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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백 | 집행위원
β. 콰인
초기 분석철학은 비엔나 학파의 영향으로 인해 (‘순수한’ 존재로서 ‘존재 일반’이든, 어떠한 것에 의해 규정된 존재이든, 우리의 의식 외부에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객관적 대상이든지 무관하게) ‘존재’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형이상학’이라고 간주하며 이를 철학에서 다루길 극도로 멀리하였다.1 그러나 인식론과 논리학을 전개함에서 이러한 주제를 완전히 다루지 않을 수는 없기에, 실제로는 그들 역시 ‘인식론이나 논리학의 영역을 뛰어넘는’ 여러 주제를 다루었다. 특히 비엔나 학파에서는 마흐의 ‘요소’를 이름만 바꾼 후 그것을 자신 철학 전개에서 그대로 활용·‘논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비엔나 학파가 따르는 전통과 유사한 전통을 추구하는 거의 모든 주관적 관념론자는 항상 ‘형이상학적(‘존재론적’)’ 방법론을 혐오하면서도 그 자신이 그 ‘형이상학적’ 방법론을 답습하는 모순을 달고 산다. 오늘날 분석철학 진영 내부에서 존재론적인 것을 다루는 것을 ‘형이상학’이라고 하여 배척하는 분위기가 여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이지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들 주제는 거의 언제나 존재론적인 것과 겹친다. 실태가 바로 이렇기에 아예 ‘형이상학적 주제’를 완전히 배척해 놓고는 온전한 철학 이론의 전개가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그들 내부에서 공공연하게 나오는 실정이다.
콰인 역시 『존재하는 것에 관하여』(이하 ‘『존재』’)에서 존재론적인 것, 즉 그가 ‘실재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다루었으며, 『경험주의의 두 독단』(이하 ‘『독단』’)에서도 역시 이 주제와 겹치는 것에 대해 다루었다.2 뮤니츠에 따르면 그는 “논리실증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던 철학 시기 동안 분석철학을 풍미하고 있었던 ‘형이상학’에 대한 전반적인 혐오감을 극복할 수 있는 방향을 향해 분석철학자로서 그리고 논리학자로서 중요한 공헌”3을 하였다. 그는 콰인이 “건전한 존재론적 견해를 개발해야 할 필요성과 중요성에 관해 긍정적인 태도”4를 취했다고 말한다. 이 〈건전한 존재론적 견해〉가 무엇인지 파악해보도록 하자.
콰인은 자신이 설정한 가상의 철학자인 ‘McX’의 견해─보편자 존재론을 받아들이는 견해─와 그에 반대되는 자신의 견해를 비교해 가며 자기 입장을 전개해 나간다:
“한 존재론적 진술이 어떤 별도의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고도 지탱된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존재론적 진술들은 일상적 사실에 관한 모든 인과적 진술로부터 직접 귀결된다. 이는 마치─McX의 개념적 틀의 관점에서 볼 때─‘속성이 있다’가 ‘붉은 집, 붉은 장미, 붉은 황혼 등이 있다’로부터 귀결되는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이 다른 개념틀에서 판단한다면, McX가 공리라고까지 생각했던 존재론적 진술도 똑같이 즉각적이고 당연하게 거짓이라고 판단될지도 모른다. 그는 붉은 집과 장미와 황혼이 있다는 것까지는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통속적이고 잘못된 방식으로 말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것들이 어떤 공통적인 것을 소유하고 있음은 부정할 것이다. ‘집’, ‘장미’, ‘황혼’ 등의 단어들은 집들과 장미들과 황혼들인 잡다한 개별적·실재들에 대해서 참이며, 또한 ‘붉은’ 혹은 ‘붉은 대상’이란 단어는 붉은 집, 붉은 장미, 붉은 황혼 등의 갖가지 개별적 실재 각각에 대해서 참이다. 그 외에 거기에 덧붙여진 어떤 실재도 없다. 다시 말해 개별적이거나 그렇지 않든 간에, 단어 ‘집’, ‘장미’, ‘황혼’ 등이 명명하는 실재도 없다. 집과 장미와 황혼들 모두가 붉다는 것을 궁극적이며 환원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래서 실제 설명력의 관점에서 볼 때 ‘붉음’과 같은 이름 아래 상정했던 신비스러운 실재들 때문에 McX의 형편이 더 나아진 것도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McX가 자신의 보편자 존재론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사용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우리가 보편자 문제로 돌아서기도 전에 이미 제기되어 버렸다. McX는 우리 모두가 일치되게 사용하는 ‘붉은’이나 ‘~이 붉다’ 같은 술어들이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기 위해 그 각각이 단일한 보편 실재의 이름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아 온 바에 의하면, 어떤 것의 이름이라는 것은 의미 있다는 것보다 훨씬 특수한 특징이기 때문이다.”5
그는 ‘존재론적 진술’─실재하는 것 또는 실재하는 것과 연관하여 다루어지는 모든 논리적, 인식론적 진술─이 일상적 경험에서 얻는 여러 가지 사실로부터 ‘인과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McX는 일상적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특수자가 있다는 것만으로 그 특수자의 상위에 존재하는 속성이 있을 것이라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다시 다른 일상적 경험에 의해 언제든 거짓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논리적으로 표현된) 모든 보편적인 것은 그것들의 개별적 양태들에 대해서는 참이며, 이것만이 오로지 이 보편적인 것이 지닌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실재” 외에는 그 어떤 다른 “덧붙여진 어떤 실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보편적인 것이 “명명하는 실재”, 즉 이 ‘보편적인 것’이 그 자체로 지시하는 실재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언어 활동에서 개념적·속성적 의미가 존재하지 않음을 주장한다:
“의미[개념적·속성적 의미; 인용자]를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해 나는 어떠한 꺼림직함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단어나 진술이 의미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의미에 관해 말하는 혹은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용한 방식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그 하나는 의미 가짐 곧 유의미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미의 같음 혹은 동의어이다. 소위 한 발화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일상적으로, 원래의 것보다 분명한 언어로 한 동의어를 발화하는 것일 뿐이다. 만일 그런 의미가 아주 싫다면 직접적으로 발화에 관해 유의미하다거나 무의미하다거나 혹은 서로 동의어라거나 이의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 형용사 ‘유의미한’과 ‘동의어적인’을 어느 정도 분명하고 정밀하게 설명하는 문제는─되도록이면 나처럼 행동의 관점에서─그것이 중요한 만큼 어렵다. 그러나 소위 의미라는 특별하고 환원 불가능한 매개적 실재가 설명적 가치를 가진다는 것은 분명히 망상이다.”6
콰인이 주장하는 것은, 보편-특수-개별이라는 이른바, ‘위계화’된 진술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의미’란 바로 이러한, 보편-특수-개별로 이어지는 개념적 틀이 언어에 그 의미로 ‘실재’한다는 맥락으로서의 ‘의미’이다. “유의미”와 “무의미”(또는 “동의어”와 “이의어”)는 발화자 발화 내용과 매개된 타자로부터 추론될 수 있는 게 아니며, 그것은 개체적인 “설명”에 의존한다. 콰인의 견해를 따른다면 개념적 연결에 기반한, 또 소급으로써 발화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언어 활동과 관련하여 주어진 사태─낱말이 쓰이는 현상, 술어가 형성되는 현상, 이를 둘러싼 제반 현상들─를 극히 제한적 시각에서만 바라본 주장이다. 설명적 요인이 의미를 구성하는 것은 타당하지만, 그 설명적 요인의 총체에도 일반성이 존재한다. 보편-특수-개별이라는 매개적 운동은 실제로 서로 인과적 관계를 이루면서 규정되는 실재적인 것이다. 즉 개념적 내용에도 역사적이고 논리적인 순서라 존재한다. 그러나 이 순서는 신실증주의적 “의미론”으로 파악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각각의 언어 활동에서 파생되는 의미는 인식 과정의 외적인 요인들, 즉 객관적인 사회적 관계와 통일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의미론 연구’는 본질적으로 역사 연구이며 역사과학이다.
형식논리학은 “(본질과 기원의 양 측면에서) 실체 개념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발전에 관한 관념, 일견 매우 이질적으로 보이는 현상들─추상적인 것이 아닌 한, 이 현상들에서 공통의 속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의 발생적 공통성이라는 원리를 논리학 내에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7 이미 비트겐슈타인 철학을 다루는 과정에서 보편-특수-개별의 실재적인 매개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었으니, 첫 번째 인용문에서 나타난 문제에 대해서만 다루어도 족할 것이다.
우리가 ‘집’, ‘장미’, ‘황혼’이든, 또는 그것의 특수한 것, 즉 그것의 규정된 것으로서의 ‘붉은 집’, ‘붉은 장미’, ‘붉은 황혼’이든, 이러한 류의 낱말을 사용한다고 했을 때를 상정한다면, 물론 이것은 추상적 개념을 구사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단어에 정확히 또는 근사적으로라도 대응되는 객관적이고도 구체적인 대상, 사물이란 존재할 수 없다. 대상은 오직 총체적인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추상적 제 개념이 사물을 그것의 날 것 ‘자체’로 지칭할 수 있다거나 또는 사물에 대한 우리 인식에서 가장 ‘원자적인 단위’이며 고로 그것이 사물에 대한 가장 풍부한 인식을 보증한다는 말은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주어진 대상에 관한 존재하는 추상적 틀이며, 이러한 추상적 틀을 통해 우리는 대상에 대한 더욱 내밀한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붉은빛을 띠는 지붕, 붉은빛을 띠는 장미꽃잎, 붉은빛을 띠는 황혼이 “붉은빛을 띠는” 그 이유는 분명히 어떠한 빛 스펙트럼에 실재하는 것으로서 객관적으로 존재함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변증법적으로 자기에 대해, 그리고 타자에 대해 전체적으로 갖는 제 관계는 물론 단순히 ‘붉다’라는 추상적 표현만으로 파악될 수는 없고 따라서 ‘붉다’는 이러한 특정한 파장 범위의 스펙트럼이 지니는 관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히 그 관계의 구체성으로 향하기 위한 통로를 반영한 표현이다. 그리고 이 통로는 바로 그 점에서 객관적인 것으로 존립한다. 만약 그것이 일반적으로, 붉은빛을 띠게 하는 특정한 파장을 벗어나 있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붉다’라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는 모든 추상적인 것이 실제로는 구체적 매개 속에서 산출된 것이라는 사실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경제적 관계를 둘러싼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의 상관성에 관한 마르크스의 중요한 언급은 이와 같은 핵심을 일깨워준다: “이 모든 지혜는 독립적으로 보면 순수한 추상으로서, 가장 단순한 경제적 관계들을 드러냄을 고수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들은 가장 심오한 대립들에 의해 매개되는 것이며, 이 대립들의 표현에 지워져 있는 희미한 한 측면만을 나타낸다.”8
바로 이 점에서 일리옌코프가 추상적인 것에 대한 V. F. 아스무스(Asmus)의 견해에 내재한 허점을 지적하였던 바와 같이, 추상적 보편자도 그에 대응되는 실재적 양태를 가진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구체적 개념들의 대상들이 존재하는 반면, 추상적 개념들의 대상들은 비존재하는가? 하지만 추상적 개념들의 범주[즉 추상적인 것]는 미덕뿐만 아니라 가치, 무게, 속도, 즉 그 존재가 비행기나 집과 같은 것들만큼이나 실재하는 대상들도 수용한다. 만약 누군가가 집, 나무, 비행기 등과 같은 다른 개별적인 것 외에 연장(延長), 가치, 혹은 속도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말한다면, 그는 명백하게 개별적인 것들은 또한 연장, 무게 및 물질적 세계의 다른 속성들 바깥에 존재하며 오직 머릿속에서만, 오직 주관적 추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스무스의 견해에 따르면 불가피하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여기에도 거기에도 없다.”9
‘붉음’과 ‘집’, 그리고 ‘붉은 집’ 간 관계를 파악해보자. 콰인은 ‘붉은 집’에 대해서 그것의 보편적 속성이라 간주되는 ‘붉음’이 단순히 그것의 개별적 양태인 ‘붉은 집’에 있어서만 ‘참’으로 될 수 있으며,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붉음’ 역시 ‘색상’의 한 개별적 양태이며, ‘붉은 집’ 역시 ‘허름한 붉은 집’에 대해서는 한 추상적 보편으로 기능한다. ‘붉은 집’이 추상적 보편이라는 연유로 하여 이것에 어떠한 객관적이고도 실재적인 함의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특수적/개별적 양태에 종속되어 존립하는 ‘붉음’이 ‘집’에 대해 어떻게 결합하여 진리 판정의 대상으로 될 수 있는지는 미궁에 빠지게 된다.
개념적 틀이 이러한 연관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파악할 때, 우리가 콰인의 전제를 따르면 그 어떠한 것도 (일리옌코프의 예리한 지적 그대로) ‘그 자체’로는 실재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개별적 지칭체는 동시에 보편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편 모든 개별적 지칭체는 그보다 상위에 놓인 추상적 보편자를 자기 계기로서 지니고 있음을 파악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붉음’은 ‘색’이라는 보편자와, 그리고 ‘붉은 집’은 ‘집’ 또는 ‘붉음’이라는 보편자와의 관계에서 비로소 특수자로 규정될 수 있다. 이미 콰인조차 “어떤 것의 이름이라는 것은 의미 있다는 것보다 훨씬 특수한 특징”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이 다루는 대상을 어떠한 보편적인 것과 연관 지어 ‘특수한-’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보편적인 것은 특수한 것과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자기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며, 특수한 것은 그러한 보편적인 것의 존재 양식을 통해 비로소 그 스스로를 특수한 것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보편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어간다면, 우리는 그것이 끊임없이 운동하는 것이며, 상호 연관을 이루면서 자기 규정적인 것으로 화하는 상대적인 정립자임을 파악할 수 있다.
철학적 유물론은 논리적 내용을 구성하는 여러 계기와 요소를 반드시 객관적 실재와 연관을 이루는 것으로 다룬다. 눈에 전혀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추상적 제 개념들, 여러 추상적 지칭 표현 역시 객관적인 것을 그 계기로 지닌다는 것을 유물론적 세계관은 승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승인에는 과학적 근거가 있는데, 심리학·언어학적으로 인간에 의해 구사되는 모든 낱말, 문장은 항상 외부 조건을 반영한다는 것이 계속하여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비고츠키는 이와 같은 언어적 개념의 활용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어린이는 게임과 말에 있어 상징과 그 가치의 연결에 어떠한 조건성과 자의성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여러 실험을 통해 볼 수 있다. 하나의 사물이 나타내는 상징이 되기 위해서는 낱말은 지정된 대상의 자질에 의존해야 한다. 어린이의 게임에서는 어떤 것이 아무것이나 다 될 수는 없다. 사물의 실제 성질과 그 상징적 의미가 복잡하게 구조적으로 얽혀 있음이 게임에서 드러난다. 어린이는 낱말을 사물의 특성에 따라 사물과 연관 지으며, 이 사물의 특성은 그것이 가진 보편적 구조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 실험에 참가한 어린이는 바닥을 유리창(그 위로 걸을 수 없어요!)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게임 과정 중에 그 성질이 바뀐 의자(마치 기차인 것처럼 취급된)는 기차가 될 수 있다. “램프 위에다는 쓸 수가 없고 탁자로는 불을 켤 수가 없어요”라며 어린이는 ‘탁자’와 ‘램프’의 의미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대상의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 성질을 바꾸는 것이다. 말을 처음으로 시작하는 어린이가 기호와 그 가치 사이의 관계를 알지 못하며 매우 오랫동안 이 관계를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없다. 진전된 실험들 역시 단 한 번의 발견을 통해 명명의 기능이 나타나지 않으며, 이 또한 그 자신의 자연적 역사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어린이가 말을 형성할 때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개별의 사물에 각각의 이름이 있다는 발견이 아니라 사물을 조작하는 새로운 방법, 즉 이름을 통해 사물을 조작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모든 외부적 기호들이 기능적으로 비슷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기호와 그 가치의 연결이 성인에 의해 만들어진 상응하는 연결과 일찍부터 닮기 시작하지만 그 연결들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종류의 심리적 형성물이다.”10
언어철학을 전개함에서 인간의 언어적 활동을 외부 대상에 대한 반영이라는 사실과 완전히 무관한 것임을 전제하는 현대 주관적 관념론자들의 망동은 일반적으로 다양한 언어적 활동을 설명함에서 단편적 문구에 대한 의미론과 통사론적 ‘분석’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이러한 시도는 불가피하게 낱말, 문장, 문법적 요소의 토대를 해명함에서 조잡한 형태의 순환논증을 반복하는 데에 그칠 수밖에 없거나, 일상언어학파의 극단적인 유아론으로 퇴행할 수밖에 없다. 〈건전한 존재론적 견해〉라는 것 역시 이 두 경향 사이에 걸쳐 있는 주관주의의 한 형태일 뿐이다.
언어 활동에서 개념적 연관 고리를 부정하는 콰인은 이제 모든 언어적 활동에서 문장이 갖는 의미는 그것의 논의 형식이 “어떤 존재론에 개입하고 있는가”11에 따라 그것의 계기와는 하등 무연고하게 ‘전환’할 뿐이며, 이 ‘전환된’ 외적 실천 형태는 “그 이론의 속박 변항12이 지칭할 수 있어야만 하는 실재에 그리고 그 실재에만 개입”4한다. 그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존재론’이란 이러한 ‘개입’이 요구하는 주관적 체계로서의 실재를 의미한다. 따라서 예를 들어, “물리적 대상이란 유전하는 경험에 대한 해명을 마무리짓고 단순화하기 위해 요청된 실재”14에 불과하다. 각자의 의미는 각자의 속박 변항에 한해서만 의미를 지니기에, “내가 McX의 존재론에 반대하면서 나의 존재론을 고수하는 한, 나는 McX의 존재론에는 속하면서 내 존재론에는 속하지 않는 실재들을 내 속박 변항들로 하여금 지칭하도록 허용할 수는 없다.”15
콰인의 이러한 주장은 형이상학의 전형이며, 그 형태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후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유아론과 다르지 않다. 콰인에 의하면 모든 지식은 설정된 속박 변항에 제한된 의미만을 지니며, 그것은 다른 속박 변항 및 그 변항의 토대와 그 어떠한 연관을 이루어 통일된 체계로 나아갈 수 없다. 이러한 관점은 총체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의식 외부에 독립해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 그래서 그는 또한 『독단』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나는 한 사람의 경험주의자로서 과학의 개념적 틀을 궁극적으로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서 미래의 경험을 예측하는 도구라고 줄곧 생각해왔다. 물리적 대상이란 편리한 매개물로서 개념적으로 상황에 맞게 도입된다. 이것들은 경험에 의한 정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식론적으로 호메로스의 신들에 비견되는 환원 불가능한 설정물들이다. 나는 비전문적인 물리학자로서 물리적 대상들은 믿고 호메로스의 신들은 믿지 않는다. 또한 나는 그와 다르게 믿는 것을 과학적 오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식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물리적 대상과 신들은 정도만 다르지 종류는 다르지 않다. 두 종류의 실재들 모두는 오직 문화적 설정물으로서 우리의 개념 작용 내에 들어온다(Both sorts of entities enter our conception only as cultural posits). 물리적 대상의 신화는 경험의 흐름을 다루기 쉬운 구조로 파악하는 장치로서 다른 신화들보다 더 효과적임을 증명해 왔다는 점에서 다른 대부분의 것들에 비해 인식론적으로 우월하다. 설정물은 거시적 물리 대상에 그치지 않는다. 원자적 차원의 대상들은 거시적 대상에 대한 법칙들과 최종적으로는 경험의 법칙들을 더 단순하고 다루기 쉽게 만들기 위해 설정된 것이다. … 과학은 상식의 연장이며, 이론을 단순화시키기 위해 존재론을 부풀리는 상식적인 조치를 계속한다.”16
이것이 〈건전한 존재론적 견해〉의 실질이다. 그렇다면 콰인의 기획은 주관주의적 소여론이나 갖가지 대응론의 극복인가?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유의미한 용어는 감각 자료의 이름이거나 그런 이름들의 복합어이거나 또는 그런 복합어의 약어이다. 이렇게 진술함으로써 이 이론에는 감각 사건으로서의 감각 자료와 감각적 성질로서의 감각 자료 간 애매함이 남게 된다. 그리고 허용될 수 있는 결합 방식들도 모호하게 남게 된다. … 우리는 더 그럴듯하면서도 극단적 환원주의라는 것의 한계를 넘지 않도록, 완전한 진술들의 의미 있는 단위들로 간주할 수 있다. 따라서 전체로서의 진술들이 감각 자료 언어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하긴 하지만, 용어 대 용어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 환원주의의 독단은 더 세련되고 섬세한 형태로 경험주의자들의 사상에 계속해서 영향을 주고 있다. 이 관념은 각 진술에 혹은 각 종합적 진술에 가능한 감각 사건들의 고유 영역이 결합되어 있어서 그중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하든지 그 진술의 진리에 그럴듯함을 더해 줄 것이고, 또한 각 진술에 가능한 감각 사건들의 다른 고유 영역에 결합되어 있어서 그것들의 발생함으로 인해 그 진술의 그럴듯함이 감소될 것이라는 생각이 남아 있다. 물론 이런 관념은 검증 이론에서는 절대적이다.”17
이 서술에서 핵심이 될 “전체로서의 진술”의 구체적 내용에 관해 콰인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만약 우리가 경험주의자라면, 사실적 구성 요소는 마땅히 확증 가능한 경험의 영역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또한 문제되는 것이 언어적 요소뿐인 극단적인 경우에서 참인 진술은 분석적이다. … 현재 나의 제안은 어떤 개별 진술에서든지 언어적 구성 요소와 사실적 구성 요소에 관해 말하는 일이 무의미하며, 또한 이것이 많은 무의미함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과학은 언어와 경험에 이중으로 의존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성은 개별적으로 취해진 과학적 진술로는 의미 있게 추적될 수 없다. … 균형 있는 고려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체 장에 영향을 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개별 경험들도 그 장 내에 속해 있는 어떤 개별 진술들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18
콰인의 주장은 소여된 것만을 취급할 수 있다는 주관적 관념론의 전형이다. 이러한 주장은 전혀 새롭지 않다. 이는 레닌의 비판 대상이었던 주관주의자 보그다노프의 주장과 그 본질에서 단 한 치의 차이점도 없다:
“『경험일원론』의 제1권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객관성의 기초는 집단적 경험의 영역 내에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나 동일한 생활상의 의의가 있는 경험의 소여, 즉 우리가 모순 없이 우리의 활동을 그것에 입각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의 확신에 의하면 다른 사람들도 모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그것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러한 경험의 소여를 객관적이라고 부른다. 물리적 세계의 객관적 성격은 그 세계나 나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인을 위해서 존재하며[거짓말이다! 물리적 세계는 "만인"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한다; 레닌] 또 만인에 대하여 일정한 의의, 나의 확신에 의하면 나에 대해서와 똑같은 의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있다. 물리적 계열의 객관성은 그 보편 타당성이다."(25쪽, 보그다노프의 강조). "우리가 우리의 경험에서 마주치는 물리적 물체의 객관성은 결국 각이한 사람들의 발언의 상호 검증 및 합치를 기초로 하여 확립된다. 일반적으로 물리적 세계란 사회적으로 동의되고 사회적으로 조화된, 한마디로 말하면 사회적으로 조직된 경험이다."(36쪽, 보그다노프의 강조)”19
“관념론은 말한다: 물리적 자연은 생물의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20 콰인의 주장과 이전 분석철학자들의 주장에는 아주 지엽적인 차이 빼고는 없다. 그는 소여된 감각 요소를 기존 경험주의의 방식으로 ‘분해’─러셀이나 무어로부터 유래한 방법으로서─하여 ‘사실적 구성 요소’에 대응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관점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콰인이 택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실제로 완강히 저항하는 경험에 직면해서 한 진술을 다른 것보다 우선적으로 선택할 경우, 그것은 우리 선택의 상대적 그럴듯함을 반영하는 느슨한 연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엘름가의 벽돌집이 있다는 바로 그 진술을 같은 주제에 관해 그에 관련된 진술들과 함께 재평가함으로써, 분명히 우리의 체계를 조정하게 될 완강한 경험들을 상상할 수 있다. 우리는 켄타우로스가 없다는 바로 그 진술을 동종의 진술들과 더불어 재평가함으로써, 우리의 체계를 조정하게 될 완강한 경험들도 상상할 수 있다. 완강히 저항하는 경험은 전체 체계의 서로 다른 선택 가능한 부분들 내에서 대안이 되는 서로 다른 재평가 중 어느 것에 의해서도 조정될 수 있다고 나는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상상한 예들의 경우에는 가능한 한 전체 체계를 혼란시키지 않으려는 자연적인 경향으로 인해, 우리는 수정의 초점을 벽돌집과 켄타우로스에 관한 이들 특수한 진술들에 맞추어도 될 것이다.”21
콰인은 “완강히 저항하는 경험”이 드러날 때마다 ‘조정’되는 진술만 취급되어야 한다는 ‘대안’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은 대응 개념을 부정한다기보단, 오히려 대응 개념을 전제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과적으로 이 “(기존 경험적 사실에 대하여) 완강히 저항하는 경험”이 그 자신의 의미를 진술에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 “완강히 저항하는 경험”이 조정을 유발함에 선차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전제이며, 이러한 부여 역시 대응─“우리의 체계를 조정하게 될 완강한 경험들”과의 대응─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결론은 "물리학이나 논리학이나 존재론의 고도로 이론적인 진술보다는 더 분명한 경험적 지칭체를 갖는 것"22을 승인하는 것이며, 감각 자료와의 대응 자체가 부정됨을 전제하기보단 조정 행위에 "[조정에 전제되는 의미론적 요소가; 인용자] 감각 자료와의 우선적 연관성 탓에 간섭당하는 경우가 거의 없음을 의미할 뿐"4이다. 대응이 개별적이고 즉각적·원자적으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긍정─러셀의 관점─하는가, 아니면 대응이 항시 ‘전체’적이며 지연─조정 과정으로 인한─을 포함하는 것으로서만 성립함을 긍정하는가, 이 차이만 있을 뿐이다.
콰인이 말하는 이 ‘조정’, 이 “완강히 저항하는 경험”은 마흐주의의 ‘요소’와 무엇이 다른가? 그의 주장은 철학적 불가지론의 정당화를 위한 장치를 쓸데없는 장광설과 함께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조정’은 (콰인이 목표로 하지도 않았겠지만) 인식이 객관적 사태로 접근함을 보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조정이 갖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으로서의 규정성이라는 것도 경험 자료에 의해 규정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또는 그러한 가능성을 단순히 콰인의 기획으로는 도저히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뒤엠-콰인 논제’를 핵심 부품으로 하는 ‘인식론적 전체론(confirmation holism)’의 관념론적 본질이라 해야 할 것이다.
2024년 12월 13일
- 레닌이 활동하던 시기에도 이러한 현상이 횡행했다: “이제 철학적 조류로서의 마흐주의의 자연과학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자. 마흐주의 전체는 시종일관 자연과학의 '형이상학'과 투쟁하고 있는데, 마흐주의가 이 명칭으로 부르고 있는 것은 자연과학적 유물론, 즉 외부 세계는 객관적 실재이며 우리의 의식은 그것을 반영한다는, 자연과학자의 압도적 다수고 품고 있는 자연발생적이고 무의식적이고 무정형적이고 철학적으로 자각되지 못한 신념이다. 그리고 우리 마흐주의자들은 이 사실에 대해서 기만적으로 침묵을 지킴으로써, 자연과학자들의 자연발생적 유물론과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고 또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수백 번이나 확증된, 한 경향으로서의 철학적 유물론과의 불가분적인 연관을 호도 내지 혼란시키고 있다.”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하)』, 1992, 123.) 다음과 같은 언급도 주목할 만하다: “순수과학과 가장 추상적인 듯이 보이는 이론의 사제(司祭)들은 그저 분노에 신음하고 있다. 그리고 철학적 들소들(관념론자 파울젠, 내재론자 렘케, 칸트주의자 아디케스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의 이러한 모든 모표에서 하나의 기본 동기가 역력히 들린다: 자연과학의 '형이상학' 반대, "독단론" 반대, "자연과학의 가치 및 의의의 과장" 반대, "자연과학적 유물론" 반대, 그놈의 유물론자다, 쉿쉿! 그놈을 잡아라, 유물론자를 잡아라, 그놈은 솔직하게 유물론자라고 자칭하지 않고 세인을 속이고 있다─바로 이것이 특히 존경할 만한 교수 양반들을 광기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위의 책, 125-6.)
- 분석-종합 구분에 대한 『독단』의 비판은 이 글에서 다루지 않는다.
- 『현대 분석 철학』, 개정판, 1997, 640.
- 같은 책.
- W. V. O. Quine, 「존재하는 것에 관하여」, 『논리적 관점에서』, 허라금 역, 서울: 서광사, 1993, 123.
- 위의 책, 25-6.
-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 1990, 262-3.
- MEW, Bd. 42, Berlin: Dietz-Verlag, 1983, 173-4.
- Dialectics of the Abstract & the Concrete in Marx’s Capital, 1982, 12.
- L. S. Vygotsky, 『도구와 기호: 어린이 발달』, 비고츠키 연구회 역, 서울: 살림터, 2012, 45-6.
- 「존재하는 것에 관하여」, 『논리적 관점에서』, 1993, 28.
- 형식논리학의 일종인 술어논리(양화논리)에서 주어진 문장의 논의 영역을 표현하는 규정적 요소인 양화사(量化辭)를 의미한다.
- 같은 책.
- 위의 책, 32.
- 위의 책, 30.
- 「경험주의의 두 가지 도그마」, 위의 책, 1993, 63-4.
- 위의 책, 57, 59.
- 위의 책, 60-1.
-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상)』, 1992, 168-9.
- 위의 책, 293.
- 「경험주의의 두 가지 도그마」, 『논리적 관점에서』, 1993, 62-3.
- 위의 책, 63.
- 같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