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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다 큰 어른, 초등학교 새로 다니다

모두들 잘 지내고 있는지요?

요즘은 얼굴 자주 보기도 힘들고 영 못보는 이들도 있네요.

무슨 생각들을 하며 지내는지는 더더욱 그렇구요.

 

여기저기 인터넷 블로그들을 둘러보다가  만난 글입니다.

이 글을 보고 저로선 참 부끄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함께 읽어보고, 생각도 나누고 싶어 올립니다.

 

 

 

다 큰 어른, 초등학교 새로 다니다

이명학

개구리 울음소리 참 우렁차게 들린다. 요놈들이 처음부터 한꺼번에 울어 제끼는 것이 아니고 어느 한두 놈이 울기 시작해야 비로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온 천지가 개구리 울음소리로 가득 찬다는 사실을 관찰을 통해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일순간 와글와글 울어 제끼는 것이 아니다. 개구리들의 일상이 우리들 사는 모습과 닮은 점들이 꽤 있는 것 같다. 극소수의 몇 명이 주장하고 외치면서 앞서 살아나가다 보면 어느새 다들 용기가 생겨 닮아가고 번져가는 그런 모습이 비슷한 것 같다.

1999년도에 이곳 상주 산골로 귀농해서 어느새 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버렸다. ‘사람이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자’는 것이 도시를 떠나온 큰 이유 중 하나라고 해두고 넘어가자. 좌우지간 좌충우돌 헤매다가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았다고 할까? 하지만 앞으로 풀어가야 할 일 또한 가득하다.


귀농의 이유 중에 하나가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것이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는 생각이 없었다. 단지 ‘도시보다는 시골이 좋은 가능성이 더 많은 곳’ 정도로 생각했다. 시골에 와서 농사가 내 주업이 되면서 참으로 바빴다. 초기에는 나 자신 그런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시간은 계속 가고, 아이들은 그 사이에도 자꾸 자라고, 가슴이 답답해왔다. 논밭에 나가서 하는 농사일도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그야말로 마음은 콩밭에 있고 일은 논에서 하고 있는 격이었다. 한참을 논둑에 앉아서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을까를 생각하고 나서 맘을 좀 바꾸기로 했다. 아마도 그때가 귀농 후 3년 정도 무렵인 것 같다. 큰아이가 이곳 초등학교 3학년, 둘째가 1학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한번 해보자! 우선은 틈나는 대로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를 다녀보기로 하고 교장, 교감 그리고 담임 선생님에게 차례차례 양해를 구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제가 다닐 때와 30년 세월이 흐른 지금 환경이 여러 가지로 많이 달라져 있으니까 제가 다시 학교를 다녀보고 싶습니다. 농사일이 워낙에 바쁜지라 앞으로 일 년 정도 비가 오는 날을 택해서 아이들이랑 똑같은 시간에 등교해서 점심 먹고 종례 하고 청소도 같이 하고 집으로 가고 싶습니다.” 갑자기 살얼음판으로 바뀐 교무실과 교장실에 무거운 기운이 짓누르는 것 같았다. 한 이틀이 지나자 학교에서는 조금 어렵겠다는 통보가 왔다.


“아니 저는 학교의 문제점을 파헤치려고 이러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체험을 해보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러니 제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하고 말하자, 무슨 교육청 장학사도 아닌 제3자가 학교 수업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라고 대답했다. “아니 제3자라뇨? 학생, 학부모, 교사가 다 같이 당사자인데 제3자라니요, 오히려 제가 볼 때는 장학사가 제3자인데요.…”


이런저런 충돌이 이어지다가 결국에는 내 뜻이 받아들여져 여덟 차례 정도 수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 뒤를 교직원들이 졸졸졸 따라다니고 불필요한 설명도 하고 해서 부담이 많이 되었다. 이런 상태로는 안 되겠다 싶어 “이러지 마십시오. 이렇게 따라다니시면 서로가 불편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부디 맘 푹 놓으시고 업무에만 신경을 써주십시오.” 했더니 학교 쪽에서도 한 발 물러섰다. 첫날은 그냥 수업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었는데 다음날부터는 선생님의 수업지도 보조 역할을 하면서 참여하게 되었고, 아이들도 좋아하고 선생님하고 관계도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사실 생업에 종사하면서 다 큰 어른이 학교를 다닌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지 몰랐다. 내가 농부라는 직업을 가졌으니까 가능한 일이지 다른 업종에 있었다면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다른 학부모들 가운데도 누군가 나처럼 하는 이가 나오면 좋을 텐데 “밥 먹고 되게 할 일 없는 모양이네” 라는 식의 평도 들렸다.


하루 수업을 하러 가기 위해서는 사흘 전부터 미리미리 농사일정을 맞추어 놓아야만 한다. 공부도 때가 있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를 뼈저리게 느껴보는 시간이었다. 한 해 동안 수업 참관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교직원들의 움직임과 역할, 빡빡한 업무처리, 교장, 교감 선생님들의 불필요한 권위와 무사안일로 변화에 대한 탄력성이 떨어지는 것을 새삼 느꼈다. 또 아이들에 대한 이해도 다시 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선생님과 같이 있는 수업시간하고 선생님이 없는 쉬는 시간의 모습이 많이 달랐다. 그 사이에 벌어지는 자기들만의 복잡하고 미묘한 갈등들을 읽을 수 있었다. 또 30년 전과는 엄청나게 다른 교과서와 색다른 수업도구들을 이용한 방법의 변화에도 많이 놀랐다. 교육에 대한 대안을 논하기 전에 여러 문제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때, 그래서 문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 때 제대로 된 대안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확신도 생겨났다.


워낙 젊을 때부터 교육에 불만을 가지고 교육 관련 모임이나 강좌에 참여하곤 했던 터라 귀농해서도 학교에 대한 막연한 불신은 여전했다. 확실치는 않지만 교사들이 뭔가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월급을 받으면 교육서비스 정신이라도 강하든가, 아니면 교사로서 양심이라도 있든가’ 하는 불만이 마음 한구석에 숨어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학교와 대화를 하려고 하니 어느새 충돌이 생기고 언성이 높아지고 거친 말들이 오고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은 별로 얻지 못하고 서로에게 상처만 남길 뿐이겠구나!’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고 있는데 내 감정에 사로잡혀 혼자서 화내고 속상해하고 지쳐가고 있구나. 정말 내가 아이들을 위해 뭔가를 하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나 자신의 감정만 풀어보려는 건지 정면으로 보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학교와 싸워서 이기려고 하거나, 설득한다고 강요하는 분위기를 연출하지 않았다. 대신에 잘한 것을 집중적으로 먼저 칭찬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풀어준 다음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털어놓게 되었다. 그러니까 일이 의외로 잘 풀리고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어내게 되는 것 같았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면 일일 명예교사를 자청하여 학교 수업을 했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한다. 기타를 메고 가서 동요를 같이 부르고, 온몸으로 뭔가를 표현하고 그 몸짓이 무엇을 말하는지 말해보기나 ‘학교가 없어진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라는 주제로 모둠별 토론하기, 재미있는 게임을 즐기며 교실 안에서 맘껏 떠들어 보기, 나무토막으로 작은 솟대 만들기 따위가 지난 5년 동안 했던 활동들이다. 언제나 하루로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 중에서 솟대 만들기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수업 일주일 전부터 산에 가서 필요한 나뭇가지며 재료를 찾아 장만해두고, 진행과정 순서를 정하고, 혼자서 예행연습도 하고, 위험한 연장을 쓰는 작업은 미리 해서 가려고 밤 1시까지 혼자서 깎고, 파고, 뚫었다. 농사일과 겹쳐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상상을 하며 설레는 마음에 잠들지 못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귀농하기 전, 아이들은 절대 학교에 보내질 않겠다는 생각을 뼈에 사무치도록 했었다. 하지만 시골로 와서 상황은 아주 달라졌다. 아이들이 학교를 가고 싶어하기도 했고, 또래 친구가 없는 시골에서 학교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학교 가서 실컷 놀다가 오라’가 솔직한 내 마음이었다. 그렇게 보내기는 했지만 목구멍에 늘 가시가 걸려 있는 것처럼 아이들을 바라볼 때마다 왠지 미안한 마음이 나를 짓누르고 괴롭혔다. 남들처럼 대안학교에 보낼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학교를 아예 보내지 않는 것도 지금 상황으로는 어렵고, 좌우지간 공교육에 아이를 보내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한탄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변화를 만들어보는 것이 부모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왕에 관심 가질 바에야 학교 안에서 영향력이 큰 운영위원장을 맡아보자고 결심하고 운영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시골 학교는 이 직함을 서로 안 맡으려고 하기 때문에 본인이 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분교 2개와 본교를 합쳐 아이들이 73명 정도인 학교의 운영위원장이 뭐 대단한 자리는 아니지만 운영위원장이 어떤 생각을 갖느냐에 따라서 학교를 변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운영위원장 자격으로 2004년 8월 6일부터 8일까지 학부모들의 힘을 모아 여름생태캠프를 열었다. 학교의 반대가 심했지만 운영위원장이라는 감투가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만일 내가 그냥 일반 학부모 자격이었다면 어려움이 더 많았을 것이다. 학교 운동장과 전체 시설을 2박 3일 동안 이용하되 캠프의 기획과 진행, 마무리까지 모든 일을 학부모가 주체가 되어서 했다.


사흘 동안 지역 아이들, 부모들과 함께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우리 소리와 몸짓을 표현해보기, 캠프 주제가 배우기, 목공예-등 만들기, 계곡 환경 탐험, 야외 영화 상영, 맨발 명상, 우리 들풀  이름 알기, 천천히 걷기, 망원경으로 별자리 관찰하기, 대나무 목걸이 만들기, 천연염색(양파, 쪽, 황토) 옷 한 벌 해 입기, 인형극 공연 관람, 모닥불 놀이 같은 활동들을 했다.


여름이면 도시의 아이들은 자연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내세워 여러 가지 캠프다 뭐다 해서 시골로, 냇가로 자연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참가시키곤 한다, 하지만 정작 시골 학교에서는 주변에 늘린 좋은 교육적인 가치를 지닌 자연 조건들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변에 아무리 많은 소재들이 있어도 교육적인 효과로 이것을 어끌어내느냐 못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 시작하게 된 일이었다.


그리고 학부모들이 실제로 학교에 관심을 가져야 학교를 성역화시키지 못하게 되고 썩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옛날처럼 “아이 다섯 키울 동안 학교 문전에 한 번도 안 가봤다”는 말을 자랑삼아 하던 그런 시절과 지금은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은 때가 되면 바뀌지만 학부모들은 그 자리에 있다. 선생이 먼저 바뀌어야 학부모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학부모들의 의식이 바뀌면 비로소 선생과 학교의 의식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여름생태캠프를 한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왜 해야 하는지 잘 모르다가 하루가 지나고 색다른 진행이 되어갈수록 팔짱을 끼고 있던 부모님들이 학교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교실에 방충망을 치러 나오신 분, 운동장 한쪽에서는 풀을 뜯어 모깃불을 놓아주시는 분, 간식을 들고 오시는 분, 아!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동의 물결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캠프를 마치고 나서 학부모님들의 관심과 참여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 전혀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들이 학부모가 관심을 가질 때 하나둘씩 이루어진다는 것을,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모두가 얻게 된 사건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학부모들의 관심을 어떻게 하면 학교 운동장으로 끌어낼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까마득하기만 했다. 그 방법 중 하나로 매년 10월에 있는 학생들이 만드는 학예회 행사 중에 부모들이 준비해서 보여줄 뭔가가 없을까 고민하던 중에 ‘엄마난타’를 기획해서 사람들을 모아 연습에 들어가게 되었다. 시골에서 들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소리들을 리듬으로 재구성하여 박자와 형식을 만들고, 집 옆 하우스 안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농사일을 마친 저녁 시간에 연습을 강행하게 되었다. 농부가 새벽에 일어나서 쇠죽을 쑤는 소리로 시작해서 솥뚜껑 여는 소리가 나면 황소가 이를 눈치채고서 소방울을 딸랑거린다. 밥 짓는 소리로 양은 솥뚜껑 깡깡거리는 소리를 내고, 이어서 밤중에 볼일 본 요강 비우는 소리, 빠루(못 빼는 연장) 소리, 망치와 쇳소리가 어우러지는 강열한 금속음으로 힘찬 아침을 알리고, 장고와 북소리 그리고 양동이 소리로 이어지다가 저녁에 옷을 다듬는 다듬이 소리, 저녁바람에 딸랑이는 풍경소리와 죽비소리로 마감되는 것이었다. 반응이 의외로 좋았다. 학부모들끼리 난타연습을 하는 과정에서 각자 다른 생각들을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되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시교육청에서 이를 보고서는 시교육 문화행사에 공식 초청해서 엄마난타로 데뷔하기도 했다.




올 초에는 해마다 하는 졸업식이 여러 가지 고쳐야 할 점이 있는 것 같아서 교장선생님과 3시간 마라톤 회의 끝에 졸업식 진행을 바꾸어보기로 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졸업식날이면 파출소장, 국회의원, 면장, 농협조합장, 우체국장 같은 온갖 기관단체 ‘장님’들이 정장을 입고서 식장 앞쪽에 앉아서 아이들에게 위화감을 주어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분들이 단순한 내빈의 자격을 넘어버린 듯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졸업식은 졸업생과 선생님 학부모들이 주인이 되어야 하고 나머지는 사실 하객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편안한 자리를 마련하여 뒤쪽으로 배치하는 것이 졸업식을 더 빛내는 일이라 할 수 있는데, 이건 어찌된 판인지 주객이 거꾸로 되어서는 오만 가지 축사로 졸업식을 지루하고 형식적인 행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왜 아이들 졸업식이 그런 장님들 표 관리하는 사전 선거운동 마당이 되도록 방치해야 하는가? 축사도 가능한 다 빼버리고 기관단체장 자리도 뒤로 배치하고 졸업식의 표정과 내용들을 아이들이 직접 만들 수 있도록 하고, 상장 수여도 같은 종류끼리 묶어서 간단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정말 졸업식다운 졸업식을 해보자고 말이다. 거의 대부분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아주 산뜻한 졸업식을 하게 되었다.


얼마 전에는 학부모 전체 총회가 열렸는데 진행을 조금 독특하게 시도해보았다. 시작에 앞서 서로 손을 맞잡고 “안녕하십니까? 바꾸어봅시다!”라는 인사로 시작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그리고 전반적인 회의 분위기를 어떤 이야기라도 좋으니까 주제와 상관없는 의견이라도 저마다 가슴 속에 담아왔던 것을 충분히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주력했더니 좋은 아이디어와 구체적인 개선안들이 쏟아져 나왔다. 변화를 원한다면 공개적인 자리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회의는 형식적으로 마치고 답답한 마음을 식당에서 혹은 교문 밖에서 백날 떠들어봐야 학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까 학부모 회의를 정말 영양가 있게 진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릴 적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30년 전에도 학부모회의가 있었는데, 그 때 학교 발전을 위한 회의를 한다는 것이 “돈을 조금씩 내서 교실에 커튼을 해줍시다”라는 의견을 말하는 것을 듣고서 어린 나이에도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커텐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정작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학교의 수업방식과 내용을 바꾸지 않고 백날 천날 학교에 커텐만 달아준다고 뭐가 바뀌는가? 요즈음도 이런 식으로 접근하려는 학부모가 많은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한 적이 많았는데, “바꾸어봅시다!” 하는 인사말을 나누면서 하나씩 바꾸어가려고 마음을 모으니 가능하다는 느낌이 든다.


최근에는 학교급식 조례 제정에 따른 급식의 변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렇게 해서 경상북도에서는 처음으로 우리 학교에서 친환경농산물 무농약 쌀을 일 년치 전량 급식하게 되었다. 부족한 예산은 지역에서 친환경 농업을 하는 분들과 학부모는 아니지만 바람직한 흐름이라고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뜻으로 이 사람 저 사람 쌀 한 가마니 값을 내주시기로 하여 해결이 되었다. 내년에는 지역에서 친환경 농업을 하는 농가와 계약 재배를 하여 쌀 공급을 안정시키고 학교에서 먹을 쌀이 나오는 논에 아이들과 함께 가서 모내기, 피사리, 벼베기 같은 현장체험을 다채롭게 할 예정이다.

 

또 올해부터는 학교 주변에 제초제를 일체 금하게 되었다. 대신에 학부모님들이 두 번 정도 학교 주변 풀을 직접 뽑기로 했다. 학교에 웬 제초제? 학교 주변에 풀 뽑기가 힘들어 학교 시설물을 관리하는 분이 제초제를 치고 있다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놀랬었다. 학교에서는 야생화 단지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좋은 볼거리를 만들어 준다고 하는데 바로 옆에서는 다이옥신이 잔뜩 들어있는 제초제를 뿌려서 온 천지를 노랗게 만들어버리면 야생화 가꾸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설득해서 학교 안 제초제 살포를 막아내게 되었다.


요즈음은 시간만 나면 학부모님들을 만나러 다닌다. 논둑에서 밭에서 막걸리도 한 잔씩 하면서, 낮이고 저녁이고 무슨 선거운동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지역학교가 문화발전소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급속한 이농과 고령화로 농촌 학교는 학생 수가 더 줄어들면서 점점 더 열악해질 것이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으로 학생, 학부모, 지역인 모두에게 학교가 문화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학교 강당에서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자녀 성교육, 부모의 역할’이란 주제로 전문가의 강의를 듣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본다거나 연극이나 풍물을 원하는 학부모와 학생들이 어우러져 함께 배우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이를 이루어내기 위해 예산을 어떤 방법으로 확보할 수 있을지를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좌우간 학부모들의 의식이 변할 때 학교도 바뀌고 우리 삶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살아가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시골의 공립 초등학교 안에서 시도한 일들을 몇 가지 사례 중심으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저처럼 비슷한 조건 속에서 고민하시는 분이 있으면 혹시나 참고가 될까 싶어서입니다. 다 적고 보니까 자기 자랑 같은 이야기만 늘어놓은 것 같아서 머리카락이 쭈빗 서는 것 같습니다. 앞서 경험한 분이 있으면 조언을 받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좋은 아이디어를 주시거나 함께 이야기 나눌 분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민들레

http://www.mindle.org/bbs/view.php?id=bimonthly&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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