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밸트

유조선 옆구리가 터지면서 시커먼 원유가 쏟아져 흘러내렸던 서해안 일대. 해안가 바위틈에 낀 기름덩어리를 문질러 닦으면서 가슴이 먹먹해 말도 못하고 섧게 울었던 때가 벌써 1년이 되어 간다. 기름 걷으러 한 번이라도 더 가야지 하다가 그만 여차저차 못가고 말아 또 얼마나 죄스럽던지. 근데 기름 쏟아부은 삼성은 쥐뿔이나 입닥치고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왜 죄스러워 해야 하는 건데?

 

암튼 그런 전차로 마음 한 구석 빚이 남은 거 같아 찝찝하던 차, 얼마 전에 서산에서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한 행인. 5회를 맞이하는 이 대회가 이번에는 참가비 없이 치뤄진다고 하여 우짠 일인가 하고 봤더니, 지난 태안일대 기름유출 사고때 사방에서 달려와 준 분들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참가비 없이 대회를 치룬단다. 취지도 나름 공감이 가는데다가, 기름유출사고 이후 그쪽에 관광수입이며 어업이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터라 꼭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신청완료. 그리고 오늘, 서산 일대에서 하프코스를 달렸다.

 

짝꿍도 10K에 나가 완주. 행인은 하프코스를 달렸는데, 워낙 오랜만에 뛴 상태라 그동안 충분한 훈련도 없어서 상당히 걱정이 많았더랬다. 하지만 1시간 48분 54초라는, 걱정했던 것보다는 괜찮은 성적으로 골인. 어제 서산에 도착해 서산 시내를 돌며 여기 저기 구경도 하고, 시장통 어귀에서 훌륭한 수제비집을 만나 창자를 꼭꼭 채우기도 했다. 날이 궂은데다가 아무래도 선전이 많이 되지 않았던지 예상 외로 참가자가 너무 적었다. 특히 외지에서 참가한 사람이 적어서 그 아까운 코스가 너무 아쉽게 되었다. 수많은 철새들이 논바닥에 둘러앉아 만찬을 즐기는 모습이며, 뭣에 놀랐는지 한꺼번에 후두둑 날아오르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길 반대편으로는 서해에선 드물게 옥색 바다가 펼쳐져 출렁거리고. 내년에도 기회가 된다면 가보고 싶다.

 

암튼 그렇게 레이스를 마치고 짝꿍과 함께 양주로 돌아오는 길. 서산시내까지 나가 의정부행 시외버스를 탔다. 시외버스는 당진의 버스터미널에 들렸다가 당진 시내에서 한 번 더 정차한 다음 고속도로를 타고 북으로 내달렸다. 그런데 이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님, 이분 덕분에 아주 걍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는 것이 아닌가.

 

버스는 서산을 출발해서 당진을 거치면서 구비구비 국도를 타고 돌더니 드디어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로 진입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낮으막하면서 고유의 충청도 억양이 섞인 목소리로 기사님의 안내방송이 시작되었다.

 

아, 아. 오늘도 저희 00여객을 이용해주신 승객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저희 00여객은 승객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이 버스는 서산에서 출발하여 당진을 거쳐 의정부까지 가는 버스입니다. 이제 곧 이 버스는 고속도로에 진입할 예정입니다. 승객 여러분 중 안전밸트를 착용하지 않으신 분들은 이제 안전밸트를 착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승객 여러분의 안전을 위하여 안전밸트를 착용해주셔야 하며, 안전밸트를 착용하지 않고 계시다가 단속에 걸릴 경우 해당 승객께서도 30000원의 범칙금을 부과받게 됩니다. 이점 잘 인지하셔서 반드시 안전밸트를 매주시기 바랍니다.

 

에... 여기까지는 뭐 정해진 멘트구요. 10년 넘게 이 멘트를 했더니 이젠 토씨 하나 안틀리고 다 외웁니다. 에... 근데 뭐 밸트 하시기 싫은 분은 안 하셔도 됩니다. 이 버스는 하이패스 버스라 단속할 수가 없습니다. 밸트 안 하셔도 되구요... 근데 왠만하면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뭐 벌금이 문제가 아니라 밸트를 하는 거 하고 안 하는 거 하고 차이가 많이 납니다.

 

운전하다보면 사고가 날 수도 있는데요, 에... 저도 작년, 재작년에 사고가 한 번 났습니다. 자동차 뒤를 들이박았는데요, 뭐 갑자기 끼어든 자동차가 문제가 있었습니다만, 하여튼 그렇게 사고가 났는데요, 아무튼 그래서 자동차는 중앙분리대에 걸쳐졌구요, 우리 버스도 큰 일이 났는데, 참 다행하게도 승객들이 모두 안전밸트를 하고 계셔서 별 일이 없었습니다. 에... 고속버스가 사고가 많이 납니다. 에... 어제도 나고 그제도 나고 그러는데요, 버스 기사들이 뭐 사고를 내고 싶어서 내겠습니까. 워낙 장거리에 힘이들고 그러니까 졸고 뭐 그러다가 사고가 나는데요, 일이 참 힘들어서 그러는데, 그렇게 사고가 나서 큰일이 나도 안전밸트 매고 있으면 크게 안 다칩니다.

 

그리고 사고가 나도 안전밸트 매고 있었는지 아닌지에 따라 보험료도 달라집니다. 별거 아니어도 한 백만원 더 보험료 받을 수도 있는데 밸트 안 하고 있으면 많이 다쳐도 뭐 80도 못 받는 수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안전밸트 하시는 것이 좋구요...

 

안전밸트에 대한 장황한 이야기를 하는데, 10K 뛰고난 여파로 피곤에 쩔어 코까지 골며 자고 있던 짝꿍 이하 승객들 상당수가 이 방송을 못들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방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있던 행인은 소리를 죽이며 배꼽을 잡아야 했다. 이 아저씨 방송의 피날레는 이거였다. 비가 오고 차가 막히고 하니 코스를 이러 저러하게 가겠다고 하던 이 아저씨,

 

이 버스는 오산 휴게소에서 15분간 정차하겠습니다. 아직 많이 가야 하구요, 앞쪽에 앉아계신 분, 그렇게 많이 마실 거 드시고 커피 마시고 하시면 중간에 차 세워야할 일이 있으니까요, 예, 에... 목적지인 의정부에는 4시 30분쯤 도착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하이고 배꼽이야... 거의 허리가 꺾일 정도로 큭큭대고 웃었더니 그만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고 의정부까지 달리는 내내 잠이 오질 않았다. 혹시 또 무슨 기가 막힌 멘트를 날려주시지나 않을까 싶어서.

 

기사님, 감솨. 앞으로도 그 즐거운 멘트, 승객들에게 많이 많이 들려주시고 안전운전 하시면서 언제까지나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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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5 21:21 2008/10/25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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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멘트도 멘트이지만...그 멘트를 기억해서 쓰신 행인님도....대단하신데요....^^

  2. 멋진 기사님이십니다..ㅎㅎ

  3. 유이/ 말을 옮기다보니 그 때 받았던 그 "감동"을 제대로 옮기질 못하겠네요. 사실 저거 걍 읽는 거 보다 몇 백배는 더 웃겼는데... 기억도 좀 띄엄띄엄하구요. ㅎㅎ 그래도 아직 이정도 수준이면 기억력이 대충은 그럴싸 하다는 자화자찬을...(퍽~! 퍼퍽!!!)

    산오리/ ㅎㅎ 그쵸?

  4. 커플 마라톤이라니~ 염장~ ㅋㅋ 전 커플 마라톤은 됐구 애인님이랑 고속버스타고 어디 가고싶네요.

  5. 라브/ 조만간 소원성취하실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