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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원가, 순소득 그리고 공장 경영

인간과 계획: 제2장 (3) 총명한 유물론 2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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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 순소득 그리고

공장 경영

 

이제 소련 경제의 여러 축적경로 중 첫 번째인 감가상각비에 대해 말하자면, 각 산업에서 사용되는 장비와 건물이 마모되는 평균속도에 따라 산업별로 다르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소비에트 정부는 1938년 1월에 산업별로 세분화된 감가상각비의 기준표를 제정했는데, 중형 기계공업과 경공업에서 5.5%부터 임업과 식품업에서 6%까지 다양했다.1 관련 부처들은 산하 공장들별로 해당 산업에 정해진 비율을 차등 적용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따로 마련된 금액(1차 5개년 계획 기간에는 총투자액의 10분의 1에 해당하였던 63억 루블이었고, 2차 계획 기간에는 총투자액의 7분의 1이 넘는 203억 루블이었다.)의 일부는 해당 산업의 건물과 장비에 대한 대대적인 수리를 지원하기 위해 국영은행의 경상계좌에 예치됐다. 하지나 그 상당 부분은 5개년 계획에 따라 수립된 건설계획에 자금을 전달하기 위해 소련에 설치된 장기신용은행에 예치된다. 따라서 감가상각비의 이 부분은 특정 산업 부문에서 벗어나 경제의 전반적인 발전을 위해 전체 공동체의 처분에 맡겨진다.

 

연히 이것은 자연스럽게 효율성을 측정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감가상각은 생산원가의 가장 중요한 구성부분이다. 한때 평균 수치가 매우 초과된 적이 있었다. 이 시기는 소비에트 정부가 거대한 재건 계획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전에는 미숙련 노동자였던 수백만 명의 농촌 출신 인력에게 고용을 제공하던 때, 즉 소련에서 실업이 완전하고 영구적으로 사라진 시기(1930년)였다. 스탈린은 이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기계를 다룰 수 있는 기술적으로 훈련된 인력의 부족으로 인해 발생했던 필연적인 비용과 초과지출을 솔직하고 의도적으로 감수했다. 물론 이 시기에 적지 않은 기계들이 파손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가장 귀중한 시간을 얻었고, 경제활동에 있어서 가장 가치있는 숙련노동력을 창출했다. 비용과 초과 지출, 파손된 기계, 그리고 기타 손실들은 풍요롭게 보상되었다.”2

그러나 제1차 5개년 계획 과정에서 이 초기 단계를 벗어나고 소비에트 연방이 불과 몇 년 만에 남성과 여성을 포함한 수백만 명의 숙련된 산업노동자를 확보하자, 공업에 대한 감가상각비는 기존 설비를 최대한 활용하는 데에 있어 확실한 자극이 됐다. 감가상각비의 액수는 설비와 건물의 원래 비용에 대한 정해진 비율로 고정된다: 따라서 최대의 생산량을 내기 위해 후자(설비와 건물)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생산물 단위당 감가상각비가 하락하고, 그에 따라 (그만큼) 생산원가가 절감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원가의 절감은 소련에서 유능한 관리자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 중 하나이며, 이를 달성한 관리자와 노동자들은 물질적 혜택을 받는다.

 

이것은 개인의 역할이 작용하는 소련의 생산단계 중 하나이다. 기존 설비의 최대한의 활용, 기계 마모율을 줄이는 기술 장치의 사용, 건물과 설비의 시기적절한 수리이러한 요인들은 각 생산 단위에 대한 감가상각비의 부담을 덜어주는 데 상당한 중요성을 가진다. 이러한 비용을 줄일 모든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빈번한 공개 비판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나치의 침략 이전인 1941년 2월에 열린 소련 공산당의 마지막 당대표자회의에서 말렌코프(소련 공산당의 서기 중 한 명)는 1940년 11월 1일, 소련의 공장들에서 약 7만 개의 공작기계들(machine-tools)이 그 특정일에 가동되지 않았고, 제조 기관들을 통해 공장에 인도된 46,000개가 아직 설치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3 이는 물론 해당 공장들의 그날 생산 능력이 그만큼 감소했으며, 결과적으로 감가상각비 부담을 줄일 기회를 상실했음을 의미했다. 또한, 소련 공산당 이바노보 지역위원회는 전쟁 중에 이 지역(‘소비에트의 랭커셔’로 알려진) 방직 공장들에서 설비 사용의 지체 현상을 없애면 1944년에 면직물 생산량을 4,300만 야드 이상 늘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계산했다.4 1946년 10월 소비에트 연방 최고소비에트의 1946년 예산에 관한 토론에서 소비에트 연방 예산위원회 위원장이자 우크라이나의 지도자인 L. P. 코르니에츠는 그해 상반기 소련 서부지역의 석탄광산들이 채탄기를 70%만, 착암기는 64.5%만 사용했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이 지역들에서 석탄 1톤당 생산원가는 계획된 원가의 2.34 루블을 초과했다. 유사한 원인들로 동부 석탄광산지대에서도 1톤당 계획원가를 1.81 루블씩 초과하게 되었다.5 도네츠 탄전(물질적 파괴가 특히 심했고, 전쟁 도중 숙련된 인력의 손실이 매우 컸던 곳)에서는 채탄기의 약 30%와 컨베이어 벨트의 22%, 전동 운반차의 26%가 놀고 있었다.6

 

이 사례들에서 관련된 기계들이 완전히 가동했다면, 제공된 장비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총생산량과 생산물 단위당 원가 모두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소비에트 언론은 이러한 교훈을 충분히 터득한 공장들이 거둔 성공한 사례들을 많이 보여준다. 예를 들어, 1946년 9월에 보로실로프그라드 기관차 공장에서는 주로 더 나은 설비들과 기존 공작기계와 프레스의 최대한의 활용을 통해 단위당 생산원가를 계획 허용치보다 13%를 절감했다. 그 결과, 9월에 기관차 한 대를 만드는 데에 드는 비용은 계획보다 5만 루블이 절감됐다. 10월에는 이러한 성공이 더욱 진전됐다: 이는 경영진의 더 나은 기술계획과, 기존의 기계를 최대한 활용하여 생산계획을 초과 달성하고 노동 생산성을 높이려는 수백 명 노동자들의 노력, 모두를 통해 달성된 결과였다. 실제로 이 부문의 계획은 9월에 3% 초과되었고, 기관차 한 대가 계획보다 더 생산되었다.7 돈바스 지역만 해도, 채탄기 기사인 게라심 자포로제츠(Gerasim Zaporozhetz)가 기계를 제대로 활용하여 월 생산량을 14,000톤으로 끌어올렸다; 또 다른 채탄기 기사인 표도르 지데예프(Fedor Zhideyev)는 1947년 1월에 같은 방식으로 16,000톤의 생산량에 도달했다.6

 

또한, 군수물품과 군수공장용 설비의 대량생산에서의 전시(戰時)의 경험은 예비 부품들(spare parts) 제작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기계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노보크라마토르스크의 스탈린 공장은 대량생산공장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났을 때 이 전시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그들은 윤활체계와 펌프, 커플링 박스, 샤프트 등 다루기 까다로운 부품들의 생산을 표준화하고; 대량생산을 조직했으며; 결과적으로 공작기계의 재설정에 필요한 시간을 단축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 결과, 이 공장의 주력(전문) 제품 제조 공정에 소요되는 시간이 1/5로 단축되었고, 그 공구부서에서 활용됐던 유사한 방법들은 그곳의 공정 기간을 3분의 1 미만으로 단축시켰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산업 내부에서 축적의 더 큰 원천은 그 운영에서 나온 순소득에 있다. 순소득은, 거래세처럼, 사회적 소유로 된 산업의 “잉여생산물”의 일부이다. 순소득은 국영공장이 다른 국영기관에 생산물을 파는 과정에서 생산원가와 국가가 사전에 정한 가격 간의 차액을 나타낸다. 판매 가격이 국가에 의해 계획되고 자유 시장의 통제되지 않는 효과에 맡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스탈린이 앞서 묘사한 단계에 있거나 본질적으로 순소득을 내는 기업이 아니므로 순소득을 내지 못하는 기업들이 반드시 공동체에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며, 따라서 국가로부터 불이익을 받지 않음을 의미한다.

 

산업의 순소득은 감가상각비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나 주로 해당 산업만을 위해 이용되지 않는다. 순소득의 더 큰 부분은 (연방 또는 지역예산을 통해) 국민경제의 기타 부문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하여 국가가 사용하도록 공제된다. 산업 내부에 비축된 순소득의 대부분은 (산업용 장기신용은행을 통해) 새로운 자본건설을 위한 자금조달에 활용된다: 하지만 그 일부는 기업소에게 유보되어 운영자원을 늘리고, 생산량과 품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재량권을 지배인에게 부여한다: 이것이 ‘지배인기금(director’s fund)’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 이 기금은 철강, 석탄, 석유, 광물 채굴 및 일부 화학공업부문에서 계획된 총 순소득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이며, 기타 중공업에서는 4%, 식품 및 경공업에서는 2%에 해당한다. 또한, 계획을 초과하여 확보한 모든 순소득의 25-75%가 추가된다.9 이 기금의 절반은 상여금과 복지향상을 위한 지출로 할당되고, 나머지 절반은 생산확장 및 해당 공장의 노동자들을 위한 추가적인 주택건설(전반적인 주택건설계획에서 제공하는 것 이외에)에 사용된다. 이 모든 것은 해당 공장이 생산량, 생산원가, 순소득에 대한 국가계획을 이행한다는 조건 하에서 이루어진다.

 

전시에는 전시 산업 확장의 막대한 필요 때문에 개별 산업에 유보된 금액이 상당히 감소했으며, "지배인기금"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1946년 7월에 복원되었다.

 

개별 산업에 유보된 순소득의 비율에 대한 개념은 산업, 운송, 무역, 농업 분야의 모든 국영 기업에 적용되는 다음 표에서 형성될 수 있다:

 

연도

총 순소득10

산업에 유보된 금액

1940년

333억 루블

116억 루블

1943년

217억 루블

18억 루블

1944년

244억 루블

-

1945년

189억 루블

20억 루블

1946년

221억 루블

59억 루블

1947년

241억 루블

54억 루블

 

보편적 이익과 개별적 이익을 결합하는 이러한 축적의 원천이 진취적이고 독창적인 공장 지배인과 그의 모든 직원에게 동기를 끊임없이 부여한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생산량이 계획된 수준을 초과할 때마다단, 계획된 생산원가를 초과하지 않고, 정해진 품질 기준을 낮추지 않으며, 그리고 물론 해당 노동조합의 공장위원회가 지속적으로 감독하는 노동법을 준수한다는 조건 하에서그 증가는 국민경제 발전을 위한 국가기금에 대한 기여의 증대와 관계 인원들에 대한 물질적 보상의 향상을 동시에 의미한다.

 

이러한 체계가 언제나 성공적이라고 하는 것은 허무맹랑한 주장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에서 생산은 매우 크게 증가했다. 생산방식과 생산기술의 개선, 기계화 공정의 도입, 원자재 및 전력사용의 낭비 일소, 과거에 먼 곳으로부터 공급받아야 했던 부품들을 생산하기 위한 보조작업장의 설립 등과 같은 요인들과 유사한 요인들은 전쟁 당시와 그 이래로 소련의 많은 공장들에서 생산량이 엄청나게 증가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한 비행기 공장에서는 생산공정의 재편을 통해 동체 생산량을 3배로 늘렸고, 노동생산성을 4배로 증대시켰다.11 소련 철도성 산하의 툴라 기계공장은 1946년 11월 25일까지 그해의 생산할당량을 완수했으며, 그 기간에 새로운 유형의 기계 10종을 제작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순소득을 축적했을 뿐만 아니라 생산원가를 4.5% 낮췄다. 노동생산성은 계획을 훨씬 초과했다. 또 다른 대규모 공장인 츠칼로프의 복합 사료 공장은 1946년 연간 생산 프로그램을 11월 26일까지 완료하여 180만 루블을 절약하고, 생산원가를 12% 낮추었으며, 완제품을 실은 철도 차량의 회전 속도를 상당히 높였다. 소비에트 언론의 뉴스 칼럼에 실린 수백 개의 기고문 중에서 무작위로 선별된 이 2개의 기사는 프라우다 1946년 11월 28일호에 실렸다.

 

동시에, 소비에트 언론은 원가를 높이거나 품질을 낮추지 않고 생산량을 늘릴 기회에 대한 부주의가 실제로 계획된 생산 할당량을 달성하지 못하게 하는 사례를 지속적으로 게재한다. 1946년 10월 15일 최고소비에트 회기에서 즈베레프(Zverev) 소련 재무성 장관은 소련 내 섬유공장의 운영방식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고; 세딘(Sedin) 섬유공업성 장관은 그 과정에서 즈베레프의 비판이 옳았음을 인정했다. 1945년에 해당 산업은 국가예산에 계획보다 4억 6백만 루블을 덜 납부했는데, 미납된 금액의 50%는 과도한 생산비용 때문이었고, 나머지는 노동자 전용 주택에 대한 불충분한 지출이랑 불필요한 부실채권 상각 등과 같은 결함들 때문이었다. 1946년에 섬유공업부문의 재정적 여건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보다 큰 주의를 돌린 결과 월마다 급격히 개선되기 시작했고, 그 해 3/4분기 무렵에는 부채를 청산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에 해당 산업은 전쟁 이래 최초로 1946년도 2/4분기 및 3/4분기 생산계획을 완수했다. 또한 계획된 수량보다 생산원가를 낮춤으로써 거의 2,400만 루블을 절감했으며, 노동자들의 노력으로 계획보다 10만 개의 방적기와 4,500개의 직기를 추가로 가동하는 데에 성공했다.

 

1946년에 섬유공업이 1945에 비해 생산량을 상당히 늘렸을 뿐만 아니라(면직물의 경우 17%, 모직물의 경우 30% 초과), 좋지 않은 출발에도 불구하고 연간계획을 3%나 초과달성한 대규모 산업군 중 하나였다는 점은 흥미롭다.12

 

계획된 원가와 노동조건의 틀 안에서 순소득의 양을 늘리기 위한 소비에트 경영진의 노력에 있어서 상당한 역할을 하는 것은 “내부 자원의 동원”이다. 수많은 공장, 그리고 특히 건설 현장에서는 자재의 초과 재고를 쌓아두는 경향이 있다. 기술적으로 정해진 하루당 재고량에 따라, 건설 현장은 60일분 이상의 자재 및 장비 재고와 40일분 이상의 철강 재고를 비축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전쟁의 가장 엄혹했던 때인 1942년과 1943년에 건설업(그 당시 수많은 공장을 건설했던)은 그러한 초과 재고를 "동결해제"하는 것만으로 30억 루블의 절약 효과를 거두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점은 소련의 조건에서 관리자들이 다른 곳에서처럼 자재 가격의 상승 가능성을 예상할 필요가 없으며, 오직 기술적 고려사항만이 그들의 계획을 좌우할 뿐이라는 것이다. 초과 재고는 일시적으로 생산 주기에서 벗어나, 그로 인해 국가 생산 계획을 방해하고 축적의 규모를 감소시킨다.

 

1946년 10월 예산 토론회의 연사들은 낭비적인 재고 축적에 관한 몇 가지 사례들을 거론하며 지배인들이 이에 관해 막대한 기회들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1946년 7월 1일에 농업기계성 소속 기업소들의 불필요한 재고는 거의 10억 루블에 달했으며, 그 중 섬유공업에서는 3억 루블을 초과했고, 화학공업에서는 1억 7천만 루블에 달했다. 앞서 인용했던 코르니에츠는 철강공업성 산하의 공장들이 7천만 루블을 지시대로 감축하는 대신, 같은 날까지 허용된 재고 총량을 3억 루블 이상 초과하도록 방치했다고 지적했다.13

 

번역: 김의진 | 사무위원

 

2024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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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Vosstanovitelnye Raboty i ik Finansirovanie, 1945, 61-2.텍스트로 돌아가기
  2. Speech at reception to metallurgical workers, 26th December, 1934.; O Sotziatistichesikom Sovrenovanii, 1941, 192.텍스트로 돌아가기
  3. Voznesensky, “Economic Plan for 1941”, U.S.S.R. Speaks for Itself, 1943, 31.텍스트로 돌아가기
  4. Kozlov, Khoziaisitvenny Raschet v Sotzialisticheskom Obschestve, 1945, 30.텍스트로 돌아가기
  5. Pravda, 17th October, 1946.텍스트로 돌아가기
  6. Ibid., 3rd March, 1947.텍스트로 돌아가기
  7. Ibid., 31st October, 1946.텍스트로 돌아가기
  8. Ibid., 3rd March, 1947.텍스트로 돌아가기
  9. V Pomoshch Fabzavmestkomam, No. 2, February, 1947.텍스트로 돌아가기
  10. 1940년도 통계는 최고소비에트 제6차 회기 보고 66쪽에서 재정성 장관에 의해 제시됐다. 1943년도 통계는 최고소비에트 제10차 회기 속기 보고(1944년 1월 28일 ~ 1944년 2월 1일) 22-3쪽에서 제시됐고, 1944년도 통계는 최고소비에트 제9차 회기 보고(1945년 4월) 8쪽, 11쪽과 Khoziaisitvenny Raschet v Sotzialisticheskom Obschestve, 1945, 56.에 제시됐다. 1946년 및 1947년도 통계는 재정성 장관에 의해 제시됐다. (Pravda, 21th February, 1947.)텍스트로 돌아가기
  11. Partia Bolshevikov v Borbe za Industrializatsiu SSSR, 1946, 97.텍스트로 돌아가기
  12. “Communiqué of the State Planning Commission on Fulfilment of the 1946 State Plan”, Soviet News, 22nd January, 1947.를 참조하라. 1947년에 소련은 다시 한번 한 해 계획을 3% 가량 초과달성했다. (Soviet Monitor, 18th January, 1948.)텍스트로 돌아가기
  13. Pravda, 16th and 17th October, 1946.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