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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장: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 이행기 경제정책의 기반

경제학 교정: 사회주의 생산양식 (9) 총명한 유물론 2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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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 이행기

경제정책의 기반

 

이행기의 객관적 경제 조건과 이 조건을 기초로 하여 형성된 경제 법칙에 관한 엄밀한 평가 없이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다. 소련공산당과 소비에트 국가의 정책은 레닌의 사회주의 건설 계획에 기반을 두고, 경제 법칙에 의존했으며, 계급 세력의 실제 균형을 고려하였다.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의 승리(victory of socialism in one country)에 관한 레닌의 가르침은 소련 사회주의 건설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이 가르침은 당과 노동계급에 과학적 사회주의 이념의 승리에 대한 명화한 전망과 확신을 심어주었다.

 

이 문제는 국내적 및 국제적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구별해야 한다. 국내적 측면은 국내 계급의 상호 관계에 관한 것이다. 공산당과 소비에트 국가는 노동계급이 농민과의 모순을 극복하고 동맹을 강화하며 농민 대중을 사회주의 건설로 이끌 수 있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수립되었다. 농민과 연합한 노동계급은 정치적으로 자본주의를 타도한 후, 경제적으로 부르주아 경제를 제압하고 착취계급을 일소한 후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 이 문제의 국제적 측면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들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가지 반대되는 체제가 공존하는 조건에서는 적대적인 제국주의 열강이 사회주의 영역에 무력 침략을 가할 위험이 그대로 존재한다. 이 모순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의 힘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승리는 침략적인 제국주의 열강의 개입과 자본주의 복귀의 위험이 소멸할 때에만 최종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소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성공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자본주의를 복구하려는 트로츠키주의자와 부하린주의자들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노동계급을 무장 해제시키려는 이론을 내세웠다. 그 이론의 취지는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러시아는 기술적, 경제적으로 뒤떨어져 사회주의를 실현하기에는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공산당과 소비에트 국가는 소련이 사회주의의 완전한 건설에 필요 충분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으며, 러시아의 기술적·경제적 후진성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 완전히 극복될 있다는 레닌의 명제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역사는 레닌의 명제의 진리성을 충분히 확증해 왔다.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레닌의 계획의 근본은 강력한 사회주의 산업을 창출한다는 사상이었다. 이는 사회주의의 물질적 기초이자 소농 경제에서 협동조합을 통한 대규모 집단 생산으로 점진적으로 전환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1920년대에 채택된, 러시아의 전기화를 위한 국가 계획인 고엘로 계획(Goelro Plan)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레닌의 프로그램에서 가장 큰 주요성을 지녔었다. 이는 인류 역사상 국민경제 발전을 위한 최초의 전망있는 계획이었는데, 이 계획은 10-15년 안에 사회주의의 생산적·기술적 기초를 구축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 승리와 사회주의의 공고화는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착취자들의 모든 저항을 완전히 진압하고, 그 자체의 완전한 승인과 복종을 확보한 다음, 대규모 집단적 생산과 (국민경제 전체의 전기화에 기초한) 현대적 기술 토대 위에서 산업 전체를 재조직할 때에만 보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만이 도시가 뒤떨어지고 분산된 농촌 인구에게 그처럼 급속한 기술적·사회적 지원을 제공할 수 있게 해줄 것이며, 이는 농업 생산성과 농업 노동 전반의 생산성을 엄청나게 높일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을 마련해 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소규모 농가가 모범을 보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규모 집단적 기계 농업을 채택하도록 자극할 것이다.”1

레닌은 농민이 사회주의 노선으로 이행하는 길의 기초를 제공하였고, 소상품 생산의 사회주의적 재건에서 협동조합의 새로운 역할을 제시하였다.

 

레닌의 사회주의 건설 계획은 국영산업과 농촌 경제 사이의 경제적 연계를 전면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전제로 하였다. 소농 경제의 특성상, 농민에게 도시와의 경제적 연계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형태는 매매를 통한 교환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행기에는 국영산업과 소농 경제 사이의 무역 유대가 경제적으로 필수적이다.

 

결과적으로 이행기에 농민의 소상품 생산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주의 건설에서는 시장과 화폐 경제를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1918년 봄부터 소비에트 정부는 매매를 통해 농촌 지역과의 상품 교환을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화폐 개혁을 위한 준비도 착수되었다. 그러나 해외 나라의 개입으로 인해 물질적 자원이 극도록 부족한 조건에서 경제 전체를 전선에 투입해야 했다. 개입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국가의 파괴를 더욱 심화하였다. 소비에트 정부는 농산물과 교환할 공산품이 전무했고, 농산물 공급 또한 상당히 감소했다. 매매를 통해 군대와 도시에 필요한 농산물을 조달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따라서 잉여 식량을 징발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즉, 국가가 모든 농민의 잉여 식량을 징발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조건 때문에 ‘전시공산주의(戰時共産主義)’로 알려진 정책이 소비에트 정부에 강제되었다.

 

군대에 빵을 공급하고, 노동 대중을 굶주림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절박한 필요성과 요구에 의해 잉여 식량 분배 제도 외에도, 전시공산주의 정책은 여러 가지의 다른 조치의 수행을 전제로 하였다. 국가에는 필수품 자원이 부족했으므로, 필수품 거래는 금지되었다. 이는 그것들이 투기꾼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소비재는 도시에서 매우 소량으로 배급되었다. 계급적 분배 원칙이 적용되었고, 배급량은 노동의 강도와 사업의 중요성에 따라 결정되었다. 전국적인 노동 복무제가 도입되었다. 부르주아에게는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에 참여할 의무가 부과되었다. 전시 상황으로 인해 소비에트 정부는 대규모 및 중규모 산업뿐만 아니라, 소규모 산업의 상당 부분도 기관화해야 했다. 자원 부족했으므로 산업계에는 엄격하게 중앙집중화된 현물 공급 제도가 도입되었고, 이는 전선에 봉사하는 것에 우선적으로 종속되었다. 기업소들은 금전적 대금 지불이나 경제적 독립성 없이, 국가적 요구에 따라 제품을 구매하고 납품하였다. 이 모든 조건으로 인해 기업이 비용을 지불하고 이익을 창출하며 운영되도록 보장하는 기업 회계 방식을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소련의 국민경제는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으로 인해 극도로 침체되었다. 1920년까지 대규모 공업 생산은 1913년 수준의 거의 7분의 1로 감소하였고, 농업 생산은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정부 지출을 충당하기 위해 평가절하된 지폐가 대량으로 급속히 발행되었다.

 

공장 노동자들은 전선에 있는 붉은 군대의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대중적 영웅심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 ‘공산주의 토요일(subbotniks)’2과 같은 노동 경쟁 형태가 매우 중요해졌다. 노동계급은 생산 관리에 관한 경험을 쌓았다.

 

해외 나라의 개입과 내전 동안 노동계급과 농민의 군사적정치적 동맹이 형성되고 강화되었다. 이는 외래 침략자와 백군(白軍)의 맹공을 격퇴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인 그들의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노동자와 농민의 노력을 하나로 모으는 데 공헌하였다. 소비에트 정부는 농민에게 토지를 주고, 지주와 부농(kulak)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 농민들은 잉여 식량 징발 제도를 통해 노동계급에 식량을 지원하였다. 이는 ‘전시공산주의’ 하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군사·정치적 동맹의 기초로 되었다.

 

‘전시공산주의’는 내전과 경제 붕괴라는, 주어진 역사적 조건에서는 불가피하였다. 그러나 식량을 강제 징수하고 무역을 금하는 ‘전시공산주의’는 생산에서 농민의 물질적 이해를 박탈하였다: 이는 도시와 농촌의 경제적 유대와 양립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장기화된 전쟁으로 인한 개입과 경제 붕괴가 없다면 ‘전시공산주의’를 폐기할 수 있었다. 이는 인민민주주의의 경험을 통해 확증되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해외의 개입과 내전을 종식시킨 후, 1921년 봄에, ‘전시공산주의’ 정책과 구별하기 위해 명명된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으로 전환을 이루었다. 신경제정책의 주요 원칙은 이미 1918년 봄에 레닌에 의해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적용은 방해 공작과 개입으로 인해 중단되었는데, 소비에트 정부는 이 정책을 다시 선포하고 3년 후에야 이를 일관되게 수행할 수 있었다.

 

이행기 소비에트 정부의 신경제정책은 시장, 무역, 화폐 유통을 활용하면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경제정책이었다. 이 정책의 본질은 농민 대중을 사회주의 건설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노동계급과 농민의 경제적 동맹이었다. 1922년 초, 레닌은 NEP의 임무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농민 대중, 일반 농촌 생산자들과 연대하여 전진해 나아가자. 우리가 꿈꿨던 것보다 훨씬 더 느리게, 그러나 대중 전체가 실제로 우리와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식으로.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이 운동은 지금은 우리가 꿈도 꾸지 모할 그러한 가속력을 얻을 것이다.”3

NEP의 번째 임무는 경제 재건이었다. 농업의 신속한 재건을 위해 농촌 직접 생산자의 경제적 이익을 되살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도시 주민의 식량을 보장하고 원자재 산업을 지탱할 수 있었다. 이 기반에서 국영산업은 발전하고, 농업과 긴밀히 연계를 이루어 사적 자본을 압박하게 되었다. 후, 충분한 자원이 축적되자, 사회주의 노선에 따라 농업을 재조직할 수 있는 강력한 사회주의 공업을 창출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 자본주의적 요소에 대한 결정적 공세를 개시하여 그것들을 완전히 일소해야 했다.

 

신경제정책은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손아귀에 주요한 지위를 놓는 한편, 일정한 한계 내에서 자본주의를 허용하였다. 이로써 사회주의적 요소와 자본주의적 요소의 투쟁이 가능해졌고, 사회주의적 요소의 승리와 착취계급의 일소, 그리고 사회주의의 경제적 기초의 창출이 가능해졌다.

 

무역은 NEP 초기에 경제 건설의 전 동력에 추진력을 불어넣기 위해 꼭 필요한 주요 고리였다. 전쟁이 끝나자 잉여 식량을 징발하는 대신 식량세(食糧稅)를 부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봄 파종에 앞서 규모가 정해진 식량세는 징발 제도에 따른 부과금보다 규모가 작았고, 시장에서 자유로이 판매하거나, 공산품과 교환할 수 있는 잉여 곡물과 기타 생산품을 농민의 수중에 남겼다. 레닌은 사회주의 공업이 농민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무역을 배우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하였다.

 

도시와 농촌 사이의 상품 유통의 필요성은 산업 자체 내에서 무역 연결의 발전을 규정하였으며, 국가의 화폐 경제 개선을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새로운 경제정책의 채택으로 산업 내 현물 공급은 폐지되었다. 국가사업은 경제 회계를 기초로 운영되었고, 점차 독립적이며 수익성 있는 기반 위에서 운영되기 시작했다. 소비자 배급제는 자유거래로 대체되었다. 1924년 화폐 개혁이 완료되어 국가에 안정적인 통화가 제공되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국민경제의 계획적 발전 법칙에 근거하여 점차 가치 법칙의 작용을 제한하면서 단계적으로 국가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국영기업 부문 범위 내에서는 직접적인 계획이 수립되어 공장 단위까지 생산 목표를 설정하였다. 국영기업에서 생산되는 상품에는 고정 가격이 설정되었다. 농민 경제에서는 그러한 계획은 불가능했다. 국가는 무역, 공급, 구매, 가격, 신용 및 금융을 통한 간접적인 경제 규제로써 농민 경제에 규정력을 가했다. 이러한 경제적 수단은 농민 경제와의 유대감을 강화하고, 사회주의 경제의 주도적 역할을 강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가치 법칙이 사적 시장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가격의 자유로운 형성과 경쟁 유지로서 현상한다. 투기가 존재했고, 자본주의적 요소는 노동 대중을 희생시켜 스스로를 팽창하였다. 소비에트 국가는 점점 더 다양한 종류의 상품을 수중에 집중시키면서, 농산물 구매를 끊임없이 확대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요소와의 끈질긴 투쟁 속에서, 곡물과 다른 중요한 상품들의 주요 가격을 설정하기 시작했으며,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써 시장 가격의 자유로운 작용을 제한했다. 민간시장과 관련하여 국가적 규제의 역할은 꾸준히 증대하였다.

 

제11차 러시아공산당(б) 전러시아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임무가 내려졌다:

“시장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 법칙을 고려하여 시장을 통제해야만 한다. 시장과 화폐 유통의 규제는 시장 활동(market processes)에 대한 엄밀한 평가에 기반하는, 엄격하게 고안된 체계적인 경제 조치로써 국가 스스로가 구현해 나가야 한다.”4

공산당과 소비에트 국가는 이 과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소비에트 정부는 사회주의 공업, 금융 및 신용 체계, 국가 독점 무역, 협동조합의 보조를 받아 격렬한 계급투쟁 속에서 자본주의 요소제조업 자본가·부농·무역업자를 규제하고 압박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시행하였다. 자본가에 부과되는 세금이 증가하였고, 생산 수단과 임노동을 사용할 기회가 감소하였다. 이는 잉여가치의 법칙의 적용이 점점 더 제한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NEP의 초기에는 자본주의 요소가 어느 정도 부활하고 성장했지만, 경제에서 그들의 역할을 급속도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노동자의 개인적·물질적 이익을 사회주의 생산의 발전과 결부시키는 것은 국가산업 성장에 필수적이었다. 사회주의 국가 기구는 노동 기여에 따른 분배 법칙에 근거하여 각 노동자가 지출한 노동의 양과 질에 맞춰 육체노동자와 사무직 노동자의 임금을 점점 더 높였다. 이로써 노동 생산성이 꾸준히 증가하였다.

 

이행기 경제는 이중적인 과정을 거쳤다. 한편으로는 일정 기간 동안, 그리고 일정 범위 내에서 자본주의 요소들이 자유로이 성장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요소들이 꾸준하고, 훨씬 더 빠르게 계획적으로 성장하여 전체 국민경제의 향방을 결정하였다.

 

NEP 초기에는 민간 부문의 비중이 공업 생산의 4분의 1을 차지하였지만, 1929년에는 10분의 1로 감소하였다. 1921-2년에 개인 사업체의 소매 매출 비중이 4분의 3에 달했던 데 반해, 1926년에는 국영 및 협동조합 사업체가 개인 사업체를 성공적으로 밀어내고 소매 매출의 주요 지위를 확고하게 차지하였다.

 

무역 거래량이 회복되고, 도시와 농촌 간 무역 유대가 강화되면서, 경제가 빠르게 재건되고 사회주의 공업이 성장할 수 있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사회주의 공업의 우월성을 이용하여 1926년까지 대규모 공업의 생산량을 1913녀 수준까지 회복하였다. 소비에트 정부가 농촌의 직접 생산자들에 다양한 지원을 제공한 덕분에 농업 생산량은 1926년에는 1913년 수준을 넘어섰다.

 

공업과 농업이 재건되면서 국민경제 전체가 사회주의의 재건으로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공업과 농업 생산이 증가함으로써 노동 대중의 물질적·문화적 수준도 향상되었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에,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소비에트 국가와 소련의 노동 대중은 경제 법칙에 따라 다음과 같은 과업을 성취하였다: 사회주의 국유화를 통해 국민경제의 주요 지위가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되었고, 사회주의 공업과 농촌 경제 사이의 무역 유대가 확립되었으며, 농촌에 소비재 공급이 조직되었다; 사회주의 공업화가 수행되었고, 선진 기계 기술이 농촌에 공급됨으로써 도시와 농촌 간 생산적 유대가 확립되었다; 농업은 집산화되었고, 농촌에 사회주의의 경제적 기초가 확립되었다.

 

공업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공고화함에 따라 국가의 사회주의 공업화 가능성이 크게 확대되었다. 농업을 선진 기술 기반으로 뒷받침함으로써 사회주의 공업화는 동시에 농민 경제의 사회주의적 집산화를 위한 물질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국가의 공업화와 농업 집산화에 관한 그 객관적 필요는 생산관계와 생산력 특성의 필수 조응 법칙과 사회주의 기본 경제 법칙에서 비롯되었다. 이 법칙은 농업뿐만이 아니라 공업 분야에서도 국민경제 전반에 걸쳐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강화할 것을 요구한다. 생산력은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만 완전한 발전 가능성을 가진다. 국가의 사회주의 공업화와 농업 집산화는 국가 경제 전반에 걸쳐 사회주의 승리를 보장하고, 생산과 인민 생활 수준을 체계적으로 높인다.

 

신경제정책은 소련에서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하려는 레닌의 계획을 실질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으며, 이 계획은 스탈린의 작업과 공산당의 결의를 통해 더욱 구체화되었다. 소련에서 신경제정책의 기본 원칙은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모든 국가의 행동 지침이 된다. 하지만 특정 국가의 구체적인 경제 건설 형태는 각국의 발전 특성과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마르크스는 자신이나 사회주의 혁명의 미래 지도자들이 혁명을 달성하는 방법이나 방식의 형식에 대해 적은 바 없다; 그는 매우 많은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할 것이며, 전체 상황이 혁명 과정에서 변화할 것이고, 혁명 과정에서 상황이 자주 그리고 상당히 바뀔 것임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5

인민민주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 경제 건설은 사회주의를 건설할 유일한 국가였던 소련보다 더 유리한 환경에서 이루어졌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길을 여는 것은 소련의 몫이었다. 오늘날 각 인민민주주의 국가는 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막대한 지원을 받고 있으며, 소련에서 축적된 사회주의 건설 경험을 활용할 수 있다.

 

*   *   *

 

1. 위대한 10월 사회주의 혁명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열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필연성은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특성이 필수 조응한다는 법칙에서 비롯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사회로의 혁명적 전환에는 이행기가 필수적이다. 이행기 국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며, 그것은 소비에트 권력이나 인민민주주의 형태를 취한다. 착취계급이 소유한 주요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주의 국유화는 국가 경제의 주요 지위를 포괄하는 사회주의 경제 형태의 창출을 가져온다.

 

2. 이행기 사회경제의 주요 형태는 사회주의, 소상품 생산, 그리고 자본주의이다. 이에 상응하는 계급은 각각 노동계급, 농민, 그리고 부르주아이다. 이행기의 주요 계급은 노동계급과 농민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최고 원칙은 노동계급의 지도하 착취계급에 대항하여 노동계급과 농민이 동맹하는 것이다. 이행기의 근본 모순은 성장하는 사회주의와 쇠퇴하는 자본주의 간 모순이다. 자본주의적 요소들에 대한 규제와 압박, 그리고 그에 따른 자본주의적 요소의 일소는 격렬한 계급투쟁으로써 성취된다.

 

3. 이행기에 사회주의 부문이 성장·강화되고 자본주의적 요소가 극복되면서 착취 관계를 표현하는 자본주의 경제 법칙을 소멸한다.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의존하는 사회주의 경제 법칙이 형성되어 점차 그 작동 영역은 확대된다. 가치, 무역, 화폐, 신용 법칙은 프롤레타리아 권력에 의해 자본주의를 분쇄하고, 사회주의의 이익을 위해 점점 더 많이 이용된다.

 

4. 이행기 동안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권의 경제 정책은 자본주의적 요소에 대한 사회주의 승리, 그리고 상품 생산과 시장을 이용한 사회주의 경제 건설을 목표로 한다. 이 정책은 사회주의 공업과 농민 경제 사이의 경제적 유대를 보장하고, 국가의 사회주의 공업화와 농업 집산화를 실현한다.

 

번역: 한동백 | 집행위원

2025년 9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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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V. I. Lenin, “Preliminary Draft of Theses on the Agrarian Question (1920)”, Selected Works, 1950, English edition, Vol. 2, Part. 2, 458-9.텍스트로 돌아가기
  2. 〔역자 주〕 적백내전기에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던, 자발적인 토요 무급노동 운동을 뜻한다. 이 운동의 명칭은 토요일을 뜻하는 러시아어 ‘수보타(Subbota)’에서 따왔다. 자세한 내용은 A. Rothstein, Man and Plan in Soviet Economy, London: Frederick Muller Ltd, 1948.의 제3장 제1절을 참조하라.텍스트로 돌아가기
  3. V. I. Lenin, “Political Report of the Central Committee to the 11th Congress of the R.C.P.(B)”, Selected Works, 1950, English edition, Vol. 2, Part. 2, 636-7.텍스트로 돌아가기
  4. The C.P.S.U. in Resolutions and Decisions of its Congresses, Conferences and Central Committee Meetings, 7th Russian edition, Part. 1, 588.텍스트로 돌아가기
  5. V. I. Lenin, “The Tax in Kind”, Selected Works, 1950, English edition; Vol. 2, Part. 2, 535.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