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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 45 호
2005년 대학 총학생회 선거를 돌아보며 / 여전히 강력한, 그러나 위기를 겪는 조직 좌파
- 정병호
2005년 대학 총학생회 선거 결과를 두고 학생 운동 내에서 논란이 많은 듯하다. ‘비운동권’을 표방하는 후보가 연세대, 이화여대, 한양대, 성균관대, 한국외대, 서강대 등 수도 서울의 주요 사립대학에서 대거 당선했다는 점 때문이다.
<조선일보>와 같은 우익들은 이 점을 이용해, 마치 운동권 쇠퇴와 비운동권 강세가 장기적 추세인 양 호들갑을 떤다. “비운동권의 약진은 …… 학생운동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쉽게도 일부 학생 운동 활동가들도 이런 패배적 생각을 공유하는 듯하다. 학생운동 내에서도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구분은 무의미해졌다”는 평가들을 심심치않게 듣게 됐다.
그러나 올해 선거를 사회 전체의 세력 관계와 연관지어 바라본다면, 이러한 분석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올해 선거는 대중 급진화와 노무현의 우경화 과정에서 진행됐다는 점에 큰 영향을 받았다.
노무현 정권은 자본가 계급의 일부 뿐만 아니라 피억압 대중 조직의 일부에도 자신의 지지 기반을 두고 있는 포퓰리즘 정권이다. 이 점 때문에 탄핵에 반대하는 시위 규모와 노무현의 파병 강행에 반대하는 시위 규모 사이에 커다란 격차가 발생했던 것이다.
그런데 탄핵 이후, 그리고 최근에 가속화되는 노무현의 우경화 때문에 노무현의 왼쪽 지지 기반에 정치적 공백이 생겨났다. 지난 2002년 대선 때 노무현을 지지했고 올해 초 탄핵에 반대했지만, 노무현의 우경화를 접하고 실망하면서 아직 새로운 정치적 거처를 찾지 못하여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바로 올해 대학 총학생회 선거는 노무현의 우경화에 따라 노무현 왼쪽 지지 기반이 급진화함과 동시에, 이 급진화가 아직은 학생 운동 조직 좌파의 이데올로기보다는 오른쪽에 머물면서 형성되는 정치적 공백을 메우기 위한 경쟁의 장이었다. 이 때문에 운동권과 비운동권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중도자유주의 혹은 중도좌파적 스펙트럼으로 수렴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가령 이화여대의 경우 탄핵반대 운동에 적대적이던 우파적 후보가 당선했는데, 이들이 선거 운동 기간에는 탄핵반대 운동과 반전 운동에 대한 우파적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들의 우파적 원칙을 그대로 내보였다가는 분명히 낙선할 것이라는 급진화 압력이 작용했을 것이다.
반면 학생 운동 좌파들은 대다수 급진 좌파이기 때문에 앞서 지적한 정치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타협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실제로 학생회는 공동행동기구이므로, 당연히 이전의 관성대로 정치조직의 강령을 학생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닐 것이다. 게다가 경제불황의 심화에 따라 학생들이 느끼는 교육서비스 저하와 경제적 압력의 증가에 대한 불만을 투쟁으로 조직해야 한다는 압력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의 교육환경을 개선하는 복지 공약이나 등록금과 청년 실업 문제 등을 주요 정책으로 내놓는 것을 두고 ‘운동권의 비권화’라고 비판하는 것은 부적절한 비판일 것이다.
그러나 일부 운동권 후보들은 타협의 정도가 지나친 경우도 있었다. 가령 서강대의 한대련 계열과 연세대의 한대련+PD 계열 후보들은 학생회의 ‘정치적 중립성’ 압력에 타협함으로써 의도치않게 비운동권 후보의 의제에 더 힘을 실어주는 격이 됐다.
고려대와 서울대의 반미청년회 계열 후보들은 노무현 왼쪽의 정치적 공백을 좌파민족주의적 의제로 메우려 했다. 그런데 이들은 “강한 나라 강한 고대”, “동북아 물류, 교통의 중심지. 경제강국 COREA” 같은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한국 지배계급과 노무현이 갖고 있는 아류제국주의적 열망에 무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과도한 타협을 취했다.
사실 올해 총학생회 선거가 앞서 지적한 정치적 공백을 메우기 위한 경쟁이었다면, 그 공백을 누가 메우느냐는 전적으로 정치적?조직적 영향력에 달려 있다. 서울대, 경희대, 고려대 같이 학생 운동 조직 좌파들이 강력한 곳에서는 비운동권이 이 공백을 메우지 못했다. 반면 비운동권이 당선된 한국외대나 신촌 지역 대학들의 경우 좌파가 취약해진 대학들이었다.
학생 운동 조직 좌파가 일부 대학에서 취약해진 데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는 조직 좌파의 이데올로기 위기와 학생회 개입의 문제점에서 찾을 수 있다.
조직 좌파의 이데올로기적 위기는 그들이 추구했던 대안 사회(북한 혹은 소련)가 위기를 겪으면서 커졌다. 이 과정에서 조직 좌파 내에서 점차 이데올로기적 분화가 촉진되고 있는 듯하다.
게다가 부분적으로는 정치조직과 학생회를 뒤섞어서 활동한 문제점도 있었다. 이것이 낳는 두 가지 측면의 문제점을 지적해보겠다.
첫째, 공동행동기구인 학생회를 정치조직처럼 운영하다보니 새롭게 급진화하는 학생들을 충분히 개방적으로 대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몇 년 전부터 학생들의 급진화가 종종 기존 학생운동 조직의 영향력 밖에서 표현되는 것을 보게 됐다. 가령 여중생 촛불 시위나 탄핵 반대 시위 등에서 많은 학생들이 학생 운동 조직 좌파가 운영하는 학생회와 별도로 개별적으로 참가했다.
둘째, 정치조직이 학생회 활동에서 비롯하는 개량주의적 압력들로부터 자유롭지 않게 돼, 급진 정치조직의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키거나 활동가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재생산하는 능력이 저하됐다.
앞서 나는 공백을 메우느냐는 좌파의 영향력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좌파가 얼마나 회복하느냐에 따라 내년 선거 결과는 올해와 또 달라질 수 있다. 실제 몇 년 째 비운동권이 당선된 성균관대의 경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조직 좌파들이 몰락해 커다란 공백을 낳게 됐지만 최근 연대회의와 한총련 등의 좌파들이 그 공백을 메우기 시작했다.
역대 비운동권을 표방한 총학생회는 대부분 학생들의 경제적 권익을 보호하는 데에도 운동권 총학생회보다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비운동권이 단과대 학생회까지 뿌리를 내리거나, 비운동권의 강세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대학은 거의 드물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비운동권 대세론’이 큰 그림에서 보자면,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존 운동권의 정치적 위기가 영향력의 축소를 가져오긴 했지만, 여전히 건재하다.
또한 새로운 급진화의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물론 학생들의 의식 급진화가 곧바로 행동으로 표현되지는 않고 있다. 이는 학생들을 짓누르는 사회적 압력이 경제 불황 때문에 매우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급진화는 폭발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여중생 촛불시위나 탄핵 반대 시위 등에서 언뜻 이런 잠재력을 보았다.
새 세대 학생운동은 우익에 맞서는 운동, 학생들의 교육 서비스와 경제 조건 악화에 맞서는 투쟁, 전쟁과 신자유주의와 같은 세계적 부조리에 맞서는 급진적 저항을 얼마나 더 굳건히 건설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달려 있을 것이다.
여전히 강력한, 그러나 위기를 겪는 조직 좌파
학생회 선거가 다가오면 어김없이 ‘학생운동 위기’론이 유행한다. 물론 늘 보수 언론의 과장이 섞인다. 그럼에도 위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1990년대 후반부터 제기된 위기론은 아직도 뚜렷한 해결책이 나오지 못한 채 학생 활동가들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학생운동의 사회적 파급력이 전보다 약해졌다는 점, 학생들 사이에서 학생운동 조직들이 부분적으로 지지를 잃었다는 점, 학생운동 조직들이 활동가 재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 등이 위기론의 내용들이다.
학생운동 위기의 원인은 두 측면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먼저 기존 학생운동의 이데올로기 위기를 들 수 있다.
학생운동의 주요 정치경향 중 하나이던 PD 경향은 애초 소련을 모종의 ‘사회주의적’ 대안으로 삼고 있었는데, 1990년을 전후로 소련·동구권이 몰락하자 위기를 겪게 됐다.
1970년대 서구의 급진 좌파들이 스탈린주의에 환멸을 느끼면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전환한 것처럼, 소련·동구권 몰락 이후 PD 경향은 ‘정체성 정치’를 포함해 다양하게 분화해 간다.
PD 경향 중 연대회의는 기존 PD가 “노동자계급이라는 ‘자명한 주체적 환상’”에 빠져 있었고, “계급투쟁 중심성에 대한 선험적이고 기계적인 승인”을 갖고 있었다고 자기 비판하며 노동계급(투쟁) 중심성을 버렸다.
그리고 “투쟁은 하나가 다른 하나로 환원될 수 없다”면서 신자유주의에 피해를 보는 세력의 “다차원적인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대장정≫ 34호, 2001년 3월).
전학협의 전신 학생연대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맑스주의를 반권위적 아나키즘에 가깝게 해석했다.
그 영향을 받은 전학협은 2002년 사회당 대선 패배 뒤 급속히 자율주의로 기울어졌고, 올해에는 급기야 전학협을 해체하고 각 학교에서 소규모 자율주의 토론그룹으로 남게 됐다.
한편, 주체주의자들이 지도한 NL 경향은 소련 몰락 후에 PD만큼 큰 위기를 겪지는 않았다. 이들이 대안으로 삼던 ‘우리식 사회주의’ 북한이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했는데도 건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체주의가 민족주의를 전폭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NL 경향은 한반도에서 제국주의적 억압 경험으로 말미암은 대중의 좌파 민족주의 정서와 상당히 융합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1990년대 대부분 동안 NL 경향이 다수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들어 가시화한 북한의 식량난과 경제위기 때문에 NL 경향 내에서도 북한을 대안으로 삼는 것에 대한 회의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남한 운동의 주체적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면서, NL 경향 내부에서 분파들이 생겨났다(가령 사람사랑 분파 출현).
주체주의자들이 학생들 사이에서 다소 지지를 잃은 것은 정권의 탄압과 마녀사냥 탓이 컸지만, 이렇듯 이들이 추구하는 대안이 많은 학생들에게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 학생운동 위기의 다른 한 원인은 학생들의 객관적 처지 변화와 관련돼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심화된 경제 위기의 영향으로, 학생들이 불안정한 노동시장에 종속되면서 원자화한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주로 학생회 위기로 드러났다. 취업 준비, 학점 경쟁, 아르바이트 등 때문에 학생운동이 주된 영향력을 행사해 온 학생회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과 참여가 떨어졌다.
물론 학생회 위기를 전적으로 객관적 한계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학생들의 원자화는 일면 현실 순응적 태도로 드러났지만, 실제로는 만연한 청년실업, 등록금 인상, 교육 서비스 하락 등 때문에 커다란 불만을 잉태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소련·동구권 몰락 뒤에 지적 회의주의가 풍미했음에도, 1990년대 후반부터 학생과 청년들 사이에서 서서히 급진화가 진행됐다.
IMF를 경험하면서 미국에 대한 반감이 증대했고, 대선에서 ‘진보적’ 후보에 대한 지지가 꾸준히 증가했다. 대학에서 홍세화, 진중권 등 사회비판적 지식인들이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기존 학생운동 조직들은 스탈린주의적 관성 때문에, 급진화하는 개인들을 개방적으로 대하려 하지 않았다.
학생회 집행부를 자신의 정치 조직의 강령에 동의하는 사람들로만 구성한다든가, 학생회를 학생들의 의사와 무관한 자신들의 정치 투쟁 일색으로 운영한다든가 하는 오류를 범했다.
사실, 기존 운동권의 비민주성은 정치적 대안의 문제점과 떼어 내어 생각할 수 없다. 기존 운동권은 스탈린주의라는 자신들의 정치적 대안이 설득력이 없게 되자, 비정치적이거나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학생들을 만나게 됐다.
가령 한총련 공식 행사에서 문화제나 장기 자랑 등이 주종을 이루고, 기존 학생운동 조직이 주도하는 연합체에서 토론보다는 형식적 규율이 강조되는 것은 이와 연관돼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몇 년 전부터 학생들의 급진화가 종종 기존 학생운동 조직의 영향력 밖에서 표현되는 것을 보게 됐다.
가령 여중생 촛불 시위나 탄핵 반대 시위 등에서 많은 학생들이 학생운동 조직 좌파가 운영하는 학생회와 별도로 개별적으로 참가했다.
작년과 올해 서울대 총학생회는 소위 ‘비운동권’을 표방했는데도, 반전 운동에 다른 어느 운동권 총학생회 못지 않은 열의를 보였다.
이는 학생운동 위기론이 일면적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기존 운동권의 정치적 위기가 자신들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긴 했지만, 새로운 급진화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물론 학생들의 의식 급진화가 곧바로 행동으로 표현되지는 않고 있다. 이는 학생들을 짓누르는 사회적 압력이 경제 불황 때문에 매우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급진화는 폭발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여중생 촛불시위나 탄핵 반대 시위 등에서 언뜻 이런 잠재력을 보았다.
새 세대 학생운동은 반전·반자본주의·반우익 운동의 성장을 고무하는 데에 얼마나 더 굳건히 나서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
다함께 45 호
운동 내 논쟁 - 탈북자의 국내 입국을 환영해야 한다 - 최일붕
주체주의자들은 남한(또는 제3국)에 입국하는 탈북자를 ‘사실상’ 환영하지 않는다.
내가 ‘사실상’이라고 강조한 이유는 그들이 탈북자의 국내 입국을 ‘반대한다’고는 결코 분명히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으레 그렇듯이 자신들의 스탈린주의적 입장을 은폐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솔직하지 못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주체주의자들의 주장은 이렇다. 1995년 대홍수 이후 북한 주민 가운데 일부가 양식을 구하러 중국에 가는 일이 생겨났다.
그들의 대부분은 양식만 구하고 곧바로 귀국한다. 장기 체류하고 있는 나머지도 대부분은 북한 귀환을 원한다. 오직 극소수만이 남한이나 제3국으로 망명한다.
그러므로 재중국 ‘탈북자’는 대부분 어느 나라에나 있는 불법체류자일 뿐이다. 그런데도 탈북자의 남한 입국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기획탈북 때문이다.
기획탈북 조직자들은 북한 체제의 전복을 기도하는 미국 정보기관들과 남한 우익단체들, 그리고 탐욕스런 중국 브로커들로 이뤄진 국제 커넥션이다.
그러나, 음모에 ‘유인’돼 ‘사실상의 납치와 인신매매’로 입국하는 것만 제외하면 탈북자가 ‘어느 나라에나 있는 불법체류자일 뿐’인데도 왜 그들의 강제송환을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것일까? 주체주의자들은 한국에 오는 남아시아 출신 이주노동자의 강제추방도 지지할까?
그들은 탈북자들이 남한 입국 후 여러 고통을 겪고 있다면서도 그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한다는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때로 일부 주체주의자들은 남한 거주 탈북자들의 정착을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고 말한다(가령 12월 2일 5시 고대법대 신관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반미청년회 정태흥 대표의 답변).
그러나 기획탈북을 통해 들어왔다 해서 환영하기가 내키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정부가 돈을 쓰라고 요구한다는 것은 모순이거나 생색일 뿐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결국 ‘기획탈북’에 의한 입국(‘기획입국’)이 원죄라는 것이다. 주체주의자들은 탈북자의 남한 이주를 사실상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북한 체제 전복과 침략을 위한 미국의 음모(‘기획탈북’)라는 견지에서 설명한다.
이런 주장의 문제점은 첫째, 미국이 북한 주민의 대량 이탈과 그들의 자국 입국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북한인권법은 위선의 산물이다. 미국은 인권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탈북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 탈북자 인권과 수용에는 진정한 관심이 없다. ‘다함께’ 김하영 동지는 이렇게 지적한다.
“미국이 노골적인 대북압박을 해 온 1990년대 내내, 그리고 부시 정부 들어서도 평범한 탈북자들의 문제는 관심 밖이었다. 정치적 이용 가치가 높고 고급 정보를 가진 소수의 고위층을 제외하면 말이다.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지난해까지 총 8명(김경필 전 베를린 주재 북한 이익대표부 서기관 부부 등 외교관·과학자 등)에게만 망명을 허용했다.……
“미국은 탈북자를 ‘프라이오리티[우선순위] 2’ 대상에 지정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노리는 동시에, 탈북자의 한 해 망명 상한선을 정해 탈북자들이 몰려드는 것을 막으려 한다.
“2005년의 탈북자 망명 상한선은 5백 명 수준으로 결정될 예정이다. 쿠바인 망명 실제 허용이 망명 상한선의 10퍼센트 수준에서 이뤄진 것을 감안하면, 미국 정부가 탈북자 5백 명을 다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벌써부터 미국 정계에서는 탈북자 수용의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예컨대, 최근 미 하원 법사위는 국토안보부에 서한을 보내 북한이 북한인권법을 악용해 간첩이나 테러리스트를 미국에 잠입시킬 가능성을 경고했다.
“미국은 이라크에서 온 난민(신청자)들에 대해 구금을 명하고 있다(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소식지 2003년 5∼6월).
“미국의 이런 위선은 이미 여러 차례 드러났다. 북한인권법의 상원 통과를 눈앞에 뒀던 올해 9월 27일, 미국측은 중국 상하이 미국인 국제학교에 진입한 탈북자 9명을 추방했다. 추방이 곧 체포와 강제 송환으로 이어질 것이 뻔한데도 말이다.
“북한인권법이 상하원을 모두 통과한 지난 10월 말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주재 미국 총영사관에 40대 북한인(연해주 지역에서 일하던 북한 노동자)이 들어와 망명을 신청했다. 그런데 미국 총영사관측은 미국 망명을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그를 러시아 당국에 인도할 방침이다.
“지난 11월 23일에는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이민법원이 북한 특수부대 지휘관 출신이라고 밝힌 탈북자의 정치 망명 요청을 기각했는데, 그 이유는 ‘북한 출신임을 증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난민들은 안전을 위해 신분증과 여권을 없애는 경우가 허다한데, 각국 정부는 이런 점을 난민 요청 기각의 사유로 곧잘 이용하곤 한다.……”
둘째, 주체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탈북자가 ‘기획탈북’ 조직자들의 접촉과 유인에 의한 사실상의 납치와 인신매매를 통해 국내 입국하는 것은 아니다.
탈북자가 만일 북한에서 어지간히 살 수 있었다면, 또 중국에서 체류 또는 거주할 권리가 주어졌다면, 남한으로 오지도 않을 것이다.
만일 북한 인접국들인 중국과 남한이 탈북자의 이주 권리를 인정한다면 기획탈북이 아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주체주의자들은 기획탈북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이주와 왕래의 자유에 대해 침묵한다.
중국 체류자든 남한 입국자든 탈북자를 고통에 빠뜨리는 것도 바로 이주와 이주자에 대한 억압이다. 주체주의자는 북한·중국·남한이 이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체주의자들은 해결책으로 기획탈북 근절을 요구한다. 이것은 북한·중국·남한 정부들이 기획탈북을 빌미로 북한 이탈 이주자를 억압하는 것을 사실상 지지하는 것이다.
지금 북한·중국 정부들은 북한 주민의 이주 자유를 억압하면서 ‘기획탈북’을 이유로 대고 있다. 남한 정부도 이런 태도를 부분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셋째, 주체주의자들은 기획탈북이 국제 문제를 일으킨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중국 정부는 탈북자 색출·송환을 하고, 이는 재중 북한인 불법체류자들의 삶을 더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획탈북이 국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탈북자의 존재를 둘러싸고 남북한과 중국·미국의 정부들이 ‘체제 우위’ 언쟁을 하는 것이 ‘국제 문제’의 실상이다.
브로커 등이 연루된 남아시아인들의 ‘기획이주’ 때문에 한국 정부와 필리핀·방글라데시·네팔 등의 정부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진보진영이 이 가운데 북한 편을 드는 것이 옳은가? 오히려 아무 편도 들지 않고 오직 탈북자만을 옹호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은 거의 다 피억압자들이다. 잘 먹고 잘 사는데도 조국을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넷째, 주체주의자들의 북한인권법과 기획탈북 등 미국의 음모에 대한 반대는 북한 내의 억압에 침묵하는 한은 설득력이 없다.
물론 진정한 진보운동가라면 미국의 음모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인권 미사여구에 가려진 위선을 들춰낼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진보운동가는 미국의 대북 압박과 적대 정책에 반대한다.
하지만 전쟁도 아닌 고작 음모와 유인에 의해 붕괴될 위험이 있을 만큼 허약한 체제는 어떤 체제인가? 미국의 그 알량하고 위선적인 권리조항에 이끌려 수많은 북한인들이 탈북할 것이 두렵다면 그런 체제는 커다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셈이다.
1989년 동독의 숙련노동자들과 기술자들이 대거 서독으로 이탈했을 때, 그리고 몇 주 뒤 수백만 명이 베를린장벽 제거를 요구했을 때 결국 동독 체제의 문제점 때문에 그랬던 것 아닌가?
물론 서독 체제가 더 나았다는 것은 아니다. 동독인들의 환상은 분명히 환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그들이 과거에 살았던 체제가 더 좋았다고 향수에 젖지는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옛 동독 지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당은 스탈린주의 정당이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 옛 동독 공산당(SED)의 후신인 민주사회주의당(PDS)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변신함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었다.
북한 주민의 중국 이동이 단지 대홍수로 말미암은 경제적 궁핍 때문이었다는 주장은 북한이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반증일 뿐이다.
맑스주의에서 사회주의는 그 정의상 자본주의보다 진보하고 질적으로 우월한 사회다.
아무리 큰물과 큰 가뭄이었다지만 자연재해에 그토록 취약하고, 아무리 많은 이재민이었다지만 자기 인민도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체제가 무슨 사회주의라는 말인가?
사실, 북한 경제는 1970년대 말부터 성장이 감속하기 시작해 1980년대 말에는 정체하고, 1990년대 대부분 동안에는 실제로 수축했다.
그것은 ‘우리식 사회주의’이기는커녕 옛 소련 경제의 리듬에 종속돼 있었을 뿐 아니라, 사실은 세계경제의 리듬에 종속돼 있다. 만일 북한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가능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다섯째, 주체주의자들은 궁극적 해결책으로 북한의 경제 사정과 식량 사정이 근본적으로 개선되는 것을 든다. 그래서 이를 위해 미국의 대북관계 정상화, 남북경협 강화, 대북 식량지원·전력 지원 등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과 남한·일본 정부들이 그런 요구를 수용하는 제스처를 취할 때 그들에 대한 개량주의적 태도를 낳을 것이다.
이미 2000년 이후 김대중 정권 후반부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
제국주의와의 ‘평화공존’이 지속가능할까?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필연적 결과로 발전하는 자본주의의 특정 단계임을 강조한다.
북한 민중의 고통은 자본주의 세계 체제와 북한 체제가 그들에게 가하는 착취와 억압의 멍에 자체를 제거할 때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물론 그러기 전에라도 우리는 국내 입국하는 북한 출신 노동자·민중을 환영해야 한다.
미국의 음모가 사실일지라도 탈북자 인권 외면의 구실이 될 수는 없다. 미국 권력층의 일부가 장차 북한에 친미 정권을 세울 요량으로 해외망명 임시정부를 구성할 북한 관료 출신 극소수 탈북자들을 비호할 수 있다. 그럴지라도 그것 때문에 수많은 평범한 탈북자들의 불행이 외면돼도 되는 것은 아니다.
다함께 45 호
“대학평준화만이 해결책입니다” - 강동훈 (정리)
최근 출간된 ≪학벌사회≫의 저자 김상봉 ‘학벌없는사회’ 정책국장에게서 수능 부정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해 듣는다
이번 수능시험에서 핸드폰을 이용한 부정 행위와 대리 시험 등이 밝혀지면서 일각에서는 처벌을 통해 시험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난해 수능시험이 끝난 뒤에는 많은 학생들이 자살을 했습니다. 다행인지 어쩐지 올해는 자살한 학생은 거의 없지만 많은 학생들이 범법행위를 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결국 우리 나라 교육은 학생들을 극한에 몰아 자살과 범법행위 중에서 선택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셈입니다.
어느 대학에 가느냐가 인생을 결정하는 상황에서 대학 진학은 생존에 직결된 문제고, 학생들의 신분을 결정합니다. 공부, 학문 다 웃기는 소리죠. 어느 대학을 나오느냐 하는 것은 인생이 걸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학생들은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이 경쟁에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의 본래 의미인 자기 실현과 계발은 사라지고 1점이라도 더 얻기 위한 경쟁만이 남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정행위는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법으로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인생이 걸린 일이기 때문에 다양한 기술이 개발될 겁니다. 돈 있는 집 부모들은 성형 수술을 해서라도 대리 시험을 치게 할 겁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학평준화를 도입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봅니다.
대학평준화는 왜 필요합니까?
평준화에 대한 이데올로기 공세가 너무 심해서 ‘평준화’ 하면 다들 하향 평준화를 얘기하고 평준화가 교육을 망치는 주범인 양 얘기하는데, 저는 교육이 평준화되는 것은 너무나 당위라고 봅니다.
지금 우리 나라 교육이 망가지는 이유는 [대학이] 서열화해 있기 때문입니다. 1류 대학과 3류 대학이라는 구분이 외피 상으로는 교육적으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획일적인 서열 속에서 사람들의 신분을 나누는 기준이 되고 있죠.
인간의 능력은 무수히 다양합니다. 교육이 정상화된다는 것은 각자가 다양한 소질을 다양하게 계발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나라의 교육은 한 가지 방식으로 줄을 세우고 모든 학생들이 시험 선수가 되길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나라 교육의 모든 부조리, 경쟁력 저하, 모든 일탈의 원인이죠.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시험선수가 돼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대학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대학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자면 서열화를 없애야만 합니다.
최근에 쓰신 ≪학벌사회≫라는 책에서 대학평준화 방안을 제시하셨는데, 그에 대해 소개해 주시죠.
대학평준화가 추첨을 해서 학생을 배분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정 대학·지역으로 몰릴 필요가 없는 구조를 만들어 주는 것이 대학평준화의 기본 취지입니다.
이것을 실행하기 위한 1차적 방법이 국립대학의 통합 네트워크입니다. 지금 서울대를 제외하면 지방의 거점 국립대학들은 이미 평준화돼 있습니다.
서울대를 묶어서 처음부터 평준화하자고 하면 무리가 있기 때문에 한시적으로 서울대 학부를 한 10년 정도 폐지하고 지방 국립대를 중심으로 통합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자리를 잡으면 그 때 서울대를 포함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때는 수도권 인구를 고려해서 서울대 학생 수를 대폭 늘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베를린대학은 학생수가 10만 명입니다. 베를린 인구가 3백만∼4백만 명 정도인데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서울대 학생 정원을 훨씬 더 늘려서 대중적 국립대학이 돼야 합니다.
그러면 사립대학들은 어떻게 하느냐 혹은 연고대가 나서서 설치지 않겠느냐고 얘기하는데, 그건 쉽게 되지 않을 겁니다.
국립대학은 지금도 사립대학에 비해 등록금에서 우위에 있고, 장기적으로는 국립대학들은 무상으로 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면 사립대학들은 경쟁이 안 될 겁니다.
장기적으로 사립대학은 공립대학 체계로 흡수해야 합니다. 지금 사립학교법 개정 문제에서 보듯이 사립학교 재단들은 교육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사립학교법 개정 문제로 학교 폐쇄하겠다는 것을 보십시오.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질적인 평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직자 지역할당제’를 실행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고시 할당제인데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고시를 계속 시행한다고 하더라도 인구비례로 고시를 할당하는 겁니다.
지금은 사법고시나 행정고시의 90퍼센트 안팎이 서울 지역 학교 출신입니다. 그리고 서울대, 연·고대가 60∼70퍼센트입니다. 그런데 인구비례로 할당하면 서울은 23퍼센트밖에 안 되죠. 결국 서울에 있는 대학에 기를 쓰고 올 필요가 없는 겁니다. 오히려 서울의 학생들도 지방의 대학들로 가게 될 겁니다.
미국의 경우에 의사나 변호사 자격증을 주 정부가 줍니다. 그러면 자연히 특정 지역으로 몰릴 이유가 없는 겁니다. 자연히 각 지역의 대학들로 분산되는 것이죠.
서울대 출신들이 정·재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립대 통합네트워크라는 것도 엄청난 저항에 부딪히지 않을까요?
시장주의자들은 말로는 시장에서 경쟁을 해야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장 경쟁은 독점이 없어지고 다양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가 시장으로 들어오는 거죠.
하지만 모두가 대등한 상황에서, 독점이 없는 상황에서 서로가 다양성과 역동성을 갖고 경쟁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지 기득권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는 좋은 성과를 낼 수 없습니다. 지금 서울대학과 지방 국립대, 사립대 사이에 무슨 경쟁이 있습니까?
‘경쟁을 통해서 교육의 수월성을 담보한다?’ 그러나 한국의 고등학생들처럼 많은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나라의 학생들처럼 대학 수학 능력이 부족한 학생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 까닭은 경쟁이 없어서가 아니라 경쟁이 왜곡됐기 때문입니다. 경쟁이 다양화해야 합니다.
그 말은 지금처럼 획일적인 시험 경쟁과 대학 서열은 안 된다는 겁니다. 각 전공 영역에서 경쟁을 할 때 진정한 경쟁력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서열화가 강고한 것처럼 보이지만 곧 무너질 거라고 봅니다. 왜냐면 최근 고교등급제가 얘기가 나오면서 그 전선이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에서 시장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독점을 인정해 달라는 것일 뿐이라는 점이 분명해졌고 이제 그것은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다함께 45 호
선거는 제국주의 점령을 안정시키지 못할 것이다 - 김용욱
조지 W 부시는 “이라크인들은 [내년 1월]선거를 통해서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팔루자 학살도 선거를 안정적으로 치르기 위해서였다고 정당화했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이라크인에게 선택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라크인들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먼저 점령을 끝낼 것이다. 미국은 지난 주 바레인에서 열린 이라크 지원 국제회의에서 대강의 철군 날짜도 밝히지 않았다.
11월 중순 수니파인 무슬림학자협회를 중심으로 47개 단체들이 선거 보이콧을 선언했다. 이것은 최근 언론에서 주목받은 17개 정당의 선거 연기 주장과는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연기를 주장하는 자들은 꼭두각시 정부 총리 후보였던 아드난 파차치처럼 미군 점령을 지지한 자들이다. 이들이 연기를 요구하는 것은 선거에서 질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원래 선거 보이콧은 팔루자 대학살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학살 이후 이른바 “수니파 삼각지대”에서는 반점령 정서가 더 극렬해졌다. 이것은 자연히 선거에 대한 극도의 불신으로 이어졌다.
〈알 자지라〉와 가진 인터뷰에서 무슬림성직자연합의 압둘 살람 알 쿠바이시는 “외국 점령군이 있는 한 공정한 선거란 있을 수 없다!”고 일갈했다.
사실,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정서이다. 팔루자 공격으로 죽은 사람의 수는 알라위 정부에 따르면 2천 명, 적신월사에 따르면 6천 명 이상이다.
중동 전문 기자 패트릭 콕번은 이렇게 말했다. “한 도시를 박살내고, 대다수 주민을 난민으로 만든 다음, 그들 보고 점령군이 진행하는 투표에 참여하러 나오라고? 내가 들어본 가장 황당한 소리다.”
하지만 많은 시아파들이 선거에 참가할 것이다. 시아파의 가장 중요한 두 지도자인 알시스타니와 알사드르가 선거 참가를 독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아파 지도자들이 선거 보이콧에 합류하지 않은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이들이 선거 보이콧에 합류했다면 팔루자 학살과 미군 점령의 정당성에 결정타를 날렸을 것이다.
더구나 시스타니가 작성하고 있는 시아파 후보 리스트에는 심지어 알라위 같은 미국 부역자도 포함될 예정이다.
시아파 지도자들은 수십 년간 꿈도 꿀 수 없었던 시아파 주도 정부를 건립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타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이 점을 이용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시스타니와 사드르가 선거에 참가하는 것은 미국 정책에 동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직접 팔루자 방어에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알사드르는 팔루자 공격을 비난했고, 지지자들에게 절대로 공격에 참가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사드르의 두 부관은 팔루자 공격에 격렬하게 반대했다는 이유로 체포당했다. 시스타니도 이러한 비판에 합류했다.
현재 그들은 선거를 점령을 끝낼 수 있는 하나의 수단으로 보고 있다. 바그다드의 대규모 시아파 거주지인 사드르 시에는 “독재 반대, 외국 점령 반대, 올바른 선거를 통해서만 이라크인들이 이라크를 이끌 수 있을 것이다.”라는 배너가 걸려 있다.
심지어 미국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거짓말을 제공했던 아마드 찰라비마저도 “우리는 나자프 같은 대학살을 막아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놓으며 선거 후보로 나서려 하고 있다.
이것은 역겨운 일이지만, 그와 동시에 시아파 대중의 반점령 정서가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 준다. 많은 시아파 사람들은 지도자들이 부추긴 기대 때문에 선거에 기대를 걸고 있다.
한 시아파 상인은 AP와 인터뷰하면서 “투표일은 내 생애 가장 기쁜 날이 될 것이다. 선거를 통해 점령을 끝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점령을 끝낼 수 있다”는 생각을 순진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시아파가 선거에 참여한다고 해서 상황이 미국에게 유리하게 풀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기대가 실망으로 드러나는 순간 미국은 더 커다란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이미 소수의 시아파들은 선거 이상을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 시스타니 지지자들 일부도 무장 저항에 참가하고 있고, 시스타니도 이것을 허용하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이라크인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악화하고 있다. 최근 <유엔개발보고서>에 따르면 60퍼센트의 농촌 인구와 20퍼센트의 도시 인구가 오염된 물을 마시고 있다.
침략 이후 영양 실조에 걸린 아동의 비율은 두 배로 뛰었고, 40만 명은 전염병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바그다드의 전력 공급은 전쟁 이전보다 60퍼센트 이상 낮다. 팔루자 공습 이전 갤럽 여론조사에서 94퍼센트의 바그다드인이 전쟁 이후 살기 더 힘들어졌다고 답했다.
이러한 고통은 점령이 종결되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다. 애당초 모든 국제법과 UN조차 무시하고 침략을 강행한 미국이 선거 이후 협상을 통해 철군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선거에 기대를 걸고 있는 많은 시아파도 점령은 2004년 4월처럼 수니파와 시아파가 단결해서 단호하게 싸울 때만 끝낼 수 있다는 결론을 다시 한번 확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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