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주기 캘린더 사업의 한계

나야 뭐 음력설을 쇠니 새해 인사는 설날 가서 하기로 하고...

어쨌거나 달력상 2022년이 시작됐다. 대형 정치이벤트가 연거푸 치러지는 해이다. 단연 가장 관심을 받는 건 대선이다. 그렇잖아도 기성정당 나눠먹기로 전락하고 있는 지방선거가 대선에 가려져 논공행상하듯 흘러갈 것 같아 안타깝다.

역대 최악의 후보들이 난장판을 벌이고 있다는 평가가 횡행할 정도로 대선이 막장분위기다. 이런 상황을 뚫고 나갈 진보좌파의 역량을 아쉬워 하는 소리도 높아진다.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이런 저런 대안이 제시되기도 하고 또 추진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게 민중경선이다. 연말에 경선룰에 대한 이견으로 결국 해를 넘기면서도 어떻게 민중후보를 만들어낼 것인지는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그 와중에 참여한 단위 간 서로에게 책임을 묻는 행태도 발견된다. 진행상황을 보면 답답하기 이를 데가 없다.

답답한 이유는 경선이 제대로 진행되어 민중후보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식의 관성화된 캘린더 사업을 얼마나 더 지켜봐야할지 몰라서이다.

이번 민중경선 과정을 조금만 보자. 참가 단위는 크게 보면 5개 정당과 민주노총이다. 노동당, 녹색당, 변혁당, 정의당, 진보당(가나다 순) 등 5개 정당이 참여했다. 정당 외의 사회운동단위는 민주노총 외에는 보이질 않는다.

이 가운데, 녹색당은 경선 후보를 내지 않았다. 노동당과 변혁당은 사회주의 후보 경선을 통해 이백윤 후보를 냈다. 정의당에서는 당의 후보로 심상정을, 진보당에서는 김재연을 냈다. 여기에 민주노총의 후보로 한상균 전 위원장이 나왔다. 경선후보는 모두 4명.

자,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과연 이들은 대통령선거에 어떤 의의를 두고 출마를 하였느냐이다. 왜 이 지점을 살펴야 하는가. 바로 후보에게 표를 줄 대중=민중에게 어떤 비전을 보여줄 것이며, 어떻게 신뢰를 얻을 것인지와 직접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정당활동을 해왔고, 정당차원에서 국가적 전망과 실천경로를 제시해왔던 과정에서 나온 후보들이 있다. 해당 정당의 강령과 정책이 어떤 수준인지는 논외로 하고, 대선은 이러한 강령과 정책을 대중들에게 평가받는 과정임을 주목하자.

사실 유권자들이 대선에서 무슨 후보자들의 이념이나 정책을 본단 말인가라며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대선이라는 짧은 과정만 보면 그런 말이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대선이 평상시 아무 일도 없다가 때 되면 그냥 한 번 때우는 과정이 아님을 염두에 둔다면, 이런 평가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금방 알 수 있다.

대선은 불과 서너달을 상관으로 치러지는 이벤트가 아니다. 지난 시간 동안 누적된 정치적 결과물들을 놓고 대중의 평가를 받는 과정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상당한 시간에 걸쳐 대중들에게 존재를 알리고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좌파에게도 정당운동은 중요한데,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대중을 만나면서, 대중과 지속적이고 연속적으로 만나면서 신뢰를 쌓는 방법으로 정당이 가장 중요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의 정당에 관한 제도는, 누누히 말하지만 박정희가 쿠데타 하고난 직후에 만들어놓은 1962년 정당법 체제에 그대로 결박된 상태에서 군소정당의 발전을 근본적으로 막아 왔기에 진보적 좌파적 정당들이 힘을 쓰지 못하는 한계가 되어왔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변혁을 갈구하는 정치세력들은 정당운동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고단하고 고독한 게 진보정당운동이지만.

제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쌓아오는 건 중요한 일이고, 대선에 임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반이다. 여기서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지금 대선에서 후보전술을 채택하겠다고 하는 민중경선 참여 단위 중 이러한 기반을 적립해왔다고 자신할 수 있는 조직은 얼마나 되는가?

각 정당 및 정당의 후보자들에 대한 개별적인 비판은 논외로 하겠다. 어차피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 장단점이며 한계 등등에 대해선 다들 알테니. 다만, 한상균 후보와 민주노총에 대해선 짚고 넘어가야겠다. 그리고 이런 식의 민중후보 단일화가 과연 적절한 대선전술이 될 수 있는지도 검토해봐야겠다.

우선 한상균 후보는 앞서 말했던 대선 출마의 전제조건, 즉 이념과 정책을 걸고 책임있는 정치주체로서 지속적이고 연속적인 접촉을 통해 유권자들의 정치적 신뢰를 쌓아 왔는지는 의문이다. 대통령은 민주노총 조합원 투표만으로 선출하지 않는다. 민주노총 조합원을 넘어서 대중=민중의 신뢰와 지지를 어떻게 만들어 왔는가?

민주노총이 정당처럼 대중과 접촉할 수도 없다. 본질적으로 민주노총은 정당이 아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네셔널 센터의 역할을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당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를 민주노총의 후보로 내세울 지라도 대중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평상시에 대중들에 대한 정치적 표면적을 넓히는 작업을 해야 하지만 그 한계가 역력하다.

그럼에도 때만 되면, 대선시기만 다가오면 민중후보, 독자후보, 단일후보 등등의 명분을 내세우면서 다른 정당들을 압박한다. 그렇게 하면서 또 조합원의 합일된 의사표현으로 일관되게 조합원의 투표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지난 시기 각 선거에서 소위 민주노총 후보들이 받은 표들을 보라.

혹여라도 이렇게 민중후보, 단일후보를 만들면 보수정치에 균열을 내면서 유의미한 정치적 성과를 거둘 수 있는가? 오히려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 보수후보 간 정권다툼의 와중에 그나마 의미 있는 진보진영의 여력을 보여줬던 사례는 민주노동당이 끝이었다. 그 이후 소위 민중후보 단일화는 그다지 효과적으로 추진되지 않았고, 의사에 합치도 이루지 못한 채 분열한 때도 있었으며, 지난 19대 선거에서 심상정이 6%를 받은 게 근간의 최고 성적이다. 오히려 이땐 후보단일화니 뭐니 하지도 않았다.

이처럼 소모적이면서 관행적인 캘린더 사업을 반복하는 것은 오히려 대중들로 하여금 쇠락한 진보좌파에 대한 환멸만 더 부추기는 것이 아닐까? 예컨대 기왕 할 거 같으면, 차라리 한상균 전 위원장이 진작에 후보출마 의사를 밝히고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견지하면서 상당한 시간 동안 존재를 알리는 동시에 입지를 다지고, 그 후 각 정당들에게 단일화든 뭐든 요구했어야 한다. 내도록 당위적인 이야기만 하면서 시국의 돌파를 위해선 민중후보를 내야 한다는 둥 경선을 해야 한다는 둥 하다가 어영부영 출마해서 경선하는 이런 모습으로 과연 어떤 유권자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가? 민주노총 조합원? 글쎄...

이건 그냥 내 생각일 뿐이지만, 이런 식의 캘린더사업형 정치활동은 써클주의 이상의 의미가 없다. 평소에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유권자들에게 때 되면 나타나 나 여기 살아있소를 외쳐봐야 눈길을 받기는 어렵다. 눈기를 끌기 위해 경선을 하니 뭘 하니 해도 어차피 그 경선을 통해 나올 수 있는 결과물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너무나 명확하기에 유권자들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처럼 유권자들로부터 외면받는 과정을 진행하면서, 그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만 힘 빼고 서로 감정만 쌓인다. 이런 걸 왜 5년마다 반복해야 하는가?

최근 어느 후보를 만드는 와중에 칠레 대통령 이야기가 나왔던가보다. 그들도 민중의 힘으로 대통령을 만들었는데, 우리라고 그렇게 하지 못하리란 법이 없잖느냐는 거다. 마빡에 쥐 오르는 줄 알았다. 어디서 많이 보던 패턴 아닌가? 시리자가 흥하니 투쟁하면 대중이 알아준다는 둥 포데모스가 뜨니 또 투쟁이 장땡이라는 둥 하던 그런 패턴.

칠레의 신임 대통령 가브리엘 보리치가 젊은 나이에(36세) 대통령이 된 건 전철요금 오른 거에 빡친 칠레 대중이 에라 모르겠다 하고 걍 찍어버려서 대통령이 된 게 아니다. 이미 27에 무소속으로 하원의원도 했고 재선의원인데다가 중도좌파연합의 단일후보로 지지받는 상태였다. 그러한 정치적 경력과 대중과의 관계가 결정적 시기에 칠레 유권자들의 지지로 이어지면서 결선투표까지 거치면서 대통령이 되었다.

정당운동을 포기하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이번 민중경선과 같은 사례가 반복되는 것에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다가 세력 간 조율도 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이념과 정책의 정당 간 연합을 해보자는 '대선전환추진위원회'에 참여하는 소위 진보좌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11월 13일 노동자대회를 비난했던 국민의당과 뭔 연합을 하겠다는 건가? 이건 페미니스트와 안티메미니스트를 한 품에 안겠다는 윤석열 캠프와 차이가 없다. 뭔 정신들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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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3 12:39 2022/01/03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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