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당신은 언제 눈물을 흘립니까?

내 외모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중 대부분은, 피도 눈물도 없을 것같은 냉정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홍채의 2/3정도만 보이는 눈 때문에 더 무서운 인상처럼 보이는 것인가보다..하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런 평가가 그닥 싫지는 않다. 만만하게 보여서 당하는 피해는 이미 '여성'이기 때문에 충분히 받고 있으므로, 속된 말로 '얼굴로 먹어주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기 보다는 일종의 방패역할을 해주고 있다고나 할까.

 

하지만 외모와는 달리 나는 자주 눈물을 짜는 편이다. 몇년 전 콜롬비아 우와족-EXXON Mobile사의 석유채취에 맞서 부족 전체가 자살을 결의했던-에 대한 강연을 들으면서 펑펑 눈물을 흘려댔더니, 수년을 알고 지냈던 선배 하나가 기절할 듯이 놀라는 것을 보고 당황한 적이 있다. 그래, 내 인상이 좀 그래 보이긴 하지. 하면서 웃어 넘겼지만, 아직도 '눈물'이라는건 극단적 소통수단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어서 그런지 잘 받아주기가 쉽지 않은가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극적인 상황에서 자주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혀 생뚱맞은 상황에서 눈이 아릿하게 되는 경험을 종종 하는데, 오늘도 역시 그랬다.



나는 지하철에서 '씨네21'잡지를 보다가 울었다. 영화 '말아톤'에서 자폐 청년 마라토너(조승우 분)의 어머니 역할을 했던 김미숙의 인터뷰 기사였다. 그녀는 이제 '언니'라는 호칭보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더 편하게 들리는 나이가 되었다며 웃고 있었다. 그녀는 자폐라는 장애를 가진 청년의 이야기인 '말아톤'이 '오아시스'나 '나의 왼발'처럼 중증 장애인을 다룬 영화였다면 출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중년 여성의 외도를 그린 '언페이스풀'도 도입부만 보고 더 이상 보지 못했다고 했다. 외면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눈물이 났다.

 

어떤 현실은 잔혹하다. 하지만 그 현실을 딛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그냥 지고 가야 하는 일상의 무게인지도 모른다. 그렇다해도 여전히 잔혹한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그래서 도의적 책임(?)을 회피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어하는 내 느낌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나는 자꾸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싶어하는데, 마침 그녀의 인터뷰 내용이 그런 나의 생각을 대변해 준것이다.

 

그녀의 인터뷰를 보면서 흘린 눈물은, 잔혹한 현실들과 마주하여 싸워야 한다는 의무감과 가능하면 덜 아파하며 살고 싶은 내 심정이 충돌하는 상황이 어쩌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극단적인 소통수단인 '눈물'로 표현된다는 것은 내가 그걸 견디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걱정하지는 않는다. 고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희열은 상상할 수 없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나는 아마 여기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중독이므로.

 

사족 : '맵다'는 감각은 통점에서 인지된다. 사람들이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매운 음식을 찾는 이유는 몸에서 매운 감각 - 통증을 잊기 위해 엔돌핀이 분비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매저키스트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