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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06
    사람 5-6월호에 급조한 편집인의 글
    사람
  2. 2010/03/11
    <사람> 목차 (2010. 3-4월)(2)
    사람
  3. 2010/03/09
    래군 선배에게
    사람

사람 5-6월호에 급조한 편집인의 글

<사람> 5-6월호가 나왔습니다.

마눌님이 보자마자 그럽니다.

"색 다르네."

전 편집인(박래군)이 구치소에서 보내온 편지를 '편집인의 글'로 때우고 날로 먹으려고 했는데, 예기치 않게 편집 막바지에 전 편집인이 보석으로 출소하느라 땜방식으로 편집인의 글, 원고를 급조해야 했습니다. (물론 편지도 잡지에 실기는 실었지만)

또 늦어진 변명을 하자면... 칠레 지진사태로 종이 구하기가 힘들었고 편집이 늦어져 인쇄일정도 어그러저버린 탓입니다.

종이잡지를 5년 가까이 만들어왔으면서도 우리 잡지에 쓰이는 종이 펄프가 칠레에서 온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밑에서도 썼지만 참 저는 주변과 관계에 무심한 놈인 거 같습니다.

그래도 좋은 글을 많이 실어 기분이 좋습니다. 편집인의 글에 대해 약간 변명을 하자면, 좋은 글을 소개할 겸 예전부터 한 번 써보고 싶던 방식(서평 방식?)을 도전해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호 편집인의 글은 <사람> 5-6월호 서평인 셈입니다. 그런데 서평은 책을 안 읽은 독자도 고려해야 하는 것인데, <사람>을 다 읽지 않은 사람들,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제 느낌이 전달될까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또 한 권의 <사람>이나왔습니다.

 

 

 

타인의 언어로만 이야기되는 사람들의 연대

 

대구에 있는 병원 하나가 문을 닫았습니다. 한 달에 1억5000만 원의 적자가 나고 그렇게 쌓인 적자가 120억 원에 달했다고 하니 너무나 당연한 결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가 그리 간단치는 않습니다. 그 병원은 바로 적십자병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적십자병원은 공공의료기관으로 저소득층과 이주노동자 같은 취약계층에게 무료진료나 부담이 적은 비용으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대구적십자병원이 만성적자에 시달렸다는 것은 그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했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대구적십자병원의 의료급여환자 진료 비율은 다른 지역 적십자병원들보다 많게는 두 배가 넘었습니다. 의료급여환자가 1000원짜리의 진료를 받았다면 일반병원에서는 360원을 내야 하지만 적십자병원에서는 190원만 내도 됩니다. 그래서 대구적십자병원이 일반병원이었다면 오히려 흑자를 낼 수 있었다고도 합니다. 이러한 공공의료기관을 살리기 위해 직원들은 10개월 동안의 임금체불도 감수하면서 폐원만큼은 막고자 애썼습니다. 그런데 애초부터 이윤추구보다 공익성에 무게를 두고 만들어지고 운영되었던 병원이 왜 문을 닫게 된 것일까요?


대구적십자병원 폐원 사태를 다룬 이번 호 르포 ‘왜 대구적십자병원은 문을 닫았나’의 앞머리에는 <한겨레21> 기사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서울 강북의 빈곤층이 모여 사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121가구를 심층 조사한 그 기사를 뒤늦게 찾아 읽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살다 가난하게 죽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아픕니다. 아파서 가난해진 것인지 가난해서 아픈 것인지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더 가난하고,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식구가 있는 집은 앞으로 더 가난해질 확률이 높습니다. 노인들은 무능하고 젊은이들은 무기력합니다. 나이가 적으면 적을수록 자포자기가 심하고 세상에 대한 분노는 더욱 크다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인데 기사를 읽으니 가난에 대한 공포가 밀려옵니다. 살얼음판을 걷는 위태로움. 벼랑 끝에서 한 발 삐끗하면 저 아래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러한 불안과 두려움이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게 하는 것 중 하나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해서든지 빈곤층은 면하고 싶다는 생각, 우선 차상위계층에서 벗어나고 봐야겠다는 심리가 절로 작동합니다.
 

<사람>의 르포에서 대구적십자병원이 문을 닫은 것은 국민들에게서 거둔 적십자회비의 단 1%도 적십자병원에 지원하지 않은 채 그 어떤 개선의 노력도 하지 않았던 대한적십자사와 “목소리가 없는 시민들을 위해선 관심과 시선주기를 꺼리는 국회의원과 관계 당국” 그리고 “소외되고 외로운 이들을 위해 따뜻한 눈길, 마음을 주지 않았던 많은 대구시민들”의 합작품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만약 목소리가 없는 시민들,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되찾아 어떤 울림을 낼 수 있었다면 결론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저 목청 높고 자신들의 정치세력을 확고하게 틀어쥐고 있는 이들,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 또는 그 어떤 희망의 끝자락을 쥐고 그 침묵의 카르텔에 어떻게든 끼어보고자 했던 이들의 담합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그 목소리, 울림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사회적 고통, 그 중에서도 특히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진상규명에는 관심없이 천안함 침몰 사건의 희생자들을 ‘대한의 아들’이자‘순국한 용사’로 일컬으며 유족 돕기 성금모금으로 추모를 독려하고 애도기간을 정해 슬픔을 강요하는 것을 보면 사회적 고통을 정치적 이해관계에 맞춰 이용하려 든다는 의심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반면 “이 참혹하고 억울한 죽음을 알려야 한다는 절박함. 그리고 그 죽음의 원인을 밝히고, 책임을 물어야 하며, 이 같은 사건이 다시 재발해서는 안 된다는 모든 당위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그 죽음의 장면을 마구(!) 사용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라는 질문(‘어느 넝마주이가 생각하는 사진과 인권’) 앞에서 과연 우리는 어떠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통 받는 피해자의 증언을 듣는다는 것,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는 것, 그들의 고통 혹은 죽음에 대한 의미부여가 또 다른 방식으로 그들을 밀어내고 가두었던 것은 아닌지, 어떤 명분을 내세워 하나의 의미를 독차지하려는 욕망은 없었는지 되짚어봅니다.
 

어떤 의미부여에 앞서 아픔에 공감하고 서로의 고통과 경험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근 불거진 낙태 찬반 논란과 관련하여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선택권이라는 현재의 논쟁 구도에서, 여성은 태아를 죽인 자로서 등장”할 수밖에 없기에 자신의 경험을 말할 수 없음(‘말하기 어려움, 또는 낙태에 대한 작은 말하기’)은 제도적 차별만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각종 억압과 편견들 가운데서 우리가 말하고 듣고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삼성의 문제가 심각하고 그래서 깊이 있게 다뤄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또 하나의 가족, 아시아의 삼성’이란 글을 읽기 전까지 삼성에 대한 제 머릿속 사고는 대한민국 국경을 한 발자국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소통과 이해의 전제조건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란 말, 연대가 중요하다는 말은 그저 미사여구였을 뿐 아직껏 제 언어가 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재작년 이맘때 서울 청계광장에서는 그전까지 아무도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청소녀/년들에 의해 촛불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그 광장에서 100여 일 동안 무수한 말들이 흘러넘쳤고 천차만별, 각양각색의 어깨동무가 있었습니다. “무엇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의 “말들에 귀 기울이고, 계속 말하라고 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명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없으며 “누구나 말할 권리”가 있고 누구나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의무”(‘김예슬 선언과 나의 스무 살’)가 있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그렇지만 매우 짧은 시간 동안만 증명되었다 곧 다시 부정되고는 하는 명제 앞에서 다시금 목소리를 빼앗긴 이들, 타인의 언어로만 이야기되어지는 이들과 함께 나누는 말, 그 언어로 재구성되는 관계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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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목차 (2010. 3-4월)

 

격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에서는 일상에서 인권과 관련된 이야기, 인권에 대한 고민과 주장, 인권이론 등 인권을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글을 기다립니다. 

편집부 이메일(esaram0@gmail.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채택되는 원고에 대해서는 소정의 원고료와 1년 정기구독권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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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군 선배에게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3-4월호 발송을 오늘 마쳤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많이 늦었죠. 아래는3-4월호에 실린 편집인의 글입니다.

책을 들고 면회를 가려고 했는데 인가가 워낙 많은 분이라 다음 주에나 볼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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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군 선배에게

 

봄볕에 기대어 담배 한 개비를 물었더니 이제야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른바 ‘용산 수배자 3인’ 중 한 명이었던 선배가 명동성당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기자회견을 한 뒤 제 발로 경찰서에 간 게 벌써 50일 전입니다. ‘벌써’라는 말에 섭섭도 하겠지만 갇힌 사람에게는 더디 가는 시간도 형벌의 한 가지인 셈이지요. 게다가 담배 한 대도 못 피울 테니, 제가 대신 또 한 개비를 물었습니다.


지난해부터 제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금연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래, 얼마나 장수하나 두고 보자’는 못된 심보가 들기도 하지만, 한편 담배를 배운 후 한 번도 작심삼일을 넘기지 못했기에 그네들의 결단이 부럽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담배를 끊으면 독한 놈이라 했다지만 요새는 ‘아직까지도’ 담배를 피우는 게 독한 거라네요. 사실 사람이 독해서가 아니라 담배의 중독성이 심한 탓일 테지요.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중독으로 치자면 어디 담배뿐인가요. 아침에 일어나면 핸드폰 문자부터 확인하고, 사무실에 나가면 컴퓨터 앞에서 이메일부터 열고, 퇴근하면 TV를 켜면서 못 다 본 신문을 펼치고.
 

그렇게 신문을 뒤적이다가 선배가 들어간 지 며칠 되지 않아 서울 왕십리 뉴타운지구에서 겨울철 강제철거가 또 실행되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지난해 12월 서울 마포구 용강동에서 60대 철거민이 목숨을 끊은 지 한 달 만에,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딱 1년 만에 다시 시작된 겨울철 철거였습니다. 서울 마포구 아현동, 북아현동과 염리동, 성동구 금호동과 왕십리, 동작구 상도동과 성북구의 장위동, 동대문구 휘경동과 답십리, 은평구 갈현동과 서대문구 가재울……. 서울만 해도 재개발 136곳, 뉴타운 재개발 113곳, 재개발 예정지역 77곳이라 하니 수도서울은 그야말로 지뢰밭입니다. 용산참사 이전에도 이후에도 한국사회에서의 재개발 병, 개발중독은 전혀 회복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아니 4대강 사업이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으니 지금까지는 그저 서막에 불과한 것인지 모릅니다.
 

어디 재개발 문제뿐인가요. 비정규직 문제가 큰일이라고 너나없이 말하지만 새해 선물로 정리해고 통지를 받아야 했던 한양대학교 미화원 여성노동자들은 설 연휴 전날도 눈발을 맞으며 집회를 열어야 했고, 설 연휴 방송사들이 앞 다투어 다문화 운운하는 동안 이주노동자들 40명은 영문도 모른 채 단속을 당해 그 중에 비자가 없는 사람은 수갑이 채워져 출입국관리소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인권을 빙자하여, 북한 인민의 인권을 볼모삼은 북한인권법이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를 통과했고, 명분 없는 전쟁의 늪 가운데 하나인 아프가니스탄에 다시 파병을 하는 법안은 별 문제 없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아마도 선배가 밖에 있었다면 일일이 챙기고 관여했을 일들이지만 솔직히 선배가 나와 있다 한들 뭐가 달랐을까 싶습니다. 
 

인권운동의 오랜 숙원인 사형제 폐지도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으로 물 건너가고, 헌법재판소의 집시법 야간집회 금지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은 밤 10시까지만 합법으로 하자는 어처구니없는 여당의 법안으로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이 와중에 법무부는 차별금지법도 제 입맛대로 어떻게 만들어볼까 하는 모양이고, 오늘 인터넷에 들어가니 쌍용차 파업 이후 “사망 6명, 자살 기도 2명, 환자 70명”이란 기사가 떠 있습니다. 또 담배가 땅깁니다. 
 

요즘에는 ‘이명박’과 ‘김연아’를 거론하지 않고 글을 써야겠다 싶습니다. 칭찬이 됐든 비판이 됐든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넘쳐나지만 끝도 없는 블랙홀 같으니 말이죠. 대신 ‘삼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지난해 말 출판계에 있는 후배에게서 삼성 X파일에 대해 양심선언을 했던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과 관련된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전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출판계에서는 책을 낼 경우 세무조사를 각오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고 합니다. 책이 나오고 그나마 양심적인 언론들도 책 광고를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그것이 기사화되기도 했습니다. 경향신문에 이 책과 관련한 칼럼이 거부되어 논란이 됐고 그 와중에 김용철 변호사의 책은 인터넷 서점을 중심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언론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 삼성의 실질적인 압력은 없었을 것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예전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와 보안사가 그랬듯이 절대 권력은 입김 없이 그저 눈빛만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이니까요. 이미 삼성은 그런 경지의, 신성불가침의, 알아서 자기검열이 작동되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요? 그래서 김용철 변호사의 책 제목처럼 삼성을 생각하는 일, 삼성에 대해 말하는 일은 대단한 용기와 각오와 결단을 요하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은 창간과 동시에 삼성 문제를 고민했죠. “대한민국과 삼성은 전쟁 중”이라며 특집으로 삼성 문제를 다루기도 했습니다. 2005년의 일이니 지난 5년 사이 삼성은 아마도 그 싸움에서 승리를 거둬 대한민국을 온전히 접수한 모양입니다. 삼성과 관련된 인권문제, 노동권 문제나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 등에 대해 『사람』은 물론 인권운동에서도 대응을 게을리 하거나 회피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삼성은 더 이상 하나의 기업, 거대 자본, 재벌이 아닌 그 무엇이 되어버렸습니다. 권력 이상의 권력, 국가보안법처럼 하나의 지배체제로 한국사회를 억압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삼성의 문제, 한국 속에서 삼성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과 삼성, 삼성 속의 한국의 문제를 어찌하면 좋을지, 선배가 나오면 머리를 맞대어봐야겠습니다.
 

안에서 박지원의 『열하일기』 완역본을 재미나게 읽고 있다지요. 잘은 모르지만 저는 박지원의 시대와 지금 시대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중심축이 바뀌는 격변기, 변방의 지식인으로서 비주류와 주변부에 주목하고 주체성을 고민하며, 거기서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가치를 찾아 나섰던 연암의 삶이 선배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압록강을 건너 산해관을 지나 북경을 돌아오는 봇짐 속에 선배는 무엇을 담아왔을지도 꼭 이야기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올해는 봄꽃이 일찍 필 거라고 합니다. 나오면 담배는 제가 한 갑 사드리지요.
 

 강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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