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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해외직접투자(FDI) 어떻게 봐야하나

 산업구조 고도화ㆍ경쟁력 강화 필수조건

 

2003년 이후 우리나라에서 나가는 해외직접투자(Foreign Direct Investment:FDI)가 크게 늘고 있다. FDI란 해외에 있는 기업의 경영권을 획득 할 목적으로 지분 등을 취득하는 것을 뜻한다. 경영권이 수반된다는 점에서 단순히 자금 이동에 불과한 간접 투자와는 구별된다.

우리나라의 FDI는 2003년 약 40억 달러에 머물렀지만 2006년에는 100억 달러를 넘어섰다. 특히 제조업의 FDI는 같은 기간 20억 달러에서 50억 달러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최근엔 부동산업과 건설업의 FDI도 급증하고 있다.

이처럼 FDI가 늘면서 우리 경제의 앞날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FDI로 인해 생산 설비가 해외로 이전되고 자금도 유출된다는 것이 그 이유다. 기업들이 해외에 투자하는 대신 국내에 투자했다면 국내 생산능력도 확대되고 고용도 그만큼 늘었을 텐데 해외에 투자했기 때문에 이 같은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국내 기업의 기술이 투자 대상국으로 이전될 경우 장래에 그 나라에서 경쟁 기업이 자라나 우리 기업을 위협하는,소위‘부메랑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점도 FDI 확대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 FDI는 경제적으로 부정적 효과만 있는 것일까? FDI가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FDI의 유형에 따라 다를 수 있다. FDI 유형은 일반적으로 △노동력 지향형 △시장 지향형 △경영여건 지향형 △기타(자원 공급, 기술 확보 등)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노동력 지향형 FDI는 상대국의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해 생산비를 절감하기 위한 FDI를 말한다. 예컨대 노동력이 풍부하고 인건비가 싼 중국이나 인도 등 으로 생산 공정의 일부 또는 전부를 이전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노동력 지향형 FDI 중 생산공정 전부를 해외로 이전할 경우 그만큼 국내 고용은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기업이 국내에 핵심 생산 설비는 남기고 부수적?보조적인 생산 설비만을 해외로 이전하거나 새로 공장을 건설하는 경우엔 국내 고용에 미치는 영향이 달라질 수 있다.

해외의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함으로써 국내 생산 단가를 낮추고 제품 생산을 확대한다면 결과적으로 국내 설비 자본이 더욱 확충되고 국내 고용도 늘어날 수 있다.

시장 지향형 FDI는 해외시장 개척이나 수출 대상국의 보호무역 정책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직접 투자가 이루어지는 경우다. 예를 들어 수출 대상국이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면 직접 투자를 통해 그 나라에서 직접 생산함으로써 높은 관세를 회피해 수출 시장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FDI도 국내 경제에는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FDI를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기업은 높은 관세 때문에 국내 생산을 늘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영여건 지향형 FDI는 국내보다 해외의 기업경영 여건이 좋을 경우 국내 투자 대신 FDI를 선택한 경우를 일컫는다. 이 경우는 FDI가 국내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주게 된다. 국내 기업경영 여건이 좋았다면 국내에서 설비를 확장해 고용이 증가했을 텐데 기업이 해외 투자를 선택함으로써 국내에서 이 같은 기회가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기업은 이 밖에도 해외에 있는 자원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거나 기술 확보를

 

위해 FDI를 선택할 수 있다. 기업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장기 공급 계약을 체결할 수도 있지만 이보다 직접 자원을 생산하는 것이 이로울 경우 FDI를 선택한다. 또 기업은 선진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기술 혁신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지역에 진출하기도 한다. 이러한 FDI는 기업의 비용을 감소시키거나 기술 수준을 높임으로써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최근 우리나라 기업들의 FDI는 주로 세계 각지의 생산 설비를 연계적으로 활용하면서도 해외에서의 생산 활동이 국내생산 기반을 유지 강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예를 들어 조선업의 경우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려는 목적으로 직접 투자를 통해 해외에서 선박 블록을 만든 이후 국내에 들여와 완성 배로 건조하고 있다. 이 같은 FDI는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고 산업 구조를 고도화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더 크다.

최근 주요 선진국들은 FDI의 장점을 활용하기 위해 세계 각지를 대상으로 투자처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선진국의 경우 2000~2005년 국내총생산(GDP) 및 총투자 대비 해외직접투자 비율이 각각 2.5% 및 12.5%에 이른다. 대만 말레이시아와 같은 신흥 공업국의 경우도 각각 1.2%와 4.8%에 달하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이 비율이 0.6%와 2.1%에 불과하다. 이는 우리 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해 선진국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FDI가 요구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다만 FDI 확대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은 필요하다. FDI가 확대되어도 핵심 생산 설비를 국내에 남겨 두기 위해서는 투자 대상국에 비해 기술적 우위에 있어야 한다. 이는 기술 혁신이 지속돼야 함을 뜻한다. 국내 경영 여건이 외국에 비해 열악해 국내 투자를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기업경영 여건을 개선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과도한 임금 상승 역시 적정 수준 이상의 FDI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물가 안정 등에도 유의해야 한다.

 

 

 

 

 

 

시대따라 FDI 유형도 변해

 

우리나라의 주요 FDI 유형은 시대별로 달랐다. 1960년대에는 삼림 개발을 위해 인도네시아에 직접 투자한 것을 비롯 원유나 철광석 등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투자가 대부분이었다. 1970년대에는 외국에 조미료 공장을 설립하는 등 시장 지향형 FDI도 있었다. 다만 1980년대까지 FDI는 상대적으로 저조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90년대 전반에는 해외의 저임금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FDI를 중심으로 비교적 활기를 띠었다. 당시 FDI는 섬유 의복 신발 등과 같은 경공업 부문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이 부문에서 FDI가 급증한 것은 국내 임금 상승 등으로 국내 생산으로는 더 이상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려워짐에 따라 기업들이 생산 기지를 임금이 싼 국가로 이전한 데 기인한다. 이 같은 유형의 해외 이전은 국내 산업과의 연계성이 낮아 국내 고용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최근까지의 해외 투자는 경공업체가 생산 설비를 해외로 이전한 것과는 성격이 크게 다르다. 1990년대 후반에는 자동차 전기전자 등 중화학공업 부문에서도 FDI가 늘어났다.

2000년 들어서는 반도체 등 첨단 산업의 FDI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이들 중화학공업 및 고도 기술산업에서는 핵심 생산 설비는 국내에 남기고 보조적인 생산 공정만 해외로 이전하는 형태로 FDI가 이루어짐에 따라 국내 산업과의 연계성이 유지되고 있다.

 

개인 해외직접투자도 급증세

우리나라의 FDI 통계에는 기업뿐만 아니라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직접투자도 포함된다. 우리나라 FDI를 투자주체별로 구분해보면 2006년 전체 FDI중 대기업 비중이 59%로 가장 높고 중소기업과 개인의 비중은 각각 32% 및 9% 수준이었다 . 개인에 의한 FDI도 2003년 이후 크게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세계 부동산경기 호황 등으로 건설업과 부동산업 등에 대한 직접투자가 증가한 데 기인한다.

개인의 부동산업에 대한 FDI 역시 부동산업과 관련된 해외소재 회사의 경영권을 획득하기 위해 나간 투자이며, 단순한 주택구입 등 해외 부동산을 매입하기 위해 나가는 자금은 포함되지 않는다.

기업에 의한 FDI와 마찬가지로 개인에 의한 FDI도 우리나라의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계속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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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5 산업은행 앞 집회

 

 

GM CEO 프리츠 핸더슨이 지엠대우 자금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산업은행을 방문했다.

노동자의 피와 땀을 환투기로 빼돌린 GM과 그것을 묵인하고 이제와서 난리법석인 산업은행에 대한 규탄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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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이진경_‘미누’를 위한 ‘이민청’ 필요할 때다

[시론]‘미누’를 위한 ‘이민청’ 필요할 때다

 

 
 
ㆍ이민의 문 닫은채 부려먹기만
ㆍ지킬수 없는 이주노동자 관련법

무거운 징벌을 내세우며 ‘준법’을 외쳐도 법을 지킬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멀리는 소문이나 불만을 말했다는 혐의로 사람들을 잡아 가둔 유신 시절의 긴급조치법이 그렇고, 책을 소지하거나 글을 썼다고 ‘국사범’을 만들던 국가보안법이 그렇다.

이민의 문 닫은채 부려먹기만

이 진 경
서울산업대 교수
사회학

1993년부터 시행된 ‘산업연수생’에 관한 법도 그렇다. 노동자가 필요해 수입하면서, 마치 교육을 위한 것인 양 ‘연수생’으로 도입하고는, 임금을 받지 못해도 직장을 옮길 수 없게 해 놓았다. 임금체불률이 고용허가제가 실시된 후인 2001년 노동연구원 조사에서도 36.8%였으니, 한국에 오기 위해 들인 비용(대개 1만달러 이상 든다고 한다)까지 생각하면, 누가 이 법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금방 20만명 이상의 ‘불법취업자’가 생긴 것은, 지킬 수 없는 법이었기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고용허가제도 그렇다. 이 법 역시 노동자 수입에 관한 것이면서도 이름부터 ‘고용허가’제인 것은, 법의 관점이 ‘고용하는’ 자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대상은 노동하는 사람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지킬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역시 지킬 수 없는 법이 되고 만다. 3년의 ‘피고용’ 이후 1개월 이상 출국했다가 재입국하는 것도, 취업계약을 3회로 제한한 것도 지키기 힘든 법이 되게 했다. 새로 제출된 개선안도 그렇다. 분명 고용허가제보다 개선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주노동자의 처지에서 생각하지 않는 한,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3년이든 5년이든 한국에서 노동을 한 사람들이 그 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말을 힘들게 배워 적응했는데, 얼마 안 있어 ‘나가’라고 한다면, 영어처럼 다른 나라 가서 쓸 수 있는 언어를 배운 것도 아니어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노동력이 필요한 게 현실이라면 훈련된 사람들을 내보내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일도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주노동자의 문제는 이민의 문제와 연결해 생각해야 한다. 즉 이민제도 없이 이주노동자를 잠시 수입해서 쓰는 것은, 노동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고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긴 안목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작년에 발상의 전환을 보여주는 새로운 제안이 제시되었다. 당시 집권당인 자민당과 경단련(한국의 전경련 같은 단체)에서 나온 것이다. 먼저, 2008년 6월 자민당의 보고서는 1000만명의 이민자를 수입하는 이민정책을 실시할 것과 ‘이민청(移民廳)’을 만들 것을 총리에게 제안했다. 

지킬수 없는 이주노동자 관련법

이어서 경단련은 정주이민을 적극 수입하는 게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새로 집권한 민주당에서는 외국인들에게 선거권을 주는 제도를 추진하고 있다. 이주노동자 이민이 좌파의 비현실적 주장이라는 비난은 전혀 설득력이 없음은 분명하다.

한국의 이주노동자들 현실에 눈을 돌리면 가난하고 약한 자를 데려다 부려먹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어쩌면 이 정도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그것은 ‘단일민족’의 유난스러운 민족주의도 아니고, 노동수급을 생각하는 공리주의적 계산도 아니라, 자본가들의 탐욕과 국가관료들의 시대착오적 단견의 합작품이다. 한국 관료들이 늘 참조하는 일본마저 달라진 상황에서, 아직도 이민의 가능성은 닫아둔 채 이주노동자를 잠시 이용하는 것 이상을 생각하지 않는 태도를 얼마나 더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일까?

이 진 경 / 서울산업대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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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18년 체류한 미누 강제출국은 다문화사회 부정”

“18년 체류한 미누 강제출국은 다문화사회 부정”

미등록 이주노동자 집중단속에 맞춰 연행

정문교 기자 moon1917@jinbo.net / 2009년10월14일 15시50분

출입국사무소의 단속으로 지난 8일 연행된 미누(본명, 미노드 목탄)씨가 강제출국 위기에 놓이자 사회각계에서 그의 석방과 이주노동자의 합법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  1999년 외국인예능대회 참여로 문화부장관에게 받은 감사패. 미누씨는 2003년 인권의 날 기념식에 노무현 전 대통령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주노동자 방송 MWTV 활동가인 미누 씨는 지난 8일 남산에 위치한 MWTV 사무실에 출근하는 길에 출입국사무소 직원에 연행돼 화성외국인 보호소에 수감됐다. 미누 씨는 한국에 18년째 체류하고 있었다.

 

고용허가제도는 물론 산업연수생제도조차 없던 1992년에 미누 씨는 한국을 찾아왔다. 그는 18년 한국생활동안 이주노동자 운동(2003년 이주노동자 강제추방 반대농성), 다문화 강사, 가수(밴드 ‘스탑크랙다운’ 보컬), 미디어 활동(2007~8년 MWTV 공동대표, 3회 이주노동자영화제 집행위원장), 학생(성공회대학교 ‘노동대학’ 19기 부회장)으로 살아왔다. 많은 언론은 이주노동자 문제를 다룰 때마다 그를 찾았다. 14일 전주인권영화제 개막제에 그의 공연이 예정돼 있기도 했다.

 

출입국사무소의 단속으로 강제출국 위기를 맞은 미누 씨를 위해 사회각계에서 힘을 모으고 있다.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 이주노동자후원회 등 이주민 단체는 물론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진보신당 서울시당,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한국독립영화협회 등 30개 가까운 다양한 분야의 단체가 모여 ‘미누의석방을위한 공동대책위’(가)를 구성했다.

 

공대위는 14일 서울 양재동 출입구 사무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미누 씨의 석방을 요구했다.

 

고병권 수유너머 연구원은 “법 바깥에 있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불법행위자로 모는 것은 이주민과 함께 산 한국인의 삶까지 부정하는 것이다. 정부는 다문화정책을 이야기하면서 한국에 존재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추방해 스스로 다문화를 부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  가수 하림 씨가 '연어의 노래'를 부르며 미누 씨의 연행을 안타까워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50명이 넘게 참여해 미누 씨가 18년 한국 생활동안 폭넓은 활동을 했음을 증명했다.

“집중단속 맞춘 표적단속”

 

미누 씨의 단속이 있기 전 법무부는 10월부터 12월까지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집중 단속을 벌일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이주노동자 단체들은 미누 씨의 연행을 ‘표적단속’으로 보고 있다.

 

정영섭 이주노조 사무차장은 “정부는 집중단속에 맞춰 이주노동자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을 표적단속해 이주노동자운동을 탄압하려 한다”고 했다. 집중단속을 앞두고 정부의 이주노동자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경고라는 이야기다. 이주노조는 작년 한 해 동안 출입국사무소의 ‘표적단속’으로 인한 강제추방으로 지도부 5명을 잃었다.

 

이주노조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합동단속에 맞춰 불법 사찰이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지난 9일과 11일 이주노조 사무실 앞에 출입국관리소 차량으로 보이는 차량들에 노조 관계자들이 다가가자 달아나는 일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출입국사무소 직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조합원의 사진을 들고 전에 다니던 공장에 탐문을 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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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원의 자동차 인물열전] 엘론 머스크

[박상원의 자동차 인물열전] 엘론 머스크

  • 박상원 자동차 칼럼니스트
  • 입력 : 2009.10.15 16:12

매연 없고 가속 뛰어난 '로드스터' 개발
테슬라, 전기차로 제2의 GM 꿈꾼다

영화배우 레오나르도 디 카프리오, 구글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 백악관 비서실장의 동생이자 할리우드 에이전트인 아리 임마뉴엘의 공통점은? 미국 신생 전기차 회사인 테슬라(Teslar motors)의 로드스터(Roadster) 소유주라는 점이다. GM 부회장인 밥 루츠(Bob Lutz)조차 테슬라의 로드스터를 보고 자신의 연구진에 전기차인 볼트(Volt) 개발을 지시하게 할 만큼 성공을 거두고 있는 테슬라 뒤에는 회사를 '제2의 GM'으로 키우려는 엘론 머스크(Elon Musk·사진)가 있다.

1971년 남아공 출신으로 17살에 홀로 미국으로 이민 온 머스크는 고학 후 아이비 리그인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스쿨을 장학금을 받고 졸업했다. 일찍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두각을 나타내 12살에 블라스터라는 자신의 게임을 판매한 적도 있다. 1995년 스탠퍼드대학교에서 공학박사 과정을 이틀 만에 포기하고 실리콘 밸리에 뛰어든다. 1999년 컴팩(Compaq)과 2002년 이베이(ebay)에 자기 회사인 집투(Zip2)와 페이팔(Paypal)을 매각, 자신의 자산을 1억9000만달러(약 2400억원)까지 불렸다. 이후 그는 IT산업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연기관 자동차의 뒤를 이어 전기차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확신, 2004년 이후 테슬라를 이끌어 오고 있다.

머스크는 테슬라를 운영하면서 전기차산업에 유리해진 '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테슬라의 전원은 6831개의 리튬이온 배터리. 전기모터로 구동되는 로드스터는 차체를 스포츠카 전문 메이커 로터스(Lotus), 트랜스미션(변속기)은 보그워너(Borg Warner)로부터 공급받는 등 부품과 제조를 아웃소싱(외주)으로 해결했다. 배터리팩을 비롯한 각종 전기 부품들은 매년 원가가 떨어져 창업 6년째인 2009년 6월에는 대당 마진 30%를 달성,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하게 됐다. 매연이 전혀 없는 로드스터는 성능도 뛰어나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3.7초 만에 도달한다.
테슬라의 전기차 '로드스터'.
테슬라는 한때 경영진끼리의 불협화음에다 파산 루머까지 나도는 등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2009년 초 미국 에너지부(Department of Energy)에서 4억7000만달러(약 5600억원)의 기술자금을 지원받아 재정 상태가 호전됐다. 다만 테슬라 로드스터의 성공을 통해 전기차 대중화의 가능성을 확인한 GM 등 기존의 자동차 대기업과 피스커(Fisker)라는 전기차 경쟁 메이커로부터 거센 추격을 받고 있는 것이 불안요인이다.

머스크는 "테슬라의 성공이 전기차의 대중화를 앞당기는 동기가 됐다면 우선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것"이라고 말한다. 10년 이내로 현재 판매량보다 1000배인 100만대의 전기차 판매를 꿈꾸는 머스크. 테슬라가 그의 말처럼 제2의 GM이 될지 무너진 하나의 도전자로 사라질지, 할리우드에서부터 디트로이트 3(GM·포드·크라이슬러), 워싱턴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테슬라와 머스크의 다음 행보를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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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원의 자동차 인물열전] 페르디난트 피에히

[박상원의 자동차 인물열전] 페르디난트 피에히

  • 박상원 자동차 칼럼니스트
  • 입력 : 2009.09.17 16:15 / 수정 : 2009.09.17 16:16

폴크스바겐·포르쉐·람보르기니·아우디… 10개 브랜드 거느린 그… 세계 1위를 꿈꾼다

지난 7월 23일, 전 세계 언론은 포르쉐에서 17년간 근무했던 벤델린 비데킹 사장의 사퇴를 비중 있게 다뤘다. 비데킹 사장은 포르쉐를 만년 군소 스포츠카 메이커에서 업계에서 가장 수익률 높은 회사로 탈바꿈시킨 주인공이었다.

비데킹이 몰락한 이유에는 폴크스바겐 그룹 이사회 의장인 페르디난트 피에히(Ferdinand Piech) 박사가 있었다. 비데킹은 포르쉐가 2005년부터 쌓아온 3조원 넘는 이익을 바탕으로 생산규모가 60배가 넘는 폴크스바겐을 인수하려 했지만, 결국 피에히 앞에 무너졌고 포르쉐는 폴크스바겐에 흡수됐다. 이로써 60년 넘는 두 회사 간의 인연은 마침표를 찍게 됐다.

'폴크스바겐, 가족, 그리고 돈' 순으로 인생의 우선순위를 꼽는 피에히는 193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변호사였던 아버지 안톤 피에히는 당시 독일의 저명 엔지니어였던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법률자문을 맡다가 1928년 포르쉐 박사의 딸인 루이제와 결혼했다. 이 같은 집안 내력 덕분에 피에히는 일찍부터 자동차 마니아가 됐다. 1962년 취리히 연방공대를 졸업하고 포르쉐에서 일하기 시작한 그는 천부적 엔지니어 소질을 바탕으로 미래 CEO감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1971년, 포르쉐의 주식을 절반씩 가진 포르쉐 가문과 피에히 가문이 경영권 다툼을 벌였고, 양쪽 모두 포르쉐 경영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이 때문에 피에히는 1972년 아우디로 자리를 옮긴다. 그는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고, 아우디가 속한 폴크스바겐 그룹에서 36년에 걸친 화려한 경력을 시작한다. 그는 디젤 직분사엔진인 'TDI'와 4륜 구동시스템 '콰트로'를 성공적으로 개발, 개발담당 임원까지 오른다. 그러나 독선적 성격으로 상사와 갈등을 빚게 됐고, 이후 일본으로 이주해 혼다에서 근무하는 것까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타고난 승부사였던 그는 1988년 아우디 최고경영자, 1993년에는 경영난에 빠진 모기업 폴크스바겐의 최고경영자까지 오른다. 피에히는 뛰어난 정치력으로 노조, 그리고 폴크스바겐의 대주주이기도 한 니더작센주를 자기편으로 만들었고, '제품, 제품 그리고 제품만이 살 길이다'라며 제품군을 혁신적으로 바꿨다. 부가티, 람보르기니, 벤틀리 같은 고급 차 브랜드를 인수했다. 2002년 나이 제한에 걸려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이사회 의장을 맡았지만, 심복들을 그룹 내 요직에 심어 실권을 장악했다.

포르쉐 엔지니어 시절의 피에히(사진 오른쪽)
도요타를 제치고 세계 1위 자동차 그룹이 되고자 했던 그에게 최대 위기는 친정인 포르쉐에서 나왔다. 포르쉐 CEO인 비데킹은 폴크스바겐과 SUV를 공동개발(이후 포르쉐에서는 카이엔, 폴크스바겐에서는 투아렉, 아우디에서는 Q7로 출시)하면서 폴크스바겐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당시 저평가돼 있던 폴크스바겐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여 최대주주 등극을 시도한다. 비데킹은 포르쉐 이사회 의장이자 피에히의 사촌인 볼프강 포르쉐의 지원 아래 2005년부터 폴크스바겐 주식을 매입하기 시작, 결국 2008년 말 33% 이상을 인수했다. 연산 10만대의 포르쉐가 연산 600만대의 폴크스바겐 그룹을 자회사로 편입하게 되는 사태를 맞게 된 것이다.

궁지에 몰린 피에히에게 2008년의 경제위기는 '천우신조'였다. 포르쉐는 무리하게 빌려온 자금(총 12조원)이 경제위기로 회수당할 처지에 놓이자, 어쩔 수 없이 자본금이 많은 폴크스바겐에 도움을 청했고, 피에히는 궁지에 몰린 볼프강 포르쉐를 압박해 비데킹을 쫓아내는 동시에 포르쉐를 폴크스바겐 그룹의 10번째 브랜드로 편입한다. 그가 도요타를 제치고 폴크스바겐 그룹을 세계 1위 자리에 올려놓을지 업계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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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원의 자동차 인물열전] 가타야마 유타카

[박상원의 자동차 인물열전] 가타야마 유타카

  • 자동차 칼럼니스트

입력 : 2009.08.28 03:01

닛산의 쇠락은 그가 해고되면서 시작됐다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가타야마는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작고 무능한 일본 닛산을 가차 없이 몰아붙여 결국 뛰어난 회사로 변모시켰다."

1980년대 말 MIT 신입생들의 필독서 중 하나였던 '심판(The Reckoning)'에서 저자 데이비드 핼버스탐(David Halberstam)이 닛산의 미국 진출에 지대한 공헌을 한 가타야마 유타카를 평한 대목이다. 가타야마가 미국 닛산 사장으로 취임했던 1960년대 미국 소비자들은 덩치가 큰 GM·포드 차량에 빠져 있었다. 경제적인 소형 일본차가 미국에서 호응을 얻을 가능성은 요원해 보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해 보였던 일본차의 미국 진출을 성공시킨 사람이 바로 가타야마였다.

가타야마가 닛산 Z카 앞에 섰다. / 닛산의 초대 미국법인 사장으로‘Z카 신화’를 일궈낸 가타야마.
1909년 일본 시즈오카현에서 태어난 그는 1935년 게이오 대학을 졸업하고 닛산에 입사한다. 2차 대전 이후 일본에서 처음 자동차 동호회를 조직했을 만큼 차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는 노조가 장악한 닛산의 사내 문화에 심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노조원 선거에 나가라는 권유를 무시한 이후, 사내에 많은 적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마케팅 능력이 매우 탁월한 그는 사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인재였다. 그는 1958년 1만6000㎞를 달리는 호주 랠리경주 참가를 주도했는데, '기술도 없는 닛산이 이미지만 구기는 것은 아니냐'라는 사내 반대를 무릅쓰고 우승, 전후 일본 국민의 자존심을 살리면서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그를 시기한 사내 정적(政敵)들은 그에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맡겼는데, 바로 닛산의 미국 진출 임무를 책임질 미국 닛산 초대 사장직이었다. 가타야마는 그 도전을 즐겼다. 당시 미국에서 성공을 거둔 독일 폴크스바겐의 경영을 벤치마킹하고, 고객과 딜러 요구사항을 정확히 파악해 이를 반영했다.

미국시장을 뚫기 위해 틈새시장을 노린 그는 일본 시장에만 치중하려는 본사와 수많은 논쟁 끝에 당시 BMW 1600을 벤치마킹한 510(일본명 블루버드)을 미국에 출시, 2년 만에 미국 내 판매를 3배로 늘리는 대성공을 거둔다.

가타야마에게 최고 영광의 순간은 세계적인 명차 중 하나로 평가받는 닛산 페어레이디(미국명 Datsun 240Z)의 개발과 출시였다.

그는 회사가 주저해 하던 고성능 스포츠카를 미국에 내놓기로 마음먹었다. 보수적 디자인을 강요하는 사내 분위기에 밀려 의기소침해 있던 수석 디자이너 마쓰오 요시히코에게 "싸고 경제적인 차만 만들어서는 해외시장에서 이기기 어려우니, 해외업체들이 우리를 주시할 만큼 놀랍고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야 한다"며 힘을 실어 줬다.

페어레이디는 일본 내수차를 개조해 수출하던 당시 관행을 깨고, 처음으로 해외용으로 따로 개발한 차량으로, 미국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510과 240Z의 성공으로 닛산은 북미에서 선도적인 외국 자동차 회사로 우뚝 솟았지만, 가타야마는 그간의 놀라운 업적에도 불구하고 1975년 사내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해고당한다. 이후 닛산의 혁신성은 빛을 잃어간다. 1983년 미국 자동차 전문지인 '카&드라이버'는 기사에서 "당신은 어디로 갔습니까, 가타야마씨?"라고 쓰며 쇠락해 가는 닛산을 개탄했다.

가타야마는 1998년과 2008년 각각 미국·일본의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게 되면서 명예를 회복한다. 그러나 파벌과 현상유지에 집착하던 닛산은 이후 미국에서의 심각한 판매악화를 겪으면서, 1998년 프랑스 르노에게 매각되는 비극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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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원의 자동차 인물열전] 존 드로리언

조선일보 기사지만 교양 차원에서 펌

 

[박상원의 자동차 인물열전] 존 드로리언

  • 박상원 자동차 칼럼니스트

혁신 없는 GM 몰락… 30년 전 그는 예견했다
 

2009년 6월 1일, 한때 세계 최대 자동차 회사였던 GM은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다음 날 지역 일간지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의 칼럼니스트 탐 월시는 디트로이트 인근 트로이(Troy)시에 있는 한 묘지를 찾아 존 재커리 드로리언(John Zachary DeLorean)이라고 적힌 묘비 앞에 섰다. "존, 누군가가 당신에게 말해줘야 할 것 같아 왔소."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갑자기 빠른 속도로 말했다. "GM이 어제 파산 신청을 했소."

월시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30여년 전, GM의 떠오르는 별이었던 드로리언이 이런 날이 올 것임을 누구보다도 먼저 예견했기 때문이었다.

1982년 10월 26일, LA 국제공항 인근 셰러턴 호텔 501호에서 한 남자가 약 2400만달러(약 312억원)어치 코카인을 소지한 혐의로 체포됐다. 그의 이름이 언론에 공개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GM의 최연소 브랜드 부문장과 총괄 부사장을 역임한 천재 자동차 엔지니어로, 유력한 사장 후보로 평가받다 갑자기 회사를 나온 인물. 1985년 영화 '백 투더 퓨처'에 선보였던 '드로리언 DMC-12'의 개발자 존 드로리언이었기 때문이다.

존 드로리언과 그가 GM에서 나간 뒤 개발한 자동차 '드로리언 DMC-12'.
영화 백투더퓨처의 드로리언.

그는 1925년 디트로이트에서 루마니아 이민자 아버지와 헝가리 이민자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포드 노조간부로 일했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자주 싸웠고, 드로리언이 17세 때 이혼했다. 가정환경은 불우했지만 학교에선 뛰어났다. 공학석사와 경영학석사(MBA)를 마치고, 패커드 자동차회사에 취직한 뒤 그의 경력은 탄탄대로였다. 4년 만에 개발 책임자가 됐고, GM에 스카우트돼 폰티액(Pontiac)의 차석 엔지니어가 됐다. 수많은 특허를 출원했고, 36세에 수석 엔지니어가 됐다. 미국인들이 그를 기억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미국의 첫 머슬카(muscle car·출력을 중시하는 근육질 스포츠카)인 폰티액 GTO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나이 든 이미지였던 폰티액 브랜드는 이후 돈 있는 젊은 세대를 끌어들여 성공했다.

드로리언은 폰티액 총괄 책임자가 된 이후에도 실력을 발휘했다. 파이어버드·그랑프리 등 성공작을 내놓았고, GM 브랜드 중 가장 큰 시보레(Chevrolet) 부문장으로 영전한 뒤에도 히트작을 쏟아냈다. 이후엔 GM 그룹의 자동차·트럭 생산총괄 부사장까지 올랐다. 사장도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그는 1973년 48세 나이로 "사회적인 일에 더 신경 쓰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GM을 떠난다.

1979년 그는 비즈니스위크 전직 기자와 함께 자서전 '맑은 날에는 GM의 본사를 볼 수 있다(On a Clear Day You Can See General Motors)'를 출간, 그가 20년간 경험했던 GM의 무능한 관료체제를 신랄히 비판했다. "GM의 경직된 시스템이 독창력을 질식시킨다" "이대로는 혁신이 불가능하다" "GM은 오랫동안 누구보다 차를 많이 팔아 어느 자동차 회사보다도 돈을 많이 벌었지만, 자기들 길만 옳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며 GM 파산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해 화제를 모았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GM에 밉보였기 때문인지, GM에서 나온 이후 그의 진로는 순탄치 못했다. 1975년 자신이 세운 자동차 회사 DMC(Delorean Motor Company)가 개발한 'DMC-12'라는 스테인리스 스틸 차체로 된 2도어 스포츠카는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크게 호평받았지만, 1981~1982년 심각한 판매난에 빠졌다. 그는 회생 자금을 급히 구하는 과정에서 FBI의 마약 함정수사에 빠지게 됐고, 그는 이것이 GM을 비판한 데에 따른 보복이라고 믿게 됐다. 이후 연방법원에서는 함정수사의 불법성을 들어 그에게 무죄선고를 내렸지만, 결국 그는 DMC 투자가들의 투자금 반환 소송 때문에 1999년 개인파산을 했다. 노년에 재기를 꾀했지만, 2005년 80세 나이로 굵고 화려한 인생을 마쳤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성서 구절처럼 드로리언의 GM 파산 예견은 그의 사망 4년 뒤 현실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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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와 함께 한 즐거운 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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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와 함께 한 강화도 소풍

 

 

이주노동자와 함께 한 강화도 소풍

 

지난 4월 19일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강화도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따뜻한 봄기운을 느끼며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이하 센터) 앞에 65명의 참가자가 모였고, 관광버스 1대와 자가용 1대를 나눠 타고 즐거운 소풍을 떠났습니다.

 

 

인터내셔널 버스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스리랑카, 몽골, 인도 등 세계 각국의 이주노동자들이 모인 버스 안은 시끌벅적한 이주노동자들의 말소리와 들뜬 분위기로 북적거렸습니다. 버스가 출발하고 센터 이상재 팀장님을 시작으로 참가자들의 소개가 이어졌습니자다. 다들 조금씩 어색한 한국말로 자신의 이름과 간단한 소감을 밝히면서 얼굴을 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인사가 끝나자 파키스탄의 아지프씨는 원더걸스의 노바디가 듣고 싶다며 기사님에게 요청했고, 버스 안 모니터에서는 한국의 최신대중가요 뮤직 비디오가 나왔습니다. 이주노동자들도 다들 대중가수들에게 관심이 많았는지 모니터로 이목이 집중되었고, 마지막에 원더걸스가 나오자 아지프씨는 ‘원더걸스 사랑해요’라고 외쳐서 많은 이들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강화도로 향하는 버스는 한국 노래와 아시아 곳곳의 언어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인터내셔널 버스’였습니다.

 

 

새가 먹을 것, 사람이 먹을 것

강화도로 가는 도로가 오마이뉴스배 마라톤 때문에 일부 통제되면서 예상보다 도착시간이 2시간가량 지연되어 소풍 참가자들은 주린 배를 부여잡고 예약한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식당은 65명분의 해물탕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고, 속속들이 자리를 잡고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파키스탄과 스리랑카 이주노동자들과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파키스탄 이주노동자 한 분이 녹두전 속의 고기를 발견하고서는 ‘이거 햄이에요?’라고 물으셨고, 확인 결과 돼지고기로 밝혀졌습니다. 질문하신 분 옆에는 두 분의 파키스탄 분들이 더 계셨었는데 그 중 한 분은 이미 녹두전을 먹은 상태라 크게 낙담하고 괴로워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식사하면서 ‘파키스탄의 고기’에 대한 이야기가 꽃을 피웠습니다. 파키스탄에서는 주로 닭․소․양고기를 먹고 한국과는 다르게 소보다 양이 더 비싸고 맛있는 고기로 대접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파키스탄 가서 한국에서는 비싸서 못 먹는 소고기를 실컷 먹어봐야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저는 목이 말라서 물을 한 통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아무 말도 안 하시던 파키스탄 이주노동자 세분이 모두 물을 컵에 가득 따라 벌컥벌컥 마시시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마 익숙하지 않은 식당 문화와 어색한 언어가 파키스탄 분들이 선뜻 물을 주문하지 못하게 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 이주노동자들이 있다는 상황을 세심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평소처럼 혼자서 필요할 때 물을 갖다 먹은 저의 부족함을 깨우쳐 준 계기였습니다.

 

제가 앉은 테이블에서 ‘녹두전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스리랑카 이주노동자들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는 또 재미있는 일이 하나 벌어졌습니다. 스리랑카 분들은 ‘섬나라’ 출신이기 때문에 해물이 너무 흔해서 그런지 해물탕에 들어간 조개, 꽃게 등을 먹지 않더군군요. 그래서 왜 안 먹냐고 물었더니 촌철살인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이런 거 새나 먹는 거 에요. 사람 먹는 거 아니에요.” 스리랑카에 가게되면 새에게서 해산물을 빼앗아 와야겠습니다.

 

 

봉천산과 언어장벽․나이장벽(?)을 뛰어 넘은 수다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강화도 북단에 위치한 해발 291m 봉천산에 올랐습니다. 얕은 언덕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정상에 오르니 땀이 뻘뻘나서 다들 많이 힘들어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물이 없어서 갈증에 시달려야 했고, 어떤 한국인 자원활동가는 화장실이나 외진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산 정상에서 배가 아파 보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소풍 온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에서의 추억을 많이 남기고 싶었는지 산 정상에서 쉬는 시간 내내 강 건너 보이는 북한의 개풍군과 아름답게 핀 진달래, 벚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마지막 단체 촬영 때는 5대가 넘는 디카가 촬영을 기다리고 있어서 일반 등산객의 손을 빌어야 했습니다.

 

산을 오르고 내리면서 앞뒤에 있는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들과 서로의 궁금한 점에 대해서 대화를 많이 나눴습니다. 한국에는 무슨 과일이 많은지, 한국에는 왜 호랑이가 없는지, 인도네시아 말로 전후좌우(前後左右)는 무엇인지, 인도네시아 바퀴벌레는 얼마나 큰지, 한국 사람들은 왜 개고기를 먹는지, 인도네시아 배드민턴계의 상황은 어떤지,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물가는 몇 배나 차이가 나는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느덧 산에서 내려와 버스에 다다랐습니다. 구김 없이 해맑은 모습이 좋아 보여서 제가 가장 많이 대화를 나눈 인도네시아 친구 ‘니노’는 무척 동안(童顔)이었습니다. 이주노동자라고 하면 왠지 나이가 많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어서 굳이 나이를 물어봤는데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1990년 생 20살. 19살이었던 작년에 한국에 들어왔는데 아직 부모님이 많이 보고 싶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찡했습니다.

 

 

최저임금법 개악 저지로 달려가는 버스

도로 정체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예정된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주최 측인 센터의 이상재 팀장님은 아쉽지만 오늘은 그만 돌아가자고 이주노동자들을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은 원래 일정이었던 ‘바다 구경’을 꼭 해야겠다며 ‘일치단결’하였고, 결국 하나 된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초지진으로 버스를 잠시 돌렸습니다. 비록 ‘발리’처럼 멋진 해변은 아니었지만 한국의 바다가 신기한지 또 한 판 거하게 기념촬영을 마치고 다시 버스에 올랐습니다. 국적은 달라도 시원하고 탁 트인 바다를 보고 싶은 마음은 똑같은가 봅니다.

 

인천으로 되돌아가는 버스에서는 다음 주 일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이주노동자들의 의견을 묻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상재 팀장님은 우선 현재 정부의 최저임금법 개악 상황과 이주노동자를 차별하는 중소기업중앙회의 ‘외국인근로자 숙식비 부담기준’을 설명하고, 다음 주일요일에 있을 이주노동자 최저임금삭감에 반대하는 서울집회와 센터에서 진행되는 한글교실 중 어디로 참석할 것인지 의견을 물었습니다. 버스 안은 술렁였고,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자신의 임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집회에 참석하겠다고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그 와중에 “다음 주 한글교실은 아예 하지 말고 모두 집회로 가자.”는 과격한(?) 의견도 터져 나왔습니다. 경제위기로 고환율과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임금조차 빼앗아가려는 국가와 자본에 대한 분노는 국적과 피부색을 초월하였고, 버스는 이미 최저임금법 개악 저지를 위해 달리고 있었습니다.

 

7시가 조금 안되어 인천에 도착했고 다음 주를 기약하며 삼삼오오 헤어졌습니다. 저도 소풍으로 친해진 니노와 다음 주 집회에서 보자고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비록 9시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앞으로 이주노동자를 만날 때 어떤 자세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해야 할지 스스로를 성찰하게 해준 즐겁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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