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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성장 일기] 10월 5일~7일 농성 128일째. 갈수록 지치고 힘들지만 풍요로운 농성장을 만들기 위해 분주한 하루하루.

농성장 일지

  * 이 글은 여성가족부 앞에서 피해 노동자와 함께 농성을 하고 있는 권수정 대리인 님이 작성하신 글입니다.

10월 5일 수요일 농성 126일

 

1.

학생행진 차승리동지가 언니에게 예쁜 국화꽃다발을 선물로 주었다. 언니는 좋아라 입이 귀에 걸리는데, 내가 심술을 냈다. “머니, 꽃이 밥먹여주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예쁘다. 하루가 다르게 날이 추워지고 찬바람 불어도 농성장 마당에서 페트병에 꽂아놓은 꽃잎이 싱싱하다. 승리동지는 12일날 우리랑 같이 촛불문호제도 하고 우리 이야기로 소책자도 만든다고 신이 났다. 뭘해도 예쁘다.

 

 

2.

한동안 밀렸던 언니의 금속노조 신분보장기금이 지급되었다. 사전에 서류를 올려줘야 해서 5월 31일 이후 투쟁경과를 일지로 정리했다. 그동안 한번 정리해야하는데, 생각하면서 다른 일들에 밀려 정리하지 못했었다. 딱히 뭐 한것도 없는것 같고, 경황없어 꼼꼼히 적어놓지 않아 잊어버린 일정도 많을 텐데, 그래도 정리하면서 보니 뭐가 많다. 언니랑 나랑 둘이 100일이 넘게 길바닥에서 농성하면서 참 바쁘게도 살았구나, 싶었다. 그리하여 더불어 살펴보니 혁명기도원 기도회는 오늘이 13차고 박승희여성위원장님의 밥심연대는 오늘이 15차다. 음--, 밥심연대 20차가 되거든 그동안 참석했던 분들 다 모아서 점심시간에 잔치나 한번할까. ^^ 에구, 날은 추워지고 뭘 더 해야할까, 고민스럽다.

 

3.

청계광장에서 유방암과 관련한 무슨 행사를 한다는데 어찌나 빵빵한 음향으로 질러대는지 지금까지 진행했던 중 최악의 조건에서 혁명기도원 기도회를 했다.

3천년전의 시편이 마음에 와 닿는다.

 

 

 

이스라엘이 하는말,

젊어서부터 받은 많은 학대에도 나는 꺾이지 않았었지.

밭가는 자들이 땅을 갈아엎듯이 내 등에 고랑같은 상처를 내었지만

의로우신 주께서는 악인들의 멍에를 박살내셨다.

시온의 원수들아, 모든 망신당하고 물러들 가라.

지붕위의 풀포기처럼 뽑을새도 없이 시들어 버리리라.

베는 이의 손에도 묶는 이의 아름에도 차지 않으리니

지나가는 이 아무도 ‘주님의 축복이 너희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복을 빈다’ 하는 사람 없구나.

 

 

밭가는 자들이 땅을 갈아엎은 것처럼, 나의 등에 고랑같은 상처가 있다니, 어쩌면 3천년 전을 살았던 자의 고통의 외침이 내 마음 같은가. ^^

수천년동안 살아남은 기독교의 힘중 하나는 바로 이 대목인 것 같다. 인민의 고통을 알아주는 마음, 그 고통을 당장 없애주지는 못하더라도, 너의 고통을 내가 안다고 말해주는 성서가 수천년동안 인민의 마음을 위로해준 것이다.

나의 등에 고랑같은 상처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호소하기에 신처럼 좋은 상대가 누가 있겠는가 말이다. ^^

 

김태석동지가 기도제목을 말했다.

“현대자동차 정몽구와 그의 무리들이 회개하고 성서의 뜻을 깨닫게 되길.” 아멘!

 

 

10월 6일 목요일 농성 127일

 

1.

10월 1일부터 산전산후 휴가를 낸 정유림 여성부장 없어서 비는 공간이 구멍이 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일을 하면 저일이 처리가 안되고 저일을 하면 이일이 안된다. 오늘이 피크였다. 정유림 여성부장의 후임은 없고, 지원대책위에 정유림 동지대신 참석할 실무자가 없고, 월요일마다 하던 일인시위 할 사람이 없고, 월요일마다 하던 노조 사무처의 촛불문화제가 가능하지 않고, 그리하여 결국 되는 일이 없이 분주하다.

 

지원대책위회의에는 김현미 부위원장님이 대신 참석하시니 회의진행은 더 잘될 수 있다. 다만 사업을 계획하고 결정하고 결정한대로 집행하기 위한 점검과 실무일이 고스란히 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며 마음 한편으로는 민사소송 준비하는 자료 정리해서 다음주부터는 우리쪽 증인진술서 작성하는것도 며칠 걸릴텐대, 대충할수도 없고, 다음주에는 주점도 하는데, 추운 농성장을 날마다 언니에게 고스란히 맡겨놓고 금속노조로 아산으로 돌아다녀도 일이 제대로 진행이 안되겠구나, 생각하며 막막하였다.

저녁에 촛불문화제를 하며 피디수첩을 틀려고 빔프로젝트와 스크린과 노트북을 사용할줄 몰라 한참을 애태우고, 그래도 어쨌든 무사히 마친 후, 마음을 비우기로 한다.

 

어차피 모든 일을 할수 없는데, 할수 있는 것이나 최선을 다해서 하자고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이것저것을 모두 생각하면서 하려고하면 쫓기듯 마음이 급해서 해야할 것도 못한다. 모두 해야할 것이지만, 그래도 어차피 어느 곳에선가 비게 마련이다. 마음은 바쁘고 일은 더 안되고 말은 거칠게 나온다. 농성장은 초라해도 풍요로운 공간이어야 한다. 내 말이 거칠게 나오면 언니가 불편해지고 결국 연대오시는 동지들도 불편하다. 이것이 최악이다.

반대로 다른일이 비어도 일단 농성장이 연대오시는 동지들과 나누는 마음으로 따듯하면 부족한것은 부족한대로 넘치는 것은 넘치는대로 그냥 그렇게 가는거다. 가장 중요한것은 농성장이 풍요로와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하며 돌아보니 언니의 어깨가 쓸쓸하다.

 

 

10월 7일 금요일 농성 128일

 

1.

어제 촛불문화제를 하면서 피디수첩 방송된것을 스크린에 빔으로 틀여서 보았다. 언니가 아침에 울어버린다. 길거리에 앉아 있는것도 비참하고 언제 끝날지 몰라 비참한데 그것을 화면으로 켜서 사람들과 보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한다. 언니를 고통스럽게 하기 위한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라는 걸 아는데도 아프다고 하며 운다. 언니를 보호해 줄수는 없는거냐고 말하며 운다.

앞으로는 우리 농성장에서 틀지 않기로 한다.

 

피디수첩에 방송된 내용중에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의 관리자 임병혁이 인터뷰를 하며 이 사건을 현대자동차에게 해결하라는 것은 난감한 일이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현대자동차가 이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곳이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맞다. 현대자동차는 이윤을 많이 내면 장땡이다. 그래서 생산의 현장을 비정규직으로 채웠고, 소나타와 그랜져를 만드는 현장에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가 성희롱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니 오래 고민하지 않고 쉽게 해고했다. 그리고 손털면 땡이다. 가해자와 그를 지지하는 현대자동차에 의해 지금 이시간에도 소나타와 그랜져는 만들어진다. 가학적인 생산의 시스템속에 성희롱 당한 여성노동자의 고통을 원동력 삼아 소나타와 그랜져가 지금도 달린다.

 

그러나, 성희롱한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를 복직시켜야 하는 문제가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는 문제로 니네가 할 일이 아니라고 현대자동차가 제 입으로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손으로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목줄을 조이며 입으로는 사회정의는 우리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엽기적인 수준의 뻔뻔함은 다른 문제다.

내 손에 칼이 있다면 너의 입을 찢어버리겠다. 순간의 망설임없이 단번에 정확하게 찢어버리고 사회정의는 이런것이라고 말하겠다. 가슴에 돋는 칼로 현대자동차, 너를 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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