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우리 집이야...

술이 과하면 실수가 당연히 따르는 것이라고들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술 마시고 실수한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는 굉장히 관대한 경향이 있다. "뭐 술이 그런 거지  사람이 그랬겠어?" 라던가, "술 마시면 다 그렇지 뭐"라던가 하는 책임전가식 혹은 동병상련식 온정주의가 무한 발현되는 것이다. 이건 사실은 그 이면에 나도 언젠가는 술 퍼먹고 실수를 할 수도 있을테니 그 때 니들도 좀 봐줘... 이런 상호부조의 함의가 숨어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술이 과하다고 실수가 당연히 따르는 것만은 아니다. 주변에 잘 살펴보면 아무리 술이 취해도 실수 하나 없는 사람 무수히 많다. 또 모든 실수가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두고 두고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는 경악스러움을 주변 사람들에게 남기는 사람도 있는데, 이건 지난 다음에야 그 때 그런 일이 있었지 하는 추억으로 남을 수 있겠지만, 사건 당시에는 거의 미치고 환장하는 수준까지 주변사람들을 몰고가는 일도 있다. 그런 거, 참으로 용서가 어렵다...

 

 



이 형님은 신체 사이즈가 행인과 거의 비슷했다. 체형이 거진 같다보니 작업복도 니꺼 내꺼 할 거 없이 먼저 입는 넘이 임자였고, 외출 할 때도 서로 맘에 드는 옷이 있으면 그냥 입고 나가면 될 정도였다. 물론 행인이야 옷이 없기 때문에 거의 일방적으로 이 형님의 옷을 행인이 입는 형태였지만서도... 행인과 이 형님의 가장 큰 외형상 차이점은 두발상태였다. 행인은 완전 생머리, 이 형님은 막 아프리카 대륙에서 수입한 듯한 곱슬머리...

 

외관상 그닥 호감있게 생긴 바닥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형님, 이상하게 '로멘스'가 많았다. 먼 넘의 가슴아픈 실연의 상처가 그렇게 많았는지, 한 해에도 서너번은 가슴 부여잡고 그녀를 기다리겠노라고 징징거리는 일이 속출했다. 재주도 좋지, 행인은 항상 그게 부러웠던 거라... 그래 참 자주 어울리기도 했다. 같은 부서였기 때문에도 그랬고, 워낙 서로 술을 좋아하기 때문에도 그렇다.

 

그런데 이 형님, 술 취하면 아주 각별하게 신경을 써야만 한다. 매우 큰 사고를 가끔 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 형님의 술버릇이 특별히 어떤 경향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술버릇이라는 것은 이상하게도 특정한 경향성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술 취하면 항상 우는 스타일, 어디 가서 자빠져 자는 스타일, 남에게 시비거는 스타일, 꼭 좋은데(?) 찾는 스타일 등 "그넘은 그런 술버릇이 있어"라고 이야기할 정도의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형님은 그게 없었다. 말 그대로 종횡무진이었던 거다. 또는 매우 다양한 술버릇을 버라이어티하게 가지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형님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이렇다. 술 퍼먹고 택시를 타면서 택시 문 앞에 구두를 가지런히 벗어놓고 맨발로 택시에 오르는 거다. 한 번은 잘 가라고 손 흔들고 택시 떠나보낸 후, 택시 떠난 자리 바로 앞에 구두코도 일자로 정렬된 한켤레의 구두가 놓여있음을 발견한 적이 있다. 아무튼 이튿날 구두사러 가자고 하면 백발백중 전날 떡이 되도록 술퍼마신 거다.

 

또 다른 짓으로는 남에게 시비를 거는 거다. 술자리에서 직장 동료에게도 시비를 거는 경우가 있었고, 특히 상사에게 시비거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래도 그럴 경우에는 좀 양호한 것이 주변에 말려줄 사람도 있고 해서 그냥 그저 그렇게 끝나는 일이 많았는데, 문제는 안 보이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뭐 수시로 팬더가 되서 들어온다. 그래 또 술을 얼마나 들이 부었길래 이렇게 되었냐고 하면, 엄청난 환타스틱 무협스릴러물을 장시간에 걸쳐 침튀겨가며 설명한다. 그나저나 도대체 그넘의 17대 1은 누가 만든 이야긴지 허구헌 날 17대 1이다. 혹시 17대 1의 출처를 아는 분은 연락바란다.

 

뭐 이런 것들 뿐만이 아니라 남의 집에 무단으로 들어가기, 노숙자랑 껴안고 자기 등등 파란만장한 일들이 많이 있었다. 술 마시면 말은 또 왜 그리 많아지는지... 아무튼 그래서 이 형님하고 술을 마실 경우 끝까지 집으로 모셔가는 애프터서비스정신을 발휘할 것인지 아니면 1차만 하고 잽싸게 튈 것인지를 빨리 결정해야만 했다. 물론 어영부영한 행인, 술마시자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한 번도 튀어본 적이 없는 결과 무지무지 속상하는 경험을 많이 해야만 했지만서도...

 

그러다가 결정적인 사고가 터진 거였다. 하루 동안 이 인간이 지가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실수를 다 저지른 것이다. 동인천에서 떡이 되도록 술을 퍼먹고 2차 3차를 가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술이 취한 후부터가 문제였다. 갑자기 어디론가 이 인간이 사라진 것이다. 집으로 간 것 같지는 않고, 해서 술이 다 깨도록 돌아다니다보니 술집 골목 쓰레기통 옆에 쭈그리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하필 잠을 자도...

 

그래 깨워서 집에 가자고 했더니 죽어도 술을 더 마셔야겠다는 거다. 또 술집을 들어갔으나 이미 떡이 된 인간이 술을 더 마시지도 못하고 있었다. 질질 끌고 나가 택시를 태우고 이 형님의 집이 있던 주안으로 가게 되었다. 뒷자리에서 코를 드르렁 거리며 자던 이 인간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손바닥으로 운전사의 뒤통수를 강타하는 거다. 오밤중에 총알로 달려나가던 택시가 순간 요동을 치면서 도로 한 복판에서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아 쉬파... 이 쉑 이거 머여??" 하고 운전사가 극도로 흥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 너... 뭔데... 말야... 끄~억... 뭔데... 응? 내 앞에.... 얼쩡거리... 느냐... 말야... 엉?" 혀도 돌아가지 않는 인간의 이 불쌍한 대사가 나오는 동안, 행여 운전사가 주먹이라도 날릴까 하여 운전사의 어깨를 붙잡고 연신 죄송하다고 할 따름이었다. 이 인간 술이 넘 취해서 그런 거니 이해하시라고, 그래 내려서 딴 차 타고 가겠노라고 겨우 운전사를 달래놓고 이 형님을 택시에서 끌어 내렸다.

 

그런데 내린 곳이 하필이면 무쟈게 넓은 대로의 중앙선 부근이었다. 새벽녘에 차들은 날라다니고, 술취한 이 인간이 해드라이트불빛만 보면 허부적 거리며 그 앞으로 달려나가는 통에 온 몸은 땀으로 절고 술은 다 깨고 나중엔 부아가 실실 치밀기 시작했다. 목숨을 걸고 차선을 헤집은 후 겨우겨우 인도까지 나왔는데, 이 형님 술 한 잔 더 하자고 생 난리가 났다. 에혀... 이걸 버리고 갈 수도 없고... 억지로 달래고 달래면서 겨우 겨우 택시 한대를 또 잡았다. 이번에는 행인이 안으로 들어가고 이 형님을 나중에 태웠다.

 

차를 출발하려고 하는데 이 인간이 앞 좌석 위로 다리를 올려놓았다. 운전사, 신경질 나는 얼굴로 다리 좀 내려놓으라고 하는데 행인, 미안한 마음에 이 형님의 두 다리를 붙잡고 좌석 아래로 끌어내리는 순간... 없었다.... 이 인간 그새 구두를 벗어두고 올라탄거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차를 세우고 다시 한참을 뛰어 택시를 탄 곳까지 찾아갔다. 워낙 오밤중의 총알택시라 불과 1분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그동안 꽤 멀리도 갔다. 택시 탄 주변을 계속 두리번 거리고 있자니 진짜 가지런히 벗어놓은 구두가 보였다. 성질나는 거 꾹꾹 눌러참고 구두를 줏어 들고 다시 택시가 있던 곳으로 허겁지겁 뛰어갔다. 와보니 택시는 간 곳이 없고 이 형님만 바람빠진 가죽부대처럼 팽개쳐져 있었다. 그것도 차도에...

 

아니, 이런 십장생같은 쉑기가 있나, 이런 게시판 같은 어쩌구 있는대로 달아난 택시기사를 향해 욕지거리를 해가면서 인간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서는 다시 택시를 잡았다. 구두 들고 행인이 안쪽에 타고, 선채로 이빨을 부드득 거리며 갈고 있던 이 형님을 간신히 택시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곤 겨우 택시를 출발시킬 수 있었다. 사람 무던히 좋아보이는 이 택시 운전사 아저씨, 혹시 손님이 토할 거 같으면 바로 이야기해달라는 친절까지 보이면서 시속 150km에 육박하는 속력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찬 바람을 맞으며 열을 식히고는 이 형님을 보니 턱을 주억거리면서 뭘 궁시렁 궁시렁 하는 소리를 내며 잘도 퍼질러 자고 있었다. 이제야 겨우 이 정신나간 오밤중의 미치고 환장할 짓이 끝나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직 이 형님의 집은 멀리 있었고, 집에 갈 동안 이렇게만 있어준다면야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안도감도 잠시, 갑자기 이 형님, 부르르 몸을 떨더니 상반신을 곧추 세운다. 급작스런 자세변화에 당황한 행인, 이 인간이 또 운전사의 뒤통수를 가격하지나 않을까 해서 같이 상반신을 세우고 또 무슨 일일까 하고 긴장하고 있었다. 순간 두 눈을 번쩍 뜬 이 인간, 짧은 순간 동안 고개를 두리번 거리더니, 순식간에 택시 문을 열었다.

 

총알처럼 달리고 있던 택시의 뒷문이 덜컥 열리고, 행인도 당황하고 운전사도 당황하고, 오밤중에 그 넓은 도로 위에 타이어의 파열음이 울려퍼지고, 택시가 갈지자로 덜컹거리는 통에 그나마 남아 있던 정신이 다 나가버리는듯 했다. 운전사 아저씨, 뒤를 돌아볼 생각도 못하고 핸들에 얼굴을 쳐박고 급한 숨을 몰아쉬고 있고, 행인, 거의 울상이 되어 소리를 버럭 질러버리고야 말았다.

 

"아, 이런 쉬바라... 도대체 또 뭐가 불만이야? 엉? 왜그러는데?"

쌍십자 들어간 욕지거리를 대고 질러대는데, 어느새 게슴츠레한 눈으로 변신한 이 인간, 다 꼬인 혀로 이렇게 대답을 했다.

"얌뫄... 여기가... 딸꾹... 임마... 우리 집이거덩... 쫘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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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15 16:15 2005/01/15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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