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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공산주의자 201(2019년 8월)호] 천황제에 있어 ‘상징’의 기능은 무엇인가 : 즉위의식을 이용한 아베의 전쟁·개헌공격 분쇄를 위하여①

원문: 季刊『共産主義者』 201号ー労働者の総決起で改憲と大軍拡の安倍倒せ!

 

 

일본의 좌파조직인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전국위원회(중핵파)의 기관지 《계간 공산주의자》 201호에 실린 글을 3번에 나누어 옮깁니다.-옮긴이
 

 
목차
 
0. 들어가며
 

1. 노동자인민에게 천황제란 무엇인가

(1) 지금의 천황제는 근대의 산물

(2) 후발주자 일본의 국가통치요소로서의 천황제

(3) 천황제에 왜 반대하는가

(4) '천황제'는 천황제 타도를 의미하는 단어

 

2. 전후 천황제의 '상징'이란 무엇인가

(1) 천황제의 핵심부분이 전후에 남겨졌다

(2) '전전천황제=예외'론의 속임수

 

3. 천황제 특유의 치안탄압·전향정책

(1) 특고경찰과 사상검찰-고문과 전향유도

(2) 전향집단·일본공산당의 과거와 현재

 

 

[계간 공산주의자 201(2019년 8월)호]

천황제에 있어 ‘상징’의 기능은 무엇인가 : 즉위의식을 이용한 아베의 전쟁·개헌공격 분쇄를 위하여

–카시와기 토시아키(柏木 俊秋)

2019년 천황 즉위식과의 대결에서 무엇이 요구되고 있는가. 전후(戰後) 상징 천황제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근대 일본과 천황제의 관계에서 ‘상징’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0. 들어가며

4~5월의 신 연호 발표→[아키히토의] 퇴위, [나루히토의] 즉위의식에서 천황 교체의 전반 과정이 끝났다. 2020년을 앞둔 이 과정이 대공황과 전쟁정세의 절박한 상황 아래 아베의 전쟁·개헌공격, 「일하는 방식 개혁1」공격과 노동자 인민 일대의 계급 공방으로서 이루어진 것이 큰 특징이다.

아베가 짜낸 ‘레이와 피버2’ 소동의 미심쩍음을 날려버리고, 노동자계급의 긍지와 미래가 달린 5.1 신(新)천황 즉위의 날을 본래의 ‘투쟁하는 메이데이’로 되찾았다. 4월 통일지방선거에서 도쿄 스기나미구(杉並区)의원선거의 승리(호라구치 토모코(洞口 朋子) 구의원의 탄생)는 아베의 목에 박힌 금빛 가시[와도 같았]다. 일본의 노동자계급 인민은 계엄상태 아래 ‘천황제 일색’을 물들이려는 아베 일당의 책동을 정면에서 맞받아쳐 분쇄할 기개와 행동력이 넘쳐있음을 보여주었다.

본격화되는 아베의 개헌공격과의 충돌. 노조파괴, 혁명적 정당 파괴 공격을 국철결전을 주축삼아 ‘전쟁·개헌저지! 대행진’ 운동으로 박살낼 중요한 순간이 왔다.

새 천황 나루히토는 5월 1일, 즉위 후 조견의 의식(即位後朝見の儀)에서의 ‘말씀’에서 “상황폐하[=아키히토]의 지금까지의 행보를 깊이 생각하며, 역대 천황과 같이 마음을 굳게 먹고 (…) 항상 국민을 생각하고 국민에게 다가가며 헌법에 따라 일본과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의 책무를 다할 것을 다짐”한다고 말했다. 아키히토나 히로히토가 해왔던 대로 ‘국가,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겠다는 선언이긴 하나 이 말이 갖는 의미가 중요하다. 이와 동시에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때의 ‘말씀’이 적힌 봉서(奉書)를 공손히 천황에게 건내고, 다시 [천황에게] 받아 나가는 시종들의 모습에서 천황제의 본질의 한 부분이 보인 것이다. 그것은 주군을 앞에 둔 신하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루히토도 주군의 태도로 응했다.

다음으로 인사한 아베는 “영매한3 천황폐하께서 (…) 말씀을 내려주셨습니다.”, “레이와 시대의 평안과 황실의 번창을 기원합니다”라며 전쟁 이전과 같은 말로 축하하였고, “긍지 있는 일본의 눈부신 미래, 사람들이 아름답게 힘을 모으는 가운데 문화가 나고 자라는 시대를 만들어낼 것을 결의”하는 등 아베류(流)의 일본주의를 떠들어댔다.

신 천황 아래 신 황후인 마사코(雅子)가 전면에 내세워져 ‘레이와의 황실 외교’를 연출하는 것으로 ‘상징으로서의 의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트럼프 방일과 황실 외교의 치켜세우기는 아베의 ‘오모테나시4 외교’의 천박함과 미국-일본간의 쟁투전에서의 패색을 부각할 뿐이다. 6월 28~29일의 G20 오사카회의, 7월 참의원 선거를 지나 가을엔 천황 교대 의식의 본격적 부분인 10.22 즉위의 식, 11.14~15 대상제(大嘗祭)가 예정되어 있다. 11월 노동자대회의 압도적 성공을 실현시켜 개헌·천황 교대 의식 분쇄의 진형을 확대시키자.

본 원고에선 신 천황 나루히토의 행동과 교대 의식에 대한 구체적 언급보다 천황제의 기본적 문제들, 특히 천황제에 있어 ‘상징’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어 문제를 생각해보려 한다.

 

 

1. 노동자인민에게 천황제란 무엇인가

우리가 지금 문제로 보는 천황제는 말할 것도 없이 현재의 천황제, 전후의 이른바 ‘상징천황제’에 대한 것이다. 2019년의 천황 교대를 계기로, 이 상징천황제에 대한 노동자계급 인민의 태도가 요구되고 있다. 이를 위해서라도 전전(戰前)의 천황제, 대일본제국 헌법하에서의 천황제와 전후의 일본국헌법하에서의 상징천황제는 어떤 점이 다른지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전전 천황제는 안되지만 전후의 상징천황제라면 있어도 괜찮다”는 것인가, 그렇게 단정할 수 있냐는 문제이다. 본 원고에선 상징천황제를 포함하여 천황제는 타도·폐지의 대상이라는 입장에서 문제를 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천황제’란 무엇인가? 대체 ‘천황’이란 어떤 존재인가?-많은 사람들이 처음 생각하는 것은 천황은 ‘일본에서 유일한 가계(家系)에서 태어나 특별한 지위와 특권과 막대한 재산을 갖고 국가적으로 보호되는 존재’, ‘황거라는 특별한 장소에 살며, 서민과는 동떨어진 세계에 사는 인간’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천황의 그러한 ‘특별·유일’, ‘길고 긴 역사’라는 점을 들어 천황과 천황제를 마치 ‘신비적인 힘’이나 ‘전통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일 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금 세상에서 그런 ‘특별한 존재’나 ‘초월적 권위’가 필요한 것인가? 아베가 말하는 것처럼 “천황제가 없다면 일본이라는 나라와 국민은 금세 너덜너덜해질” 것인가? 아니면 천황제는 있어도 없어도 좋은 존재인 것인가?-이에 대한 물음의 대답이 본 원고의 주요 목적이다. 반드시 ‘천황제 반대’가 전제이진 않은 많은 노동자민중을 향해 천황제에 대해 말하려 할 때, 이러한 물음에 성심성의껏 대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베나 자본가 계급, 일본회의5 등의 천황제 찬미의 뿌리는 전전과 같은 ‘만세일계6’ 신화다. 다만 고대에서부터 몇 번이나 ‘왕조의 교대’가 있었고, 그것[=만세일계]이 커다란 거짓말임은 아베 일당은 알고 있기에 천황제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내세우는 것이다. 한편 일본공산당 같은 기성야당이나 노동운동의 지도부, 리버럴들 또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질질 끌려다니는 듯 “황실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말한다. 그리고 현재의 상징천황제를 무조건 필요한 것으로 인식, 미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괜찮은 것일까. 왜그러한 관념이 노동자민중을 휘어잡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우리의 천황제 논의를 시작해야만 한다.

본 원고에선 이상의 문제의식에서 천황제 비판을 할 것이나, 주로 천황제의 다음과 같은 점을 짚을 것이다. ①근대 천황제의 성립과 일본 자본주의의 관계, ②전전 천황제와 전후 천황제의 관계(연속면과 비연속면, 계승성과 절단성), ③천황제 특유의 치안 탄압체제, ④일본공산당 비판.

 

1) 지금의 천황제는 근대의 산물

먼저, 천황제의 역사가 천 년 넘게 거슬러 올라감을 인정하더라도 천황제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근대 일본의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두 번째로, 근대 천황제의 경우에도 전전 대일본제국헌법하에서의 천황제와 전후의 상징천황제는 어떤 관계인지, 그 차이는 무엇인지를 고민하고자 한다.

먼저 첫 번째 지점에 대해 살펴보자.

천황제는 한마디로 19세기 후반의 메이지유신에 의해 새로이 만들어진 정치적·인위적 구조물이다. 그 이전의 에도시대(도쿠가와 막부 당시)까지의 천황의 존재는 아예 다르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그것[=천황제(근대 천황제)]이 메이지유신과 함께 시작된 일본의 근대화, 즉 일본 자본주의의 형성·발전의 역사와 하나이며, 정치권력자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져 의식적으로 강화된 것이라는 특이한 국가 통치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사회의 자본주의화(化)라는 사태는 이전의 어떤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규모와 철저함으로 구(舊)사회를 뒤집고, 인간의 생활과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버리는 세계사적 충격력을 갖고있기 때문이다(물론 실제 과정은 그렇게 쉽게 진행되지 않고 구 체제와의 타협과 우여곡절을 겪지만).

그러한 일본의 자본주의화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 근대 천황제다. ‘천황제가 새로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19세기 중반, 1853년의 ‘흑선내항7’을 역사적인 전환점으로 하는 소위 에도 막부 말기 과정에서 도쿠가와 막부에게 반기를 든 서남웅번(사츠마, 조슈, 토사, 히젠 번 등)의 하급 무사들은 일부 공가(公家)와 자신의 번(藩)의 상층부를 끌어들여 도막(倒幕)운동을 전개했다(당초의 존황양이(尊皇攘夷)에서 존황도막(尊皇倒幕)으로). 그 과정에서 도막의 정통성의 상징으로서 나온 것이 교토 어소에 있는 천황이었고, 그것을 상징하는 ‘니시키노미하타(錦の御旗)’였다.

에도시대의 천황은 막부의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의 통제 아래 놓여 정치권력에서는 분리된 명목적 권위뿐인 존재에 불과했다. 재정적으로도 작은 다이묘 급의 가난한 귀족이었으나, 역대 쇼군의 ‘센게(임명)’는 천황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등 [천황은] 도쿠가와 쇼군 집안에게 국가지배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유일한 존재였기에 지배계급내의 권위만은 높았다. 특히 에도시대 중반 이후로는 국학(과 미토학(水戸学)), 신토의 대두로 천황의 존재와 황국의식이 지배계급 안에서 높았으나 민중의 차원에선 교토, 기나이(畿内)지역은 천황의 존재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한 천황(구체적으로는 고메이(孝明)천황과 그 아들인 무츠히토(睦仁)=메이지 천황)을 이용해 막부를 무너뜨리고 정치권력을 손에 쥔 메이지유신(1868년)의 정부 지도층은 처음엔 ‘왕정복고’를 주창하며 고대 율령시대로의 회귀(천황친정과 태정관제)를 내걸었으나 바로 그 시대착오성에서 알아챌 수 있듯 천황을 정점으로 한 근대적 중앙집권국가=‘국민국가’의 형성으로 선회했다.

그 신호탄으로 에도의 이름을 도쿄로 바꾸고, 15세의 천황 무츠히토를 데리고 가 도쿄를 수도로 정했다(도쿄천도). 그리고 천황과 황후를 ‘문명개화’, ‘서양화’의 견인차=모델로 삼는 한편 국민에게 ‘보이는 천황’, ‘보여지는 천황’으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그중에서도 천황의 행차 연출이나 소학교 외의 ‘고신에이(御真影)8’의 활용(봉안전에 천황의 사진을 넣고 경례를 의무화함)등을 정력적으로 시행했다.

그 배후엔 천황가에 국가재산 대부분을 이전하고 황실의 물질적·제도적 비대화를 꾀했다. 특히 자유민권운동의 고양과 헌법제정(1889년), 국회 개원(1890년)을 앞두고 정치적 격동이 천황과 황실에 미치지 않도록 재정적 측면에서도 여러 가지 계획이 획책되었다. 막부나 여러 다이묘들에게서 가져온 주요 광산이나 비옥한 산림과 농지를 ‘고료지(御料地)’, ‘고요테이(御用邸)’라는 이름으로 황실의 소유로 하고, 유력 기업의 주식이나 증권을 대량으로 황실재산에 편입했다. 이것은 이윽고 전국의 대지주·부농층과 대기업·재벌과 황실의 강력한 결합·유착을 만들어냈다. 미츠이(三井), 미츠비시(三菱), 스미토모(住友), 야스다(安田) 등 후의 대기업·재벌은 황실과의 결합을 통해 지반을 굳혔고, 천황 직속의 군대가 지배하는 타이완, 조선의 식민지경영으로, 또 다음엔 ‘만주국’ 지배로 거대한 이익을 올렸다. 대일본제국헌법이 제정된 시점엔 정부와 병립하는 모양으로 황실이 ‘성역’으로 우뚝 솟아올랐다. 황실은 일본 제일의 대지주였고, 일본 최대의 자본가·자산가였고, ‘아라히토가미(現人神)’로서 인민의 위에 초연히 군림하는 존재가 되었다.

새 정부의 지도층은 전국의 사족반란9, 농민 잇키10, 도시에서의 소요가 계속되는 내란정세 속에서 구미(歐米) 자본주의열강에 의한 아시아 침략·식민지화의 압력에 대항하며 일본을 급속하게 근대화=자본주의화를 이루기 위해선 천황의 ‘초월적 권위’를 최대한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근대화 정책=부국강병·식산흥업정책의 선두(정신적·이데올로기적 지주)를 천황·황실에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서도 일본의 경우는 서구 자본주의국가와 달랐다. 자본가=부르주아 자신이 하나의 사회세력으로서 부르주아혁명의 선두에 등장하기 위한 준비와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 대신하여 국가가 자본주의제도·기술 도입과 함께 자본가 그 자체의 육성도 하는 통일국가형성의 과정을 거쳤다. ―이 즈음의 사정에 대해선 본지 196호에 실린 미즈키 유타카(水樹 豊)의 논문인 「천황제 타도론의 현재적 목적 확립을 위하여」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기에 참조하고자 한다. 이 논문은 고 혼다 노부요시11서기장의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론」을 통해 메이지유신부터 20세기로의 과정을 “절대주의천황제에서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로의 전화(轉化)”로 간략하게 묘사한다. 천황제 보나타르트주의에 대해서는 본 원고가 보완적 의미로 서술하는 것으로 갈음한다―

메이지유신과 일본자본주의의 형성에 대해선 이 시기가 세계사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자유주의단계에서 제국주의단계로의 이행기에 해당하는 시점이었음이 결정적이었다. 구미 자본주의열강의 ‘외압’으로 도쿠가와 막부를 쓰러뜨리고 국가적 독립을 확보하며 본격적인 근대화=자본주의화에 나선 일본의 경우 당초 성립한 유신정권은 봉건제에서 자본제로의 과도기의 정권으로, ‘절대주의정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아래에서 20~30년간의 초단기간에 자본의 원시적 축적(상업자본과 노동력의 축적)을 이루었고, 그것과 시기적으로 겹치는 산업자본의 형성을 고려해보면 ‘유사전제(有司専制)’라 불리는 사츠마, 조슈 중심의 독립적인 번벌정부의 아래에서 군사적·경찰적인 관료기강을 만들고 그 정점에 천황을 비롯한 일련의 근대화 정책을 강권적으로 단행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절대주의적 천황제 국가는 세계사적인 경향에서 말할 수 있듯이 ‘절대주의’로서의 확립·완성이었다고 말하기보다 오히려 성립직후부터 그 내실을 조금씩 바꾸며 더욱 자본제적 부르주아 국가로서의 성격을 강화했다. 거기에 청일전쟁(1894~1895), 러일전쟁(1904~1905)을 통해 제국주의 국가로의 도움닫기가 가능했다.

1889년(메이지 22년) 성립된 제국헌법은 천황제 절대주의의 도착점인 동시에 근대적인 천황제 보나파르트주의로의 전환을 잠재적으로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천황에게 헌법 위의 절대적 권한=천황대권(天皇大權)을 부여하는 동시에 천황의 일체의 정치적 책임에서 해방시켜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초월적 권위자로 성역화하는 모습에서 나타났다. 이는 구 봉건세력이 아직 강력하게 잔존했기에 이에 대항하려는 것만은 아니었다. 헌법제정과 의회정치의 개시가 이끌 새로운 요소인 계급정세의 격변에 의한 거대한 불안정요인의 출현을 두려워한 것이었다. 바꿔말하면, 자본주의체제를 전복할 세력의 대두-즉 프롤레타리아의 대량출연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침략전쟁과 식민지 확대에 대한 타민족 인민의 불만과 분노에의 공포와 합쳐졌다.

또, 개설된 제국의회는 귀족원과 중의원이 있는 양원제였으나, 귀족원 의원은 황족·화족12의원, 고액납세자의원(지주층), 칙선13의원 합 252명으로, 기본적으로 천황·정부에 의한 선임이었다. 정원 300석의 중의원 의원은 국민의 선출[로 구성된다]하나, 선거권자는 직접 국세 15엔 이상을 답부하는 25세 이상의 남성으로, 피선거권자는 30엔·30세 이상의 남성으로 제한된 선거였으며 유권자수는 총 45만명(홋카이도, 오키나와 제외)으로 내지14 인구의 1.14%에 불과했다. 제 1회 중의원선거는 정부·여당의 매수공작·선거 간섭(천황 자신이 매수금이나 방해자금을 ‘하사’)하에 이루어졌으나 결과는 구 자유당과 개진당 등의 야당=‘민당’이 과반을 점했다(171석). 일반적으로는 메이지 헌법의 성립을 기해 일본이 아시아에서 유일·최초인 ‘입헌군주제 국가’가 되었다고 하나 영국과 독일(프로이센)제국을 모범으로 한 헌법체제는 기이한 외견상의 입헌주의를 보여줄 뿐이었다.

특히 천황제 조항이 문제가 된다. 앞서 말한대로 ‘천황대권’을 가진 천황이 ‘신성불가침’의 영역, ‘정치적 무책임’을 가진 이상 사회적으로도 큰 힘을 가진 군대(육해군과 군부), 식민지총독부가 천황 직속으로 통수권을 내세워 의회나 내각에 개입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와는 거대한 차이가 있다.

그 중에서도 중대한 점은 꼭대기에 있는 천황이 일절 책임을 지지 않는=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점이 정부와 사회 전체를 상명하복식의 폐색적인 사회를 만들었고, ‘무책임의 체계’를 전체적으로 구조화하는 결과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15년간의 전쟁의 과정에서 극한에 도달한다. “황송하게도 천황폐하의…15”라는 말이 꺼내진 순간 시간이 멈추고 모두가 직립부동의 자세를 취한다. 누구도 반대할 수 없고 무엇도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만들어져 사회에 금기와 자숙, 자기규제, 촌탁과 은폐가 만연해졌다. 천황제는 사람들에게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는 체제,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체제였던 것이다. 그것이 최악으로 나타난 사례가 ‘천황의 군대’가 행한 수많은 잔혹행위였고, 패전 직후 도쿄재판과 천황의 전쟁책임의 면책16이었다. 게다가 이것이 전후 사회를 규정해 천황과 일본정부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침략·전쟁 책임을 일절 부정한 채로 오늘날에 이르렀다. 종군위안부문제와 징용공문제는 오늘날의 전쟁문제인 것이다.

 

 

2) 후발주자 일본의 국가통치요소로서의 천황제

앞서 말했듯 제국헌법에 의거해 천황은 ‘천황대권’을 법적으로 부여받았다. 천황은 유일한 주권자이며(천황주권) 국가원수이고, 통치권의 총람자, 육해군의 통수권자(대원수), 국가적 제례의 제주(祭主)이기도 하는 등 무한하다고 할 수 있을 ‘천황대권’을 가지고 있다. 마치 절대적 전제군주의 모습같지만 제국헌법 하에서의 천황은 절대군주도 전제군주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통치권의 소유자가 아니라 ‘총람자’였듯이 천황은 ‘국무대신의 보필’로 통치권을 ‘총람’=통할하는 관계이며, 실제 행사는 천황을 보좌하는 국무대신(과 그 집합체인 내각)이 하였고 천황은 통치상의 책임을 일절 지지않았다(천황의 정치적 무책임). 그 자체가 얼토당토않은 꼼수였다. 그리고 이것에 천황제 통치형태의 핵심이 있다.

이토 히로부미 정부가 그러한 기만적인 법적장치를 둔 이유는 천황을 헌법의 틀 안에 위치시킴으로써 외견상 ‘입헌주의’, ‘입헌군주제’의 모습을 보이고 천황과 천황제에 정치적인 책임이나 위험이 미치지 않도록 하기위한 예방적[성격의] 반혁명적 장치였다. 설령 정부가 무너져도 천황제 국가 자체는 꿈쩍하지 않도록 형태를 만든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러한 교묘하고 교활한 장치에 천황을 ‘신성불가침’의 절대적 권위자로 추대해 그 아래에서 정부의 전제적인 강권지배를 관철, 전쟁과 억압적 정치를 종횡무진하게 전개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교활한 겁쟁이인 일본의 자본가계급은 천황=국체의 그러한 권위·권력을 빌려 폭리를 취했다. 그 근저에는 항상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공포, 직접적으로는 번벌 관료정부에 대한 민권파와 민당세력, 민중반란의 공포가 있었다. 그리고 침략·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아시아민중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에 대한 공포도 강하게 작용했다. 그렇게 천황제는 후발주자인 일본자본주의·제국주의의 국가통치 요소로서 일본의 지배계급에게 절대 빠질 수 없는 기둥이 되었다.

그렇다면, 천황이 가진 기능·특성이 정부·지배계급, 국민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인가. 앞서 “근대의 천황제는 그 전의 천황제와 완전히 다르”다는 “근본적 차이”를 강조했으나 한가지 결정적으로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그 시기의 권력자(지배집단)에게 “지배의 정통성을 부여”하거나 “공적 권위를 부여”하는 기능이다. 즉 지배계급 내부의 권력투쟁이 단순한 사적차원이 아닌 유력한 한 진영에게 ‘공적 권위=사회전체를 위한 싸움’이라는 칭호를 붙여 ‘공권력’으로 합리화하는 역할이 천황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기능이었다는 것이다(이토 아키라(伊藤 晃)씨의 『「국민의 천황」론의 계보(「国民の天皇」論の系譜)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관계에서도 그러하였다. 특히 근대 이후엔 천황의 이름으로 민중 그 자체를 ‘국가에 속한 백성=국민’으로 규정하였다. 이를 통해 천황 자신이 ‘국민의 천황’이 된 관계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가지, 이 점에서 덧붙이자면, 이 ‘규정지음’이라는 기능의 ‘공통성’이 있는 동시에 근대의 천황제와 그 이전의 천황제가 다를 수 있는 것은 (이토 씨도 서술하였듯)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자본주의화의 과정이 구미 선진국과 같이 ‘국민국가’의 형성에 사활적이었다는 점에서다. 게다가 이에 더해 이 시기가 세계사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자유주의 단계에서 제국주의 단계로의 이행기라는 특수한 사정도 결정적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구미열강의 근대적 국민국가(민족국가)의 형성이라는 과제를 한두발 뒤처진 채 쫓아갈 수밖에 없었던 후발주자 일본의 경우, 천황제라는 일본의 독특한 권위주의적 통치체제 아래 ‘채찍과 당근’을 나눠 쓸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다(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부르주아지=시민계급이 스스로의 정치적 행동을 통해 시민사회와 정치국가를 만들려 한 역사적 경험 없이 근대화라는 과제에 직면한 일본의 특수 사정).

여기서 메이지유신의 정치적 지도층은 자기자신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천황제에 그 지배의 정통성을 구하려 하는 주객전도 식의 모순된 관계에 빠졌다.

 

 

3)천황제에 왜 반대하는가

다시 말해, 천황제의 어디가 제일 문제인 것일까, 왜 반대하는 것일까에 대해.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천황제의 본질은 노동자계급 인민의 계급성을 해체, 말살해 ‘계급융화’를 꾀하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초월적 권위를 갖고 ‘국민을 하나로 한다’, ‘국민의식을 개조’하는 상징으로서 천황제가 존재한다.

따라서, ‘특별한 존재’인 천황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노동자계급 자기해방의 사상과는 어울릴 수 없다. 천황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적대물이다. 이는 파리코뮌의 노동자계급의 궐기의 모양을 이곳에서 직접 경험한 근대 일본의 건국자들이 가진 ‘혁명에 대한 공포감’과 연결되어 있다.

둘째, 다른 면에서, 천황제의 본질은 폭력성·흉폭성(천황제 테러, 치안탄압)과 가짜 이데올로기(사이비 공동체성·평등성)이다. 그 위에 성립된 천황에 의한 인민의 포섭과 동화는 항상 배제의 논리와 등을 맞대고 있는 것이다. 천황의 존재 자체가 차별주의·배외주의·선민주의(엘리트주의)의 발로이며 근원이다. 이는 일본 자본주의의 역사정 본성 그 자체라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민족차별과 여성차별·부락차별·장애차별·오키나와 차별·아이누족 차별 등 모든 차별이 천황제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

셋째, 천황제는 전쟁과 침략·식민지주의의 대명사다. 메이지유신 이래 천황제국가의 ‘일군만민17’사상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 諭吉)의 ‘탈아입구’사상과 연결되어 아시아 침략의 사상으로 확대되었다(1915년 전쟁 말기엔 ‘오족협화(五族協和)’, ‘팔굉일우(八紘一宇)’, ‘대동아공영권’사상으로). 이는 전전 천황제의 특유한 점만은 아니다. 지금부터의 전쟁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일본 자본주의의 ‘생명보다 돈’ 정책과 한몸이며, 오늘날 아베의 ‘일하는 방식 개혁’공격, 노동운동 절멸 공격과 연동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천황제의 전쟁책임 문제는 오늘날의 대결과제이며, 노동자 국제주의의 살아있는 과제이다.

넷째, 제사와 의식이야말로 천황제의 생명이다. 국가 신토·황실 신토의 내용물이 비어있으니 형식·형태(외견상)에 의존하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재로 이어지는 제사 의식과 교대 의식의 꺼림칙함, 황당무계함이 이를 보여준다. 히로히토도 아키히토도 나루히토도 무엇보다 이것을 중요시해 ‘지켜’왔다. “진무천황18부터 시작되는 수구불변의 황실 전통”이라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것들을 인정해선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은 없다.

다섯째, 천황제국가에 있어 치안탄압정책은 독특한 의미와 위치를 갖고 있다. 그것을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정책·전쟁국가 만들기와 한몸인 것으로 항상 강화되어 왔다. “천황은 신(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19)의 자손”,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의 나라”라는 국체사상의 아래에서 국가권력, 특히 경찰·사법권력이 “국체보호를 위해선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식의 강권과 폭력을 떨칠 수 있게 되었다. 이 점은 3장에서 다루고자 한다.

 

 

4) ‘천황제’는 천황제 타도를 의미하는 단어

무엇보다 ‘천황제’라는 단어 자체가 20세기에 접어들어선 ‘혁명당’의 단어다. 에도시대 이전은 물론이고 메이지유신 이후에도 1930년대 초까지 이 단어는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개개의 천황은 ‘미카도(帝)’, ‘천황’, ‘천자(天子)’, 또는 ‘천조(天朝)’, ‘스메라기(皇)’, ‘스메라미코토’등으로 불렸으며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통치구조나 정치의 형태, 천황이 있는 장소는 ‘죠테이(朝廷)’, ‘다이리(内裏)’, ‘킨리(禁裏)’, ‘킨츄(禁中)’, ‘큐우츄(宮中)’등으로 불려왔다. 제도·지배시스템을 의미하는 ‘천황제’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31년 코민테른 일본지부였던 일본공산당이 쓴 「정치테제(31테제)」가 최초라고 여겨진다(초안의 문구 중에서 몇 번이나 ‘천황제’라는 단어를 사용, 마지막 슬로건의 부분에선 “천황제를 타도하자!”고 선언). 그 전엔 ‘천황제’라고 말할만한 것을 ‘군주제’라는 일반적·직접적 표현으로 말해왔다(1922년의 당강령초안이나 27테제에선 “군주제 폐지”라는 슬로건이 사용되었다).

어쨌거나, ‘천황제’라는 단어는 처음부터 천황과 그 국가체제를 향한 비판, 반 천황제·천황제타도(군주제 타도)의 의미가 들어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강령으로 내걸었던 일본공산당 스스로가 그 입장을 유효하게 실천화하지 못한 채 패배, 괴멸해 ‘천황제’라는 단어 자체도 본래의 계급성을 잃고 중성화(中性化)되어버린 것이다. 오늘날의 일본공산당은 이를 모두 버리고 ‘천황의 제도’라고 말하고 있다(후술). 민중의 차원에선 ‘천황제’, ‘상징천황제’라는 단어가 일반화되어있지만, 우익 천황주의자들은 지금도 기본적으로 ‘천황제’라는 말을 쓰지 않고 ‘황실제도’라는 말을 쓰고 있다(그것이 오히려 체제의 계급성을 느끼게 한다).

우리들이 지금 천황제라 말하는 경우는 이러한 패배의 역사를 넘어 일본 제국주의와 함께 천황제를 목적의식적으로 비판·타도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을 것이다. ―스탈린 지배하의 코민테른에 의한 ‘천황제 타도’는 그 자체에 “후발주자 일본은 먼저 봉건적인 천황제를 타도할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이라는 ‘2단계전략’에 의한 이론적 오류와 관료주의적 통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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