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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의 근원을 없애는 투쟁이 필요해요"

 
"이주노동의 근원을 없애는 투쟁이 필요해요"

변정필 노동자의 힘 회원  

명동성당에서 농성투쟁 중이어야 할 농성투쟁단 공동대표 샤말 타파 동지는 현재 네팔에 있다. 지난 4월1일 한국 정부가 여수보호소에 수감되어 있던 샤말타파 동지를 긴급 강제 출국시켰기 때문이다. 만우절의 거짓말 같은 소식이었지만, 그것이 한국 이주노동자 운동의 현주소, 그리고 탄압 받는 이주노동운동 활동가를 지지·엄호하지 못한 한국 노동운동의 현실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기에 농성단 동지들은 이 현실을 인정하고 대오를 추스리며 다시 투쟁에 나서고 있다.

착한 사람

"어렸을 때 꿈은 경찰, 군인이었어요. 그리고 잠깐 고등학교 때 가수가 되고 싶어서 노래도 많이 불렀어요. 그리고 대학교 가서는..." 잠깐 말을 멈춘 후에 항상 그렇게 했듯이 "히히" 하면서 "그냥 착한 사람되고 싶었어요."한다. 남들한테 폐 끼치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다른 사람들도 같이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게 꿈이었단다. 좀 싱겁기는 하지만, 농성투쟁에서 보여주었던 모범생 같은 모습의 기원을 알 수 있겠다 싶었다. 매일 새벽으로 이어지는 회의에서도 공부하는 수험생처럼 졸지 않으려 눈에 연신 연고를 발라대며 끝까지 버티던 모습이며, 아무리 피곤해도 농성장에 연대단위가 방문하면 표정을 얼른 바꾸어 환하게 웃으면서 맞이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회의 중에 이견이 생겨도 끝까지 웃는 얼굴로 차근차근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농성투쟁에 함께 한 동안은 그는 항상 텐트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를 토론으로 해결하는 해결사였다. 그리고 항상 '괜찮아요'가 입버릇처럼 따라다녔다.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 잘 못하고, 걱정 안 끼치게 착하게 살고자 했던 샤말동지는 결국 여수외국인보호소에서 웃지 못할 해프닝을 남겼다. '연행이주노동자 석방·단속추방 중단'을 요구하며 30일이 넘도록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할 때에도 항상 '난 괜찮아요, 화성보호소에 있는 깨비, 굽타, 헉 동지가 걱정이에요.'라던 샤말 동지는 급기야 단식투쟁 말미에 상황을 보러온 국가인권위 조사관의 '몸 상태가 어떠냐'는 질문에도 '괜찮아요'라고 대답해 명동농성단 동지들이 분노(?)했던 기억이 있다. '아니, 곧 죽을 것 같은데, 죽을 것 같다고 말해야지!'

이주노동자 스스로 투쟁해야 한다

샤말동지는 1994년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산업연수생 1호로 한국에 들어 왔다. 94년 당시 대학교 2학년이었던 샤말동지는 한국에 다녀온 친구들의 '한국에 가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좋은 것도 많이 배울 수 있다'는 말에 한국에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브로커를 통해 불법으로 입국하느니, 합법적 연수생으로 가서 기술도 배우고 돈도 벌고 싶어서 굳이 산업연수생으로 입국을 했다. 그리고 그 이후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코스대로 임금체불을 하던 산업연수업체를 뛰쳐나와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신문배달을 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안양 전진상 복지관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그 곳에서 이주노동자 지원을 도왔다. "거기서 이주노동자들 어려움 갖고 있는 거 알게 되고, 이주노동자 지도자 교육도 받았었어요. 그러면서 이제 NGO가 아니라 이주노동자 스스로가 자기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2001년 친구의 소개로 이주지부를 알게 되었죠." 그리고 평등노조 이주지부 안양분회 분회장을 거쳐 2003년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 비상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11월15일 '강제추방저지·미등록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를 위한 농성투쟁'에 돌입했다.

우리의 희망, 꼭 쟁취하기를 빌어요

지난 11월15일은 전국에 있는 이주노동자 1,000여 명이 명동성당 등에서 단속추방·미등록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를 요구하며 농성투쟁에 돌입한 날이다. 그 전날 잠은 잘 잤냐는 질문에 "당연히 못 잤죠. 걱정 진짜 많이 했어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고 조직하면서 다 숨어있으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그런데 그 날 우리 이주동지들이 그렇게 많이 모인 것을 보면서 아, 이게 조직화와 우리 투쟁의 성과구나 생각했어요."라며 목소리가 환해지는 것이 전화기 넘어 보인다. 그런데 "아무리 말해도 숨어서 농성 투쟁하는 우리만 바라보는 이주노동자들 보면 안타까워요."라는 아쉬움이 금새 전화선을 타고 전해진다. "우리 농성하는 동지들, 모든 것을 버리면서 다섯 달 째 농성하는 거 어려운 거예요. 우리 이주노동자 희망 위해, 권리 위해 고생하고 있어요. 여기 돌아와서 보면, 여기서 먹고사는 거 농성하는 거 보다 훨씬 힘들어요. 거기서 열심히 싸워서 우리의 희망 꼭 쟁취하기를 빌어요."라는 메시지를 농성단 동지들에게 전했다. 그리고 네팔에 있어 미안하다는 말도.

이주노동의 근원에 저항하는 투쟁을 할겁니다.

네팔에 돌아왔더니, 물가도 많이 올랐고, 최소한의 생필품도 제대로 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 졌다고 한다. 게다가 국왕을 향해 선거민주주의 도입을 요구하는 투쟁이 매일매일 수도인 카트만두에서 일어나고 있다. 거의 십 년 만에 돌아간 고향 땅 민중의 삶은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의 삶보다도 더 처절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샤말 동지는 네팔에서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네팔 노총에서 이주노동을 준비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교육을 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도 받았다. 그러나 샤말 동지는 좀 다른 생각을 한다. "이주노동은 한번 시작하면 끝이 없어요. 나라로 다시 돌아와도 살기 어려우니까 또 나가요. 그러니까 네팔에서 살 수 있도록 일자리를 만들고, 그래서 사람들이 네팔에서 살고 싶도록 해야 해요."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라를 떠나야만 하는 강제적인 이주노동을 끝내는 투쟁을 국내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겠어요. 친구들이랑 이야기를 해도 그냥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누구 사람 좀 네팔로 보내줘요"라며 또 '히히' 웃는다. 한국에서 노동운동의 경험이 네팔에서 어떻게 꽃을 피울지는 모르겠다. 네팔 노동운동의 조건에 의해 규정받는 바가 클 것이고, 어쩌면 좌절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운동에서 이주노동운동의 싹을 틔우기 위해 투쟁했던 그 강한 의지가 네팔에서도 굳건히 자라나기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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