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말 대잔치라더니

글을 쓰든 말을 하든 간에 인식의 흐름에 맡겨놓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난 도통 어떻게 그런 재주들을 가지고 있는지 항상 희안할 뿐이다. 그게 된다는 게 신기하다는 거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인식의 흐름에 모든 걸 내맡기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이야기들이 활자화되어 나오는 걸 보게 된다. 특히 요즘에는 그런 글들이 꽤 보이는데, 이번에도 대표적으로 그런 글 하나가 보였다.

프레시안: 민주당 위성정당? 노무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곽노현 전 교육감의 글이다.

핵심은 두 가지 제안을 더민당이 받으라는 건데, 하나는 더민당이 비례정당을 만들거나 비례후보를 내지 말고 비례는 그냥 진보정당에게 밀어주라는 것, 다른 하나는 진보정당들은 지역구에서 민주당과 선거연대 하라는 것.

난 도대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그 상상력이 부러울 따름이다. 우선 몇 가지 선택지에 따른 각 정당별 또는 정치세력별 비례의석획득 예상을 보자. 저 표를 위해 동원된 예상 득표비율은 그럴 수도 있다. 맞으면 성지순례글 되는 거고. 그런데 여기 중요한 핵심 하나가 빠졌다. 유권자들이 정확하게 비례용 정당에게 자신들의 표를 내주는가이다.

여기에는 먼저 미통당이 비례후보를 내지 않을 것이 전제된다. 정말 그렇게 할까? 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 미통당으로 최근 기어들어간 자들 중 비례자리 보고 들어온 자들을 전부 미한당으로 보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부조정이 필요하다. 아니 그래 미통당 배경 업고 들어와서 비례 한 자리 할 욕심에 가득했던 자가 넌 미한당으로 가서 비례 나가라 그러면 그냥 군말 없이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게다가 미통당 후보들이 선거운동을 할 때 절대 미한당 비례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 현행 선거법이 그렇게 되어 있다. 미통당 후보들이 미한당 이야기만 벙긋 해도 더민당이나 정의당 등이 가만 있겠나? 저거 고발~! 신난 검찰과 선관위가 칼춤을 추고... 이 와중에 과연 30~35%의 철벽 수구지지자들이 정확하게 지역구와 비례를 구분해서 지역구는 미통 찍고 비례는 미한 찍는 이런 일이 완벽하게 벌어질 수 있을까?

뭐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차원에서 더민은 어떻게 할까? 아직까지는 명분상 비례용 정당을 만들기는 어려울 거 같다. 정봉주나 손혜원이 동떠서 뭐 하나 만들어 놓으면 못이기는 척 따라갈 수도 있다. 하지만 더민이 그렇게 할지는 의문이다. 그것들도 뇌를 가진 것들인데 계산기에 답이 안 나오는 짓을 하진 않을 거고. 

더민이 직접 나서지 않은 상태에서 더민의 비례용 위성정당이 만들어진다고 가정하자. 정봉주나 손혜원이 동을 떠서든 어쨌든 간에 말이다. 그럼 이 때 더민은 어떻게 해야 하나? 자당의 비례후보를 깡그리 소거해야 하나? 비례는 우리 찍지 말고 저쪽 찍어 주세요. 이렇게 할 수 있나? 

혹은 아예 더민이 직접 비례용 위성정당을 만들었다고 해보자. 이 경우도 마찬가지. 정말 지역구와 비례 구분해서 지지자들의 표를 확연하게 분류할 수 있나? 오히려 차선책으로 더민을 바라보던 유권자들의 마음까지도 되돌려놓을 수 있는 판국인데 과연 이런 도박에 무슨 승산이 있다고 더민이 덥썩 움켜쥘까?

하긴 뭐 어떤 가능성도 존재하는 판국에, 저 칼럼의 표에서 전제된 그런 구획이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도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저 표를 보여주면서 더민에게 자, 통 큰 결단 한 번 하는 게 어때? 라고 제안해봤자, 일단 더민이 안 받을 거고, 다음으로 그렇게 되면 결국 '범진보'로 분류되었던 더민 이외의 정당들은 알고 보니 더민의 위성정당이었을 뿐이라는 게 확실해진다. 그렇게 되면 기왕의 진보정당이니 뭐니 하는 타이틀은 그냥 다 사기가 되는 거고.

일단 더민당이 비례후보를 내지 않는다는 건 더민당에게 쥐뿔 암 것도 하지 말라는 거와 마찬가지다. 그나마 비례에서의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다른 야당 쌩까고 끝까지 미통당 눈치보며 기었던 건데 이제와서 비례를 안 내? 더민당이 그런 제안을 받을 이유도 없고 받을 가능성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더민당에게 비례후보 내지 말고 진보정당들에게 양보하라는 건 도대체 뭔 의미가 있는 제안인지 알 수가 없다.

다음으로, 진보정당들로 하여금 지역구에서 민주당과 선거연대 하라는 건데, 이건 그냥 더민당이 지역구 후보 낸 지역에서는 다른 진보정당들은 후보 내지 말라는 이야기일 뿐이다. 왜 그래야 하는데? 그동안 지역에서 쎄가 빠지게 정치활동을 해온 다른 정당들의 후보는 그럼 지금까지 더민당 후보가 강림하면 갖다 바치려고 지역구 다져놨던 건가?

도대체 이런 망상에 가까운 상상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뭘까? 곽감은 이에 대해 어떤 목적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바로 "정치개혁, 특히 국회개혁을 해내고 민주주의를 공고하게 만드는"데 방점을 두었다고 한다. 아니, 이런... 죄송하지만, 난 이런 식으로 자리 따먹기 하는 걸 민주주의로 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해서 확보된 의석으로 밀어부치는 어떤 일련의 행위들이 과연 "정치개혁, 특히 국회개혁"을 해내는 "민주주의"인지 동의가 안 된다.

아무튼 그렇다면 곽감이 그리고 있는 공고해진 민주주의는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는가? 미통당의 의석을 100석 아래로 끌어 내린 후 촛불 개헌과 개혁 입법을 해내는 것이다. 아니 지금 "촛불정권" 들어선 이후 미통당 계열 때문에 뭐 개혁이 안 된 건가? 물론 걔들이 딴지 건 것도 적지 않다만, 아니 그동안 충분히 지지기반이 받쳐주고 있는 동안에는 정권과 더민이 왜 저렇게 어영부영 하면서 노닥거리고 있었던 건가? 

글 가운데에 곽감이 얼마나 낭만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문장이 있다. 더민이 이런 제안들을 받아들이면, "무엇보다 희생을 감수하고 시대정신과 소명의식 실천에 나선 민주당에서 국민들이 희망과 감동을 발견하고 정치혐오와 불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안 됐지만, 더민이 약간 정신산란한 와중에 이런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한들 여기서 국민들이 희망과 감동을 발견하거나 정치혐오와 불신을 극복할 가능성은 없다. 오히려 더 심해지면 몰라도. 특히 진보진영은 멘붕에 빠지게 될 거다. 저런 산술적 정치공하게 휩쓸려 진보정당들이 보수정당 더민당의 위성정당으로 전락하는 걸 기꺼이 감수한다면 아마 이후 진보정당운동은 진정한 궤멸 수순으로 접어들게 될지도 모르겠다.

뭐 그냥 어르신이 이렇게 되면 좋지 않겠나, 하는 덕담 수준에서 하신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이 글을 처음 봤을 땐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아, 곽감께서 여전히 왕성하게 고민도 하시고 활동도 하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런데 이걸 또 좋다고 퍼 나르고 격찬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어이가 없었다. 어르신의 덕담은 그냥 덕담으로 넘기자. 이게 마치 진짜 현실 가능한 건데 더민당이 왜 이런 좋은 이야기를 안 받아주냐고 설레발치는 짓은 좀 그만하고. 그렇게 설레발이들 치는 게 대깨문하고 뭔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언젠가 했던 말이지만, 이래서 철인정치는 절대 해서는 안 된다. 플라톤 개객끼...)

(아, 그리고, 제목에 "노무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묻고 있던데, 노무현이라면 이런 생각 안 했겠지. 그리고 이런 글을 읽으면 웃었겠지 뭐. 기본적으로 노무현이 승부사라는 건 이런 류의 계산을 하지 않고 정공법을 택했기 때문인데, 아니 그걸 무시하고 "노무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물어보다니. 글구 이제 죽은 사람들 자꾸 꺼내들지 말자. 안 그래도 정의당 비례나온 것들이 노회찬 갖다 붙이는 거 보면 신경질나는 판국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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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6 13:56 2020/02/26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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