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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약한 자를 향한 용서받지 못할 폭력.

8월 12일자 서울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친아버지와 계모,같은 마을 주민 등 모두 7명이 어린 남매를 3년 가까이 집단폭행하고 8살짜리 여아가 사망하자 암매장"했다는 것이다. 충북 충주경찰서는 12일 정모(36·무직·주거부정)·손모(여·29)씨 부부를 비롯,최모(30·회사원·충주시 이류면)·이모(32·여)씨 부부,그리고 같은 마을 주민인 배모(52·여)·신모(46·여)·최모(47·노동·주거부정)씨 등 모두 7명을 살인 또는 사체유기 등의 혐의로 긴급체포했다.경찰에 따르면 계모 손씨는 정씨가 전처 황모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12)과 딸(8)을 평소 밥도 제대로 주지 않고 학대하였고 배가 고픈 남매가 집에 있는 돈과 이웃 슈퍼마켓의 과자를 훔치는 등 도벽이 심해지자 정씨와 함께 남매를 수시로 폭행했다는 것이다. 또 지난 4월18일 이들 부부와 주민들로부터 폭행을 당한 정씨의 딸이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다음날 집에서 숨지자 최모(30)씨 등 주민 4명은 자신들의 범행이 드러날 경우 처벌을 받을 것을 우려,같은 날 오후 7시쯤 최씨의 승용차에 이불로 싼 시체를 싣고 제천시 백운면 다릿재 부근으로 가 야산에 암매장했다.이들로부터 함께 폭행을 당한 아들은 현재 할머니가 보호하고 있으나 대인기피증세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12일 낮 이들의 진술을 토대로 정씨 부부와 암매장에 가담했던 주민들을 다릿재 부근으로 데려가 발굴작업을 벌여 시체를 찾아냈다.-서울신문- 한국이 아동학대에서 세계 수위를 달리고 있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처럼 선명한 폭력으로 꺽여버린 어린 생명의 소식 앞에서는 할말을 잃게 된다. 도대체 방어의 능력도 없는 저 연약한 존재에게 집단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 것일까? 우리는 도대체 이 부끄러운 현실을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저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에 대해 비난과 분노를 느끼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가? 그 아이들은 그저 운이 나빠서 그런 부모를 만나고 그런 어른들을 이웃으로 가졌더란 말인가? 처음에는 아마 작은 폭력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폭력은 그 속성상 일단 시작되면 점점 강도를 높여가면서 지속되는 특징이 있다. 그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양심을 무디게 하고 결국 가장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불쌍한 생명의 주변에는 양심을 가진 어른이 단 한명도 없었더란 말인가? 아니다. 그럴수는 없다. 생명의 소중함을 믿는 사람이라면 아니, 최소한 사람으로서의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가장 약한 자를 향한 이러한 폭력에 대해 분노 이상의 것을 가져야 한다. 학대받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시스템과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구체적인 싸움을 해야 한다. 사회전체가 아무리 미쳐돌아가도 그 피해를 아이들이 받도록 해서는 안된다. 폭력이 아무리 일상화되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아이들을 향하게 해서는 안된다. 아이들아, 너희에게 정말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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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불황이면 노동자가 참아야 한다?

내수 시장 침체, 유가 상승, 실업문제.. 방송을 보다 보면 요즘처럼 경기가 안 좋은 적이 없었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 아침 MBC 에서는 LG정유 파업에 대한 기획방송을 내보내면서 경기침체로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의 파업이 설득력을 얻지 못한 것이 파업실패의 요인이었다고 나름대로 진단을 내렸다. 사람들은 노동귀족들의 기득권 수호에 대해 불만들이 많다는 것이다. (오호라~ 경력 11년차의 노동자 가족 5명이 24평아파트에서 모여 사는 것이 '귀족'이라면 단칸방에서 밥이나 먹는 사람들은 모두 중산층이겠군.) 마침 바로 앞에는 여름휴가를 떠난 피서객조차 비용을 아끼려고 집에서 음식을 싸오거나 텐트나 심지어 자동차(!)에서 자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살기가 어려워졌다는 이야기를 방송하였다. (얼마나 어려우면 며칠씩밖에 휴가를 가지 못하고 휴가 가서 마음껏 돈도 못 쓰고 있나에 대한 리포트의 동정어린 말에 공감해야할지... 참고로 얼마전 한 보육교사는 상담에서, 몸이 아파 병가처리를 해달라는 요청을 원장이 묵살하는 바람에 1년에 4일밖에 없는 연가를 고스란히 집에 누워 보내, 여름휴가가 하나도 없는 것을 하소연하였다.) 한국과 같이 영세자영업의 비율이 높은 산업구조에서는 내수시장의 침체는 바로 경제위기의 주요요인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피서지에서 돈도 안쓰고 백화점에서 새 옷도 안사니 이만 저만 큰일이 아니란다. 그런데 이런 저런 방송을 보다가 드는 한가지 의문은 그렇다면 내수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한 방법은 결국 소비를 촉진시키는 것인데 그 소비는 노동자가 제대로 임금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얼마전 광주에서 체불임금 2천여만원을 받기 위해 고공(크레인)농성을 벌인 노동자의 이야기가 나왔다. 최저임금 현실화 요구는 대답없는 메아리이고 노동자들은 언제 짤릴지모르는 불안감에 하루 하루를 살고 있는데 무슨 수로 소비 촉진? 지갑에 든 것이 있어야 지갑을 풀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자본은 경기가 어려우니 잠시(?) 참으라 한다. 이런 이상한 논리가 가능한 세상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 ** 사족으로 한마디 더, 그래도 이라크에 군대 보낼 돈은 있나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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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저항(펌)

" 아름다운 저항 " - 안윤길 (현대 중공업 노동자/시인)


물 흐르듯
순리대로 산다고
다 옳은 것은 아니다

거머리의 삶을
누구 옳다고 하겠는가

개처럼 사는 삶은
비굴할 뿐이다

하이에나처럼 사는 삶은
추악할 뿐이다

깊은 산 맑은 물
힘찬 몸짓으로 거슬러 오르는
송사리 떼를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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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제도화와 보육교사

난생 처음 최저임금과 관련 된 집회에 다녀왔다.

참석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집회하는 곳을 다녀왔다.

보육노동자들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를

머리로만 생각지 않기 위하여 생각해 낸 첫번째 실천의 방법이

최저임금제도화를 위한 집회에 참석해보자는 것이었다.

 

8월 2일,

많은 정규직과 또 그럴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떠난

휴가철의 중간에

최저임금위원회 앞에서 진행되는 집회에 얼마나 사람이 올 것인가? 의문을 가지고

게으른 몸을 일으켜 오전 7시부터 시작한다는 집회 장소인

최저임금위원회 건물 앞 도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30분이나 지나있었다. -_-; 

 

실천의 가장 큰 장애물은 자본도 공권력도 아닌

자기 자신의 나태함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도착한 그 자리에는

질서정연한 대오를 이루고 있는 100여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위원회로 들어가는 정문을 사이에 두고

인도 양쪽으로 앉아 있는 집회 참가자들의 결연한 모습에 눌려 대오에 끼어들지 못하고

(지각한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누가 오라 한것은 아니지만..)

뒷쪽에 서서 1시간 30분정도 집회의 진행을 지켜보았다.

 

최저임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02년 전국보육교사 근무실태조사를 통해

실제 보육교사들도 최저임금수준으로 받고 있는 사람이 상당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보육노동은 육체와 정신을 모두 소모하는 복잡하고 강도 높은 노동이다.

대부분의 보육노동자(보육교사)는 하루 10시간정도 중간 휴식시간도 없이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그런데도 민간시설에서 근무하는 경우 월 60만원정도를 받고 있는 것이다.

물론 최근 들어 지방자치단체에서 일부 지원금이 나오는 곳도 있지만

지방의 경우에는 심하게는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급여를 받는 경우조차 있다.

보육노동자 중에는 최저임금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고.

 

모든 노동이 다 신성하지만

사람을 가르치고 키우는 일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과 대접은

그 노동의 중요성이나 신성함에 비해 너무나 낮은 것이다.

만약 노동자들이 주장하는대로 노동자 평균임금의 50%로 최저임금을 제도화 한다면

보육교사, 아니 보육노동자들 중에서도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많이 생길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집회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든다.

자기 노동의 가치는 저렇게 스스로 투쟁하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인데

보육교사들이 할 수 있을까?

저렇게 더운 여른날 거리에 앉아서 대오를 사수하며 집회를 하고

자기 요구를 목청껏 외칠만큼 절박한가?

 

그저 아이를 돌보는 것은 사랑과 봉사로 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정작 자신을 끊임없이 소진시키다 말지 않을까?

자기 노동에 대한 자긍심과 그에 따른  정당한 댓가를 얻었을 때

오히려 아이들 앞에서 더 당당하고 책임있는 보육교사가 될 수 있을텐데..

 

이제 이런 문제를 어떻게 현장 보육교사와 함께 나눌 것인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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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시인의 '전사1'

" 전사 1 " - 김남주 일상생활에서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이름 빛내지 않았고 모양 꾸며 얼굴 내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시간엄수가 규율엄수의 초보임을 알고 일분 일초를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 동지 위하기를 제몸같이 하면서도 비판과 자기비판을 철두철미했으며 결코 비판의 무기를 동지 공격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조직생활에서 그는 사생활을 희생시켰다. 조직의 이익을 위해라면 모든 일을 기꺼이 해냈다.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먼저 질서와 체계를 세워 침착 기민하게 처리해 나갔으며 꿈속에서도 모두의 미래를 위해 투사적 검토로 전략과 전술을 걱정했다. 이윽고 공격의 때는 와 진격의 나팔소리 드높아지고 그가 무장하고 일어서면 바위로 험한 산과 같았다. 적을 향한 증오의 화살은 독수리의 발톱과 사자의 이빨을 닮았다. 그리고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또 다른 전투의 준비에 착수했으며 그때마다 그는 혁명가로서 자기 자신을 잊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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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은 공공재인가?

아이를 출산하고 키우는 일은 사회 구성원의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사회적인 일이다. 예전엔 그것이 사적인 일로 인식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이제 사회의 필요에 의해 주목받고 있다. 출산율 저하로 미칠 영향은 단순히 노동력의 부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저출산은 인구구조를 변화시키고 고령사회의 진입을 단축시켜 전반적인 사회복지 비용의 증가를 가져온다. 동시에 사회의 활력과 발전의 정도가 출산률의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양육은 사회구성원 전체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때 공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정작 이 양육을 사회화한 보육노동에 대해서는 이러한 평가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아니 오히려 선거에서 표를 의식한 부모들에 대한 직접 지원방식만을 고려하여 보육노동자들을 전반적인 고용 불안정으로 내 몰고 있다. 말하자면 대인서비스인 보육의 성격상 총 보육비용 중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는데 이를 부모가 내는 보육료에 포함하여 부모의 수득수준에 따라 차등지원하는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부모와 보육노동자가 마치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동 양육을 국가가 책임진다는 것은 사회적인 양육 노동에 드는 비용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보육서비스의 이용자인 부모가 내는 비용은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의 적정 요금이어야 한다. 마치 수도물을 사용할 때 수돗물을 공급하는 총비용과 상관없이 공공재인 수도물을 누구나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총 보육비용 중 인건비는 정부에서 부담하는 것이 당연하다. 학교 교사가 국가로부터 임금을 받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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