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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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에게 중요한 것과 그것을 얻는 길
- 살고자하는 마음
어떤 거룩한 자가 늘 선한 마음을 품고 올바른 생각과 말과 행위만을 하며 죄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성도가 가만히 보니 어떤 사람이 자신의 욕심과 교만을 이루고자 거짓말을 했다. 이에 거룩한 자는 죄에는 사망의 심판이 있음을 알기에 그를 불쌍히 여겨 그가 생명의 심판에 이르도록 하얀 책을 펴 지적해주었다. 그러나 범죄한 자는 성도에게 지적 받고도 생각과 말과 행위를 돌이키지 못함은 욕심과 교만을 돌이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하던 자들은 돌이키지 못한 자를 옳지 않다고 판단했으나 책으로 지적해준 성도는 의롭고 온전하다고 판단했다. 이번에는 자신을 돌이키지 못한 그 사람이 동일한 이유로 자신처럼 거짓말하는 다른 사람을 보았다. 이때 돌이키지 못한 자는 입을 닫지 않고 오히려 하얀 책을 펴더니 거짓말은 옳지 않다고 되어있는데 당신은 어찌 이렇게 행하느냐며 지적해주었다. 또한 상대방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소리를 높여 비판하되 자신은 믿는 자이니 거짓말을 해도 죄가 없으며 오히려 의로운 자라고 여겼다. 그러자 지적 받은 사람은 마음에 들보를 그대로 놔두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이나 잘하라고 했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어리석은 바리새인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의 잘못된 생각과 말과 행위와 실수를 어찌 잘못된 생각과 말과 행위와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자가 판단하거나 혹은 비판하는 것이 옳겠는가? 그러므로 거룩하고 정결한 공동체와 또한 그 한 몸에 거하고 있는 거룩한 가정에서는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보았을 때 우선 자신에게 그와 같은 것들이 있는지 없는지를 돌아보는 것이 옳다. 또한 자신이 그 십자가의 길에서 말씀과 기도와 인자의 살과 피로 온전해졌을 때에도 자신의 의와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옳다.
한편 온전한 사람이 잘못된 생각과 말과 행위와 실수를 한 그 영혼에게 이것은 잘못되었다 지적할 때는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특히 그것을 돌이키는 것이 옳다. 그리고 그가 은혜를 받은 자라면 자신을 온전함과 거룩에 이르도록 자신을 지적해준 지체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는 것이 마땅하다.
사람은 이렇게 거룩하고 신령한 지체들과 함께 하며 자신도 역시 말씀에 순종하며 또한 아버지께로 부르짖으며 또한 인자의 살과 피를 의지하므로 아버지의 뜻에 이른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거듭난 후에 의롭다 하신 영혼들과 거룩하다 하신 영혼들이 육신의 장막에서 나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섰을 때 생명의 심판을 내리시니 거룩하다고 인정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거룩한 육체를 입는다. 그리하여 영광의 자유에 이른 자들이 천국에서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린 후 셋째하늘에 올라갔을 때에 24장로와 장자와 자녀와 또한 신령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아버지와 아들의 품에 영원히 함께 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반드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아버지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니 영의 거듭남을 얻은 자들 가운데 육신의 기회가 있을 때 혼의 거듭남을 이루지 못한 자들은 온전하게 되는 그 과정에서 거룩을 이루므로 온전케 된다. 그리하여 그 과정에서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은 자들이 자신처럼 온전케 된 의로운 영혼들과 함께 셋째하늘에서 아버지의 의로운 백성으로서 영원히 거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사람들이 더 큰 구원에 이르길 원하시니 이 세상에 있을 때 거룩에 이르므로 아버지의 백성보다는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그 권세와 언약을 이루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피의 은혜로 영이 거듭난 백성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늘 지적하시는 것은 그들의 깊은 속에 있는 마음과 혀와 생각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돌이키는 자들은 나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성소에서 아버지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형제자매요 신령한 교회로서 거하겠고 돌이키지 못하는 자는 시온산에 있는 그 새 예루살렘성전으로부터 먼 곳에서 거하게 된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아버지께서는 태초에 자신의 품에서 낳으신 그 아들의 이름 안에 세 가지의 의미를 넣어두셨으니 두 번째 의미는 온 세상이 똑같이 부르며 생명에 이르는 이름이다. 다음과 같은 비유를 통해 예수라는 이름의 그 두 번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자기의 백성들이 의롭고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는 왕이 있었다. 그런데 그 왕은 아들을 낳고서 감히 백성들도 참으로 부르기 쉬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자라서 이제는 자기에게 사랑과 은혜와 훈계를 베푼 아버지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이는 아버지가 자기를 늘 부르는 그 이름에 담긴 뜻을 알기 원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지어서 붙여준 아버지에게 자기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그 아버지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 “나는 너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백성들에게 내가 가진 소중한 진주를 공평하고 의롭게 나누어주고 싶노라. 하지만 만일 남자에게만 진주를 주고 여자에게는 주지 않거나 돈이 많은 자에게는 주고 가난한 자에게는 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공평하다 하겠느뇨? 그러므로 지위가 낮고 배움이 없는 자들에게도 진주가 공평하게 허용되는 것이 옳도다. 또한 나의 말에 순종하며 진주를 구하는 자와 불순종하며 진주를 구하는 자에게 똑같이 진주를 준다면 그것을 어찌 의롭다 하겠느뇨? 만일 불순종하며 있는 자에게 똑같이 진주를 주는 게 의롭다고 한다면 과거에 불순종한 그가 마음을 돌이키지 않아도 오늘 진주를 주어야 하니 내가 어찌 나의 백성이 어제처럼 똑같이 내일도 불의하고 더러움을 행하도록 하겠느뇨? 하지만 그가 과거에 불순종했어도 오늘 마음을 다하여 뉘우치는 자에게 진주를 주어 내일의 기회와 소망을 얻게 하는 것이 오히려 의로운 것이 되겠노라. 또한 나의 말에 순종하며 진주를 구하는 자에게는 더욱더 큰 진주가 주어지는 것이 공평하노라.” 그 아들은 자기아버지의 말을 가만히 듣고는 자기이름에 담긴 의미를 깨달았다. 그러므로 백성들에게 가서 이렇게 전했다. “누구든지 왕에게 진주를 받기 원하는 자는 나의 이름을 정직하게 부를 것이요 나의 이름을 더욱더 정직하게 부르는 자는 더 큰 진주를 얻겠노라.” 그러자 백성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그 아들의 이름을 정직하게 부르며 왕의 말에 순종했다. 그러므로 그 왕은 하나의 진주를 그들에게는 베풀어주었다. 하지만 그 아들의 이름을 거짓되게 부르는 자들에게는 진주를 내리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의 진주를 얻는 자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왕의 마음을 이해하고 왕의 뜻을 이루기 원했으니 그 아들의 이름을 계속해 부르며 왕의 말에 순종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더 큰 진주를 베풀었다. 하지만 진주를 얻은 후 거짓되게 부르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 큰 진주를 주지 않았다. 한편 백성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왕의 말에 불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품고 있는 것이 좋았으니 그 아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왕은 아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은 그들에게는 진주를 내리지 않고 오히려 의롭고 정직하게 심판하여 옥에 가두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자들은 원수가 심은 그 선악과로 인하여 또한 스스로가 자신의 욕심과 유익을 구하는 마음을 품을 때 불의와 죄악을 범하며 사망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라는 그 이름을 가진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다. 그러므로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부를 수 있는 그 이름은 생명의 이름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그 선악의 죄로 인하여 어제는 비록 죄악되고 불의했으나 그 아들의 이름은 누구든지 부를 수 있는 생명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그가 오늘 자신의 죄와 허물을 회개하며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 아버지께서는 예수라는 그 이름 하나로 그에게 거듭남의 은혜를 베푸시니 그는 영원한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진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임하는 그 생명은 공평한 은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주가 무엇인지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자들과 귀히 여기지 않는 자들은 아버지의 앞에 나와 진주를 구하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오히려 생명 없는 돌을 구한다. 그러므로 그 생명의 이름을 거짓되게 부르는 자들에게 어찌 아버지께서 진주를 내리시리요?
한편 그 공평한 은혜를 얻은 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아버지의 그 뜻을 이루기 원한다. 즉 자신이 의롭고 깨끗하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에 자신은 참으로 연약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기의 생각이나 이 세상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아들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 생명을 이룬 아들이 그에게 임하니 그를 사망으로 이끄는 그 선악의 죄는 그의 마음에서 떠난다. 그리하여 그 이름을 정직하게 부른 그가 거룩에 이르러 그 거룩한 육체의 생명에 이르니 그가 큰 구원을 얻은 그것도 역시 공평한 은혜이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과 거룩하신 영의 은혜와 긍휼을 받아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 셋째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내려주시는 지식이 있다. 그러므로 이 깨달음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자기의 지혜나 경험으로 혹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지식으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태초에 모든 계획을 의롭고 공평하게 세우신 아버지께서는 그 이름을 가진 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권위를 주셨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께로부터 나오신 거룩하신 영께서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그 말씀과 또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일만을 증거하여 완성하신다. 그러므로 공평하고 의로운 그 생명의 이름 안에는 아버지와 거룩하신 영께서 한 분으로 속하여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판단의 기준과 도구는 오직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판단은 아버지께로 가까이 가기 원하는 한 영혼이 어떠한 말과 행동을 하였을 때 그것을 말씀의 기준으로 옳다 틀리다 판단을 내려서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해주며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니 더 이상 그런 말을 뱉거나 그런 일을 행하지 말라고 말씀을 전해주는 것이다. 이때 그 판단의 말씀을 통해 돌이킨 영혼은 점점 더 거룩해져 아버지께로 더 가까이 나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거룩하고 정결한 공동체에서 말씀으로 판단을 할 때나 판단치 않을 때에라도 거기에 비판이 있으면 안 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다른 영혼들도 비판을 통해 서로를 선악의 죄 가운데로 더욱더 낮추게 하기 때문이다. 즉 판단이 아닌 비판을 하게 되면 더욱더 비판을 불러들여 그 죄가 비판을 즐긴 영혼들을 더욱더 옭아맨다. 또한 판단이 아닌 비판은 공동체에 거하는 자들을 생명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 더욱더 멀리 이끈다. 즉 거룩하신 말씀에 순종하거나 하나되지 않는 자들이 어찌 그리스도께로 또한 아버지께로 가까이 거할 수 있으리요?
예를 들어 거듭남의 은혜를 얻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다. 이때 남자가 여자에게 판단이 아닌 비판을 하니 여자는 저 아래로 내려간다. 하지만 비판 받은 여자만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요 비판한 그 남자도 여자와 함께 내려가되 비판한 남자는 비판을 받은 여자보다 더 아래에 거하게 된다. 남자가 먼저 죄를 불러들였기 때문이요 여자는 판단이 아닌 비판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영혼들에게 판단이 아닌 비판을 하는 자는 생명을 위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게다가 원수는 늘 참소하는 자이니 그들의 말과 행위를 항상 듣고 보면서 때를 기다린다. 그러다 나중에 때가 되었을 때 혹은 덫을 만들어 잡은 후에 비판한 자들이 돌이키지 못하도록 한다. 또한 공동체에서 비판한 자는 나중에 자신도 판단이 아니라 비판을 받게 된다. 즉 비판한 자가 나중에 범죄했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 말씀으로 판단을 주는 대신 비판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말씀을 알고 있음이 아니요 오직 아는 것을 순종하므로 거룩해진다. 그러므로 사람을 씻어 깨끗하게 하는 것은 오직 말씀의 판단이요 반대로 비판은 상대와 자신을 더욱더 죄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판한 자는 자신이 비판한 만큼 비판을 받은 자는 자신이 비판을 받은 만큼 그 죄로 감싸이는 것은 그들이 말씀이 아닌 선악을 입에 담았기 때문이요 또한 어두운 세상으로 더욱더 깊이 빠져드는 것은 비판하는 자들이 거할 곳은 말씀의 판단이 있는 거룩한 공동체가 아니요 오직 사망으로 들어가는 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비판과 판단은 이처럼 한 사람의 생명과 관계된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를 판단할 때에나 판단하지 않을 때에도 비판은 안 하는 것이 옳고 판단은 마음의 문을 열고 듣되 비판은 육의 귀로도 듣지 말아야 한다. 또한 판단을 해야 할 때에도 오직 말씀의 판단을 하되 말씀을 모르는 자는 판단도 안 하는 것이 자신과 상대방의 생명을 위하여 참으로 옳고 지혜로운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품에 함께 계셨으며 또한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낳으시고 자신의 말씀과 권위를 아들에게 주셨으니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알고 계신다. 또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으니 자신부터 의롭고 거룩하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판단과 심판의 자격을 갖추고 계시니 공동체에서 거룩에 애쓰는 자들에게 판단하시고 또한 나중에 심판대에서는 각 사람의 영혼에게 영원한 생명과 사망의 심판을 내리신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에 거하는 지체들을 판단하시며 심판하실 때 자신의 생각이 아니요 오직 아버지의 말씀으로 하시니 그것은 비판이 아니라 판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거룩하고 정결한 자들에게 주시는 판단과 심판대에서 내리시는 심판은 모두 다 공의롭고 정직하고 공평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목적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말씀의 판단과 심판을 내리시니 그들이 받은 완전한 판단과 심판을 깨닫고 돌이키므로 온전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행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참 아들만 감사히 받되 사생자들은 받지 못하니 많은 자들이 살고자하는 마음이 없기에 육에 있을 때 판단을 받으면 더욱더 실망하고 장막에서 나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섰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 실망은 그들이 받은 판단과 심판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요 마음 없이 생명의 아버지를 헛되이 붙들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그것을 원치도 행치도 않으며 오히려 자기의 마음을 행위와 세상에 두고도 생명의 아버지께로 가까이 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신령한 율법을 이루셨으나 의문의 율법은 폐하셨으니 만일 그 두 가지의 율법이 동일한 것이면 모순이 되어버리고 만다. 아버지의 말씀에는 이렇게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 교만한 자는 깨달음을 구하기보다 자신이 옳음을 나타내고자 거룩한 말씀을 이용한다. 또한 사람은 행위로는 의롭게 되지 못하나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했으니 행위와 행함은 다른 것이어야만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행위라는 것은 아버지께서 명하시지 않은 것을 행하는 것이니 사람의 기준으로 선하고 옳게 보이는 것도 행위일 뿐이다. 반면 믿음의 행함은 아버지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니 예를 들어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기 전에 세상에서 돌이켜 방주로 들어가라는 말씀을 미리 전하셨다. 이때 믿고 들어간 자는 의로 여기심을 받았으나 안 믿는 자들과 믿는다며 안 들어간 자들은 세상과 함께 사망으로 내려갔다. 마찬가지로 소돔과 고모라가 불로 멸망 당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을 때도 이와 같았으되 소돔과 고모라는 마지막 때의 예표이니 하늘에서 내리는 유황비로 세상이 멸망을 당하기 전에 심판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자들을 위해 마지막 때에 예비하신 방주가 바로 광야의 예비처이다.
비판치 말라는 것도 이렇게 모순처럼 보이는 말씀들 가운데 하나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옳고 그른 것을 말씀을 기준으로 스스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셨고 거룩하신 영을 통해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바울도 스스로 판단하라는 말씀을 늘 거룩하고 신령한 교회에 전했다. 그러나 판단을 명하신 그리스도께서 비판하지 말라고도 하셨으니 모순이 되지 않으려면 판단과 비판이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판단과 비판의 각기 다른 정의를 깨달으면 비판은 멈추되 판단은 계속하므로 자신과 공동체의 거룩을 유지할 수 있다.
우선 판단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한 몸으로 모이는 상황에서 깨달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거룩하고 정결한 공동체와 함께하는 한 지체가 간음을 범했을 때 그 영혼을 앞에 두고 다른 지체들과 함께 있을 때 오직 말씀을 편다. 그리고 간음한 그 영혼에게 이르길 그가 아버지께로 범죄한 것이요 또한 거룩한 지체로서도 범죄하였으니 돌이키라는 말씀을 명한다. 이처럼 오로지 말씀으로 행하는 그것은 판단이 되는 것이다.
이때 말씀으로 판단을 받은 자가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거룩을 이루기 위해 돌이킬 때에는 모든 지체들이 그를 따뜻하게 받아준다. 그리하여 돌이킨 자는 다른 자들과 함께 그 생명의 길을 계속해 걸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판단을 받고도 돌이키지 아니할 때에는 두 번 세 번 다시 말씀으로 그에게 명한다. 하지만 말씀으로 판단을 받았음에도 끝까지 돌이키지 아니하는 자는 한 몸에서 그를 내어 쫓는 것이 옳음은 적은 누룩이라도 온 덩어리에 퍼지기 때문이다.
반면 비판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니 공동체의 한 지체가 똑같은 간음의 죄를 범했다. 이때 말씀으로도 그를 명하여 돌이키라고 똑같이 말하되 범죄한 것에 대하여 그 영혼에게 어떠한 이유나 어떠한 말이나 어떠한 행위를 통해 그의 범죄한 모습을 가릴 수 있도록 말한다면 그것은 비판이다. 또한 그에게 말하길 범죄하게 된 이유를 대라고 하는 것도 역시 비판이되 간음한 자가 간음한 자에게 말씀이 이러하니 돌이키라고 하는 것은 세상말로 내로남불이니 곧 바리새인의 비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제자들에게 계시를 주실 때도 역시 비판치 말라고 명하셨다. 그러므로 거룩한 공동체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그런 비판적인 말들은 조금도 들을 필요가 없다. 사람은 사람의 말과 생각과 의와 주장을 듣고 의와 생명에 이르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말씀에 순종하므로 이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과 타협하기보다 사람과 타협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언제든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맞추는 자는 어떻게 사람들을 판단할 수 있냐고 생각하되 판단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요 말씀이다. 또한 말씀으로 판단을 받은 그 영혼을 그의 안에서 살피시는 분이 계시니 그 영혼의 마음의 판단은 오직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내리실 것이요 그리하여 한 몸에 거하는 자들은 오로지 비판이 아닌 판단만을 하는 것이 옳다. 그래야 자신도 원수의 선악에 의해 간음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그것을 보며 교훈을 삼을 것이요 또한 그 죄가 거룩한 공동체에서 더 이상 썩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자하는 마음이 없거나 포기한 영혼들은 자기의 의와 생각에서 돌이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아니하며 또한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과 타협하는 데서도 돌이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그런 자들에게는 말씀의 깨달음을 허락하시지 아니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오히려 자기의 의와 깨닫지 못하는 말씀들을 합해 믿는 자들끼리 서로 거부하며 비판하며 싸운다.
예를 들어 어떤 자는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니 자신은 판단하지 않겠다느니 완전한 사람이 없다느니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들을 하며 범죄한 그 영혼에게 명하여 돌이키라는 말조차 전하지 못한다. 게다가 어떨 때는 가장 의롭게 보이는 말로 즉 모든 심판은 하나님이 행하시니 우리는 무조건 용서와 사랑을 베풀고 그저 기도하자며 말씀의 판단을 말씀의 비판으로 바꾸므로 자신이 아버지보다 더 의로운 자리에 앉는다.
반대로 어떤 자는 판단의 정의를 모르니 판단하거나 끊어내라는 그 말씀들을 가지고 범죄한 영혼들을 판단하되 아직까지 그 죄를 끊어내지 못한 자신의 생각과 의와 감정과 경험으로 판단한다. 특히 자신의 생각과 관점이 다른 자들에 대해서는 더욱더 강하게 판단하되 늘 거룩하신 말씀들을 찾아 이용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심판보좌에 앉아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는 그 행위를 육에서 나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까지 멈추지 아니한다.
그런데 이렇게 판단의 의미를 모르고 말씀으로 판단하기를 즐기는 자들이 만일 권위를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사람의 피를 흘리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역사가운데서 구약의 제사장으로부터 수많은 자들이 자신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며 칼로 찌르거나 불로 태워 다른 믿는 자들의 피를 흘리고 자신도 그 사망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그것이 참으로 간편해졌으니 교만한 바리새인들의 자손들은 키보드와 마우스로 이 순간에도 그 피 흘림을 멈추지 않고 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계시며 오직 홀로 한 분 신으로서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아버지의 품에 함께 계셨으니 완전한 하나님이셨다. 동시에 에덴에서 둘째사람의 육과 마음을 지으시고 그 깨끗한 마음 안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신 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자신의 십자가로 거룩케 하여 아버지의 거룩한 자녀가 되는 그 부활의 생명을 주시고자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으니 완전한 사람이셨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그 기쁘신 뜻을 이루는 십자가의 길이 그리스도께 참으로 고난스러운 것이었음은 아버지의 품에서 낳으신 아들이시라도 연약한 육을 입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의 길을 자기 혼자서 걷거나 혹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걷지 않으시고 오직 창세전에 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해 그 십자가의 길을 정하신 아버지의 계획에 따르며 자신의 안에 계신 거룩하신 영의 인도하심에 이끌려 그 순종의 길을 끝까지 걸어 결국에는 부활로 온전하게 되셨다.
그런데 초대교회 시대와 모든 일곱 교회시대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 고난의 길을 걸은 자들이 있었다. 또한 이 마지막 때에도 있다. 그러므로 그 고난의 길을 걸으신 그리스도를 인도하셨던 거룩하신 영께서는 지금도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들을 인도하시며 도우신다.
하지만 그들이 비록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며 아버지의 그 기쁘신 뜻에 이르고자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처럼 연약한 육을 입고 있다. 그러므로 그 연약함으로 인하여 그들은 오늘 영육간의 일들을 염려하며 그 십자가의 길에서 내일 있을 일들도 염려한다. 그러나 십자가에 담긴 세 면의 비밀을 깨닫는 자는 모든 염려를 이기고 끝까지 그 마지막으로 나갈 수 있다.
우선 그리스도께서는 세 개의 십자가에서 가운데에 달리셨으니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요 이 세상을 위한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그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셋째하늘의 온전케 된 의로운 백성이나 혹은 자신의 거룩한 자녀들로 삼으신다.
한편 오른편의 강도가 달렸던 것은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들을 위한 십자가이니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후 십자가의 첫사랑을 잊지 않고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거룩에 이르고자 하는 자들도 오로지 그 십자가의 희생만을 생각하며 나아가야 한다.
반면 왼편의 십자가는 오로지 이 세상의 십자가이니 그 십자가를 지는 자는 사망에 이를 것이요 오직 원수와 함께 영원한 고통가운데 거하게 된다. 그러므로 누가 그 세상의 십자가를 지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가 사람의 눈에는 매우 영광스럽게 보이니 많은 자들이 그 길로 가며 또한 사람은 누구나 오른쪽이나 왼쪽의 십자가를 지게 되어 있으나 많은 자들이 그것을 진다.
하지만 거룩하신 영께서는 거룩에 이르기 원하는 영혼들을 인도하시며 도우시는 보혜사이시니 고난과 영광으로 향하는 그 길을 걷는 자들이 늘 그리스도의 오른편에 있기를 원하신다. 또한 마지막에 그 십자가의 희생만을 생각하며 나가기를 원하시되 아버지께서 이미 모든 것을 예비하셨으니 오늘의 염려를 하지 말고 내일의 은혜를 구하길 원하신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는 것이 오늘의 걱정을 이기며 내일의 은혜 즉 그 기쁘신 뜻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육의 연약함과 믿음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오늘의 염려를 이기지 못하며 내일 있을 일들을 자신이 계획하는 자들이 있다. 하지만 깨달아야 할 것은 사람은 그 길에서 내일 있을 일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내일 일을 계획하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의 일을 사람인 자신이 계획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요 잘못된 것이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사람은 오로지 아버지의 은혜만을 구하되 오늘의 은혜를 구하지 말고 내일의 그 은혜를 구하는 것이 옳다.
또한 어린아이는 오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로 갈까를 고민하지 아니함은 이미 계획을 세워놓은 그의 부모로 인함이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는 오히려 ‘내가 내일 무엇이 되겠노라. 미래에 무엇을 하겠노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자들은 매일 매일 그날의 은혜를 구하되 아버지를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거룩하신 영께로 이끌리는 자들은 내일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그 꿈을 위하여 거룩에 애쓰며 오로지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그 은혜만을 구한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누구든지 오른쪽의 십자가를 지고 그 꿈을 품은 자들에게는 늘 은혜를 베푸시니 그 고난의 길이 오히려 즐겁고 형통하게 된다. 또한 자기의 마음도 원하되 연약한 육도 그것을 자원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음도 육도 자신이 원하는 그 고난의 길을 즐겁고 형통하게 걸은 자들이 자신의 안에 있는 원수의 죄와 이 세상을 이기므로 오늘 이 땅에서 그의 몸이 성전이 되어 마음의 천국을 이루고 내일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 거룩한 육체의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들 가운데 첫사랑은 잊지 않고 있으나 참으로 육의 연약함을 이기지 못하며 또한 믿음이 없다 하는 자들은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씀의 능력과 십자가의 능력을 통해 믿음을 키우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되 오직 한 몸으로 나아가고자 애씀이 옳음은 거룩하고 약한 다른 지체들의 도움을 받아 함께 그 고난과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어떤 악한 왕이 둥근 나라를 다스리며 자신의 욕심과 영광을 취했고 백성들은 그 불의한 왕이 하는 말을 따라 행했다. 예를 들어 법관들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권위와 처지를 저울 위에 올려놓았으니 힘있는 자와 자신이 아는 자 앞에서는 저울이 기울어지되 힘없는 백성들 앞에서는 조금도 기울어지지 않았다. 법을 만드는 자들은 자기에게 유익을 가져오는 법은 재빨리 처리했으나 백성들을 위한 것은 느리게 만들며 자기의 영광을 구했다. 법대로 행하는 자들은 백성을 위한 봉사가 아니요 매달 백성에게 받는 돈에만 마음이 있었다. 백성들은 이곳 저곳을 걸어 다니며 오직 육을 즐길 수 있는 돈과 음행 두 가지만 생각했다. 그러므로 둥근 나라의 곳곳에 불의와 죄악이 넘치고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깨닫고 있었지만 대중은 불의와 죄악에 순응하며 돈과 음행을 따라다녔고 어떤 자들은 세상 어디에도 거룩한 곳이 없다며 의심했다. 그러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다른 나라로 가고 싶어하는 사람도 소수지만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먼 나라의 왕자가 정의와 사랑과 공평과 평안을 가지고 찾아왔으니 그의 나라에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없었으며 불의와 죄와 헤어짐과 죽음과 슬픔과 아픔도 없었다. 그 왕자는 둥근 나라의 백성들에게 말하길 누구든지 자신의 나라로 가고 싶은 사람들은 다 데려가겠다고 했다. 이에 사람들은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하냐고 묻자 왕자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내 아버지의 나라에는 거할 곳이 많이 있으니 그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필요하되 그곳은 불의와 죄가 전혀 없는 나라이므로 나의 아버지처럼 거룩하게 되기를 구하여라. 그러면 나는 그의 발에 종이와 나무로 빛을 비추어주겠으니 나를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그 길에서 거룩에 이를 것이요 나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백성이 아닌 나와 같은 왕자와 공주로서 다스리겠고 이 불의하고 죄악된 나라는 마지막에 멸망의 심판을 받겠노라.” 왕자의 말을 듣자 그 나라에서 개를 키우는 12명과 돼지를 치던 7명이 왕자를 따르기 위해 둥근 나라에서 나왔고 왕자는 약속대로 나무와 종이로 그 난민들의 발에 빛을 비추어주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국 그 길에서 거룩하게 되어 왕들로서 자기의 영광을 가지고 아들의 나라로 들어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둥근 나라에 불의와 죄가 있음을 알아도 그냥 그렇게 사는 게 좋았으니 그것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그곳에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셋째하늘에서 자기의 욕심과 영광을 위해 선악을 창조하고도 끝까지 돌이키지 않았기에 아버지께로 쫓김을 당한 원수는 이 세상의 공중권세를 잡고 돈과 외모로 사람들과 이 세상을 불의하고 악하게 이끌어간다. 그러나 거듭난 후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나라와 거룩을 구하는 자들은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어 이 땅을 에덴동산과 같이 회복한 후 천 년 동안 왕으로서 다스리실 때 그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그 광활한 땅을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린다. 또한 천국의 끝에 하늘에서 내리는 유황불로 땅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며 세상이 멸망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라 셋째하늘로 올라가 아들과 함께 아버지의 영원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그 영광을 허락 받는다.
그러나 그전에는 그가 거룩한 자녀 됨의 약속을 믿고 그 영광의 자유를 소망하며 오직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의 영원한 나라에 있는 것들과 또한 아버지의 거룩하심만을 사모하는 자여야 된다. 그리고 그 마음이 진실하다면 이 불의하고 죄악된 세상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의 생각에서 돌이키고 세상에서 나와 그리스도를 따르며 말씀에 순종하므로 자신을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가꾸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도 아들을 통해 주신 그 모든 약속들을 천년왕국과 또한 셋째하늘에서도 영원토록 지키신다.
그러나 원수가 넣어주는 생각을 따라 세상을 이끌어 가는 자들과 중생이 없는 이방인들과 거듭남이 있어도 이방인들처럼 썩어질 육의 욕심과 헛된 세상의 영광을 구하며 사는 자들은 말씀의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그리고 깨닫지 못하니 이 모든 것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모른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모든 것이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갈 이 세상에 있다고 생각하며 행하고 있다. 만일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상에서 돌이키지 않는 자들은 육을 입었을 때는 이 세상을 즐기고 육을 벗었을 때는 아버지의 나라를 즐기자는 마음을 품은 자들이니 아버지께서는 그 거짓된 자들이 육을 벗었을 때 그들이 원하던 대로 영원한 형벌이나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으로 보내주신다.
이처럼 원수는 이 세상에서 당장 얻을 수 있는 돈과 명예가 바로 장차 얻게 될 그 모든 것이라는 믿음을 넣어준다. 이때 첫사랑을 잊고 아버지께서 아들의 십자가를 통해 주신 그 은혜의 약속과 소망을 버리므로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과 그 거룩한 육체를 포기한 영혼들은 거짓선지자들의 설교가 거짓임을 알면서도 속아준다. 그리하여 이 마지막 때에 어리석은 자들과 거짓된 자들은 무엇이든지 이 땅에서 받고자 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오히려 이 말씀을 이용해 끝까지 자기의 손을 원수를 향하여 펴게 되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아버지께서는 태초에 아들을 낳으시고 귀한 이름을 찾아 붙여주셨으니 태초에 태어난 그 아들의 이름이 바로 예수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름을 지을 때 그 안에 의미를 두고 또한 그 이름대로 되기를 원한다. 마찬가지로 아버지께서도 그 이름의 안에 세 가지 의미를 두셨으니 한가지 비유를 통해 그 중에 첫 번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한 나라의 왕이 자신이 거하고 있는 아름다운 정원에 깨끗한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포도나무를 심고 싶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자기가 낳고 이름을 지어준 자기의 아들을 통해 이루기 원했다. 그러므로 그 왕은 자기의 마음을 알고 믿음직한 아들에게 포도원을 만들어서 가꾸라고 했다. 또한 포도원 만드는 일과 포도나무 가꾸는 일을 아주 잘하는 충성스런 친구를 붙여주었다. 이에 그 아들은 그 충성스런 친구와 함께 자기의 밑에 있는 다른 종들에게 명하여 포도원을 만들었으며 그 안에다 많은 포도나무들을 심었다. 그리고 나서 그 아들과 그 친구는 날마다 땀을 흘리며 늘 깨끗한 물을 주고 때로는 가지를 치고 나쁜 벌레들을 잡아내고 필요할 때 약도 주었다. 그렇게 한 3년이 지나자 자기의 온 마음과 몸과 정성과 뜻을 다한 그 수고의 보람으로 인하여 드디어 포도나무들이 좋은 열매를 조금씩 맺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떤 나무들은 신 열매를 맺었다. 하지만 그 왕은 일년을 더 기다리라고 했으니 그 아들과 충성스런 친구는 계속해 자기의 온 마음과 몸을 다하여 모든 포도나무들을 공평하게 가꾸었다. 그러나 일년이 더 지나자 이번에도 어떤 것은 좋은 열매를 맺고 어떤 것은 신 것을 맺었다. 이에 그 왕은 이번에도 일년을 더 기다려보라고 했으나 그렇게 7년이 되었을 때는 드디어 추수를 명했다. 그러므로 그 아들과 충성스런 친구는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들은 뽑아서 왕궁으로 가져가 아름다운 정원에다 옮겨 심었다. 그리고 그 좋은 열매들은 왕에게 바쳤다. 그러나 신 열매만 맺은 나쁜 포도나무들은 모두다 뽑아서 아궁이에 넣고 불에 태웠다.
이와 같이 예수라는 그 이름 하나로 그 영원한 셋째 하늘과 거룩한 자들의 안식처가 있는 둘째 하늘과 이 첫째 하늘이 창조되었다. 또한 그 안의 모든 것들도 역시 그 이름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그 목적을 다 이루신 후에는 둘째 하늘과 원수를 가둔 이 첫째 하늘과 또한 그 이름으로 창조된 모든 것들이 역시 그 이름으로 다 멸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창조자의 이름을 아는 자는 태초에 그 아들을 낳으시고 이름을 지어주신 그 아버지도 당연히 알고 있다. 또한 아버지와 아들에게로부터 나오신 그 거룩하신 영도 당연히 알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아는 자는 아버지의 그 창조목적을 아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원수의 그 선악과 싸우며 아버지의 그 뜻만을 이루어간다.
그러나 반대로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아버지도 모르고 거룩하신 영도 모르니 그들은 가장 먼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보면서도 셋째 하늘과 둘째 하늘과 이 첫째 하늘을 아버지의 뜻과 계획에 따라 창조하신 예수그리스도를 거부한다. 또한 아버지께로 생명의 은혜를 받아 쉬지 않고 숨을 쉬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도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아버지를 알고자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멀리 간다. 그러면서 나중에는 자신의 안에 영원히 살 수 있는 그 거룩한 영이 있음을 모른척하며 썩어질 육과 사망으로 들어갈 이 세상을 즐기며 불의와 죄를 쌓는 것이다.
그러나 그 창조와 멸망의 이름을 아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과 거룩하신 영께서는 오직 한 목적을 가지고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안다. 또한 그 목적을 다 이루신 후에는 창조하신 것들을 태양으로 다 넣으시고 그 이름을 가진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룬 자녀들과 교회와 백성들을 그 의롭고 거룩한 셋째 하늘로 데려가 그곳에서 영원토록 기쁨과 안식을 누린다는 것도 안다. 그러므로 거듭난 자들 가운데 그 이름의 첫 번째 의미를 아는 사람은 아버지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주신 그 인생의 목적도 아니 이 마지막 때에도 오직 거룩만을 이루어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한 가족이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은 후 빨간 자동차를 타고 사막을 지나다가 기름이 다 떨어졌다. 그런데 가족들이 다 내려서 미는데 한 살도 안 된 아기가 운전대를 붙들고 있었으니 아기는 앞이 보이지 않아 차가 좌우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게다가 뒤에서 미는 가족들도 역시 앞을 보지 않고 오로지 땅과 사막만을 바라보니 차가 앞으로 곧장 가고 있는 줄 알고 계속 열심히 밀었다. 그렇게 온 가족이 힘들게 차를 밀고 가다 높은 언덕길에 올라가서 밑을 바라보니 사막이 펼쳐져 있는데 오른쪽에는 차를 움직이게 하는 석유가 흐르는 강이 보였고 길의 양쪽으로 푸른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으나 입구가 안 보였다. 게다가 사람들도 그 길로 가기를 꺼렸으니 하얀 자동차 일곱 대만 그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반대로 왼쪽에는 눈과 몸을 즐겁게 해주는 유흥가가 있었고 길이 넓었으며 3개의 주유소가 있었지만 나무는 다 시들어 있었다. 하지만 검은 자동차들뿐만 아니라 빨간 자동차를 탄 다른 가족들도 그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운전대를 잡은 아기가 말하길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든지 반드시 왼쪽 길로 가야 한다고 했고 다른 가족들도 그 길을 선택했다. 결국 그 가족도 검은 자동차를 탄 가족들처럼 그 길로 들어가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었다. 그러나 그것이 물이라 겨우 6미터를 달리다 서버렸고 그들은 또다시 내려서 오직 땅과 사막만 보면서 다음 주유소까지 힘들게 6킬로를 밀었다. 그러나 다음 주유소에서 넣은 것도 물이니 그들은 다른 가족들처럼 개고생을 하면서 계속 밀고 갔다. 그런데 그 길은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보면 사람이 깨닫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왼쪽으로 벗어난 길임을 알 수 있었지만 멍하게 있으면 그것이 안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길의 끝에 사망이란 푯말이 붙어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 그곳으로 떨어지면 영원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면 오른쪽 길은 그 석유의 강이 어느 지점에서부터는 바닥까지 훤하게 보이는 맑은 생수의 강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길의 마지막에는 영생이란 푯말이 있었고 그곳을 지나 올라가면 참으로 맑은 호수에서 기쁘고 즐겁게 안식하며 즐기는 낙원이 있었다. 그러므로 빨간 자동차를 밀면서 왼쪽 길을 힘들게 걷는 가족들 가운데 천에 하나 정도는 아주 드물게 두려움을 이기고 오른쪽 길로 돌이키는 가족도 있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소원하니 누구나 다 그리스도와 함께 낙원에 거하기를 원하되 낙원으로 가는 그 길에는 육과 혼의 고난이 있다. 하지만 육적으로는 비록 고생스런 그 십자가의 길이 복된 이유는 늘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가운데서 너와 네 집이 그 생명의 길을 함께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수가 힘의 논리로 이끌어가는 이 어두운 세상에다 내놓은 길은 오직 썩어질 육과 헛된 세상을 즐기는 길이요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한 사망으로 부활하는 길이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처음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공평하게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선택해 걸을 수 있도록 거듭남으로 그 길을 갈라놓으시되 그 후로는 생명의 길로 온 영혼들이 그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어떤 가족이든지 중생한 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둘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해 걸을 수 있으나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은 진리로 거룩해져 몸과 마음에 아버지께서 거하시므로 천국이 임하는 그 거룩한 부활의 생명을 원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비록 의식주에 대한 걱정과 자기의 생각과 의에서 돌이키는 두려움이 있지만 아버지께서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시며 친히 거룩하게 하신다는 믿음으로 그것들을 이기고 그 생명의 길을 걷되 그 길에서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영혼의 안식을 얻고 또한 그 영광의 자유를 소망한다.
반면 원수는 사람들에게 참된 것을 주지 못하니 항상 거짓된 것을 보여주며 들려주며 사람들이 사망으로 들어가는 이 세상의 길을 끝까지 걷도록 돕는다. 그러므로 그 사망의 길을 걷는 자들은 이방인이든 거듭난 자든 육의 기쁨은 순간순간 얻을 수 있어도 진리가 없으니 마음은 공허하고 심판이 다가오니 영혼은 두렵다. 게다가 원수는 썩어질 육과 세상의 영광을 주었다 뺏었다 하니 사망의 길을 걷는 자들은 염려와 고통의 나날을 보내다 마지막에는 낙원이 아닌 사망으로 들어가 영원한 고통에 처하되 영원한 부끄러움이나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으로 들어가는 자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난 자들 중 적지 않은 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며 생명의 길을 걷기보다는 세상을 따라 사망의 길로 가는 것은 참으로 그 가족들 가운데서 가장 어리석고 육적인 자가 다른 모든 가족들의 방향을 잡고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가족은 십자가의 피를 얻고도 거룩을 거부하고 이방인들처럼 육과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길로 갈 수밖에 없으니 이 세상에서의 꿈과 목표와 희망을 정해 그 사망의 길을 개고생하면서 지금까지 달려왔고 오늘도 달리고 있고 내일도 달릴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먹고 살아야지’라는 말을 버릇처럼 내뱉되 이방인은 정작 사람은 먹고 마시며 죽음으로 점점 가까이 가고 있다는 것과 사람이 왜 사는지도 당연히 모르고 있으니 이방인들이 어리석은 것이요 아님 약속을 얻고도 이방인처럼 사는 자들이 어리석은 것이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남자는 아버지가 되기 전에 준비하는 일들이 몇 가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름을 붙여주고 그 이름을 부르기 위해 이름을 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자기자식을 낳기 전 이곳 저곳을 다니며 이것 저것을 뒤적이며 귀한 이름을 따서 지어놓았다가 태어나면 그 준비한 것을 붙여주고는 얼굴을 가까이하여‘아무개야’하며 기쁘게 부른다.
마찬가지로 셋째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태초에 자기의 자식을 낳으실 때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의 모든 곳을 다 뒤지시며 귀한 이름을 찾으셨으니 그 이름을 바로 예수라 지으시고 아들을 낳으셨다. 그리고 나서 그 이름을 주셨으니 그때에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하시며 기뻐하셨다.
그 후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품에서 낳으신 그 아들에게 권위를 주시고 그 아들을 통하여 종들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 종들을 통하여 셋째 하늘과 둘째 하늘과 이 첫째 하늘을 창조하셨으며 사람들도 창조하셨다. 즉 태초에 세우신 구원과 심판의 모든 계획과 그 뜻을 그 귀한 이름을 가진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가고 계시는 것이다.
사람은 또한 자기의 자식을 위하여 이름을 붙이되 그 아이가 자라나 나중에 그 이름의 뜻대로 되기를 소원한다. 하지만 그 소원은 아이에 대한 소원만이 아니요 사실은 자신의 마음도 그것을 원한다. 즉 아비가 돈을 원하는 자는 자식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이름을 높은 자리를 원하는 자는 자식이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이름을 명예를 원하는 자는 자식이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이름을 갖다 붙이고는 자식이 그것을 이루도록 자신을 희생해 밀어준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이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을 불로 멸하시기 전에 이 세상을 구원코자 하신다. 그리고 그 귀한 이름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생명 주시는 그 일을 자신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비록 누구나 죄와 허물이 있으나 누구든지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이름을 부르는 자는 이 마지막 때에도 거듭남의 은혜를 얻어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을 얻고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그 거룩한 육체의 생명도 얻고 있다.
이처럼 아버지의 아들은 처음부터 그 이름을 예수라 하였으며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권위를 주셨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종들은 그때도 예수의 그 이름에는 순복했으며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그리하여 말씀에 순종한 종들은 그 의롭고 거룩한 셋째 하늘로 들어가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누린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과 교만을 이루고자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선악의 죄를 창조한 그 원수는 오히려 셋째 하늘에서도 이 첫째 하늘로 쫓겨났다.
아버지께서는 또한2천년 전에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실 때도 사람들이 거룩의 믿음을 가지고 그 이름을 그대로 부르기 원하셨다. 그러므로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붙이라고 그 육의 아비 될 영혼에게 종을 통해 알려주셨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그 이름을 진실하게 부르는 자는 참으로 아버지의 종들이 말씀에 순종하는 그를 돕고 마지막 때는 그 귀한 이름을 가진 아들과 같은 생명을 얻어 영원한 셋째 하늘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그 이름을 처음부터 거짓되게 부르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귀에는 예수 믿으면 복 받고 부자 되고 병 고친다라는 거짓선지자들의 말들이 아름답게 들린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죄의 사함을 얻지 못한 그들이 어찌 유황불 못의 가장 뜨거운 곳으로 들어가는 거짓선지자를 따라 그 사망으로 들어가지 않으리요?
한편 처음 만날 때는 그 이름을 진실하게 부르므로 거듭남의 은혜를 얻었으나 중간에 첫사랑을 잃고 육과 세상에 마음을 빼앗긴 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중간에 거짓과 행위로 돌아선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은혜를 받았으니 열심히 일해서 상급을 얻자는 삯꾼의 그 말이 아름답게 들린다. 그러므로 거룩을 이루지 못한 그들이 어찌 그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리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아버지께서는 생명이 있는 흙과 물로 동물의 육과 육신의 혼을 창조하시고 오직 한 번의 삶을 주셨으나 거룩한 영은 주시지 아니하셨다. 그러므로 동물도 생각을 하며 먹고 마시고 배설하면서 한 평생 육신적인 활동을 하다 아버지께서 정하신 수명을 다하면 육과 혼이 다시금 자신이 왔던 흙과 물로 돌아가니 영원히 살지는 못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은 욕심과 교만을 품고 선악을 창조한 후 끝까지 돌이키지 못하여 셋째하늘에서 쫓겨난 원수의 말과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우주가 우주를 낳았으며 자연이 곧 하나님이요 산의 정상은 하나라도 거룩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라고 주장하며 모든 생명은 삶과 죽음을 반복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그런 무질서하고 불완전하고 우연한 창조계획을 세우시지 아니하셨으니 동물에게도 사람에게도 육의 죽음을 오직 한 번으로 정하셨다.
한편 아버지께서는 아담도 깨끗한 육과 혼으로 지으셨으나 짐승과는 달리 그의 코를 통해 생기를 불어넣어주셨다. 즉 죄가 없이 선하게 지음을 받은 둘째사람은 혼과 더불어 거룩한 영이 있기에 인격체요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영혼은 아버지께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육체를 가진 인격체와 형체를 가진 인격체(천사)에게는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귀한 것이 바로 자신의 영원한 생명이다. 그리하여 중생 후 이것을 깨달은 영혼들이 자신의 썩어질 몸을 이용해 마음과 영혼의 거룩을 이루고자 자신의 생각에서 돌이키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진리에 순종함은 한 번 정해진 그 육의 죽음 후에 아버지께로 얻게 될 그 거룩한 몸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중에 자기의 영혼이 입고 영원히 살게 될 그 새 옷을 위해 자기의 안에 있는 영혼을 염려하며 거룩을 이루어가기보다 오히려 오늘의 의복을 염려하며 그 헌 옷을 아름답게 치장하는데 자기의 온 맘과 정성을 다한다. 또한 진주는 값없는 돌로 여겨서 버려버리고 대신 헌 옷을 가꿀 수 있는 돌을 취해 깊은 곳에다 숨겨놓는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자들은 소중한 영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짐승과 같이 여겨 한 평생 육만 돌보다 목숨을 마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거룩을 이루시고자 사람과 같은 연약한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며 또한 십자가에서 그 옷을 찢어 거룩을 완성하셨으니 거듭난 자들이 약속으로 받은 그 은혜에 감사하며 이제는 순례자의 그 길을 걸어 그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거하는 자들이 자신은 지금 나그네의 길을 걷고 있으며 이 세상에 순례자로서 잠시 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는 말씀을 베푸신 후 이제는 인격체들이 이성을 가지고 더 깊이 생각하고 깨달은 후 돌에 간 마음을 돌이키도록 이런 뜻의 말씀을 허락하셨다.
사람들은 집안에 있다 외출할 때에 자기가 만나게 될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앞모습은 상당히 신경을 쓰며 그가 이리저리 거울을 보면서 꾸미지만 뒷모습은 예민하게 여기지 아니하며 별로 잘 꾸미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저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 간단히 털거나 쓰다듬고 마친다. 하지만 사람은 앞모습만을 보고는 판단할 수 없으니 그의 뒷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성품이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썩어가는 몸만 신경 쓰고 영혼의 생명은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자들은 아버지께서 그 들판에 베풀어두신 지혜로 아름답게 자라나는 백합화를 보고도 그 영광을 깨닫지 못하니 일만 악의 뿌리에서 나오는 그 썩어질 열매를 더 많이 맺고 싶어하되 두 장의 팬티를 껴입는 자와 하루에 네 끼를 먹는 자와 이 집에서 자다 일어나 새벽에 깨어 저 집으로 옮겨가 잠자는 자는 이 세상에 한 명도 없다. 또한 이 세상의 영광을 얻었다 곧 잃어버리는 자들을 보며 세상의 영광이 헛되고 헛된 것임을 알아도 잠시 후 잃을 것을 끝까지 좇아가다 귀한 생을 마친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입히시니 거듭나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이 될 그 약속을 받은 영혼들을 더더욱 입히시지 아니하시겠는가? 그러나 들에 핀 백합화를 아무리 보아도 보지 못하고 아무리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은 거룩에 애쓸 수 있는 그 소중한 병기를 이용해 오히려 육과 세상을 좇아가니 인침을 받았어도 자신을 들풀처럼 여기는 자들은 거룩에 이르도록 주신 오직 한 번뿐인 인생을 허비해버린다. 그리하여 오직 자기의 의복만을 염려하며 가꾸는 동안 자기의 뒷모습은 전혀 꾸미지 않는 자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뒷모습만이 아니요 그가 꾸몄던 앞모습까지도 서서히 더럽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할례 받은 유대인과 거듭난 이방인에게는 공히 생명나무의 열매를 언약으로 주셨으니 선한 양심을 끝까지 간직한 영혼들은 단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소중한 육체를 눈에 안 보이는 자기의 뒷모습을 꾸미는 병기로 이용한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뒷모습도 점점 더 거룩해지며 인자의 재림 전까지 그의 온 영과 혼과 몸이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으로 완성된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인자의 살과 피를 의지하며 진리에 순종해 거룩을 이룬 자가 잠시 입고 있던 그 헌 옷을 벗고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섰을 때에 그 영광스런 하얀 새 옷으로 갈아 입혀주시는 것이니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가장 먼저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라!
이처럼 아버지께서는 모든 영혼들의 앞모습과 뒷모습을 공평하게 꾸미시어 이 세상에 보내셨으되 그가 그 깨끗한 모습으로 나갔다가 비록 원수의 죄와 세상으로 인하여 잠시 더럽혀졌다 할지라도 자신의 마음과 믿음을 아버지의 뜻에 두고 거룩에 애를 써 다시금 깨끗하게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고 가며 거룩함과 정결함에 애쓰는 자들은 은혜를 받은 영혼들이요 교만한 자들은 행여 육과 세상을 바라지 않을지라도 아들을 통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의를 따르며 인간의 노력과 수행으로 거룩을 이루고자 하니 은혜를 받은 자 외에는 많은 자들이 돌아갈 때는 앞모습과 뒷모습이 함께 더러워진 상태로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서게 된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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