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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쁨

어느 여름의 끝무렵에 나는 예순살 된 탱화 화가 응가왕 팔조르와 함께 카시므로의 스리나가르로 갔다. 그는 털로 짠 옷, 모자, 아크털로 만든 장화로 전통적인 차림을 하고 있었고 카시미르 사람의 눈에는 분명 라다크의 오지에서 온 것으로 보였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그를 놀렸다. 그는 계속해서 조롱을 당했다. 택시 운전사, 가게주인, 그리고 행인들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저 바보 같은 모자 좀 봐!” “저 우스운 장화 좀 봐!” “저런 촌사람들은 생전 안 씻는데!” 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응가왕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는 그곳에 간 것을 즐기고 있었고, 눈에 생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조롱하고 있는 것을 잘 알면서도 거기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미소를 짓고 예절 바르게 행동했으며 누가 비웃는 투로 라다크의 전통적인 인사말 “줄레, 줄래!”를 외치면 그냥 “줄레, 줄레!”라고 대답을 했다. “왜 화를 내지 않으세요?”하고 내가 물었다. “치 천?”(무엇 때문에요?)이 그의 대답이었다.
응가왕의 평온한 태도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다. 라다크 사람들은 억누를 수 없는 삶의 기쁨을 소유하고 있다. 그들의 기쁨의 느낌은 너무도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라다크에서 조금이라도 지내면 전염성이 강한 그들의 웃음에 감염되고 만다.
처음에 나는 라다크 사람들이 겉보기보다 그토록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보는 미소가 진짜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라다크 체류 두 해째에 나는 어느 결혼식에서 뒤에 앉아 손님들이 즐기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아, 저 사람들은 정말로 행복하구나”하고 중얼거렸다. 그때서야 나는 내가 문화적인 눈가리개를 쓴 채, 라다크 사람들이 겉보기만큼 행복할 수는 없다고 믿으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농담과 웃음 뒤에는 내가 속한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좌절과 질투, 불만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실은 나는 나도 모르게 행복을 위한 인간의 잠재력에는 커다란 문화적 차이가 있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런 무의식적인 전제를 설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놀랐다. 그 결과 나는 정말로 라다크의 현실을 경험하는 데 더 개방적으로 되었다고 생각한다.
몰론 라다크 사람들에게도 슬픔과 문제가 있다. 그들도 병이나 죽음에 직면하면 슬퍼한다. 내가 본 것은 절대적인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야말로 중요한 것이다. 해마다 산업화된 세계로 내가 돌아올 때 그 대조는 점점 더 두드러진다. 삶의 그토록 많은 부분이 불안감과 공포로 채색되어 있는 우리에게는 집착하지 않는 것, 우리 자신 및 우리의 주위와 일체감을 느끼는 것이 어렵다. 그런데 라다크 사람들은 확장된, 포괄적인 자아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우리처럼 두려움을 느끼면서 자기보호막을 쳐놓고 그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 실제로 그들은 우리가 자부심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자존심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들의 자존심은 의문의 여지없이 아주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나는 울퉁불퉁하고 먼지투성이인 길로 잔스카르로부터 트럭을 타고 오고 있었다. 열다섯 명쯤의 라다크 사람과 캘커타에서 온 두 명의 학생과 같이 있었다. 여행이 계속됨에 따라 그 학생들은 조바심을 하며 불편해했고, 채소자루를 의자삼아 앉아있는 중녀의 라다크 사람을 밀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사람은 일어서서 그보다 한 20년은 젊은 그 학생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두 시간쯤 후 우리가 쉬려고 멈추었을 때 학생들은 그 사람에게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가 물을 가져오자 학생들은 그에게 불을 피우고 자기들을 위해 차를 끓이라고 명령하다시피 했다.
그는 하인 취급을 받았다. 그로서는 분명히 평생 처음 당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굽신거리는 태도는 전혀 없었고 친구에게 하듯이 아부하는 태도도 없이 위엄을 잃지도 않고 그저 요청받은 대로 행동을 했다.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러나 그 사람도 다른 라다크 사람들도 그가 받은 대우에 화를 내거나 당황하기는커녕 그걸 재미있는 일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 나이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아주 대범했기 때문에 자신을 내세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라다크 사람처럼 정서적으로 건강하고 안정된 사람들을 만난 일이 없다. 그 이유는 물론 복합적이며, 전체적인 삶의 방식과 세계관에서 나온다. 그러나 나는 그 가장 중요한 요인은 자신이 훨씬 큰 어떤 것의 한 부분이며, 다른 사람들과 또 자신의 주위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라고 확신한다. 라다크 사람들은 자기들의 땅에 속해 있다. 그들은 나날의 친밀한 접촉을 통해서, 변화하는 계절, 필요, 제약들을 포함한 그들의 가까운 환경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그 삶터에 결속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해 있는 살아있는 맥락을 의식하고 있다. 별들과 해와 달의 움직임은 그들의 나날의 활동에 영향을 주는 친숙한 리듬이다.
그와 똑같이 중요한 것으로, 라다크 사람의 보다 큰 자아개념은 사람들 사이의 긴밀한 유대와 관계되어 있다. 아까 말한 결혼식에서 나는 사람들이 웃고 농담을 하고 나서는 조용히 앉아서 차를 마시며 말을 주고받을 필요 없이 오랫동안 각자 생각에 잠겨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많은 경험을-슬픔과 기쁨을-공유해왔다. 그들은 삶의 중요한 전환기가 되는 의식(儀式)들에서 서로를 지지해주며, 함께 일을 해왔다. 나는 갑자기 그들의 인간관계의 깊이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전통적인 라다크 사회에서는 아주머니, 아저씨, 비구, 비구니들을 포함해서 누구나가 몹시 상호의존적인 공동체에 속해 있다. 어머니가 자녀들 모두와 덜어져서 혼자 있는 경우는 없다. 어머니는 항상 자녀들의 삶의 일부이고 손자녀들의 삶의 일부인 채로 있다.
라다크 문화를 체험하기 전에, 나는 집을 떠나는 일은 성장의 일부이고 성인이 되는 데 필수적인 단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대가족과 친밀한 작은 공동체야말로 성숙하고 균형 잡힌 개인들을 만들어내는 보다 나은 기초가 된다고 믿는다. 건강한 사회란 각 개인에게 무조건적인 정서적 지지의 그물을 제공하면서, 긴밀한 사회적 유대와 상호의존을 권장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틀 안에서 개인들은 아주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항 안정감을 느낀다. 역설적으로, 나는 라다크 사람들이 산업사회의 우리들보다 정서적으로 덜 의존적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사랑과 우정이 있지만은 그것은 격렬하거나 구속을 주는 것이 아니다. 한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일년 동안 어디에 가 있다가 돌아온 열여덟 살짜리 아들을 만나는 어머니를 본 일이 있다. 그녀는 아들이 보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놀라울 만큼 평정해 보였다. 나는 이런 행동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겨울 동안 떠나 있다가 되돌아왔을 때 라다크 친구들이 내게 보이는 태도가 이상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들이 좋아할 선물을 가지고 왔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보고 반가워하고 선물에 기뻐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내가 아무데도 가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들은 선물에 대해 고마워했지만 내가 바란 식은 아니었다. 나는 그들이 몹시 흥분하고 우리들의 특별한 우정을 확인해주기를 바랐다. 나는 실망했다. 내가 여섯 달 동안 떠나 있었건 단 하루를 떠나 있었건 나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똑같았다.
그러나 나는 어떤 상황에든 적응하는 능력, 상황에 상관없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대단한 장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내 라라크 친구들의 편안하고 대범한 태도를 이해하게 되었고, 내가 아무데도 가지 않은 것처럼 대해주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라다크 사람들은 아무것에도 우리처럼 집착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 대부분은 물론 우리의 삶에 그토록 영향을 미치는 집착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친구가 떠나는 것을 보거나 어떤 값진 것을 잃어버리면 불행할 수는 있다. 그러나 굉장히 불행하지는 않을 수 있다.
만일 라다크 사람에게 “레에 가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마을에 머물러 있는 것이 더 좋으시겠어요?”라고 물으면 대답은 필경 “레에 가면 좋지요. 그리고 가지 않아도 역시 좋습니다”일 것이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정말로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라다크 사람들은 일상의 음식보다 잔치를 더 좋아하고, 불편하기보다는 편안한 것을 좋아하고, 아프기보다는 건강한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만족과 마음의 평화는 그런 외부의 상황에 좌우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은 내면으로부터 온다. 라다크 사람들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그들 주위와의 관계는 내면의 평정과 만족감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의 종교는 사람이 건강하고 따뜻하고 안락하고 배부르더라도 그가 ‘무지’한 한 행복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만족감은 자신의 살의 흐름의 일부임을 느끼고 이해하면서, 긴장을 풀고 그 흐름과 함께 움직이는 데서 온다. 당신이 먼 길을 막 떠나려 하는데 비가 쏟아진다고 해서 비참한 기분이 될 게 뭐 있는가? 아마도 더 좋을 것은 없겠지만, 라다크 사람들의 태도는 그렇다고 해서 “불행할 게 뭐냐?”이다.

- ‘오래된 미래’ 중에서,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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