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으로 옳은?

선조가 왜의 움직임을 확인하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한다. 서인인 황윤길과 동인인 김성일을 왜로 보내 그 동태를 살펴보도록 한 후 귀국한 이들로 부터 의견을 구한다. 관심사는 전국을 통일한 토요토미의 군부가 조선으로 쳐들어올 것인가였다. 이 때 동시에 통신사로 다녀온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한다.
 
서인인 황윤길은 왜의 군비가 그 기세가 놀랍고 특히 전국을 통일한 토요토미의 관상이 예사롭지 않아 위험하니 전쟁에 대응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성일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토요토미를 보니 그 생김이 쥐새끼 같고 대국에 대해 적의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전쟁을 할 위인으로 보이진 않는다는 것이다.
 
양 정치세력이 서로 다른 말을 하니 선조도 헷갈릴 일이다. 해서 두루 의견을 묻는 과정에 아무래도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의 일파였던 김성일의 말에 더 비중을 두어 정책을 결정하게 된다. 훗날 이 잘못된 판단이 임진왜란에 대비하지 못한 과오로 남게 된다. 후세 사람들은 이 일을 들어 사색당쟁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한편, 당파의 이익에 사로잡혀 "국익"을 돌보지 않았던 김성일을 죽일 놈으로 판단하게 된다.
 
그런데 김성일은 임란동안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키거나 관군을 조직하여 매우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선조도 임란 초기에는 김성일의 죄과를 들어 사형을 명하였으나 서애 등의 만류로 명을 거두는데, 결국 김성일의 전과에 대해 후에 치사한다.
 
조정에서 보고가 있은 후 서애가 김성일을 불러 진정 왜가 쳐들어오지 않을 것으로 보느냐고 재차 묻자, 김성일은 묘한 답을 내놓는다. "저라고 어찌 왜가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장담을 하겠습니까? 다만, 불시에 이런 놀라운 소식이 알려지면 중앙과 변방이 아울러 심하게 놀랄 듯하여 그리하였나이다" 징비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김성일의 이 말이 전혀 거짓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임란 중에 김성일은 적과의 전투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특히 민심을 안정시키고 초유사라는 직책을 맡아 의병을 모으는 일도 하는데 재주를 보였다는 점이다. 어찌 되었건 그로서는 정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에서든 어쨌든 간에 저간의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역사의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느냐는 거다. 김성일이 후에 어찌 했던 간에 선조 앞에서 정확하고 낱낱한 실상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것은 크나큰 과오임에 틀림없다. 아니 과오라고 이야기하기에는 그 정도가 지극히 심할 지경이다. 중앙과 변방의 요동이 예상된다고 할지라도 당리당략을 벗어 던지고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고 이를 추진할 수 있었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다. 즉, 정도(正道)를 걷느냐 그렇지 않느냐다. "국익"이라는 실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는 없으나 정도를 걷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당위다. 역사에서 뭐 거창한 것을 배우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다. 정도를 벗어나면 사단이 일어난다는 사실. 그것이 전부가 아닐런지.
 
어떤 분이 내방하셔서 행인의 글 밑에 다음과 같은 쪽글을 달아주셨다.
 
우리가 포기한 '국익'으로 저네들이 살을 찌워서 우리에게 비수를 꽂는다면? 도요토미가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판국인데도 우리네 선조는 그저 '도'를 논하기에 바빴다. 민주노동당사람들 참으로 "정치적으로 옳은" 말들은 참 잘도 떠든다. 점점 지지하기가 싫어진다. 그저 입만 살은 인간들인거 같다.
 
이분이 말하는 "저네들"은 다름 아닌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일 거다. 특히 셰튼 교수가 미국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황우석 교수의 연구결과를 슬쩍 해서 미국으로 날랐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으신 게다. 그리고 그렇게 한국의 "국익"이 되어야할 연구물을 가져가서 "미국"의 살을 찌우고 그 이후에 그들이 우리 등 뒤에 칼을 꽂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신다.
 
물론 가능한 이야기다. 그런데, 셰튼 교수가 뭘 가지고 갔는가? 이거 상당히 재밌는 부분인데, 셰튼이 가지고 간 것이 뭐 중뿔나게 있냐 하면 그런 거 없다는데 결정적 문제가 있다. 황우석이 신청한 특허청구서를 보면 그 내용 중 상당한 부분이 피펫으로 시약을 채취하거나 특별한 도구를 이용하여 난자 속에 정자를 심는 등등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거 미국애들이나 영국애들이 몰라서 안 한 작업이 아니다. 누구나 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황우석의 경우 어떤 결과가 나온 것이고 걔들은 그 결과를 못 얻어낸 것에 불과하다. 뭐 지나가는 말로는 한국 사람들이 젓가락질을 잘 해서 그렇게 되었다는데 아무튼 그렇게 따지면 셰튼이 가져가서 미국의 "국익"으로 할 만한 무엇이 있었느냐 하면 꼭 그런 거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결론인 셈이다.
 
그런데 왜 셰튼은 황우석과 '갑작스런' 결별을 선언했는가? 셰튼은 황우석과 마찬가지로 학자다. 학자는 연구의 결과와 이를 통한 명예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황우석의 연구에 자신의 명예에 심각한 하자를 줄 수도 있는 문제점이 발견된다. 이 때 할 수 있는 일은? 황우석과의 의리를 앞세워 같이 구렁텅이로 뛰어든다? 천만의 말씀이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셰튼은, 다시 말해 지 살기 위해서 셰튼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다. 여기에 왜 난데없이 "국익"이 끼어드는가?
 
이렇게 거창한 이야기까지 할 필요도 없다. 도대체 그 "국익"이라는 무엇은 실체가 없다. 국민소득 2만불의 시대를 향해 달려나가는 대~한민국이라고 모두(?) 자랑스러워 하지만 그 2만불은 도대체 누구의 주머니에 있는 2만불인가? "국익"을 위해 이라크에 보낸 우리의 자이툰은 "국익"표 호떡 구워 이라크 애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이나 하다가 이제 전투병으로 체제전환을 하려 한다. 그 덕분에 노나게 돈 버는 중생들은 자이툰 병사들의 월급 저금해주는 외환은행 밖에 또 어디가 있나? 이라크 파병한 덕분에 이라크 현지 공사 하나 제대로 따내지 못하고 비파병국들에게 홀라당 다 '뺏기고' 있는 현실에서 뭐가 "국익"일거나?
 
쪽글 달아주신 분의 성의는 고맙지만 그 쪽글 내용 중에 더 이해할 수 없는 부분. "정치적으로 옳은 말"을 하는데 점점 더 싫어진다? 그럼 정치적으로 그른 말을 하면 좋아하실라나? 우짜라는 겁니까, 지금? 가치관이 전도된 이같은 발언을 보면서 상당히 헷갈리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너는 착한짓만 골라해서 갈 수록 미워져"라고 이야기하면 어떻게 해야하나? 그 때부터 나쁜짓만 골라할까? "너는 공부를 잘해서 점수주기가 싫어" 이러면 점수 잘 받기 위해서 공부 하지 말고 내내 탱자 거리고 놀고 있을까? 이를 어째야 하나...
 
어찌 보면 지나가는 길손께서 그냥 툭 던져놓으신 말씀이라 여기고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것은 우선 행인의 속이 좁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정말 갈수록 궁금해지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 "국익"은 어떻게 생긴 애일까? 그 국익이라는 것이 그 쪽글 남기신 어떤 분께는 어떤 모습으로 돌아갈까?
 
금모으기 이야기도 했지만 "국익"을 위해 금모았던 사람들의 염원과는 관계 없이 그 금붙이를 통해 "사익"만 발생했다. 작금 진행되고 있는 난자모으기 역시 마찬가지 결과가 눈에 뻔히 보인다. 순수한(?) 일념으로 자발적으로 난자를 제공했던 사람들의 노력의 결과가 미즈메디를 비롯한 몇 몇 특허지분보유자의 사익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무슨 "국익"이 있을까? 그저 한국사람이 만들었으니까 기분 좋다는 그거 하나? 같은 한국사람으로서 뿌듯한 그 기분?
 
미셸 위가 LPGA에서 좋은 성적 거두니까 한국사람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는 사람들이 있더라. 나도 미셸 위 좋게 보는 편인데, 골프 자체를 경멸하는 행인이 미셸 위를 좋게 보는 이유는 오직 그 경기능력때문이다. 한국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미셸 위의 부모는 한국인인지 모르지만 미셸 위는 미국인이다. 호적신고가 되어 있으면 이중국적자니까 한국인도 된다고 하겠지만 미셸 위는 미국국적의 미국인으로서 미국시민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살고 있다. 자부심을 느끼는 거야 개인의 자유겠지만 한국인이기 때문에 자부심 느낄 필요는 없는 거다.
 
요컨데 황우석의 연구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시던지 말던지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뿌듯해 하시는 거 안말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뿌듯함을 위해 거짓말을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거나 심지어 왜 거짓말 했냐고 "정치적으로 옳은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건 완전히 뒤죽박죽이다. 이래서야 어디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가지고 "정치적으로 옳은 말" 하고 살 수 있겠나?
 
그런 혼란의 시대는 이제 끝낼 때도 되지 않았나? 언제까지 가치관이 전도된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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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28 03:52 2005/11/28 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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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전에 엄마가 그런 말을 했어요.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고요. 그래서 옳건 그르건 직접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싫어하셨죠.
    난 그냥 옆집아줌마랑 똑같은 생가가고 싶은데 왜 와서 분탕질이야 하는 그런 거였어요. 뭐랄까... 본능적인 왕따방지랄까? 근데 정말로 '국익'이 어떻게 생긴건지 궁금하긴 하네요.

  2. 만우/ 무진장 궁금하시죠? 제가 지금 무진장 궁금하거든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