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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공산주의자 201(2019년 8월)호] 천황제에 있어 ‘상징’의 기능은 무엇인가 : 즉위의식을 이용한 아베의 전쟁·개헌공격 분쇄를 위하여②

원문: 季刊『共産主義者』 201号ー労働者の総決起で改憲と大軍拡の安倍倒せ!

 

 

일본의 좌파조직인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전국위원회(중핵파)의 기관지 《계간 공산주의자》 201호에 실린 글을 3번에 나누어 옮깁니다.-옮긴이
 

 
목차
 
 

1. 노동자인민에게 천황제란 무엇인가

(1) 지금의 천황제는 근대의 산물

(2) 후발주자 일본의 국가통치요소로서의 천황제

(3) 천황제에 왜 반대하는가

(4) '천황제'는 천황제 타도를 의미하는 단어

 

2. 전후 천황제의 '상징'이란 무엇인가

(1) 천황제의 핵심부분이 전후에 남겨졌다

(2) '전전천황제=예외'론의 속임수

 

3. 천황제 특유의 치안탄압·전향정책

(1) 특고경찰과 사상검찰-고문과 전향유도

(2) 전향집단·일본공산당의 과거와 현재

 

 

[계간 공산주의자 201(2019년 8월)호]

천황제에 있어 ‘상징’의 기능은 무엇인가 : 즉위의식을 이용한 아베의 전쟁·개헌공격 분쇄를 위하여

–카시와기 토시아키(柏木 俊秋)

 

2. 전후 천황제의 ‘상징’이란 무엇인가

 

(1) 천황제의 핵심부분이 전후에 남겨졌다

 커다란 두 번째 문제, 상징천황제란 무엇인가? 전전과 전후 천황제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현행 헌법의 제 1장 1조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그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국민의 총의에 기반한다”고 적혀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민주헌법’의 제 1장에 천황 조항이 놓여있는 것 자체가 모순의 극치다. 떼어붙여둔 듯한 “주권을 가진 일본국민의 총의에 기반”한다는 것은 공문구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의 총의”를 묻기 전에 이미 ‘세습천황’이 헌법상 특별한 지위를 보장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제 1장 1조에서 규정된 ‘상징천황’이란 전쟁으로 파산, 붕괴한 천황제를 전후에도 존속시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전전 천황제에서 전쟁과 억압정책으로 이어지는 ‘천황대권’을 떼어내면 그 뒤엔 ‘형식적 권위’가 남을 뿐이라는 생각 때문에 ‘상징(심볼)’이라는 언어를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인간을 ‘상징’으로 규정하는 등, 처음부터 모순이 넘쳤던 파산적 정치제도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주요하게는 미국의 점령정책·전후 세계전략의 상황에 맞춰 선택된 조건이었으며, 일본정부도 천황제=‘국체’를 남겨두는 것이 일본 자본주의·제국주의의 연명과 부활을 위한 유일한 피난처였다. 물론 그 근저엔 일본과 아시아 인민이 전후 제국주의에 강제한 ‘전전 일본의 전면부정’, ‘두번 다시 전쟁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사에 기반한 제약이 있었다.

 어쨌든, 천황제의 전전(戰前)적 방식이 기본적으로 부정된 것은 확실하다. 전전 일본을 뒤덮은 ‘일본은 천황중심의 신의 나라’라는 ‘국체’사상과 국가 신토·군국주의의 부정, ‘신격 천황’또는 국가원수·천황권위규정의 부정, 통치권·통수권의 박탈과 ‘천황의 군대’ 해체, 막대한 재산의 몰수=국유화 등 상당히 철저한 것이 있었다.

 반면, 천황제의 핵심부분이 남아 전후로 계승된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전전과 동일한 ‘만세일계’사상과 연관된 세습제(그마저도 남계 남자아이의 황위세습), ‘신성불가침’의 유일, 특별한 존재라는 지위, ‘황국신화’ 그 자체의 ‘3종의 신기(神器)1’, ‘연호제’, ‘야스쿠니 신사’, ‘황거(115만 평방미터)’, ‘료테이’등의 승계·보유다(연호는 일단 법적 근거를 잃었고, 야스쿠니 신사는 단순 종교법인으로 재편되었다). 이 모든 것을 ‘상징’이라는 말로 속이고, 천황제를 남긴 것이다. 즉, 천황과 천황제가 살아남았다는 점이 핵심 중의 핵심이며, 천황제의 존속을 토대로 일본 자본주의와 자본가계급도 살아남았다.

 전전 천황제의 핵심부분의 승계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사례가 있다. ‘천황의 인간선언(1946년 1월 1일)’이라 불리는 것이다.

"나와 우리 국민 간의 유대는 상호 신뢰와 경애로 맺어진 것이지 단순히 신화와 전설에 의한 것은 아니다. 천황은 신[現御神]이고, 일본 국민은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며 그래서 세계를 지배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가공의 관념에 기반을 두어서는 안 된다.2"

 일반적으로는 ‘신격성의 부정=인간선언’으로 찬미되나, 천황 히로히토는 여기서 ‘자신은 보통의 인간으로 돌아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는 언급되지 않고 다른 것을 말한다. “전전부터 천황은 국민과의 신뢰관계에 의해 강하게 연결되어 왔다”, “이는 신화나 전설, 가공의 관념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강고한 끈이다”, 그러므로 전후에도 같은 끈·상호신뢰관계를 강화해 공존하고 싶다는 주장인 셈이다.

 현행 헌법의 천황조항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국가의 상징과 국민통합의 상징’이라는 점에 있다. 이 점은 사실, 전전 헌법에서도 똑같았다. 천황이 일본국가와 일본 국민을 대표, 통합, 상징해왔다는 것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규정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천황이 국가와 국민을 ‘통합하는 상징’이었다는 점이야말로 전전·전후를 꿰뚫는 천황제의 핵심이다. ‘상징천황이 되었으니 안심’이라는 식으로 말해선 안될 문제인 것이다.

 천황이 ‘상징성’을 가졌다는 것은 천황 자신이 일정한 정치적 권력(권한·권능)을 가졌음을 의미하나, 그 이상으로 천황에게 ‘공성(公性)’, ‘정통성’을 부여받은 국가·정부의 현실에서의 강권 지배나 국가폭력을 ‘상징천황’이 추인, 지지한다는 점이 크다. 또한, [이는] 정부의 권력을 등에 업고 처음으로 천황의 기능이 발휘되는 상호의존의 관계이기도 하다(‘천황의 권위’ 속엔 국가의 폭력성·강권성이 내면화되어 있다). 즉 만세일계신화에 기반한 사이비 ‘공동체’ 이데올로기(및 국가폭력)로 천황 하에서 국민의 일체화를 획책하는 시스템을 전후 헌법에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능을 가지고 노동자계급의 계급성을 부정·해체도 꾀하려 하고 있다.

 전전·전쟁중의 신격천황은 ‘일군만민’, ‘일시동인3’이라는 ‘가족국가’관 아래 ‘국부’로서 국민에 임하는 태도, ‘오오미코코로(大御心)’, ‘인자’, ‘지혜’를 가지고 국민=신민을 거두어들이려 하였다(황후·황족의 ‘자선사업’참가도 포함). 현실의 강권정치가 가열찰수록 천황에의 환상이 생겨나는 구조다. 부르주아 독재를 위한 권위와 권력의 이원화, 전제적 정부와 ‘자애깊은 천황’상(像)이 전후에도 그 구조가 기본적으로 계승된 것이다.

 전후의 천황, 특히 헤이세이(平成)천황 아키히토(부부)는 천황제의 그 기능을 매우 의식적으로, “전심전력을 다해(아키히토의 말)” 추구했다. 쇼와천황과 같이 궁중의 제례와 전국순행을 중시했다. ‘헤이세이류(流)’라 불리는 ‘위령 여행’과 ‘기원’, ‘시정 사람들에게 다가가는’것이 그것인데, 이는 ‘정(情의) 회로’를 통해 사람들의 내면에 주입되어 천황과 국민 사이에 ‘마음의 공동체’를 만드려는 정치적 행위·정치행동에 지나지 않았다(이토 씨의 앞의 글의 지적이 날카롭다). 2016년 8월 8일의 천황 메시지 이후의 과정을 보면, 그것이 상당한 흡수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천황과 국민의 일체화”, “천황제에 의한 국민통합”은 지금 그러한 모양으로 진척되고 있다.

 이는 아키히토 부부의 ‘노력’에 의했음이 컸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노동자민중의 아베정치를 향한 분노와 반 원전의 표현이기도 했을 것이다. 게다가 언론과 자칭 ‘리버럴파’ 아키히토 부부 찬미와 과거 ‘천황제 반대’를 외쳐왔던 ‘좌익진영’, 일본공산당의 현재의 사상적 굴복·전향 상황이 크게 관여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천황제와 노동자계급인민의 본질적·현실적인 관계에서부터 말해보자면 이는 어디까지나 사안의 절반만 본 것이다. 패전 직후의 천황순행에 대한 전국의 노동자인민의 반응이 지금의 우리에게 시사점을 주고 있다. 당시 한편에서는 처음으로 가까이 볼 수 있게된 천황 히로히토를 둘러싸고 “만세!”의 목소리를 높이며 ‘열렬히 환영’한 같은 노동자들이 다른 날엔 “식량을 내놓아라!”며 대거 황거 앞 광장이나 황거의 안까지 몰려갔고, 1947년 2·1총파업에 기쁘게 궐기했다. 현실의 노동자계급 인민의 ‘편차’라고 할 수도 있고, 현실적으로 유연하고 확실한 행동력의 표현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계급을 믿고 그것에 철저히 의지한 전위당(혁명당)과 노동조합 지도부의 올바른 사상성과 노선적 활동이 있다면 천황제를 향한 민중의 태도·대응은 뿌리부터 달라질 것이다.

 현재의 천황이 얼마나 ‘국민과의 친화’에 힘을 쏟고 있는지를 노동자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천황의 힘에 의해 ‘평화와 번영’이 보장될 것이라 믿는 자는 없다. 그렇기에 천황측도 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심적 불안을 느껴 필사적으로 행동하려 하는 것이다.

 물론 천황에 의한 ‘국가·국민의 통합’이란 단순한 지배의 안정이나 질서유지를 위한 것만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전쟁동원에의 ‘통합·일체화’다. 그리고 타민족을 침략, 차별, 억압하는 ‘국민의식의 개조’를 위해서야말로 천황제가 필요해질 것이다.

 

(2) ‘전전천황제=예외’론의 속임수

 전전과 전후의 공통성·계승성을 왜 이렇게 강조하는가 하면, 전후의 상징천황제를 지지·옹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전전의 절대주의적 천황제는 본래의 천황제가 아니다. 헤이안시대부터 에도시대까지의 천황제처럼 정치권력을 갖지 않고 일본의 정신적·문화적 중심으로 있었던 천황제가 진정한 천황제의 모습’이라는 주장에 최근 다시 힘이 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즉 전전 천황제를 예외라 말하며 부정하는 한편 현재와 중세·근대의 천황제를 묶어 정치권력에서 떨어진 문화적·정신적 권위의 표현으로서의 천황과 천황제를 뽑아내겠다는 사고방식이다. 상당히 현행헌법=전후헌법의 옹호자들과도 겹친다.

 이 ‘전전천황제=예외’론은 ‘전전 일본=제국주의 국가’론, 다시말해 ‘전후 일본=비 제국주의’론과 겹쳐있다. 이는 전전 국가의 패배와 파산으로 타도된 일본 제국주의 지배계급의 회피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천황(천황제 국가)의 전쟁책임 문제에서 도망가기 위한 연막에 불과하다. 오늘날의 아키히토나 나루히토를 ‘전전 천황제(제국주의 국가)’와 분리된 ‘비정치적·문화적 천황’으로 상정, 긍정함으로 오늘날의 권위를 세우려는 것이다.

 이 점을 가장 의식적으로 행한 사람이 1980년대의 나카소네정권이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 康弘)가 “전후의 천황은 무일푼”, “공정무사”, “천황은 하늘의 찬란한 태양과 같은 것”, “일본국민의 단결의 상징”이라 말하며 천황·황실을 ‘신성불가침’의 초월적 권위, ‘일본의 오랜 전통과 문화’의 최대의 계승자로 꼽은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천황을 다시 ‘국가원수’로 만들어 그 아래에서의 국민의식의 변화를 위해 전통적 천황주의 우익이 외치는 것처럼 단순하고 경직적인 ‘전전회귀’노선으로는 더 이상 안된다는 지배계급의 현실감각(패배의 자각)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 ‘국철분할·민영화로 총평·사회당을 부수고, 말끔하게 대단한 헌법을 만들자’는 신자유주의노선과 한몸인 극히 첨예한 이데올로기 공격이었다. [나카소네 정권은] 국철공격으로 노동조합과 사회에서 ‘반체제적 좌익세력’이 일소되는 날 의식개혁이 이뤄진 국민 스스로가 ‘태양과 같은 천황’ 아래 저절로 모일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상황이 만들어질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만큼의 성과를 만들어냈는지는 제쳐두고, 사회당·총평 지도부의 사상적 굴복과 투쟁하지 않음으로 인한 패배에 의해 결과적으로는 나카소네의 생각이 이루어졌다. 아니, 진전되는 듯 생각되었다. 그러나 주지하고 있듯, 국철 전선에서 도로치바를 선두로 하는 노동자계급의 강력한 반발이 일었고, 30년에 걸친 격렬한 공방 속에서 국철분할·민영화 공격은 결국 완성되지 못한 채 파탄했다. 이와 함께 천황제를 둘러싸고도 1990년대 천황 교체 결전의 과정에서 나카소네의 천황관(觀)(천황·국민의 일체론)은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 나카소네식의 ‘천황은 원래 세속의 정치권력이나 계급대립과는 초연한 존재’라는 사고방식이 신자유주의 공격의 격화와 함께 이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나 ‘일본회의’의 주장으로 이어졌고, 아배정권 아래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이는 30년간 기성 야당세력이나 노동운동 지도부의 굴복, 익찬세력화, 전 천황 아키히토 부부의 언동과 연결되어 노동자계급의 의식에도 작지않은 영향을 주었다.

 전전과 같이 직접적으로 ‘국가를 위해,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자’고 말할 수 없는 전후 일본의 지배계급은 다시금 전쟁국가로의 전환이 요구되는 오늘날, ‘자위적 목적의 전쟁’은 헌법상으로도 올바르다고 말할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위대를 전장으로 보내는 실제 전투에 참가하는 것과 종국엔 징병제를 통한 국민 전체의 전쟁동원 사이엔 아직 커다란 차이가 있다. 아베의 전쟁정책에 대한 노동자인민의 분노가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아베는 지금 천황 교체라는 카드를 써 ‘국민의 의식개조=이데올로기적 개조’를 꾀하고 있다. 아키히토나 나루히토와 국민과의 ‘친화’관계가 강화되며 천황과 상징천황제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는 것이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을 지키’기 위해 자위적 전쟁에 참가하는 것과 같다는 가치관을 국민=노동자인민에게 심으려 필사적이다. 이는 동시에 천황제가 단순한 ‘정치의 보완물’이 아닌 ‘전쟁 가능한 국가’에서 국민을 통합하는 상징으로의 전환을 추구하는 것이다. 전쟁국가를 위한 ‘국민의 이데올로기적 개조’란 동시에 상징천황제의 새로운 재편·강화에 토대를 둔 것이다.

 이상 요약하자면, 전후의 상징천황제란 일본 제국주의의 부르주아 독재의 전후적 관철형태에 불과하다. 패전을 기점으로 바뀐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계급지배 방식이며, 구미(歐美)식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의회제적 통치형태로의 이행으로 제국주의적 연명과 부활이 보장되었다는 점이다.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미 제국주의와의 단독 강화, 오키나와를 실체로 한 미일안보조약의 체결이 이를 결정지었다는 면이다.

 연합군최고사령부(GHQ·맥아더)의 초기 대일점령정책 속에서 정치범의 석방, 치안유지법과 특고경찰의 폐지, 재벌과 지주제의 해체, 독점금지법, 전범·군국주의자의 공직 추방등이 이어졌으나, 그 대부분은 전후 혁명의 패배와 한국전쟁의 발발로 유명무실해졌거나 철회되었다. 그중 가장 큰 것이 재(再)군비확장=자위대 창설과 기시 노부스케(岸 信介)등 A급 전범의 정재계 복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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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마테라스에게 하사받아 천황이 계승하고 있다는 3가지 물건. 야타노카가미(八咫鏡), 야사카니노마가타마(八尺瓊勾玉), 쿠사나기켄(草薙劍)으로 구성되어 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34] 인간선언, 2009.11.27., 조선일보 인용.텍스트로 돌아가기
  3. 一視同仁, 일본제국이 조선을 차별하지 않고 천황의 적자로서 동등하게 통치하겠다는 동화정책의 연장.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