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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가운데서도 파멸하지 않는 인간의 삶 : 『욥기』다시 읽기 최형묵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운영위원) 2. 고통으로 무너지지 않는 인간이 있을까? - 서장(1~2장) 욥은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느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종교적으로 경건한 사람이었으며 도덕적으로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렇게 흠이 없는 사람 욥을 두고 시비가 시작된다. 사탄은 욥의 동기를 의심한다. 그가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누리는 복을 거두어버리면 그는 틀림없이 하느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한다. 사탄의 의혹은 상식적인 지혜의 세계를 대변하는 것으로, 우리들 모두를 근본적인 문제의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욥기』의 저자는, 반드시 보상의 동기를 따라서만 경건하고 의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사탄의 입을 통해 발설함으로써, 그러한 상식이 ‘사탄적’(악마적)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사탄의 의혹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사탄은 숨 가쁘게 욥에 대한 시험 작전을 펼친다. 가축이 약탈당하고 종들이 살해된다. 자식들 또한 죽는다. 한마디로 욥이 가진 모든 것이 사라졌다. 소유의 완전한 상실이다. 사탄은 확신하였다. 그렇게 그가 가진 모든 것이 사라지면 욥은 무너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상실해버린 그 고통 앞에서 슬퍼하였지만, 그의 신실함과 의로움은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오,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욥을 믿어준 하느님, 그 하느님을 믿은 욥의 일차 승리였다. 그럴 리가 없다고 믿었던 사탄은 이차 시험을 계획한다. 소유를 박탈함으로써 그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탄은 이제 욥 자신에게 해를 가하면 틀림없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믿었다. 욥은 병들고 그가 맺고 있던 인간관계로부터 격리된다. 고대인들이 신의 저주로 가장 두려워하였던 피부병을 앓은 욥의 모습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인격의 근거 자체가 말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그는 사회적 관계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폐허의 잿더미에 앉게 된다. 소유를 상실한 것은 괴롭지만 그래도 견딜 만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몸마저 망가지고 그 결과 인간으로서 자기 몫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고통은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하다. 사회적으로 존재 자체를 완전히 부정당하는 지경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들기나 할까? “차릴 죽는 것이 낫겠다”는 욥 아내의 탄식은 그런 절망적 상황을 말한다. 그러나 욥은 그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 하느님과 욥의 이차 승리였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 안에 있는 하느님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하느님에 대한 신실함, 그리고 그 신실함에 걸맞게 악을 멀리하는 인간 승리에 관한 이야기로서 『욥기』의 결론은 이미 서장에서 내려졌다. 그러나 그 결론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욥기』의 진가는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제기되는 물음들에 있다. 고통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친구들의 태도와 그 고통 때문에 절규하면서도 끝까지 스스로의 존재를 포기하지 않고 항변하는 주인공의 갑론을박은 고통 가운데 있는 인간의 적나라한 상황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3. 두 세계의 대결 - 본론(3장-42:6) 고통을 겪는 욥에게 친구들이 달려온다. 그들은 물론 욥과 논쟁을 벌이기 위해 달려 온 것은 아니다. 그들은 고통 받는 친구를 위로하고 나아가 친구가 그 고통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방법을 충고하기 위해 달려온다. 그들은 선의로써 욥에게 말을 건넨다. 그러나 친구들의 말은 위로를 주지도 못하고 나아가 그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다. 친구들의 주장은 욥을 더욱더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선의를 통해 다가오는 악이라고 할까? 우리들 모두가 쉽게 경험하는 상황이다.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악의는 손쉽게 배척할 수 있다. 그러나 선의 가운데서 다가오는 악은 분별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항변하는 욥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세계관 속에 감추어진 악의와 기만을 폭로한다. 1) 고통의 기원 - 욥과 세 친구의 논쟁 (3-31장) (1) 삶이 고통이라면? - 욥의 탄식(3장) 욥이 겪는 고통이 너무도 처참하여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무거운 침묵을 깨트리고 마침내 욥이 입을 떼고 탄식의 독백을 쏟아놓는다. 자신이 당하는 잔인한 운명을 한탄한다. 욥은 자신이 살아있는 것 자체를 원망한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면 그 누구인들 자신의 삶을 원망하지 않겠는가? 그 고통에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탄식하는 욥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인간의 실존 그 자체이다. 욥은 사(死)의 찬미를 노래한다. 삶이 곧 고통이라면 죽음은 곧 기쁨이다. 삶이 죽음이요 죽음이 삶이다. 죽음의 세계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삶의 세계에서 고통을 주는 모든 관계가 뒤바뀌어 있다. 자신의 권력과 영예를 위해 분주했던 권세가들이 할 일이 없다. 무고한 핏덩이들이 내버려지는 그 고통을 더 이상 겪지 않는다. 악한 사람들이 제멋대로 굴지 못하고, 자신을 소진시키는 고단한 노동에 시달리던 이들이 안식을 누린다. 죄인으로 격리되었던 이들이 더 이상 정죄받지 않고, 주인도 노예도 없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사의 찬미는 역설적으로 진정한 생의 찬미로 바뀐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나 누려야 할 세계를 ‘죽음’의 세계는 보장한다.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을 죽어야 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살아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욥은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 가운데 있다. 살고자 발버둥치는 일이 오히려 자신을 죽이는 두려운 일이 되고 있다. 밥을 놓고서도 탄식하고 있으니, 그것은 살고자 하는 것이 곧 죽음에 이르는 두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어찌 욥만이 처한 상황일까? 살고자 애쓰는 모든 일이 결국 자신의 무덤을 만들 뿐인 오늘 우리들의 현실이기도 하다. 인간이 그 고통을 겪어야 하는 까닭이 무엇이며, 그 고통으로부터 헤어 나오는 길은 무엇일까? (2) 아닌 땐 굴뚝에 연기 나랴? - 첫 번째 논쟁(4-14장) 욥의 불경스러운 탄식을 들은 친구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퍼부어 대기 시작한다. 가장 연장자이자 인생의 경험이 풍부한 엘리바스가 경험의 논리를 펼친다. 죄 없는 사람이 망하고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을 자신은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잘못 때문에 그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아닌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고통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서는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서는 길 밖에 없다고 단언한다(4:1-5:24). 과연 그럴까? 가난과 질병, 그로 인한 고통이 죄의 결과일까? 쓰나미로 인한 서남아시아 사람들의 고통, 미군의 공습으로 폭격을 당한 이라크 민간인들의 고통, 60%에 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이 모두 그들의 잘못 탓일까? 엘리바스는 그렇다고 말하지만 욥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욥은 먼저 고통의 현상을 주목하라고 말한다. 절절히 자신의 고통을 호소한다. 지금 고통을 겪는 그는 무엇보다도 위로를 받고 싶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전쟁이요 강제 노역과도 같은 상황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그래도 이해 받고 위로 받을 수 있다면 그나마 삶의 희망을 간직할 수 있다. 동정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욥은 하느님을 향하여 탄식한다(6:1-7:21). 엄격한 교리주의자의 면모를 가진 친구 빌닷은 매우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공정한 하느님의 심판은 잘못될 리 없는데도 지금 하느님의 공의를 의심하고 항변할 수 있느냐고 한다. 빌닷은 욥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면 그 자식들이 잘못한 것 때문에 지금 고통을 격고 있다고 단언한다. 도대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이 과연 하느님의 의에 합당한 것인지 물음을 던지고 있는 욥에게 빌닷은 더 이상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명백한 잘못이 있으니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는 길 밖에 없다고 한다. 욥이 정말 의롭다면, 욥이 더 이상 불경을 범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이 욥의 명예와 가산을 회복시켜줄 것이라 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빌닷은 저 유명한 경구를 말한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여기에서 의로움을 입중해주는 방편은 재산이다. 그 재산이 처음에는 보잘것없지만 점차 크게 될 것이라 한다. 재산과 의로움은 비례한다? 그러나 현실이 그와는 전혀 다르다면 그 경구는 언어의 폭력일 뿐이다(8:1-22). 빌닷의 감정 없는 신학, 인정 없는 교리적 독선에 욥은 분노를 터뜨리며 거의 정신착란지경에 이른다. 친구들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하느님에게 호소하다, 혼자서 탄식을 하다, 종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욥은 아예 하느님의 부조리에 대해 항변한다. 하느님을 경외하며 흠 없이 살아온 자신은 이렇게 학대하면서 악인이 세운 계획은 잘만 되게 하니, 이 무슨 일이냐고 따진다. 잘못을 할 때는 가차 없이 벌을 주면서도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은 눈여겨보지도 않는 존재라고 항변한다(9-10장). 엘리바스의 경험으로도, 빌닷의 교리로도 설득되지 않는 욥을 보고 세 번째 친구 소발은 직격탄을 날린다. 죄인 주제에 제발 허튼 소리 그만 하고 죄를 회개하는 길밖에는 없다고 선언한다. 소발의 대안은 아주 구체적이다. 먼저 마음을 바르게 먹고, 기도하며, 생활을 깨끗하게 하면,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다. 부끄러움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져 두려움이 없어진다. 괴로운 일은 옛 일이 되어버리고 생활이 밝아지고 희망이 생긴다. 확신이 생기고, 걱정거리가 없어지고 악몽을 꾸지 않는다. 자다가 놀랄 일도 없고 많은 사람들이 환심을 사려고 줄을 설 것이다. 마치 오늘날 빈궁함과 곤고함 때문에 절박한 심정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교인들을 향한 목사의 설교 같다. 소발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오만하기 그지없는 욥이 안타까울 따름이다(11장). 욥이 보기에는 친구들이 오히려 가소롭다. 그들은 마치 하느님을 완전하게 알고 있는 듯이 말하지만 욥이 보기에 하느님은 불가사의하다. 친구들이 보기에 하느님은 인간을 흥하게도 하고 망하게도 하는 전지전능한 존재로서, 선한 사람을 흥하게 하고 악한 사람을 망하게 한다. 욥은 말한다. 하느님은 인간을 흥하게 하기도 하고 망하게 하기도 하지만, 흥하고 망하는 것이 선과 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정반대다. 욥에게는 그것이 의문이다.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몸부림치며 호소한다.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을 절대화하며 마치 하느님의 대변자라도 되는 듯이 행세하는 친구들과 욥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욥은 이제 하느님과 직접 대면하는 것만이 진실을 아는 길이라 확신한다(12-14장). (3)두 가지 지혜의 대결 - 두 번째 논쟁(15장-21장) 욥의 항변이 거세어지자 친구들은 이제 사실상 적대자로 변한다. 다시 엘리바스가 말문을 열면서 이제는 욥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하잘 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잠잠하라고 한다(15장).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하잘 것 없음, 또는 인간의 한계성에 대해서는 욥도 이미 공감하고 있는 바이다. 그 점에서 엘리바스와 욥은 일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태도는 너무나 대조된다. 엘리바스는 오직 순종과 침묵을 강조한다. 반면에 욥은 눈을 부라리며 마구 떠들어댄다. 엘리바스에게서 하느님의 위대함은 인간 주체의 소멸의 근거이다. 반면에 욥에게서 하느님의 위대함은 인간 주체의 회복의 근거이다. 엘리바스는 절대적으로 의로운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납작 엎드리는 수밖에 없다고 보지만, 욥은 절대적으로 의로운 하느님이기에 그 권능이 인간 사회 안에서도 공명정대하게 펼쳐져야 한다고 본다. 여기에서 특정한 인간의 욕망과 권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 자연적 혹은 초자연적 힘으로 둔갑하는 세계 현실과, 사람들이 그렇게 자연적 내지는 초자연적 힘으로 잘못 믿음으로써 정당화되는 불의와 고통이 극복되어야 한다는 저항적인 주체의 요구가 충돌한다(15-17장). 두 번째로 이어지는 빌닷의 충고는 아예 욥을 저주하는 것으로 일관한다. 분을 이기지 못해 날뛰지만 그런다고 바위가 제자리에서 밀려날 턱이 없다고 한다.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질서를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따라서 요지부동한 것으로 믿는 사람들은 그에 대해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그와 같은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것은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옳지도 않다는 것이다. 빌닷은 마치 뿌리 뽑혀 말라버린 나무와 같은 형세를 하고 있는 욥의 처지는 곧 그가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는 증거라고 단언한다(18장). 여전히 친구들이 말하는 의미에서 죄를 저지른 바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욥은 그처럼 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고통 받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들의 신학을 의심해보라는 듯이 자신의 고통을 생생하게 전한다. “폭력이다!” 외쳐도 소용없고 “살려달라!” 부르짖어도 듣는 사람이 없다. 그 사태를 보고도 하느님은 방관한다. 오히려 자신을 가혹하게 괴롭힌다. 욥의 이와 같은 부르짖음은 고통을 죄의 결과로, 유복함을 의로움에 대한 증거로 삼는 신학과 그 세계관을 의심하라는 촉구이다. 그 의심이 없이는 새로운 가능성은 없다(19장). 아마도 다혈질적 성격을 지닌 듯한 소발의 두 번째 발언은 저항하는 욥에 대한 불쾌감을 감추지 않는다. 여전히 그는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욥의 고통으로 동요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고통에 다가서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타인의 고통이 자신의 세계관을 입중해주는 명징한 사례라 보는 관점에서 변함이 없다. 그러한 입장에 저항하는 욥이 불쾌할 따름이다. 따라서 악한 자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만을 함으로써 욥에게 경고하고 있다(20장). 욥은 다시 친구들에게 호소한다. 정말 자신을 위로할 생각이라면 자기들의 주장만 되풀이하지 말고 고통을 겪는 당사자의 처지를 살피고 그 말에 귀기울여달라고 호소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욥은 자신의 고통만을 두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욥은 이제 자신의 고통이 친구들이 주장하는 사실과는 다른 경우를 대표하는 하나의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친구들에게 역설한다. 자기 한 몸 때문에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가 이야기하는 것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들으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친구들은 선과 악의 구도, 다시 말해 도덕적 규범의 차원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고 있다. 그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확고하게 믿고 있는 그 진실을 의심해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자기를 보면서 달리 생각할 수 없다면, 악인이 받아야 할 벌을 의인이 받고 의인이 받아야 할 보상을 거꾸로 악인이 받는 숱한 현실의 사례들을 보고 생각을 바꾸라고 외친다. 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만일 악인이 받아야 할 벌과 의인이 받아야 할 보상이 잠시 유예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변명할 생각은 말라고 한다. 욥의 이와 같은 주장은 모든 유예의 논리가 지닐 수 있는 함정을 들추어내며 그 논리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위기상황으로 몰아넣는다. 바로 지금 당면한 문제를 미래 역사에 맡기는 태도의 함정을 들추어낸다. 물론 이와 같은 유예의 태도는 모든 경우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한편의 사람들은 현실은 얼버무려 의도적으로 그 현실을 용인하기 위해 그 유예의 논리를 펴는가 하면,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바로 그 유예의 논리가 현실을 압도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미래의 희망을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욥의 주장은 불가피하게 유예의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의도적으로 유예의 태도를 취하는 이들에게 “지금 당장!”을 외치는 것과 같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공평함을 말할 수 있는 현실은 부조리하며, 그 불공평한 현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주장은 불온하다. 정말 불공평한 현실은 그대로 두고 하느님의 복과 징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평생 고통스럽게 살다 간 사람들은 모두 죄를 짓고 저주를 받아왔단 말인가? 불공평한 현실은 그대로 두고 말하는 행복과 불행은 하느님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하느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그 사태를 두고 하느님을 운운하는 친구들은 불온하다. 오늘날 그 태도를 그대로 취하고 있는 종교는 또 얼마나 불온한가?(21장) (4) 운명의 굴레를 벗어라! - 세 번째 논쟁(22장-27장) 첫 번째 논쟁이 죄의 혐의를 주장하는 친구들의 공격과 그 혐의를 부정하는 욥의 응수로 특징지어지고, 두 번째 논쟁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지혜가 격돌하는 양상이었다면, 세 번째 논쟁은 혼전의 양상을 띠고 있다. 그 내용만으로는 과연 누구의 주장인지 헷갈릴 정도로 유사하기도 하다. 욥이 구체적으로 처해 있는 고통의 상황을 새삼 환기하지 않는다면 모두 옳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한 혼선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실제로 본문 자체가 엉켜 있다(25-27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번째 논쟁 전반부의 엘리바스의 주장과 욥의 주장을 통해 여전히 동일한 주제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듯이 엘리바스는 멋진 설교를 한다. 엘리바스는 감히 하느님에게 도전하며 악행을 범한 욥을 질책하며 훈계를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욥에게 장엄한 축복을 선언한다. 하느님과 화해하기만 하면 은총을 베풀 것이라 한다. 하느님 앞에서 돌이키기만 한다면 만사형통한다는 말씀에 그 누가 솔깃해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엘리바스가 말하는 의미에서, 돌이켜야 할 그 무엇이 없는 욥으로서는 얼마나 난감하겠는가? 남에게 못살게 굴지도 않고 선하게 살아 왔는데도 지지리도 가난하게 고생만 하는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많아 고생하는 것이니 하느님 앞에 회개하라고 한다면 얼마나 난감할까? 오늘날 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들은 대부분 그런 류가 아닌가? 그런데도 난감해하기보다는 다들 “아멘!”을 외치는 사연은 또 무엇일까? 인간의 근원적 한계에 대한 자각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저 복 받고 싶은 마음에 우선 회개부터 하는 것은 아닐까? 도대체 무엇을 돌이켜야 할지도 모르면서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그 경우 설교는 청중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현실의 부조리를 깨닫게 하기보다는 사고를 정지시키고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역할을 할 뿐이다. 엘리바스의 아름다운 설교는 그처럼 부질없다(22장). 엘리바스이 감동적인 설교가 끝난 후 이어지는 욥의 이야기는 그 누구를 직접 대면하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마치 오페라의 아리아와 같다. 그 말하는 투도 이제까지의 격정적인 어조와 달리 절제되어 있다. 여전히 욥은 탄식한다. 여전히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제 절망만 하고 있지는 않다. 대답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간절히 찾는다. 이제까지 거의 항변으로 일관했던 욥은 아직 알지 못하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발버둥치기 시작한다. 하느님은 명백히 자신에게 무죄를 선포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고통의 의미를 묻기 시작한 것이다. 그 물음의 결과일 것이다. 자신의 고통 때문에 몸서리치고 그 고통이 더욱 가중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욥은 시선을 이제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옮긴다.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미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이 대목에 이르러 욥은 더더욱 확실하게 그 사실을 체감한다. 선과 악을 한 순간에 판별할 수 있도록 해 주지 않는 하느님이 원망스럽기는 하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선과 악이라고 믿는 것이 하느님이 원망스럽기는 하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선과 악이라고 믿는 것이 하느님이 재가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욥은 분명하게 깨닫는다. 부자와 재상은 하늘이 낸다고 했던가? 그것이 사람들의 믿음이었다. 결국 권세도 재산도 가지지 못해 가난하고 비루하게 사는 사람은 하늘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욥은 그 믿음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소상히 밝힌다. 욥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어찌 그렇게 가난하게 되었는지를 생생하게 서술한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자연적인 질서요 신적인 질서로 간주하는 것이 결코 자연적이지도 신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말한다. 악행을 범하는 사람이 있기에 그로부터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생긴다. 따라서 가난과 고통은 운명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관계를 바꿈으로써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가난과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을 때에는 거기에 아무런 의미가 있을 수 없다. 그저 고통스러운 현실일 뿐이다. 고통스러운 현실 때문에 절규하는 사람들 앞에서 침묵하시는 하느님의 속셈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 고통을 자신이 가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닐까?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고통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를 스스로 생각해보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고통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고 그것이 뭔가 잘못된 현실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따라서 변화할 수 있다고 보게 되면 그 고통은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열어준다. 예수는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두고 그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그 사람이나 그의 부모 잘못 탓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려는 것뿐이라고 말하며 그의 눈을 뜨게 해준다(요한복음 9:1-12). 눈먼 사람의 눈을 뜨이게 하는 일, 그것이 곧 하느님의 일이다. 부조리한 현실에서의 고통은 마치 그와 같다. 지금 현실에서 그것은 마치 운명과도 같지만,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은사가 된다. 욥은 그와 같은 깨달음에 이른다(23-24장). (5) 사랑하는 연인을 찾듯이 지혜를 찾는 욥 - 지혜의 찬양시(28장) 욥의 이야기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는데, 지금까지의 긴장된 문맥과 달리 분위기가 확 바뀌어 ‘지혜의 찬가’가 등장한다. 아마도 본래 독립된 전승이었던 이 노래가 욥과 그 친구들의 지혜를 뛰어넘는 근원적인 지혜에 관한 물음으로 이 대목에 삽입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욥의 이야기로 엮어진 것은 지금 아는 것을 전부하고 생각하지 않는 욥의 일관된 태도와 잘 어울린다. 욥은 인간 지식의 놀라운 성취에도 불구하고 해명할 수 없는 사태 앞에서 과연 지혜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있다. 마치 애타게 사랑하는 연인을 찾는 듯한 태도이다. 욥은 그 지혜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이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으로 세상의 이치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개별적 지식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은 어느 누구도 지혜의 참 가치를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깊은 바다도 넓은 바다도 그것을 숨겨두지 않았다. 모두가 그 지혜를 아련하게만 느낄 뿐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눈에도 지혜는 보이지 않는다. 저 깊은 심연의 세계에도 지혜라는 것이 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정작 알지 못한다. 욥은 하느님만이 그 지혜가 있는 곳을 안다고 말한다. 태초에 하느님이 그 지혜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없이 지혜를 말하면서도 정작 실감하지 못하는 우리들 모두의 실상을 말한다. 친구들이 더 이상 사유하기를 중단하고 자신의 지식을 절대화하고 있을 때 욥은 이처럼 겸허하게 끝없는 지혜를 추구했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6) 욥의 마지막 자기변호(29장-31장) 친구들과의 격정적인 논쟁을 벌인 욥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위로도 얻지 못하고, 자신의 주장으로 친구들을 설득하는 데도 한계를 느낀다. 친구들도 이미 욥과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을 시인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 상황에 이르러 욥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고 지금 사신의 처지를 다시 생각한다. 일종의 정관(靜觀)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해야 할까? 욥은 지난 날 아주 행복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한 만큼 그에 상응하여 유복함을 누렸다. 때문에 불사조처럼 장수를 누리며 선종(善終)하리라 믿었다. 그 모든 것을 의로운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적절한 보상으로 여겼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재난과 고통으로 그 확신은 흔들린다. 욥은 가진 모든 것을 잃었고 인격적으로 모독을 당하고 있을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 욥은 고통을 받는 사람을 보면 함께 울었고 궁핍한 사람을 보면 함께 마음 아파했던 자신에게 행복은 오지 않고 화가 들이닥친 상황을 통탄한다. 하지만 욥은 친구들이 말하는 의미에서 그 어떤 잘못은 저지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전히 확신을 가지고 있다. 욥은 하느님 앞에서 떳떳이 설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결백에 대한 그 자신감, 그러나 그와는 대조되는 극심한 고통의 상황은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 그 극명한 대비로 욥의 발언은 마감하고 있다. 2) 팽팽한 대립구도의 균열 - 엘리후의 연설 (32장-37장) 욥과 세 친구들 사이의 논쟁은 끝까지 평행선을 달렸다. 그 대화를 지켜본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을지언정 대화의 당사자들 사이에서는 피차간에 소득이 없는 논쟁이었다. 결국 욥과 세 친구들은 함께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 때 한 젊은이 엘리후가 등장한다. 엘리후가 보기에 친구들은 욥을 정죄하려고만 했지 정곡을 찌르지 못했고 욥 역시 정당하지 않았다. 엘리후는 논쟁의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는 태도로 나선다. 엘리후가 보기에 하느님의 언어로서 고통은 고통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인간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고통 받는 사람의 생명이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될 때 하느님은 천사를 보내 그를 구하고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상기시킨다. 그가 하느님에게 기도하면 모든 것을 정상으로 회복시켜준다. 그러한 일을 두 번 세 번 되풀이하는 것은 사람의 생명을 무덤에서 끌어내어 생명을 보게 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엘리후가 생각하는 고통의 의미다. 엘리후의 이와 같은 생각은 명백히 욥의 친구들의 생각과 다르다. 욥의 친구들은 인과응보적 보상의 논리를 따라 고통을 죄에 대한 징벌로만 이해했다. 그러나 엘리후의 죄에 대한 징벌로서 고통이 아닌 교훈을 일깨우는 계기로서 고통의 의미를 강조한다. 인간은 죄가 없어도 고통을 받을 수 있다. 그 고통은 인간을 하느님 앞에서 겸허한 존재로 만들고 진정한 생명을 누리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 점에서 친구들과 욥은 모두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다. 죄를 지었으니 고통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나 죄가 없는데도 어찌 고통을 주느냐고 불평하는 것은 모두 고통을 죄의 결과로 생각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태도이다. 엘리후는 자신의 말대로 양측의 잘못을 지적하고 훈계함으로써 공평함을 지키는 듯했다. 그리고 욥의 친구들의 입장을 벗어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기본적으로 불가역적인 존재로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욥의 친구들과 기본적인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욥의 신성모독에 있다. 엘리후는 세 친구들의 동의를 구한다. “세 분께서는, 그가 말하는 것이 악한 자와 같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엘리후는 사실상 친구들이 욥을 정죄한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거기에 새로운 범죄를 더욱 명확하게 추가한다. “욥은 자신이 지은 죄에다가 반역까지 더하였으며, 우리가 보는 앞에서도 하느님을 모독하였습니다.” 결국 엘리후의 신학은 친구들의 신학보다 세련되었지만 역시 보수적이다. 선행을 행하면 행복하지만, 악행을 범하면 고통을 겪는다는 친구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명쾌했지만 현실적 설득력은 없다. 엘리후는 그 약점을 보완한다. 행복도 고통도 모두 하느님의 장중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고, 고통은 꼭 범죄의 결과로 겪는 일만은 아니며 하느님의 선한 뜻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를 지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엘리후의 이와 같은 주장은 한편으로는 사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지만, 그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순간 서둘러 그 새로운 지평을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울타리 안에 포섭하는 꼴이다. 그렇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어찌해야 할까? 인간은 그 앞에서 스스로 무지몽매하다는 사실을 시인해야 한다는 것이 엘리후의 결론이다. 3) 천지불인(天地不仁) - 하느님과 욥의 대화(38장-42:6) 욥이 하느님에게 항변할 때 정말 하느님이 응답하리가 기대했을까? 아마도 욥의 행보를 지켜본 사람은 하느님의 직접적 응답을 기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답답해 뱉어놓은 하소연에 가깝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나타난다. 욥은 정말로 하느님과 일대일로 대면하는 상황을 맞이한다. 하느님은 욥에게 응답을 한다. 그렇게 응답하는 하느님은 욥을 정죄하지 않는다. 욥이 항변했던 내용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을 하지도 않는다. 하느님은 욥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하느님의 지혜, 곧 섭리를 욥에게 일깨우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1) 하느님의 자유 - 하느님과 욥의 첫 번째 대화(38장-39장 / 40:1-5) 응답하는 하느님은 욥에게 이 땅이 시작된 날을 환기시킨다. 땅의 기초를 놓은 이는 하느님이다. 그 뿐이 아니다. 하느님은 바다와 땅의 경계를 정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우주만물의 운행 그 가운데 하느님의 뜻이 있다. 자연적 질서 자체가 하느님의 지혜 곧 섭리라는 말이다. 이 이야기는 자연의 모든 사물이 인간에게 유용하도록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경고한다. 땅의 기초를 놓고 모든 경계를 정한 것이 인간이 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이 한 일이라는 말은 그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욥의 친구들이 그렇게 명백하게 선과 악을 가르고 그것을 하느님의 정의와 연결시켰던 발상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노자(老子)는 “천지 불인(天地 不仁)”이라고 했다(『老子』5장). 자연은 인간의 규범적 가치로 재단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떤 자연현상은 인간에게는 명백한 재난이지만 자연 자체로서는 생명활동의 연장일 뿐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인간적 가치로 재단하는가? 하느님은 여러 가지 자연현상과 생명현상을 들어가며 욥에게 대답해보라고 다그친다. 이것은 욥에게 스스로 죄를 인정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친구들에게 항변하면서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친구들의 사고의 한계 안에 있었을 수도 있는 욥에게 그 한계를 뛰어넘는 진실을 깨우치라는 이야기이다. 욥은 더 이상 긴 말을 하지 못한다. 그저 겸손하게 그 진실을 인정할 뿐이다. (2) 하느님의 정의 - 하느님과 욥의 두 번째 대화(40:6-41장 / 42:1-6) “아직도 너는 내 판결을 비난하려느냐? 네가 자신이 옳다고 하려고, 내게 잘못을 덮어씌우려느냐?” 이렇게 시작하는 하느님의 두 번째 물음은, 욥의 친구들이 매여 있던 인과응보의 논리에 매여 자신을 판단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하느님은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인과응보 논리의 허구를 깨트리기 위해 욥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욥이 스스로 의롭다고 내세울 만한 근거를 묻는 말씀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하느님은 욥에게 교만한 자들과 악한 자들을 응징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만약 그렇게 응징할 수 있다면 하느님은 욥을 찬양하겠다고 하며, 욥이 당신을 이겼다고 인정하겠다고 한다. 이야기인즉슨 ‘네가 생각하는 악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불가능하다. 네가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내가 내 자리를 너에게 내주겠다’는 것인데, 이 이야기가 뜻하는 바가 과연 무엇일까? 이것은 마치 숙명론처럼 보인다. 세계의 악은 인간 스스로 극복할 수 없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인간이 그렇게 악의 사슬에 묶여 살 수밖에 없는 숙명적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들이 하는 일이 악순환을 만들고 있는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악을 척결한다는 것이 또 다른 악을 만드는 현실, 고통을 극복한다는 것이 또 다른 고통을 만들어내는 인간 현실에 대한 적나라한 질타이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고통에서 헤어 나오는 해법을 제시한다면서 더 심한 고통을 가하고 있지 않은가? 욥 역시 자기의 의로움을 강조하지만 욥이 스스로의 의로움을 강조할수록 사실은 친구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모순을 낳는다. 의로우면 고통을 겪지 않는다는 말인가? 욥이 스스로 경험한 대로, 그리고 목격한 대로 무수히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을 겪지 않는가? 그러니 고통은 운명이란 말인가? 그것이 아니다. 인간의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하느님은 촉구한다. 욥은 하느님에게 억울하다고 항변하고 하느님이 불공평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욥에게 인간들 스스로 만든 그 굴레에서 헤어 나올 것을 촉구한다. 덩달아 그 굴레 안에 하느님을 가두는 것을 질책한다. 하느님은, 일정한 한계 안에 갇힌 인간이 그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전지전능하다고 생각하면서 만들어내고 있는 악의현실에 주목한다. 하느님의 정의는 일순간 악의 해소라는 방식보다는 선과 악을 드러내줌으로써 인간에게 그것을 분별하도록 하고, 인간에게 악순환에서 벗어날 길을 찾도록 촉구하는 방식으로 제시되고 있는 셈이다. “대낮의 광명은 너무나 밝아서 악한 자들의 폭행을 환히 밝힌다.”(38:15) 제발 인간들이 그 사실을 깨닫기를 바라는 것이다. 베히못과 리바이어던 이야기 역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하느님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두 짐승 베히못과 리바이어던의 위력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이 두 동물은 실존하는 동물이라기보다는 고대적 상징이 응축된 전설적인 동물들이다. 앞에서 인간이 개입하지 않아도 자유롭게 자신들의 생명을 영위하는 동물의 세계를 언급하는 이야기(38:39-39:30)에 비해 이 이야기는 훨씬 무겁다. 인간의 불가항력을 강조하는 것 같다. 서두의 이야기가 숙명론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듯이 이 이야기는 그 숙명론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보완장치처럼 보인다. 역시 숙명론일까? 인간이 별짓을 해도 물리치거나 어찌해볼 도리 없는 괴물들의 존재를 강조하는 뜻은 무엇일까? 우리는 하느님의 두 번째 응답의 서두에서 가졌던 의문과 동시에 그 해법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그 괴물들의 위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무시무시한 괴물들 역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간 사회의 악의 상징과도 같은 두 괴물들이 피조물이라는 이야기는 인간사회의 악 역시 하느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이야기일까? 이 이야기를 숙명론으로 받아들이면 그렇게 보는 것이 그럴 듯한 해석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초점은 악도 하느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측면보다는, 마치 신적 존재와 같이 간주되는 그 존재 역시 피조성의 한계 안에 있다는 점에 있다. 인간사회는 수없이 많은 필연적 법칙으로 얽혀 있다. 정치의 법칙, 경제의 법칙 ..... 그리고 그 법칙을 따르는 제도는 항상 항구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 모든 것들의 꼭대기에 국가권력이 자리하고 있다. 베히못과 리바이어던은 바로 그와 같은 존재를 말한다. 홉스는 국가권력을 리바이던이라 불렀다. 그것은 마치 인간들에게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하느님을 말한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당신의 피조세계의 한계 안에 있을 뿐이다. 하느님을 승인하는 것은 또 하나의 거대한 필연의 법칙에 우리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한 ‘필연적 법칙’에서 헤어 나와 전혀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엄청난 가르침 앞에 욥은 승복한다. 욥의 그 승복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닐까? 숙명론의 관점에서는 아주 편하고 익숙한 해법이 제시된다. 전지전능한 하느님 앞에서 어쩔 도리 없는 인간이 스스로 한계를 승인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제군주와 같은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그저 명령만을 기다리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뜻은 아니다. 결국 그 이야기를 위해 욥의 고통이 또 하나의 도구로 채용되었다면 허망하지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그 하느님을 믿어야 할까? 만일 그렇다면 욥이 지금까지 항변해왔던 것보다 더 극렬하게 하느님에게 항변해야 하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심각한 회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욥기는 인간이 스스로 만든 법칙에 매인 노예에서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자유인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궤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을 승인하는 것은 또 다른 법칙에 자신을 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이전까지는 하느님에 관해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을 뿐이지만 이제는 하느님을 직접 체험한다는 이야기이다. 이제 어떤 중재가 없이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편견 없이 하느님을 만난다. 하느님을 대신한다는 존재, 하느님을 전한다는 이야기는 오히려 하느님의 진실을 보여주고 전하기보다는 왜곡시켰다. 그러나 이제 그 미망에서 벗어났다. “그러므로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이 번역은 이전에 욥이 뱉었던 항변 자체를 거두어들이고 그렇게 항변했던 것을 잘못이라고 뉘우치고 있다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나는 먼지와 재를 포기하고 후회한다”로 재해석될 수 있고, 이 말은 ‘먼지와 재’로 상징되는 신음과 한탄의 태도를 접겠다는 뜻이다. 그것은 근본 태도를 바꾸겠다는 뜻이지 말을 번복한다는 뜻이 아니다. 고통이 더 이상 자신을 파멸의 상황으로 몰고 가는 어떤 구실이 될 수 없게 만드는 삶의 의지의 천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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