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전쟁

장시간 전철로 통학(?)을 하다보면 온갖 인간군상들을 보게 된다. 자는 사람, 조는 사람, 조는 척 하는 사람, 옆사람과 떠드는 사람, 혼자 떠드는 사람, 전화하는 사람, 게임하는 사람, DMB를 보며 깔깔대는 사람, 신문보는 사람, 가끔은 식사를 해결하는 사람도 있고, 1000원에서 몇 천원까지 하는 물건을 파는 사람도 있다. 그 중에 반가운 사람은 책 읽는 사람.

 

간혹 독서삼매경에라도 빠진 사람들을 보면 도대체 무슨 책을 읽고 있는 걸까 궁금해서 슬쩍 넘겨다보기도 한다. 가장 많이 읽히는 것은 역시 바이블. 성경을 저렇게 성실히 읽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째 예수가 보면 혀찰 일만 넘쳐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다음으로 많이 눈에 띄는 것이 처세서적들. 무슨 처세술이 그렇게나 다양한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처세술을 읽고 성공했는지 궁금하다. 섯다판 하우스 벌어봐야 돈 버는 넘은 자리 편 놈이고, 죽빵 밤새 쳐봐야 돈 버는 건 당구장 주인이듯이, 처세술 허구한 날 팔려봐야 돈 버는 넘은 그 책 쓴 넘일 뿐인 듯 한데...

 

토익책이나 그와 비스무리한 어학책 보면서 심각하게 중얼거리거나 눈을 감고 복기를 하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다. 처세술책 보다는 차라리 그 쪽이 훨씬 빨리 성공할 수 있을 듯 싶은 생각이 든다. 최근 나타난 경향으로는 무협지를 무지하게 많이 본다는 거다. 요샌 정통무협이 아니라 오리엔탈 환타지라나 뭐라나 하는 것이 아예 한 장르로 자리를 잡았단다. 전철에서 시간 땜빵하기에는 아마 가장 좋은 분야의 책이 아닐까 싶다. 단행본 코믹을 보는 사람들도 꽤 있다. 뭐 기타 등등

 

소설이라고 해봐야 벌써 10년도 전부터 거의 들고 보질 않던 처지였는데, 최근 읽은 소설이 아리카와 히로라는 일본 작가가 쓴 "도서관 전쟁" 시리즈. 라이트 노블(light novel)이라고 하는 장르란다. 하긴 읽는 내내 에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느낌도 들고, 통신언어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굉장히 술술 읽히는 것이 시간 보내기는 참 좋은 느낌.

 

원래 에니메이션을 먼저 봤는데, 너무 속도가 빠른데다 중간 중간 뭔가 빈 듯한 인상도 받아서 소설책을 보게 되었다. 라이트 노블이라고 하지만 값은 헤비급이다... 권당 11800원... 첫 권만 사고 나머지는 후배 책을 돌려 읽었다.

 

하지만 이 책, 라이트 노블이라는 장르가 주는 선입견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내공이 있다. 비록 일본풍 회화체를 그대로 번역해서 굉장히 어색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인데, 번역으로 인한 나레이션의 어색함은 차치하고라도 주제가 주는 중량감은 꽤나 묵직하다. 어쩌면 지금 한국의 실정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오버랩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책 전반에 흐르는 주제는 검열. 그리고 표현의 자유. 물론 등장인물들 간의 러브러브도 빼놓을 수 없는 에피소드들이겠지만, 이건 일종의 장치로 치부해도 좋을 듯할 정도.

 

"미디어 양화법"이 발효된 지 30년 쯤 흐른 후의 일본은 '미디어 양화위원회'라는 검열단체와 이들과 결탁해 이익을 보는 집단들이 한 축을 이뤄 온갖 출판물, 언론미디어를 검열(물론 사후검열이라는 형식이지만)하고 탄압한다. 그 반대편에서, 지방자치단체를 축으로 하는 '도서대'가 검열반대 및 언론출판의 자유를 위해 무장투쟁한다. 여기까지의 흐름만 보더라도 이 책의 행간에는 놀라울 정도로 섬찟하게 현실의 한국이 겹쳐진다.

 

무엇보다도 라이트하지 않게 다가오는 부분은 이 희대의 악법인 "미디어 양화법"이 왜 생겨났는가 하는 원초적 질문이다. 그건 바로 사람들의 무관심. 내 일이 아니기에 나는 관심이 없다는 그 외면으로 인해 정부와 결탁한 이해집단들은 검열을 합법화하고 언론출판을 탄압할 수 있도록 하는 "미디어 양화법"을 별다른 무리 없이 제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관심을 자아비판하면서 그 모든 것이 바로 자신들의 일이었음을 자각하고 고백한다.

 

쌍용차 노조의, 그저 자르지만 말아달라는 요구가 잔혹하게 짓밟히고, 용산의 고통은 묻을 수 없는 고통으로 매일 살아나고, 거기에 미디어 관련 악법들은 날치기로 통과되는 등, 최근의 일들만 봐도 이 땅에선 도저히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이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다. 연말로 가면 승기를 잡은 정권과 자본은 계속해서 새로운 쌍용차 사태를 일으킬 것이고, 냉동실에서 차디차게 굳어 있는 용산참사의 희생자들은 여전히 몸을 녹이지 못할 것이며, 헌재가 어떤 판결을 내리던 미디어를 장악하려는 정권과 찌라시들의 욕망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오늘로부터 30년 후, 30년 전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벅차 힘겨워하는 오늘의 아픔이 지금보다 더욱 커져 있지는 않을까? 어느날 문득, 손에 잡힌 "도서관 전쟁"이라는 라이트 노블을 보면서, 이것이 혹시 예언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에 사로잡히지는 않을까? 가볍게 읽으려고 했던 소설임에도 왠지 착잡한 심경이 떠나질 않는 것은 내가 너무 감수성이 예민한 탓인가...

 

다 잊자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래선 안 되겠다. 이 무관심이라는 치유하기 힘든 병을 숙명처럼 안고 살 생각은 말아야겠다. 그것이 가슴속에 멍울이 져서 업보처럼 삶을 누를지라도 기억하고 분노해야겠다. 라이트 노블을 읽고 드는 생각치곤 꽤나 무거운 생각인 듯 하지만 그래도 이나마 얻었다는 것이 책 읽는 보람이 아니겠는가...

 

<덧>

혹시 관심 있으신 분은 '도서관전쟁 공식사이트'라도 한 번쯤 방문하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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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8 16:59 2009/08/08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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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처세술책은 저자의 처세술의 일환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곤 합니....;;;;

  2. 빌리도

  3. 책도 보고 아니메도 봤는데 ㅡ.ㅡ;; 아니메는 좀 별로.... 였던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