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肉鐸 - 배한봉

肉鐸 

 

- 배한봉

 

새벽 어판장 어선에서 막 쏱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

 

육탁肉鐸 같다

 

더 이상 칠 것이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육탁을 치는 힘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바닥 치면서 알았다

 

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다 제 세상이었던 때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덤 속 겉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게 스며들었다

 

아직도 바다 냄새 싱싱한,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닫을 수 없는 작고 둥근 창문

 

늘 열려 있어서 눈물 고일 시간도 없었으리라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짜게 만들었으리라

 

누군가를 오래 기다린 사람의 집 창문도 저렇게 늘 열려서 불빛을 흘릴 것이다

 

지하도 역 대합실에서 칠 바닥도 없이 하얗게 소금에 절이는 악몽을 꾸다 잠 깬

 

그의 작고 둥근 창문도 소금보다 눈부신 그 불빛 그리워할 것이다

 

집에 도착하면 캄캄한 방문을 열고

 

나보다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부터 마중할 새끼들 같은, 새끼들 눈빛 같은

 

 



무엇을 두드리는지,

왜 두드리는지는 중요치 않다.

 

두드린다고 무엇이 나오던가.

두드린다고 의문이 풀리던가.

 

온 몸으로 두드리는 그 치열한 행위만이 남을 뿐.

 

세상은 그 무엇으로 이루어지지도 않고,

그 이유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두드리는 행위만이 살아

세상을 이룬다.

 

그 행위 뒤에 무엇이 나오지 않을 수도,

그 행위 뒤에 의문이 풀리지 않을 수도

 

한 솥 매운탕꺼리밖에 되지 않을 지라도...

 

어짜피 몸뚱아리 부지하며 살아가는 인생

육탁 밖에 길이 없다.

 

바다도 제 세상

솥도 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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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연어

 사춘기 시절에 나는 책을 통해서 사랑을 배우고, 세상을 배웠다. 23살 즈음 사랑에 대한 지독한 열병이 식어가는 시기에, 세상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던 시기에 책을 읽고 나서 느끼는 감정에 변화가 왔다. 나는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지만, 오래간만에 만난 사람은 내가 머리카락이 많이 자랐음을 알아채는 것 처럼, 난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아주 간만에  찌릿한 소설책을 한권 읽음으로 인해서 비로소 그 변화를 눈치채게 되었다. 나는 책을 통해서 나의 경험을 반추하면서, 화자의 이야기와 나의 경험을 함께 버무려 질겅질겅 씹고 있었던 것이다.

  변화는 내 몸에 아주 잘 맞는 옷을 입은 것 처럼 편안함을 주었다. 때로 경이롭기도 했다.  화자를 잘 이해할 수 있어서 편안했고, 내 몸속에 흐르는 물줄기와 비슷한 다른 사람의 몸 속에도 흐른다 사실에 경이로웠다. 작가들은  내가 경험했지만 미처 표현하지 못한 그것을 책 위에 유려하게 펼쳐 놓는다. 

 그 유려함에 잔잔히 흐르던 내 안의 물줄기는 갑자기 또 하나의 물살을 만나며 소용돌이 친다. 감정의 파도타기. 희열. 떨림. 문학 작품을 읽는 기쁨!  나는 루이제 린저, 베른하르트 슐링크 만큼이나 글을 잘 쓰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내가 책을 펼쳐들어, 탐독하는 순간에 비로소 작가의 몸에 흐르던 물줄기와 나의 그것이 하나 됨이 체현된다. 책을 정말 맛있게 읽은 후에는, 한명의 독자로써 작품을 완성하는 일에 동참하는 기분이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더 리더』(2009 봄) :

루이제 린저, 『생의 한가운데』(2008 겨울)

아모스 오즈, 『나의 미카엘』(2008 겨울)

오쿠다 히데오, 『남쪽으로 튀어』(2008 가을) 

한강, 『채식주의자』(2008 여름)

최인훈, 『광장』(2008 봄) 

황석영, 『바리데기』(2007 가을)

어반 얄롬,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2007 가을),

박현욱, 『아내가 결혼했다』(2007 가을)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2007 여름),

로맹가리,『유럽의 교육』(2006 겨울),

라우다 에스키벨,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2006 겨울)

에밀 아자르,『자기 앞의 생』(2006 겨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동안의 고독』(2006 가을)

루이스 세뿔베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2006 여름)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2006 여름)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2006 여름)

알베르 까뮈, 『이방인』(2006 여름)

카렐 차페크, 『호르두발』(2004 봄)

카렐 차페크, 『평범한 인생』(2004 가을)

프란츠 카프카, 『변신, 시골의사』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안도현, 『연어』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파트리크 쥐스킨트, 『좀머 씨 이야기』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이만교, 『결혼은 미친짓이다』

 

  그때 그때 물길이 만남는 순간을 기록으로 남겨놓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이제라도 제목이라도 기록할 마음을 먹은 게 다행이다. 차차 독후감을 써 내려 가야겠다. “처음에는 마구 읽기만 하다가 나중에 가서 비로소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메모해 두지 않으면 무엇을 읽고 무엇을 안 읽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더 리더, 195)

 

 

 



Bernhard Schrink, 『Der Vorleser』

한국어판 : 김재혁 옮김,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이레

 

왜일까? 왜 예전엔 아름답던 것이 나중에 돌이켜보면, 단지 그것이 추한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느닷없이 깨지고 마는 것일까? 상대방이 그동안 내내 애인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왜 행복한 결혼 생활의 추억은 망가지고 마는 것일까? 그런 상황 속에서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동안은 행복했는데! 마지막이 고통스러우면 때로는 행복에 대한 기억도 오래가지 못한다. 행복이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 때에만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고통을 잉태한 것들은 반드시 고통스럽게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일까? 의식적인 고통이든, 무의식적인 고통이든 간에? 그러면 무엇이 의식적인 고통이고 무엇이 무의식적인 고통인가?(43)

 

그녀는 진지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샤워실과 침대로 이끌기 전 반 시간가량 그녀에게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어주어야 했다. 이제 나도 샤워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그녀의 집에 올 때 함께 가져온 욕망은 책을 읽어주다 보면 사라지고 말았다. 여러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어느 정도 뚜렷이 드러나고 또 그들에게서 생동감이 느껴지도록 작품을 읽으려면 집중력이 꽤 필요했기 때문이다. 샤워를 하면서 욕망은 다시 살아났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이것이 우리 만남의 의식儀式이 되었다.(49)

 

나는 모든 게 다 내 책임이라고 말했다. 내가 너무 생각이나 조심성 없이 그리고 애정 없이 행동한 것이다. 나는 그녀가 상처받은 것을 이해했다. 또 나 따위가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녀가 상처받지 않은 것도 이해했다. 나는 그녀가 나로 인해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의 행동을 그냥 단순하게 보아 넘길 수는 없었음을 이해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녀가 나로 인해 상처받았음을 고백했을 때 나는 행복했다.(56)

 

모든 사람이 다 그럴까? 나는 젊었을 때 지나치게 자신감을 느끼거나 지나치게 자신 없어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나 자신을 너무 무능력하고 초라하며 보잘것없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스스로 전체적으로 보아 성공했으니 모든 일에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감을 느낄 때는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해결해 내곤 했다. 그러나 더없이 작은 실패 하나도 나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확신시키기에 충분했다. 자신감을 다시 얻는 것은 결코 성공에 따르는 결과가 아니었다. 내가 이룬 것은 나중에 비교해보면 내가 실제로 해낼 수 있다고 기대하거나 남에게 인정을 기대했던 것에 비참할 정도로 못미쳤으며, 내가 그것을 실패로 느끼느냐 성공으로 느끼느냐는 오로지 나의 기분에 달려 있었다.(74)

 

그분도 한 때 감정이 풍부한 청년이었겠지만,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다 보니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감정들이 말라 죽었는지도 모른다.(150)

 

“네가 어렸을 때 엄마가 네게 무엇이 좋은지 너보다 잘 알고 있으면 네가 마구 화내던 것 생각 안 나니? 어린아이들의 경우에도 그런 이야기를 어느 수준까지 하는 게 좋은 건지가 정말 문제겠지. 이것은 철학적인 문제야. 하지만 철학은 어린아이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아. 철학은 아이들 문제를 교육학에 넘겨주었어. 그런데 교육학이 아이들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어. 철학은 아이들을 잊었어.”(152)

 

“하지만 어른들의 경우에는 내가 그들에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좋다고 여기는 것보다 우위에 두려고 하면 절대 안 돼.”(154)

 

“만일 네가 서술한 상황이 그 사람에게 어쩌다가 생긴 것이거나 아니면 유전적인 것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라면, 너는 당연히 행동을 해야 한다. 네가 상대방을 위해 무엇이 좋은 건지 알고 있고 그 사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너는 당연히 그 사람이 그에 대해 눈을 뜨도록 해주어야 한다. 물론 최종 결정은 본인에게 맡겨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해야 해. 그 사람과 직접 말야. 그 사람 등 뒤에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단다.”(154)

 

우리가 말하는 것이 진리인가 아닌가 여부는 우리의 행동에 달려 있기 때문에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186)

 

한나는 펜에 힘을 잔뜩 주어 쓴 것 같았다. 종이 뒷면에까지 글씨 자국이 났기 때문이다. 내 주소 역시 힘을 잔뜩 주어 썼다. 한가운데를 접은 편지지의 아래쪽 면과 위쪽 면에 박힌 글씨 자국을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198)

 

나는 한나의 글씨체를 들여다보면서 그것을 쓰느라고 그녀가 얼마나 많은 힘을 소모하였으며 또 얼마나 투쟁을 해야 했을지 깨달았다. 나는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동시에 나는 그녀가 불쌍했다. 너무나 지연되고 실패한 그녀의 인생이 불쌍했고, 그녀 인생 전체의 지연과 실패가 가엾게 느껴졌다. 어느 누가 제때를 놓쳤을 경우, 어느 누가 무엇을 너무 오랬동안 거부했을 경우, 또 어느 누구에게 무엇이 너무나 오랫동안 거부되었을 경우, 그것이 나중에 가서 설사 힘차게 시작되고 또 환희에 찬 환영을 받는다고 해도, 나는 그것은 이미 때가 너무 늦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너무 늦은’이라는 것은 없고 ‘늦은’이라는 것만 있는 것인가, ‘늦은’ 것이 ‘결코 없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199~200)

 

“나는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런저런 일을 하게 만들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어. 그리고 넌 알 거야. 너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누구도 너한테 해명을 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야. 그렇기 때문에 법정 역시 나한테 해명을 요구할 수 없었어. 하지만 죽은 사람들은 내게 그것을 요구할 수 있어. 그들은 나를 이해하거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법정에 있을 수는 없었지. 하지만 그들이 그곳에 있었다면, 그들은 나를 특히 잘 이해했을 거야. 이곳 교도소에서 그들은 나하고 자주 같이 있었어. 그들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매일 밤 나를 찾아왔어. 재판을 받기 전에는 나는 그들이 나한테 오려고 하면 쫓아버릴 수 있었어.”(210)

 

나는 지난 오랜 세월 우리의 이야기가 정말로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우리의 이야기가 행복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는 뜻은 아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그것이 슬픈 이야기냐 아니면 행복한 이야기냐 하는 물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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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기록

4월 1일 수 맑음

 

영어학원을 등록했다.

Speaking 반 하나와, Teps 반 하나..

Speaking은 요즘 영어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는 동생과 재미삼아...

Teps 재미로 만만하게 봤다가 질퍽거리는 상황을 구제하기 위해서...

영어학원 2개를 오전에 몰아서 다니니

한국의 도시는 정말 징그러운 곳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낀다.  

 

4월 2일 수 맑음

 

영어 수업이 끝나고, 곧장 학교에 갔다.

간만에 학교에 가니 몸 둘 곳이 없더라.

멍한 머리로 텝스 스크립트를 디립다 외웠다. 

 

저녁 때는 생협 회의를 했다. 

간만에 김철규 교수님도 보고, 유림이도 보고, 성희도 보고, 상혁이와 여란씨도 봤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성희가 "우리가 했던 운동은 또 그렇게 순환하는 역사로 남겨지는구나 싶다"고 한 말만 기억에 또렷하다.

역사란 후대에 쓰여지는 것이기에, 다시 되새길 만한 가치가 있는 과거만을 다룬다. 성공이든 실패든... 성희의 말은 우리가 다시 되새길만한 가치가 있는 과거를 겪어왔다는 자평인가.

적지만 사람도 남았고, 아주 작은 흔적도 남았다. 

또 다른 역사의 흐름에 몸을 맡기려면, 여기에 만족해야 한다.

쓸쓸하지만 최선이다.

 

김철규 선생님이 밥을 사주셨다. 밥먹는 동안에 잠깐 웃었다.

바로 안국역에 가서 희망제작소에서 안철수의 SDS를 들었다.

내 인생에 기업가(Entrepreneur)와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이란 새로운 개념이 끼어들었다.

성공하는 기업가가 되기 위해서 나의 강점을 찾아서 그걸 살리란다.

 

4월 3일 금 맑음.

 

성희와 예술의 전당에서 만났다. 카쉬 전을 봤다.

20세기 초 인물들의 성격, 사고, 기분이 한점의 시간을 포착한 카쉬의 스틸사진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다큐멘터리나 글에서 만난 것 이상의 진한 감동이 전해졌다.

신선한 만남이었다.

 

6시즈음 SDS 워크샾을 하러 대방동에 갔다.  

1시간 일찍 도착했다.

아쉽게도 사람들이 주는 감동은 카쉬의 스틸사진의 인물들에 못미쳤다.

성희와 아쉽게 헤어져버린 공허한 기분 때문인가...  

다시 시작해야 할 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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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예술

 

  타인의 고통에 예민해 진다는 건 사랑과 보살핌으로 주변을 물들이기 위한 초석이지만, 그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사람이 너무 많은 이 시대에 무슨 과욕이냐 싶을 수도 있지만, 사실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민감해 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하루 10분 이상씩 돌이켜 볼 여유를 갖고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타인의 아픔을 눈치 챌 수 있다. 사람들은 이를 애써 무시할 뿐이다. 감당하지 못할 아픔들에 버거워지기 싫어서. 이런 식으로 자신의 한계를 긋는 작업을 계속하는 까닭에 사람들은 그 이상을 알기가 어렵다. 그 이상을 실천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영웅이 아닌 이상 '모든'사람의 고통에 민감해질 필요는 없다. 나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내가 손 내밀면 잡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민감해질 필요는 있다. 이러한 노력이 더 넓은 세상, 더 많은 사람에게 뻗어나갈 수 있을 거란 믿음을 가지고. 

 

 타인의 고통을 아는 사람이 그 고통을 어루만져주고, 치유해 주고 싶다면 응당 타인의 고통을 느끼고 있음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날 것으로 표현하기보다 '타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해 주는 것이 상대방에게 더 '필요'하다. 

 

  자신이 느끼는 고통을 상대방이 공감하길 바라지 않는 사람. 공감해 주더라도 표현해 주지 않길 바라는 사람. 또 적극 표현해 주길 바라는 사람. 타인의 고통에 접근하기 위해선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럼 누가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지를 어떻게 알 것인가?  이건 정말 어려운 문제다. 충분한 시간을 나누기, 풍부한 감수성으로 타인의 감정 느끼기, 자기가 느낀 것을 표현해내기... 이런 경험들이 역사적으로 축적된 것이 음악, 미술, 문학, 역사, 철학 즉, 예술과 인문학이다. 예술과 인문학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사람에게 가는 길'을 찾는 이들을 위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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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삶의 태도가 문제다

"공부는 정말 싫어, 난 공부 체질이 아닌가봐."

 

하면서 휴학을 한 친구가 요즘 학술서적을 읽고 있댄다.

 

"공부로 읽는게 아니라 재미로 읽고 있어. 정말 재밌어.

똑같은 학술서적인데, 공부로 읽는게 아니라, 그냥 읽으니까 너무 재밌는거야.

공부할 때는 왜 몰랐나 몰라."

 

이 친구 말을 듣기 전까지만해도 나는 나를 짓누르는 압박감이 무엇인지 몰랐다. 깨달음은 이렇게 우연히, 예기치 않은 곳에서 찾아온다. 이 친구의 주절거림이 나한테는 깨달음의 계기였다.

 

난 그동안 "잘하지 못하는 것을 잘하고 싶은 욕심"과 "재밌어서 저절로 하게 되는 일"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었다. 잘하지 못하는 것을 잘 하려면 고통스러운 노력이 뒤따라야만 한다. 그 고통스러운 노력 끝에 내가 원하는 바를 성취했을 때의 쾌감. 그것은 고통스러운의 기억을 상당히 말소시킨다.  후자는 그 반대의 경우다. 재밌으니까 저절로 업으로 삼고자 하는데, 업으로 삼다 보니 흥미를 잃는다. 그러면 나는 "그건 원래 재미없는데 재밌다고 내가 착각했던 거야"라고 여긴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일은 업으로 삼지 말라"고 말한다. 그것이 업이 되는 순간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일들로 인해 괴로워 지고, 그러면 결국 흥미를 잃고, 인생의 낙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난 이런 식으로 좋아하는 일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실수를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어리석게도...

 

지향하는 바가 같다면 어떤 것이든 내게 주어진 일을 하면 된다고 여겼기에, 수많은 갈등과 번민이 있었다. 이것이 내가 할일인 것 같다가, 저것도 내가 할 일인 것 같고..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아무것도 못 할 것 같고...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것인가. 정답은 없다. 어떤 선택을 하든 마음먹기에 따라서 괴로울 수도 즐거울 수도 있는 것. 궁극적으로 희비를 결정하는 것은 선택을 대하는 인생의 태도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지치지 않고 열심히 할수만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하든 결과는 같을 것이다. 하나만 더 덧붙이면 욕심을 줄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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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낭골

  48기 귀농학교 학생 5명과 나는 ‘새낭골 김태수 선생님을 만나야겠다’는 목적 하나로 어색함을 애써 감춘 채 한차에 몸을 실었다. 9인승 승합차는 구리에서 춘천까지 물길 따라 시원하게 이어진 길을 달렸다. 남이섬, 가평 길 안내판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봄 한철 느긋하게 즐겨볼까 싶어서 알아보았었던 남이섬 자작나무 나무심기, 가평 하이킹, 삼백산 트래킹을 속절없이 떠나보내는 것 같은 기분에 잠시 쓸쓸해졌지만 그 자리를 귀농학교 사람들과 나눈 대화들로 조금씩 메우 나갔다.

 

  춘천에서 볼만하다하는 호수들도 지나치고, 도청 소재지인 도심도 지나 우리가 도착한 곳은 춘천시 사북면 고탄리. 둔덕 위에 콘크리트를 대강 발라 놓은 구불구불한 시골길과 지릿한 냄새. 영락없는 깡시골이없다. 반겨줄 이 없는 그 조그만 마을에서 우린 한참을 헤맸다. 선생님께서 오전에 가족과 나들이를 나가서 아직 돌아오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길을 잘못 들어 후진으로 어렵사리 차를 빼기를 몇 번. 차를 뺄 때마다 둔덕 밑으로 차가 빠질까봐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겨우 흉물스럽게 스러져 가는 폐가들 사이에 단아한 집 한 채를 발견했다. “춘천 귀농지원센터” 현판이 대문 앞에 걸려있었다. 김태수 선생님 댁이었다.

  반시간 정도 지나자 선생님 가족이 도착했다. 이날 선생님 댁을 찾은 손님은 총 11명. 선생님 아내 홍주원 선생님은 손님이 많이 온 걸 보고 놀라셨다. "이렇게 많이 오실줄은 정말 몰랐어요."라면서 부산스레 느릅나무 차를 준비하시는 홍주원 선생님. 손님이 이렇게 많이 찾아오는데도 불구하고 남편이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면서까지 가족들을 위해 시간을 보낸 것을 그제서야 아셨나보다. 내가 “선생님께서 주말엔 꼭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주말에 찾아뵙게 되어서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가족들하고 시간 보낸다고 손님 안맞을 수 있나요. 조절하며 살아야죠."라시면서 함박웃음을 지으신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면서 가족을 위하는 남편의 마음을 알고 감동하셨나보다.

  현장실습을 하기 이전에 한 시간 가량 느릅나무 차를 마시면서 담화를 나눴다. 빨리 실습을 해보고 싶어 조바심을 내는 귀농학교 사람들에게 선생님은 "일만 해서 뭐합니까. 궁금한 건 물어보고 나서 시작하죠."라고 말씀하시며 여유를 부리셨다. 귀농학교 사람들은 실제로 ‘농사짓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농사를 짓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장 궁금한 건 무슨 작물을 심느냐다.

 

  “친환경 농산물로 안정적인 수입을 내려면, 원예작물이나 특용작물처럼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작물이 아니라 항상 먹을 수밖에 없는 그런 농작물로 경쟁력을 가져야 해요. 경기가 안 좋을 때는 원예작물이나 특용작물이 가장 큰 타격을 받습니다. 하지만 기본 작물은 그러는 법이 없죠. 가령 우리나라에서 고추를 안 먹는 집은 없잖아요. 저는 김장철만 되면 고추를 살 수 있냐는 전화를 받습니다. 알음알음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고 고추를 팔다 보면 어느새 다 팔리고 없어요.”

  나는 농장 운영에 관심이 많다. 김태수 선생님께 혼자서 그 많은 작물을 CSA로 감당하는게 힘들지 않으실까? 농가들과 함께 공동으로 CSA를 할  계획은 없으실까? 등등을 여쭈었다. 귀농통문에서도 CSA를 시작하려면 개인보다 여러 농가들이 협동을 하는 것이 훨씬 수월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저의 새낭골 회원들에게 옆집 사람의 생산물을 끼워파는 건 신뢰를 져버리는 일이예요. 우리 회원들은 나를 믿고 회비를 내는 거니까요. 지금 상황에서 제가 농가들과 공동으로 CSA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처음부터 함께 시작하신다면 분이라면 공동으로 CSA를 하는 것을 충분히 고려해 볼 만 하죠. 잘만 되면 훨씬 효율적인 시스템이니까요." 

  점심을 먹으면서 귀농학교 학생분들 사이에서 공동체 이야기가 나왔었다. 학생들은 점심 때 나눈 대화를 떠올렸고, 공동 CSA는 자연스레 공동체 이야기로 흘렀다.

  “귀농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비빌언덕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공동체에서 시작 하는 사람들이 많죠. 그런데 좋은게 좋은거지하고 모인 공동체는 결국에 와해되는 경우가 많아요. 사람들이 남들하고 세밀하게 일을 조정하는 것에 서투르기 때문이죠. 농사의 특성을 고려하면 공동체보다는 홀로 설 수 있는 길을 모색한 후에 품앗이나 두레로 농가들끼리 연대 하는 방식이 나아요. 여러 농가가 협동한다는 것은 노동력을 던다는 점에서 편하긴 하지만, 정확한 원칙 없이는 정말 힘든 일이예요. 처음 시작할 때 운영, 경영에서의 모든 변수를 꼼꼼히 따져보고,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원칙을 세워야 할 거예요.”

 

  여기까지 듣고서 나는 선생님께 조심스레 내가 구상하고 있는 사업 아이템을 말씀 드렸다.

  "CSA를 꾀하는 농가들이 모여 농장주들이 사회적 일자리를 신청하고, 그게 잘 정착이 되면 학교 급식이나 로컬푸드 직판장 등으로 판로를 확대하는 사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순간 김태수 선생님과 홍주원 선생님의 낯빛에 반가운 기색이 스쳤다. 홍주원 선생님은 "춘천에서 그런 걸 계획하고 있어요."라면서 어느새 리플렛을 하나씩 돌리고 계셨다. 놀랍게도 사업단은 내가 생각했던 일과 상당히 비슷한 것들을 계획하고, 추진하고 있었다. 사업명은 이름하여 춘천친환경농산물유통사업단. 춘천시와 노동부의 지원을 받아 춘천소비자생활협동조합, 춘천친환경농업인연합회, 춘천노동복지센터, 춘천시민연대, 춘천여성민우회, 한림대학교 산학협력단이 협력하여 회원제직거래, 유치원·학교 등 지역단체급식에 친환경 농산물공급, 이주여성 다문화 식당과 친환경농산물 조리가공, 지역농업/유통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 사업을 하고 있단다.

  “가장 중요한 건 소비자와 생산자간의 ‘신뢰’예요. 신뢰를 쌓기 위해서 저 같은 농사꾼들도 소비자들을 직접 만나고 있죠. 농민들도 자기가 애써 키운 농작물이 알수 없는 곳으로 팔리기 보다, 자기 지역 사람들이 먹어주길 원해요. 로컬푸드죠. 이게 생협하고 어떻게 다르냐하면 우리는 절대로 전국적인 유통망을 추구하지 않아요. 전국적인 유통망을 만들면 바로 옆집에서 농부의 쌀을 먹고 싶어도 그 쌀이 서울을 찍고 와야 먹을 수 있는 구조가 되거든요. 이런 유통구조는 빨리 깨야 되죠.”

  홍주원 선생님은 다시 귀농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귀농하는 것을 많이 알릴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말도 없이 내려왔는데, 농작물이 많아지자 농산물 팔 때가 되니까 사달라고 연락하기가 영 민망했단다.

  “귀농 잘 하려면 사람농사부터 잘 지어야겠어요.”

  

  라고 귀농학교 학생 선생님 한분이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긍정하는 분위기다. 그러자 여기에 홍주원, 김태수 부부는 한 말씀씩을 덧붙이시면서 1시간 가량의 담화를 마무리 하셨다.

 

  “농산물을 파는 것은 공산품을 파는 것 하고는 확실히 달라요. 우리가 자식처럼 애써 기른 농산물이란 것을 회원들도 알아주셨으면 하는 게 있어요. 아마 회원분들도 우리가 보내는 농산물을 받으면 친정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농산물을 받은 것 같은 마음일 거예요. 회원 중에 제약회사 다니시는 분이 한분 계시는데, 그 분은 매년 우리 가족들에게 약을 한보따리씩 챙겨주시곤 해요. 그런걸 보면 느낄 수가 있죠.”

 “귀농을 시작하려면 머리보다는 몸이 적응하는게 중요해요. 농작물은 생명이잖아요. 생명을 키우는데 뒤따르는 육체적 과정이라는게 만만치 않아요. 농사가 잘 받는 몸이 있는가 하면 농사를 지어 병이 드는 몸도 있잖아요. 저는 농사를 해서 몸이 더욱 좋아졌으니 농사가 체질적으로 맞는거죠. 그럼 이제 몸으로 적응하러 나가 볼까요? ^^”

  그날 작업은 하우스 비닐 벗기기와 계사 울타리 손질이었다. 혼자서는 8시간이 걸려도 못할 일이지만 8명이서 1시간도 안 걸리는 일들이었다. 하우스를 치는 이유는 식물이 비를 맞으면 꼼짝없이 병원균에 감염이 되기 때문이란다. 빗물에는 온갖 병원균이 다 들어있다. 요즘엔 개인이 아무리 친환경을 하고 싶어도 인간이라는 종(種)이 뿌려놓은 업(業) 때문에 하늘이 도와주지 않나보다. 계사는 이제 귀농 1년차의 새내기 농부가 사회적 일자리를 받아 선생님 하우스 한 동을 빌려서 올해부터 시작한단다. 생협과 학교 급식으로 70%의 유통망을 확보한 상태라고 한다.

  

  나는 이동할 때마다 선생님 트럭 옆자리를 고집스럽게 지키며 이것저것 여쭸다. 선생님은 전혀 귀찮은 내색이 없으셨다. 오히려 내가 묻는 것 보다 더 많은 말씀을 해 주시기도 하셨다. 춘천 사업단은 작년에 15명의 사회적 일자리를 신청하여 20명의 실무자가 사업을 운영하고 있고, 인건비 부족분은 생협 등 회원 단체들의 회비로 충당하고 있다고 한다. 올해 사회적기업 인증 신청을 할 것이라 하셨다. 사회적 기업 인증을 받으면 수익금의 30%를 사회에 환원해야 하고 취약계층을 고용해야 할 의무가 생기는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그런 것은 사회적 기업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친환경유통사업단이 다문화 가정이나 장애인들의 추업을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김태수 선생님은 가족과 함께 여유롭고 평화로운 전원생활을 꿈꾸시면서 흙투성이 농부로 다부지게 홀로서기에 성공하셨다. 뭇 사람들이라면 거기에 만족하면서 조용히 지낼 만도 한데 선생님은 선생님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라면 힘 닿는 대로 손을 뻗치시고 계셨다.

 

  “춘천에 다시 오실거죠? 나중에 오면 더 많은 이야기 나누어요.”

  “그럼요. 꼭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

 

  선생님의 말씀만큼 감미로운 음악이 어디 있으랴, 선생님의 사시는 모습처럼 따뜻한 풍광이 어디 있으랴. ㅋㅋㅋ 돌아오는 길에 또 한 번 가평, 남이섬을 지나쳤지만 이번엔 아쉬움이 머물 자리조차 없었다. 다시 한 번 55번 고속도로를 타게 되더라도 내 행선지는 가평과 남이섬이 아닌 새낭골이 될 것 같다. 만족스런 봄나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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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을 가보련다.

 

“도행지이성 道行之而成” 길은 그 곳을 다녀야 생기게 마련이니..  

 

Robert Frost "The road not taken" /  壯者 內篇 齊物論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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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광고] 동업자를 찾습니다

나. 그리고 너.

Creative Challenge & Change

“창조적인(Creative)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도전(Challenge)하여 기존의 틀에 변화(Change)를 이끌어낸다.” 이렇게 연결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경험할 때마다, 제 심장은 뜨겁게 달아올랐던 것 같습니다. 특정한 소재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발 디딛고 있는 곳에 무한한 소재가 펼쳐져 있습니다. 아무리 창조적이고 기발한 생각도 저의 현실과 밀접한 연관이 없다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현실을 예리하고, 진지하게 바라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고,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기회가 오지요.

 

Careful Communication & Connection

“신중하고 사려 깊게(Careful) 소통(Communication)하고, 사람들을 엮어낼 수 있는(Connection) 사람”과의 만남 역시 제 심장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저부터 그렇게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직의 분위기와 성과는 그 어떤 명분이나 대의보다 조직을 이루는 사람들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봅니다. Careful Communication & Connection 없는 Creative Challenge & Change는 시체나 다름없죠.

 

“Two set of the triple C” 정신. 제가 직접 몸으로 부딪히면서 경험한 여러 활동을 통해서 깨달은 것입니다. 이 ‘정신’이야말로 제 라이프워크입니다. 저는 이 밑그림에 다양한 색깔을 일생에 걸쳐 칠해나갈 것입니다. 요즘은 사회적 기업과 사회적 기업가들의 소식을 들으면 가슴이 뜁니다. 사회적 기업가들은 나의 이상을 사회에서 실현하고 있는 인생의 선배들로써, 저에게 무한한 영감을 줍니다. 기회만 된다면, 동지만 만난다면 사회적기업 창업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도전과제

(미완.. OO과 함께 완성해야 함, 관심있으신 분은 주저말고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lovedfolks@naver.com)

◎ 사업명 : ‘로컬푸드 급식과 생태농장 체험교육’

◎ 사업목적 : 도농 교류를 통한 도시와 농촌의 상생, 도시민들의 귀농, 귀촌의 활성화

◎ 사업대상 : 원주나 춘천과 같은 도농복합도시에 생명농업에 관심 있는 귀농인들과 도시지역의 초등학교 저학년 학부모와 학생들.

◎ 창업전략

- 생태농장을 지사로 두는 일종의 프랜차이즈 회사. CSA로 도시회원들과 농민들을 조직하고 생산이 안정화 되면 학교 급식소와, 직거래 장터로 판로를 확대한다. 보통 1평에 년 1만원의 소득을 올릴 수 있다 한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노동부에 사회적 일자리를 신청하여 1000평 이상의 땅을 가진 농부들을 고용한다. 초기 3년 동안 농부들에게 노동부가 지원하는 일정한 임금을 지급하는 대신, 농산물 판매수익을 회사가 가져간다. 판매 수익이 임금을 상회했을 때에는 농민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할 수도 있다. 회사는 3년 동안의 판매수익을 자본금으로 학교 급식사업과, 직거래 장터를 열어 지원금이 중단된 이후에도 안정적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한다. 농가체험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부수입을 올린다. 땅를 매입할 수 있을 정도로 회사의 수익이 생기면, 땅을 사서 땅이 없지만 농사를 짓고 싶은 사람들을 고용할 수도 있다.

◎ 창업계획

- 위와 같은 방법으로 CSA가 가능한 지역 조사 e.g. 원주, 춘천, 칠곡 등 도농복합도시

- 만나야 할 사람 : 귀농운동본부 실무자, 두레생협 상무이사 김기섭 선생님(일본의 식육교육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 위함), 원주 로컬푸드 사업단, (주)생협친환경급식 사업, I Love 안성마춤학교 사업단, 새낭골 김태수님 등 CSA를 진행하고 있는 농가의 농장주들, 도농복합도시 초등학교 교사와 학부모들

- 시나리오 : 우선 관내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저학년 학부모들과, 농업인들을 CSA 회원으로 조직한다. 농가의 안정적인 소득을 위해서 작물 선정, 작부체계 관리, 농업 교육을 하고, 직거래 시스템을 마련한다. 작물의 선정과 관리는 3년 이내에 CSA 농가가 생산하는 생산물로 학교 급식을 식자재의 대부분 조달할 수 있도록 조절한다. 저학년 학부모들을 조직하는 이유는 농사가 안정화 되려면 최소 3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CSA 농가들이 급식에 식자재를 대 줄 정도로 농업이 안정화되기 위해서는 친환경 급식을 지원하는 학부모들이 급식을 시작하기 전에 최소 3년간 농가를 지원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4학년 이상의 학생들은 급식 혜택을 못 받게 되므로 3학년 이하의 저학년 학부모들을 중심으로 지원체계를 만든다. 소비자들은 후원이 아닌 1:1 등가교환으로 거래한다. 학부모들은 지원한 액수만큼 농가에서 생산하는 생산물을 받아볼 수 있다. 학교에서는 특별활동 프로그램이나, 놀토를 이용하여 학부모와 학생, CSA 농가가 함께 참여하는 농가체험 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프로그램의 운영을 통하여 로컬푸드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친환경급식을 매개로 한 도농 교류를 꾀한다. 처음에는 한 지역을 집중 공략하고, 성공하면 다른 지역으로 확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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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부르는 사랑

 

이렇게 울부짖으면,

정이 떨어질만도 한데...

사랑한단다... 

 

아름다운 사람.

그 사람보다 아름다운 사람을 이제껏 본적이 없다.

 

이 말을 전하고 싶은데-

그사람 앞에만 서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나면 그제사 

조그만 목소리로 

'나도...'

라고 말하지만

그 조차도 부끄러워 뜸을 들인다.

 

나도....

그 사람의 눈물을 가려줄,

그 사람의 땀을 식혀줄

그런 그늘을 만들고 싶다.

 

나에게 사랑이 무언지를 느끼게 해 준 그를,

한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_ 최영미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창자를 뒤집어 보여줘야 하나, 나도 너처럼 썩었다고

 

정당히 시커멓고 적당히 순결하다고

 

버티어온 세월의 굽이만큼 마디마디 꼬여 있다고

 

그러나 심장 한 귀퉁이는 제법 시퍼렇게 뛰고 있다고

 

동맥에서 흐르는 피만큼은 세상 모르게 깨끗하다고

 

은근히 힘을 줘서 이야기해야 하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도 충분히 부끄러워 할 줄 안다고

 

그때마다 믿어달라고, 네 손을 가슴에 얹어줘야 하나

 

내게 일어나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두 팔과 두 다리는 악마처럼 튼튼하다고

 

그처럼 여러번 곱씹은 치욕과, 치욕 뒤의 입가심 같은 위로와

 

자위끝의 허망한 한 모금 니코틴의 깊은 맛을

 

어떻게 너에게 말해야 하나

 

양치질할 때 마다 곰삭은 가래를 뱉어낸다고

 

상처가 치통처럼, 코딱지처럼 몸에 붙어 있다고

 

아예 벗어붙이고 보여줘야 하나

 

아아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아직도 새로 시작할 힘이 있는데

 

성한 두 팔로 가끔은 널 안을 수 있는데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_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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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눈물

망가진 수도꼭지처럼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눈물이 나오는 요즘이다.

 

눈물이 많은 사람은 과거에 상처가 많은 사람이라는 말을 누군가에게 들은 적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우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은 걸까...?"

 

울고 싶은데 울음이 도저히 안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는 나란 인간은 상처따위는 받지 않는 냉혈한인가 싶었다.

내 스스로를 냉혈한이라고 여기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이 참담함을 극복하고자, 나는 내 짧은 상상으로는 잘 가늠할 수 없는 다른 이들의 상처를 이해해 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눈물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처에 대해서 이야기에 하는 것을 경청을 하거나..

굉장히 슬픈 영화나 소설을 보거나...

 

그러나 그것은 내 눈물샘을 자극하는 데에 별 도움이 안됐다.

 

허나 지금..

내가 예전 그 때에 그렇게 이해하려고 애쓰던 그런 사람이 되어있다.

 

차이가 뭘까.....

 

그때는... 누군가를 사무치도록 그리워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없다는 좌절감에 빠져본 적이 없었다.

난 자신감 넘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그 우물 안 개구리는 그리움이 뭔지 몰랐고, 자신의 조그만 세계에서 좌절감이 뭔지 몰랐다.

 

세상 밖으로 나온 개구리는 이제 슬픔은 배울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슬픔은 맨살로, 직접 맞딱뜨리며 겪어봐야 비로소 그게 무엇인지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바깥 바람은 차고, 날카롭다.

살이 튼다.

 

튼 살의 상처가 아물면서 살가죽이 두꺼워지면

슬픔이라는 감정에 익숙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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