 부인들이 이 산을 많이 찾아간다. 확실히 태산에 오르면 건강에는 좋을 것이다. 어쩌다 전족을 한 노부인이 지팡이를 짚고 비틀비틀 돌계단을 오르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조마조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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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2 18:47 2005/01/22 18:47

1.

나를 황학루에 남기고

안개 낀 삼월, 친구는 배에 올라 양주로 떠나고

이윽고, 돛대마저 시야에서 사라져

뵈는 것, 아득히 하늘에 닿은 장강의 물 뿐이어라

- 이백 [황학루에서]

 

2.

이 글은 일본역사학자인 진순신의 [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기행]의 나름대로 의미있는 구절을 정리한 것이다. 1924년 일본 고베에서 출생한 진순신은 [중국의 역사][태평천국][제갈공명][영웅의 역사]등 지금까지 주로 중국역사를 소재로 하는 150여편의 작품을 썼다. 이 책을 여행배낭에 넣을까 말까 망설였다. 가장 무거운 종이질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중국여행을 마무리하는 지금 이 선택을 아주 잘 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도시별로 발기발기 찢어져 있다. 도시마다 그 부분을 작은 가방에 넣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 이 책은 항공소포로 서울로 보내질 것이다.

 

3.

사람도 인연이고 책도 인연이다.

책에서 사람을 만나고 역사를 체험하고 미래를 꿈꾼다.

앞으로의 여행중에 또 어떤 책을 만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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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2 18:39 2005/01/22 18:39

1.

아침에 일어나 바로 은행으로 걸어갔다. 50달러자리 달러를 꺼내려 몸에 차는 지갑을 꺼내는데 거기에 100원이 있다. 이게 왠 헤프닝인가. 그냥 어제 깔끔하게 돈을 줄 수도 있었는데 나의 산만함이 나를 그르쳤다. 돈과 신분증 카드들을 4군데로 분산해서 가지고 다니는 것이 또 이런 문제를 낳기도 한다. 50달러를 바꾸었다. 곱하기 8남짓의 금액이다. 400원 남짓을 가지고 은행을 나왔다. 300불 가지고 간 미달러가 180달러 남았다. 여행자수표 1000달러는 아직 한번도 쓰지 않았다. 중국은 은행이 잘되어 있지만 인도를 예상해서 아껴두었다. 미달러는 여행에게 급하게 통용되는 돈인거 같다. 

 

2.

어제 봐두었던 시장의 두부 백반집에 들어갔다. 두부국에 밥이 나온다. 파오차이(중국김치)를 달라했다. 두부는 언제 먹어도 물리지가 않는다. 나와서 티벳식 둥그런 구운빵에 양념넣은 것을 샀다. 빵이 차서 맛이 없다. 숙소로 돌아왔다. 주인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어제 차 빌린 돈과 숙소 비용을 지불했다. 주인이 아이와 티벳식 식사를 하고 있다. 같이 티벳 버터차와 만두 그리고 감자볶음을 먹었다. 아이에게 너가 뛰어노는 곳이 어디니하고 물었는데 이해를 못시켰다.

 

3.

숙소를 나왔다. 우선 숙소가 있는 구시가지 주변을 돌아보자. 구시가지 골목에 드문드문 보이는 카페들은 거의 사람이 없을것 같다. 뒷 산이 가까워진다. 한 아줌마가 산을 올라가려면 저쪽 골목으로 가란다. 중국에 와서 메이요우(없어요)쪽 사람보다는 친절한 중국인을 훨씬 더 많이 만났던것 같다. 산 중턱에 이름모를 묘들이 있고 정상에는 티벳사원이 있다. 사원을 빙둘러 색색의 소원쪽지들이 주변 풍경과 잘 어울린다. 저멀리 장족 마을들이 보인다. 그 배경으로는 험산산들이 어께동무를 하고 있다.

 

4.

산을 내려와 다시 3번버스를 타고 티벳사원인 숭잔린쓰로 갔다. 내려서 매표소쪽으로 가지않고 옆 동네로 좀 돌아보니 쉽게 사원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동네 길로 올라갈때 티벳 장족 아줌마두분과 인사를 했다. 장족 인사말을 외워두었더라면 짧은 시간이나마 더 통했을텐데 아쉽다. 숭잔린쓰안에 가장 큰 법당안으로 들어갔다. 정문은 잠겨있고 옆문으로 들어갔다. 스님 세분이 함께 불경을 외우고 있다. 그때와 같이 10미터 떨어져서 앉았다. 또 다른 맛이 있다.

 

5.

티벳 불교는 한국의 절에서 들었던 점잖은 불경보다는 약간 마교라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소위 신들의 전쟁에서 메이저 신들은 신성한 신으로 살아남았다. 티벳 불교는 아마 중간파 격일 것이다. 소수파 신들은 보통 악마나 귀신 사이비로 배척당한다. 종교의 세계 역시 냉혹한 권력 투쟁의 장이다. 티벳불교는 어떤 경계에 있는 느낌이다. 특히 불경의 후렴 마무리 부분이 인상적인데 마치 한때 서태지와 아이들 테입을 꺼꾸로 들으면 피가 모자라라는 말이 들린다고 했는데 마치 그 느낌이다. 인도의 고대경전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옴이라는 후렴구가 가장 완전한 발음이라 해서 일본에서 한때 사건을 일으킨 옴 진리교가 그 발음을 체택했는데 그것보다는 이 티벳불경의 후렴구가 더 걸죽하고 진한 맛이 있다.

 

6.

숭잔린쓰를 뒤로하고 다시 버스를 탔다. 시간은 아직 2시정도다. 내친김에 터미널로 갔다. 한 두 시간거리의 볼 만한 곳을 가볼까? 지도로는 감이 잘 안온다. 정보창구의 직원에게 질문했다. 당연히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 직원의 태도인데 성의를 보이기 보다 화를 낸다. 자긴 모른단다. 그럼 왜 인포메이션 창구에 앉아있나. 그래 관두자. 다시 중심가로 가서 인터넷 카페에 들어갔다. 3시간 정도하고 왕빠주인과 인사했다. 이제 내려간다고 그동안 고마왔다고... . 이 주인 차 시간을 알아봐준다. 그 성의가 느껴진다.

 

7.

저녁은 마지막으로 한국식당으로 갔다. 해물순두부를 시켰다. 아까 왕빠에서 중국여행동호회싸이트를 검색하다 이곳에 치커주가 있고 그 맛에 매료된 사람이 있음을 확인했다. 한국식당에 일하는 친구에게 치커주 얘기를 하니 같이 가잔다. 바로 옆 상점 큰 항아리에 치켜주가 있다. 500미리 물통 하나에 3원이란다. 치커주는 수수로 만든 술이라는데 사와서 먹으니 도수가 상당하다. 식당에 미안해서 부추전을 하나 시켰는데 너무 맛이없다. 치커주 두잔과 일하는 친구가 한 잔 따라준 중국술 한잔을 먹으니 취기가 오른다. 그만 먹고 내일 일찍 출발하자.

 

8.

숙소에 들어가 주인에게 내일 아침 출발한다고 말했다. 그 친구 나에게 깨워줄까하고 물어본다. 그러라고 했다. 여행은 상품소비자로 규정되느냐 국가의 벽을 넘어 관계를 확장하느냐의 싸움이기도 하다. 이 싸움은 분명히 구분되지 않는다. 아직 이곳이 때묻지 않은 도시라고 기대해서 였을까? 그동안 수 많은 장사꾼들 틈에서 별 타격이 없던 내가 이 상그릴라에서 우울한 기분을 갖게 되었다.  

 

9.

세상에는 두 부류가 있다. 일처리가 깔끔한데 그것이 도리어 숨을 막히게 하는 스타일과 일처리가 너무 두리뭉실해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스타일이 그것이다. 아마 세상사람의 다수는 두리뭉실한 스타일일 것이다. 이 친구는 두리뭉실의 표본이다. 이건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내가 이 친구에게 힘들었다는 건 나의 과거의 모습, 다듬어지곤 있지만 현재 나를 이 친구를 통해 확인했다는 의미로도 생각해 보게된다. 다음에 다시 상그릴라에 올때 이 친구를 찾을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 050117 (월) 여행 53일차

 

(잠) 3900원 (30원)

(식사) 아침 520원 (4원)

          저녁 4160원 (32원)

(이동) 버스 4번 520원 (4원)

(간식) 치커주 390원 (3원)

         장족 호떡 130원 (1원)

(기타) 절 잔돈 시주 70원 (0.5원)

         인터넷 780원 (6원)

 

............................................... 총 10,37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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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2 16:11 2005/01/22 16:11
  1. 사막은
    2005/01/23 15:48 Delete Reply Permalink

    메일이 없다고 나오네요. 정확히 메일이 어찌 되시나요. 글고 덧글에 답은 왜 안 하시는지. 이건 해 주시겠죠?

  2. aibi
    2005/01/23 22:47 Delete Reply Permalink

    조금전 사막은님 매일 잘 확인했습니다. 그쪽으로 답장을 드리지요. 덧글에 답하는 건 저의 인터넷 조건이 불안정하고 지금 홀로여행 중인지라 조금 떨어져서 서로를 지켜보자는 생각에 수다를 떨고 싶음에도 참고 있는중이랍니다. 짧은 덧글을 읽으며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며칠만에 인터넷이 되는 곳을 찾아 앉으면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이 바로 이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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