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없음 2022/11/18 12:37

2022/11/18 이제야 언니에게

<타인의 집> 손원평

44쪽. 지구 자체가 거대한 공동묘지이며 삶은 그 공동묘지 위를 끊임없이 순환해 생겨난 결과일 뿐이라고 위안하며 말이다. 누군가의 죽음 위에 발을 디디는 게 인생이라면 그 죽음이 얼마 전 나와 같은 공간에 머물던 사람에게 닥쳤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물론 이런 종류의 작자기 위안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정확히 나를 둘러싼 모든 게 일상으로 느껴질 때쯤, 나는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에 스트레스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재화언니와 희진이의 특징을 낱낱이 파악하고 그들의 껄끄러운 관계를 알아버린 후에도 최대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 그들의 행동 패턴과 시간을 파악한 나였으니까. 하지만 엮이지 않는 데엔 한계가 있었고 그건 어느 날 재화언니가 내 방문을 두드리면서 곤란한 부탁을 하는 것으로 촉발됐다. -151

<이제야 언니에게> 최진영

161쪽.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제야가 물었다. 

이모는 내가 겪은 일일 때문에 나한테 잘해주는 거예요?

잘해주는 게 아니라 걱정하고 아끼는 거야.

너무 노력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노력해야 해 이모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람은 노력해야 해. 소중한 존재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래야 해. 

노력은 힘든 거잖앙아요. 제야가 중얼거렸다.

마음을 쓰는 거야. 억지로 하는 게 아니야. 좋은 것을 위해 애를 쓰는 거야.

제야는 일기에 이모의 말을 썼다. 언젠가는 이모의 말을 이해할 수 있길 바랐다. 

162쪽. 낯모르는 사람들 틈에 있을 때마다 제야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들 중에도 있을까. 나와 비슷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다 해도 절망스럽럽고 없다 해도 고통스러웠다.

이런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들 중에도 있지 않을까. 그런 짓을 한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165쪽. 새해가 되고 겨울이 멀어지고 바람은 순해졌다. 저녁 산책을 하며 제야는 이모에게 돈을 벌고 싶다고 말했다. 급하게 생각할 것 없다고 이모가 말했다.

나는 내가 쓸모없는 것같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아. 나쁜 생각을 끊지 못하고 벌벌 떨고 사람을 경계하고 겉돌면서 점점 더 나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데만 집중하는 것 같아. 쓸모없어야 아무 것도 안 할 수 있으니까.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당연해지니까. 왜냐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니까.

제야는 앞만 보고 걸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근데 그럼 나는 뭐지 이모?

꼭 무언가를 해야 되느는 건 아니야. 너는 지금으로도 충분해.

167쪽. 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살아가고 있어. 하루하루 잘 살아가면서 조금씩 건강해지고 있어. 네가 조급해하지 않으면 좋겠어. 뭔가를 시작하더라도 여름 지나고 하면 좋겠고. 

그냥 그렇다는 거야, 이모. 다람쥐 쳇바퀴 같은 거. 좋다가 힘들어지는 거. 힘들어서 내려왔는데 다시 타고 싶은 거. 아무것도 아닌 거. 근데 다람쥐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과인 거.

넌 다람쥐가 아니야.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해. 언젠가 정말 전속력으로 달려야 할지도 모르잖아.

그런 때가 오면 저절로로 달리게 될 거야.

나는 지금 이모 옆에 있어서 좋아. 안전하다고 생각해.

근데 우리 속에 있는 것 같아?

안전하니까. 

173쪽. 이모는 애를 쓰는 걸까? 이모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위해 애쓰는 건 아주 멋지고 좋은 일이라고 했다. 나는 이모가 애쓰는 걸까봐 여전히 두렵다.

이모의 말을 여기 적어둔다.

한숨이 날 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아직 젊다. 지금도 나는 부자지만 앞으로 더 부자가 될 거야. 무슨 일 있을 때는 젊고 돈 많은 솔로 이모를 생각해. 두려울 게 없을 것이다. 

도망치지 않기 위해 이모의 말을 적어둔다.

나는 절대 이모에게로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도망칠 생각으로 살지는 않을 것이다. 이모에게는 늘 웃으며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이모도 웃게 할 것이다. 

180쪽. 제니에게도 승호에게도 남자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런 일을 겪고도 연애를 하다니 정말 남자를 밝힌다고 생각할까봐 겁이 났다. 그건 사실 제야가 자기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연애를 하다니. 그건 사실 제야의 머릿속 당숙이 하는 말이었다. 넌 정말 남자를 밝히는 애구나. 제야는 당숙을 떨쳐낼 수 없었다. 남자에게 잘해서 인정받으면 당숙을 지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야는 늘 남자의 기분과 욕구를 살폈다. 자기감정을 모두 남자의 사랑과 연결시켰다. 남자가 있으나 없으나 우울하고 불안하고 외롭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남자가 점점 커져서 모든 걸 없애주길 바랐다. 제야의 기억과 망상을. 제야 자체를. 

189쪽. 눈을 떴을 때는 저물녘이었다. 창이 열려 있었다. 내가 창을 열어두고 잤나? 제야는 벽에 등을 기대고 창을 빤히 쳐다봤다. 제니에게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또 제니를 괴롭힐 것만 같았다. 자기를 통제할 자신이 없었다. 제야는 이모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제니를 잃는 중이라고. 제야는 가깝고 익숙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우울과 불행, 자책감, 죽고 싶다는 열망.

200쪽. 나는 그가 스스로를 혐오하고 증오하길 원한다. 내가 나를 혐오하게 된 만큼, 증오하고 자책하고 망가뜨린 만큼, 아니 나보다 훨씬 크고 깊게. 변명 없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수치스러워하길.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렇다면 그보다 훨씬 힘이 세고 덩치가 크고 괴물 같은 사람이, 아니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 짐승이어도 좋다. 아무튼 그 무엇이 그를 강간하길 원한다. 자기 죄를 알 필요도 없다. 재산을 뺏을 필요도 없다. 가족을 해칠 필요도 없다. 명예를 더럽힐 필요도 없다. 그가 당하면 된다. 그리고 모두가 그 사실을 알면 된다.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은 그에게 어떤 말을 할까? 너도 즐긴 거 아니냐고 말할까? 네가 죽을힘으로 반항했다면 당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할까? 다 큰 남자가 겁도 없이, 다 큰 남자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 큰 남자가 울면서 하는 말이라고 다 믿어선 안 돼, 그런 말을 할까? 다 큰 남자가 술을 마신 것 자체가 문제라고, 다 큰 남자가 착각한 거 아니냐고, 다 큰 남자가 이미 소문이 나버렸으니 인생 글러먹었다고, 다 큰 남자가 총각도 아닌데 먼저 자빠졌는지 자빠뜨렸는지 알 게 뭐냐고 말할까? 가해자 보듯 그를 볼까?

206쪽. 나는 내 인생 최대 불행이 강간당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내 인생 최대 불행은 이런 세상에, 이런 사람들 틈에 태어난 거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른이라고 고개 숙여 인사해야 하고 어른이 하는 말이니까 들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싹수가 노란 거고 애당초 글러먹은 애가 되는 거고. 당숙이 악마여서 나를 강간한 게 아니다. 여기서는 그게 강간이 아니니가 강간한 거다. 당숙이 당당한 건, 가해자면서 희생자인 척 구는 건, 이 세계에서 당연한 문법인 거다. 여기 사람들은 '강간'이나 '성폭행'의 의미를 모른다. '남자가 꼴리면 그럴 수도 있는 짓'만 안다. 돈이 많으면 돈이 많은데 무슨 대수냐, 궁핍하면 불쌍하니까 눈감아주자, 돈이 적당히 있으면 먹고살 만해서 잠깐 딴 생각을...... 그러므로 이곳에서 남자는 언제나 그럴 수 있다. 지구 어딘가에는 아직도 여성 할례가 있다고 들었다. 더럽고 불경하다며 생리하는 여자를 격리한다고 들었다. 여자를 재산 취급한다고 들었다. 결혼 지참금이 적다고 여자를 학대한다고 들었다. 여기 사람들에게 그런 얘기 해주면 뭐라고 할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기겁할까? 우리는 뭐 다르나? 대한민국은 달라? 내 아들이 한 달에 거둬들이는 돈이 얼만데 젊어서 여자애 하나 건드린 게 무슨 대수냐고 말하는 이 땅은...... 야만인들. 파렴치한들. 

나는 그 일이 없었다면 나는 분명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날 그 일이 없었어어도 그는 분명 지금과 같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잊었어요? 저 사람이 나를 강간했잖아요.

말하니까 다들 얼어붙었다. 불편해졌다. 혀를 찼다. 남사스럽게 저런 말을 어떻게 저렇게 염치없게 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벌레 보듯 나를 봤다. 난 벌레가 아니다. 인간이다. 나도 부끄러움을 안다. 나는 부끄럽지가 않다. 

216쪽.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한 사람은 그다. 그는 분명 그러지 않을 수 있었고, 그러면 안되는 거였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저주스럽다. 그를 생각하고 그날을 생각하고 어떻게든 내 잘못을 찾아내려는 내가, 그의 친절과 다정함을 아는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라고 생각하는 내가, 술 때문이었을까 의심하는 내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다른 이유를 찾으려는 내가 저주스럽다. 

그는 자기를 저주하지 않을 것이다. 한번이라도 자기를 저주했다면 내게 빌었을 것이다. 변명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기를 사랑한다. 아낀다.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소중할 것이고, 자기 잘못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는 그렇게 지내는데, 그런 자기를 유지하는데, 어째서 나는 나를 저주하나. 나를 버리지 못해 안달인가. 어째서 나조차 내게 책임을 묻는가. 나를 걱정했던 그와 나를 강간한 그는 한 사람이다. 친절하고 비열할 수 있다. 다정하고 잔인할 수 있다. 진실하고 천박할 수 있다. 그게 사람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고 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떼어낼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너무 쉽다. 괴물이라고 말하기는 너무 쉽다. 너무 쉬운 그 말은 아무 의미 없다. 너무 쉬워서, 아무 힘이 없다. 그는 괴물도 짐승도 악마도 아닌 사람이어서 나를 강간했다. 그는 나를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기만하는 편이 훨씬 쉬우니까. 그는 쉬운 인생을 살 것이다. 나는 여태 애썼다. 다시 애쓸 것이다. 나는 애쓰는 사람이 될 것이다. 절대로, 그와 같은 사람은 되지 않을 것이다. 

222쪽. 내가 고향에 이있지 않아도, 도시의 익명에 둘러싸여 있어도 이 세상 어딘가에는 나를 아는 사람들이 있잖아. 부모님이 있고, 친척들이 있고, 동네 사람들이 있지. 학교 사람들도 있고, 여행하는 동안 깨달았어. 나조차 그들의 시선으로, 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판단할 때가 많다는 걸. 무슨 뜻인지 알겠니? 나를 의심하는 사람들의 말이 쌓일수록 나는 나를 의심하게 되었어. 내가 그럴 만한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나를 몰아세웠어. 내가 겪은 사건만큼 나란 존재 자체가 너무 끔찍했지. 끔찍한 나는 그런 일을 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잖아, 그 일 이전에는 나는 나를 끔찍해하지 않았어. 원인과 결과가 자꾸 역전되는 거야. 

226쪽. 여행하는 동안 나를 둘러싼 공기를 생각했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유령같은 공기가 가진 힘에 대해. 그 힘을 만들어내는 또다른 힘과 작용들에 대해. 나는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나는 어떤 힘에 둘러싸여 있는지. 나는 어린 여자애여서 무시당했다가 젊은 여자여서 의심받고 늙은 여자여서 무시당하게 될 거야. 하지만 어릴 때, 나와 승호와 함께일 때 나는 달랐어. 강릉 이모와 함께일 때도 나는 달랐지. 나는 그냥 나였어. 나를 주장하거나 증명할 필요도, 나를 부정할 필요도 없었어. 

229쪽. 이런 말 정말 쓰기 싫지만 그래도 쓴다. 너도 잘 알겠지만 확인하는 마음으로 쓴다.

만약에 네가 성범죄르를 당한다면 증거를 꼭 남겨야 해. 녹음이든 사진이든 남겨야 해. 몸을 씻지 말고 바로 경찰서로 가야 해. 당시 입었던 옷과 속옷도 다 챙겨야 해. 안전한 장소는 없어. 집도 바깥도 위험해. 사람이 많은 곳도 사람이 없는 곳도 위험해. 도시도 시골도 버스도 택시도 공개된 장소도 밀폐된 장소도 위험해.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밤도 새벽도 다 위험해. '괜찮겠지'란 생각은 위험해. 상대가 그러기로 마음먹었다면, 성범죄를 피할 방법 따윈 없어. 조심하라는 말이 아니야. 죽일 수 있다면 죽이라는 말이야. 살아남으라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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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18 12:37 2022/11/18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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