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사칭은 큰 죕니다.

내부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언제나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것도 '적'과의 대척점에 서있는 절체절명의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싸워야 할 대상이 앞에 있다는 이유로, 싸워야 할 다른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로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일이 어디 한 두번인가? 그러나 그러다가는 언젠가 제 다리를 지가 부러뜨리고, 지 살을 지가 파먹어 적 앞에서 훼까닥 꼬꾸라지는 수가 있다. 그래서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한다. 그게 내가 속한, 내가 신념과 시간을 바친 곳이라고 할지라도.

 

게다가 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군도 아닌 것이, 아니 오히려 적과 더욱 근사한 것이 당장 눈에 보이는 적과 다르다고 해서 그걸 걍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적의 적은 동지인가?"라는 그 오래된 의문은 오늘 이 순간에도 수시로 물고 씹어봐야할 생각의 주제다. 그러나 어디 그렇게 하기가 쉬운가? 특히나 정치판에서는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된다는 놀라운 생리가 실제로 통용되는 곳이다보니 "적의 적은 동지인가?"라는 생각은 가끔씩 골방 어느 구석에 파묻어 두어야 할 필요악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바로 그 연장선상에서 "적의 적"은 가끔 아군에게 "우리가 남이가?"라는 듣기에 껄끄러운 코멘트를 던진다. 한발 더 나가서 적에게 돌릴 화살을 우리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전술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전선을 흐리지 말라는 요청이다. 이게 간혹 씨가 먹히는데, "전선"이라는 것 자체가 작금 상황이 매우 위중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고, 이 엄혹한 시기에 피아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못하면 전투는 물론이려니와 전쟁에서조차 패배하고 말것이라는 위기의식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급박할 수록, 이 말은 씨가 잘 먹힌다. 필요한 때를 잘 포착하여 이 전선을 흐리지 말라는 요청을 하는 측은 자신에게 돌아올 화살을 공동의 적에게 돌리게 됨으로써 위기탈출의 호기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말이다. 눈에 너무 뻔히 보이게 하면 안 된다. 잔뇌 굴린다고 욕이나 먹게 되니까.

 

뭐 그닥 오래 되지 않은 과거로 돌아가보자. 이라크 파병, 한미 FTA 추진, 평택 미군기지 이전 등 잊을래야 잊기 어려웠던 격동의 세월을 상기해보자. 그게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에서 이루어진 일들도 아니고, 전노시절에 있었던 일도 아니니까 기억하기 어렵진 않을 거다. 해서, 아주 걍 뽀작뽀작 잘도 기억이 나누나. 계엄령도 없이 군을 동원하기까지하는 정권을 보면서, 이제 이 정권에 대해 퇴진요구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운을 떼었을 때, 당의 지도부고 무슨무슨 연대니 뭐니 하는 집단의 잘나가는 원로 여러분께서 하시던 말씀이 이거다. "지금 정권퇴진을 이야기하면 수구세력에게 기회를 준다."  그때 그 정권은 다름 아닌 노무현 정권이다.

 

피아식별에 헷갈리기 시작한 이분들의 지도지침을 받던 한국사회의 거대 운동들이 그분들의 어이상실 판단력의 발휘 이후 불과 몇 년도 되지 않아 오늘날 갈곳을 몰라 방황하고 있다. 그분들 이야기대로라면, 지금이야말로 제대로 된 적이 눈앞에 들어앉아서 황당무계한 짓을 하고 있으니 전선이 더욱 명확해지고 도처에서 칼부림이 일어나야 하는데, 정작 눈 뜨고 앉아서 쥐어터지고 있는게 다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기륭 농성장은 용역깡패들에게 쑥대밭이 되고, 세종로에선 물대포가 위용을 발휘하고, 촛불들은 다시 잠잠해지고 있는 이 때, 그동안 진보세력의 중추 핵심임을 만방에 과시하면서 달리고 달리던 분들은 뭣들 하고 계시나? 촛불 시즌 2.0이라고라?

 

이명박과 수 브라더스를 비롯한 개념상실한 인간들이 좌충우돌, 사회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이 상황에서 사실 세상이 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얘네들만 '적'이 아니다. 이것들하고 말을 다르게 하면서도 행동은 똑같이 하는 것들, 그것들 역시 분명하게 '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적과 대척점에 서있다고 해서, "적의 적"이 동지인 것은 아니다.

 

쌀 직불금과 관련해서 강기갑 의원이 노무현 정권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취지로 어떤 라디오 방송과 인터뷰를 했나보다. 그랬더니 이게 노무현 정권 당시 한 자리 하던 사람들에겐 상당히 귀에 거슬렸던가보다. 정청래 전 의원이 이에 대해 한 소리 했다. "강기갑 의원님, 지금은 도둑놈을 먼저 잡아야 할 때입니다."라고 소리를 지른다. 주제는 이거다. 전선을 흐리지 마라.

 

정청래 전 의원은 강기갑 의원을 존경한단다. 행인은 강기갑 의원 별로 존경하지 않는다. 왜 존경하지 않는지에 대해선 기회가 있을 때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암튼 현 시국에서 강달프로 위세를 떨치고 있는 강기갑의원이지만 행인은 그닥 존경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나지 않는 분인데, 정청래 전 의원은 상당히 존경하나보다. 그런데 이 존경하는 강의원에게 정청래는 "현 쌀 직불금 정국에 어쩌면 찬물을 끼얹는 소재로 악용될 것이 염려"스러워 노무현 정권에서 있었던 문제를 꺼내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러면서 세우는 논리는 이거다.

 

도둑놈을 못 지킨 경찰은 분명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잘못은 부당하게 농민의 쌀을 훔친 도둑놈들입니다. 우선 급한 것은 누가 도둑놈인지 잡아 놓고 "너 왜 어떻게 쌀을 훔친 거야?" 먼저 따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명단을 공개하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에서 느닷없이 참여정부 책임론과 노전 대통령 서면조사까지 들고 나오시면 좋아할 사람들은 도둑밖에 더 있겠습니까?

 

좀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이 수준은 이미 자기 주제파악을 못하는 수준이다. 강기갑의원에 대한 호불호는 제쳐두고 순전히 현 상황에 대해서만 판단하자면, 지금 강기갑의원이 이야기하는 요점은 이거다.

 

"둘 다 도둑넘"

 

그리고 사실 누가 보더라도 둘 다 도둑놈이다. 지금 사회적으로 직불금과 관련되어 쏟아지는 양 정권에 대한 비판은 어느 한 쪽은 도둑놈이고, 다른 한 쪽은 중대과실을 범한 경찰이라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두 쪽 다 도둑놈이라는 얘기다. 정상적인 사고회로를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도둑놈 둘 다 잡아 족쳐야 한다고 판단한다. 그 둘이 공모공동정범이던, 아니면 완전 별개의 실행범이던 간에 도둑놈은 도둑놈이지 시대가 바뀌었다고 도둑놈이 경찰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이 왜정시대 끝나고 도래한 미군정시긴가?

 

정청래 전 의원은 의원씩이나 하셨던 깜냥에는 한참 못미치게 엉뚱한 사례를 끌어들이며 민주당과 민노당의 협력을 요구한다. 하나는 민노당과 한나라당과의 상생협정, 다른 하나는 민노당의 대 조중동 투쟁의 소극성. 전자에 대해선 행인도 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후자에 대해선 걍 이렇게 코멘트 해줄만하다. "풋~!"

 

"18대 국회에 문방위 의원을 배치하지 않은 것도 그렇고요." 라고? 17대 국회때 의원 하나를 정무위에 배치시킬려고 했더니 법사위로 보내버린 건 누가 한 짓이었나? 게다가 민노당, 이제 5명 밖에 되지 않는 의원으로 원내투쟁도 해야하고 통일전선 복무도 해야하는데 지금 문방위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잘 알면서~!

 

그리고 조선일보와의 싸움에 민노당이 소극적이었다고 하는데, 겉으로는 조선일보와 성전을 치룰 듯이 설레발이 치면서 실제로는 조중동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었던 집단은 누구였나? 나중엔 별 씨잘데기 없는 기자실 폐쇄 쑈프로그램까지 가동하면서, 정작 한미 FTA며 평택미군기지며 전략적 유연화며, 조중동에게 칭찬받을 짓만 골라 한 집단이 누구였는지 그거 참 기억이 쏙쏙 잘 난다.

 

"지금은 민주당과 차별성을 부각시킬 때가 아니라 서로 협력하고 나중에 선의의 경쟁을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라는 정청래 전 의원의 말은 오래 두고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이 글 쓴 날짜가 2008년 10월 23일이다. 시간은 오전 11:30.

 

지금은 도둑놈들을 죄다 때려 잡을 때다. 도둑이면서도 경찰인 척 하는 것들은 괘씸죄까지 적용해야 한다. 경찰 사칭죄까지 포함해야 하나? 암튼 그렇다. 저 동네 분들은 어째 죄다 이렇게 자기들 편의에 따라 입장을 바꾸시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정통망법을 사이버 국가보안법으로 만들어놓은 주제에 한나라당에서 사이버모욕죄 신설한다니까 난리를 치는 분들. 글쎄 다 똑같은 분들이라니까.

 

그나저나 이거 당 깨고 나온 내가 우째 민노당 의원까지 보살펴야 하나?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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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3 16:28 2008/10/23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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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원~한 말씀이네요 ^^
    (저도 강모의원 별로 존경하지 않지만 둘 다 도둑놈이라는 말에는 전격 공감!!)

  2. 글을 읽자니 말씀처럼 구열우당이 보여준 실망스런 행태가 (행인님처럼 쏙쏙은 아니지만)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갑니다. 평택도 그렇고, 포스코사태도 그렇고, 전략적 유연화도 그렇고 말이죠. 대한민국 정당정치를 생각하면 정말 짜증부터 솟구치고, 기운이 하나도 없어집니다. 진보신당은 원외에 덩그러니 있고, 거대 양당이라고 할 수 있는 한날당과 민주당은 도저히 최소한의 신뢰를 보내기도 힘들고 말이죠...

    추. 강달프를 존경하지 않는 사연이 몹시 궁금하네요.
    추2. 가끔씩 생각했던 것인데요. 본문의 글자 크기를 조금만 크게 해주시면 안될까용? 글이 평균적으로 좀 긴 편인데, 글자가 좀 작아서 말이죵. ㅎ

  3. "말을 다르게 하면서도 행동은 똑같이 하는 것들"
    이게 얘네들의 본질인데, 사람들은 다르다고 느끼는 걸까요?
    심지어 운동하신다는 원로분들이나 민노당 패거리들까지 말이죠... 그게 답답해서요. 좀 있으면 진보신당 패거리도 그러지 않을라나 걱정되요.

  4. 똥과 겨.

  5. 펄/ 그러게요. 하여튼 지 위치가 어딘지도 모르고 저런 소리 하니까 사람들이 등을 돌린 건데 아직도 그걸 몰라요... 쩝...

    민노씨/ 강의원을 존경할 수 없는 처지라서용... 혹시라도 나중에 비망록을 쓰게 되면 그 때 풀어볼까 합니다. ㅋㅋ

    산오리/ 글쎄,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나봐요, 많은 사람들이. 진보신당은 그렇게 되지 않길 바라지만서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죠. 산오리님 보고싶습니다. ㅠㅠ

    말걸기/ 그것도 적절한 비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