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2003 보도사진전 대상 작품


전쟁은 끝나야 한다!

 

 

- 수상부분 대상 

World Press Photo of the Year 2003 1st Prize People in the news Singles

- 작가명

Jean Marc Bouju

- 소속명

France, AP

작품소개 2003년 3월 31일 남부 이라크 나자프 시에 있는 美 101 공수사단 3여단 內의 포로수용소. 한 이라크 포로가 겁에 질린 4살난 자신의 아들을 안고서 달래는 모습.

 

* 출처: 좌파 사진작가 모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나'란 무엇인가

나에 대한 앎이 해탈을 여는 열쇠다.

 

'나, 나, 나' '내것, 내것'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이다. '나'하면서 '나'를 모르고 산다는 것은 유감 아니겠는가? 무엇이 나인가? 무엇을 진정한 나[참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너무도 관심 기울여 연찬해 볼 주제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 주제에 대해 너무도 무관심한 채로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인 듯한데 웬일인가?

 

자. 무엇이 '나'인가. 이 몸, 이 마음을 '나'라 하겠는가? 대충대충 그런 식으로 생각해 버리고 사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다. 과거세 긴세월 동안 '나다' '내 것이다'를 무수히 반복하면서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아집(我執), 법집(法執)을 씻어내지 않고서는 해탈할 수 없다.

불조(佛祖)께서 제시한 요긴한 해탈 방편 하나가 '나'를 제대로 알아버리는 길이다. '제대로'라는 것은 과학적인 엄정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방편적인 진지성을 의미한다.

'나'가 무엇인지 알고자 함은, 앎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나'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고통을 당기기 때문에 '나'를 잘 알아버림으로써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즉 집착을 벗기 위한 방편으로 나에 대한 바른 앎이 요청되는 것이다. 종교가 , 앎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학문과 다른 점이 그것이다.

자. 무엇이 나인가? 동사섭 장(場)의 대단원에서는 "당신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진정 당신의 모습입니까?"하고 진지하고 엄숙하게 다그쳐 묻는다.

"홍길동입니다." "모모의 아빠입니다" "OO의 남편입니다" " OO그룹의 사원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몸입니다" "혼입니다" 등등 답해 봄직한 별의별 대답들이 다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대답한 등등 답해 봄직한 별의별 대답들이 다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대답한 그것이 진정 '나'인가 자문해 보면 "여차저차하니 그것을 진정 나라고는 할 수 없다." "진정 무엇이 나란 말인가?"하고 새롭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주제에 성실히 몰입하고 있노라면 대체로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이른다. 이 상태의 밀도를 거듭 심화시켜 나가는 길이 화두선(話頭禪)이요, 이 답답함에서 돌파구를 찾아 진일보하여 스스로 만족할 만한 답을 얻어 관행해 간다면 이것이 염불선(念佛禪), 법계관(法界觀), 일심산관(一心三觀) 등의 행법(行法)이다.

 

 

'참나'가 아닌 것들을 낱낱이 놓아 가는 명상법

 

참나를 찾는 일에 있어 일반화시켜도 됨직한 좋은 방편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진정한 나[참나]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낱낱이 놓아 가는 명상이다. 흔히 세상 사람이 '나'라고 여기는 것을 보면 네 겹정도로 분석해 볼 수 있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인식의 주체[識主我)], 마음[心我], 몸[身我], 그리고 자기 동일시[自己同一視]의 내용인 '내것'이라는 것들[境界我]이 그것이다. 그림과 같이 나란 식주아, 심아, 신아, 경계아 등 네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진정한 나를 알고자 나의 겉부분부터 "그것이 진정 나인가"하고 물어 보자. 양파의 핵심을 찾고자 껍질 한 겹 한 겹을 벗겨가듯......

 

경계아(境界我 :  경계나), 우리가 알게 모르게 무수히 자기 동일시하며 집착하고 있는 몸 밖의 것들, 부모, 형제, 자녀, 남편, 아내, 동산, 부동산, 아끼는 물건들, 명예 권력 등등 소중한(?) 나의 경계아들! 그것들이 나인가? 아니다. 그러면 놓아라. 쥐고 있지 말자. 자녀를 놓을 때 오히려 효과적으로 기를 수 있다. 재산을 놓을 때 그 관리의 효과적인 길이 보인다.

 

신아(身我 : 몸나), 그것이 나인가? 몸이라는 것, 알고 보면 현미경을 동원해야 겨우 보이는 아버지의 정자 한 마리, 어머니의 난소에서 한 달에 한 개씩 생산되는 난자 한마리, 그리고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고 열달동안 먹었던 밥, 김치들, 내가 태어나서 꾸준히 먹어온 밥, 김치들, 그것들의 집합이 몸이다. 정자가 나인가, 난자가 나인가, 밥,김치가 나인가? 그것들을 "나야!"하고 붙들고 있는 자가 있다면 딱하게 보이지 않겠는가. 몸뚱이 이것, 내가 아니다. 놓아라 내일 모레쯤 화장터에서 뿌연 연기, 한줌의 뼛가루로 흩어질 이 몸뚱이, 내가 아니다. 놓아라.

 

심아(心我 : 마음나), 그것이 나인가? 심아, 그것은 생각과 감정의 조합과정일 뿐이다. 생각[知], 감정[情], 욕구[欲], 의지[意], 생각/감정/욕구/의지가 기능적으로 무수히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마음이다. 꽃 한송이를 본다[인지작용 : 생각], 기분이 좋다[감정], 꺽어서 집에 꽃아 놓고 싶다[욕구], 꺽고자 한다[의지], 인생사 전반에 마음은 이런 식으로 활동한다.

이때 생각들이 나인가? 아니다. 그 순간 일어난 생각 기능일 뿐이다. 감정, 요구, 의지도 마찬가지다. 마음이라는 것도 막연히 생각하면 무슨 실체(實體)가 있는 듯 하지만 잘 관찰해 보면 그런 식으로 몇몇 기능들이 난무할 뿐이다.

 

식주아(識主我 : 인식의 주체)! 산이 보인다. 무 엇인가 보는 주체가 있으니까 그것이 산을 볼게 아니냐고 생각한다. 이 생각이 '아트만(Atman)' 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의 개념을 만들어 내었다. 나무가 있고 돌멩이가 있다면 그 것을 만든 자[창조자]가 있을 게 아니냐는 생각이 '브라우만(Brahman)'이라는 형이상학적 신(神)을 만들어 내었다. 석가의 석가다운 역사 출현의 의미는 그 두 형이상학 개념에서 벗어났다는 점에 있다.

새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듣는 무엇이 있는가? 아니다. 주체적으로 역할하는 '기능'이 있을 뿐 주체자라는 실체는 없다. 아트만이나 브라만과 같이, 알 수도 체험할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상상의 관념 창고에 설정하려드는 것은 약한 유아기 인격에서 볼 수 있는 '믿음 심리'이다. 믿어버림으로써 어떤 욕구를 성취하고 편해지고자 하는 마음이 인간의 '믿음 심리'이다.

이 믿음 심리가 인간에게 유익한 도구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믿음 심리가 없다면 한강교를 건널 때마다 이상(異狀) 유무를 검토해야 할 것이요, 이웃을 대할 때마다 흉악범이 아닌지 항상 살펴야 할 것이다. 많은 종교 교설이 믿음 심리를 전제로 하고 시설된다.

 

해탈하지 못해도 믿음으로써 얻는 공덕은 아주 많다. 그러나 무엇이나 중도(中道)라야 좋고 상황에 따라야 하는 법, 불신 능사(不神能事)도 금물이지만, 믿음 능사도 금물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이 너무도 뿌리 깊게, 너무도 심각하게 당하고 있는 믿음 심리 피해 사례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나는 존재한다"라는 믿음이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믿음, 이것은 인간의 성장 과정에 단계적으로 필요하지만 최종 단계의 성국 과정에서는 그 철석같은 믿음을 놓지 않으면 안 된다. 석존의 보리수 밑 수행이 바로 그 과정이었다. 그 당연하고 자명한 듯한 '나'라는 실체는 연기적 기능에 불과함을 꿰뚫어 보고, 미지근하게 끝까지 따라다니던 불안[ ]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참나' 운운 역시 관념의 허상이다.

 

자, 마지막 '나'라고 버티어 봄직한 인식 주체[識主我]도 '나'가 아니요 한갖 기능임을 조견(照見)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겟는가? 자유감이요, 해방감이요, 대자대비요, 넘치는 생명력이지 않겠는가. 산산수수(山山水水)요, 묘한 있음[]이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사덕(四德)이 넘치는 어떤 상태가 아니겠는가. 공(空)과 성(性)과 상(相)이 일여(一如)로 현전하는 아미타불의 일심법계(一心法界)가 이것임을 명상의 깊이만큼 점두(点頭)하리라 본다.

 

혹 '무언가 허탈할 것 같다'고 생각되는가? 이해도 된다. 노망한 시어머니를 30년 시중하다가 죽었는 데 문득 서운하더란다. 관념적으로 사색하지 말고 명상적으로 관조하노라면 사색 과정에 따를 수 있는 어떤 허탈감은 극히 일시적이고 명상의 깊이에 비례하는 충만감이 현전할 것이다.

혹 "아, 그러면 마지막에 현전하는 그 자유감 등등이 '참나'이겠구나" 하고 결론을 내리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감 등도 꾸준히 흐르는 법. 그것에다 다시 이름을 붙이고자 할 일이 아니다. '진아'이니 '참나'이니, 이름을 붙이고자 하는 '믿은 심리'가 깔려 있을 수 있으니 깨어 잇을 일이다.

 

세간의 명인이 되는 데에도 뼈를 깎는 노력이 따르는 법. 해탈자라는 출세간의 명인이 되어야 할 마당에 적은 노력으로 되겠는가. 석존의 유언에 "게으름 피우지 말고 정진하라" 하셨다. 이 한 말씀에 담긴 석존의 간절한 비원(悲願)과 자비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음미해 볼 때 가슴이 메인다.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 출처: 용타스님 명상록 '마음 알기 다루기 나누기' - 대원사

* 주니님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긍정 바탕 없이 초월 지평 안 열린다


해탈은 먼 곳에 있지 않다

 

불행의 극점에서 해탈의 극점까지는 무한분법(無한분법)적인 무수(無數)단계가 있다고 봐야겠지만 표현의 편의를 얻고자 삼분법(三分法)을 써 본다면, 욕구가 좌절되면(좌절됐다고 생각하면) 불행을 느끼고, 욕구가 성취되면(성취됐다고 생각하면 행복을 느끼고, 욕구를 놓아 버리면 해탈을 느낀다.

불교인이 지향하는 바는 해탈의 극점인 묘각(妙覺: 大覺)이다. 이 묘각을 위해서 일체의 욕구를 버리게 한다. 물론 옳은 일이다. 그러나 사람의 수양 수준이나 근기나 기질 등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모든 사람에게 "탐심(貪心)을 놓아라. 무상, 무아이지 않느냐"하고 요구하기로는 무리다.


많은 가르침의 현실을 생각해 보자. 사람은 대체로 탄생으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욕구-좌절-분노-욕구-좌절-분노'의 악숙환을 반복한다. 이 과정에 욕구는 더욱 치열해지고 진심(瞋心)은 더욱 심각해진다.
욕구가 성취되어 기쁨을 느끼는 경우라 할지라도 성취될때까지 지속되는 긴장감은 분노[불유쾌 정서층]의 심각도를 높여 준다. 뿐만 아니라 기뻐함과 동시에 다음 성취를 위한 새로운 긴장이 시작되고 더 큰 성취 욕구로 재무장하고 나서는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인생이란 탐(貪), 진(瞋)의 늪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탐, 진은 "나는 존재한다" "나는 불만족 상태에 있다" "나는 사랑받아야 한다." "나는 인정받아야 한다" 등의 그릇된 사고 방식[痴]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이는 탐(貪), 진(瞋), 치(痴)를 세가지 독물[三毒] 이라 하여 철저히 제거해야 할 목표로 삼고 있다. 이런 심리 구조로 보아 탐, 진의 뿌리인 "나는 존재한다" 등의 삿된 견해를 퇴치하기 위해서 공(空), 무아(無我)와 같은 존재론적 정견이 요청됨은 당연하다.

 

 

지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욕구 좌절의 역사를 살아오면서 겹겹이 퇴적되어진 무의식 속의 탐, 진의 한(恨)이 무작정 "공이니라" "무아니라" 등의 초워론법으로 용해되기는 어려운 법. 중생 진화의 완료인 묘각을 결정짓는 주(主)바라밀 - 염불선, 간화선, 묵조선, 비파사나, 주력, 공관(空觀), 법계관(法界觀), 일심삼관(日心三觀) 등 - 에 전념하기 이전에, 혹은 현자 주바라밀에 전념하고 있더라도 탐, 진의 한을 완화시키는 정화[카타르시스, 한풀이, 밝은 마음 강화] 작업이 조(助)바라밀로 요청된다. 방편(바라밀)무한이라 했듯이 그 길은 많겠지만 지족(知足)이라는 방편을 좋은 조바라밀로 부각시켜 본다.(주와 조는 정해져 있음이 아니고 공부인이 선택에 달려 있다. 에컨대 '수식관'을 주바라밀로 선택했다면 화두나 묵조도 조바라밀이다- 필자 주.)


지족(知足), 즉 '만족을 아는 것'이다. ,『법구경』에 지족 최부(知足最富)라 했다. 만족을 아는 것이 가장 부자라는 말이다. 사람은 현재 이미 있는 것[旣存], 현재까지 이루어 온 것[旣成]에 만족하지 않고, 아직 없는 것, 아직 이루지 않은 것을 있게 하고, 이루고자 하는 데에 집착함으로 인하여 괴로움의 늪에 빠져든다.
기존기성(旣存旣成)을 누리는 것, 범사(凡事)에 감사하는 것, 그것이 지족이다. 지족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요, 지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 역시 없을 것이다. 지행(知行)이 일치되기 어렵듯이 지족의 중요성은 알되 지족하는 것이 몸에 잘 익어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해탈이니 구언이니 초월이니는 제쳐 놓더라도 세상 사람이 이 '지족'이라는 덕목 하나만이라도 일정 수준 이상 체득한다면 일반적인 의미의 행복은 보장될 것이다. 불행이란 대체로 '없는 것' '이루지 못한 것'을 향한 지나친 긴장감과 이루지 못했을 때 따르는 실망감을 의미할진데, 지족이 태도는 현재 이미 있는 것, 이루어 온 것[기존 기성]으로 충분히 만족하는 것이니, 행복이 아니겠는가. 알고 보면 이것이 응무소주(應無所住)를 실천하는 첫 단계일 것이다.

 

팔만대장경을, 소승 대승을, 불법을 한마디로 가파하라 하면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而生基心)이다. 마음이 일체에 머물 바 없느니 자유롭고 그 자유로운 마음[응무소주]로 세상일이 하니[이생기심], 그것이면 전부이지 않겠는가. 지족은 일체의 당하여 만족하므로 마음에 스트레스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 왈 응무소주라! 얼마나 덕목인가.

이렇듯 지족(知足)이란, 『법구경』 어느 귀퉁이에 있는 한 개 단얼 치부해 버리고 지나칠 수는 없다. 지족 철학은 경전이 많은 곳에서 이런 저런 표현으로 드러나 있지만 중대한 정견(正見) 덕목 하나로 부각하고 있지는 않은 현실인 듯 하여 유감이다. 지족(감사, 기존 기성의 확인)은 이처럼 현재의 행복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과거의 지족못하여 쌓여온 탐, 진, 치, 삼독을 녹여내는 좋은 방편이다.

그러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 놓으면 편리하겠지만 어느 쥐가 어떻게 그 방울 다는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성자들의 가르침이 뭇 중생에게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식의, '그림 속의 떡'과 같은 식의 현실성 없는 공리 공담(空理空談)이 되고 있다. 지족! 그 중요성을 열번 백번 알아도 지족하는 인격이 되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관행(觀行)이다. 내면화를 위한 명상이다. 동사섭(同事攝)법회에서 법쇠 시간 45시간 중 10시간 정도를 할애해서 지족의 이론과 그 실습을 하고 있음도, 그것이 인격으로 정착되도록 돕자는 것이다.

 

 

지족 명상

 

지족의 관행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방법론은 많은 것이다. 하나의 대안을 말해 보겠다. 지족[감사] 명상은 혼자 있을 때는 참선하는 식으로 하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할 적에는 스피치 식으로 해도 될 것이다.

지족 명상, 곧 감사 명상이란, 내 인식 주체가 인식 객체에 대해서 "OO이 여차여차해서 감사하다" 식으로 생각[말]하는 것이다. 즉 인식 객체란 자기 자신을 비롯해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일 터이니, 자신의 마음을 원점으로 해서 마음, 몸, 기능, 업적, 가족, 이웃 등의 사람들, 가정, 환경, 사회, 국가, 국제 사회, 삼라만상, 태양계, 은하계 등을 동심원(同心圓)적 단계로 긍정 명상해 들어간다. 명상문을 미리 작성해 놓고 읽억면서 명상 생활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이다. 나에 대한 정체(正體) 개념이 애매하거나 나에 대한 가지 평가가 좋지 않은 것이 온갖 불행의 씨앗이다. 정체감이 애매하고 자아 개념이 낮은 사람은 매사에 주체성이 없어 우유부단하고, 열등감이 많아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주변 사람[특히 주로 많이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우호감이다. 인생은 사람과 만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는데 사람에 대해 부정적으로 느끼는 시각이 발달돼 있다면 늘 사람들 때문에 기분 저조한 불행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특히 '나' 와 '사람'에 대한 긍정(肯定) 명상[지족명상, 감사 명상]을 강력하게 해서, 굳어 잇는 어리석은 사고대(思考帶, 痴)를 긍정적으로 교정해야 한다.

 

긍정명상은 자신의 마음부터 시작함이 좋을 듯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까운 사람, 남편이든 아내든 아들이든 친구든 대상으로 해서, 혹은 아무 물건이든 하나의 물건을 앞에 놓고 감사거리를 발견해 보아도 된다. 동사섭 법회에서는 방 가운데 주전자이든 볼펜이든 죽비든 놓고 감사거리를 발견해서 표현하게 해 보면 그 단순한 물건 하나에서 수십 수백가지의 감사점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모든 수련생이 감동한다. 수련생들은 대체로 "하찮은 저 볼펜 하나에 이토록 긍정점이 많이 있는데 하물며 OOO은 어떠하겠는가?"하면서 기존의 부정의 시각을 녹여내고 긍정 토대를 정립하게 된다.

 

 

긍정 명상의 요령

 

1. 마음에 대한 긍정 명상

(1) 마음은 우주하고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함을 명상한다.

 

(2) 마음의 무한 가능성을 명상한다.(무한한 환희의 가능성, 무한한 지혜, 자비, 힘의 가능성,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가능성 등등.)

 

(3) 마음이 초차원성, 해탈성을 명상한다. 그래서 마음이 곧 부처라하고 신성(神性), 불성(佛性)을 멀리 찾지 않는다.

 

2. 몸에 대한 긍정 명상

(1) 일단 생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근거가 되는 육체에 감사한다.

 

(2) 부붐적으로 모든 기관과 조직, 곧 머리끝으로부터 발끝까지 머리, 눈, 귀, 코, 입, 살, 팔, 다리, 손, 발, 허파, 염통, 혈관, 위장, 소장, 대장, 간장, 신장, 췌장, 비장, 대뇌, 소뇌, 간뇌, 척추, 신경, 모공 등등을 가능하다면 샅샅이 관찰하여 그 기능의 신비를 찬탄하고 그 건재함을 감사한다.

 

3. 업적에 대한 긍정 명상

(1) "나는 이름을 쓸 줄 안다" "나는 삼곱하기 칠은 이 십 일임을 안다"와 같이 극히 사소한 듯한 것들을 업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2) 그 사소한(?) 것들에 대한 가치 부여를 튼튼한 바탕으로 해서 자신이 이루어 온 큰 성취(?)에까지 샅샅이 통찰 명상하여 자아 개념을 높인다.

 

(3) 업적 면에서 자기보다 큰(?) 업적을 이루어 온 이웃과 비교 평가하여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는 일은 금물이다. 지혜 하나로는, 상대 평가를 피하고 절대 평가 시각으로 10등이라면 15등보다는 우수하지 않느냐식으로 기대 수위[집착수위]를 가능한 한 밑으로 내리어 만족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매사에 100은 '지향 목표'로 바라다볼지언정 '집착 목표'로 놓고 매달릴 일은 아니다. 직찹 수위는 밑으로 거듭 내리어야 한다. 만일 집착 수위를 '0'으로 끌어내리고 산다면 그것이 곧 도인의 삶이다. 집착수위를 0으로 하여 사는 사람은 나날이 좋은 날이요, 순간순간이 환희요, 경이로움일 것이다.

 

4. 이웃 사람에 대한 긍정 명상

사람 긍정 명상은 우선 우호감이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떠올리는 것이 좋다. 한 사람을 떠올리고 조용히 있어 본다.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하여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 본다. 극히 자연스런 흐름이다. 사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것이나, 공통되는 부분도 많을 것이다.

 

(1) 아마 영접하고 있는 분을 향하여 맨 먼저 일어나는 마음은 "안녕하세요"하는 인사이지 않을까 한다. 인사는 정성이 가득할수록 좋다. 내가 대하고 있는 바로 이 사람을 부처로, 하늘로, 소중한 존재로 받들지 못한다면 부처를, 하늘을 귀한 존재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는 자세로 최대한 공경의 절을 올려본다.

 

(2) 절을 올리고 가만히 있노라면 자연히 기도가 나오지 않을까. "OO님 행복하세요. 몸 건강하시고 소원하는 것들 두루 이루시고, 마음 크게 자유로워지시고 주변에 사람을 베푸시는 존재되십시오" 식으로 간절하게, 가능한한 구체적으로 기도한다.

 

(3) 그리고 그 다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나지지 않을까. 태어나서 부터 지금까지 그분이 주변에 기쁨과 유익함을 일으켜 주었던 일 등등에 대해서, 아는 것은 구체적으로 떠올리고 정보를 모르는 것은 상상력을 통해서 감사한다.

 

(4) 마지막으로 그분의 존재 자체의 신성함에 대한 찬탄이 나오지 않을까. 그 육체이 신비, 눈, 귀, 입, 팔다리, 심장, 폐장, 위장, 간장 등 많은 기관과 조직의 신비를 음미하며 찬탄한다. 특히 그분 속의 주인공[혼]의 신비는 그 어떤 거창한 수식어를 붙여 찬탄한다 해도 다 찬탄하지 못할 만큼 불가사의 한 존재이다.

 

(5) 사람에 대한 긍정 명상 소재는 이 외에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니 다채로운 사람 명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6) 소리내어 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한다.

 

5. 기타 긍정명상

전기 전화를 비롯한 무수한 문화, 문명의 혜택에 대해서, 물, 공기, 풀, 나무, 산, 강 등의 대자연, 태양계로 부처 뭇 은하계에 이르기까지 중중 연기(重重緣起)하는 대질서의 파노라마를 밀밀하게 느끼면서 감사찬탄한다.

'아미타불' 한 명호에만 전념키로 한 수행자라도 공부 에너지 십분의 일만 할애하여 긍정 명상을 한동안 해둔다면 공부 능률이 배가될 것이다.

모든 종교인은 긍정의 바탕이 허술하면 현재의 행복은 물론, 초월의 지평이 (잘) 안 열린다는 자각하에서 개이적, 집단적, 사회적 긍정시각 열어가기 운동을 벌일 필요가 있다. (어찌, 세상에 걸을 길이 없던가, 걷고자 하는 의지가 약할 뿐이지.)

 

 

* 출처 : 용타스님 명상록 "마음 알기 다루기 나누기" - 대원사

* 주니님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견(正見)이라는 첫 단추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행복의 조건을 떠오르는 대로 몇 가지 정리해 보라고 한다면 무엇을 꼽겠는가?

혹시 마음을 다스리지 않고 행복해지리라고 생각하여, 부와 명예와 출세와 건강 등등의 조건들만 나열되었다면 당신의 행복의 수준은 1, 2학년 정도밖에  될 수 없다. 3, 4학년 수준 이상의 행복을 누리려면 무엇보다 마음관리가 행복의 조건에 우선적으로 들어가야 한다.

행복의 조건 제 1호는 단연 마음관리다. 마음관리를 하지 않고 수준 높은 행복을 기대하는 것은 마치 낚싯대를 들고 산으로 가는 것과 같다. 태양은 항상 밝게 빛나고 있건만 먹구름이 그 온전한 빛을 가리기도 하니, 가리운 것만 거두면 이내 찬란한 광명을 되찾을 수 있다. 이 구름장을 제거하는 노력이 곧 마음을 관리한는 작업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름을 제거하는 선교 방편(善巧方便)은, 구름 여하와는 상관없이 태양은 항상 밝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해 버리는 것이다. 곧 내 마음이 부처의 마음과 다르지 않음을 확신하는 것, 이것을 밑바탕으로 해서 마음관리가 구체적으로 행하여지지 않는다면 행복과는 점차 멀어질 수밖에 없다.

 

또 행복의 조건으로 중요한 것은 관계 좋음이다.

어떤 심리학자는 인간이 내적으로 불행해지는 확실한 이유를 사회화 과정이 잘 못된 데 두었다. 사회화 과정은 곧 인간 관계이다. 어렸을 때부터의 부모와의 관계, 동생과 누나와의 관계, 이웃 친지와의 관계, 선생님과의 관계 등, 뭇 관계가 좋아야 하는 것이 행복의 요긴한 조건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수긍할 것이다.

앞으로 몇 회에 걸쳐서 이 두가지 조건, 즉 마음관리와 인간 관계를 주제로 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먼저 마음관리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행복의 결정적 요인은 사고방식이다.

 

행복은 항상 어떤 요인에 의해서 일어난다. 행복은 정서 상태이다. 정서는 홀로 일어나는 법이 항상 무엇인가의 대상에 의해 일어난다. 하다 못해 꽃 한송이를 바라다본 이유만으로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친한 친구에게서 걸려온 전화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는 것이다. 기분이 좋기는 한데 이유를 모르겠다는 소리는, 이유가 분명히 안잡히기 때문이지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으며, 모든 것은 더불어 관계함을 통해서 존재한다.

행복의 결정적 요인은 사고방식이다.

'베크'라는 심리학자는 "정서는 사고에서 나온다. 사고는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 고로 정서는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사고로부터 정서가 나오고 사고는 선택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최고의 정서[깨달음,  解脫 등의 핵심은 정서이다]를 체험하려면 사고를 재조정하면 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사성제(四成濟)를 심리학적 언어로 잘 갈파한 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게서 깨달음을 이루신 다음에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하신 첫 설법의 내용은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사성제였다. 우리 마음이 괴롭다[苦], 그 괴로움의 원인은 이러이러한 것이다[集], 원인을 없애면 괴로움이 사라진다[滅], 괴로움이 사라지고 멸이 현전하게 하는 방법론이 있다[道]는 것이다. 이 도(道)에는 여덟 가지 방법[八正道]이 있는데 그중 첫번째가 정견으로, 방법론의 핵심이며 도(道)의 체(體)가 된다.

이 정견은 존재론적 정견과 가치론적 정견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이 두가지 형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존재론적으로 바라다본다는 말은 대상을 보면서 "이것은 꽃이다" "이것은 책이다" "저분은 선생님이다"라고 아무런 감정 평가 없이 그냥 사고(思考)만 적용하는 것이다. 그런에 우리는 불가피하게 가치론적으로 발달되어서, "저것은 꽃인데 얼마짜리일까"하고 가격으로 환산해서 바라다보거나 자기 감정을 삽입시켜서 바라다보게 된다.

 

아무튼 가치론적인 견(見)이든 존재론적인 견이든 바로 보는 견해라면 우리는 보다 행복할텐데 대상을 그대로 보는 바른 견해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더 큰 행복을 누리는 데 장애가 된다.

우선 존재론적 정견부터 연찬해 보자.

 

 

내가 없는데 괴로움은 어디에

 

우리 인간이 욕구(탐심)를 갖고 있다. 식욕, 수면욕, 성욕, 안전(安全)욕, 물욕, 명예욕, 권력욕 등 무수하게 많다. 우리는 이들 욕구가 성취되면 기뻐하고, 욕구가 좌절되면 슬퍼한다. 그런데 욕구가 성취될 때 행복해진다는 이 말을 잘 살펴보면 완벽한 말이 못 된다. 욕구가 성취되었다고 생각하면 행복의 정서를 체험하게 되고 욕구가 좌절되었다고 생각하면 불행의 정서를 체험하게 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욕구가 성취되었다고 밖에서 아무리 객관적 사실을 얘기해도 내 속에서 인정이 되지 않으면 행복하지 못한 것이다. "3억 정도 벌었으면 이제 성공한 것 아니냐?"고 주위에서 얘기해도 "아니야, 아는 10억 정도는 벌어야 성공이라 할 수 있지!"라고 스스로는 성취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행복을 느낄 수 없다.

중생심은 욕구가 성취되었다고 생각하면 기뻐하고 욕구가 좌절되었다고 생각하면 불쾌해 하는, 쾌-불쾌-쾌-불쾌의 윤희를 거듭한다. 그럼 이 수준 낮은 행복으로부터 수준 높은 행복으로 어떻게 올라갈 것인가.

 

인간에게 욕구가 있을 때는 그 욕구 이전에 욕구하는 '나'가 존재하게 되고, 욕구의 '대상'이 존재하는 법이다. '나'와 '욕구 대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한, 욕구하지 않기는 어렵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 밝히신 법은 욕구의 뿔히가 되는 주(主)와 객(客)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대각(大覺)을 이루시기 전 죽음에 대한 불안이 꾸준히 따라붙자 이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벗어날까를 사유해 나가시다가 스스로 어디에 걸려 있는지를 아시게 됨으로써 나온 법칙이다. 부처님께서는 출가 후 여러 외도 스승들 밒에서 갖가지 수행을 하며 기적적인 경지까지 체특했지만 죽음에 대한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또 고행의 방법을 통해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하도록 수행했지만 해결이 되지 않자, 다시 원기를 회복하여 보리수 아래에서 3*7일 동안 명상을 하며 이치를 궁구해 나갔다.

 

첫째는 "나는 죽기 싫다", 둘째는 "그런데 나는 죽는다", 이 두가지 명제를 함께 가지고 있는 자신을 주시하게 된다. "나는 죽기 싫은데 죽을 수밖에 없다"라는 모순을 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신 후 이 두 가지 앞에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 먼저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해결이 되지 않음을 아셨다. 나는 존재한다는 대전제가 과연 올바른 것인가를 검토해 보아야지 그 문제를 제외해 놓고 아무리 밑에서 해결하려 해 봐야 안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과연 나는 존재하는가"를 정사유(正思維)하셨다. 그리고는 '나'라는 존재는 연기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렇게 '나'라고 하는 것은 연기적 존재이므로 이때까지 '나'를 주장하며 살아 온 것은 마치 그림자를 놓고 실체라고 믿고, 눈병환자가 어깨비를 보면서 달이 있는 것처럼 본 것과 마찬가지이다.

 

'연기고공(緣起故空)'이다. 대전제인 "나는 존재한다"할 때의 '나'는 실체가 없는 연기적 존재이다. 고로 공(空)이다. 다시 말해서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은 곧 주격의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이니, 따라서 죽기 싫은 자[주체]도 사라져 버린다. 곧 아공(我空)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도 모두 살펴보니 연기적 존재 아닌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것이 법공(法空)이다. 석가모니가 중생들을 보니까 한결같이 "나는 존재한다" "너는 존재한다" 해놓고 여기에 욕구가 나와서 아등바등 괴로워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가치관을 바로 세워야

 

석존께서는 중생들이 내는 그 욕구는 성취되면 성취될수록 더 큰 욕심을 내고 좌절되면 좌절됨으로 해서 슬퍼서 분노하고, 분노하면 욕구는 더 커지는 중생살이를 보시고, 나도 깨달음을 얻었으니까 중생들도 가능할 것이다 하고 다섯 비구를 위시해서 45년간 법을 설하였다.  

팔정도 중 그 벽두에 정견을 설하셨는데, 바로 팔만대장경은 정견의 숲이라 할 수 있다. 무수한 나무 하나하나가 다 정견이라는 나무인데 그 중에서 제일 큰 아름드리 나무는 무아(無我)라는 나무이다. 곧 무아야 말로 정견 중 정견이다. 아공이라는 정견이 있는 자리에는 욕구가 들어 설수 없기 때문에 욕구를 성취하느니 마느니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욕구의 주체인 '나'가 공(空)하므로 욕구의 객체인 역시 공(空)할 수 밖에 없고, 욕구의 주객(主客)이 돈망(頓忘)하니 툭 트인 해탈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고로, 사고를 바르게 함이 행복을 위해 요긴한 일이다. 정견이라는 방편을 놓치고 다른 방편에 매달려 있다면 지말(支末)에 끄달리고 있는 것이다. 정견을 현대말로 표현하자면 바른 가치관, 바른 세계관, 바른 인생관 등이다. 정견(正見)을 정립하지 못하면 그 인생 제대로일 수 없다. 목숨이 끊어지는 것은 몸둥이 하나만 문제가 되지만, 가치관이 잘못되면 혼이 망가지는 법이다. 세세생생 그 망가진 혼의 인과를 받아야 한다.

마음관리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곧 정견 정립을 어떻게 할 것인가로 집약이 된다. 우리들은 이런저런 나름대로의 견해로 정립이 되어 있을 것이다. 많은 경우, 활불교(活佛敎)적으로 정립되어 있기보다는 관념 불교, 죽은 불교, 머리 속에만 있는 불교로서의 가치관 정립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 우려 된다. 이때 이 자리, 이 순간이 곧 삶의 도(道)가 되고, 멸(滅)이 되어야 한다. 이때 이 순간의 나의 손짓 발짓이 도가 되어야, 그것이 활불교이다. 관념적으로 머리 속에서 정리하는 불교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까지 정견의 중요성과 존재론적 정견을 강조해 보았다. 이어서 가치론적 정견을 밝힐까 한다.

 

 

* 출처: 용타스님 명상록 "마음 알기 다루기 나누기" - 대원사

* 주니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좋은 생각으로 머릿속 채우기



행복해지자! 나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자!

그럴려면 웃는 연습을 해야한다. 밝은 표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를 억지로 옭아매지는 말자!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파란 가을하늘로 치유하기


 

아프다는 말 그만해야지.. 아프다 아프다 하니까 더 아프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아프지도 않고 우울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날엔 옥상도 좋고 계단도 좋고 그런 곳에 앉아 하늘을 보면 좋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인어공주



 ♪ 인어공주 中 - 바다의 선율2 ♪


 






느낌이 좋았던 영화.. 박해일의 웃음이 있어서 더 따뜻했던 영화..

이 영화를 생각하면서 진보캠프 중간에 강의실에서 이 음악을 들었던 적이 있다.

이 음악을 들으며 창밖을 바라보는 느낌은 형언할 수 없을만큼 오묘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맥가이버



♪ 맥가이버 ♪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머리 긴 남자! *^^*

예전엔 좋아라하면서 미쳐났었는데 다시 생각해보건데

맥가이버는 미국 자본주의의 철저한 하수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한때 선거정책에서 인용하려고 했었듯이 미국의 이미지를

착한 자본주의 국가쯤으로 굳히려했던 매체의 산물이 아니었나 싶다.

13일부터 케이블 방송에서 다시 해준댄다. 아~ 다시보면 어떤 느낌일까?

내용을 다시 살펴보기 위해서라도 한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드라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랑하는 날에 -서영은


♪ 미술관 옆 동물원 ♪

 

 

어떤 네이버 블로그에서 찾아냈다.

정말 보물같은 영화.. 행복해지는 영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미술관 옆 동물원

         

 

넌 남을 배려해서가 아냐..

단지 자신이 상처받을까봐 그게 두려워서 일부러

안타까운 짝사랑을 하는 척 즐기고 있어!

액자속의 그림을 보듯, 창밖의 풍경을 보듯..

넌 비겁해! 평생 사랑을 못해볼꺼야!

- 미술관 옆 동물원 中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