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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르본느 소비에트

소르본느 소비에트

소르본느 대학은 사람들과 적기와 슬로건으로 꽉 찼다. 모든 강의실, 때로는 층계와 회랑에서도 여러 행동위원회(Action Committees)가 열려 다음 행동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이들 위원회에서 혁명적 행위의 모든 측면이 다루어졌다. 노동자들과 접촉을 꾀하는 게릴라 그룹에서부터 음식과 의료 지원을 위한 조직까지. 빠리에 있는 거의 모든 단과대학 건물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벌어졌다.
소르본느 대학 중앙에는 약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이 있다. 혁명의 미래를 두고 하루 종일 토론이 계속되었다 정파간의 대동단결을 촉구하는 연설과 학생들에게 목표를 분명히 하라고 요구하는 연설, 그리고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이 뭐라고 말하든 학생들 뒤에는 노동자가 버티고 있다는 전투적인 노동자들의 확신에 찬 결의도 있었다.
오데옹 극장은 3천 명의 청년 학생들과 노동자들에게 접수된 이후 계속 '점거'된 상태였다. 점거는 쉽게 포기되지 않을 것이었다. 무대 뒤쪽 분장실과 회랑에서는 수백 명의 청년들이 일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계획을 짰다.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일은 진행되었다. 지도부가 따로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극장의 객석에서 토론은 계속되었다. 청중은 그다지 학구적이지 않았고 소르본느보다는 덜 아카데믹하고 더 부르주아적이었다. 토론은 자주 떠들썩해졌지만,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 드골 정권의 경직성이 폭로되었다. 처음으로 사람들 모두가 뭔가 말할 것이 잇고 그 것을 말할 장소가 있음을 느꼈다.
이것은 청년들의 혁명이었고 대부분의 작업은 밤에 이루어졌다. 내가 들었던 가장 뛰어난 연설은 새벽 2시에 대강당을 꽉 메운 사람들에게 행해진 것이었다. 그것은 전형적인 젊은 혁명가의 연설이었다. 그는 풀오버와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고 헝클어진 장발에다 피곤과 부족한 음식으로 지쳐 있었지만 두 눈은 반짝거렸다.
그는 자신의 뒤에 있는 깃발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혁명은 사회주의와 노동자 국가의 적기(赤旗)를 위한 혁명이며 아나키스트와 개인의 흑기(黑旗)를 위한 혁명입니다." 찬성을 표시하는 유쾌한 고함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나중에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거의 이 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그는 지쳐 있었고 심한 기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심한 기침은 그가 5월 10일 밤의 그 메이스 최루탄 연기를 견뎌낸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들 젊은 혁명가들은 이번에 성공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회가 썩은 사회라는 신념, 즉 이 사회가 수년간 부패해왔고, 사회가 그들을 변화시키기 전에 사회를 먼저 변화시킬 대가 왔다는 신념 대문에 서구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클리브 굿윈
[블랙 드워프] 1968년 6월 1일

- 『1968 -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 타리크 알리, 수잔 왓킨스 지음,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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