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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83회 – 겸손한 삶
- 11/26
사는 게 만만치 않은 모델 커플이 데이트를 하다가 다툰다.
맛있게 식사를 한 후 계산을 하는 문제에서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데
서로 미묘한 말을 주고받다가 날카롭게 서로를 찌르면서 젠더문제를 정면으로 들고 싸운다.
그렇게 한바탕 치고받은 둘은 곧 화해를 하고 호화 크루즈에 타게 된다.
적지 않은 돈을 내고 당당하게 승선한 갑부들과
오직 돈을 벌기 위해 그들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승무원들 사이에서
협찬으로 얻어 탄 두 커플은 어정쩡한 위치에 서게 된다.
갑부들과 대화하며 그들에게 끼려고 해보지만 그들의 눈에는 귀여운 광대 정도로 보일 뿐이고
괜히 어깨에 힘을 주며 갑부들처럼 승무원을 대해보지만 말 한마디로 그들의 생계를 좌우할 수 있다는 현실에 곧 주눅이 들어버린다.
그 와중에 갑부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힘을 여유롭게 활용하면서 배 안의 모든 것을 쥐락펴락하고
그에 순응해야하는 승무원들은 잘 훈련된 조교들처럼 깔끔하게 그들의 배설적 욕구를 들어준다.
호화로운 배안에서 아주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카로운 계급차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계급과 젠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우아하고 유머 넘치는 고상함을 잃지 않던 영화는
승객들과 선장이 함께 하는 만찬 자리에서 판을 확 뒤집기 시작했다.
럭셔리한 연회장에서 우아하게 차려입은 승객들과 고급스러운 음식들의 향연이 펼쳐지는데
갑자기 거세진 파도로 배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연회장은 점점 난장판이 되어간다.
배의 흔들림에 멀미를 하는 승객들은 곳곳에서 쓰러지고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우아하게 차려입고 고급스러운 음식을 먹던 이들이 갑자기 웩웩거리며 오물을 쏟아내는데
역겨움과 통쾌함과 유머러스함이 동시에 밀려와서 정말 짜릿했다.
그렇게 배부른 부르조아들의 난장판 파티로 판을 뒤집고 나더니
이어 선장과 승객의 현란한 논쟁이 그 뒤집힌 판을 두들겨 팼다.
서로를 ‘미국인 사회주의자 선장’과 ‘러시아 자본가 돼지’라며 비꼬아대는 둘은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상대에 대한 조롱을 쉼 없이 쏟아냈다.
배는 심하게 흔들리고 승객들은 구토하면서 난리도 아닌데
서로를 까발리기에 정신없는 둘의 대화는
경쾌한 지옥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줬다.
그렇게 우아하면서도 엽기적인 난리판이 휩쓸고 간 후
배는 침몰하고 몇 명의 사람들만 조그만 섬에 살아남게 된다.
나이 많은 부르조아 백인 남성, 젊은 흑인 남성 승무원, 중년의 백인 여성 관리자, 젊은 백인 모델 커플, 중년의 라틴계 여성 청소부 등 다양한 계급과 연령과 인종과 성별이 어울려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권력관계는 순식간에 역전돼서 일할 능력이 있는 자가 리더가 되고 리더를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관계가 만들어졌다.
사냥을 비롯한 생존을 위한 능력을 갖춘 여성 청소부가 권력의 중심에 서고, 가진 것은 허세 밖에 없는 부르조아 남성이 말단이 됐다.
권력을 갖게 된 여성 청소부는 여성중심의 새로운 위계를 만들고 젊은 남자를 취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힘을 키워 가는데
남성들은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이며 그 상황에 순순히 적응하거나 개인적 야욕만을 챙기려 했다.
마치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에 나오는 전도된 여성지배사회의 초기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뒤집혀 새로운 권력관계가 만들어진 섬에서의 생활은
기존 계급과 젠더관계의 습성을 버리지 못해서 생기는 갈등을 동시에 보여주며
풍자와 유머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전복적 상상력에 힘이 빠져서 단조롭고 단순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막판에 그들이 난파된 그곳이 무인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다시 이전의 권력을 찾을 수 있는 사람과
새롭게 만들어낸 권력을 잃게 될 사람의 입장이 대비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새로운 전복의 상상력을 심어주는 아주 기발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점점 잊히고 있던 전복적 비판의 날카로움을 다시 환기시켜내는 재미있는 영화임에는 분명했다.
킬킬거리면서 속 시원한 조롱과 통쾌한 어퍼컷을 다 즐기고 났더니 온갖 것들로 뿌옇게 보이기만 하던 이 빌어먹을 세상이 다시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내 발밑에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있는 것도 함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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