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 역사에 울리는 방송

장시간 통학(!)이다보니 지루하긴 해도 전철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요즘이다. 그래서 하루 일과의 최소 1회 이상은 국철구간에 몸이 떠다닌다.

 

플랫폼에서 전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방송이 나온다.

"철도노조의 불법파업으로 인하여 고객 여러분에게 불편을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뭐 죄송할 거 없다. 게다가 행인은 물론이려니와 플랫폼에서 전철을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어제 오늘 전철 안에서 철도노조 파업때문에 못살겠다 뭐 이런 소리 하는 사람들 못 봤다. 혹시 그 시간에만 공교롭게 죄다 좌빨들이 전철을 이용한 것일 수도 있겠다만. 까이꺼 전철 몇 분 늦게 도착한다고 한들, 어차피 경기도 일원에서 전철을 이용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파업사실을 알고 있는데다가 정 급하면 버스를 타던 자가용을 이용하던 대체수단을 강구하게 되어있다. 10여년 전에 지하철 파업했을 때 노조원들을 빨갱이니 개XX니 하던 승객들도 봤지만 이번엔 전혀 그런 모습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그닥 죄송할 거 없다.

 

그런데 상당히 귀에 거슬린다. 거진 20분 정도 전철을 기다리는 중에(중간에 전철이 지나갔지만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통과시킨 것도 있고) 방송이 수차례 흘러 나온다. 방송이 나올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어는 바로 "불법파업"이다.

 

그 방송에서는 파업의 원인이라고는 단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는다. 철도 종사자들의 열악한 작업환경도, 사측(사장이 허준영이다. 전직 경찰청장)의 일방적인 단협파기도, 야비한 임금감축 계획도 전혀, 네버, 단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는다. 필수사업장이기 때문에 조합원 전체가 아니라 거의 3분의 1 가량의 조합원이 계속 업무에 투입되고 있다는 사실이나, 군 병력까지 동원한 대체인력이 투입되고 있어 운행안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빠져있다. 그러면서 악센트를 주어가며 힘있게 반복되는 단어는 "불법파업"이다.

 

언제나 반복되는 궁금증이지만, 도대체 이놈의 나라에서 "합법파업"은 언제 해보는 건가? '준법투쟁'조차 불법파업이라며 단죄했던 어느때를 상기하더라도, 세계 12위 경제대국이라는 한국에서 과연 "합법파업"이라는 것이 가능하긴 한 건가? 노동관계법들을 훑어봐도 이건 뭐 사실상 "합법파업"이라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법구조에서 과연 저 방송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듯 "불법파업"은 영원한 고유명사란 말이냐?

 

차라리 이번 기회에 버스노조며 화물연대며 운송사업과 관련된 전 사업장이 총파업이라도 했으면 싶다. 불법파업은 얼어죽을... 아직도 사람들이 5공 시대에서 살고 있는줄 알고 있나보다.

 

그나저나 그 방송을 들으면서 왜 자꾸 집회해산 경고방송이 연상되는 걸까? 철도청장의 전력이 연상되어서 그런 걸까? 그렇다면 그건 좀 과도한 연상일 듯 싶긴 한데, 거참 들으면 들을 수록 욕이 나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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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7 21:15 2009/11/27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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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acked from
    • At 2009/11/27 23:03

    행인님의 [전철 역사에 울리는 방송] 에 관련된 글. 어제 오늘 지하철을 타고 여러군데 돌아 다녔지만 그다지 불편한 건 느끼지 못했다. 열차 운행 간격이 좀 조정됐다는 것 같은데 다행히도 시간이 잘 맞았는지 얼마 기다리지 않고 열차에 탓었다. 그런데 조금 거슬리는 건 플랫폼에 열차 도착을 알리는 전광판에 끊임 없이 '철도노동조합 파업으로 전동열차가 지연 운행되고 있습니다.' '철도공사에서는

  1. 근데, 율사들이 '불법'이라고 판정하지도 않은걸 '불법'이라고 하는건 문제가 있는거 아닌가요? 명예훼손으로 손배소 때려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능.

    • 그렇죠. 더구나 이번 파업 건은 '불법'이라는 딱지를 붙이기조차 민망한 수준이에요. 오죽하면 검경에서조차 아직까지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웃기는 건 경찰청장출신 허준영의 진두지휘를 받고 있는 철도공사만 내내 방송과 전광판에 "불법파업"이라고 떠들고 있다는 거죠. 하긴 도대체 철도공사사장자리에 전직경찰청장이 앉아 있다는 것도 나름 희한한 일이기도 합니다. 에혀...

  2.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제가 국철을 타는 곳이 경기북부 어느 전철역인데요, 이 역에서 웃기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난데없이 역 직원들하고 공익들이 왠 빨래줄 같은 거 들고 나와서 개찰구를 막는 거에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불법파업으로 열차가 지연되고 있으니 아직 나가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주 이상하게도 열차 운행간격은 평상시하고 거의 차이가 없거든요.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불법파업으로 열차가 지연되고 있으니... 어쩌구 합니다. 그래서 "아니, 지연되건 말건 승객들이 개찰구를 나가는 거 하고 무슨 상관이 있길래 여길 통제하나?"라고 물으니 안전을 위해서라나 뭐라나 합니다. "어차피 똑같이 운행되는데 예전에는 안전하고 지금은 불안전한 이유가 뭐냐?"라니까 불법파업때문에...라고 합니다.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이꼴 보면서 느낀 건, 적어도 이 파업을 "불법파업"으로 규정한 집단이 이용객들에게 불편함을 좀 느껴 달라고 시위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개찰구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항의를 하면서도 파업때문에 불편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 왜 이렇게 하는 거냐고 계속 묻거든요. 결국에 직원이 공익에게 "야, 그 줄 치지마" 이러면서 들어가더군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이 곳곳에서 벌어집니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세상입니다.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정녕 불편함을 느껴보시하고 강요하는 이 넋나간 사태를 어찌 이해해야할지...

  3. 아 놔 '법'이 무슨 전가의 보도도 아니고 뭣하면 다 불법인건가요 -ㅅ-

    • 결국 공안기관이 체포영장 발부하고 난리가 났죠. 웃기는 건 죄목이 업무방해랍니다... 이건 파업권 자체를 부정하는 거죠. 제정신들이 아닙니다. 하긴 대통령이라는 자가 나서서 이 경제위기에 무슨 파업이냐고 뚱딴지 같은 소리나 하고 자빠졌으니... 몇 년 전에 조선일보가 레미콘 노조 파업하는 거 보고선 "이 가뭄에 왠 파업?" 했던 것이 생각나더군요. 법이라는 것은 그래서 도저히 정치라는 것을 넘어서지 못하는 거네요.

  4. 저도 1호선 타고 다니지만... 정말 불쾌하더라구요 ㅡ_ㅡ 아예 철도공사사장 명의로 자보도 붙어 있더군요; 쳇쳇입니다;

    • 불쾌하기 짝이 없죠. 경찰청장 출신이라서 그런가, 집회시위에 대해선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네요. 콘테이너라도 쌓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