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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보편적 성격, 그리고 몇 가지 이론적 문제


파시즘의 보편적 성격, 그리고 몇 가지 이론적 문제


한동백 | 집행위원

 

파시즘의 성숙 단계로의 발전 조건은 일반적으로 노동계급의 일정 수준 역량이 사회혁명을 급속히 촉진하는 객관적 조건인 자본주의의 경제적 모순이 만나는 지점전반적 위기의 격화에서 형성된다. 자본주의의 전방위적 위기 하에서 자본 순환이 광범위한 경제적 혼란을 야기하는 와중에 노동계급의 단결된 역량이 다수 군중을 사회혁명으로 이끌 있다면, 독점자본의 가장 반동적인 분파가 주도를 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합의된 여러 지점을 향한 공세를 동반한, 노동계급에 대한 공공연한 테러 독재 실시한다.

파시스트 운동은 각 부르주아 정권에서 노동계급의 투쟁 역량에 대비한 민주 개혁 요구의 상승 경향을 겨냥하는 강력한 차단 기도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계급이 지속 성장하면서 노동자 조직화가 큰 폭에서 이루어지고 그에 상응하는 만큼 노동자들의 요구 수준이 날로 발전하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노동계급의 이해가 스며 들어가 그것이 독점자본의 경제적 이해관계의 추구에 강한 타격을 줄 수 있게 된다면 파시즘이 지배계급의 매력적인 선택지로 될 실재적 가능성이 생겨난다.

이는 전반적 위기 하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그 필연적 전개 과정에 따라 가치의 안정적인 증식이 보장되기 어려운 때에, 또는 더 높은 수준의 이윤율을 형성해 내기 어려운 때에 단지 낮은 수준의 민주주의적 자극마저 독점자본이 노동계급에 대해 동일한 자세를 취하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러한 상황에서는 오직 노동자에게 적용되는 최소한의 수준의 노동 조건을 유지함으로써 안정적인 가치 증식이 보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독점자본은 노동계급의 투쟁이 그간 쌓아 올린 노동 조건 상에서 성과를 그보다 후진적인 수준으로 급속히 되돌리려 것이고 그 수단은 파시즘으로 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노동계급이 각 나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그 실제적 작동에 행사하는 영향력의 규모와 무관하게 각 부르주아 정권이 파시즘으로 수렴해 가는 경향이 있다. 즉 “지배계급의 가장 반동적인 집단 사이에서는 부르주아의 의회 민주주의를 권위주의적 경로로 유도하고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 징후가 증가함에 따라 민주주의를 해체하려는 경향”1이 커지고 있다. 레닌은 독점자본주의가 “민주주의로부터 정치적 반동으로의 전환”2을 야기함을 지적함으로써 그것이 민주주의와 근본적으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음을 폭로하였다. 자본주의 발전과 민주주의 후퇴 간 이러한 보편적 연관의 견지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해체하려는 내재적인 합법칙적 경향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며, 경향이 “특정한 조건 하에서만 파시스트 독재로 전화한다는 사실”3 간과해서는 된다.

특수하게는 각 나라가 처한 특수한 상황에 따라 지배계급이 파시즘이라는 선택지를 택할 때의 그 기준과 조건이 크게 변동할 수 있으며 또 상시적인 것이 될 수 있다. 한국의 상황만 보더라도 국내 노동계급의 역량과는 관계 없이 노동계급의 정치적 활동을 심히 제약하는 국가보안법이 존치되어 왔고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그 규모에 비해 매우 광범위한 영역에서 폭압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이는 한국 사회경제의 신식민지적 특성, 그리고 역사적으로 한국이 해외 제국주의의 세계 분할 의도에 따라 사회주의 정권과 직접적으로 대치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공산주의 전초기지라는 특수성으로부터 야기된 특성이다.

파시즘이 발호는 지배계급이 그간 축적되어 온 민주 성과를 공격함으로써 노동계급을 공공연하게 테러할 수 있는 정치적 조건을 확대해 나가는 양태로 전개된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노동계급은 국내의 전 민주 역량을 단일 전선 아래로 묶어 부르주아 민주 제도의 성과를 수호해야 하며, 여유가 확보될 때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당면 발전 수준에 그 성과를 보존하기 위한, 또는 그것을 더욱 확고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다양한 제도적 안전 장치를 도입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독점자본은 마련되어 있는 법률적 기반을 최대한 민주 개혁 조치의 성과 무효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할 수 있으며, 이보다 더 과감하게 비합법적 수단을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이로부터 부르주아 민주주의자와 파시스트 간 차이의 주된 경향이 드러난다. 파시스트는 공공연한 방식으로써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성과를 담보하는 그것의 진보적 부위를 파괴하려고 하는 반면,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이에 유보적이고 수동적이거나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때로는 그러한 시도에 명확한 형태로 대립한다. 이 시기 노동계급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인가 아니면 부르주아 민주주의인가가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인가 아니면 파시즘인가 사이의 선택에 직면해 있”4다. ”민주주의적 권리를 위한 투쟁을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노동계급의 투쟁과 결부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옹호라는 문제에 대한 도식주의적인 태도를 버릴 필요”5 있다.

파시즘을 취급하는 부르주아적 경향에서 적지 않게 나타나는 경향은 각 나라가 처한 조건의 특수성에서 기인하는 파시스트 운동의 개별적 성격을 경제적인 기초와 그 관계에서 발생하는 계급적 이해와 독립적 양상으로 다루거나,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어떠한 “직접적 행동에 기초한 대중적 저지선”을 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는 이 테러적 사상에 대한 순전히 피상적이고 유희적인 취급에 불과한데, 이는 파시스트 국가에서 경제에 대한 국가의 ‘규제’가 유난히 두드러져 보인다는 점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견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류의 견해는 예컨대 나치 독일의 사례를 보았을 때, 그것의 “대중적 성격”과 무색하게 당대 경제 정책이 이른바, “조합주의 경제”로써 재벌의 경제적 이익을 집중적으로 보장하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다는 점6에서 역사적으로 근거가 부족하다. 베르너 크라우스(Werner Krause)는 이와 관련하여 당대 나치가 실시한 정책의 실질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들고 있다: “1933년 1월 30일 직후 기업의 국가 선전은 중단되었다. 기본 조직 원칙(grundsätzliches Organisationsprinzip)으로서, 전문 영역에 따른 그룹화와 기업가와 근로자의 정치적, 조직적 강제 통합을 모두 포함하는 기업 질서에 대한 구상은 일정 기간 동안 국가 독점 조치의 구현을 위한 이념적 보조로서 활용되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경제의 [국가 담당의] 전문 영역 구조를 확립하는 것은 독점 재벌이 경제에서 결정적인 지위를 유지하는 것과 모순되었으므로, 그것은 결국 폐지되었다. 이러한 관점을 강화하기 위해 그들은 소위 “경제의 자기 관리(Selbstverwaltung der Wirtschaft)”의 틀 내에서 기업 협회를 독점 기업의 통제 하에 더 잘 배치할 수 있도록 순수 기업 조직에 따라 경제를 구조화하려고 노력했다.”7 정치학자 자크 파월(Jacques Pauwels) 역시 독일 파시스트들과 독일 독점자본 사이 유착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독일의 대기업(Großindustrie)과 대형 금융기관(Hochfinanz)이라는 두 축, 그리고 이들과 협력했던 경제적 특권층대부분 독일 동부 지역의 대지주 귀족인 융커들이었다 물심양면으로 히틀러를 지원했다. 히틀러가 정치적으로 부상해 마침내 권좌에 오를 있도록 도왔던 것이다. 그리고 독일재계, 즉 대자본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높은 수익이라는 열매를 수확할 수 있었다. 그 열매는 나치스의 사회적으로 퇴행적인 정치, 대규모 재무장 프로그램, 정복 전쟁, 점령국에 대한 무자비한 약탈, 그리고 유대인 재산 몰수 및 학살 등 각종 그로테스크한 범죄로 얼룩진 땅 위에서 자라난 것이었다.”8 독일에서 노동조합 활동은 모두 금지되었으며, 모든 노동 조직은 어용노조인 독일노동전선(DAF)으로 통폐합되었다. 군비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공공 정책 예산은 대규모로 삭감되었는데, 일례로 독일에서 주택 건설 자금의 국가 보조 비중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약 40%를 점하였으나, 나치 정권이 들어선 시기인 1936년에는 8%까지 감소하였다.9

 

독일 나치 정권보다 앞서 성립하였던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에서의 경제 정책도 본질적으로 이와 다르지 않았다. 트라우트 라팔스키(Traute Rafalski)의 이탈리아 역사 연구에 따르면 무솔리니 파쇼 정권의 국내 경제 정책 분야에서 드 스테파니(De Stefanis)의 ‘경제적 자유주의’ 노선은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무솔리니 파쇼 정권 시기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형성된 기업에 대한 국가 간섭의 급속한 해체, 기업가에 대한 세금 경감, 비생산적인 목적을 위한 국가 재정 지출의 억제, 상속세 및 누진 소득세의 폐지, 사회 보험 기업의 민영화, 간접세 증세 등의 경제적 조치가 취해졌다.10 “그들[민간 자본가들]은 민간 영역의 [경제적] 주도권과 그 [경제적] 권력의 자유로운 활동을 방해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고, 파시스트 운동과 힘을 합쳐 “생산성”이 도약하도록 도울 것을 촉구”11하였다. 경제사학자 클라라 마테이(Clara Mattei)의 연구를 통해 당시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은 일요일 휴무 폐지, 여성 보호입법의 성과 파괴, 노동조합 탄압 등을 거침없이 밀어붙였으며, 그 결과 산업 재해와 결근이 증가하는 등의 문제가 터져 나왔음을 알 수 있다.12

디미트로프는 1930년대 파쇼 정권의 기만성을 다음과 같이 압축적으로 보고하였다:

“파시즘은 노동자에게 ‘공정한 임금’을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한층 낮은 거지와 같은 생활수준을 가져왔다. 파시즘은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약속했지만 실제로 한층 격심한 기아의 고통, 노예적인 강제노동을 초래하였다. 파시즘은 실제로는 … 노동조합을 파괴하고 그들로부터 파업의 권리와 노동자신문을 빼앗고 그들을 억지로 파시스트 조직에 몰아넣으며 그들의 사회보험기금을 약탈하고 공장을 자본가의 방자한 전횡이 지배하는 병영으로 변화시켰다. … 파시즘은 … 트러스트의 전능과 은행자본의 투기를 없애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 참을 수 없는 트러스트 독재를 창출하였으니, 일찍이 그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적인 부패와 타락을 확산시키고 있다. 파시즘은 몰락하고 빈곤화한 농민에게 채무노예적 상태의 해소, 차지료(借地料)의 폐지를 약속하고 또한 토지를 갖지 못한 몰락해 가는 농민을 위해 지주의 토지를 무상 몰수할 것까지 약속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트러스트와 파시스트 국가기구에 대한 근로농민의 유례가 없는 예속 상태를 만들어 내었으며 농민의 기본적 대중에 대한 대농업 경영 지주, 은행, 고리대의 착취를 극한으로까지 진척시키고 있다.”13

예컨대, 파시즘의 사이비 ‘혁명’ 문구를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는 1920년 2월 24일 히틀러가 약 2천의 청중 앞에서 발표한 나치당의 25개조 강령(25-Punkte-Programm)이 있다. 식민주의(제3항)와 인종주의(제4항)가 가미되어 있는 이 문서에서 나치스는 “대기업 이익의 대중적 분배”(제14항), “토지 투기의 일소와 공공 이용을 위한 그것의 무상몰수”(제17항), “고리대금업 청산”(제18항) 등을 내세웠으나 1930-40년대 반파시즘 항쟁에서 가시화되었던 것처럼 그것은 한낱 기만적 선동 문구에 불과하였다.

 

노동조합에 대한 광범위한, 그리고 노골적인 공세 역시 파시스트 운동과 파쇼 정권의 정치적 행동이 목적하는 바에서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한다. 예컨대 파시스트 치하 이탈리아에서 “노동조합과 기타 노동자 조직의 파괴와, 국가가 중재하는 노사관계를 통하여 노동조합에 대해 적극적이고 통합적인 규제를 달성하고자 한 노력은 여러 단계를 걸쳐 이루어졌으며, 결정적”14이었다. 첫 번째 단계에서 그러한 공세는 파시스트 노동조합주의자들이 내세웠던 “통합적 조합주의” 개념에 근거하여 1923년 12월 팔라초 키지와 1925년 10월 팔라초 비도니에서 정치적 합의의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두 번째 단계에서는 파시스트 조합을 노동자들의 유일한 협상 대표 조직으로 내세움을 공식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 모든 기업에서 직장협의회(commissioni interne) 성립의 금지가 공표되었다.11 선진자본주의 나라를 축으로 하여 현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발전 양상을 규정하였을 때, 그 나라 노동자들의 민주 의식이 과거보다 훨씬 발전한 이유로 하여 오늘날 파시스트 운동이 노동조합에 대한 포괄적이고 테러적인 공격을 선동하는 것이 군중 사이에서 그 영향력을 얻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이윤율 저하의 압박 속에서 현대 부르주아들은 계급투쟁에서 노동자의 집단적 투쟁을 온갖 수단으로 무마할 것을 더 맹렬히 요구하고 있으므로 노동조합에 대한 테러 기도는 나날이 악랄해지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 발전의 고삐가 특수한 조건에 의해 늦춰졌을 때 군중 사이에서 여전히 잔존해 있는 여러 비합리적이고 반민주적인 감정 사이에서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파시즘은 또한 노동 군중의 민주주의 의식이 크게 저락해 있고 이와 같은 일련의 주체적 조건이 총 자본의 의도를 반영하는 부르주아 정권에 조금의 개혁의 자극도 가할 수 없는 상황을 형성하였을 때 발호할 수도 있다. 이때는 반대로 노동계급의 주체 역량이 현저히 낮았을 때 파쇼적 폭거가 준동하는 것이므로 훨씬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노동계급은 언제나 현재의 발전 수준에 이른 민주주의의 성과를 고도화된 정치 운동을 통해 선전하고 그것을 능동적으로 수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일반적으로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는 “노동자들 자신이 처한 계급적 상황을 왜곡함으로써 노동자들을 기만하고, 계급투쟁에서 이들을 혼란케 하며”16 군중에게 “배외주의, 인종적·민족적 증오심을 주입하고, 전쟁과 식민주의를 미화”11한다. 철학적으로는 인본주의와 유물론적 세계관에 적대적이다. 사이비 ‘혁명’ 문구를 내세움으로써 노동계급이 자신의 적을 식별하는 것에 혼란을 야기하는 것도 특징이다. 개별 나라에서 파시스트 운동이 보여주는 그 이데올로기적·행동적 특징은 그 나라가 처한 특수성에 따라 다르다. 예컨대 1930년대 독일 파시즘은 다른 지역의 파시즘과 비교했을 때 훨씬 더 광포한 인종주의 및 우생학 사상과 반유대주의를 기반으로 하였고, 철학적으로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의 “역사 형태론”,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실존주의, 신화적 낭만주의 사조에 강한 영향을 받았었다.18 독일 파시즘의 이러한 기원의 형성은 독일적 상황의 뿌리 깊은 역사적 특수성과 관련되어 있었다.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구체적 특징은 각 시대와 나라마다 다르지만 당대의 상황에서 독점자본의 경제적 이해에 테러적으로 복무함에 유용한 사고 체계를 양산하기 위한 잡다한 관념론의 형태“고귀한 민족 정신”, “정신적 귀족” 등 주의주의(主意主義)적 요소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경향로 발현되었으며, 현재도 이는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되고 있다.

파시스트 운동의 그 이데올로기적 양태에서 이보다 더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것은 파시즘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형식적인 평등 관념까지 근본적인 방식으로써 부정한다는 데에 있다. 이는 인간 해방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관점 및 한 사회에서 제출되는 수많은 “사회주의적 견해”의 “평등”을 부정하는 것을 넘어, 그간 부르주아 계급 내부에서 합의되어 온 “평등”까지 공공연한 공세의 대상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그 반동적 본질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평등”은 그것이 아직 단지 부르주아의 의도를 반영할 뿐이었던 18세기의 수준을 넘어, 오늘날 노동계급의 투쟁에 대한 부르주아적 회유 및 그러한 강제된 회유로써 부분적으로 노동계급의 계급적 이해가 반영된 “평등”으로 되기까지 지난한 발전 과정을 거쳤다. 이로써 현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평등”은 그것의 18-19세기적 발전 수준에서 찾아볼 수 없던 것들동등한 참정권, 근로자·여성·장애인·기타 소수자의 권리 등 현대 민주주의 제도가 실질적·형식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권리들”을 갖추게 되었다. “평등”은 이러한 일정한 자기 한계 내부의 그 변증법적 성격으로 인해 노동계급의 정치적 의도를 보조하는 수단으로도 된다. 파시스트 운동은 이러한 “평등”에서 노동계급의 이해 관계가 반영되어 있는 부위를 “급진적인 방식”으로써 소거한다. 더 높은 수준의 안정적인 노동 착취를 달성하고자 하는 반동적인 독점자본의 의도가 이를 끊임없이 추동한다. 이때 필연적 매개로 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공세의 의도를 기반으로 형성·발전한 파시즘의 이념적 특질은 파시스트들이 군중 사이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기 위해 여러 우회로를 설정하는 것과 깊은 연관을 맺는다. 예컨대 그들은 현대 민주주의 제도에서 군중에게 아직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또는 그렇게 여겨지는 몇 가지 내용을 부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구성 요소들의 “부당성”을 강조함으로써 군중 다수가 그러한 민주주의의 성과를 스스로 포기하게끔 만든다. 이러한 공세의 전개에서 파시스트 운동은 자기 활동을 “민주주의적”이라고 선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러한 방식으로써 민주주의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반대를 위한 여건이 무르익게 되었을 때 파시스트 운동은 사회주의 노동계급을 활동을 직접적으로 보조하는 민주주의 제도를 광범위하게 공격한다. 디미트로프는 1930년대의 여러 연설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이 최대한 일반민주주의 운동 및 민주주의 발전 추이와 정치적 연관성을 가지는 모든 계층 및 세력과 끊임없이 접촉하고 통일적인 정치 행동을 이어 나가야 함을 역설하였다.

한국의 파시즘은 대미 종속과 신식민지적 특성에 기반해 발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특수성이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신식민지 파시즘을 연구한 에베르하르트 헤케탈(Eberhard Hackethal)에 의하면 “종속적 파시즘(abhängigen Faschismus)의 특징은 국내 시장을 해외 독점자본에 개방하고 해외 투자를 선호하며 위기의 부담을 국내 노동 인구에게 전가”19한다는 데에 있다. 신식민지 현지의 종속적 파시스트들의 정치적 성격은 궁극적으로 그 나라의 경제에 대한 신식민지 구조를 고착화하고자 하는 특정한 제국주의 국가 자본의 의도를 반영한다. 제국주의 자본에 의도에 따른 “경제적 개방”“금융 개방”, “세계화”, “자유 무역” 등으로 표현되는 대외 경제 정책을 달성하기 위해 종속적 파시스트 운동은 대외적으로 배외주의적 노선을 실시하기 위한 여러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갖추기 어려우며, 이는 국내를 향한 팽창주의적-민족주의적 선동에도 일정한 제약을 가한다. 따라서 종속적 파시즘은 “‘내부 안보’를 유지하는 것이 최고의 국가 의무”20로 되고, “이러한 상황에서 파시즘의 고유한 공격성은 주로 “내부를 향한 전쟁”으로서 자국민을 대상으로”11한다. 그러나 종속적 파시즘은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증오를 동력으로 하여 신식민지-관료 자본의 테러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즉 더 보편적인 범위로서는 현대적 착취 계급의 폭압적이고 공공연한 테러 독재라는 점에서 전통적 파시즘과 공통성을 지녔다.

 

제국주의 자본에게 자국의 거의 모든 자연ㆍ지리적 이점을 내줘야 하는 신식민지 국가의 그 내재적인 조건으로 인해 신식민지의 예속적 지배 권력은 자국민을 회유할 수단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 즉 종속적 파시즘은 전통적 파시즘보다 “더 넓은 범위의 중산층과 노동계급의 특정 부분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경제적 수단이 부족”22하다. 예컨대 피노체트 정권의 ‘엘 라드릴료(El ladrillo)’미국의 파쇼 경제학파인 ‘시카고 학파’가 연구하고 그 ‘칠레적 실행’을 주도하였다는 것이 이제는 공공연한 비밀인, 19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의 ‘국가재편성과정(Proceso de Reorganización Nacional)’, 1964년 브라질에서 군사 쿠데타로 성립한 브랑쿠 군사 파쇼 정권의 ‘정부경제활동프로그램(Programa de Ação Econômica do Governo)’ 등 역사적 실례에서 보듯, 남아메리카의 수많은 종속적 군사 파시스트 세력은 사회경제적 테러 수단을 원용해서라도 수많은 국유자산을 외래 자본에 매각하면서 철저히 제국주의 자본의 이해에 부응하는 동시에 ‘경제적 자유주의’로써 자국의 예속적 지배계급의 이해에도 부응해야 했다. 국유 자산의 해외로의 유출과 간접세의 대폭 증가와 직접세의 인하 및 사회보장기금을 향한 대대적인 긴축은 사회 내부의 사회적 안정망을 완전히 무력화하는 데 강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 막대한 경제적 피해의 작용 범위는 단지 노동계급에 한정되지 않았다. 외래 대자본과 한 줌도 안 되는 예속적 대지주의 경제적 의도에 복무하는 종속적 파시스트 정권의 행태는, 군중 내부의 광범위한 계급·계층에 자연발생적인 것으로서의 급진적인 경향 및 정권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게 하였다. 종속적 파시즘은 군중의 이러한 경향을 폭압적인 방식으로 억압하기 위한 ‘확실한 조치’로서 예속적 지배계급 내부에서 정치적으로 유효한 선택지로 된다. 때문에 종속적 파시즘은 제국주의 국가에서 파시즘이 발양하는 것보다 훨씬 급속히 전개되며, 자국민을 향한 야만성도 한층 심화되어 있다.

신식민지 한국에서 계속 추동되는 파시스트 운동의 그 전형은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현상하였던 전통적인 파시즘과 일정한 차이를 가지는 형태로 구축되어 온 것이며, 그러므로 한국에서 파시즘에 반대하는 통일전선은 자연히 피억압 민족의 전선으로서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제 파시즘에 대한 몇 가지 이론적 취급을 둘러싼 문제에 대해 다루어 보자.

 

유럽에서 파시스트 운동 및 파시즘 정권이 탄생한 이래 파시즘이라는 현상을 둘러싼 연구는 수없이 이루어졌으며, 그 분야는 정치학과 사회학을 넘어, 인문학에까지 이르렀다. 적어도 1940년대 이후의 기준으로 우리가 조금이라도 들어본 대다수 철학가의 문헌에서 파시즘이 등장하지 않는 것을 기대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게다가 파시즘에 대한, 각자의 상이한 학술적 관점에 따라 작성된 문건은 작가당 분류하더라도 수백 권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단지 ‘굵직한 흐름’으로서의 파시즘 연구의 추이만 다룬다고 하더라도 수십 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이러한 연구의 낱낱을 일일이 검토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이 연구가 몇 가지 좁혀진 영역 내에서 ‘분파’를 형성한 상태라는 데에 있다. 이는 결코 모든 ‘굵직한 흐름’을 파악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왜냐하면 이는 항상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과 함께 ‘비교’되어 특정 시기에 어떠한 두드러진 학술적 경향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당연히 일정하지 않으며, 시기마다 그 현상형태가 다르다. 이는 최근까지의 연구 경향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먼저 파시즘이 ‘대안적인 근대주의’를 위한 ‘혁명’의 한 갈래였다는 ‘분석’이 존재한다. 로저 그리핀(Roger Griffin)이 전개한 이러한 학설에서 파시즘의 보편적 성격을 규정하는 본질은 독점자본주의의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발전 양상에 있지 않으며, 단지 특수한 형태의 ‘근대성’을 정초하는 몇 가지 심리적 요소에 있다. 그는, 그가 “통찰력 있는 것”이라 간주한 기 드보르(Guy Debord)의 ‘파시즘 해석’이 또한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이해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반동적 자본주의의 기능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것이 아니라 ‘테러리즘적’인 화신으로서의 그것으로 여겨지는 마르크스주의적 맥락에서 인간 의식의 고대적 요소를 영속시키는 힘으로 이해되는 혁명적 근대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개념적 틀로 옮겨진다.”23 그는 이러한 ‘힘’“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의례 화려한 요소들의 공유(share of age-old ritualistic and spectacular elements)”24 당시 소련의 ‘스탈린식 정치’에서도 보이는 바와 같은 것이라고 하면서 파시즘을 정의하고자 한다.

그는 파시스트들이 이 ‘힘’을 전통적인 “자유주의적 근대성”의 타락을 효과적으로 넘어설 수 있는 근대성 형성의 핵심 매개로 여겼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탈리아와 독일 파시스트 정권의 이념적 조력자들의 여러 이데올로기적 표현을 무수히 들고 있다.

 

이러한 ‘분석’은 사회경제적 이해관계가 어떠한 이데올로기적 표현 형태로 가공되어, 현상적으로는 얼마간 강한 인상을 줄 수 있음을 크게 간과하고 있다. 이 이데올로기 표현 형태는 파시스트가 독점자본주의 하 (해외를 넘나드는) 자본 간 이동에서 특정 경제적 국면의 상품 자본에 포함된 지불노동 분을 낮추기 위한, 그리고 전반적으로 전개되는 평균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를 상쇄하기 위한 사회경제적 이해의 목표를 반영하고 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이론가 조반니 젠틸레(Giovanni Gentile)가 역사에 관한 숱한 소논문에서 드러내었던 바와 같이, 르네상스 시기의 전통 및 각종 의례에 집착하여 이를 일종의 ‘문화적’이고 ‘교육적’인 배외주의의 형태로 가공하고자 했던 이유는 국수주의가 피지배계급의 계급의식 형성에 해독 작용을 가하는 데 첨단에 서 있다는 역사적인 법칙적 경향에 있다. 명백하게도, 이러한 갖가지 관념적 요소들은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의 제국주의적 의도를 달성하기 위해 추진했던 군수산업의 팽창이 수반하고 또 자기의 필연적 존재 조건으로 삼는 ‘전통에 반하는 요소’에 비해 파시스트 정권에서 매우 협소한 영역만을 점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특히 젠틸레에 대해 강조하는 “신지학적 추상화(theosophically based abstraction)”25가 “근대성”과 결합한 양상은 파시즘이라는 현상을 규정하는 데서 전혀 본질적이지 않다. 이러한 형태의 형이상학은 전(前)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도 얼마든지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다. 이 이데올로기적 요인들은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성격에 따라 매우 다른 정치적 양상을 가져오는 (그 사회에서 본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추진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표현 형태는 몇 가지 주되게 관찰되는 속성을 제외하면, 동일한 경제적 이해 속에서도 다른 형태로 발현될 수 있다.

“자유주의적 타락”에 대한 파시스트들의 적대감은 그들이 독점자본주의 체제를 옹위할 목적에 따라 “마르크스주의적 타락”이라 규정하였던 현상에 대한 적대에 비하면 매우 협소한 것이었다. 이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스트 운동에서만이 아닌, 프랑스 파쇼 세력인 불의 십자단(Croix de Feu)의 정치적 행보에서도 관찰된 현상이었다.26 그리핀이 고수하는 견해, 더 넓게는 파시즘에 대한 ‘정신사적 분석’의 사상적 기원을 제공한 것으로 여겨지는 제브 스테른헬(Zeev Sternhell)은 프랑스 파시즘에 대한 프랑스 학계 내 지배적인 흐름프랑스 파시즘의 발전 양상에서 산업자본주의의 반동적 부위가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했음을 승인하는 학설들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파시즘의 맹아를 반합리주의니체, 베르그송과 이에 영향받은 소렐의 견해에 기초한와 영성주의, 그리고 귀족주의적 도덕주의27에 기초한 지성적 운동으로 파악28하였다. 그는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대항으로서 제3의 정치운동이자 생디칼리즘이라는 관점을 강력히 제출29하였다. 예컨대, 그에 의하면 프랑스 파시즘은 그가 마르크스주의의 “공통 분모”라 칭하는 “합리주의적, 유물론적, 헤겔주의적” 요소에 대해 명백히 적대적인 것이었다.30 이러한 지성적 측면의 강조는 그가 실제 파쇼적 정책이 취한 경제 정책을 분석하기보다 프랑스 초기 파시즘의 ‘경제학설’에 주목하는 경향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그는 확실히 파시즘을 어떠한 형태의 계획 경제로 파악하지는 않았다. 즉, 파시즘의 기초를 닦은 “소렐주의자들은 사유재산, 개인의 이익, 시장 경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최초의 좌익 혁명가들이었다.”31

 

그는 합리적이고 전면적인 계획이 사회주의 경제의 필수 요건임을 이해하지 못한 채 사회주의를 ‘재정의’하고 이로써 얻어낸 ‘사회주의’를 파시즘과 동일시하였다. 스테른헬은 프랑스 및 이탈리아 파시스트 운동의 정신적 본류를 확정 지은 사상적 경향인 소렐주의가 “자본주의의 모든 구조를 파괴하지 않고”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도덕적 및 지성적 규범을 근절할 수 있다고 믿었음을 내세우면서, 그것이 “부르주아 질서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항하는 전례 없는 전쟁 무기를 형성”32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사회주의에 대한 전형적인 부르주아적 인식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사회의 상부구조에서 재현되는 타락파시스트들이 기만적인 언사로써 ‘적대’의 대상으로 상정한 것까지 포괄하여은 그 토대의 모순을 전면적인 계획으로써 지양해 내지 못한다면 일소할 수 없다. 동일한 방향에서 파시즘에 대해 “‘좌우익’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파시즘의 발생적, 그리고 본질적인 연관을 은폐하고자 하는 시도일 뿐이다. 두 역사가의 입장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는 스탠리 G. 파이네(Stanley G. Payne)조차 파시즘의 정의와 연계하여, 파시스트에게 보이는 “반자유주의”의 정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나타난 새로운 형태의 권위주의적 우익의 뿌리는 적어도 네 가지 다른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주로 가톨릭계에서 기업주의 교리가 성장하고, 정치적 가톨릭교의 특정 새로운 형태가 모호하게 발전한 것, 온건하거나 보수적인 자유주의가 점차 권위주의적인 방향으로 변화한 것, 이는 특히 남부 유럽에서 그렇다. 라틴 서방에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가에서 전통주의적 반자유주의 및 군주주의 세력이 변동을 겪은 것, 이탈리아에서 도구적이고 현대화된, 그리고 제국주의적인 새로운 종류의 급진 우익이 등장한 것이다.”33

파시스트 운동은 그들의 ‘이상’을 실현할 힘을 얻어내는 과정, 그리고 마침내 이를 얻고 테러적인 통치를 실행할 힘을 얻은 모두에서 독점자본의 정치적 지지와 금전적 후원이 없으면 유지되기 어려운 정치적 조류였다.34

 

파시스트 정권의 긴축 재정과 노동운동 파괴, 강압적인 수단을 원용하는 임금 삭감, 친자본 경제 정책은 이미 파시스트의 ‘조합주의 경제’에 관한 경제사적 연구를 통해 구석구석 폭로되었다. 파시즘은 ‘자유민주주의’부르주아 사회에서 ‘정통’으로 간주되는 ‘민주주의’ 대항하였지만, 이는 ‘부르주아 질서’에 반대하는 맥락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제국주의 시대에서 특수한 규정을 받는 독점자본 계급과 (일부 부르주아까지 포괄하는) 반독점 세력 사이의 모순이 심화하는 조건에서 금융독점자본의 이해가 배타적으로 관철되는 자본주의에서, 이를 다른 형태로 수호하기 위해 나타났다.

프랑스 파시즘 연구가 김용우는 스테른헬의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스테른헬의 해석에는 몇 가지 중요한 결함이 없지 않다. 먼저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를 일관된 하나의 사상 체계로 볼 수 있는가,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 러시아 혁명, 경제 공황과 같은 사건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채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적절히 다룰 수 있는가, 이러한 정치·사회·경제적 변수와 무관하게 형성된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를 상정하는 것은 너무 관념론적인 접근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35

 

파시즘은 초기에 아나키즘과 소부르주아 사회주의, 군주제 복고파에 의해 가공된 낭만적 ‘황색사회주의’ 등 다양한 부르주아 및 반동 대지주 사상 조류의 혼재 속에서 발전해 왔다. 그러므로 그 이념적 특징의 불연속성이 심하였고, 그만큼 그것을 후원하는 계급 역시 농촌의 소부르주아, 대지주, 도시 자영업자, 자본가로 분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10월 사회주의 혁명의 성취, 유럽에서 혁명적 노동계급의 진출, 1929-33년 경제 대공황을 거치면서 이러한 우연적 성격은 완전히 해소되었다. 이탈리아에서 그 성격이 모호하였던 파시스트 도당은 대자본이 그 경제적 이해를 수호하기 위해 공세의 깃발을 들었을 때 매우 단일한 정치적 성격을 보이게 되었다. 특히 〈붉은 2년〉을 거쳐 공업 부문 노동자 파업 건수가 1918년 303건에서 1920년에는 1,881건으로 증가하고 전후의 정책적 혼란이 축적되면서, 피아트와 안살도를 비롯한 여러 산업자본의 공장평의회에 대한 공격 의지가 심화하였다. 독점자본은 금전적 이득을 미끼로 이들의 “전투적인” 측면을 노동운동 분쇄에 활용하였다.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초기 형태와 그 실지 운동 양상의 특이성은 파시즘의 대자본에 대항한 이른바, ‘중산층 독재’라는 그릇된 상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R. P. 듀트(Dutt)의 포괄적 연구에 따르면 이미 파시스트 운동은 그 초기(예컨대 독일에선 1920년대)부터 수많은 대자본의 지원을 받고 있었음이 추적된다:

“유대계 주요 은행가의 사적 대화에 대한 특징적인 보고는 Mowrer의 “Germany Puts the Clock Back”(1933), 1977.을 참조하라. 그는 “베를린 부유층 살롱에서 다소 당황한 청중들에게 다년간 민족사회주의자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온 경위를 유창하게 설명했다.” 히틀러에 대한 대기업의 금융 지원은 이미 1924년 히틀러-루덴도르프 재판과 바이에른 주의회 조사위원회에서 폭로된 바 있다: “후년에 이르러 나치즘 운동의 금융 후원자로 알려진 명단은 극도로 길어졌다. 공장주, 경영자, 총괄 고문(법률자문)들은 미국 공화당 전국위원회 후원자 명단에 버금갈 정도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Mowrer, 144.) 외국인 후원자로는 데터딩, 크뢰거, 포드 등이 거론되었다. 폴 포르는 1932년 2월 11일 프랑스 하원에서 나치의 해외 금융 후원자들 중 슈네데르-크뢰조가 장악한 스코다 군수기업 이사진이 포함된다고 발언했다.”36

파시즘의 탄생과 발전은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의 촉발에 강한 규정력으로 작용하였던 사회주의 정권의 탄생과도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각자의 주저에서 끝없이 보여주는, 소련에 대한 음모론적이며 침략적인 관점, 그리고 파시스트 정권의 국제정치적인 정책 영역에서 핵심인 일관된 목표가 반(反)소비에트였음은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대 파시스트들이 슬로건화하였던 관념적 요소들이 그들의 정치적 행동의 본질을 규정하는 데서 아무런 실제적인 역할도 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들은 파시즘의 발호에서 주로 결과의 측면이라는 규정을 띤다. 이러한 정신적인 결과들은 물질적인 영역의 생산 체계를 들여다보는 것보다 아주 빈번히 더 ‘흥미로운 것’으로 여겨지지만, 대부분 본질에서 빗겨가 있다.

 

파시즘에 대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대중적 문헌을 작성한 로버트 팩스턴(Robert Paxton)은 파시즘의 정의에서 가장 불분명한 입장을 표한 학자 중 한 명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파시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의식하여 『파시즘의 해부학(The Anatomy of Fascism, 2004)』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파시즘에 관한 ‘최초의 해석’, 즉 ‘자본주의의 앞잡이로서 권력을 손에 쥔 폭력배들의 정치운동’이라는 해석은 한 번도 이론적 장악력을 잃어본 적이 없다.”37 2000년대 초반의 부르주아적 이념 지형과 현재의 이념 지형은 일정한 차이를 보이겠지만,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제아무리 파시즘에 대한 관념론적 정의를 고안해 내기 위해 분투하는 지식인이어도 파시즘이 내재한 사회경제적 동인자본주의 경제의 일반 법칙의 특수한 형태들에 상당 부분 할애하지 않고서는 이 작업을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엄밀하게는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는 현재까지도 파시즘 연구가 항상 자본주의의 테러적 성격과 연동된 채 연구되고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매우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팩스턴은 이러한 관점이 비록 장악력이 강할지라도 “심각한 결함이 존재한다”38고 주장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파시즘을 단순히 자본주의 도구로 간주하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우리를 잘못 이끌 위험이 있다. 스탈린의 제3인터내셔널에서 정설이 된 편협하고 완고한 이 시각은 파시즘이 자발적으로 생겨났으며 진정으로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파시즘을 자본주의 체제의 과잉 생산이라는 불가피한 위기가 낳은 필연적 결과로 봄으로써 인간의 ‘선택의 자유’를 무시해 버리는 더 큰 잘못을 범했다.”39

그의 입장을 더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파시즘의 근원을 자본주의 경제의 필연적 결과로 ‘연역’하는 것은 첫 번째로 그것이 대중의 자발성에 기초한 광범위한 지지와 무관했다는 오류를 낳으며, 두 번째로 파시즘을 ‘선택의 자유’로써 피할 수 있었음에도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오류를 낳는다. 먼저 팩스턴이 이러한 ‘경고’를 거친 다음 문단에서 “파시스트들이 권력을 장악하였을 때 어김없이 자본가들 대부분이 가장 손쉬운 비사회주의적 해결책으로써 파시스트들에게 협력했던 것이 사실”40이라고 한 점, 그리고 이 문단의 다음 문단에서 “기업 사회가 파시즘의 희생자였다고 보는 해석으로 말하자면, 둘의 관계에서 발생했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알력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전후 기업가들의 자기변명을 그대로 수긍한 것”38이라고 한 점이 강조되어야 하겠다. 이러한 서술은 어디까지나 그가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한 경제적 모순의 발전이 파시즘의 발호에서 핵심임을 부정하기 어려움을 실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더 나아가 그는 ‘다른 시각의 분석’을 다루는 과정에서 거의 모든 시도가 ‘최초의 해석’과 비교되었을 이론적 불연속성이 심하다는 것도 충분히 강조하고 있다.

그가 지적한 두 가지 문제점을 다루어 보자: 그는 코민테른에서 제출된 파시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이 그것이 동반한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분석의 틀에 대한 구체적 취급을 사상한 채 이루어진 주장이며, 역사적으로도 근거가 없다. 코민테른 제7차 대회 중인 1935년 8월 20일에 채택된 결의인 「파시즘의 공세와 파시즘에 반대하고 노동계급의 통일을 지향하는 투쟁에서 코민테른의 임무」 전문에 따르면 파시스트들이 “그들의 슬로건을 데마고기적으로 소부르주아 대중의 분위기에 적응시키고 있다”42는 것이 지적되어 있다. 파시스트 세력은 “이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대중적 기반을 만들어 내고, 이들을 반동 세력으로 길러내 노동계급에 보냄으로써 모든 근로자를 더욱 강하게 금융자본에 예속”38시킨다. 정치운동은 군중을 활용하는 것이며, 이 활용의 전개는 사회 체제의 특수성에 따라 다른 형태를 띠었다. 파시스트 운동과 정권에서 군중의 체계적 동원은 매우 폭력적인 형태흔히 “파시스트적 직접 행동”이라 불리는로 나타났는데, 이는 파시즘을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데거 지배적 규정력을 행사할 만큼의 독점적인 특징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물리적이며 비합법적인 정치적 활동 양상을 가리키는 “직접 행동”은 파시스트 운동에서만 발현되는 특징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프랑스의 역사에서 룸펜 프롤레타리아 주도로 1849년에 결성된 〈12월 10일회〉는 보나파르티즘의 정치적 행동대 노릇을 하였는데, 이때 프랑스는 아직 파시즘 탄생의 경제적 조건인 독점자본주의가 확립되기 전에 있었다. 똑같이, 1848년 2월 프랑스 부르주아 공화파는 그들 영향력 아래의 대중적 군사 조직인 〈국민방위군(garde nationale)〉을 활용하여 임시정부를 형성하였다. 이들이 주도하는 임시정부는 아직 즉자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프롤레타리아 군중 일부와 광범한 룸펜 프롤레타리아를 끌어들여 각각을 〈국민작업장(Ateliers Nationaux)〉와 〈기동대(Garde mobile)〉로 편성하였고, 이들을 자신들의 정치적 ‘직접’ 행동대로 활용하였다.44 이들 준군사조직의 행위는 당연히 당시에도 사회적 혼란과 부분적인 비합법성을 구성하였다. 이보다 더 과거로 돌아간다면, 1780년대에서 19세기에 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 계파가 활용하였던, 수많은 정치 행동적-인적 요소들을 관찰할 수 있으며, 농촌의 잔존 지주 세력이 일으킨 반동적 농민 운동 역시 대중적 성격을 띠었다. 이러한 양상은 부르주아 의회 정치가 여전히 공고화하지 않았을 때 나타났던 것이지만 현대에도 독점자본은 의회의 반동 세력과 ‘야지(野地)’의 우익들을 꾸준히 금전적으로 지원하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45 ‘기회’는 파시스트에 대항할 수 있는 현실적, 그리고 잠재적인 각계각층의 의식성에 따라 만들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파시스트 세력의 투쟁은 항시 이 영향력에 종속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그들은 실지 군중의 정치적 수준에 따라 군중을 발동하기도 하였으며, 또는 자본주의 사회 ‘엘리트’를 중점적으로 내세우는 등 전술을 달리 하였다. 이는 대중 동원적 요소가 파시스트 세력의 중요한 전술적 부분을 구성하지만, 어느 때에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팩스턴은 코민테른이 이러한 현상을 ‘자발적인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음을 거론할 것이다. 그러나 ‘자발적인 것’의 기준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즉, 이는 그가 언급하였던 ‘선택의 자유’와 직접적 연관을 이루는 본질적인 범주이다. 팩스턴은 역사가로서 자료를 수집하고 그것을 훈련된 방식으로 나열하고 있지만, 엄밀한 과학자로서 그것을 해석하는 데에 활용되는 철학적이고도 논리적인 범주를 심도 있게 다루려 하지 않고 있다.

 

특수한 객관적 조건 아래에서 군중은 그 조건에 따라 운동하며, 이는 전위적인 실천가에게도 결코 예외가 아닌 것으로 된다. 만약 장기적인 실업 상태가 이미 유럽에 형성되어 있던 지적인 요소가 결합하여 파쇼적 군중 집단을 형성했다면, 이 집단은 군중의 자발성낡은 부르주아 철학가들이 절대 놓지 않으려 하는 자유의지을 그 주체적 계기로 가지는가? 더 쉬운 예로, 중한 범죄에 집단으로 가담하고자 하는 특정한 개인은 그 가담에 대해서 명백한 ‘선택할 자유’를 가진 채 행동한다고 할 수 있는가? 팩스턴은 파시즘이 불어나던 시기 이탈리아와 독일, 그리고 스페인만이 아니라 프랑스, 영국 등 유럽 국가에서 ‘자발적인 것’으로서 형태를 띠는 파쇼적인 농민 자위대가 모이는 현상을 ‘선택할 자유’에 기초한 현상이라 해석할 그 어떠한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지금까지 다룬 경향 외에도 파시즘이라는 현상을 개개의 심리적인, 정신분석학적인 특수 요소의 작용 결과로 환원하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이러한 시도는 매우 긴 역사를 가졌다: 특히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의 『파시즘의 대중심리학(Die Massenpsychologie des Faschismus, 1933)』은 이 흐름에 아주 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라이히는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억압’을 심리적 영역에서 개개인이 파시즘을 내면화하게 한 원동력이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성적 억압은 … 군중 개개인을 수동적이고 비정치적으로 만들 뿐만이 아니라, 부르주아적 인격 구조에 2차적인 힘, 즉 지배 질서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하는 인위적 이해관계를 창출한다. 성적 억압의 과정을 통해 섹슈얼리티가 자기에게 자연스레 부여된 만족의 경로에서 배제된다면, 그것은 다양한 종류의 대리 만족의 경로를 따르게 된다. 예컨대, 본능적인 공격성은 잔인한 가학성으로 확대되어 제국주의적 이익을 위해 소수에 의해 선동되는 전쟁의 대중 심리적 근거의 필수 부분을 형성한다.”46 그는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군중이 급속히 ‘좌경화’할 것을 기대하였던 교조주의자들이 그러한 오류를 계속 시정하지 않으면서, 공황에도 계급의식의 발전에 방파제를 놓는 심리학적 요인을 무시하였다고 비판하였다.47

라이히의 시도는 혁명의 객관적 주체적 조건의 상호 연관에 대한 인식론적 및 심리학적 틀의 정비를 조속히 수행해야 함을 환기한다. 그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끝없이 신비화되어 거론되는 〈리비도〉에 의존하였지만, 프로이트의 〈리비도〉설이 “광범위한 군중의 성생활 유형을 연관”48 내는 지적-방법론적 매개의 역할 데에 커다란 무리가 있는 형태로 남아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를 “성경제학(sexualökonomie)”의 확립에 활용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불가피하게 신비주의로 빠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가 비록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인식의 지속적 운동 경향 및 발전 과정을 안에서 규정하는 요인을 생리학적인 것에서 찾으려고 한 시도를 지적하고 이를 넘어서려 했어도 이는 극복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그가 프로이트로부터 “무의식(unbewusst)”을 차용하는 과정에서 그것의 발생적 기원에 대한 유물론적 해명을 조금도 가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 결과로 〈리비도〉는 여전히 은밀하게 ‘성적 억압’에 의한 부정적인 심리 효과를 가져오는 ‘변화 불가능한 본능’으로 상정되어 다루어지고 있다.

 

그는 ‘계급 국가’에서 ‘사회화 과정’을 ‘성적 억압’을 내면화하여 〈리비도〉의 분출을 보수적인 방향으로 이끌게 하는 원동력이라 간주49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이러한 ‘사회화 과정’은 당시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한 소련에서도 남아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하여 소련과 파시스트 국가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 즉 사회 체계에서 진보성과 반동성을 가르는 어마어마한 차이를 보였는지 그는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정반대로, 매우 억압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서 성적 욕망을 여러 형태로 전용하는 방식대개 여성에게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가해지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계급적 지배력을 보존코자 하는 현상에 관해 그의 학설은 해명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자본주의 발전 초기부터 현대까지 부르주아 지도 세력들이 주창한 고루한 도덕주의는 항상 ‘개방주의’와 결합되어 발현되었는데, 이 메커니즘의 본질은 자본주의 경제의 노동력 재생산 구조를 확립하기 위한 정교한 술책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다.

 

〈리비도〉의 분출은 사회형태에 따라 여성에게는 어떠한 성적 ‘욕망’의 ‘분출’도 허용할 수 없는 억압의 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이 ‘난점’을 프로이트는 “근원적으로 결핍된 것”, 즉 자신의 ‘거세’를 처음부터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리비도〉(또는 그것의 분출을)를 자연스레 ‘포기’한 존재로 ‘여성’을 묘사함으로써 ‘극복’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프로이트는 여성의 ‘사회적 기능’을 매우 협소한 범위로 축소하였는데, 이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욕구와 잠재력을 가질 수 있다는 인식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반동적인 시도이다. 라이히는 이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공식은 그 소녀에게 모든 성행위를 억압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이므로 정신분석은 나치 고위 관료에게도 받아들여지는 것이다.”50 그는 프로이트가 이용한 ‘개념’이 시대 진보에 적대적이고 매우 낙후한, 남근 숭배와 어떠한 연관성을 가졌으며, 이러한 연관에서 한 사회의 사회경제적 특성과 관련하여 프로이트의 학설의 제약성을 어떻게 ‘지양’할 수 있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리비도〉 분출의 사회적 경과와 생산관계 연관성을 과학적으로 해명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단지 여성을 향한 ‘정신분석학적 제약’을 소거하는 방식, 즉 〈오르가즘〉설을 제출함으로써 해결하려 하였고, 이는 본질적인 것을 빗겨나간 것이었다.

 

어떠한 형태의 성 의지가 본능적인 양태로 실재하고 이에 보증되는 성적인 의지를 ‘창조적으로’ 발휘하더라도,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내적 동인에 따라 성의 관계는 어느 한 성의 독재계급 사회에서 이는 남성 독재로 발현된다로 귀결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러하다. 바로 이 점에서 라이히가 논구하는 “성혁명(sexuelle Revolution)”의 한계가 노정된다. 성의 분야에서 혁명을 달성하려면 성을 매개로 한 억압 및 해방의 역사적 사례를 취하여, 어떠한 성적 매개가 특수한 조건에서 진보적인지, 그게 아니면 반동적인지를 과학적으로 규명해야 한다. 파시스트 정권은 고루한 ‘도덕’과 말초적 자극을 지배계급의 이해에 복무하는 방향으로 풀어놓는데, 이 두 책략은 역사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여성의 노예화라는 형태를 띠었다.51 오늘날 여성에 대한 파시스트의 (성적인 것을 매개로 하는, 즉 남성의 ‘성적 욕망’을 사회적 취약 계층에게 분출하게 유도하여 전반적 우민화를 달성하는 방식으로서의) 국가폭력은 세계적으로 특수하고 전문적으로 다뤄야 할 문제로까지 취급되고 있다.

 

그의 저서 곳곳에서 그가 “성에 대한 진보적인 것”이라고 언급할 때 그것은 진정으로 진보적이기도 하며, 또는 교묘하게 반(反)여성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의 환상 속에서 ‘진보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무언가로서 있기도 하다. 동일하게, 그가 소련의 ‘성-문화적’ 보수성과 “금욕주의”를 지적하였을 때, (그것에 부분적으로 타당한 지적이 있을지라도) 그는 소련에서 성을 둘러싼 문제가 또다른 중요한 영역, 사회주의 인격의 전면적 발달과 프롤레타리아 도덕의 연관성 속에서 취급되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52

라이히가 프로이트 학설을 끌어온 견해에 레닌이 프로이트 학설을 어떻게 취급하였는지 굳이 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총괄하자면, 라이히의 설의 불충분성은 〈무의식〉의 실재성을 유물론에 입각하여 정리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정의한 ‘성적 억압’라이히의 개념적 용법에 의한다면, ‘성적인 것’은 굉장히 말초적인 수준에서 발현되는 모든 성행위 일반을 포괄한다이 역사적-사회형태의 내부 메커니즘이 어떠한 질적인 변화 국면을 형성하느냐에 따라 서로 너무나도 상이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간과하였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성적 억압’은 자본주의 국가 기구가 파쇼적 특질을 띠는 것을 해명하는 데서 핵심 변수로 없다.

 

이외에도 프랑스에서는 “생성의 형이상학”으로써 파시즘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크게 일어났다. 이러한, ‘생성철학’에 기초한 연구는 푸코가 서문을 적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작업한 『앙티 오이디푸스(Anti-Oedipus, 1972)』53에서 체계화되었는데, 현대의 모든 ‘미시-파시스트(micro-fasciste) 연구’는 이 프랑스적 원천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미시-파시스트’의 시작점을 분열적인 “욕망적 생산”에 둔다. 이 생산은 서로가 서로를 견인하고 또 배척하면서 특정한 “영토화”를 이루는데, 이 조립되고 해체되는 전개상에 따라 이들은 그것을 “기계”라고 칭하고 있다.54 이로써 여러 정치적 경향은 특수한 욕망적 생산의 “영토화”가 되는 것이며, 그것은 “욕망 기계“가 만들어 낸다. 파시즘은 특수한 미시-정치적 “영토화”의 결과로 취급된다. 이 “영토화”에 참여하는 각각의 욕망 기계는 ‘국가’, ‘민족’, ‘인종’, ‘지도자’, 그리고 ‘죽음의 본능’ 등으로 표현된다.55 개개인은 “미시적”인 층위에서 욕망 기계를 내재화하고 “파시즘”의 요체로서 분화한다. 그들에 의하면 파시즘은 군중의 욕망으로써 받쳐지는56 이 특수한 “재영토화”의 고착화가 현실화하는 흐름이다. 즉, 파시즘은 특수한 사회적 욕망 기계에 의해, “영토”에서 “기표적이며 구조화된 편집증적 통합선”57으로서의 “탈주선”을 타고 “재영토화”를 이루는 양상이다. “필경 파시즘 국가는 자본주의에서 경제적·정치적 재영토화의 가장 환상적인 시도였다.”58 그러나 “파시즘”을 “결정화”하는 제 계기의 발생적 기원에 대한 해명은 “미시-파시스트” 연구가 직접적으로 표명된 『천 개의 고원(Mille plateaux, 1980)』에서도 매우 모호하고 정리가 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뿐이다. 규명되어야 할 것은 이러한 일반성에의 용해가 아니라 전근대에는 전혀 다른 양태로 ‘나타난’ 이 “영토화”의 흐름이 왜 1920년대 이후에는 전과는 다른 특수한 양상을 띤 채로 나타났는가이다. 즉 대규모 억압이나 강제, 폭력의 유무 여부 확정이 아니라 어떠한 유형의 대규모 억압, 강제 그리고 폭력인가의 분석이 요구된다.

 

『천 개의 고원』으로 들어가 보자: 먼저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데올로기적 수사를 그대로 용인한다면, ‘욕망’이 단순히 관념적인 규정은 아니다. 그것은 그들 특유 형이상학에서 객체적 특질을 가지는 ‘생성’을 정립하는 ‘힘’이다. 그러나 그들은 개체적이고 원자화한 수준에서만 ‘생성’을 논한다. 그것은 모든 것을 ‘미시화(微視化)’하는 방식으로써 객관적 실재의 구체적 존립 양식을 극도로 추상화한 것이다. 예컨대 ‘인간’은 ‘생성’에 피정립적인 것이고 ‘욕망’은 특수한 규정을 얻은 ‘힘’이다. 그러나 그들의 ‘미시-파시스트’ 분석에는 이러한 정립과 피정립의 사상이 제출되어 있지 않다. 그들에 의하면 ‘욕망’은 각각이 “분자적인 선(線)으로서 절편성”이므로, 그것은 지배적으로는 오직 개체적인 수준에서만 작용한다. 개개인에 내재한 파시즘은 이 원자적이고 긍정적인 ‘힘’이 타를 파괴, 즉 제압하고자 하는 ‘욕망’으로써 추동된다. 전체적 연관(“거시-정치”)이 “미시-정치”에 대한 지배적인, 그리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정립자로 되는 일은 없다. 즉 “군중이라는 개념은 분자적인 것”59이며, “군중이라는 개념은 계급이라는 그램분자적(molaire) 절편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절편화 작용의 유형을 통해 나아간다.”38 “파시즘”은 ‘욕망’그 자체로 “분자적”이고 “미시적”인에의 맹목성을 충동하며 “분자적인 절편성”을 띠고 군중의 “분자적인 절편성”과 하나가 된다. 그 다음 “파시즘”은 “이 초점들은 점에서 점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우글거리며 도약하고 나서, 뒤이어(avant) <민족 사회주의 국가(nationaliste socialisme d'Etat)>에서 분자적 초점들을 다함께 공명하게”61 하고, “각각의 거처에 전쟁기계가 장착”38하여 실제의 파시즘을 만들어 낸다. 들뢰즈는 이러한 “미시-정치적인” 틀로 정치적인 것을 ‘해명’하려 한다.

 

그러나 그들이 양자를 현실적 사태에 대입하는 순간 구분은 극도로 모호해진다. 예컨대 군중이라는 집단은 그보다 부분적인 단위로서 (“미시적인”그런데 절대적으로 미시적인 것이 가능한가?63) 개개인의 특성을 반영할 수 있지만, 개개인은 사회적 관계의 복합체로서 존재하므로 전체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거시적’이다. 그 이해관계에 있어 파시즘은 역사적으로 일관한 형태를 띠었으며, 파시스트가 군중을 선동해 들어가는 측면에서 도드라진 편견 역시 일정한 성격장애인, 유대인, 공산주의자에 대한 혐오와 편견, 당대에 흔히 퍼져 있던 특정 내용의 음모론 등을 띠었다. 즉, 주관적 요인을 따지자면 그것은 가지각색의 “분자적으로 절편화”한 ‘욕망’또는 그가 뭉뚱그려 표현하는 ‘군중’각각에 동시적으로 들어선 게 아니라, 역사적인 동일성과 연속성을 띠는, 그리고 사회경제적 이해의 다소 체계적인 작용에 따라 발생·​발전한 특수한 욕망에 진입하였다. 이 욕망은 오로지 총체적인 사유 속에서만 구체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반대로 ‘미시-정치’로는 이것들과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에 수반한다고 하는 “코드화”의 발생과 발전의 연관을 전혀 파악할 수 없다. 그는 또한 기하학적 표상을 훨씬 더 복잡한 대상적 연관에 아무런 검증 없이 도입하여 이 대상의 ‘규칙들’이라 불리는 것을 이끌어 낸다. 도대체 어떻게 하여 대상의 내재적인, 그리고 대상 간 연관을 좌표계에서 특정한 함수를 띠는 선분이 각 축과 만난 점으로 간주해야만 하는가? 동일한 “기하학적 표상” 아래에서 그것은 특정 함수를 표현하는 연속하는 곡선이 될 수도, 축 자체가 될 수도 있다. 들뢰즈나 가타리는 스스로가 활용한 무수한 유비에 대한 ‘근거’를 순전히 암시적이며 자기 당위적으로 댈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구상은 연구 대상으로서의 객관적 실재와 구체적 동일성을 지니지 못한 (관념적인) 상(象), 일개 표상의 지위로 격하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형이상학’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서 더욱 구체적이고 원론적인 형태로 제출되어 있다.

 

‘미시-파시스트’ 분석에는 역사적 분석이 결여되어 있는데, 이는 특정 사회에서 파시즘이 유의미한 사회적 힘으로 전화한 때, 즉 그것이 시대에 출현한 때 그 사회의 경제적 연관에 대한 체계적인 파악의 부재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가타리는 “파시즘”의 출현과 관련하여 여러 역사적인 예를 동원하지만, 이는 아무런 구체적 분석이 없이 상황에 따라 역사를 ‘선별’하는 것에 불과하다. 탐구 대상의 보편적 연관은 오직 그것의 역사적 순서와 논리적 순서를 통일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이는 대상의 성숙한 형태인 자립적인 전체가 탐구자의 명백한 경험적 요인으로 등장하기까지 그 이행의 순서제 계기를 총괄하는 것이다.

 

어떠한 현상이 반복적인 패턴으로 나타나기까지 그 이행의 역사적 계기의 고찰을 도외시한 들뢰즈와 가타리는 “파시즘” 범주를 매우 우연적인 수준에서, 그것도 매우 원자화한 개개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가타리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모든 파시스트적 의미는 사랑과 죽음의 복합적 표현에서 비롯되며,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하나로 합쳐진 것이었다. 히틀러와 나치는 독일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죽음을 위해 투쟁했다. 독일 군중은 그에 따라가서 스스로의 파멸을 맞이하기로 동의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전쟁에서 명백히 패배한 후에도 수년간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방식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64 여기서 ‘죽음’과 ‘사랑’은 엄밀하게 정의되지 않았는데, 이것이 정확하게 규정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는 단지 현실을 극도로 추상화한 표상물의 지위를 넘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독일에서 파시스트 정권이 수립되고 그들에 의해 결코 적지 않은 군중이 기만에 빠지기까지 사회경제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역관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며, 이를 “계기 없는” 관념물, 즉 개별적인 추상적 표상, 감정의 특수한 발현 형태로서 취급하고, 이를 독점적인 ‘해석 틀’로 가공하여 파시즘을 규정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이러한 표상은 역사적으로 파시스트에 저항하였던 세력에서도 나타나므로, 파시즘은 어떠한 정치적 진영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비약한다. 그러나 파시즘을 추동한 ‘적극 분자’와 그에 맹목적으로 순순히 응한 군중, 그리고 파시스트 지도자 모두 각각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비롯된 이해관계의 일방적 정립의 산물이었으며, 이 현상들의 발전 추이는 오직 역사과학으로써만 연구될 수 있다. 규정된 현상, 특히나 인간사회에서 규정된 관계나 현상, 외양 따위의 발생 및 발전에의 탐구에서 전체와 부분, 원인과 결과의 시간적 연관으로 표지된 것에 관한 역사적·논리적 순서의 고찰 방식에의 거부는 연구 대상으로 설정된 것의 신비화로 귀결된다. 우리는 나치 독일이 패배에 명백히 직면했음에도 독일 군중의 적지 않은 부위가 나치의 승리를 확신했음을, 그들이 ‘스스로의 파멸’을 욕망했다는 미시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독점자본주의의 모순, 괴벨스의 선전, 나치스 교육, 경제적 이해관계의 반동적 분출 등의 전체의 배열항으로 취급한다. 어떠한 것과 그것의 타자는 언제나 이 관계를 규정하고 정립한 중심 매개물질적 생산체계, 경제적 이해관계(생산과 소비, 다시 말해 “먹고 사는 문제”) 그리고 계급투쟁의 추이, 즉 투쟁에서 기본 계급의 주체 역량에 의해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상쇄하는 힘의 발전 경향 내부에 있다. ‘죽음’과 ‘사랑’의 외양은 이 발전과정에서 배치된 직접적인 표상일 뿐이다. 즉 그들이 말하는 ‘미시적인 것’은 ‘원자적인 것’, ‘분자적인 것’의 단지 폐쇄적 상호 정립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전체로서 경제적 사회구성체에 의한 피정립자에 불과하다.

 

결국 들뢰즈와 가타리의 견해는 실지 파시스트 정권이 공산주의자 및 이에 지도되는 민주주의 진영과 얼마나 격렬한 투쟁의 과정을 거쳤는지, 그 구체적이고 생생한 역사의 존재성을 비합리적으로 부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파시즘에 대한 투쟁은 단순히 심리적인 층이나 개개인을 둘러싼 (그 개개인의 행동 양상에 대한 극도의 추상화인) ‘욕망 기계’를 넘어, 매우 일관된 양태로서 경제적이고 정치적이며, 제도적인,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영역까지 매우 폭넓은 전선을 형성하여 발전하였다. 또한 그는 군중을 그가 정의한 “욕망적 생산”에 의해 ‘정립’되는 ‘기계’의 절대적으로 수동적인 허물로 격하하고 있다. 그러나 특수자로서 ‘기계’의 발생적 기원 및 그것이 즉자대자적인 것으로서 발전순환을 완성하는 제 요인·순서에 대해서는 조금도 분석되어 있지 않으며, ‘생성’의 우연적 분화 산물(“잠재성의 현행화”)이라는 설명에는 요인들의 정확한 현실화 시점, 존립 방식이 부재한다. 파시즘은 개체적인 수준에서 심리적인 것을 포괄하지만, 그 존립의 본질적 연관에서 개개인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의 산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연구는 파시즘의 사회경제적 출현 경로, 그것의 발전 양상, 동조 세력의 경제적 이해와 정치적 목적, 이 정권의 경제 정책, 대외 정책 등의 사회적-물질적 생산 체계와 그 상부구조의 특수성변증법적 상호 연관을 중심에 놓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추상적이고 불분명한 용어 사용과 ‘논증 구조’로 가득 찬 이 “미시-파시스트” 연구 원전들은 현재까지도 한 사람마다 매우 상반된 해석을 불러와 그 무용성을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모호성은 도대체 어떠한 현상을 파시즘으로 규정해야 할지에 대한 불분명한 ‘기준점’의 난립을 야기한다. 그것은 대신 다른 여러 목적에 부합하였는데, 예컨대 지식인들의 경제적 지위가 크게 위축된 서구 자본주의 나라에서 속물적인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이 금전 획득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활용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므로 이에 기초한 파시즘 연구는 오늘날까지 제국주의 국가의 지식인층에서 유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파시즘 현상에 대한 소부르주아·부르주아적 해설을 톺았다. 속류 역사가적 ‘수집’에 의존하는 데서 단 한 치도 못 나아가는 경향을 제한다면, 이러한 설명에서 특징적인 것은 역사적 유물론에의 적대적인 태도 및 사회분석의 틀을 특수한 형태의 관념에 조명을 쏘는 것에 국한한다는 것이다. 이 관념이 포함하는 것은가장 개체적인 수준에 있으며 신비화한 ‘인간 심리’에서, 역사적으로 제출되어 서로 간접적인 연속성을 띠며 현실에 소개된 사상의 궤도까지 다양하다. 그것들은 파시스트 정권에서 대규모 군사 경제 체제를 급속히 추진하거나 반노동 개악(改惡)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현상까지 종합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결함이 깊은 틀로 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들은 노동계급이 파시즘의 본질을 추려내는 데 커다란 방해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그릇된 견해들은 노동계급이 파시즘에 대해 적절한 정치 전술을 수립하는 데 막대한 해악을 끼친다.

 

우리는 노동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에 기초하여 파시즘의 보편적 성격을 파악함으로써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통속적인 공격 방식이 표현하는 전반적 내용이 파시즘의 의도와 전혀 분리될 수 없음을 인식할 수 있다. 한 나라에서 극우주의자들이 왜 기존의 민주 성과를 허물고자 하는지, 그리고 왜 부르주아 국가 내에서 민주주의의 이념적 틀과 연관된 여러 사회적 시책의 지속적인 개혁을 결사 반대하는지, 그 의도의 궁극적인 지점에 어디에 존재하는지 파악하고자 한다면 역사 발전이 계급투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을 체득해야 하며, 이에 기반해 파시즘의 보편적 특성 및 연관을 이해하여야 한다. 이는 또한 현대 노동계급이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데서 고민해야 하는 수많은 전략적이고 전술적인 주제와도 접점을 가지고 있다. 파시즘의 보편적 성격을 일반민주주의 운동의 정치적 당위를 세우는 데 연계하고 이로써 (그것이 이념적인 것이든, 객관적인 조건으로서 한 정치 형태이든) 민주주의를 사회주의의 길목으로 화하게 함은 투쟁이 장기화되는 오늘날의 정치 구도 속에서 더더욱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2025년 1월 3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 D. Eichholtz et al, Faschismus-Forschung, Berlin: Akademie-Verlag, 1980, 14.텍스트로 돌아가기
  2. V. I. Lenin, “A Caricature of Marxism and Imperialist Economism”, Collected Works, Vol. 23,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64, 43.텍스트로 돌아가기
  3. E. Lewerenz, “Zur Bestimmung des imperialistischen Wesens des Faschismus durch die Kommunistische Internationale (1922 bis 1935)”, Faschismus-Forschung, 1980, 34.텍스트로 돌아가기
  4. G. M. Dimitrov, 『통일전선 연구: 반파시즘 통일전선에 대하여』, 김대건 역, 서울: 거름, 1987, 176.텍스트로 돌아가기
  5. 위의 책, 178.텍스트로 돌아가기
  6. F. Neumann, 「파시즘의 경제구조」, 『파시즘연구』, 서동만 역, 인천: 거름, 1983, 185-95.텍스트로 돌아가기
  7. W. Krause, “Faschismus und bürgerliche politische Ökonomie”, faschismus-forschung, 1980, 307.텍스트로 돌아가기
  8. J. R. Pauwels, 『자본은 전쟁을 원한다: 히틀러와 독일·미국의 자본가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박영록 역, 파주: 오월의봄, 2019, 14.텍스트로 돌아가기
  9. A. Tooze, The Wages of Destruction: The Making and Breaking of the Nazi Economy, London: Penguin Books, 2006, 158 ff.텍스트로 돌아가기
  10. T. Rafalski, Italienischer Faschismus in der Weltwirtschaftskrise (1925-1936), Opladen: Westdeutscher Verlag, 1984, 33.텍스트로 돌아가기
  11. Loc. cit.텍스트로 돌아가기
  12. C. E. Mattei, The Capital Order: How Economists Invented Austerity and Paved the Way to Fascism, Chicago &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22, 40 ff.텍스트로 돌아가기
  13. 『통일전선 연구: 반파시즘 통일전선에 대하여』, 86-7.텍스트로 돌아가기
  14. Italienischer Faschismus in der Weltwirtschaftskrise (1925-1936), 34.텍스트로 돌아가기
  15. Loc. cit.텍스트로 돌아가기
  16. D. Eichholtz, “Faschismus und Ökonomie. Zu Problemen der Entwicklung der Produktionsverhältnisse unter der faschistischen Diktatur”, Faschismus-Forschung, 1980, 52.텍스트로 돌아가기
  17. Loc. cit.텍스트로 돌아가기
  18. V. Wrona, “Marxistisch-leninistische Faschismuskritik – unabdingbarer Bestandteil der antifaschistisch-demokratischen Umwälzung”, Ibid., 371.텍스트로 돌아가기
  19. E. Hackethal, “Faschismus in Lateinamerika”, Ibid., 255.텍스트로 돌아가기
  20. Ibid., 253.텍스트로 돌아가기
  21. Loc. cit.텍스트로 돌아가기
  22. Ibid., 248.텍스트로 돌아가기
  23. R. D. Griffin, Modernism and Fascism: The Sense of a Beginning under Mussolini and Hitler, NYC: Palgrave MacMillan, 2007, 71.텍스트로 돌아가기
  24. Ibid., 72.텍스트로 돌아가기
  25. Ibid., 203.텍스트로 돌아가기
  26. “파시스트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자본주의와 계급적 특권을 옹호하는 것 이상의 일에 관여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들의 혁명은 저속한 물질주의를 초월한 ‘영적’ 혁명이었다. 그럼에도 사회 및 경제 문제에 관해서는 반복적으로 자본주의 경제, 자본가의 경영적 권위, 사회적 위계를 지지하였다. 주관적으로 파시스트는 ‘영적’ 문제에 집착했고, 특히 ‘타락’을 근절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지만, 객관적으로는 보수적 이익, 특히 재산권을 공격하기보다는 그것들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라 로크(La Rocque)가 그랬듯이, 이들은 때때로 ‘부르주아적’ 타락을 비판하였지만, 이는 마르크스주의적 타락에 대한 훨씬 더 큰 혐오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R. J. Soucy, “French Fascism and the Croix de Feu: A Dissenting Interpretation”,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26 (1), 1991: 164.)텍스트로 돌아가기
  27. Z. Sternhell, Neither Right nor Left: Fascist Ideology in France, tran. D. Maisel,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6, 67 ff.텍스트로 돌아가기
  28. Z. Sternhell, The Birth of Fascist Ideology, tran. D. Maisel,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9, 75.텍스트로 돌아가기
  29. Ibid., 180 ff.텍스트로 돌아가기
  30. Ibid., 17-8.텍스트로 돌아가기
  31. Ibid., 22.텍스트로 돌아가기
  32. Ibid., 28.텍스트로 돌아가기
  33. S. G. Payne, Fascism: Comparison and Definition, Wisconsin: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80, 99.텍스트로 돌아가기
  34. 이탈리아 파시스트 지도자 무솔리니가 운동 무리를 이끄는 데 끌어온 자금의 출처에 관해서는 W. A. Renzi, “Mussolini's Sources of Financial Support, 1914-1915“, History, 56 (187), 1971: 189-206.를 참조하라. 이에 관해 그람시 역시 다음과 언급한 바 있다: “전투적 파쇼(Fasci di combattimento)는 전쟁 직후에 출현하였으며, 그 시기에 등장한 다양한 참전 용사 단체들과 동일한 소부르주아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그 결연한 적대─부분적으로, 전쟁 기간 동안 사회당과 참전주의 단체들 사이의 갈등의 유산─로 인해 파쇼는 자본가들과 정부 당국의 지지를 얻었다. 그들의 출현이, 성장하는 노동자 조직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 백색 테러단을 구성하려던 지주 측의 요구와 우연히도 일치했다는 사실로 인해 대지주들에 의해 창조되고 무기를 지급받은 무장 패거리들의 체계가 똑같은 파쇼의 이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 패거리가 발전해 감에 따라 그 이름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기관에 대항해 싸우도록 길들여진, 자본주의의 백색 테러단으로서의 그들의 정체성과 결합되어 갔다. 파시즘은 그 성격상 이러한 본래 결점을 결코 탈각해 본 적이 없다. …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기관들에 대한 그 난폭한 공격행위들이 자본가들─그들은, 1년의 과정을 통해, 사회주의 노조의 전체 투쟁기구들이 산산히 부서지고 주변화되는 것을 목도했다─에게 이득을 주어 왔지만, 그럼에도 더욱 극악해져 가는 폭력이 사회의 중간층 및 민중 사이에서 파시즘에 대한 광범위한 혐오감을 유발시켜 결국 종식되고 만 것을 부인할 수 없다.” (A. F. Gramsci, 「두 개의 파시즘」, 『옥중수고 이전』, R. Bellamy 편, 서울: 갈무리, 2001, 273-4.)텍스트로 돌아가기
  35. 김용우, 『호모 파시스투스: 프랑스 파시즘과 반혁명의 문화혁명』, 서울: 책세상, 2005, 112.텍스트로 돌아가기
  36. R. P. Dutt, Fascism and Social Revolution: A Study of the economics and Politics of the Extreme Stages of Capitalism in Decay, Chicago: Proletarian Publishers, 1974, 100.텍스트로 돌아가기
  37. R. O. Paxton, 『파시즘: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손명희 & 최희영 역, 서울: 교양인, 2005, 465.텍스트로 돌아가기
  38.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39. 위의 책, 465-6.텍스트로 돌아가기
  40. 위의 책, 466.텍스트로 돌아가기
  41.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42. 「파시즘의 공세와 파시즘에 반대하고 노동계급의 통일을 지향하는 투쟁에서 코민테른의 임무」, 『코민테른 자료선집 3』, 편집부 엮음, 서울: 동녘, 1989, 136.텍스트로 돌아가기
  43.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44. K. Marx,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임지현 & 이종훈 역, 고양: 소나무, 2017, 66-7, 259-62.텍스트로 돌아가기
  45. S. N. Nadel, 『계급론』, 김병호 역, 서울: 녹두, 1986, 37-8.텍스트로 돌아가기
  46. W. Reich, Die Massenpsychologie des Faschismus: Zur Sexualökonomie der politischen Reaktion und zur proletarischen Sexualpolitik, Kopenhagen-Prag-Zürich: Verlag Für Sexualpolitik, 1933, 53.텍스트로 돌아가기
  47. Ibid., 19.텍스트로 돌아가기
  48. Ibid., 42.텍스트로 돌아가기
  49. Ibid., 88 ff.텍스트로 돌아가기
  50. W. Reich, 『성문화와 성교육 그리고 성혁명』, 이창근 역, 서울: 제민각, 1993, 24.텍스트로 돌아가기
  51.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파시스트적 정권이 ‘인권’을 빙자하여 어떤 정책을 취했는지는 B. Gross, 『친절한 파시즘: 민주주의적 폭력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김승진 역, 서울: 현암사, 2018, 537-67.을 참조하라.텍스트로 돌아가기
  52. 이 부분에 관해서는 『성문화와 성교육 그리고 성혁명』, 1993, 167-70.을 참조하라.텍스트로 돌아가기
  53. 푸코가 작성한 서문에 의하면 “『앙티 오이디푸스』가 대면하는 세 부류의 적수”가 있는데, 이 중 “가장 주요한 적수이자 전략적인 적은 파시즘”이다. 푸코는 이 문헌을 비(非)파시즘 윤리의 지침서라고 강조하였다. (G. Deleuze & F. Guattari, 『안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분열증』, 김재인 역, 서울: 민음사, 2014, 7.)텍스트로 돌아가기
  54. 위의 책, 23 ff.텍스트로 돌아가기
  55. F. Guattari, “Everybody Wants to be a Fascist”, Chaosophy: Texts and Interviews 1972-1977, Los Angeles & CA: Semiotext, 2008, 168.텍스트로 돌아가기
  56. 『안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분열증』, 2014, 65, 433.텍스트로 돌아가기
  57. 위의 책, 564.텍스트로 돌아가기
  58. 위의 책, 434.텍스트로 돌아가기
  59. G. Deleuze & F. Guattari,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역, 서울: 새물결, 2001, 407.텍스트로 돌아가기
  60.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61. 위의 책, 408.텍스트로 돌아가기
  62.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63. 물론 들뢰즈와 가타리는 『앙티 오이디푸스』에서 “그 자체로 그램분자적 구성체의 투자가 아닌 분자적 구성체는 없[다.] … 욕망 기계들이 대규모로 형성하는 사회 기계들 바깥에 실존하는 욕망 기계란 없다”(『안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분열증』, 2014, 563.)는 것을 명시한다. 그러나 그들의 분석에서 “그램분자적 구성체” 및 그것의 안정화에서 필수적인 지속성에의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은 부재하다. 그들의 ‘정치 형이상학’에서 그것은 “탈영토화의 분열증적 과정”에 놓여, 재차 “유목적인 것”, “미시적인 것”으로 환원될 뿐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64. “Everybody Wants to be a Fascist”, Chaosophy: Texts and Interviews 1972-1977, 2008, 168-9.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