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호칭과 지칭, 그리고 존칭과 존댓말

 

re님의 [호칭]에 관련된 글.
리우스님의 [호칭에 얽힌 얘기]에 관련된 글.

 

 

1.

 

사람들은 가끔씩 지칭을 호칭과 구별하지 못한다. 지칭과 호칭의 형태가 동일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헷갈릴 법도 하지만. 보통 권위 있는 인사를 지칭할 때, 'ㅇㅇㅇ대표님', 'ㅇㅇㅇ의원님', 'ㅇㅇㅇ위원장님' 따위를 '~께서'와 함께 존칭으로 사용한다. 말걸기 같은 싸가지가 바가지인 새끼가 'ㅇㅇㅇ대표', 'ㅇㅇㅇ의원', 'ㅇㅇㅇ위원장'으로 '님'자 떼고 '~이/가'와 사용하면, 어떤 덜떨어진 것들은 진짜루 "싸가지 없는 새끼" 취급한다.

 

내가 아무리 되먹지 못한 놈이어도 권영감 앞에서 "어이 권영감, 잘 지내나?"라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통념이라는 게 있고, 무엇보다 상대방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기분 상하게 하는 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권의원님, 안녕하시지요?"라고 한다.

 

상대방을 부르는 호칭과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 지칭은 다르다. 상대방을 부르는 건, 나와 상대의 관계에 따라, 내가 상대를 어떻게 대할 지 그 태도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제3의 인물을 언급할 때는 그냥 그 사람의 이름, 이름에 직위를 붙여서 말하면 된다. 다만, 상당히 저주하고 싶은 대상에게만 '~새끼'라는 말이 붙듯이 존경과 권위를 담아 표현하고자 한다면 '~님'자를 붙이기도 한다. 이러고 싶다면 맘대로 해도 되는데, 남에게까지 존경과 권위를 담아 표현하라고 한다면 예의가 아니다. 그리고 지칭에서 지나친 존칭은 권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지칭에서의 존칭은 주의해야 한다. 할머니 앞에서 '아버지께서' 따위를 사용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즉, 윗사람에게 아랫사람에 대한 존경과 권위를 표현하는 게 웃기다는 거다. 이건 꼭 가족 관계에 한정할 건 아니다. 요즘 세상이라면 사회적 관계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민주노동당 대변인실에서 'ㅇㅇㅇ대표님께서 ㅇㅇㅇ라고 말씀하셨다' 따위의 브리핑은 오만과 불손의 표현이다. 소위 유권자들한테 민주노동당 대표에게 존경과 권위를 표현해달라는 듯 전달된다.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제발 그런 표현 쓰지 말라 해도 말을 안 듣는다. 이런 게 진짜 싸가지 없는거다.

 

하여튼 운동권이 더 권위적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ㅇㅇㅇ대표님께서', 'ㅇㅇㅇ의원님께서', 'ㅇㅇㅇ위원장님께서'... 으, 지겹다.

 

 

2.

 

나는 말이 짧다. 나보다 왠만히 나이 먹지 않고서는 나한테서 온전한 존댓말 듣기 어렵다. 나는 유독 나보다 나이 많은 인간들한테 말이 짧다. 존댓말은 상대방과 나 사이의 위계이기도 한데, 뭐 대단한 사람도 아닌 것이 나를 아랫것 취급하는 건 참을 수 없다. 네가 짧으면 나도 짧다. 하지만 반대로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 특히 차이가 많이 나는 상대일수록 존댓말을 쓴다. 그 사람 입장에서 나에게 반말을 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말을 놓을 만한 관계라고 생각할 때 말을 놓는다. 사적인 관계이거나 다분히 공식적인 관계라 하더라도 상대방이 말을 놓아버리면 나도 반말로 간다. 반말은 친근감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위계의 반영이기도 하다. 이게 어려운 문제인데, 친근감으로 위장한 위계 강요가 있다. 상대방이 자기한테 말 놓기 힘들 걸 알면서 자기는 친근감의 표현이라며 말을 놓은 경우가 있다. 할배들한테는 봐주지만 대충 봐서 아저씨면 같이 말을 놓아버리는 습성도 필요하다. 자주 이러면 '싸가지 없는 놈', '원래 그런 놈'으로 여겨져서 오히려 갈등도 피할 수 있다.

 

길거리에서 지나치거나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면 내가 존댓말 쓰는 경우는 네 가지 정도이다. ①존댓말을 안 쓸 수 없는 어른, ②나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나에게 존댓말 쓰는 사람, ③공식적인 관계 중심으로 만나서 말 놓기 좀 애매한 사람, ④존나 싸가지 없는 새끼. 특히 ④번의 경우는 '~습니다', '~습니까' 따위로 아주 공손한 표현을 사용한다. '너 같은 새끼랑은 사적인 관계는 없어'라고나 할까.

 

사람들이 반말을 쓰기 어려워 한다. 나이 차이를 극복하기 힘들어 한다. 사회적 관계가 평등해질수록 존대의 표현은 적어진다. 20세기 초중반만 하더라도 한국어에서 존대는 4등급이었다. 지금은 '~요'의 확장으로 거의 2등급으로 바뀌었다. '습니다' 따위는 존대도 있지만 공식적 관계를 표현하기도 한다. 꽤나 바뀌었다. 여기서 쭉쭉 나가서 사람들 사이가 평등해지면 다 반말만 쓰게 될거다. 반대로 반말 많이 쓰면 관계도 평등해지는 면이 있다. 일단 개기기 쉬워지니까.

 

 

3.

 

존댓말-반말을 어떻게 쓸까보다 어려운 게 호칭이다. 나는 '오빠'라는 호칭을 써본 적이 없다. 그럴 관계가 없으니까. '형'이나 '누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배웠다. 어려서부터 형이랑 누나랑 살았으니까.

 

'언니'라는 표현은 호칭과 지칭으로 함께 사용하기도 한다. 당 정책위에 '목언니'가 있는데 누군였는지 먼저 '목언니'라고 부르더니 다들 '목언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손아래 누이가 손위 누이를 부르는 '언니'와는 사뭇 다른 의미이다. 부르는 사람과 불리는 사람의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 아닌, 불리는 사람의 지위를 담는 말로 보인다. 여기서 '언니'라 함은 당 정책위 사무실에서는 비교적 나이가 많은 여성을 칭(호칭 및 지칭)하는 말이다. 목언니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목언니'라 부르기도 한다. 이때는 하대보다는 존중의 느낌이 강하다. '목언니' 말고 '강언니'도 있다.

 

홍미로운 건 이런 호칭(및 지칭)이 남자를 부를 때는 없다는 점이다. 아무개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아무개형'이란 호칭이나 지칭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형'은 대체로 관계만을 담는다. 그래서 '형'이란 호칭을 쓰는 어떤 경우는 문제 있는 관계일 수 있다. 남자가 남자를 '형'이라고 부를 때, 진짜 형이니까 그러기도 하고 정말 사적으로 친해서 그러기도 한다. 그러나 공적인 관계도 갖는 듯한 사람들 사이에서 '형'이란 표현은, 남자들끼리 '형-아우'라는 '마초동맹'이 형성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남이가."

 

얼그러진 인간 관계 때문에 애초 가족 관계에서 파생한 호칭('언니'는 애초 가족 관계에서 나온 건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렇게 쓰인다)은 그 맥락과 상황에서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언니'가 비하의 의미로, '오빠'가 여성을 포박하는 의미로, '형'이 마초동맹의 의미로, '누나'가 야릇한 불륜의 의미로 쓰인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 있다. 그래서 가족관계에 빗댄 '언니, 오빠, 형, 누나'라는 호칭을 어떻게 써야 할지 어려운 것이다. 이 어려움도 모르고 정신 못차리는 인간들은 싸가지 없이 막 불러댄다.

 

 

어쨌든 이런 어려움을 피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님', '~씨' 따위의 표현이다. 무성적이고 나이 관계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은 이런 호칭이 특정한 상황에서만 자연스러운 느낌이다. '~님'은 PC통신 시절부터 많이 쓰이기 시작해서 지금은 인터넷에서나 기업이 손님을 부를 때 널리 사용한다. 블로거들도 아마 '~님'을 선호할 듯하다. '~씨'는 함께 일하는 공간에서 널리 퍼진 듯한다. 그런데 문제는 직위가 낮아서 직위명이 호칭으로서 뽀대나지 않는 사람들을 부를 때 사용하게 되어 하대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호칭이라는 게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의미가 있으면 좋으니 사람들은 직위를 호칭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공적인 관계에서는 무난하다. 하지만 직위를 호칭으로 사용하는 건 권위주의로 흐를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특히, '직위+님'이 호칭으로 쓰일 때 그렇다. 그냥 직위만 호칭으로 부를 때는 권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직위만 호칭으로 불리는 경우에도 듣고 있는 제3자의 입장에 따라 불쾌할 수도 있다. '자리'라는 것 자체가 유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말을 놓을 수 있는 관계라면 'ㅇㅇ아', '야'로, 존댓말을 써야 하는 입장이라면 'ㅇㅇ씨'로 불리는 게 좋다. 'ㅇㅇ님'은 너무 존대하는 것 같아 부담된다. 직위를 호칭으로 불릴 때도 가끔은 어색했다.

 

참, 남을 부르고 내가 불리는 것도 힘들다. 뭐가 우리들 사이를 이렇게 힘들게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