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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23회 –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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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와 같이 산책을 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다가와서 인사를 하더군요.

근처에 사시는 분 같은데 안면은 없어서 가볍게 목인사만 드렸습니다.

 

“혹시 개 심장사상충약이랑 진드기약 필요하세요?”

“저희 개는 이미 약이 있는데요.”

“아, 물론 대부분 이런 약들이 있으실텐데... 저희 개에게 필요가 없어서... 버리기도 그렇고 해서...”

 

개에게 필요한 약을 주겠다고 하는데 굳이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도 우스워서 그냥 받았습니다.

서로의 개에 대해서 짧게 대화를 나누고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약을 받아들기는 했지만 사랑이에게는 이미 약이 있기도 하고 건네받은 약이 많기도 해서 어떻게 해야 되나 잠시 고민을 하며 돌아왔습니다.

 

집에 와서 약을 살펴봤더니 일부는 사용하던 것이었고 일부는 새것이었는데

문제는 유효기한이 얼마 남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모기나 진드기로 매개되는 병들을 예방하는 약이어서 여름이 지나면 필요도 없어지는 약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민 없이 모두 휴지통에 버렸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쓰레기를 건네받은 것일 수도 있고

어떻게 생각하면 이웃과의 소소한 나눔을 했을 수도 있는 것인데

이왕이면 즐거운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분도 아마 비슷한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버릴까말까 고민을 하다가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평소에 자주 산책을 다니는 사랑이를 발견하고는 일부러 길가로 나와서 약을 건네줬던 거겠죠.

이제 그분의 얼굴을 알게 됐으니 사랑이와 산책을 다니다가 마주치게 되면 가볍게 인사라도 건네야겠네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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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을 잘 보낸 감귤이 꽤 자랐습니다.

이 정도면 청소년기를 지나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청년의 모습과 비슷해 보입니다.

앞으로 한두 달 동안 크기가 조금 더 커지고 그 이후에는 노랗게 익어가기 시작할겁니다.

여름 동안 흘린 땀의 결과물이어서 더 보기가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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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한쪽 귀퉁이에는 부추꽃이 만발했습니다.

부추는 부추 나름대로 한해의 흐름을 마무리하면서 꽃을 피워 번식을 준비하고

사람은 사람 나름대로 여름을 보내고 겨울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작물들을 심고 있는 이때

화사하게 피어난 부추꽃이 잠시 숨 좀 돌리라고 발걸음을 잡아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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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밭들은 겨울 농사 준비로 한창 바쁩니다.

8월 중순부터 밭 갈기와 거름주기 등으로 미리미리 준비를 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모종심기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갓 심어진 브로콜리 모종들이 이 가을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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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에서 서너 시간 일을 하고 난 후

팽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조금 있으면 심어야 할 마늘씨를 다듬습니다.

사랑이도 시원한 이 자리를 꽤 좋아해서 먼저 뛰어올라갔습니다.

마늘을 다듬다가 책을 읽기도 하고 사랑이랑 얘기도 나누면서 가을의 여유를 즐겨봅니다.

 

 

3

 

요즘 가을하늘도 너무 맑고 푸르러서 좋은데

그 아래 펼쳐진 구름들의 모습도 그에 못지않게 다채로워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맛이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사랑이와 산책을 하다가

하늘을 봤는데

화사한 빛을 반사하며 편안하게 펼쳐진 뭉게구름이

제 마음까지 뭉글뭉글하게 만들어버려서

얼른 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늘 방송을 준비하면서 그 사진을 쓰려고 봤더니

제 눈으로 봤던 모습과 너무 다른 느낌이더군요.

해상도가 떨어지는 카메라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그때의 느낌을 살려보려고 사진편집을 이래저래 해봤지만

저의 어설픈 실력으로는 더 이상한 느낌만 만들뿐이었습니다.

그렇게 30분쯤 깨작깨작 거려봤는데 이런 모습이 나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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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느꼈던 그 편안함과 화사함은 온데간데없이

뭔가 비현실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데

묘한 기분을 안겨주더군요.

명확하게 구분되는 땅과 하늘 사이에

한 무리의 구름이 끼어들었는데

포근한 듯하면서도 차가운 기운을 품고 있고

날카로운 듯하면서도 편안함을 안겨주는

그 묘한 느낌이 좋았습니다.

 

무더운 여름의 기운이 질기게 이어지는 요즘

조금은 비현실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살짝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요?

 

 

 

(David Darling & The Adagio Ensemble의 ‘Clear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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