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방의 악몽

* 이 글은 현근님의 [저주받은 목소리...]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제대하고 복직한 후 전에 같이 근무하던 사람들과 회식을 하러 가게 되었다. 근무처는 달라졌지만 그래도 동료가 돌아왔다고 한 잔 거하게 빨자며 모인 사람들이 왜 그리 고맙던지... 그 사이에 많은 후배들이 들어왔고, 해설라므네 선배 사원들과 후배 사원들이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좀 묘한 것이 군대 가기 전만 해도 삼겹살 집에서 쐬주 좀 마시다가 삘 받으면 소주병에 숟가락 꼽고 기냥 한 곡조씩 불러 제끼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노래를 부르지 않는 거였다. 술 좀 오른 행인, 급기야 작업복 웃도리를 풀어 젖힌 후 소주병에 숟가락 두개 꼽고 소주병 하나를 가운데 끼워 마이크를 만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한자락 할라고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선배가 "쉑기 촌스럽기는... 그만 일어나서 노래방이나 가자"고 하는 거다. 갑자기 분위기 싸해지고 영문도 모르는 행인, 노래방이 뭔지도 몰랐던 순박한 행인은 기냥 노래방에 끌려 갔다는 거다. 가서... 적응이 되지 않은 행인, 그래도 한 노래 한다고 자부하던 행인, 기냥 촌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랬다. 노래방이라는 것이 그 때까지도 생소한 곳이었다. 처음 갔던 노래방의 분위기는 별로 맘에 들지 않는 거였다. 술도 없이 마이크 붙잡고 노래만 하는 곳. 이게 무슨 기분 잡치는 일인가 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노래방이라는 곳의 분위기가 영 맞지 않아서 잘 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살다 보면 하기 싫은 일도 하게 되는 법. 어쩌다 어울리고 술 한 잔 들어가면 노래방도 간혹 가게 되었다. 더 이상 삼겹살집에서 노래를 부를 수 없었으니까. 하긴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옆자리 손님들 목이 터져라 고래 고래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다른 손님들, 삼겹살이 목에 넘어가겠냐...



그러던 어느날 고등학교 동창인 L과 만났다. 물론 다른 동창넘들도 같이 만났다. 술 한 잔 진하게 빨고 난 후 당구장에서 green field의 낭만에 젖은 후 다시 맥주 한 잔. 이래 저래 넉넉히 취하자 갑자기 한 넘이 노래방을 가잔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쪽 저쪽에서 재청이요 삼청이요 오케이 콜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L 이녀석이 자긴 노래방 가기 싫단다. 거기 왜 가냐는 거다. 딴 넘들이 함 가자고 잡아 끄는데 이넘이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래, 뭐 싫다는 넘 억지로 끌고갈 일이 있나, 친구넘과 다투기 싫어서 그럼 술이나 한 잔 더 하러 가자고 하고 그날은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한동안 그 사건을 잊고 있었는데, 다시 이 넘들과 뭉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이 날은 좀 달리 쌩쌩한 후배넘들이 껴 있었다. 후배들과의 친분을 돈독히 할 요량으로 술집을 마냥 달려 나갔다. 워낙 술 좋아하는 넘들이라 이건 마셔도 마셔도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소주집 주인이 댁들처럼 술 퍼마시는 사람은 술장사 20년에 첨 봤을 정도라고 했으니까...

 

1차 끝나고 2차 끝나고 3차 가자고 선동질을 하고 있는데, 후배넘덜이 노래방을 가잔다. 문득 L 이넘이 노래방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라 그냥 3차 가자고 했더니 이 후배넘덜, 술 먹은 김에 꼬장을 부리기 시작했다. 길거리에서 생난리를 치는데 이게 장난이 아니다. 어느정도냐 하면...

 

한 넘이 갑자기 도로로 뛰어들더니 지나가던 택시를 막무가내로 세웠다. 저 시키가 뭔짓을 할려고 저러나 했더니 이 쫘식이 갑자기 운전사 아저씨에게 한다는 소리가 "아저씨, 선배들이 말야, 후배들이 노래방 가자는데 이걸 거부하면 이게 선배요 개쉑기요?"하는 거다. 어이가 없는 아저씨, 뭐 이런 싸가쥐 없는 자식이 다 있나 하면서 잽싸게 내빼버리고 우리덜은 기가 막혀서 이 버르장머리 없는 후배넘을 여기서 죽여야 하나 살려야 하나 고민하게 되었다.

 

사태가 심상찮게 돌아가자 결국 뭐 별 수 있나? 선배가 참아야쥐... L 이녀석이 큰 결심을 한 듯 외쳤다. "그래, 쒸바 까짓거 노래방 가자. 가서 죽자~~~!!"하고 힘차게 외친 후 보무도 당당하게 근처 노래방으로 기어들어가는 거였다. 후배들, 기가 살아 환호성을 지르며 노래방으로 달려들어갔고, 우리들은 뭐 쉬엄 쉬엄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노래방으로 들어간 후배넘들, 들어가자마자 한 넘은 노래 번호 찾느라 여념이 없고, 또 한넘은 양말 두 짝을 벗어 귓바퀴에 걸고 넥타이 풀러 마빡에 두르고, 다른 넘들은 음료수 사들고 와서 정신없이 벌려놓는다. 좌식들, 우리 친구넘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품 속에서 주머니 속에서 양주병이며 안주거리를 한다발씩 꺼내 테이블 밑으로 갈무리 했다. 아자씨 보면 난리가 나니까 모르게 한 잔씩 하려는 거였다. 선배가 달리 선배더냐...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면서 분위기는 무르익고 술 떨어질 때마다 후배 한 넘씩 나가서 또 보충해 오고, 너도 나도 이젠 기분 좋은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때였다. 후배 한 넘이 L에게 노래 한 곡 하라고 보챈다. 그러고보니 1시간 넘도록 시간이 흘렀는데 이 넘은 술만 홀짝 홀짝 처먹고선 노래 한 자락 하질 않았다. 친구넘들은 원래 저 놈이 노래방을 싫어하는 넘이니까 그렇겠거니 했는데, 후배들은 그게 아니었나보다. 어거지로 노래 한 곡 하라고 난리 부르스를 추는데 결국 L이 견디질 못하고 노래 한 곡을 지정했다.

 

드뎌 이넘의 노래를 듣는구나, 우리덜도 감격했고 후배넘덜도 감격했다. L이 마이크를 잡는 순간 행인은 물론 울 친구넘덜, 학교다니던 내내도 그랬거니와 졸업하고도 몇 년간 이넘을 만나면서 이넘이 노래부른 것을 못봤는데, 잘난 후배들 덕분에 드뎌 노래를 듣는다니 꿈이냐 생시냐 하면서, 하늘이 무너져도 있을 수 없을 것 같던 기적을 일구어낸 후배들에게 노래방 이후의 모든 시간과 자본을 투자하기로 약속했다.

 

후배들 신났다. 탬버린 깨지라고 두들기면서 한 넘은 테이블 위에 올라가 춤을 추다가 천정에 붙은 조명에 마빡 부딪치고, 다른 두 넘은 디스코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붙잡고 부르스를 추고 자빠졌다. 하긴 술 처먹고 맛 간 넘들이 뭔들 알겠냐? 그렇게 전주가 흐르고 노래가 시작되었다. 노래는 젊은 미소였다. 티비 화면에 5, 4, 3, 2, 1 카운트가 들어가더니 드뎌 역사적인 순간이 시작되었다.

 

"나아에 꿈 나아에 모오드은 거엇, 어어여어뿌운 꽃한소옹이

모오진 바람 불어어와아서 내에 꾸움을 데려 갔네..."

몇 소절을 불렀을까... 춤추던 놈들 어이 없어하면서 자리에 앉았고, 탬버린 두드리던 넘은 기냥 탬버린 놔버리고, 행인 비롯 다른 넘덜 하나 둘씩 담배를 입에 물고 바닥을 깔아보며 술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아... 그랬다. 그것은 노래가 아니었다.

 

제대로 맞는 것은 가사밖에 없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는데 모니터에 가사가 나오고 있으니까. 음정 박자가 완전 제 각각 노는 것은 둘째 치고, 이넘은 음치 중에서도 최고 고수급이었다. 그러니까 어떤 정도냐 하면... 도레미파솔라시도가 제 음정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낮은 음은 작은 소리로 높은 음은 큰 소리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었다. 이거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심오한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경지다. 일부러 하라고 해도 할 수 없는 그런 경지인 것이다. 요 근래 미소는 살인미소지만 완벽한 음치로 소문난 어떤 연예인도 이 L 앞에서는 새발의 피요 사카린 앞에 설탕이다. 낮은 음은 작은 소리로, 높은 음은 큰 소리로 음정의 높낮이를 목소리의 크기로 변조하는 인간이 있으면 이 L과 만나 세계를 논해도 된다...

 

행인과 행인의 친구덜...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술을 들이키고 있는데, 눈치없는 후배쉑덜이 키득거리고 웃기 시작하더니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뒹굴기 시작했다. 분위기 잡고 노래 부르는 통에 후배들이 뒹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L이 결국 후배들의 광기어린 웃음의 행진을 보게 되었다. 노래가 갑자기 중단되고 이 L녀석, 성질을 버럭 내더니 마이크를 홱 집어 던지고 노래방 문짝을 부서져라 걷어차면서 나갔다. "이런 쉬벌, 그래서 노래방 안 온다고 했잖아, 이 개쉑덜아~~!!"

 

졸지에 분위기 살벌해지고 우르르 몰려나가면서 L을 붙잡았다. L의 기분을 풀게 해주려고 대로변에서 후배들을 한따까리 하고 포장마차로 들어가 쏘주 사주면서 화풀라고 벼라별 아양을 다 떨었다. 후배넘덜 연신 미안하다고 머리를 조아리고... 한참을 그런 후에야 L의 화가 좀 풀렸다.

 

"그래 그래, 거 뭐 까짓거 그거 가지고 성질을 내고 쥐랄이냐, 술 마시고 풀어라."

"어, 형, 미안해요. 뭐 우리가 웃을라고 그런 것은 아니고, 하도 웃겨서 그만.."

"아 이 쉑덜이 그만 하라니까, 기껏 화 풀어놨는데 또 염장을 지르고 쥐랄이여?"

"아, 참 그게 아니고 사과하는 거잖아요. 아무튼 정말 그런 노래 첨 들었어여."

"이거떨이 아직 정신을 못차렸나, 다 대가리 박어!"

"..."

"화 풀어라. 거 뭐 애들이 다 그렇지 뭐."

말도 없이 소주잔만 들이키던 L이 대가리 박고 있던 후배들이 보기 안쓰러웠는지 후배들 보고 일어나라고 했다. 후배들, 이제는 말도 없이 조심 조심 소주만 빨고 있었고, 우리들은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같이 있던 친구넘 중에 C라는 넘이 있었다. 이 넘은 원래 웃음을 못참는 걸로 우리 사이에서 아주 유명했던 넘이었다. 이 넘이 자꾸 키득거리기 시작하는 거였다. 지 딴에는 미안하니까 웃음을 참을라고 이를 악물고 딴 생각을 하려 노력하는듯 했는데, 그게 맘대로 안 되었나 보다. 계속 키득거리는 것을 눈치채고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있는데, 이넘이 참다 참다 안 되겠는지 그만 포장마차가 떠나가라고 웃기 시작했다.

 

웃어도 그냥 웃는 것이 아니라 뱃가죽을 부여잡고 웃다가 그만 의자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굴러떨어졌는데도 이넘은 데굴거리면서 계속 웃고 있었고, 그 모습이 어찌나 웃기는지 한 따까리 했던 후배들마저도 다시 웃기 시작했다. 그걸 말려야하는 행인도 결국 웃음이 터져 나왔고, 친구넘덜 모두 웃기 시작했다. 진짜 웃기는 거는 영문도 모르고 포장마차 주인아저씨도 따라웃기 시작했다는 거다.

 

웃음이 멈출줄 모르고 이어지는데, L이 벌떡 일어나더니 "이런 쉬파! 앞으로 내 너덜 만나면 사람이 아니라 개다 개!" 그러더만 휙 하니 뛰쳐나가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쫓아나갔을 때는 이미 택시를 잡고 출발하고 있는 L이었다.

 

지금도 그 넘 만나면 절대 노래방 가지 않는다. 아니, 못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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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5 03:57 2004/10/25 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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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행인님 글을 재미 있게 읽고 있었는데, 덧글을 남기지는 못했었네요. 그런데, 이번 글은 너무 재미있어요. '사카린 앞에 설탕'으로 모든게 이해 됩니다. 너무 재미있어요.

  2. 저도 hand님 글 왕팬이랍니다. ^^ 특히 지난번 투표 이야기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자주 찾아 뵙겠습니다. 꾸빠닥~~ m(-.-)m

  3. 산오리가 아는 한 사람은 '섬소년'을 제멋대로 부르는데...
    '엄마가 섬그늘에...' 노래인지 시조인지, 구분 못하죠..
    그런 사람들에게 노래방은 고문인데... 그래도 이양반은 꿋꿋하게
    끝까지 부릅니다... 다들 귀막고, 소리지르고 해도 의연하게...ㅋ

  4. sanori/ ㅋㅋㅋ 제 선배 한 분도 그렇습니다. 이분이 강조하시는 음치의 3대 기조. 음정 무시, 박자 무시, 관객 무시... 이 선배는 고등학교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딱 한 곡만을 부릅니다. 사이먼 가펑클의 브리지 오브 트러블 워터... 딱 한글로 쓸 수 있는 발음으로 부릅니다. ㅋㅋㅋ

  5. 역시 행인님의 입심은 대단하군요.^^ 언제 어디서나 나오는 이 구라빨의 정체는???

  6. 정체는... 기냥 구랍죠, 녜... ㅋㅋㅋ

  7. 안녕 행인?
    요즘은 제가 좀 뜸했지요?

    이벤트 당첨 선물이 대기중인데,
    너무 바쁘셔서 받을 수 있을라나요?

    우편으로 보내드릴까요?

  8. 옷~~~!! 이러나~~~!!!!
    당첨선물을 기냥 우편으로 받음 뭔가 허전할 거 같은디요...
    조금 지둘렸다가 우리들도 이벤트 함 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어때여?? *^^*

  9. 후후, 그렇지요? *^^*

    그런데 문제는.

    제가 다음주 월요일부터 함양에 있답니다.
    최소 17일동안..
    자 행인, 우짤랍니까?

    정녕 11월말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요?

  10. 여지껏두 지둘렸든데 11월이 뭐 며칠 남았슴꽈?? ㅋㅋㅋ

  11. 많이 남았슴돠!!
    선물 따위 내가 다 먹어버릴거얏.

  12. 이러나/ 음... 그게... 먹는 거였슈??? ㅜㅜ

  13. 그건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