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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27회 –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것

 

 

 

1

 

민주노조의 상징이었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 어용노조의 철옹성으로 변해버렸을 때

많은 활동가들이 무기력과 무능력으로 숨 죽여 있었을 때

정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한 분이

지역의 집회, 출근투쟁, 토론회 같은 곳에 꾸준히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이래저래 나대거나 목소리 높이지 않은 채 평범한 늙은 노동자로 자리할 뿐이고

사내하청노동자나 해고자들을 보면 돈 봉투 하나 슬쩍 찔러주는 정 많은 형님일 뿐이었습니다.

유난스레 서로에 대한 비판의 칼날이 예리하던 곳이었지만 그 분에 대해서 좋지 않은 얘기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에게 중요한 단점이 있었는데

입이 가볍다는 점이었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험담을 하거나 쓸데없는 참견을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필요이상으로 말이 많고 하지 않아도 되는 얘기를 하곤 해서

주위에 사람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오래전에 딸이 결혼한다며 연락을 주셨는데

제주도에 있다는 이유로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나중에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많이 서운해 했다는 얘기를 듣고

미안함에 할 말이 없더군요.

제가 울산을 떠나고 오랜 방황을 할 때

힘들어하는 저를 위해 얼마의 돈을 보내주기도 했었는데

저는 그 분이 정년퇴직하고 어떻게 지내시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그 분의 소식을 오래간만에 들었습니다.

돌아가셨다고...

 

시인으로서 세 권의 시집을 내기도 했었지만

어쭙잖게 문인행세를 하려하지 않으며

그저 노동자들과 항상 함께 하려 했었을 뿐이었던

노동자 시인 안윤길

그 흔한 구속, 수배, 해고 같은 화려한 이력도 없이

그저 평범한 노동자로서 살아가면서도

의리와 정을 잃지 않았지만

정작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던

너무도 평범해서 더 안쓰러워지는

늙은 노동자 안윤길

그분이 칠십년 삶을 마감하셨다네요.

 

윤길이 형님,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너무 미안해서

빈소에는 찾아가지 못했네요.

저도 형님처럼 순수하고 평범하게 살다가

나중에 그곳으로 찾아갈게요.

그때 제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삶이란 게 별건가

- 안윤길

 

 

한 30년 노동자로 살다보니

깨우치는 게 있더라구

아득바득 산 놈이나

느긋하게 산 놈이나

그놈이 그놈이더라구

 

아득바득 살며

뼈빠지게 모은 재산이라는 것도

하루에도 수십억씩 챙기는

재벌놈에 견주면 조또 아니더라구

그러게 비굴하단 소리 들으며

뭐 빠지게 모아봤자

삶의 짐만 무거울 뿐이란 말이시

 

산다는 거, 그거 별게 아니더라구

하루세끼 밥 먹고 똥 잘 싸면 그만 이여

노동자는 그저

자본에 맞서 내 할말 할짓 다하며

당당하게 사는 게 땡인 기라

 

 

 

2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라는 영화에는 너무 평범해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나옵니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살아가는 중년의 사내, 동네 슈퍼에서 안내방송을 하고 있는 중년 부인, 동네의 평범한 두부가게 사장님,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없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맛의 라면집 사장님, 공원벤치에서 개미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할머니, 조그만 어항에서 기르는 거북이에게 매일매일 밥을 챙겨주며 그렇고 그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주부

이런 사람들이 알고 보면 어마 무시한 국제조직의 스파이입니다.

그들은 저마다 특별한 재능을 하나씩 갖고 있지만 남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재능을 꽁꽁 숨기고 가장 평범하게 살아가려고 엄청 노력합니다.

그들이 숨기고 있는 재능이라는 것도 어마 무시한 초능력이 아니라

뭘 해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지 않도록 행동할 수 있는 능력, 엄청난 균형감각,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을 끓일 수 있는 실력, 중년에도 아이돌 그룹의 춤을 출 수 있는 열정, 동네의 사소한 것들을 다 꿰고 있는 관찰력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위에 이런 특별한 능력을 갖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끔 ‘생활의 달인’ 같은 프로그램에 나와 그 솜씨를 자랑하는 분이 아니더라도 삶의 고수들은 여기저기에 존재합니다.

그 재능을 꽃피우는 사람보다 그렇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사람들이 몇 십배, 아니 몇 백배는 많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스타의 외모와 프로의 재능과 지식인의 입과 이 모든 걸 컨트롤하는 자본의 힘에 놀아나는 이 세상에서는 모두의 재능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꾹꾹 눌러 담는 것에 익숙하고

무시와 외로움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야 하고

욱하고 터져 나오면 두들겨 맞는 것을 각오해야 하고

있는 듯 없는 듯 살다가 별다른 흔적 없이 조용히 사라져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인내와

초연한 삶의 자세와

날카로운 각성의 본능을

가슴속 깊은 곳에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양아치나, 돈벌레나, 똘마니나, 똥파리나, 핫바리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3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을에 있는 어느 집의 모습입니다.

조그만 마당을 두고 본채와 창고가 나란히 있는데

사람이 살지 않는 창고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넝쿨식물들이 벽을 타고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감귤을 저장했을지 소를 키웠을지 장사를 했을지 모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주하고 활력이 넘쳤을 공간이었을 겁니다.

아직도 외양은 멀쩡해서 조금만 손질을 하면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볼품없어 보이는 이곳이 오늘따라 더 마음이 가네요.

 

 

 

(조덕환의 ‘수만리 먼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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