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finished Spaces

from 영화+독립영화 2011/08/11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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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http://www.unfinishedspaces.com/

 

 

 

그것은, 말하자면 혁명이라든가 투쟁이라든가 저항이라든가 하는 말은, 이미 낡아버렸나. 그래서 함부로 조롱해도 괜찮은가. 가끔, 가깝다고 생각했던, 그나마 말이 좀 통한다고 생각했던 이들로부터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다.

 

 

지인으로부터 받은 어느 책에는, '혁명하자고 하면 할거예요? 하지도 않을거면서'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당신이 지금 내게 묻는다면, 나는 '그래 하자, 그런데 어떤 혁명?'이라고 말하겠다, 친구야. 하자고 하면 할 사람, 여기 하나 있다.

 

여 성과 어린이와 노동자를 위한 예술학교를 만들자, 는 것은 오래전 친구들과 가끔 하던 이야기였다. 2004년, 내 힘에 부치는 작업을 간신히 마치고 상영을 하게 되자, 그 꿈에 한 발 다가가는건가, 생각했다. 2010년, 하던 일을 모두 정리하고 다시 대학생이 되는 바람에 그 꿈은 다시 저만큼 멀어진다.

 

이 영화는 어떻게 시작할까. 결국 무슨 이야기를 할까.

굳세게 자신을 믿고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갔던 이들이 같이 이루고 싶었지만 아직 이루지 못한 어떤 꿈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궁금하다.

 

 

2011/08/11 05:23 2011/08/11 05:23

Inside Out 2011

from 영화+독립영화 2011/06/15 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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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http://www.insideout.ca/21/

Screening  http://www.insideout.ca/21/schedule/index.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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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한 분이 자원활동가 티셔츠를 입고 극장 안으로 입장하는 관객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반가웠다.

당신 덕분에 이 영화제도, 당신이 지금처럼 친절하게 안내했던 사회학 수업도 조금 더 좋아질 거 같네요.

작년에 이어 두번째 방문한, 인사이드 아웃 영화제, 5월 19일에서 29일.

 

 

 

날짜 상관없이 기억나는 대로 대충 나열한, 상영작 초간단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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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phne

표절공방과 연애담 사이로 의미를 잃은 결혼생활에 지칠대로 지친 한 작가의 내면이 얼핏 다가오기도 하고, 2차 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의 출판계와 연극계를 살짝 엿볼 수 있겠으나 . 대저택과 이제 막 전쟁터에서 돌아와 슬픈 표정을 한 채 묘한 태도를 보이는 남편과 지나치게 천진난만해서 어쩐지 현실감이 조금 부족해보이는 아이들로 인해 폭넓은 공감을 얻기는 좀 어려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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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vening Dress

선생님이 좋다, 선생님이 정말 좋다, 그래서 그만 미워졌다, 그녀가 지나치게 예뻐하는 내 친구도 그녀도... 이런 복잡한 마음을 담은 제 심장소리를 누군가에게 들킬까봐 무섭고, 툭하면 바닥에 굴러떨어졌다가 펑 터져버릴 것만 같은 심장을 어째야 할 지 몰라, 혼자 방에 숨어 스스로 뺨을 때리기도 하는 그런 아이, 그런 나이의 애틋한 마음을 제대로 잘 그렸다. 거짓말만 하는 것처럼 보였던 선생님도, 먹고 사는 일에 치여 다정한 대화따위 할 겨를도 없다는 듯  아이들 앞에서 화만 내는 엄마도, 언젠가는 그런 아이였을텐데 말이다.

 

 

Animate Pro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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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ulia

     YouTube ; http://www.youtube.com/watch?v=fu5m1fY4cg8

같이 상영한 11편의 단편 애니메이션들 중에서 관객들 호응이 가장 컸던 작품.

객석에서 여자들은 모두 박수를 치거나 깔깔대고 남자들은 침묵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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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ontreal Girl

다큐멘터리처럼 찍은 극영화, 혹은 극영화를 가장한 실화.

감독의 사연과 배우의 소품, 그리고 몇 가지 그럴듯한 에피소드를 버무려, 25년간 살아온 아파트를 떠나야하는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의 이야기를 맛깔나게 보여준다. 극 중에서 한 친구가 주인공에게 느닷없이 던진 한 마디는 내 가슴에도 잠시 무겁게 머물다 갔다. '넌 변두리로 좀 나가서 살아봐도 돼. 다운타운에서 살만큼 살아봤잖아. 우리가 힘들게 노동하는 동안, 너는 감독이랍시고 느긋하게 특권을 누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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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dvocate for Fagdom

존 카메론 미첼보다 훨씬 먼저 이 세계에 이름을 알렸고 훨씬 더 매력적이었으며 훨씬 더 도발적인 작업을 했다고 평가받는 한 캐나다 퀴어영화 감독의 다큐멘터리.  구스 반 산트 감독이 인터뷰이 중 한 사람으로 등장해 친구이자 동료로 오랫동안 바라본 주인공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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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cret Diaries of Miss Anne Lister

친구와 연인의 경계는 자주 명확하지 않다. 다만, 누군가 그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려 할 때, 도저히 그걸 받아들일 수 없는 순간이 가끔 있다는 것만은 명확하다. 신분질서가 엄격하고, 이웃과 친인척이란 그 마을 주민들의 사생활을 감시하거나 통제하는 존재로 여겨지며,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부모의 집과 재산을 물려받아 관리할 수 있다는 걸 납득하지 못하던 시대에도, '내가 비록 남자랑 결혼을 할 수 밖에 없지만, 너도 잘 알잖아, 네가 이 세상에 하나뿐인 내 배우자라는 거...'라는 고백을 받는 여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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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ight Watch

가장 가까왔던 두 사람 사이의 비극은 대부분 질투에서 온다. 독점욕보다 질투가 더 크다. 날마다 폭격으로 허물어지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헤치고 사람을 구하다가 사랑을 만나지만... 이미 정리한 지 오래라고 여겼던 예전 관계가 상대방에게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을 때, 당신이 이미 잃은 건 뭔가. 곧 끝날 것처럼 파국으로 치닫다가 조금 더 과거로, 다시 조금 더 그 이전으로 되밟아가는 구성이 긴장감을 더하는 영화.

사라 워터즈(스?) 의 소설이 원작.

 

 

 

 

 

 

photo by n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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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vening Dress

마이크를 쥔 분이 감독. 옆에 있는 분은 프로그래머. 감독이 썼던 원안에는  남학생 캐릭터가 없었는데, 시나리오 작가와 같이 작업하는 동안 좀 더 극적인 전개를 위해서 넣었다고. 주인공 선생님 엄마,  외로운 세 여자가  서로 어딘가 조금씩 어긋나 소통하기 어려운 상황이 세심하게 그려져 좋았다고 한 관객이 말하자 몹시 기뻐했다. 누군가 그걸 느껴주길 바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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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ontreal Girl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배우(가운데) 가 관객의 불어질문을 영어로 통역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질문을 유도하기도 하면서 정말 유쾌하게 관객과의 대화를 이끌었다. 감독(초록색 셔츠, 오른쪽) 의 실제 파트너가 주인공의 파트너로 데뷔한 사연을 들었다. 예전에 홈비디오로 찍었던 장면이며 그 분은 자기 얼굴이 이렇게 온세상에 공개되는 걸 전혀 원치 않았단다. 어떻게 설득했는지 모르겠지만 편집하기엔 너무 아까운 장면 중 하나. 원씬 원컷으로 담은 엔딩에 관해(이제 끝나겠지 하고 일어서던 사람들, 나가려던 사람들이 어정쩡하게 계속 지켜보다가 기다려도 기다려도 계속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는 걸 보면서 급기야 폭소가 터졌었다),  후원금을 조금씩 모아서 제작하다 보니 후원자 이름이 너무 많아서 엔딩이 그만 그렇게 되어버렸다고 죄송하다는데 그 말에  다시 폭소가 터졌다. 영화 속에서나 밖에서나 제작진과 관객들이 같이 농담을 즐길 수 있어서 좋았던 시간.

 

 

 

 

2011/06/15 05:38 2011/06/15 05:38

Hot Docs 2011

from 영화+독립영화 2011/05/03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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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http://www.hotdocs.ca/

* Volunteers Trailer : http://www.youtube.com/watch?v=3yupHti_A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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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부터 영화제와 인연이 닿기 어려웠다. 올봄, 어쩌다 일터'에서 만난 윗사람이 자신의 그룹활동에 관해 다큐멘터리를 발표한 활동가였다. '영화를 제작하는 동안 당신은 카메라 뒤에서 당신의 주인공들에게 이런 저런 표정이나 대사를 주문한 적이 없나? 다큐멘터리는 가끔 저렴한 극영화가 될 위험에 놓이지 않던가? 당신에게 기꺼이 시간을 내주고 촬영을 허락한 사람들에게 당신은 뭘 줬나?' 일을 시작하기 전,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오히려 내가 물었을 때 그 활동가는 '재미있는 질문'이라며 같이 일해보자고 했다. 매주 만나는 청소년들이 스스로 자신을 이야기하는 동영상을 만들도록 해보자던 약속도 있었다. 그 약속은 지키지 못한 채로 일을 마쳤다. 그이도 나도 처음에 정한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함께 일했지만 마주 앉아 커피 한 잔 같이 마실 시간조차 만들지 못했다. 그이에게 '대상화'에 대한 숙제만 남기고 헤어진 셈인가. 오랜만에 닿은 다큐멘터리적 인연을 살짝 비켜가면서 어느새 핫 독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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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편에 14불, 적어도 7편 이상 볼 계획이라면 패스를 사는 게 낫다.

오전 11시부터 저녁 6시까지는 학생과 노인에게 무료로 상영한다는데 작년에도 그랬나?

그랬더라도 그 시간에 시내 중심가로 영화를 보러 들어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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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뿐만 아니라 이런 저런 토론회, 설명회, 특강 등을 들을 수 있는 패스.

40일전에 구입하면 50불 할인되고, 다큐멘터리 관련 조직에 소속되어 있으면 50불 더 할인된다.

그래도 만만치 않은 가격이다. 어찌 어찌해서 네트워킹 & 마켓 패스를 손에 넣었으니

여기서 만난 영화제 관계자들이나 다큐멘터리 아카이브에 한국 독립다큐작품들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3주전에 경순 감독에게 부탁했고 다른 분이 소포를 보냈다는데 아직 못받았다. 곧 도착하겠지.

 

 

 

How Are You?

http://www.hotdocs.ca//film/title/how_are_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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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영화는 한 예술가 커플이 베니스 비엔날레에 작품을 전시하기까지, 일상과 활동을 따라가면서 10대와 20대 시절 촬영한 비디오클립을 섞어 구성한 작품이다. 게이라는 정체성과 예술가라는 정체성이 만나 사람들 앞에서 좀 더 예리한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인 듯도 하고, 이런 다큐멘터리로 인해 게이 예술가에 대한 또 하나의 편견이 작동할 수도 있겠다. 나는 꽤 재미있었는데 같이 간 친구는 영 심드렁했다.

 

 

I AM JEJUS

http://www.hotdocs.ca/film/title/i_am_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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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여성감독이 세계 각국의 예수들을 만난 이야기.

브 라질, 러시아, 영국에서 '나는 예수다'라고 선언한 사람들이 무얼 먹고 누구와 어떻게 사는지 보여준다. 이들은 진심으로 자신이 부활한 예수라고 믿는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감독이 이야기하기로는,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후원자들 덕분에 굶지 않고 체면을 잘 유지하는 편이라고.  영국에서 마약을 하다가 어느날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한 남자, 허경영씨를 생각나게 하는 브라질의 예능체질 할아버지, 러시아의 외딴 마을에서 '여자는 남자를 돕기 위해서 신이 만들어낸 존재'라고 가르치고 '전쟁과 같은 부정적인 역사는 가르치지 않는' 제법 성스러워보이는 한 마을의 지도자에 이르기까지 흥미진진한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 안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는 여성혐오 혹은 철저하게 종속적인 존재로 '사용'하는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할 기회...가 마련되면 좋겠는데 뒤로 갈수록 점점 더 싱거운 코미디가 되고 만다. 한국에서 이런 영화를 상영할 수 있을까. 상영하면 좋겠다. 친구들 반응이 궁금하다.

 

 

Hot Coffee

http://www.hotdocs.ca/film/title/hot_coffee

공식블로그: http://hotcoffeethemovi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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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디어 미국에서 마이클 무어를 (긍정적인 면에서) 넘어설만한 신인이 나타났다. (다큐멘터리를 못보고 있는 2-3년 새 훌륭한 신인들이 많이 등장했겠지만.) 설득력있는 정보와 논쟁적인 사례들을 다루는 감독의 공격적인 태도, 주인공들의 훌륭한 증언들이 깔끔한 촬영/편집기술과 함께 명쾌하게 전달된다. 제목이 너무 단순하지 않냐고? 천만에, 저 제목이어야만 한다네. 그리고 마지막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분명히 당신의 어느 나약한 부분을 건드릴 것이다. 다 죽어가는 심장, 혹은 한쪽 눈을 질끈 감아버리곤 하던 빈약한 양심이 있던 자리를 찾아 아프게 꾹 누를 것이다. 이 영화를 꼭 보라구. 거대기업과 싸우는 용감한 소비자들, 혹은 노동자들 VS.  거대기업을 도우면서 엄청난 돈으로 미디어를 활용해 이 멋진 주인공들과 우리 모두를 기만하는 세력의 혈전이 영화 전체를 팽팽하게 긴장시킨다. 발랄하면서도 열정적인 감독과 궁금한 것이 많은 관객들의 논쟁도 인상적이었다.


 

청계천 메들리:   A Dream of Iron

http://www.hotdocs.ca/film/title/cheonggyecheon_medley_a_dream_of_i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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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 풀이되는 '나'의 악몽과 '욕망'에 대한 문학적 내레이션, 한국 근현대사와 가족사, 쇳물을 둘러싼 노동자들의 이력과 청계천에서 붙박혀있던 남자들의 이야기...들이 능청맞고 육중하게 맞물려 화면 속에 계속 등장하는 기계들처럼 복잡하면서도 정교하게 굴러간다. 내레이션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좋지만,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도입부, 그리고 중 후반의 무거운 표현들을 조금만 덜어내면 어떨까. 청계천 사내들이 개불을 먹는 장면도 여러 가지 이유에서 불편할 수 있겠다. 이 감독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 이 사람만이 포착할 수 있는 생생한 장면들, 여러 자료화면들이 지루하지 않게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쇠를 다루는 남성들의 역사가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보여주는 단면이 될 수 있는데, 이 영화가 가진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다. 핵심이 무엇인가, 어떻게 핵심을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이 저마다 다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A Barefoot Friend

http://www.hotdocs.ca/film/title/my_barefoot_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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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꾸준히 제작하고 있는 이성규 감독의 신작.

인 물 중심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서, 아니 그런 영화에 너무 깊이 몰입하기 때문에 화면과 거리를 두려고 굉장히 애쓰면서 봤고 주변 분위기를 더 많이 살폈다. 비 내리는 늦은 밤, 한국인이 만든 인도영화를 보러 올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걱정을 좀 했는데, 객석이 꽉 찰 정도로 많은 이들이 왔고, 대부분 감동받은 표정이었다. 주인공에 관한 후일담을 궁금해했고 보다 광범위한 펀드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낮에 먼저 상영한 박경근 감독이 통역을 맡아 다소 흥분한 듯한 이성규 감독의 이야기를 적절하게 잘 전달하는 모습이 좋아보였다. 오늘은 한국인을 셋이나 만났고 커피도 같이 마셨네. 이 영화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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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신작 디비디를 가득 담은 소포가 왔다. 잘 보겠습니다. 그리고 틈 봐서 꼭 전달할께요.

 

*5월 4일밤부터 사진파일 업로드가 안된다. 무선인터넷 신호가 약해서 그런가, 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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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cret Trial 5

http://secrettrial5.com/

(아직 못봤지만) 홍보 이메일을 받은 여러 영화들 중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작품.

 

 

Little Voice

http://www.hotdocs.ca/film/title/little_voi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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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린이들과 같이 크레파스를 쥐고 도화지에 그려본 다큐멘터리. 백 명이 넘는 컬럼비아의 어린이들(11세에서 13세)이 인터뷰에 응했고 그들 중 몇은 영화의 화자가 된다. 처음부터 3D로 기획한 것은 아니었고, 1차 작업을 완료한 이후에 마케팅을 위해서 3D로 전환했다는데 그 효과는 감독이 예상한 것보다 더 크다. 객석 곳곳에서 어른들이 어깨를 흔들며 앞 좌석에 코를 박고 운다. 전문가의 캐릭터와 어린이들이 크레파스로 그려놓은 (솜씨는 어설프지만 표정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캐릭터들이 코 앞으로 달려와 속삭이기 때문이다. 내가 다리를 잃고 내 친구가 아빠를 잃고 내 이웃들이 이렇게 눈물 흘려도 너희 어른들은 왜 이런 전쟁을 계속하고 있니? 특히 한 주인공이 강아지 두 마리를 마당에 묶어놓고 피난 가는 장면, 그녀석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컹컹 짖는 소리를 들려주는 대목에서는 반려동물을 가족과 다름없이 아끼는 이 나라 어른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 다 좋은데, 가장 큰 문제점은 영화를 보는 내내'콩사탕은 싫어요'라는 에피소드가 생각난다는 점. 평화로운 시골마을을 마구 파헤쳐놓는 전쟁의 참상에 관해 어린이들이 증언하는 여러 사례들이 감독의 정치적 견해로 인해 '전쟁 반대'가 아니라 '게릴라 반대'로 왜곡되지나 않을지 제법 심란해진다.

 

 

After the Apocalypse

http://www.hotdocs.ca/film/title/after_the_apocalyp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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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소련 체제 하에서 러시아가 여러 번 시도했던 핵실험으로 인해, 그 위대한 과학의 힘으로도 결코 복구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카자흐스탄의 한 지역과 거기 사는 사람들에 관한 작품. 피폭자였던 엄마, 그 엄마의 (소위 '기형'이라고 부르는) 얼굴을 쏙빼닮은 딸이 '유전자 여권'에 등록되어 '출산과 육아'를 국가기관에 의해 관리(감시?) 당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이한 모습으로 태어났다가 목숨을 잃은 아기들을 유리병 속에 넣어 보관하고 있는 'Polygon'이라는 곳에서는 이런 아기들을 '괴물'이라 부르며 더 이상 태어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사가 있고, 임신했다는 주인공에게 '멍청하게...'라고 힐난하는 의료진이 있다. 생존자들은 오히려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산다'며 덤덤하게 살아가려고 애쓰지만 아이를 인공유산하라고 설득하는 이들을 피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자 눈물을 흘리며 분노한다. 뱃 속의 아이를 살릴 것인가,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는 감독에게도 주인공의 원망이 쏟아진다. 공식적으로, 아니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도의적으로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있는 러시아와 그저 이 불안한 여성들을 윽박지르는 것으로 '관리'를 다하고 있다는 듯 뒷짐을 지고 있는 카자흐스탄의 정책에 대해 관객들도 한없이 불편해진다. 원폭으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했다가 최근 대지진으로 다시 한번 위기를 맞이한 일본과 이런 원자력을 여전히 '안전하다'고만 홍보하는 한국에서도 반드시 봐야할 영화.

 

 

Inside Lara Roxx

http://www.hotdocs.ca/film/title/inside_lara_ro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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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성 포르노 스타가 HIV에 감염된다. 그와 같이 작업했던 세 여성배우들이 그에 의해 감염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언론은 한동안 이 여성들에 대해 호들갑스런 기사를 연이어 싣다가 더 선정적인 기사에 묻혀 이들을 잊어버린다. 그들 중 하나인 라라 록스의 인생에 관한 작품. 감독은 이전에 성매매 여성들과 같이 작업했고 포르노 영화의 제작현장이 성매매의 현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내가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애였어. 통제불능이었지.'라고 회고하는 엄마, 열 여섯살에 이미 마약을 하고 있던 라라에게  '넌 가능성이 많은 아이야'라는 격려를 듬뿍 줬다던 사회복지사, 포르노 배우로 오랫동안 일하다가 감염자들을 돕는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선배들을 주인공과 같이 만나면서 감독은 라라가 왜 이 일을 시작했고 감염된 상태에서도 떠나지 못했는지를 5년 동안 귀 기울이며 깊이 들여다 본다. 그러다 어느날 내놓지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모두가 라라에게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누군가는 꼭 (이 영화를 만든 감독처럼) 라라의 편이 되어주면 좋겠다. 격렬하게 논쟁할 부분이 여럿 담겨있는 좋은 영화다.

 

 

*그 외,

  후기를 쓰고 싶지만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재밌게 봤던 영화들

 

 

The Ballad of Genesis and Lady Jaye

http://www.hotdocs.ca/film/title/ballad_of_genesis_and_lady_jaye_the/8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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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phin Boy

http://www.hotdocs.ca/film/title/dolphin_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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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ck

http://www.hotdocs.ca/film/title/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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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y Cheerleaders

http://www.hotdocs.ca/film/title/boy_cheerleaders/8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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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ol Channing: Larger Than Life

http://www.hotdocs.ca/film/title/carol_channing_larger_than_life/8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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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ff Bell Light Box 는 가장 많은 관객이 몰리는 곳이라서 예매를 못한 이들에게는 가장 피곤한 곳이기도 하다. 밴쿠버와 마찬가지로 이 도시에서도 영화를 상영하는 곳에 좌석번호가 없기 때문에, 예매를 했고 입장권을 받았더라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면 일찍 가서 서 있는 수 밖에 없다. 누군가가 예매를 취소하거나,  도착하지 못해서 빈 자리가 생기기를 바라며, 러쉬 라인에서 한 시간 이상 서서 기다리던 한 관객은 쓰러지기도 했다. 덕분에 사고를 염려한 사람들이 이들 중 단 한 사람도 건물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그 사람은 무사히 귀가했을까. 적절한 응급조치를 받았을까. 하루에 천 명 이상이 접근하는 영화제다. 건물마다 구급요원 한 두 명은 있었으면 좋겠다.

 

*패스를 가진 사람들이 먼저 들어갈 수 있으니까, 아직 도착하지 못한 친구들 자리를 미리 맡아두는 경우가 많다. 여기 사람들도 그렇게 한다. 가방이나 자켓을 빈 좌석에 올려두고 누가 물어보면 ;사람 있어요' 한다. 재밌다. 그리고 가끔은 그건 공정하지 않아요, 라고 말하고 싶다. 거의 매일 비가 오는데, 이 빗길을 버스 타고 전철 타고 자전거 몰고 혹은 걸어 걸어 힘들게 와서 줄 선 사람들이 있는데.

 

*Tiff 후원자 리스트를 건물 복도 어느 벽에 새겨놓았다. 구체적이진 않지만 액수도 적혀 있다.  백만원 이상 기부하신 분들, 오백만원 이상 기부하신 분들... 이런 식으로 어떤 이들의 이름을 공개하는 것은 어떤 효과를 가져올까. 저 리스트를 보면서 사람들은, 내 이름도 올리고 싶다, 혹은 저렇게 큰 돈을 후원금으로 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는 생각을 하게 될까? 영화제 주최측에서는 후원금을 투명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걸까? 한번도 자세히 본 적이 없는데 가만히 들여다 보니 한국인의 이름도 보인다. 저 사람은 어떤 동기로 여기까지 왔을까. 그래서 흐뭇할까. 어떤 이름들과 그 이름이 노출되는 방법에 대한 짧은 고민.

 

*극장에서 매표원으로 일하는 한 친구는 Hot Docs나 Tiff에 안간다. 얄미워서 한 푼도 주기 싫단다. 겪어보니 조금 이해가 가기도. (영화를 산업으로만 인식하는) 정부에서 지원하지 않으면 당장 내년을 기약하기 어려운 여러 영화제와 몇 몇 영화 제작자들의 운명은 이제 어디로 흘러가고 있나. 날마다 영화를 보고, 영화를 상영하는 곳에서 일하고, 앞으로도 영화에 관련된 일을 계속하고 싶어하는 사람조차 외면하는 이 영화제는 축제가 맞나.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축제일까. 어떤 축제가 되면 좋을까.

 

* Bloor 극장, Innis 상영장(여기는 극장이 아니라 대학 캠퍼스 안에 있는, 영화도 틀 수 있는 강당 같은 공간)의 경우,  내년에는 다른 대안을 찾는 것이 좋을 듯. 화질과 음질 모두에 문제가 있고 좌석도 불편하다.

 

* 어느 영화제나 마찬가지지만, 자원활동가들의 편차가 커서 인종차별적 발언을 무심코 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얼굴에 피곤이 자글자글 접혀있는데도 너무나 친절하게 안내해주셔서 송구스러운 분도 있었다.

 

* 어느 커피집에서 만난 한 한국인 종업원은  단지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만으로도 환대해주셔서 약간 어리둥절했다.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개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신이 한국인이면서, 아니 자신이 한국인이기 때문에, 그간 이 나라에서 겪어야 했던 갖은 모욕을 어느 만만해보이는 한국인에게 되돌려주는 분들이 그렇지 않은 분들보다 더 많다.  동전 두어 개를 건네고 커피를 한 잔 사는 그 잠깐 동안에도 선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 사이에서 복잡한 감정과 수많은 사연들이 덧칠된다. 피부색 다르고 국적 다른 낯선 사람들로부터 욕을 듣는 것보다 그런 묘한 한국인을 한번 만나는 것이 더 서럽고 괴로운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저 '안녕' 먼저 인사를 건네며 활짝 웃고 말지만.

 

*인터넷 환경 좋은 곳에서 딱 하루만 마음 편하게 서핑 좀 하다가 자고 싶구나. 사진파일 업로드가 여전히 안된다. 아웅...

 

*5월 10일 저녁, 학교에서 사진파일을 올리다.

 

 

 

 

2011/05/03 00:54 2011/05/03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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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학교에서 본 영화.

 

 

 

 

틀 어주기 전에 선생님이 '로저 무어가 어쩌고 저쩌고...'해서, 아 그 사람도 저런 제목의 영화에 출연했나,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마이클 무어의 영화였다. 감독의 이름과 '로저와 나'라는 다큐멘터리의 제목이 그만 섞여버린 걸까. GM 같은 대기업과도 맞장을 뜨시고, 힘자랑 돈자랑하다 폭삭 주저앉을 뻔 했던 미국 정부와 (특히) 부시를 마음껏 조롱한다는 점 때문에 여기 사람들도 꽤 좋아한다는 마이클씨, 그의 신작은 강의실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선생님이 시간계산을 잘못해서 중간에 끊고 수업을 마치려고 하자, 다른 때 같으면 좋아라하며 슬그머니 일어나 나가버렸을 학생들이 일제히 시계를 가리키며 무슨 소리냐고 아직 많이 남았다고 끝까지 봐야한다고 항의했다.

 

돈 과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이라기보다는, '자본과 권력' 혹은 '권력과 검은 돈'의 밀월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절에도 존재했고, 돈은 늘 '(아주, 대단히) 많이 가진 자들과 권력'을 위해 사용되며, 최소한의 인간적 대접을 요구하기 위해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다가 나가 떨어져 해고되고 집까지 빼앗겨 망연자실한 못가진 이들에게는   더 내놓으라고 느닷없이 덮쳐 목덜미를 무는 것이 자본의 속성이라는 것을 신랄하게 까버린다. 그의 빠른 호흡과 거침없는 독설은, 보는 동안에는 울분을 달래주기도 하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듯도 한데, 다 보고나서 며칠 동안 끈적끈적하게 남아 있는 이 앙금은 뭘까. 화면 밖에서 나는, 그리고 당신은 마이클씨처럼 한번 미친 척 들이대 보지도 못한 채 각종 금융상품광고와 높으신 분들의 감언이설에 이리 끌려가고 저리 휘둘리며 살아가기 때문인가. 아니면 나나 당신이 그런 인터뷰 그런 연출을 하기 위해선,  상상할 수 없었던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압력을 계속 감내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감옥에 갈 각오 혹은 목숨을 내놓을 생각까지 해야하는 현실  때문인가.

 

 

2010/11/19 13:28 2010/11/19 13:28

Free Documentaries

from 영화+독립영화 2010/09/2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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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고, 진보넷에 관련 포스트도 있을 법 한데 미리 찾아볼 새가 없었음.

마이클 무어의 '식코'를 비롯해서 유명한 다큐멘터리들(여러 영화제에서 상영했고 극장에서 개봉도 했던 작품들)을 온라인으로 보거나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사이트. 6월에 페이스북에 매일 접속할 때 한00이란 분이 알려주신 곳. 한동안 잊고 지내다 오늘 문득 생각났는데 다시 잊어버릴까봐 자료실에 남겨둠.

 

홈페이지 : http://www.freedocumentaries.org

 

 


Who are you guys?
We are just a few people that want to make a difference and thought putting all these films in one place would make a cool website and a good re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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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you plan on expanding?
We will be adding films periodically with the help of our hosting partners. In the future we may look at ways to individually license films. No matter what, we will always offer our films for 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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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 you a non profit company?
Right now, we aren't a non profit company. This means that your donations are not tax deductible. We are in the process of filing as a non profit. We definitely aren't doing this for the mo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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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isn't the video streaming smoothly?
This could be either a problem with your connection or our hosting partner. Even high speed modem speed does fluctuate so we encourage you to try again later or use a different connection. If the problem persists then please email us and we will see if we can find a better stream of the film. Or you can simply pause the film and let it load before restar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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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do documentary film makers allow their films to be streamed for free on the internet?
Many documentary film makers realize that having their films streamed on the internet for free will not only educate people on their perspective but will also encourage people to purchase the DVD. 

 

카테고리 중에서 일부 (클릭하면 작품 리스트로 이동)

 

- 액티비스트 관련

- 인권 관련 

- 환경 관련

- 전쟁 관련

GLOBALIZATION(지구화? 세계화?) 관련

- 여성 관련 (현재 세 작품 밖에 없는데 아마 다른 카테고리에서 관련 주제를 좀 더 찾을 수 있을 듯.)

 

2010/09/27 10:30 2010/09/2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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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토론토국제영화제

2010년 9월 9일(목)부터 19일(일)까지

 

* 공식 홈페이지  http://tiff.net/

 

* 보고 싶은 영화들

 

1. 무료 상영 - 지난 상영작들 중 몇 편을 무료로 상영하는 서비스

 

2. 주말 상영

    기후변화 이슈를 비롯, 지구를 지키자는 환경 다큐멘터리가 여러 편 있는데 시간이 전혀 맞지 않다.

    지나간 토요일과 오늘 일요일, 그리고 다음주 주말에 상영하는 작품들 중에서 보고 싶은 영화들 몇 편.

    단 한 편도 못보고 그냥 지나갈 수도 있는 이번 영화제, 아쉽다.

 

   (제목을 클릭하면 홈페이지의 영화소개 화면으로 이동함)

   

Pink Saris   

-  인도,  핑크 갱'이라는 이름의 한 여성 조직, '부끄러운가, 그렇다면 너도 죽으리라.' (예고편)

 

 Rabbit Hole

-  '헤드윅'의 존 카메론 미첼 감독.  니콜 키드먼보다 다이언 위스트가 더 궁금.

 

 매치 메이커

- 1968년 세계2차대전 이후 이스라엘.  한 마을 주민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 (예고편)

 

 노르웨이의 숲

- 트란안홍은 하루끼의 소설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이 소설은 뭘까.

 

 Beginners   

-  일흔 살 아버지의 커밍아웃은 아들의 인생에 무엇을 남기나.  미국.

 

 Out bound   

-  루마니아에서 법을 전공했던 감독은 왜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Look Stranger 

- 이것도 루마니아에 관한 영화, 한 여성의 고된 여정을 담은 것.

 

  Inside Job  

-  미국 경제위기에 관한 다큐.  2007년 아카데미 어워드에서 노미네이트되었던 감독.

  

   그 외 올해 101세를 맞은 한 여성감독의 최신작도 있고, 여성 뮤지션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도 여러 편 있다. 한번이라도 극장에 갈, 못가더라도 관련정보를 훑어볼, 시간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랄 뿐. 일단 간단하게라도 메모하고.

  

 

 

*결국 한번도 못갔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2010.11)

 

  

  

 

 

2010/09/12 17:07 2010/09/12 17:07

[알림] 어머니

from 영화+독립영화 2010/08/17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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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을 세 줄로 요약한다면

전태일의 어머니,

같은 하늘 아래 서로 다른 길을 간다 해도

당신과 나의 어머니

 라고 할 수 있으려나

 

태준식 감독 '어머니' 작업 블로그

sosun.tistory.com

 

아직 촬영중이라는데

벌써 포스터도 나왔고 트레일러도 공개한 지 오래.

 

근데 아래 포스터에 카피가 너무 많다

나중에 알아서 잘 가지치기 하시겠지

 

 

 

2010/08/17 13:40 2010/08/17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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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병님의 [독립영화와 저작권] 을 읽고

[만화방 앞에서 망서리기]와 관련

 

 

* 인디플러그

 

아직 회원가입 못했다.

가까운 분이 아이디와 비번을 알려줘서 샘터분식을 내려받아 봤는데 그 뒤로는 접속할 겨를이 없다. 몇 년 전, 독립영화 제작자(감독) 몇몇과 함께 제작자들이 직접 배급하는 온라인 공간을 고민한 적이 있었지만 그 틀은 지금 인디플러그와 같은 형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때 모인 이들은 저마다 배급방식이나 온라인 소통방식에 관해 각자의 의견을 분명하게 내놓기 어려운 입장이었으므로, 만약 뜻을 모아 공간을 마련했다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 모임은 결국 성과없이 끝났다.

모인 이들은 너무 바빠서 시간이 부족했고, 제작자들끼리 새 길을 내본 경험이 없어서 자신감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한독협이라는 공식 조직이 있는데 왜 샛길을 내려고 하는가'에 대해 의혹 혹은 부정적인/불안한 견해를 가진 다수의 눈총을 매끄럽게 받아들이지 못해 각자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흩어졌다. 여러 모로 아쉽고 아픈 경험 중 하나였다. 그 때 다큐야 쩜 넷의 온라인 설계를 맡아 수고하셨던 분께 (개인적으로 급히 마련한) 최소한의 수고비만 지불한 채 작업을 중단했던 것이 지금까지 두고 두고 죄송하고, 시간과 정성을 내놓고 마음을 열었던 몇몇 동료들에게도 일일이 만나서 매듭을 짓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

 

시간이 흐른 지금, 인디플러그가 등장했다.

회원가입 할까 말까, 고민이 됐다. 이렇게 운영하는 거 맞나, 판단하기 어려웠다. 가까운 분이 그랬듯이, 나도 가입해서 여러 사람들과 아이디를 공유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다. 하지만 한 발 더 나아가서, 인디플러그의 존재이유와 운영방침, 그리고 그 다음에 대해 토론하고 합의하기 위해 움직이는 게 더 급한 듯 하다.

 

 

*관련기사1

 미디어스 - 인디플러그의 활동과 독립영화계의 침묵 (2010. 8. 13)

 기사 내용 중 같이 읽고 싶은 부분 발췌

독립영화계에서 저작권 문제가 거론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예전에 이미 <워낭소리>를 둘러싼 논란이 독립영화계를 한바탕 휩쓸었었다. <워낭소리>의 제작자였던 고영재는 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면서 해외 시장 진출의 통로가 막혔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며 저작권법을 위반한 불법 다운로드에 대해 강하게 성토했고, 이를 계기로 독립영화 진영에서 저작권과 관련된 논의가 일었었다.

그런데 그 때 MB의 <워낭소리> 관람과 독립 영화 진흥 정책에 관련된 것으로 주제가 확산되며, 저작권과 관련된 논의는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
채 묻혀버렸다. 그러다 다시 고영재가 대표를 맡고 있는 인디플러그의 굿 다운로더 캠페인 동참과 불법 업로드 업체에 대한 법적 대응 선언으로 저작권 관련 문제가 독립영화계에 제기 되었다.

 

* 위 기사에서 언급한, '워낭소리' 고영재 피디의 발언을 담은 기사

한겨레 - 정보공유 한단계 성숙하는 계기 되길 (2009년 3월 5일 등록, 3월 13일 수정)

 

 

* 위 상황과 관련해서 [워낭소리 관련]에 보면

당시 고영재의 '디지털 악마' 발언을 비판하는 글이 여러 편 있었다

그리고 독립영화감독들이 연대서명을 받아 질의서를 전달하는 조직적 항의가 있었다

 

라울 -  [새],   [독 08]

슈아 -  [답답한데 졸려]

나루 - [연명을 부탁합니다]

 

이후 한독협 홈페이지 개편작업이 있었고, 공개질의서 및 관련논의가 올라왔던 게시판이 닫힘.

공개질의서 내용은,  '워낭소리' 불법다운로드 사태에 대한 한독협 사무총장 고영재의 대응방식(수사 요청? 경찰에 고발?)과 언론사 기자들이 여럿 찾아온 가운데 어느 대학 강의실에서 공개적으로 발언한 내용에 대한 비판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대통령의 '워낭소리' 관람요청(감독 및 한독협 관계자 참석 하에)과 이후 장관의 대화요청에 응한 것에 대한 비판이 더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관련기사1 중에서 발췌 조금 더.


당연하지만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인디플러그가 독립영화계를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갖가지 언론들에서는 인디플러그의 사업 정책을 독립영화계로 환원해 보도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문제적인 것은 언론의 보도형태가 아니라, 독립영화계의 반응이다. 그들은 마치 거대한 침묵을 통해 인디플러그의 입장에 암묵적으로 공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때로 동의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완전히 상업화된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영화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생산, 유통, 소비 방식을 만들어 왔으며, 그 방식의 다양화를 이루어 왔다. 다시 말해, 독립영화는 획일화된 상업영화의 그것들과는 다른, 대안적인 방식들을 끊임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만들어지고, 도입된 것이 퍼블릭 액세스이고 공동체 상영 등이다. 그것들이 성공적이었든 아니든, 그러한 기본적 취지와 의도만은 아직까지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작권은 상업영화가 가장 전형적으로 이익을 창출해 내는 통로이다. 게다가 그것은 직접적인 생산자나 창작자에게 보상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보다는 그것의 투자자들이나 거대 유통 기업들에 이익을 돌려주기 위한 장치이다. 물론 몇몇 이름난 생산자들이 저작권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얻긴하지만, 대부분의 창작자들에게 그것은 신화적인 것일 뿐이다. 상업영화계에서도 그들은 대부분 영화사에서, 방송국에서 창작 노동을 하며 착취당하는 노동자일뿐이다. 게다가 그것은 문화의 향상발전을 도모하기 보다는 그 반대로 기능하고 있다. 저작권은 디지털 네트워크 환경에서 문화적 생산물들을 확산시키고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막고 있으며, (때문에) 풍부한 2차 창작물(소위 패러디나 키치 등)들이 산출될 수 있는 통로를 차단시키고 있다. 파생 창작물의 생산을 활성화 시키는 것은 문화(심지어는 산업)를 향상발전 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저작권이 가로 막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디플러그가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독립영화계가 침묵하고 있는 저작권 단속은 독립영화의 기반 정체성을 위협할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 된다. 그것은 상업 영화의 틀에 독립영화 스스로를 구속시키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만약 이 상태가 더욱 진행되어 독립영화가 저작권 산업에 기대어 생명을 유지해 나가게 된다면, 독립영화는 발명되어야할 미래의 가능성들(퍼블릭 액세스를 포함한 대안적인 영상의 생산, 유통, 소비 방식들)을 미리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 관련기사 2

무비위크 - 온라인 다운로드의 가능성을 보다 (2010. 3)

인터뷰 내용 중 다시 읽고 싶은 부분 발췌

고영재 대표의 답변 중 밑줄 친 부분은 같이 생각해보고 싶은 점들

아래 두번째 답변, 세번째 답변 등은 동의하기 어렵다.


- 유료 사이트라서 시장이나 유저들의 가격에 대한 저항도 예상된다.

가격은 2,000원으로 결정했다. 고민의 산물이다. 유저들은 싼 게 좋다고 하는데, 지금 개봉 영화 가격이 일반 유저들이 바라볼 때 비싸다고 인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디플러그는 그동안의 기술적 이슈였던 DRM(Digital Right Management)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DRM을 건다는 건 ‘대여’ 개념인 거고, 인디플러그는 ‘소장’ 개념이다. 이러한 정책들을 네티즌이 이해하고 인정해 주면 부가판권 시장에서 다운로드 시장이 연착륙될 수 있다.

-독립 영화 유통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온라인 구축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면?

물론 수익성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철학적 배경으로 몇 가지 고민을 했다. 인디 음악이나 만화, 민중가요는 시장에서 다 실패했다. 적어도 유통의 영역에서는 말이다. 그들은 자기 작업은 열심히 하는데, 나머지 부분은 귀찮아한다. 개인적으로 그것이 불만이었다. 인디플러그는 자체 수익의 일정 부분을 포기했다. 수익의 50퍼센트를 제작사에 제공한다는 철학을 원칙적으로 시행하려고 한다. 그래야 온라인 배급을 통해서 제작자도 수익을 챙길 수 있고, 다양한 작품이 많이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온라인 내 독립 영화 활성화를 위한 전략이 있다면?

각각의 독립 영화가 지닌 장점을 가지고 관객들과 만날 수 있도록 그 포인트를 잘 찾아나갈 필요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독립 영화 진영이 한 단계 질적 도약을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제작 측면에서 장르를 개척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고, 마케팅도 더 적극적으로 모색할 수 있게 된다. 이번에 <경계도시 2>에 김C가 다큐프렌즈로 참여하는 게 좋은 예다.
 

나는 아직 한국독립영화협회에도 가입하지 못했다.

가입하려고 시도했다가 안됐던 그날부터, 가입하라고 권유받던 시간을 지나, 먼 곳에 혼자 떨어진 지금도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개인작업(이라고는 하나 다양한 형태로 수많은 분들이 참여했던) 하나, 여러 감독과 미디어 활동가들이  함께 제작했던 공동작업이 하나, 제작지원 한번 못받고(2007년부터는 응모하지 않기로 했다) 몇 년 동안 혼자 꼼지락거리다가 아프다는 이유로 중단한 작업이 하나 있을 뿐인 초라한 이력에 단 한 줄이라도  더 새기게 될까. 실패의 이력만 길고, 성과없는 시도만 계속하며, 고민만 많은 나같은 이가 과연 독립영화 계속할 수 있을까. 온라인 배급은 물론 독립영화에 관련해서 나같은 이는  더 이상 발언하지 않는 것이, 이 어려운 시절을 딛고 지금 열심히 작업하는 이들에 대한 예의일지도 모르겠다.

2010/08/17 13:17 2010/08/17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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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등 강조는 옮겨오면서 제가 한 것임

말문이 막혀서 이 사태에 관해 따로 할 말은 없다. 

 

* * * * * 

 

출처 : 프레시안

 

 

독립·예술영화 제작 직접지원 폐지, 영진위 의도는?

[뉴스메이커] "특정단체 밀어주기 및 배제 노골적" 영화계 반발

기사입력 2010-07-02 오후 5:58:36

        

 영화진흥위원회(위원장 조희문, 이하 '영진위')의 내년도 영화발전기금 운용계획안에서 독립영화 제작지원, 예술영화제작지원, 그리고 기획개발역량강화 사업의 예산이 전액 폐지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영화계가 또 한 차례 들썩일 전망이다. 또한 영진위 내에서 예산안을 의결하는 과정에서 위원들 간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져 더욱 논란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겨레가 오늘(2일) 오전 보도한 바에 따르면, 영진위가 최근 9인 위원회에서 통과시키고 문화부가 승인해 기획재정부로 넘어간 내년도 영화발전기금 운용계획안에서 올해 12억이 배정됐던 기획개발역량강화 사업과 독립영화제작지원(7억), 예술영화제작지원(32억 5천) 예산이 모두 폐지됐다. 영진위는 대신 이를 '영화유통 및 제작지원' 사업으로 통합해 현물지원으로 보완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영진위가 작성한 발전기금 운용계획안은 영진위 9인위원회의 의결과 문화부의 승인을 거쳐 기획재정부에 제출된 상태다.

 

이에 대한 문화부의 입장은 "문화예술의 다른 분야에도 그렇듯 영화계에도 직접지원보다 간접지원과 인프라 구축 지원이 늘어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유병한 문화관광체육부 문화콘텐츠산업실장은 이러한 변화가 "갑자기 결정한 것이 아니라 정권 초기부터 영화계에 주문했던 내용"이 라고 밝히면서, "독립, 예술영화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원하는 방식이 바뀌는 것일 뿐이다. 영화제작지원의 총예산은 오히려 올해 39억에서 내년 50억으로 늘어났다. 그간 나눠먹기, 편파시비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만큼 이를 개선하자는 취지도 있다"라고 밝혔다.

 

그 러나 영화계에서는 영진위의 이러한 예산계획이 "특정세력을 배제하거나 밀어주면서 '길들이기'를 하겠다는 의도"라고 의심하는 분위기다. 그간 영진위 조희문 위원장을 비판하며 사퇴요구를 해온 영화인들의 선봉에 독립영화계가 있었던 만큼, 실제로 영진위의 이번 기금예산안은 상당 부분 의혹을 살 만한 구석이 있다. 본지가 추가로 입수한 발전기금 운용계획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작지원' 항목이 통폐합된 것 외에도 영화단체사업지원 항목 중 공모사업선정지원 예산도 4억 6천 가량 줄었고, 시네마테크전용관 지원은 임대료에 해당하는 1억 7천을 삭제하고 2억 8천만 원만 책정됐다. 공교롭게도 영진위는 현재 인 디포럼과 인권영화제 측으로부터 '촛불단체라며 의도적으로 단체사업 지원에서 탈락시켰다'며 소송에 걸린 상태이며, 올해 시네마테크전용관 사업자 공모를 시도했다가 서울아트시네마와 마찰을 겪고 공모마저 유찰되자, 서울아트시네마에 임대료를 제외한 사업지원 부문만 지원하기로 한 바 있다.

 

반면 다양성영화 사업 중 독립영화 관람료지원 항목이 신설돼 3억 5천 가량이 책정됐다. 독립영화전용관의 관람료를 할인하고 이를 영진위에서 지원한다는 이 사업은, 결국 독립영화전용관의 수익을 일정부분 지원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 다. 사업의 취지 자체야 바람직하지만, 현재 "심사조작까지 해가며 영진위가 특별히 밀어준 단체가 독립영화전용관의 사업자가 되었다"는 세간의 의혹이 풀리지 않고 있는 만큼 뒷말이 안 나올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올해 초 영진위는 사업자 공모를 통해 새로이 독립영화전용관의 사업자로 한국다양성영화발전협의회(한다협)를 선정했지만, 이 과정에서 논란과 잡음이 끊이지 않아 몇몇 단체가 영진위를 대상으로 '사업자 선정 취소' 소송을 행정법원에 제기한 상태이며, 국내 독립영화 감독 155인은 한다협이 운영하는 '제1독립영화전용관' 시네마루에 "나의 영화를 상영하지 않겠다"며 보이콧을 선언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글로벌 스튜디오 건립'을 위해 새로이 35억이 설계비로 책정됐으나 이 '글로벌 스튜디오'라는 것의 정체를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유병한 실장은 "아시아 다른 국가에서도 한국에 로케이션을 하러 오는 상황이다. 남양주 종합촬영소의 규모를 뛰어넘는 대규모 스튜디오를 만들어 미래에 대비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중국에도 거대 스튜디오가 여럿 있는데 국내에는 없다. 오래 전부터 영화계가 요구해왔던 사항이며, 향후 아시아 시장 전체를 겨냥하자는 의도"라는 것. 그러나 영화계 일각에서는 조희문 위원장이 그토록 밀어부치고 있는 '3D 산업을 위한 스튜디오'일 것이라는 짐작이 떠돌고 있다. 유병한 실장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지만, 영화계에서 그런 루머가 떠도는 것 자체가 영화계와의 소통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본지가 접촉한 영진위의 한 위원은 "나 역시 글로벌 스튜디오의 정체를 모른다. 글로벌 스튜디오는 물론이고, 예산안 전체가 위원들 사이에서 충분히 논의와 검토를 거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위원 3인이 예산안 편성을 위한 팀에 속해있기는 했지만 다른 위원들이 예산안을 리뷰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채 심의 의결 불과 3일 전에 안이 제출됐다는 것. 한 마디로 위원들은 그저 표결을 위한 '거수기'로만 동원됐다는 것이다.

 

한편 유병한 실장은 "이것은 그저 '안'일 뿐, 확정된 것은 아니며 일부 수정될 수도 있다. 9월 정기국회 전까지 계속 논의가 필요하며, 국회에서의 논의와 의결을 거쳐야 확정이 된다"고 밝혔다.

 

 

/김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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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미디어오늘

 

 

 문화부, 내년도 독립영화 지원금 전액 삭감  

영진위 역할 대폭 축소에 ‘해체’ 우려도…외압시비 위원장은 건재
 
2010년 07월 08일 (목) 17:00:28 김원정 기자 ( mingynu@mediatoday.co.kr)
 
 
문 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이하 문화부)가 ‘심사과정’에서 논란을 야기한 영화진흥위원회(위원장 조희문·이하 영진위)의 독립영화지원사업 예산을 전액 삭감키로 했다. 문화부는 지난달 삭감계획이 담긴 ‘2011년 영화발전기금 운용계획안’을 마련했고, 영진위는 지난달 28일 ‘9인 위원회’를 열어 이를 통과시켰다. 계획안은 문화부를 거쳐 현재 기획재정부에 올라간 상태다. 
 
계 획안은 다음해 영화발전기금 전체 예산을 전년대비 5.2%(444억4400만→421억2900만원) 감액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부적으론 영화다양성사업 예산이 올해 보다 50% 이상 줄었지만, 영화인프라 구축사업은 70% 이상 증액됐다. 문화부는 영화산업의 자생력을 키우기 위해 직접지원 방식을 간접지원 형태로 바꾼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영화계에서는 독립·예술영화의 근간이 흔들릴까 우려한다. 
 
무엇보다 독립영화 제작지원, 예술영화 제작지원 그리고 기획개발 역량강화 부문을 통합해 사업 자체를 없앤 점이 반발을 사고 있다. 해당사업엔 내년도 예산이 배정되지 않았다. 투자조합 출자사업(150억→100억), 예술영화전용관사업(17억1400만 → 13억5500만), 시네마테크전용관사업(4억5천만→2억8천만), 한국영화 해외수출 지원사업(34억→ 14억)은 예산이 크게 깎였다. 
 
한 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관계자는 “독립·예술영화제작지원사업이 사라진 건 심각한 문제”라며 “영진위와 문화부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에 재갈을 물리려는 의도”라고 지적했다. 앞서 조희문 영진위원장은 독립영화제작 지원작 선정과정에서 심사위원들에게 외압을 가한 사실이 알려져 영화인들로부터 사퇴 요구를 받아왔다. 결국 예산 삭감 조치로 이런 요구를 입막음하려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문 화부는 이를 직접지원방식에 수반되는 ‘편파시비’로 규정했지만, 영화계는 문제의 본질을 잘못 짚었을 뿐더러 논란을 해소하는 방법도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한독협 관계자는 “사업을 변경하려면 그동안 효과와 문제 등을 면밀히 따지는 게 먼저지만 그런 과정 없이 언론에 ‘추문’이 퍼지니까 덮어놓고 없애려 한다”고 비판했다. 양쪽이 갈등을 빚고 있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논의조차 없었다는 설명이다. 
 
일 각에선 ‘2011년 영화발전기금 운용계획안’에 따른 예산으로 영화 제작·유통산업을 진흥해야 하는 영진위가 역할을 다할 수 있을지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예산이 전액 혹은 대폭 삭감된 영화 다양성 사업 부문은 영진위의 핵심 사업이란 이유에서다. 결국 독립성을 보장받도록 설립된 영진위를 문화부가 사실상 해체, 장악하려는 수순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조희문 영진위원장의 처신도 도마에 올라 있다. 그 는 영화계 다양성을 구현한다는 명목으로 이른바 진보적 인사들을 영화계에서 축출·배제해 논란을 일으켰으며, 이 과정에서 기관장으로 부적절한 무리수를 동원해 사퇴 압박을 받고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2011년 영화발전기금 운용계획안’에 동의하면서 ‘자리를 지키려고 영화를 팔아 넘긴다’는 비판까지 받고 있는 상황이다. 
 
영화인들은 기획재정부에서 국회로 넘어가는 동안 시간이 있는 만큼 대응 수위를 조만간 결정해 대중들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 토록하겠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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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미디어스
 
 
 
영진위, 영화진흥기관 맞나?
[기고]2011년도 영화발전기금 예산안을 뜯어보니
2010년 07월 08일 (목) 18:04:00
 
최현용/한국영화단체연대회의 사무처장  mediaus@mediaus.co.kr
 
 
  지 난 6월 28일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2011년도 영화발전기금(이하 영발기금) 예산안을 의결했다. 이어 문화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 기획재정부(이하 기재부)로 예산안을 송부했다. 이제 2011년도 영발기금 예산안의 향방은 기재부에 달려 있다.
 
문제는 예산안의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영화진흥정책의 방향성이다.
 
언 론에서 알려진 바대로 독립영화제작지원사업, 예술영화제작지원사업, 기획개발지원사업 등 주요 직접지원사업이 폐지되었다. 그리고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장비를 대여해주고, 후반작업을 현물지원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자랄 것으로 보이는 장비를 더 사겠다고 예산을 배정했다. 장비를 대여해주고, 후반작업을 공짜로 해주면 독립영화, 예술영화가 절로 진흥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새다.
 
특 정 정책이나 사업이 영속적일 수는 없다. 필요하다면 사업을 폐지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진흥’을 목적으로 하는 정책이라면, 이런 식은 아니다. 민간업체와 무료라는 비용을 무기로 경쟁하는 영진위, 도대체 이게 무슨 영화진흥정책인가. 이건 영화업계와 싸우자는 것이다.
 
지 원사업 폐지의 대안이라는 ‘제작지원 (인건비 지원)’ 사업도 마찬가지이다. 기업단위로 인건비를 보조하겠다는 사업이다. 현재 영화산업에서 투자자본은 전방위로 제작비를 줄이라는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저예산영화가 범람하는 이유이다. 문제는 부당한 방법으로 제작비를 줄이고 있다는 점이다. 인건비를 투자비로 돌린다든지 등의 불법이 횡행하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인건비 직접 보조사업이 추진되는 건, 그만큼 투자자본에게 제대로 된 투자(혹은 제작예산책정)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콜싸인이나 마찬가지이다. 도덕적 해이를 요구하는 영화정책이라니, 이건 영화산업을 불구로 만들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에 다름 아니다.
 
다른 사안을 보자. ‘독립영화 관람료 지원’이란 신규사업에 예산을 배정했다. 독립영화제작지원은 폐지하면서 이런 사업을 만든 것이다. 사업내용은 “독립영화전용관 상영 독립영화 대상 관람료 할인 지원”이다. 즉 논란과 의혹 속에 제 식구를 챙겨준 지금의 독립영화전용관 시네마루에 관람료를 별도 지원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독립영화전용관사업의 일부인 셈이다. 그럼에도 별도의 사업으로 분리시킨 이유는 명백하다. 관람료는 극장의 수입으로 계산되기 때문에, 인건비 전용이 가능하다. 일반 지원사업의 경우에는 인건비 전용이 불가능하는 점을 고려한다면, 명백히 시네마루의 경영난을 지원하기 위한 사업에 불과하다.
 
문 제는 제식구챙기기보다 더욱 심각하다. 시네마루가 아닌 다른 극장에서 상영되는 독립영화는 독립영화가 아닌가. 온라인과 같은 가격 수준으로 극장에서 영화관람료를 할인해주는 것은 관객들에게 가격정책의 혼선만을 야기할 뿐이다. 정리하자면, 결국 영진위가 위원장 개인의 식구를 챙기기 위해 독립영화계와 싸우자는 것이다.
 
또 다른 사안을 보자. ‘국제공동제작센터 운영’이란 명목의 사업이 있다. 4년 전부터 각 지역의 영상위원회들이 공동으로 추진해온 ‘국제공동제작센터-전국영상위원회’ 사업에서 이름만 빌려온 셈이다. 영진위와 영상위원회들간의 관계 정립에 대해 토론회 한번 주최하지 않은 영진위가 넉살좋게 사업성과를 가로채려는 것 아닌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이런 식이다. 도대체 영화진흥을 위한 정책인지, 그나마 어렵게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영화인들의 기를 꺾고 하는 일마다 훼방을 놓기 위한 정책인지 알 수가 없다.
 
그 나마도 각 사업의 세부적인 내용을 영진위 실무자조차 알 수 없다는 상황이다. 문화부가 작성한 예산안을 조희문 위원장이 그냥 통과시켰다고 밖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영진위가 영화계와 싸우겠다는 예산안을, 영진위가 진흥기구가 아니라 후반작업업체가 되라는 예산안을 조희문 위원장이 통과시킨 것이다. 스스로가 “독립기구의 장”이라며 사퇴를 거부하고 있는 그토록 당당한 조희문 위원장이 허수아비 역할을 자임하며 이런 내용의 예산안을 통과시킨 것은 분명 자리보전 때문일 것이다. 체면과 염치가 있다면 그리고 생각이란 게 있다면, 제발 책임질 일 좀 하시라고 권고하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조직도 생각을 해야 한다. 그래서 정책연구개발이나 R&D사업이 늘 중요하게 인정되는 것이다. 2011년도 예산안을 보면, 영진위의 정책연구 및 통계조사사업 순 예산이 3억이 채 되지 않는다. 어떤 조사를 하고, 무슨 연구를 하고 어떤 정책을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지 말고 ‘까’라는 문화부의 의중인가. 하긴 영화제작부문 종사자가 1900명이라는 통계(“2009 문화산업백서”)를 들이미는 문화부가 도대체 뭘 알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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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문화체육관광부는 진정 한국영화의 공적이 되려 하는가?!
 
한국독립영화협회 소식 / 2010.07.16
 
[성명서]
 
문화체육관광부는 진정 한국영화의 공적이 되려 하는가?!
- 2011년 영화발전기금 운용계획에 드러난 일방적 영화정책을 철회하고,
즉각 재편성하라 -
 
새 정부 출범 이후 영화계의 잡음이 끝이 없다. 한국영화 발전에 이바지해야 할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일치감치 영화계의 외면을 받고 있는 모양새다. 강한섭 위원장이 불명예스럽게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퇴했으며, 후임 조희문 위원장을 둘러싼 구설은 올해 초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독립영화전용관, 영상미디어센터, 시네마테크 전용관의 불공정하고 무리한 공모 심사 과정. 칸영화제 수상작 <시>에 대한 ‘0점’처리. 독립영화제작지원 심사과정에 외압 등 다시 언급해도 낯 뜨거운 사건들의 연속이다.
 
현실은 부끄럽지만 한국영화는 희망적이다. 2009년 독립영화 <워낭소리>을 보기 위해 관객 300백만명이 극장을 찾았다. <낮술>, <똥파리> 등 독립영화의 잇단 성과에 대해서는 뜨거운 갈채로 화답하고 응원해 주었다. 2010년 <시>, <하녀>, <하하하>는 나란히 칸국제영화제에 진출하여 의미 있는 성과로 한국영화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러나 최근 공개된 영화발전기금에 대한 2011년도 기금운용계획안(이하 ‘예산안’) 공개 이후 영화계는 현 정부의 영화정책에 다시 한 번 심각한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다. 아니 영진위와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광부’)가 진정 한국영화 진흥을 바라는 지 허탈하게 의심하게 됐다.
 
2011년 예산안에 따르면 한국 영화의 다양성에 기여해 왔던 영진위의 핵심 사업의 예산이 대거 삭감 되었다. 특히 한국 독립․예술영화 제작의 근간이 되었던 ‘독립영화제작지원’과 ‘예술영화제작지원’ 등은 전액 삭감되었다. 뿐만 아니라 독립․예술영화 상영에 앞서왔던 예술영화전용관 사업, 시네마테크전용관 사업, 영상문화의 저변 확대에 앞장섰던 영화단체들의 사업지원 부분이 모두 크게 감소하였다. 다양성사업 부문은 총 63억 가량 감소하여 2010년 대비 55% 축소되어 있다. 예산안 작성 이전 문광부는 영진위 직접 사업을 간접 지원 사업으로 전환할 것을 수차례 예고한 바 있다.
 
영화인들은 간접 지원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 하지 않는다. 인프라 증진 사업 또한 매우 중요한 사업이다. 그러나 제작 및 배급 지원 사업 등 직접 지원 사업 부분이 일방적으로 삭감 조치 된 것에 대해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이 사업들은 2000년 초부터 실시, 수년간 영화계와 조율하며 발전해 왔던 사업이며, 10년간의 독립영화와 예술영화 등 다양성 영화의 산실이 되어 왔던 소중한 사업들이다. 특히 독립영화제작지원 사업은 한해 20여편의 독립영화를 생산케 하는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지금 영화계가 분노하는 것은 비단 중요 예산이 삭감되었다는 것만이 아니다. 이것이 결정되는 과정에 주체인 영화계가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이다. 심지어 예산안의 작성주체인 영진위 조차도 2011년도 예산안에 들러리였다는 내용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다. 지속적으로 직접 지원을 간접 지원 방식으로 바꿀 것을 표명해 왔던 문광부는 이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만약 영화계의 의견 수렴 없이 일방적으로 강행되고 있는 2011년도 예산계획의 중심에 문광부가 있다면, 문광부는 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민간적 자율기구인 영진위의 위상을 보장하지 않는 상급기관에 대해 대한민국 영화인을 비롯한 국민들은 냉소적 조롱을 보낼 수밖에 없다. 문광부는 지금이라도 영진위 독립성을 존중하고, 영진위가 영화인의 의견을 수렴하여 세부적인 사업을 집행할 수 있도록 최대한 조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를 기본으로 문광부 장관의 의무인 ‘영화진흥계획’을 조속히 마련하라! 2011년 예산계획의 파행적 충격은 여기에서 멈춰져야 한다. 이에 대한 피해는 고스란히 기금의 주인인 국민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의 10년의 미래에 대해 지금 영화인들은 중대한 책임을 느끼고 있다. 그 영화인들이 문광부에 정중히 묻는다. 문광부는 진정 한국영화의 공적이 되려 하는가?! 한 나라에 문화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기관에게 던져지는 이 모순 가득한 질문이 당장 중단되길 독립영화계는 진심으로 바란다. 2011년 영화발전기금 운용계획에 드러난 일방적 영화정책을 철회하고, 즉각 재편성하라!
 
 
2010년 7월 16일
(사)한국독립영화협회
 
2010/07/30 08:22 2010/07/30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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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관련한 논쟁, 그리고 어떤 충격적인 정보를 접한 뒤로 다시 찾지 않게 되었지만, 1998년과 1999년에 접한 김규항의 글은 가끔 가슴을 저몄고 충분히 재미있었다. 음악(특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외치다 대중문화평론가가 된 이들에 대한 회고), 교회, 학교(특히 폭력적인 교사들에 대한 회상), 그리고 영화계에 대한 지적은 공감하기에 충분했다. 아래에 퍼온 어느 글에서처럼, 나도 아버지에게 태백산맥을 구해드린 적이 있는데 (그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지만) 그렇게 비슷한 경험들이 떠올라서 그의 글이 잘 읽혔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한대수에 관해서는, 독립영화를 제작하는 한 동료가 ' 박정희 정권의 한국에서 죄없는 사람들-  특히 시인, 소설가, 가수 등 - 이 잡혀가고 매맞을 때 미국으로 도망가서 편하게 음악한 인물' 이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던 게 떠오른다. 한대수의 자서전을 구해 읽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씨네21에 연재하던 그의 짧은 글 한 편 정도는 접할 수 있었을텐데 어찌 그리 무서운 오해를 했던 걸까, 아쉬운 대목이다. 암튼, 문화운동에 관련된 몇 가지 자료를 뒤적이다가 그의 오래 전 글 몇 편을 남겨둔다.

 

그 즈음 내 생각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 수 있는 몇 가지 흔적들 중 하나. 자신이 통렬하게 비판하던 어떤 무리들 속에 들어서버린 한 인간을 보는 것이 나인지 아니면 바로 그 인간이 나인지 생각해봐야할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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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인들, 록을 고르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록에 열중하고 있다. 노래라곤 <광야에서>나 <아침이슬> 밖에 안 부르던 사람들이 록을 듣는다. 한국의 지식인들을 대변한다는 한겨레신문사는 '신중현 헌정공연'을 주최했다.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서 록은 지적이고 저항적인 음악으로, 쓸 만한 예술양식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90년대 들어 게임이 끝났음을 감지한 80년대의 문예활동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변신을 서둘렀다. 조직활동을 내세우던 사람들답게 청산 속도도 빨랐다. 문화예술 활동가들 가운데 순진한 몇몇은 절망감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기도 했으나 인생을 경영할 줄 아는 이들은 자신들이 버린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적당히 차용하는 대중예술 평론가로 명함을 바꿨다. 강철 같은 '사회주의 문예활동가'가 시침 뚝 떼고 '의식 있는 대중예술 평론가'로 변신하는 모습은 분명 보기 민망한 일이었지만 피차 살아보겠다고 작정을 하고 한 일이니 만큼 서로 지난 일을 언급하는 일은 금했다. 

대중음악 부분은 틈새시장이었다. 김현식이 죽자 상황판단이 빠른 이가 재빨리 대중음악 평론이라는 아이디어 상품을 내놓았고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각광을 받는 분위기와 맞물리며 히트상품이 되었다. 80년대 운동권 노래를 계속 부르기도 썰렁하고 무식하게 대중가요를 무작정 따라 부르기도 난처한 지식인들에게 대중음악 가수나 곡에 대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해주는 평론과 연구들은 위안을 주었다. 

언더그라운드 대중음악이라는 소재가 재탕 삼탕 되다가 대중음악계를 무협지로 묘사하는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록으로 옮겨갔다. 처음엔 '이승철과 다섯 손가락'하는 식의 실수가 빈번했지만 역시 고도의 지적 기능 훈련을 받은 사람들답게 금새 '문제는 록정신이다'라는 구호로 발전되었다(10여 년 전엔 '문제는 리얼리즘이다'였지 아마). 록의 불량함과 저항성은 사회적인 것으로만 해석되었고, 거기에 힘입어 텔레비전 카메라에 침을 뱉는 밴드가 나오고 음악은 엉망이지만 밴드의 존재 이유는 멋지게 설명하는 희한한 지식인용 밴드가 양산되었다. 

그렇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70년대엔 탈춤과 마당극을, 80년대엔 소비에트나 북조선의 집체극을 진보적인 예술양식으로 선택했던 지식인들은 이번엔 록을 고르게 된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일은 지식인들의 끊임없는 변화에도 대중들은 한치의 동요나 불만이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지식인들은 대중성의 문제를 고려해 왔고 대중을 선도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심지어는 대중성에 대한 의견 차이로 조직이 깨지는 것도 불사했건만 슬프게도 뒤에 따라오는 대중은 단 한 명도 없었던 모양이다. 

알고 보니 대중예술 평론이란 실제 대중예술이나 대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지식인이 쓰고 역시 지식인들이 읽기 위해 만들어 낸 대중예술의 해석판 같은 것이었던 모양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역사책'이었던 것이다. 

논리적인 근거나 타당성 없이는 행동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지식인들이, 익숙하지 않은 대중예술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평론과 연구라는 고유의 해석판이 필요할 것이다. 또 한때 혁명을 꿈꾸던 사람들이니 만큼 끊임없이 '대중'을 이야기하고 연구하는 행위가 마음의 편안함을 준다는 것도 인간적으로 이해 안가는 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로 대중을 선도하거나 아주 조금이라도 연관되어 있다는 기대는 버려라. 어차피 다시 혁명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 씨네21 1998년_3월
 

 

"이걸 읽으면, 이 양반이 뭔가..." 10년쯤 된 일이다. 선배한테 빌린 <태백산맥> 열 권을 아버지께 내밀었다. 읽을거리를 구해 오라는 아버지의 부탁을 이용하여 아버지의 소시민적인 의식에 파문을 일으켜 보려는 수작이었다. 그런데 웬걸. 다음날 아침 그 책들은 모두 내 책상 위에 쌓여져 있었다. 

(의아한 표정의 아들)"왜, 재미없으세요?"/(조금 미안한 표정의 아버지)"응"/(의혹에 찬 표정의 아들)"왜요?"/(귀찮은 표정의 아버지)"조금 읽어 봤는데, 너무 뻔해..."/(이 양반이 보수성을 드러내는구나 하는 생각에 열 받은 아들)"뭐가 뻔해요."/(딴 데를 보며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의 아버지)"아, 옛날에 다 본 얘기야"/"(아들)..."

아차, 아버지의 고향이 거기였구나. 일단 꼬리를 접긴 했지만 기분은 개운치 않았다. 4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읽고 감동했고, 파시스트들의 집요한 공격으로 그 빼어난 '리얼리즘'이 방증되었다는 이 대작품이 뻔하고 재미없었다... 아버지의 반응은 나에게 오랜 의문으로 남았다. 

"청년이라면 밤을 새워라/이제 대학생이 되셨다면/조국의 교과서로 불리는/조정래 대하소설/태백산맥과 아리랑을 읽어 주십시오." "끝없는 감동의 물결/독자 400만" "선배들이/인간을 사랑한 순정/태백산맥의 골짜기마다 숨어 있다./선배들의 조국에 대한 고뇌/태백산맥만이 증거 한다."

며칠 전 신문에서 본 <태백산맥>의 광고 덕에 나는 묵은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나는 리얼리즘에 대한 한 '편견'을 마련함으로써 내 속을 다스릴 수 있었다. 98년도 대학 새내기들에게 소설책을 팔기 위해 "조국의 교과서"라는 표현을 쓰는 업자들에 대한 언짢음 때문이었을까? '편견'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리얼리즘은 지식인을 위해 마련된 장치이다. 비록 책상에 앉아 담배나 빨고 있지만 마음만은 칼바람 부는 벌판과 총탄이 빗발치는 계곡을 달리고 싶은 지식인의 당연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가상현실 체험이다. 

광고는 계속된다. "98년도 대학 새내기 여러분. 여기에 <미스트>나 <레이븐>을 능가하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리얼리즘, <태백산맥>과 <아리랑>이 있습니다. 누구든 책장만 펼치면 '선배들'과 함께 '태백산맥 골짜기와 만주벌판'을 누비며 그들의 '순정과 고뇌'를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통한 리얼리즘도 아버지를 흥분시킬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짐작컨대, 열 권의 책을 받아든 아버지는 첫 권을 펼치자 이내 "옛날에 다 본" 이야기임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의식'에 어떤 형태로든 적극적일 수 없는 소시민인 아버지의 유일한 선택은 그 소설을 피하는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태백산맥>이 '뻔하고 재미없었던' 것이다. 어제 저녁에 구한 책을 날이 새기 무섭게 돌려 줄 만큼. 

그러나 영상시대 지식인의 머리통은 그리 단순하지 않아서 <태백산맥> 같은 유장한 리얼리즘만으론 모자람이 있다. '책상 위의 역사'를 더욱 장엄무비하고 의미심장하게 만들기 위해선 바로 지식인 자신의 '일상의 진실'을 그린 리얼리즘이 곁들여져야 한다. 

먼저 책장을 넘겨 태백산맥이나 만주를 달려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뭔가를 한껏 느낀 다음, 바로 리모콘을 눌러 힘있는 강원도나 우물에 빠진 돼지에 낄낄거리며 담배연기를 길게 뿜는다. 비로소 지식인은 비분강개에다 나약한 자신을 자조하는 웃음마저 곁들인 완벽한 지성미를 갖추게 된다. 리얼리즘은 리얼하다. | 씨네21 1998년_3월
 
 
나는 하드록이 좋다. 레인보우의 8분 27초 짜리 <스타게이저>를 틀고 눈을 감으면 심장 근처로 고압전류가 흐르고, 드럼을 두들겨 살아있음을 확인하던 20여 년 전으로 돌아간다. 그 시간만큼은 개점휴업 중인 출판사의 알량한 발행인이 아니고 한달 내내 이자 챙기기에 녹아나는 불량거래 직전의 채무자도 아니다. 그 시간만큼은 나도 한 록 하는 로커이고 국가와 사회가 감당 못할 날라리이다. 

1985년의 청년은 하드록을 들을 수 없었다. 식민지에는 민족적인 문화와 매판문화가 존재할 뿐이었다. 나는 하드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의 오염된 육체와 정서가 부끄러웠다. 어느 날 밤, 나는 책상 옆에 놓여져 있던 스네어 드럼을 치우고 분연히 일어나 민족음악을 찾아 나섰다. 맨 먼저 한 일은 마샬 앰프의 살인적인 출력에 늘어나 버린 나의 귓구멍을 대나무와 오동나무 그리고 쇠가죽 따위에서 내는 단출한 소리에 맞춰 다시 뚫는 것이었다. 휴학생이었고 시간은 많았다. 매일 밤 FM의 국악 프로그램을 듣고 또 그걸 녹음해선 온종일 듣기를 여러 달, 내 귀는 드디어 새로운 음악을 즐겁게 수용하기 시작했다. 

내 귀는 민속악보다는 정악을 좇았다. 김성진의 정악 대금은 나를 사로잡았다. 몇십 년을 주인의 침에 삭은 쌍골대가 어떤 관념적인 틈새도 없는 윤기로 <상령산>을 울리자 나는 전율했다. 얼마간의 미장 데모도 노릇으로 나는 대금을 살 수 있었다. 단단하고 묵직한 몸에 삼현육각이 새겨진 놋쇠 덮개가 덮인 대금을 손에 넣고는 감격의 눈물을 찔끔거렸다. 입대가 한달 앞으로 다가오자 나는 최선을 다했다. 국악원에 출근하다시피 열심히 강습을 받고 밤새 혼자 연습하고 대금의 조카뻘인 단소를 수십 개씩 만들어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도서관을 뒤져 대금에 관한 온갖 문헌을 찾아내기를 계속했다. 

군대 내무반에서 대금 연습을 하리라는 내 계획은 대한민국 육군을 졸로 보는 꿈이었음이 입대하던 날 밤 밝혀졌다. 무슨 운명인지 대금 연습을 포기한 건 저 산밑의 일이고 나는 다시 드럼을 치게 되었다. 사병들의 춤을 위해선 <젊은 그대>, <아파트>, <배드 케이스 오브 러빙 유> 따위를 연주하고 이따금 지원되는 스트립걸을 위해선 <모나코>를 깔았으며 장교놈들 회식을 위해서는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로 봉사했다. 군부정권하의 군대를 위해 문선대 노릇을 하는 일에 대한 거리낌은 없었다. 나 또한 군바리였고 나는 나의 드럼에 맞춰 미치게 몸을 경련하는 불쌍한 전우들을 위해 기꺼이 팔다리에 쥐가 나도록 드럼을 두들기고 또 밟았다. 

3년을 총 대신 드럼스틱으로 때우고 나와선 이른바 노동자 문화운동 하는 조직에 들어가 보니 음악팀에선 놀랍게도 전기기타 신디사이저 드럼을 사용하고 있었다. 몇 차례 공연을 따라다니며 드럼을 치기도 했지만 내 생애에 가장 불편한 드럼이었다. 나의 음악정신은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 거길 그만두고 다시 한 해를 놀 때는 또 대금을 만지작거렸다. 90년대로 넘어와 이른바 진보적 영화도서 출판을 시작하고부터는 맥없이 여러 음악을 전전했다. 퓨전재즈, 다음에 블루스, 다음에 서양 고전음악, 그 다음에 재즈 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1998년, 나는 다시 하드록을 듣는다. 

대금을 꺼내는 일은 드물어졌고 <영산회상>도 일주일에 한번 들을까 말까다. 대금을 꺼내고 <영산회상> 시디를 넣고 하는 일이 피곤하기 그지없고 그 이유를 생각하면 더욱 피곤해질 뿐이다. 하여간 당분간 '우리 것'은 그다지 듣고 싶지 않다. <서편제>가 뜨고 이른바 국악붐이 일면 명절날 방문객을 맞는 고아가 된 것 같고 쇠락한 고향을 밝히기를 부끄러워하는 잡놈이 된 것 같다. 나의 음악유전이 이 나라의 역사와 조금이라도 관련을 맺어왔을 거라는 공상을 하면서, 파시즘이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이 염병할 나라에서 정악처럼 사람을 정갈하게 만드는 음악을 듣는 일은 코미디이고 잔혹극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에게 아직도 한줌의 음악 정신이 남아 있다면 얼마간 어질러진 채로 놔두고 싶고 그래서 거듭하는 게 하드록이다. 한없이 몽롱해 하면서도 머리와 입으로 록에 붙어먹으려는 놈들에 대한 살의를 풀지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나의 음악유전은 몹시 피곤했고 음악에 관한 한 나는 임포 증세를 보이는 것 같다. | 씨네21 1998년_4월
 
 
한총련을 보면 기분이 좋다. 그들의 노선이 아니라 'GUESS' 모자와 'NIKE' 티셔츠를 입고도 '자주'를 외치는 그들의 분방함이 정말 좋다. 필자가 학교 다닐 무렵의 운동권 학생들은 밝고 화사한 빛깔이나 영문이 들어간 옷을 입는 것은 금기였다. 집회에 모인 학생들은 모두 '심각한' 빛깔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치 유니폼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같은 담배를 피웠고 같은 음악을 들었으며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은 소설을 읽고 같은 공연을 봤고 같은 어휘로 말했다. 

파시즘은 어디에 있는가. 파시즘은 이른바 5,6공 인사나 한국논단 같은 극우집단에만 남아 있는가. 천만에, 파시즘은 우리 안에도 남아 있다. 파시스트 치하에서 몇십 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파시스트와 닮아 갔고 파시즘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다. 구제금융을 부른 '국가'가 그 원인을 '국민의 과소비'라 둘러대면 '국민'은 가슴을 치며 금가락지를 빼들고 방송국에 간다. '국민'의 대다수인 근로대중들이, 30여 년을 경제개발 현장에서 뼈빠지게 고생만 하던 사람들이 요 몇 년 아이들과 놀이동산 몇 번 가고 갈비도 사먹고 한 것이 구제금융의 원인인가. 우리 안의 파시즘은 우리를 한없이 비굴하게 만든다. 

한 대중음악 평론가가 말한다. "우리 나라에서 뜨는 노래 절반이 일본 곡 표절인데 지금 전면 개방하면 그게 다 밝혀질 거고 그러면 국민들은 배신감 때문에 우리 가요에 등을 돌릴 거다. 개방을 미뤄야 한다." 이런 게 바로 우리 안에 남은 파시즘이다. 여당 쪽에서 일하는 선배가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물었다. "미국영화 막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 자생력을 길러야 한다고 하지만 개방해서 경쟁하게 하는 게 근본적으로 자생력 기르는 거 아니냐?" 그 선배는 나를 일종의 영화인으로 보고 물었지만 그다지 영화인이 아닌 나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고 얼마 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그 문제를 물었다. 놀랍게도(아무래도 나만 놀란 것 같다) 하나같이 개방이 바람직하지만 그걸 '주장'할 순 없다고 답했다. 이런 게 바로 우리 안에 남은 파시즘이다. 이젠 물어야 한다. 이른바 '민족'의 이름 하에 덮어 둔 한국 대중문화 '업자'들의 '무능'과 '배신'에 대해 물어야 한다. 그들의 정조가 과연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정조인지 따져봐야 한다. 

세상의 모든 파시즘은 언제나 '민족'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강북에 가본 강남의 중딩이 통신에다 소감을 썼다. "강북 형들 넘 무섭게 생겼당. 다신 안 간당..." 이 중딩과 점심을 거르는 강북의 고딩이 과연 같은 민족인가? 오늘 아침 농성장에 출근하는 노동자와 반성하지 않는 자본가가 굳이 같은 민족이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이라는 테두리 안에 사는 사람은 무조건 같은 민족이라는, '한국'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생겨나는 것은 모두 민족적인 것이고 보호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파시즘을 부른다. 전두환이 광주를 토벌하며 더러운 집권욕을 드러낼 무렵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이 지껄였다. "한국인들은 들쥐와 같다. 들쥐의 습성은 한 마리가 맨 앞에서 뛰면 덮어놓고 뒤따라가는 것이다." 위컴은 '망언'을 사과했지만 '들쥐들'은 18년 동안 덮어놓고 맨 앞에서 뛰는 놈만 따라다녀 왔다. 파시즘은 우리 안에 남아 있다. | 씨네21 1998년_5월
 
 
거들고 있는 웹진의 인터뷰 리스트에 한대수를 올려놓고 이 사람은 뉴욕에 사니까 팩스나 인터넷으로 인터뷰를 해야겠구나, 그런데 연락처를 어디다 알아보나 하며 혼자 흥미진진해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한대수가 자서전을 냈다. 나는 인터뷰 계획을 취소하고 대신 한대수의 자서전을 읽는 기쁨을 얻기로 했다. 한대수가 자서전을 내다니. 

초등학교 5학년 때던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실존적 고민에 빠져 꼬박 1년을 가위눌려 살았던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낭만적인 힘'을 얻었다. 누구 노랜지 제목이 뭔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그 노래에 감사했다. 그 노래는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였다. 10년쯤 전. 열정의 음악사가들(모든 음악 생산물에 역사적 의미를 잣대로 별을 매기는 사람들. 신중현에게 '이제 보니 위대한 록'이라고 적힌 별을, 산울림에게는 '다시 보니 창조적 록'이라는 별을 달아준 바 있다. 이제 그들은 한대수에게 '돌아온 포크록의 생부'라고 적힌 별을 달아 준다.)이 한대수를 "이 땅의 현실에 뿌리박지 못하고 행복의 나라(미국)로 떠나 버린" 쪼다로 폄하한 글을 읽었다. '반동으로 몰린 은인'을 바라보며 나는 절망했다. 그리고 지난 해, 이소라 숀가 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드디어 한대수가 노래하고 자기 얘기를 하는 걸 볼 수 있었다. 

한대수는 좀더 살이 붙고 좀더 이마가 벗겨졌지만 여전한 장발과 부츠 차림이었다. 그는 특유의 걸걸하고 강한 경상도 억양으로 자신의 옛 노래들과 <노 릴리전>, <에이즈 송> 같은 새 노래들을 불렀고 사회자의 질문에 따라 예술과 자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바람'처럼 '자유'롭게 그러나 기품 있게 말함으로써 깊은 울림을 얻고 있었다. 나는 지식인이 혹은 예술가가 입을 벌린다는 게 발언한다는 게 저런 거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 깨달음은 내가 서른 일곱 해 동안 이 나라의 사람들로부터 전혀 얻을 수 없었던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나의 초등학교 1학년 담임은 자기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잃어버리자 아이들을 하루 종일 변소에도 못 가게 하고 교탁에 엎드려 울었다. 울다가 한번씩 우리를 노려보던 그 추한 눈빛을 난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선생들은 언제나 자기 한 몸 건사하기 힘든 인격을 폭력으로 벌충하는 그런 인간들이었다. 학교 다니는 일이 끝나고 문화계 언저리에서 건달 노릇을 하게 된 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회의 선생'이 학교 선생과 다른 건 때리지 않는다는 점뿐이었다. 장엄한 예술가 선생은 알고 보면 장엄한 정신지체아였고 존경받는 인격자 선생은 실은 공명심과 출세욕만으로 채워진 인격장애자였고 입만 열면 역사를 말하는 열혈지사 선생은 자기 아내와 자식한테서조차 존경받지 못하는 불쌍한 생쥐였다. 이 나라의 더러운 역사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기로 했지만 그들 덕분에 나는 적을 보며 비분강개하는 일보다는 우리 안의 위선을 조롱하는 일을 더 즐기는 비틀린 사람이 되었다. 

한대수의 자서전은 정직했다. 그는 쪼다가 아니었다. 그가 이 나라에서만 살던 사람들보다 먼저 '자유'와 '바람'을 먹었다는 게 언제나 문제였지만 그 역시 그의 죄는 아니었다. 그는 가슴 아픈 성장기를 거친 한국 소년이었고 '빳다'를 치는 한국 군대에 다녀 온 유일한 뉴요커였다. 한대수는 남자가 생겨 자기를 떠난 전처의 '그 남자'가 곤경에 처하자 그를 집으로 데려와 먹이고, 나중엔 '그 남자'와 헤어지고 신경쇠약에 걸린 전처를 새 아내와 사는 집으로 데려와 보살피는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었다. 불의 열정으로 인생을 채워 온 그 '야수'가 말이다. 한대수의 50여 년 생애의 얼개가 한 조각씩 드러날 때마다 나는 '인간 한대수'에게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다. 최영미는 죽은 김남주에게 "선생님 차라리 잘 돌아가셨어요"라고 적었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 있는 이 멋진 사나이에게 무릎 꿇고 말한다. "형님, 절 거두어 주십시오." | 씨네21 1998년_7월
 
 
박노해가 다시 세상에 돌아오는 과정은 몇 가지 단계로 이루어졌다. 먼저 박노해는 나오기 일 년쯤 전에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수상집을 펴냈다. 추기경이 추천사를 쓴 그 책은 박노해에 대한 세상의 경계심을 풀어주었다. 정권이 바뀌고 양심수 석방문제가 불거질 무렵 박노해는 법무부장관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 내용은 "공개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공개되었는데 "한 때 극단적이고 편협된 사고를 가졌던 점을 인정하며 새 삶을 모색하고 싶다"는 반성문이었다. 뒤이어 박노해는 '준법서약서'를 썼다. 그는 준법서약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으며 그걸 안 쓰는 건 "유연하지 못한 태도"라고 했다. 출감하는 날, 박노해는 '다시' 언론사에 편지를 돌렸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힘내십시오. 사랑합니다." 파시스트들이 애독한다는 <조선일보>는 그 편지를 '감동'이라고 뽑았다. 모든 단계는 주도면밀했고 매체를 다루는 솜씨는 그가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임을 방증했다. 

"7년 살고 박노해처럼 된다는 보장만 있다면 감옥살이 못할 놈이 누가 있냐." 초장에 한대 패서 재우는 건데. 친구는 민망하게도 장세동이 옥살이할 때마다 전두환으로부터 위로금을 받았다는 얘기를 박노해한테 빗댄다.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건 박노해만 몰랐던 거 아냐." "농촌 공동체? 소리 없이 하고 있는 양반들 많아. 하루 다섯 시간 노동? 쌍팔년에 러셀이 한 얘기고. 도대체 새로울 게 하나도 없잖아."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돌아온' 박노해는 '변화'가 가장 주요하다고 했지만, 정작 그가 정색을 하고 하는 얘기들 가운데 새로운 건 없어 보였다. 나는 십오 년 전의 김지하를 떠올렸다. 오늘 김지하와 그의 생명사상은 어디 가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주인이 서비스라며 비단조개를 몇 개 갖다주자 친구의 목소리는 한 단계 높아지고, 소주잔만 비우며 "조개나 먹어 자식아" 하던 나도 왠지 울컥해서 거들기 시작했다. "<노동해방문학>하던 아무개는 종적을 모른다더라. 그래도 염치를 아는 사람이지." "사노맹도 다 나온 게 아냐. 한 명은 안 썼어." "준법서약서 얘긴 하지마 자식아." "썼다고 욕하는 게 아니라, 쓴 게 자랑은 아니지 않느냐는 거야. 안 쓴 사람들이 엄연히 있는데 말야." "강용주라고 우리하고 동갑내기 장기수 말야. 자기 어머니한테 쓴 편지 읽어봐라. 너나 나나 대가리 박고 칵 죽어야 돼." "이상해. 독립운동이고 민주화운동이고 어떤 놈은 3대가 망하고 어떤 놈은 혜택받는단 말야." "그게 바로 인생 경영 아니겠냐. 그것만 되면 맑스주의 아니라 친일 경력도 일생에 보탬이 되는 거야." 우리의 삶이 버려진 조개 껍질보다 시시해서였을까. 우리는 점점 취해만 갔고 주장은 주정으로, 주정은 다시 공전해갔다. 

돌아오는 길. 사지를 못 가누며 연신 "조개나 먹어라 새끼들아"만 되내이는 친구를 부축하다가 나도 힘이 빠져 주저앉았고 이내 둘은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별이 총총하게 박힌 하늘을 보며 친구가 중얼거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었다. 망할 자식.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싸우는 사람의 영혼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다. 유토피아는 점심을 거르는 아이들을 알면서도 오늘 점심은 뭐로 때우나 고민하는 시민들의 구차한 삶 속에도,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전직 혁명가의 새삼스러운 외침 속에도 없다. 유토피아는 "아무 것도 아닌" 준법서약서 한 장 못 쓰고, 아들을 기다리는 칠순 어머니에게 "오래 사셔야 돼요."라고 말하는 내 동갑내기 장기수의 영혼 속에, 사람들이 '미망'이라 비웃는 그 고결한 영혼 속에나 있다. 주여, 갇힌 자에게 은총을. | 씨네21 1998년_9월
 
 
외할아버지는 한일합방 되던 해 태어나 해방되던 해 돌아갔다. 일제 치하에서만 살았던 셈이다. 내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외할아버지의 모습은 면사무소 앞에서 일본 관리들과 찍은 사진이다. 가운데는 콧수염에 긴칼을 든 순사가 근엄하게 앉아 있고 그 옆에 외할아버지가 사진 찍기 싫은 얼굴로 앉아있다. 초등학교 때 이 사진을 처음 보고 어머니에게 외할아버지는 친일파였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글쎄, 일본 사람들하고 일했지만 그 사람들이 가장 불편하게 여기는 분이기도 했다. 밖에선 한없이 고지식했지만 집에선 믿기 힘들만큼 부드러운 분이었지. 항이가 외할아버지 닮았구나." 

외할아버지는 도벌꾼을 막기 위해 산골마을을 찾아다니면서 실사를 벌이다가 트럭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고 결국 늑막염이 되어 돌아갔다. 전라도의 덕망 있는 유학자였던 외증조 할아버지는 공부를 작파하고 돈놀이로 연명하기 시작했다. 남편의 모든 것을 불태운 외할머니는 어린 자식들에게 당신의 처지를 한탄했고 아버지의 무덤에 못 가게 했다. 감성적이고 예민한 어머니에게 그것은 그대로 상처가 되었다. 다섯 해 후 내려온 인민군은 '지주이자 고리대금업자'인 외증조 할아버지를 가두고 재산을 몰수했다. 집안의 젊은이들이 모조리 좌익이었음에도 외증조 할아버지를 빼주진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산사람이 되어 싸우다 죽었다. 토벌대에 잡힌 몇몇은 '와이로'(우익 고유의 생활문화인)를 써서 살아남았다. 외증조 할아버지는 얼마 못 가 화병으로 돌아갔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어머니가 나를 당신 아버지와 닮았다고 한 얘기에 '닮기를 바라는' 소망이 더 깊게 베어 있음을 깨달은 건 서른이 다 되어였다. 어머니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지만 좌익에 대해 뿌리 깊은 선망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간 다음 의지하고 따랐던 집안의 좌익 오빠들 때문이다. 그들이 인간적으로 얼마나 멋진 사람들이었는지 떠올리는 어머니의 눈은 꿈을 꾸는 듯 하다. 어머니는 그렇게 외할아버지의 추억에 좌익 오빠들의 추억을 보태 놓고 당신 아들이 그리 되기를 바랬던 것 같다.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 뭘 하라거나 하지 말라거나 하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어머니의 가르침은 언제나 같았다.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 불의를 보고도 참는다면 남자가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비굴해지면 안 된다." 그 말을 매일 같이 들을 무렵엔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그 말을 충분히 이해하는 나이가 된 나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

어머니는 (요즘 말로 하면) 당신 아들이 좌익 인텔리가 되기를 바랬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좌익도 인텔리도 되지 못했다. 좌익인 듯할 뿐 좌익이 아니며 인텔리인 듯할 뿐 인텔리가 아니다. 글만 쓰면 파시스트를 저주하고 중산층을 까고 지식인을 비꼬고 근로대중을 한없이 지지하지만, 그 글은 방구석에 앉아 세상을 재단하는 부도덕을 깔고 있다. 어머니의 가르침은 실패했다. 이제 늙고 병든 어머니는 아들의 곤궁함에 노심초사하면서 출근한 며느리를 대신해 조용히 아이를 본다. 어머니는 더 이상 '불의'나 '비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일용할 양식을 벌기 위해 거의 매일 그 '불의'와 '비굴'과 교접한다. 돈이 된다면 재벌에도 몸을 팔고 파시스트에게도 웃음을 판다. 다만 이따금, 아주 이따금씩만 더러운 꼴에 생지랄을 할 뿐이다. 어머니의 가르침은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정말이지 어머니의 가르침은 실패했다. 그 가르침을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그럴 때면 나는 다섯 살 짜리 딸, 김단을 방으로 부른다. 그리고 김단을 안아 올려 입을 맞춘 후 말한다. "단아, 힘없는 동생들한테는 친절하고 나쁜 오빠들하고는 용감하게 싸울 줄 알아야 훌륭한 언니가 되는 거야." 김단은 그 말을 할 때면 세 번에 두 번은 딴전을 피우고 한번쯤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그럼 용감한 사람이야, 아빠?" 김단은 겁이 많지만 그 겁만큼이나 용감하다는 말을 좋아한다. 나는 비로소 안도한다. "이 아이가 나보다는 낫겠구나." 가르침은 계속된다. | 씨네21 1998년_10월
 
 
게이 후배가 있다. 칠 년 전 어떤 책을 번역해보겠다고 찾아 왔을 때 해사한 얼굴에 주황색 사파리가 인상적이었다. 바로 일을 진행했으나 얼마 후에 다른 출판사에서 책이 나오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딱히 볼일이 없어졌지만 워낙 똑똑하고 호감 가는 친구라 언젠가는 같이 일할 기회가 있기를 기대했다. 그 녀석을 다시 만난 건 삼 년 전이었다. 나는 근근히 버텨오던 영화전문도서 출판을 지속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고 그 녀석을 찾았다. 

저녁 무렵 대학로에서 만난 그 녀석은 살이 붙고 안색이 안 좋았지만 지적인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밥 대신 맥주를 먹기로 하고 골뱅이 집에 들어갔다. 일 이야기에 간간이 '깃발 꼽는 지식인들'을 안주(참으로 질긴 안주) 삼아 네댓 시간을 보냈다. 그 녀석은 내가 말을 하면 조금은 부끄럼 타는 듯한 얼굴로 잠자코 듣고 있다가 선량하게 웃었으며 이따금씩 손뼉을 쳤다. 그날 그 녀석으로부터 받은 느낌은 특별했다. 처음엔 '매력 있군' 했지만, 며칠 후 나는 그 '매력'이 성적인 지점에 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성적 취향의 경계란 얇디얇은 것이었다.

그 후론 그 녀석한테서 그런 느낌을 받은 기억이 없다. 그 녀석은 내 앞에서 더 이상 부끄럼을 타지 않았고 술만 먹으면 악을 쓰고 차도에 오줌을 갈기곤 했다. "형, 나 남자 좋아해요." 한달 쯤 지났을까. 그 녀석은 포장마차에서 만취한 채 내게 커밍아웃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받은 느낌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그 녀석은 제 애인을 나에게 소개했고 며칠 후 생일파티에 초대했다. 낙원동의 아담한 게이 카페에서 열린 생일파티엔 열댓 명이 참석했다. 열 명 남짓한 게이들이 짝을 이루어 참석했고 '일반'(그들은 이성애자들을 '일반'이라고 자기들은 '이반'이라고 부르더라)은 그 녀석의 여자 친구 둘과 나, 그 녀석의 남자 친구 그렇게 넷이었다. 게이들의 생일파티(네 가지 성이 참석한)는 유쾌했다. 적극적인 이성애자일 뿐인 나로선 그들 가운데 이정섭씨처럼 간드러지게 말하는 친구가 없다는 것부터 신기해 보였다. 돌아가면서 준비한 선물을 내놓고 덕담을 하는 식당 지배인, PD, 철인 경기 선수, 스튜어드, 학생에 백수까지 그들은 그저 건강하고 예의바른 남자들이었다. 그들의 짝짓기가 가진 원시성은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성적 매력(육체적 의미만이 아닌)을 기반으로 짝짓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짝짓기에 돈과 계급은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들에게 결혼이 없는 것은 축복이었다. 

그 녀석은 첫 키스를 초등학교 5학년 때 했다고 했다. 남자와 말이다. 내가 여자에게 느끼는 성욕과 안타까움을 그 녀석은 남자에게 느끼는 것이다. 그 녀석과 내가 다른 건 단지 그것뿐이다. 그 녀석은 엑스포만 피는 나를 '변태'라고 놀리곤 했다. 맞는 말이다. 게이가 변태라면 남들 디스 필 때 엑스포 피는, 딱 그만큼의 변태다. 그 녀석은 아직 공식적으로 커밍아웃하지 못했다. 그 녀석이 난 남자가 좋다라고 맘놓고 얘기할 수 있는 세상은 올 것인가. 퀴어 영화제가 번듯하게 열리고 게이 담론이 늘어나는 건 그런 세상이 오고 있는 징표다. 하지만 이미 찬성하거나 이해할 채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끼리 생각을 재확인하고 학습을 늘리는 일이 세상을 개선시키는 건 아니다. 퀴어의 세계는 문화 담론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변태인가. 꼴리면 하고 땅기면 살고 싫어지면 헤어지는 그들이 변태인가, 돈 때문에 하고 계급 때문에 살고 싫어져도 못 헤어지는 우리가 변태인가. 정말이지 누가 더 변태인가. | 씨네21 1998년_11월
 
 
술자리에서 내가 기독교인임을 밝히면 사람들은 당황한다. 그런 자리에서 그런 얘길 꺼내는 일이 웃기는 데다 나라는 인간이 도무지 교회 나가는 사람처럼 보이는 구석이 없기 때문일 거다. 사람들 짐작대로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기독교인이다. 아이가 경기라도 하면 나는 며칠 사이 지은 죄를 떠올린다. 나는 예수에 의지한다. 내가 가진 단출한 지식과 사상을 통틀어 예수의 삶만큼 나를 지배하는 건 없다. 나는 진정으로 사회주의를 소망하고 내 나머지 삶을 연관시키려 하지만 사회주의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영혼을 따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며 나는 기독교인이다. 

내가 처음 교회에 나간 건 중학 2학년 때였다. 교회는 나더러 믿으면 축복 받는다고 약속했는데 그 믿음의 세기와 축복의 양은 정비례한다고 했다. 믿음이란 교회에 열심 하는 것이고 축복이란 돈이나 명예, 건강 따위의 것들이었다. 교회는 욕망으로 물든 담장 밖을 말했지만 실은 담장 밖의 욕망에 찌들어 있었다. 교회는 언제나 영혼을 말했지만 영혼을 얻는 일이 돈을 잃는 일이라면 그마저도 없었을 거였다. 머리가 커가면서 나는 교회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제 새끼만 챙기는, 내 아버지보다 더 이기적인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교회에 다녔지만 교회가 내 삶에 끼치는 영향은 적어져 갔다. 교회에 다님으로써 일어나는 삶의 변화란 교회에 다니는 일 외엔 없었다. 

내가 한신에 들어간 건 우연이었다. 나는 그곳이 문익환이나 장준하 같은 거인을 배출한 곳이라는 것, 인권운동의 젖줄이자 민중신학의 본산지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마쳤을 때 내 관심은 오토바이와 음악, 그리고 여자에만 있었다. 내일이 없는 삶을 하루하루 태워가던 건달이 그래도 대학은 다니라는 권고를 받아들였을 때 나는 한신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머리통이 뒤집히는 충격을 받았다. 교회의 사회 참여. 정의의 하나님. 비천한 자들의 예수. 한 소년의 삶에조차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던 교회가 세상의 한 가운데서 세상의 바닥을 갈아엎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기독교임을 사랑하게 되었다.

보수 교회의 건물에 진보 교회를 칠하는 일은 무리였다. 경악한 목사와 장로들은 내게서 청년부 회보를 만드는 권한을 빼앗았고 나는 교회를 나왔다. 아버지가 눈물을 보였지만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친구 소개로 찾아간 교회는 작았다. 목사는 알려진 소설가였고 50명 남짓한 신도는 지식인들이었다. 나는 지쳐 있었고 새로운 교회의 진보적이고 지적인 분위기는 잠시 나를 편안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다시 교회를 의심하게 되었다. 광주항쟁 3주기가 되는 예배 시간. 목사는 감동적으로 설교했다. 목사가 눈물을 흘리자 신도들도 울기 시작했다. 예배가 끝나도 흐느낌은 그치지 않았다. 땡. 교단의 종이 울리고 목사는 웃으며 야유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신도들은 이제 야유회에 맞는 얼굴이 되었다. 장소에다 회비까지 정해지고 드디어 신도들은 개운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갔다. 교회는 한줌의 양심과 사회의식을 마스터베이션하고 있었다. 징그러웠다. 나는 교회 문 앞까지 왔다가 되돌아가기를 거듭했다. 나는 청년부 총무였고 두 달만에 교회에 나갔을 때 회원들은 해명을 요구했다. 내가 그들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모두 내 눈길을 피했다. 

교회에는 예수 대신 맞춤식 예수상(像)들만 모셔져 있었다. 나는 신학을 공부하려던 나의 소망을 접고 입대했다. 그곳에서 세 번의 살인과 세 번의 자살을 생각했고 김씨 성을 가진 여자를 떠나보냈으며 김씨 성을 가진 창녀에게 구혼했다. 이제 십 년이 더 흘러 나는 며칠 후면 서른 여덟이다. 나는 이제 나보다 다섯 살이 적어진 예수라는 청년의 삶을 담은 마가복음을 읽는다. 내가 일년에 한번쯤 마음이라도 편해 보자고 청년의 손을 잡고 교회를 찾을 때 청년은 교회 입구에 다다라 내 손을 슬그머니 놓는다. 내가 신도들에 파묻혀 한시간 가량의 공허에 내 영혼을 내맡기고 나오면 그 청년은 교회 담장 밑에 고단한 새처럼 앉아 있다. | 씨네21 1998년_12월
 
 
전세계 영화인들의 저주와 전세계 영화팬들의 찬미를 먹고사는 20세기의 에덴 동산, 할리우드의 연례 재롱잔치. 오스카 수상식은 보는 사람의 오감을 사로잡는 마력이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 모든 할리우드 장르 영화의 온갖 컨벤션들을 화사하게 배열한 최고급 종합선물이다. 오스카 수상식은 서너 시간 넘어 하기 때문에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는 버릇을 가진 나는 챙겨보지 않아도 해마다 보게 된다. 그리고 매번 쇼가 무르익을수록 볼거리가 쌓여갈수록 불편함도 같이 쌓여 간다. 자본주의를 거부하기로 한 내가 자본주의의 꽃을 감상하고 있기 때문이며, 전세계 피압박 영화를 지지하기로 한 내가 가해 영화의 자축연에 참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카는 자족적인 불편함에 기대어 구경을 지속하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한 메뉴까지 준비한다. 올해의 메뉴는 엘리아 카잔의 공로상 수상.

알다시피, 엘리아 카잔은 빨갱이 사냥이 극에 달한 1952년, 이른바 하원 반미행동조사위원회에 나가 자신이 좌파임을 시인하고 동료 8명을 밀고했다. 카잔은 54년 <워터프론트>로 오스카 감독상을 받는 등, 영화와 연극을 넘나들며 활동을 계속했지만 '밀고자'로 손가락질 받아왔다. 그를 불리한 처지로 몰아넣은 건 그 자신이었다. 카잔은 52년 하원 증언을 마친 직후 '공산주의는 위험천만한 적들의 음모'라는 광고를 <뉴욕타임스>에 싣는가 하면, 88년 발간한 회고록에선 "그런 기회가 또 다시 오더라도 똑같이 명예로운 행동을 하겠다"고 밝히는 배 째라 식의 행태를 보여왔다.

72년, 좌파라는 이유로 미국에서 쫓겨나 20년 동안 망명생활을 해오던 찰리 채플린이 '영화를 20세기의 예술이게 한 공적'으로 오스카 공로상을 받았다. 채플린의 공적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그 상은 할리우드가 매카시즘의 피해자에게 정중하게 용서를 구하는 절차이기도 했다. 영화 <채플린>에 묘사된 대로, 채플린이 83세의 노구를 끌고 입장하자 할리우드 영화인들은 열광적인 기립 박수를 보냈고 채플린은 눈물을 흘렸다. 

오스카가 FBI에 의뢰해서 좌석 배분을 한 걸까. 카잔이 입장했을 때, 객석의 오른쪽은 거개가 기립했지만 왼쪽은 팔짱을 끼고 있거나 박수치지 않았다. 머리가 비었을 거라 여겨지던 할리우드 영화인들의 만만치 않은 사회의식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일이었고, 역사 속에서 '이미 확보된 이성'이 '우상이 남긴 상처'를 지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카잔은 "아카데미의 용기와 관용에 감사한다"는 짤막한 인사말을 하고 서둘러 퇴장했다. 

<조선일보>는 그 일을 두 번 언급했다. "엊그제 열린 7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엘리아 카잔 감독이 특별공로상을 받았다. 매카시 광풍에 의해 채플린이 추방된 1952년, 카잔 감독은 자신의 동료였던 공산당원들의 이름을 의회 청문회에 밝혀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카잔의 원죄는 '마녀 (공산주의자) 사냥'이 극에 달했던 52년,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동료 영화인 8명을 밀고한 것."

도무지 <한겨레>와 구분할 수 없는 이 공평무사한 표현은 <조선일보>와 그들의 보수 사상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들은 왜 52년 미국의 메카시즘을 '광풍'이며 '마녀사냥'이라고 하면서, 오늘 한국의 '광풍'과 '마녀사상'을 요구하는 걸까. 그것은 그들의 보수 사상이 세상을 판단하는 신념체계가 아니라, 가진 것을 내놓지 않으려는 혹은 더 많이 가지려는 동물적인 욕망 체계이기 때문이다. 52년 미국의 메카시즘은 내 돈궤하고 아무 상관이 없지만, 오늘 한국의 메카시즘은 내 돈궤를 보존하거나 늘리는 일인 것이다. 새삼스런 얘기지만, 보수 사상이 진보 사상과 대립한다 해서 보수 사상을 진보 사상과 같은 층위에 놓는 일은 터무니없다. 그것은 순수한, 매우 순수한 욕망이다. | 씨네21 1999년_3월
 
 
알고 보면 이번 스크린쿼터 파동이란 골 때리는 일이었다. 스크린쿼터는 GATT는 물론 그 후신인 WTO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문화적 예외 조항'으로 볼 때, 현재로선 어떤 '경제 논리'로도 축소나 폐지를 거론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문제가 안 되는 일이 문제가 된 셈이다. 내막은 문화 의식이 결여된 한국 공무원들이 '공정 무역'이라는 채찍과 '5억 달러 투자'(외자 유치!)라는 당근으로 꼬드기는 미국 공무원들에게 은근슬쩍 땅문서(스크린쿼터라는) 내주려다 소란이 난, '실화'보다는 '야담'에 가까운, 그런 일이었다. 

영화인들은 전례 없이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싸웠냐 하면 '자신들의 모습에 자신들이 놀랄 정도'라고 했다. 두 달이 넘게 계속된 영화인들의 싸움은 공무원들이 꼬리를 빼고 국회 결의안이 관철되고서야 일차 마무리되었다. 농성을 풀며 영화인들은 "국민의 지지를 얻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영화인들이 제아무리 열심히 싸웠던들 국민들이 외면했다면 결과는 전혀 달랐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왜 이리도 민망한가. 

과연 한국 영화인들은 '국민의 지지'를 받을 만한 사람들인가. 제 밥그릇이 걸린 일에는 '자신들이 놀랄 정도'로 열심인 영화인들은 남의 밥그릇에는 어떤 관심을 보였던가. 자신들의 불행을 언제나 민족이라는 이름에 호소하는 영화인들은 정작 민족이 불행할 때 어디에 있었던가. 이번 싸움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독점 자본'으로 해석하는 참신함을 보인 영화인들은 다른 업종의 노동자들이 진짜 독점자본과 싸울 때 무엇을 도왔던가. 이번 싸움에서 한국 영화를 '민족 고유의 것'으로 해석하던 영화인들은 농민들이 신토불이를 외치며 미국쌀과 싸울 때 어떤 지지를 보냈던가. 이 나라의 유한 계급을 뺀 모든 백성들이 불행해진 구제금융 시대가 일년을 넘기고 있지만 그 동안 영화인들은 그 잘난 영화 예술로 세상의 어떤 모습을 그려냈던가. '경쟁력'을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나고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고 길거리를 헤매는 이 나라의 백성들이 그런 염치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경쟁력'을 유보하는 아량을 베풀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한번도 사회적이지 않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사회적 혜택은 과연 공정한가. 

이번 싸움을 통해 개발된 영화인들의 자기 논리가 전례 없이 정교함에도, 이번 싸움의 열기가 밥그릇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체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냉소하고 일상의 우연에 천착한다는 지성파 감독까지 연단에 오르는 이변이 생길 리 있었겠는가.('정치 의식'을 초월한 듯 행동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경제 의식' 아래에 머물 뿐이다.) 나는 영화인들의 '경제 투쟁'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 경제투쟁이 경제투쟁에 머물지 않기를, 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열정이 남의 밥그릇도 함께 생각하는 사회적 지평으로 확대되기를 바란다. 영화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억울함과 고통을 이 나라의 백성들이 겪는 보편적인 억울함과 고통 속에서 재발견하여야 한다. 영화인들은 이번 싸움을 통해 지켜낸 스크린쿼터가 오로지 영화라는 업종에만 주어지는 소중한 혜택임을, 그들의 장사가 매우 특별한 장사임을 다시금 생각하여야 한다. 그것은 산업의 문제이자 예술의 문제지만, 오히려 '염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족 : 이 만큼 말하고도, 내 속은 여전히 찜찜하다. 한국 영화인들이 농성장에서 함께 흘린 눈물은 모두 같은가. 영화 자본가의 눈물과 영화 노동자의 눈물은 싸움이 끝난 다음에도 연대하는가. 싸움의 성과로 얻어지는 산업적 이익은 함께 흘린 눈물처럼 공정하게 분배되는가. 한국영화인들은 같은 민족인 동시에 같은 계급인가. 한국 영화인들에게는 '상식선'의 정치의식이 필요하다. | 씨네21 1999년_3월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내가 나라가 시끄러울 만큼 못된 짓을 한 인물이 나오기만 하면 "또 교인이군"하는 게 버릇이 되고 말았으니 정말이지 하느님께 민망할 따름이다. 좌우간 저 옛날 부천서에서 여대생 취조하는 데 희한한 도구를 사용한 문귀동 집사로부터 빨갱이 대통령을 막는답시고 바람을 일으키다 잡혀 들어가 오늘도 성전에 성전을 거듭하고 있는 권영해 장로라든가 소싯적부터 오로지 대통령이 되기만을 간구한 끝에 진짜로 대통령이 되어 끝내 나라를 부도 낸 김영삼 장로를 비롯, 국가적인 규모로 사고치는 인간 치고 교회 안 다니는 인물이 드무니 낸들 어쩌겠는가. 

사정이 그러한데 그 아줌마들, 이른바 낮은 울타리 아줌마들이 교인인 건 되레 당연했다. 낮은 울타리의 모태는 '수요 봉사회'라 하며, '수요 봉사회'란 박정희 시절 만들어진 장관집 아줌마들의 사회봉사모임으로 매주 수요일에 모여 "주머니를 만들고 그 안에 치약이나 칫솔을 넣어 일선 장병한테 보내는"(한겨레) 식의 활동을 해왔다고 했다. 고매한 장관집 아줌마들이 하잘것없는 군바리에게 보낼 치약 칫솔을 주머니에 담는 일을 주마다 해왔다니 건국 이래 이런 갸륵한 미담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 아줌마들이 라스포사니 앙드레 김이니 하는 옷가게에서 50% 할인 혜택을 받았다거나 그마저 다른 돈 많은 이들이 내주곤 했다는 건 그런 노고에 대한 당연한 사회적 보상이라 할 만하다. 하여튼 낮은 울타리는 '수요 봉사회' 아줌마들 가운데서도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아줌마들의 모임이라 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말하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어찌 그럴 수 있냐지만 그 말씀은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몰라서 하는 말씀일 뿐이다.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일보다 어렵다고 했지만, 교회는 물질축복은 성실한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가르치지 않는가. 예수는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언제나 세상에서 천대받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지만, 교회는 세상에서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어선 안 된다고 가르치지 않는가. 예수는 세상으로 나가 세상을 섬기는 빛과 소금이 되라 했지만, 교회는 세상의 더러운 죄를 들어와서 씻어라 하지 않는가. 예수는 집도 절도 없이 동산과 벌판에서 하느님 말씀을 전했지만, 교회는 성전을 짓고 찬란하게 치장하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 가르치지 않는가. 그 아줌마들, 이른바 낮은 울타리 아줌마들은 결단코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지키고 실천한 참 신자들인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또 말하길 교회의 가르침이 세상의 욕망과 다를 게 무어냐 하고 심지어는 예수와 가르침과 교회의 가르침이 온통 거꾸로라고도 하지만, 그 말씀 역시 참 신앙의 경지가 무언지 몰라 하는 말씀일 뿐이다. 2천년 전 이스라엘의 가르침은 오늘 대한민국의 생활 형편에 맞추어 살아 숨쉬는 가르침으로 재해석되는 게 당연하며, 백 번을 양보하여 대개의 한국 교회가 수천만을 상대로 하는 거대한 사기조직일 가능성이 있다손 치더라도 하더라도, 진실을 밝히는 게 언제나 은혜가 되는 건 아니다. 만일 기독교인의 삶, 예수를 따르는 삶이 돈과 명예 권력 따위를 얻는 일과는 애당초 거리가 먼 삶이라는 사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 당하며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죽기 십상인 삶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때의 대혼란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느님을 경배 드리는 거룩한 성전에 날품팔이 거지 양아치 장애자 매춘부 따위들이 예수의 동무랍시고 몰려들고, 대를 이어 뜨겁게 믿고 정확히 바쳐 온 집사 권사 장로 목사들의 신앙적 프리미엄이 하루아침에 깡통주가 된다면 그 억울함을 무슨 수로 보상할 것인가. 근대 이후 교회를 핍박한 건 언제나 빨갱이들이었고, 성도들은 순교자의 본을 받아 죽음으로 교회를 지키고 또 지켜낼 뿐이다. 할렐루야. | 씨네21 1999년_6월
 
 
지난해 초여름 어느 날이던가. 전화응답기엔 자신들을 독립 프로덕션 '빨간 눈사람'이라 소개한 메시지가 녹음되어 있었다. 다음 날 나는 그들에게 전화했고 <애국자 게임>이라는 다큐멘터리 제작과 관련하여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그들의 요청에 응했다. 광화문 근처 북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는 어느 새 긴 대화로 이어졌다. 대화는 주로 80년대 문화운동과 그 주역들이 90년대에 어떻게 적응해왔는지 따위였던 것 같다.

그날 이후, 그들은 나를 형이라 불렀고 이따금씩 자신들의 근황을 알려오곤 했다. 올해 초 그들은 <애국자 게임>을 잠시 접고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거나 의문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난 자식들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해 1986년 발족되어 10년이 넘게 싸워 온 사람들)의 여의도 천막 농성을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있다고 알려왔다. 
올해 5월, 그들은 인디 포럼에서 다큐멘터리 <민들레>를 상영했고 나는 얼마간의 의무감을 안고 그 영화를 보러갔다. 푸른영상의 김동원 선배나 눈에 띨까, 300석 규모의 극장 객석은 거개가 비어 있고 그나마 한편은 유가협 어머니 아버지들이 메우고 있었다.(하긴 90년대 후반의 한국에서 유가협 농성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보러 올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민들레>는, 정확히 말해 <민들레>의 소재는 이른바 90년대 후반의 미감을 거스른다.)

<민들레>가 시작되자 이내 나는 그 영화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영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내가 잊고 살던 '현실'이었다. 내레이션도 어떤 종류의 연출이나 기교도 생략한 채 피사체의 일상을 차갑게 담아낸(이런 걸 두고 다이렉트 시네마라 하던가. 현실을 단독 유치하기 위해 모든 형식적 가능성을 포기하는 영화 말이다.) <민들레>는 내게 치명적인 고통을 주었다. 물론 그 고통은 영화보다는 영화 속에 담긴 현실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나는 잊고 살았다. 전태일의 어머니가 차디찬 여의도 천막 속에서 한군데도 빠짐없이 골병이 든 육신을 한으로 견뎌가며 일년 째 농성중이라는 사실을. 이른바 지식인 사회(이런 게 있긴 한 걸까)에선 이미 세 번쯤 유행이 지난 그 전태일의 어머니가 말이다. 나는 잊고 살았다. 우리가 달라진 세상을 구가하며 달라진 세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껄이는 이 순간, 그 달라진 세상을 만들다 죽어나간 자식을 안고 여의도 길바닥에 화석으로 남은 사람들을. 

<민들레>가 상영되는 내내 나는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고, 이 영화가 끝난 후엔 이 고통이 내내 계속되기를 기도했다. 나는 내가 얻은 고통에 어떤 식으로든 보답하고 싶었고 다음 날 가장 신뢰하는 녹음기사 친구에게 <민들레>의 사운드 보정을 부탁했다. 친구는 한푼의 대가도 없이 동료들이 모두 퇴근한 밤시간을 몇 번씩이나 투자하여 정성스레 <민들레>의 사운드를 다듬어주었다. 

며칠 전, 어느 대학에 강연을 갔던 나는 전날 <민들레> 상영에 단 한 명의 관객이 왔었음을 알았다. 그 한 명의 관객은 행복했고 그 영화를 볼 것을 고려하지 않은 수많은 관객들은 불행했다. 나는 독자들께 <민들레>를 볼 것을 권한다. '삭발 시퀀스' 혹은 <민들레>의 다른 모든 시퀀스에 대한 설명을 부러 생략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민들레>를 보는 우리는 90년대 후반의 정신적 더께를 벗겨낼 수 있다. <민들레>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다. 우리가 잊고 사는 바로 그 현실 말이다.

추신 1 : 축하 전화 없음에 항의하는 '빨간 눈사람'의 연락을 받고서야 나는 <민들레>가 제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받았음을 알았다. 3년 전 그 영화제의 머슴 노릇을 하던 나는 이런 몰개성한 국제 영화제가 하나 더 존재할 필요란 주최자들의 문화적 허영이나 위한 것이려니 했는데, 어느새 그 영화제는 이 나라의 평균정신을 넘어서고 있다. 

추신 2 : 11월 4일은 유가협의 여의도 천막 농성 1주년이 되는 날이다. 우리는 그날 여의도에 가는 게 좋겠다. 가서 전태일의 어머니나 이한열의 어머니나 박종철의 아버지, 아니 그들보다 덜 알려진 자식들을 담고 화석으로 남은 어머니 아버지들의 손을 잡고 "힘내세요."라고 말하는 게 좋겠다. 그 순간 우리는 우리가 한번 더 힘을 내 살아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다. | 씨네21 1999년_11월
 
  
2010/07/19 14:47 2010/07/19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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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에서 발견한 어떤 논쟁]에 관련

 

성급하게 써내려간 게 아닌가, 여겼던 몇 몇 대목을 지적해주는 좋은 글

 

레디앙 학생운동 논쟁에 부쳐(1)

 

 

레디앙에서 젊은 논자들끼리 학생운동에 관한 논쟁이 한참 진행되었다. 서로의 논점이 어그러져서 무슨 논쟁이라 이름 붙여야 할지 모르겠는데, 여하간 학생운동 얘기가 가장 많이 나왔으니 편의상 학생운동 논쟁이라 부르자. 이 글을 레디앙으로 보내지 않는 것은 내가 실패한 논쟁을 생산성 있게 바꾸겠다는 거창한 야심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좀 더 글을 편하게 쓰고 싶기 때문이고, 여기에 올려도 어차피 볼 사람은 다 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또래집단의 진보진영 비판에 난감해 하는 이유


처음에 논점으로 제기되었던 건 학생운동 문제는 아니었다. 조병훈의 최초의 글이 실린 것은 “진보 야!”라는 지면이었다. 이 지면은 진보진영에 대한 (주로 젊은 친구들의) ‘고언’을 싣는 자리인 것 같다. 이 지면에 대한 내 감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필요한 것 같긴 한데, 읽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무슨 문제를 얘기할지는 뻔한데 그 문제의 해결방법을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젊은 친구들이 진보진영에 대고 우리를 잘 받아들이려면 이런 게 필요했으면 좋겠다, 저런 게 필요했으면 좋겠다, 하는 얘기들을 듣고 있으면 종종 내가 소비자의 불만을 접수하는 서비스 노동자가 된 듯한 느낌이 들어 불쾌해진다. 그러니까 정신건강을 생각하면 안 읽는게 낫다.


그 친구들이 겪는 문제는 나도 겪는 문제다. 가령 이런 일이 있었다. 민주노동당 깨지고 진보신당 생길랑 말랑할 때 얘기다. 여의도에 분당하겠다는 좌파들이 우르르 모였다. 내 나이 그때 스물 여섯이었는데, 촛불시위도 나기 이전이었던 그때 나는 이 판에서 영원히 막내겠구나 생각하던 때였다. 내 위로 막내에서 두 번째 연령이 나보다 8살 연상인가 그랬다. 한 이십 명이 모여서 조개에 소주를 먹는데, 분당 과정에서 의견이 달랐던 두 패거리가 싸우기 시작했다. 이런 싸움, 해결 안 된다. 싸움이 해결이 안 되자 그들은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민중가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소주잔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언제쯤 내가 아는 노래가 나올까 시간을 재고 있었다. 한 시간 반쯤 지나니까 청계천 8가가 나오더라. 그래도 따라부르지는 않았다.


“이러니까 애들이 못 나오지.” 알고 지낸지 5-6년쯤 지난 어느 386 옆자리로 가서 그렇게 말을 붙였다. 그러자 “에이 뭘 어떡해. 적응해야지, 응?”이라고 답변하더라. “아니 이걸 뭘 어떻게 적응해. 맨날 들은 나도 지겨운데.” 투덜투덜했다. 그때 나는 고민했다. 아니, 도대체 이 상황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1) 70년대~90년대초 학번 운동권들이 민가를 부르는 것을 금지시킨다. → 저 두 패거리, 소주병 깨고 끝까지 싸우는 꼴을 보자고?

2) 내가 소주병을 깨서 지랄발광한 후 70년대~90년대초 학번 운동권들에게 20대를 향한 서비스 정신을 강요한다. → 일단 내가 먼치킨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낫살 쳐먹었단 이유로 활동가 뿐만 아니라 평당원들까지 감정노동자로 만드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3) 20대들을 모아와서 우리만 아는 민가를 부른다. → 일단 그럴 20대들이 없다. 그리고 우리만 알만한 민가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무엇보다 20대들을 모아서 민가를 억지로 외우게 한다면 그러고 있는 우리가 선배들보다 더 폭력적이다.

4) 우리 시대의 마지막 천재운동권 김민하씨가 일렉기타를 치고 옆에서 내가 “잔혹한 천사의 테제”를 부른다. → UCC로 찍어 올리기 전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실 찍어 올려도 아무 의미가 없다.

5) 이딴 더러운 정당은 내버려두고 20대들만의 조직을 만들어 기존 진보정당을 무력화시키거나 일신한다. → 내가 먼치킨이어야 가능하다. 사실 내가 먼치킨이어도 불가능하다. 

6) 그냥 희망이 없는 진보정당 운동을 접는다. → 전반적으로 두루두루 검토해볼 때 이 쪽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인 것 같다. 


문제는 이렇다. 윗세대에게 자기들 좋아서 하는 문화를 일신하라고 요구하려면 그들을 무슨 영웅적 주체로 만들어야 한다. 내가 타인에게 그렇게 과도한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가? 그런 요구는 사실, “이 조직이 마음에 안들면 마음이 통하고 문화가 맞는 20대들끼리 조직을 만들어 윗세대 진보들을 후려치세요.”라고 요구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요구다. 그런 요구 들으면 “아니 뭘 나더러 어쩌라고?”라는 말이 당신 입에서도 튀어나오지 않을까? 그리고 더 큰 문제, 20대들끼리는 공유하는 문화나 정서가 있을까? 뭔가 공통적인 것이 있어야 윗세대에게 이걸 배려해달라고도 요구할 수 있고, 혹은 우리끼리 뭉쳐서 윗세대에 대항하겠다는 기획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게 있지도 않으면서도 윗세대에게 뭔가를 해달라고 하는 건 결국 떼쟁이 심보 밖에 안 될 것 같다는게 내 생각이다. 상대방이 요구를 안 들어주는 게 문제가 아니라, 실은 우리가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거다. 우리만 아는 민가를 불러야 할지, 아니면 모두가 레이와 아스카 피규어를 들고 와서 레이파와 아스카파로 나뉘어서 싸워야 할지, 그도 아니면 대로변에서 똥을 싸야 할지 누구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면서 운동권에게 젊은이들에게 환대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좀 성립하지 않는 말이다. 일단, 여의도의 어느 날 풍경에서 묘사되었듯 운동권은 자기들끼리도 서로를 환대하지 않는다. 둘, 나는 20대들 역시 서로를 환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럼 결론은? 여기서도 불평은 들리고 저기서도 불평은 들린다. 나는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사람들에게 문제를 설명하고 서로가 참고 감내해야 할 부분이 있음을 말할 수밖에 없다. 학생당원들 일도 잘 안 하면서 무슨 말은 그렇게 많은지 죽겠다는 아저씨 세대에게는 ‘아니 그럼 진보정당이 청년세대에 씨도 안 뿌리면 나중에 어디 가서 수확하려고 그러냐.’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 청년세대에 대한 당의 무심함에 좌절하는 또래들에게는 ‘그래도 우리끼리라도 소통하고 힘 합쳐서 무언가를 자꾸 요구해야 당도 바뀌고 우리도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사람에게 당신 혼자 몸 불사질러 희생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으니까 각자에게 조금조금씩을 요구해야 하는 거다. 이런 귀찮은 일이 싫다면 정말로 당 접는 것 이외에 답은 없다.  


조병훈, "왜 진보신당에 입당 안해?" 비평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9059


내 문제의식을 얘기했으니 이제 레디앙에 올라온 각 글에 대해 비평하겠다. 조병훈은 최근 글에서 “내가 현재 진보신당 지도부를 둘러싼 소모적인 논쟁을 비판하기 위해 기존 학생운동권의 몰락을 다루면서, 고려대 학생행진 등으로 나타난 좌파 학생운동조직의 사례와 각 부문 운동의 일부 밑거름이 되었던 학생운동권 출신 활동가들까지 무리하게 재단했던 것은 나의 불찰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이 구절은 조병훈의 최초의 글을 문제의식을 요약하고 있다. 그런데 불찰이라?


그런 것도 불찰일 수는 있겠으나, 사실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다. 학생운동권 활동가는 용가리 통뼈인가? ‘무리하게 재단’ 당하는 걸 거부하게. 재단도 많이 해야 솜씨가 는다. 그런 거야 서로의 경험을 맞춰보고, 인정할 건 인정하고 상호간에 인식의 발전을 이룩하면 될 일이다. 혼자 다 알면 대화를 할 필요도 없으니까.


내가 보기에 조병훈 글의 결정적인 문제는 그런 것은 아니다. 그의 글의 주제는 분명 “진보신당의 문제”다. 그걸 밝히기 위해 ‘기존 학생운동권의 몰락’을 다루었다고 본인도 밝혔다. 그러면 그의 글의 전제는 다음과 같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진보신당의 몰락의 원인은, (과거 진행된) 학생운동권의 몰락의 원인과 같은 차원에서 파악될 수 있다.” 이건 전혀 말이 안 된다고는 볼 수 없지만 갑론을박이 가능한 명제다. 가령 나는 이 명제가 반만 맞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진보신당의 구체적인 문제를 토론해야 할 시국에 이렇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맞는 것 같기도 한 명제를 들이미는 것은 냇가의 나룻배를 산 위로 올려 썰매를 타고 내려오자는 것과 비슷한 짓거리라고 본다.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흰눈이 내린...”응??? 진보신당 문제도 버거워 죽겠는데 지금 학생운동권이 왜 무력해졌는지를 토론해 보자고???


그래도 굳이 그런 작업을 하겠다면 그 전제의 근거가 무엇인지나 정연히 밝힐 일이다. 그런데 조병훈은 그런 작업을 생략한다. 본인의 머릿속에서는 너무나 명백한 일이었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남들과 소통을 하려고 나왔으면 남들이 동의하지 못할 주장이 무엇인지를 체크해보고 그것에 대해 설명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런 게 없으니 이후 논쟁이 진보신당 논쟁인지 학생운동 논쟁인지 밥인지 떡인지 구별할 수 없도록 되어 버렸다.


글을 통해 유추해 보자면 그 대담한 주장의 근거는 이것인 것 같다. “00년 이후 학번들에게 왜 진보신당 입당 안 하느냐고 물어보면 운동권처럼 보여서 싫다고 얘기하기 때문에.”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그 반응을 체크하는 것은 매우 존중받을 만한 자세다. 그리고 이런 반응들에서도 우리는 많은 것을 얻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반응이 진보신당의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낸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령 길거리에서 사람을 붙잡고 민주노총의 문제가 무엇인지 물어보자. 그 사람이 민주노총의 노동자 조직률이 낮다거나, 민주노총 교섭의 혜택을 보는 노동자 비율이 낮다는 얘기를 꺼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무슨 소린지도 모를거다. 그 사람은 그저 ‘민주노총이 강경한 파업을 일삼아서’ 그 조직이 위기에 빠졌다고 대답할 가능성이 제일 높다. 그래서 이것이 민주노총의 근본적인 문제인가? 트위터에서 정치에 관심있단 양반들에게 진보신당이 왜 어려울까요, 라고 물어보면 “5+4연대 탈퇴하고 노회찬이 완주해서” 그렇다는 대답을 들을 가능성이 제일 높다. 그래서 선거를 포기했으면 진보신당이 잘 되었겠는가? 이런 반응들을 듣는 것도 의미는 있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또 현재의 진보신당과 왕년의 학생운동권에 대한 조병훈의 ‘비교’는 학생운동과 정당운동 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 ‘근본적인 차이’는 개념적으로도 서술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실천적인 차원에서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런 부분이다. 현재 진보정당 운동에 대해 논하는 사람 중에 진보정당이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학생운동에 대한 갑론을박은 학생운동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주장까지 포함해서 전개되었다.


그 이유는 과거의 학생운동이 비정상적인 국면에서 정립된 비정상적인 방식의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이 맥락을 설명하는 것은 현재 진보정당 운동의 위기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핵심적인 부분은 아니다. 학생운동 사례와 진보정당 운동 사례를 유비적으로 겹쳐놓으면 논의가 어그러지는 건 그래서다. 여하간 1) 예비 엘리트집단이라는 대학생의 자기인식, 그리고 2) 다른 공간에선 사회운동이 거의 불가능했던 시대상황, 이란 특수맥락에서 ‘학생정치조직’의 역할인식과 활동이 가능했다고 정리해보자. 그리고 이런 이의 활동을 ‘학생 운동권’이라 불렀다고 생각해보자.


90년대가 들어선 후 문제는 학생운동이 더 이상 부문운동 중에서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학생운동이 도대체 부문운동이기나 한지도 불분명했다는 것이다. 이건 진보정당 운동의 위기 분석과는 별개의 맥락인데, (뭐 사회문제이기는 하니까 책 한권 분량으로 설명하다 보면 같이 엮일 수는 있겠다.) 조병훈의 글에선 그런 면이 드러나지 않는다.


조병훈의 스케치에서 드러나는 문제의식도 물론 이런 문제들을 포괄하고 있을텐데, 거듭 읽어봐도 너무 막연하다. 일단 학생운동을 1) 이념에 의한 정치운동과 2) 대학이라는 생활공간에서의 자치운동의 수준으로도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학생운동이 1)의 역할을 부여받을 수밖에 없었다면, 조병훈이 스케치한 90년대 이후에는 2)의 측면이 대두되어야 했다고 볼 수 있다. 1)을 부여잡는 이들은 “그런데 왜 그 짓을 밖에서 이념운동(혹은 부문운동) 단체에 들어가지 않고 하필 너희들끼리 캠퍼스에서 모여서 해야 해?”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왜 해체하지 않았는지를 분석하려면 ‘돈’ 얘기가 나오고 이는 양승훈이 하고 싶었던 얘기인 것 같긴 한데, 이건 이따 양승훈 글 얘기하면서 살펴보자.


조병훈이 스케치하는 ‘학생운동 몰락사’는 1)의 측면을 지키려던 이들이 쇠퇴하는 과정을 그리는 것 같다. 그리고 조병훈은 그 쇠퇴의 원인을 ‘운동권 정파의 폐쇄적 운영방식’이란 부분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그런 후 그 원인을 오늘날의 진보신당에 투영하여, 진보신당의 위기를 학생운동의 몰락이란 사건에 포개는 것일 게다.


문제는 자치운동을 옹호하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학생이념운동의 몰락은 학생운동권이 잘못해서 생긴 일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거역이었다는 거다. 그들의 입장에서 운동권이 할 수 있었던 올바른 선택은 학생운동권의 일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해산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게 옳은 일인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어떤 운동권은 그렇게 했다. 그래서 나는 조병훈이 학생운동 사회에서 자치운동을 옹호하고 있기는 한 건지, 그런 구별을 하고 있기는 한 건지도 의심스럽다. 그게 아니라 이념운동을 옹호하는 거라면, 조병훈의 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냥 막연히 ‘운동’이란 이름하에 묶이는 사회현상을 뭉뚱그려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념운동과 자치운동의 구별에 새로운 차원이 도입된 건 2007년 “88만원 세대론”이 히트친 이후 2008년 즈음에 ‘당사자 운동’이란 차원이 도입되고 나서다. 당사자 운동의 관점에서 ‘학생운동몰락사’를 재서술하는 건 유의미한 일이기는 하나, 십년 전엔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회문제의 틀거리로 당시 그들의 활동을 재단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덧붙여 조병훈의 글을 그저 ‘운동권 방식’에 대한 두루뭉술한 문제제기로 억지로 이해해 보려해도 문제는 남는다. 만일 조병훈이 바라본 문제가 서두에 내가 말했던 것과 비슷한 문제였다 본다면, 그런 문제는 진보신당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문운동 벌이는 시민사회단체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운동권’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물론 그 모든 것을 운동권의 유산이라 부르는 것도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렇게 보려면 조병훈의 글은 다시 쓰여져야 한다.


내가 보기에 운동현장에서의 세대론은 두 가지 정도로 나누어진다. 하나의 축은 70년대-90년대 초 학번과 그 이후의 대립항이다. 그 이후 세대 중에는 ‘활동가’가 된 사례가 거의 없다. 아직 초년생이거나 인턴십일 뿐이다. 다른 하나의 축은 그들 활동가 내부에서 보이는 70년대-80년대 초반 vs 80년대 중반-90년대 초반의 대립항이다. 개발새발 잡은 거라 엄밀한 건 아닌데, 하여간 그 내부에서도 앞선 세대 활동가는 젊은 나이부터 단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반면 그 이후 세대는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그 앞선 세대 활동가를 선배로, 상사로 모시고(?) 살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다.


이건 조직운용방식의 문제와는 좀 다른 것이다. 조병훈의 말이 옳다면, 학생운동 위기를 가속시켰던 그 90년대 학번 운동권들은 당이나 시민사회단체에 들어가서 잘 적응하고 살고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 그들도 조직에 들어가면 지금의 20대들과 비슷한 신세가 되는 까닭이다. 이건 어떤 기득권 세력이 자기들끼리만 알아먹는 언어로 토론을 하며 논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만)은 아닌거다.


조병훈은 글을 보면 ‘운동권이 싫어서 진보신당에 입당하지 않겠다는 청년’들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토론이 지겹다고만 하지 말고 그 토론이 무슨 의미인지 쉬운 언어로 풀어서 그런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 필요없다.’는 단언이 아니라 사람들의 견해를 만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교량이다. 그리고 이번 논쟁에서도 볼 수 있듯이, “논쟁이 쓸데없다.”는 사람의 글에서 정말 천하에 쓸데없는 논쟁이 생기는 경우도 다반사다.


조병훈의 문제의식, 학생운동권의 문제와 진보정당의 문제를 구성하는 공통된 문화적 프레임이 없다고는 보지 않는다. 내 경우는 큰 틀에서 이것들을 ‘활동가’ 주도 운동의 문제로 엮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문제는 남는다. 일단 학생운동의 문제를 훌쩍 넘어선 얘기고, 활동가들이 계속 활동하는 이유는 그들이 여전히 엘리트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운동하겠다는 후배가 없기 때문이라는 점이 있다. 누구에게도 희생을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한 내 최초의 문제의식이 기억나는가? 이런게 싫다면 말 그대로 당을 접는 수밖에 없다. 조병훈의 글에 대한 비평으로는 이쯤에서 줄이자.


학생운동권 몰락 문제와 활동가 주도 운동의 문제에 대해 개발새발 써놓은 글들이 있는데, 더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길 바란다.


2008/02/14 - [정치/분석] - 왜 학생 운동 조직은 20대로부터 멀어졌나?
2010/01/16 - [정치/정당] - [경향신문] 진보정당, 활동가의 종언

 

 

레디앙 학생운동 논쟁에 부처(2)

 

 


홍명교, “무지한 반성이 '학생운동 위기' 지속시킨다” 비평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9078


조병훈의 글이 논리없이 스케치만 있다면, 홍명교의 글은 나름의 논리는 있는데 근거가 없다. 홍명교 글의 논리적 핵심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학생운동 몰락에 대한 조병훈의 해석은 그의 정치적 당파성과 협소한 정파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2)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실체도 없는 ‘기존 운동권’이란 대상을 호명하여 재미를 보아왔다.

3) ‘기존 운동권’이 없는 만큼 더 이상 ‘학생운동의 위기’도 없다. 십 년이 지난 ‘학생운동 위기론’을 지금 꺼내드는 거야말로 어쩌면 진보신당이 처한 진정한 위기, ‘이론적 안이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4) ‘위기’를 ‘부정적인 대상’(=운동권)이 지닌 도덕적인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

5) 조병훈이 운동권 정파의 폐쇄성을 문제삼는 이유는 뻔하다. 레닌주의가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이다. 

6) 학생운동 주체들이 수많은 구조변혁을 이룩했고, 조병훈이 긍정적으로 보는 부문운동을 만들어 내왔는데, 그들의 폐쇄성을 비판하는 것은 결국 급진좌파정파에 대한 공격이 아닌가? 

7) 그게 아니라면 조병훈은 어째서 진보신당 지도부의 폐쇄성을 비판하지 않는가?

8) 입당하고 선거만 하면 정치가 다인가?


이 글의 매력은 진위를 판별할 수 없는 보편적인 명제인 1)과 4) 같은 것 사이사이로 진위를 판별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명제인 2)와 3) 같은 것을 간간히 섞어서 ‘논리’를 전개하다가 불현듯 아무런 실천적 근거도 없이 5, 6) 7), 8) 같은 구체적인 단언으로 상대를 비판한다는 데에 있다. 이런 글은 그들이 평소에 읽는 사회철학자들의 글쓰기와 얼핏 보기에는 닮아 있어 멋있게는 보이겠으나, 그렇다고 그 학자들이 품고 있는 치열한 고민과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조병훈 글의 핵심적인 문제는 진보신당의 위기 문제를 학생운동의 몰락 문제로 치환해서 설명했는데, 그게 맥락에 닿는 말인지 누구도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오늘 니가 배탈난 이유는 어제 짜장면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인데, 그건 누구도 단언할 수 없는 얘기다. 여기에 대고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아니, 도대체 어제 짜장면만 먹은 게 아니라 짬뽕도 먹고 카레도 먹었고 오늘은 된장찌개도 끓여먹고 라면도 먹었는데 왜 하필 배탈이 짜장면 때문이란 거야?”라는 것이다. 그런데 홍명교는 이에 대고 근엄하게 선언한다. “문제는 짜장면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다. 짜장면을 자유주의적 방식으로 먹었기 때문이다.” 이게 3)에 해당하는 주장인데, 이쯤되면 코미디가 따로 없다.


물론 이는 ‘어쩌면’이란 부사가 보여주듯 홍명교의 핵심적인 주장은 아니다. 왜냐하면 홍명교는 조병훈의 최초의 문제의식, 그러니까 ‘진보신당의 문제’에 대해선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관심있어 하는 것은 오직 조병훈이 스케치하는 학생운동권의 몰락의 방식이며, 그 스케치 방식의 정파성이다. 그리고 그 정파성에서 그는 레닌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의 공격을 읽어낸 후, 여기서 다시 한발 더 나아가 진보신당의 문제도 여기에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그는 묻는다. “조병훈은 어째서 진보신당 지도부의 폐쇄성을 공격하지 않는가?” 물론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조병훈이 학생운동권의 부정적인 당파싸움(?)의 이미지를 현재 진보신당 진로문제를 두고 토론하는 이들에게 덧씌우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즉 조병훈의 학생운동권 비판은 진보신당 비판과 연결되어 있는 거다. 그런데 홍명교는 조병훈이 진보신당 지도부는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파적이라고 한다.(7) 좀 핀트가 어긋나 있다. 만일 조병훈이 진보신당 지도부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그건 조병훈이 왕년의 학생정치조직 활동가에 해당하는 위인이 진보신당 내부에서 다른 인물군에 비교된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정파성의 발현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조병훈이 진보신당 문제를 도외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어서 홍명교는 조병훈이 진보신당 문제를 얘기하려다 제대로 쓰는데 실패한 저 한편의 글만을 보고 “8) 입당하고 선거만 하면 정치가 다인가?”라고 묻는다. 좀 황당한 일이다. 글 한편만 보면 상대편에 대한 사상검증이 끝나는가?  


홍명교의 주장 중에서 가장 올바른 것은 “4) ‘위기’를 ‘부정적인 대상’(=운동권)이 지닌 도덕적인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이건 어디다 갖다 붙여도 올바른 말이다. 만일 조병훈이 도덕주의적 비판을 한 것이라면, 조병훈은 옳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큰 문제는 조병훈이 도덕주의적 비판을 했는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조병훈은 정파 활동가 중심 학생운동의 구조적 협소함이 극복되었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던 것이 학생운동권 몰락의 원인이라 보는 것 같다. 이런 그의 시각은 ‘정파 소속 몇몇 활동가’의 성찰과 반성이 중요했다는 ‘도덕주의 비평’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적어도 다른 방식으로 전유하는 것이 가능하다. 애초에 구조의 문제를 지적했던 만큼 구조적 접근도 가능한 것이다.


이를테면 조병훈이 글에서 “그래서 학생운동권은 몇 명이 말아먹었고, 지금 진보신당도 지도부 몇 명이 말아먹었다.”고 선언했다면, 이건 구조적인 문제를 몇 몇 인자들의 도덕성 문제로 치환하는 도덕성 비판이다. 그런데 홍명교는 조병훈이 바로 그런 짓을 안 했다고 비판한바 있다(6). 어안이 벙벙하다.


그러면서 홍명교는 조병훈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이에 반해 진보신당의 20대 당원들께서는 자기 생활공간에서 얼마나 대중들을 열심히 만났는지 되묻고 싶다.” 이렇게 물으면 안 된다는 걸 아니까 저렇게 덧붙인다. “결국 나는 지금 다소 무리해서 위악적으로나마 ‘도덕주의적으로’ 묻는 것인데, 우리의 이런 질문은 끝이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끝이 없는 질문을 던진 건 외려 조병훈이 아니라 홍명교다. 사실인즉 홍명교가 그 위악성을 발휘하고 싶었기 때문에 조병훈의 주장은 도덕주의적인 것이 되어야 했던 거다.


홍명교는 “우리 운동권들은 구조적 변혁도 많이 했고, 그 후 생긴 부문운동들 여러 가지도 사실 우리 운동권들이 만든 거다.”라고 얘기한다.(6) 스스로 문제를 도덕적인 차원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문제를 그렇게 바꾸면 운동권이 운동권 이후 세대들에게 꿇릴 것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도 그거 안다. 근데 지금 그게 논점은 아니다. 


전후맥락을 따져볼 때, “홍명교는 조병훈의 주장을 ‘도덕적 비평’으로 보아야만 했다”고 설명하는 게 올바른 일일게다. 왜냐하면 자신의 글의 구도를 이미 그렇게 짜놓았으므로. 아마도 본인의 경험 때문에. 그 심정 이해한다. 십 년동안 운동권이 동네북이었는데 한번쯤 팩 성질을 부릴 때도 됐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운동권을 만나보지도 못한 친구들이 ‘운동권 방식의 폐해’를 천연덕스럽게 논하는 세상에선 더 그렇다. 정파들 다 망하고 학교에 입학한 친구들이 어느 정파의 활동가를 자칭하는 세상에선 더 그렇다. 그렇긴 한데, 우리는 바로 그런 의미없는 ‘팩’을 볼 때 개인의 트라우마를 상상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런 식의 비난은 아예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조병훈씨 개인의 트라우마만 상상하게 할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건 홍명교에게 되돌려주어야 할 말인 것이다.


운동권이 구조적 변혁도 많이 했고 부문운동을 만들어냈다는 얘기는 도덕주의적 비평의 세계에선 의미가 지대하다. 그렇지만 다른 영역으로 넘어오면 별로 그렇지 않다. 상대편 논자는 “구조적 변혁을 많이 했지만 실패했잖아.”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부문운동 영역으로 넘어온 순간 그는 운동권의 조직논리가 아니라 부문운동의 방식에 적응하게 된 것이므로 얘기가 다르다.”고 하면 그만이다. 논리적으로만 본다면 그렇다. 실제로 조병훈은 이렇게 반론한다.


“대세를 잡고 있던 NL학생회 그룹이 폐쇄적으로 지도부를 지키는 선택을 했던 반면, 90년대 좌파학생조직은 홍명교의 말처럼 수 차례 자기 내부의 구조변혁을 통해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위하여' 진화했고, 더 많은 현장으로 진출했다.

'기존 운동권'의 좌파 학생조직 출신 학생들이 각 부문에서 활동한 바에 대해서는 홍명교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과 시민단체 활동가의 차이는 무엇인가. 설마 좌파는 좌파 학생운동조직 출신이라는 등식이 홍명교의 논리 구조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정말이지 아니겠지.“


이런 문제에 대해 반론하려면 조병훈이 학생운동을 대함에 있어 정치운동과 자치운동도 구별하지 않고 뭉뚱그려 논하고 있다는 점을 말해야 한다. 조병훈은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모른다. “90년대 좌파학생조직은 홍명교의 말처럼 수 차례 자기 내부의 구조변혁을 통해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위하여' 진화했고, 더 많은 현장으로 진출했다.”라고 스스로 말하지 않았나. 그말인즉슨 결국 학생운동조직이 스스로를 해산한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다는 거다. 그런데 조병훈은 지금 자기 논리구조 속에서도 올바른 그 선택의 결과를 보고 학생운동권이 망했다고 시비를 걸고 있다. 더 나아가 진보신당이 그것들이 망한 방식으로 운영된다고 시비를 걸고 있다. 

가) 이념조직이 학교를 나와야 했고, 나) 자치조직으로서의 학생회가 더 강화되어야 했다면, 현재 학생운동의 문제는 가)는 대략 해결되었는데 나)는 전혀 길이 안 보인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에 대해서야 정치조직을 꾸렸던 학생운동권의 책임을 물을 수 있겠으나, 나)에 대해선 학생들 일반이 모두 책임져야 할 일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을 거다. 이렇게 구별하고 나면 ‘기존운동권’이란 허상을 공격할 방법은 사라진다. 적어도 기존운동권의 공과를 공격하면서 현재의 진보신당의 문제를 공격할 방법은 사라진다. 당시 학생운동조직은 스스로의 어떤 부분을 와해시켜야 할 입장에 처해 있었는데 그걸 현재의 진보신당에 투영했을 때 논의할 수 있는게 뭐냐고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홍명교는 조병훈의 비논리를 적시하지 못한다. 그러지 않고 그저 자신의 논리구조를 근거없이 나열하는데 급급할 뿐이다. 조병훈은 자유주의자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자여야 하니까! 홍명교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조병훈이 기존 운동권정파의 폐쇄성을 문제삼는 이유는 레닌주의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6) 이로써 홍명교는, 기존의 운동권 정파 중에 유독 레닌주의 정파만 폐쇄적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책임을 지게 된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사실 운동권 정파들의 조직원리는 다들 비슷비슷했다. 그 조직원리만 보고 그게 수령론의 반영인지 혹은 민주집중제의 반영인지를 감별하는 것은 경험자들에게 가능했던 일인지는 모르나, 오늘에 와서 중점적으로 논의할 문제는 아니다. 무엇보다 조병훈은 뭉뚱그려 운동권을 논했던 바, 차라리 어떤 이념도 공격하지 않고 이념집단 자체에 대한 혐오감을 보이고 있다고 공격했다면 더 맥락이 닿았을 것이다. 조병훈이 하필 레닌주의나 급진좌파 정파만 젓가락으로 골라내어 비평했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나?


홍명교의 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학생운동나 진보신당의 문제도 아니고, 조병훈의 비논리나 논리도 아니며, 한국 사회의 현실은 더더욱이나 아니다. 그저 그가 읽고 학습했을 텍스트들의 흔적과 편린일 뿐이다. 레닌을 열심히 읽고 논쟁의 현장에 뛰어들면 왠지 상대방이 '좌익소아병' 환자처럼 보이고, 지젝을 열심히 읽고 비평을 시작하면 왠지 삼라만상의 문제가 '자유주의자' 탓처럼 보일 것이다. 우리 그러지 말자. TV에 나오는 요리사가 하는 그대로 칼질하지 말고, 우리가 잡고 있는 생선이 광어인지 우럭인지 아니면 도다리인지 정도는 확인하도록 하자.


양승훈, “20대, 좌파, 학벌 그리고 돈” 비평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9123


이 글은 장황하고, 산만하며, 핵심이 없다. 이 글은 서두에 조병훈과 홍명교의 논쟁을 자유주의와 혁명적 맑스주의자의 대립으로 묘사하는데, 그건 조병훈의 운동권 조직 비판이 레닌주의 혹은 급진좌파정파 비판이라는 홍명교의 오도된 인식을 추인하는 것이다. 뒤이어 제시되는 문제는 ‘학벌’과 ‘돈’ 문제다. 말하자면 이렇게 투닥투닥대는 ‘운동권 정파 전쟁’(이 논쟁을 그렇게 정리하는 것 자체가 홍명교의 오류를 답습하는 얘기란 점은 이미 지적했다.)들이 ‘학벌’과 ‘돈’을 갖춘 ‘그들만의 리그’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인데, 맞는 얘기이긴 하지만, 이 논쟁 중에 튀어나와야 할 얘기인지는 모르겠다. 저 얘기를 좀 더 갈고닦아 이 논쟁에 개입한다면, “학생운동은 망한게 아니라 처음부터 유의미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이건 꽤나 재미있는 테제이긴 한데, 이 작업의 결말은 조병훈의 애초의 비평의 전제를 허무는 것이다. 물론 양승훈은 그런 일을 하진 않았다.


‘돈’ 문제 나왔으니 정리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다. 90년대 이후 학생정치조직이 스스로의 존재 이유에 대해 물음을 던졌고 ‘학생정치조직 해체’라는 주장까지 운위되었음은 이미 지적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학생운동권 몰락’과 ‘진보신당 위기’를 두루뭉실하게 포개놓는 조병훈 비평의 전제가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이런 맥락은 학생운동에 고유한 맥락이고, 곧바로 진보신당의 위기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맥락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몰락을 고민하고 있었던 섹터 얘기는 지금의 진보신당 문제와 관련이 없다. 우리가 지금 “진보정당 운동은 끝났으니 다 접고 민주당 안으로 집단입당해서 하나의 분파를 결성하자!”는 ‘주대환 테제’를 따를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확인해야 할 문제. 그러면 왜 학생정치조직들은 학생회 활동에 대한 확신이 없었으면서도 계속 탈정치화를 수반하면서도 학생회 선거에 개입했을까? 정답: 당선되면 돈이 나오니까. 돈 얘기 -끗-. 아마 홍명교가 본인의 글에서 하고 싶었던 얘기도 이런 문제였던 것 같은데, 이런 사정 역시 진보정당 운동에 대입할 수 없는 맥락인 건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진보신당더러 선거에 나오지 말고 현장으로 가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현장으로 가긴 가야 하지만, 선거에 안 나오는 건 정당조직으로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가 되니 말이다. 그런 얘기를 하려면 사노련이 되었든 노힘이 되었든 정당조직을 의도하지 않는 그런 쪽 단체들을 고민해야겠지.  


홍명교, “내가 비판한 건 유령이 아니다” 비평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9156


이후로는 자신의 견해를 반복하는 드잡이질이 되어버려서 크게 문제삼을 부분들은 없는데, 홍명교의 이 글에선 몇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첫째는 ‘자유주의’라는 말의 오용에 대해서다. 홍명교는 ‘자유주의’적 원칙이 확립된 세상에서 탄생한 정치평론의 잣대를 그대로 들여와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것들을 ‘자유주의’라고 칭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지금 “한국 사회는 자유주의도 확립이 안 되었으니 일단 자유주의를 위해서 싸우자.”는 식의 단계론을 설파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계론을 설파하지 않더라도 있는 건 있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한국 사회의 경우 사회 전반적으로는 ‘자유주의’가 과소하되, 운동 진영의 일각에선 ‘자유주의’가 과도하게 실현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가령 스스로 좌파라 칭하는 이들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요구’보다 ‘표현의 자유’를 훨씬 더 중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현실사회주의의 전체주의적 오류에 대한 좌파들의 지나친 반성이 가져온 역편향일 수도 있겠고 한국 사회의 ‘미국화’의 한 단면일 수도 있겠다. 이런 부분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냥 모든 것을 자유주의라 얘기해버리면 진보신당에게 선거에 나오지 마라고 요구하는 저치들의 요구도 ‘자유주의적’인 것이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자유주의적 비평은 주류 기득권에 맞서 싸울 때 훌륭한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자칫 낙인을 찍는듯한 ‘자유주의’ 놀이가 “자유주의의 모든 것에 반대하지도 않으면서도 자신을 제외한 모든 정파를 자유주의자라 호명하는” 코미디로 전락할까 두렵다.


둘째는 ‘실용적 독해’에 대한 비판에 대한 것이다. 담론에 대한 이론적 독해와 실용적 독해가 따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존재하는 것은 이론의 함의에 대한 정확한 숙지와 그 이론이 적용될 사회문제의 맥락에 대한 면밀한 파악이다. 논쟁이 어그러지는 이유는 그저 이 두 가지가 파탄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지 누구는 실용적 독해를 하고 누구는 정치적 독해를 제대로 하기 때문은 아니다. 홍명교에게만 하는 말은 아니고 이 글의 결론이다.

 

 

 

2010/07/15 12:04 2010/07/15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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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워낭소리'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려고 리뷰와 관련기사를 모으는 중.

 

1.

 

 

달군 - 불편하게 만들기

칸나일파 - 도쿄소나타, 워낭소리

잔물결 - 워낭소리

처절한기타맨- 모진소리, 워낭소리, 할매꽃

daybreak飛렴 - 워낭소리

 

라울 -  ,  독 05,  독 06

공돌 - 워낭소리

냐옹 - 워낭소리 낭팰세

나루 -  여름에서 겨울까지 본 영화들

            수익금 30% 기증보다 더 절실한 것아쉽지만 일단락,  연명을 부탁드립니다

몽상가 - 뒤늦게 워낭소리

 

하루 -  다녀와서,   큰 맘  먹고 워낭소리,   명랑한 밤길

449  -  비겁한 독립영화인, 비겁한 카메라

tnffo -  가족서사, 한국(여성)문학의 함정

홍지 - Beethoven Chronicle

울산까마귀 - 워낭소리

 

tinooo - 정리

염둥이 -  며칠 전 메모,  나에 관한 이야기2

처절한기타맨 - 워낭소리, 대통령의 영화되다

한판붙자 - 결국 일을 쳤구나

재원 -  그 영화

 

슈아 - 서울독립영화제에 초대과도한... (두 글의 입장이 많이 달라서 좀 당황스럽다.)

돌~ - 워낭소리에서 늙은 농촌, 농민을 보았다

달팽이 - 워낭소리

은수 - 워낭소리 한줄로 요약안됨

GreenMonkey - 소에 받힌 적 있는 아버지가 워낭소리를...

 

풀소리 - 워낭소리

유이 - 워낭소리

jineeya - 보물같은 삶의 이야기, 워낭소리

라디오레벨데 - 워낭소리 강추

크자 - 워낭소리

 

홍실 - 영화 세 편

뎡야핑 - 워낭소리

 

 

 

2. 언론 리뷰 및 관련기사

 

씨네21의 리뷰들 중에서는 허문영의 의견이 가장 공감이 간다. 

 

1) 씨네21 - [전영객잔] 환영으로 완성한 농촌 판타지 (정한석)

 

 

[전영객잔] 환영으로 완성한 농촌 판타지

글 : 정한석 | 2009.02.05

 

영상과 소리를 인위적으로 분리했음에도 끌어안고 싶은 <워낭소리>

 

 

새해 보신각의 타종식 현장을 중계한 KBS 방송이 왜곡보도 논란에 휩싸인 건 모두 아는 일이 되었다. 현장에 있지 않았으므로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데, 카메라의 앵글은 촛불을 들고 목소리를 높이던 군중을 교묘히 피해 찍었고 조작하지 않고서는 막는 것이 불가능한 현장음은 조작되었다고 한다. 그날의 현장에 있었던 문화평론가 진중권은 진보신당 게시판에 이에 관한 글을 남겼다. 그의 글의 요지는 “그것은 중계방송이 아니라 하나의 판타지물”이라는 표현으로 요약된다. 이것이 <워낭소리>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우리의 현실 경험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워낭소리>를 이 왜곡보도와 동일시하여 비판하려는 뜻을 갖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영상과 소리의 합일성이 실은 얼마나 쉽게 분리되고 이용될 수 있는지 동시에 그것이 분리되어 재결합했을 때 어떤 왜곡이나 충만한 정감 그 어느 것이라도 불현듯 일으킬 수 있는지를 예시하고 싶다. 새해 벽두의 이 사건은 <워낭소리>를 생각할 때 무관하지 않으며 나의 관심은 진중권이 아니라 그가 말한 판타지에 있다.

 

워낭 울리지 않아도 워낭소리가 나네?

 

사운드의 영화학자 미셀 시옹은 그의 저서 <영화와 소리>(민음사 펴냄)의 첫장을 우연히도 소와 음매 사이에 관해 설명하는 것으로 연다. 자크 타티의 영화 <트래픽>에서 트럭을 몰고 가던 한 남자가 초원에서 저 멀리 있는 희미한 물체를 얼핏 보았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은 그의 정확하지 않은 시야가 아니라 원근법을 깨고 귀에 가깝게 들려오는 음매라는 소리라는 것이다. 이때 소라는 기의는, 그러니까 저것이 소라는 것은 음매라는 소리의 기표로서 확실하게 지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영상과 소리의 조정에 관한 예이며 한편으로는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는지에 관한 예이기도 하다. 이것 역시 <워낭소리>를 말하는 데 무관하지 않다. 아니 무관하기는커녕 미셀 시옹은 다른 저서 <오디오-비전>(한나래 펴냄)에서 “영화는 영상예술. 환영(幻影)이라고? 물론. 그것 말고 뭐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 책에서 얘기하려고 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시-청각 환영”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나의 관심은 미셀 시옹이 아니라 그가 말한 시-청각 환영에 있다.

 

경상북도 봉화에 사는 한 노부부와 그들과 함께 세월을 살아온 마흔살 먹은 늙은 소를 주인공으로 한 이충렬의 영화 <워낭소리>는 이들 촌부의 일상적 모습을 특히 그들이 소와 함께 얽혀 사는 모습을 일종의 운명적 공동체로 보여주는 영화다. 이때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소가 등장하지만 할머니는 다소 다른 자리에 있고 할아버지와 소가 주된 주인공이다. 할아버지의 느리고 무너질 것 같은 걸음과 마흔살 먹은 소의 비틀거리는 걸음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줄 때, 얇게 휘어서 성치 않은 왼쪽 다리를 이끌고 논밭을 매는 할아버지와 숨쉬기도 곤란한 소가 함께 농사일을 할 때 그들은 흡사 하나가 된다. 결국 이 영화는 소멸하기 직전에 놓인 두 육신 중 하나가 먼저 떠나고 머지않아 또 하나가 곧 따를 것이라는 비정한 삶의 퇴장 순서에 대한 아름다운 마지막 기록이다. 이 점을 성실하게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워낭소리>에 배인 정감을 설명하는 길이 되겠지만 여기에는 사실 좀더 말해야 할 다른 문제들이 있다.

 

보신각 타종식의 왜곡방송과 미셀 시옹의 소와 음매 사이의 지적을 떠올릴 때 <워낭소리>가 정감을 일으키는 진원지는 단순한 이 서정적 묘사를 넘어서 다른 영역에 있다고 나는 느낀다. 전적으로 공감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지와 사운드에 가해진 이 영화의 인위성을 주목해야만 한다. 진중권이 말한 판타지와 미셀 시옹이 말한 시-청각 환영의 문제가 여기 있다. <워낭소리>는 판타지이며 환영의 영역에 있다.

 

이 점이 <워낭소리>의 전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초가 된다. 예컨대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올드 파트너’(Old Partner)이지만 한글 제목은 <워낭소리>다. 영어 제목은 영화의 내용적 면모를 따라 지어졌지만 한글 제목은 정감의 작동방식에 따라 지어졌다. 그 방울의 소리가 그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워낭은 소의 목에 걸려 있는 방울이고 할아버지의 소는 워낭을 차고 있으며 소리를 낸다. 그러니까 워낭이 울리면 워낭소리가 날 것이다. 혹은 워낭이 울려야 워낭소리가 날 것이다. 하지만 워낭이 울리지 않아도 워낭소리가 들린다는 것이 이 영화의 역전된 착상이다.

 

힘들어서 더는 농사일을 못하겠다며 이제 우리도 다른 이들처럼 농약을 치자고 할머니는 잔소리를 늘어놓고 할아버지는 소의 건강에 치명적이니 그럴 수 없다는 말로 둘러댄다. 밭에서 시작한 이 대화는 그들이 서로 갈라진 길로 나뉘어서 갈 때조차 이어진다. 그때 그들은 침묵하고 말하고 있지 않은데 대화는 외화면에서 이어진다. 그때 그 자리에서 말을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자리에서 녹음된 소리가 지금 그들의 모습 위로 들어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노부부가 소를 타고 논밭과 집을 오갈 때, 허름한 대청마루에 앉아 있을 때, 그들의 입은 조용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늘 화면 위를 흐른다. 혹은 다른 대화를 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우리가 듣는 내용은 늘 소에 관한 것이다. 만약 한 두 장면에서 이 방식이 고수될 때 그건 기능적인 선택이며 특기할 만한 사항도 아니지만 이 영화는 시종일관 집요할 정도로 그러하다. 그러니까 소리는 그때 그 자리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인식하는 것이 이 영화를 보는 첫 번째 방법일 정도다.

 

여기에 두 번째 종류의 출처없는 소리가 등장한다. 비판받을 만한 구석이 있지만 너무 노골적이어서 심지어 순박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이 인공적 소리는 농촌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거의 매 장면에서 들려온다. 후시녹음으로 들어갔을 것이 분명한 지저귀는 산새 소리, 구슬픈 뻐꾸기 소리, 온갖 종류의 벌레소리, 개구리 소리, 우리가 농촌이라는 곳에 관해 상상할 때 떠올릴 수 있는 거의 모든 소리가 들려오지만 그건 지금을 가리키고 있지 않으며 화면 안에 그 소리의 진원지는 없다. 그중에서도 워낭소리는 소가 움직이지 않아도 마치 환청처럼 지속적으로 들려온다.

 

영화 전체가 일종의 더빙판 같은 느낌

 

이렇게나 끈질기게 영상과 소리를 분리시켜 완성한 다큐멘터리가 또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영화 전체가 일종의 더빙판이라는 느낌까지 든다. 만약 이 영화를 볼 때 소리를 끄고 영상만 본다면 혹은 영상을 지우고 소리만 듣는다면 우리는 그때 서로 다른 두 버전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니 이때 영상이 행사하지 않는데도 이미 행사되는 소리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미셀 시옹은 SF영화 <스타워즈>에서 그 유명한 자동문의 문소리를 지적한다. 관객에게 열려 있는 문과 닫힌 문 두숏을 보여주고 그 사이에 문이 열릴 때 나는 푸쉿 소리만 들려주어도 관객은 스스로 문이 열렸다 닫히는 장면을 보았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말하는 “추가된 환영”일 것이다. <워낭소리>는 이 노부부가 오로지 소에 관해서만 말하고, 소와 함께 살고 있으며, 소와 함께 인생을 마감할 것 같다는 환영을 추가하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두 가지 비판의 입장이 있을 수 있다. 만약 다이렉트 사운드(영상과 소리의 활용은 유물론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 주의자들이라면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기극이다. 혹은 다큐멘터리의 진실성이 현실의 내밀한 포착, 즉 구성이 아니라 포착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라면 또한 <워낭소리>는 심각할 정도로 리얼리티가 어그러져 있어서 비판의 도마에 오를 것이다. 그것은 진실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맥락이다.

 

나는 <워낭소리>가 일반적인 다큐멘터리가 추구하는 진실을 포착하고자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실이 있다 해도 그건 우리가 생각하는 촌부의 세밀한 삶의 리얼리티- 이미 말한 대로 영상과 소리의 불일치로 리얼리티는 거의 소멸한다- 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의 구축만이 이 영화의 진실이다. 이 말의 절반은 비판이지만 절반은 옹호일 것이다. <워낭소리>의 목적은 자기 환영성의 완성에 있다.

 

환영성을 강력하게 만드는 몇 가지 것들이 있다. 말하자면 우선 관객이 이 영화를 기승전결로 이해하도록 유도하려는 내러티브의 고정점이 있다. 영화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누는 대화의 전부가 소에 관한 이야기로만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농사를 짓고 딸린 가족이 없는 노부부의 삶이 단조롭다고는 하나 그들의 삶의 대화가 전부 소에 관한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건 현실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거의 늙은 소에 대해서만 말한다.

 

대화가 전부는 아니다. 카메라가 인물을 담는 방식에서도 주체와 대상을 나누어서 한곳으로 집중하게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소를 보여주는 카메라의 시선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감독은 할머니가 영화를 좀 알고 할아버지는 사진을 찍는 줄로 알 만큼 몰랐다고 표현했다. 이때 영화에서 할머니는 늘 보는 사람이며 할아버지와 소는 늘 보이는 대상이다. 할아버지가 무언가를 본다면 그건 소를 보는 것이며 소에 대한 반응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 오가는 시선의 교환보다 할아버지와 소 사이의 시선의 교환이 훨씬 많으며 그리고 건너에는 그 둘을 보는 할머니의 시선이 있다.

 

또한 할머니는 카메라를 의식하며 말하지만 할아버지는 카메라를 의식하지 못하고 잡힌다. 말하자면 할머니가 카메라에 대고 액션을 하는 것이라면 할아버지는 대부분 카메라가 잡아내는 리액션의 상태다. 할아버지와 소가 눈과 눈, 발과 발이라는 육체적 환유의 관계로 묶이고 있을 때, 또한 할아버지의 갈라 터지고 굳은살 박인 워낭을 쥔 손,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 그것은 소의 늙은 몸과 머리로 자연스럽게 연관된다. 심지어는 그렇게 교차편집된다. 그러나 할머니의 육신은 그 어디에서도 그만한 클로즈업을 부여받지 않는다. 할머니를 영화 안에 화자로 심어두고 나머지 대상인 할아버지와 소를 보도록 하는 카메라의 방식이다. 그게 이 영화에서 할머니가 객관적 화자가 되고 할아버지와 소가 주관적 오브제가 되는 이유다.

 

리얼리티 강조한 <송환>과는 대척점에

 

이미 말한 것처럼 <워낭소리>의 환영에의 유지는 강박적으로 이미지와 사운드를 분리시킨다. 그리고 인물들을 주체와 오브제의 층위로 갈라놓는다. 그것들을 따라 이야기 안에 이야기를 진전시킨다. 이때 문득 궁금해지는 것은 그렇다면 왜 이 영화는 이런 방식을 동원하여 환영을 이토록 추구하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그것이 한편으로는 재현적 실패에 기인하며 또 한편으로는 극화에의 욕구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충렬은 물리적으로 충분한 재현을 하는 데 실패했을 수도 있다. 즉 사운드를 쓸 만한 장면과 이미지를 쓸 만한 장면을 서로 나누어 인위적으로 재결합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야기를 진전시킬 수 없을 만큼, 유용한 촬영분을 충분히 찍어두는 데 실패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중요한 건 거기에 보완심리가 작용했다는 거다. 나는 이 기술적인 실패를 보완하려는 욕구가 우선 이 영화의 환영성을 끌어낸 한 가지 계기라고 추론한다. 나머지는 한번 그렇게 들어선 환영을 끝까지 고수하려는 태도다. 그건 거의 극영화의 환영을 유지하려는 태도에 가깝게 다가가며 감독 자신에게 몇 가지 철칙을 안겨주는 것 같다. 이 점에 관해 비판이나 비난이 아닌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 김동원의 <송환>과 변영주의 <낮은 목소리2>의 한 장면을 말해도 좋을 것이다.

 

김동원의 <송환>에는 이 다큐를 유명하게 만든 대표적인 장면이 있다. 비전향 장기수 조창손 할아버지와 박영석 할아버지가 오랜만에 만났을 때 김동원은 그 둘의 대화에 마이크를 갖다 대는 것이 죄송스러워 끝내 그 둘이 대화하는 장면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그 순간의 리얼리티를 놓친 것이다.

 

김동원은 찍을 수 있는 것과 찍지 못할 것이 있으며 찍지 못한 것은 메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더 정확히는 왜 메울 수 없는지 설명하는 것 자체를 영화의 형식으로 변환하여 넣은 다음 역설적으로 그 장면을 복원하였다. 어찌됐든 그는 여기에 어떤 환영을 도입하는 대신 찍지 못한 장면(즉 듣지 못한 장면)의 실패의 기록을 남기기로 한 것이다. 그게 위대한 과정으로서의 다큐멘터리, 태도로서의 윤리적 다큐멘터리를 완성한다. 거기에서 환영의 개입은 자연스럽게 제거된다.

 

김동원의 <송환>이 얼마나 환영을 경계하는지는 비전향 장기수들을 다룬 다른 다큐에 비해 <송환>에서 그들을 영웅시하는 면모가 단 한 장면도 없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충렬의 경우는 그 반대일 것이다. 그는 말 한대로 아마 꼭 찍고 싶었던 장면을 김동원처럼 놓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김동원과 또한 다르다. 그는 보완의 과정을 거치기로 하였을 것이며 그걸 복원하기 위해 들여온 방편 중 하나가 바로 소리와 영상을 적절하게 분리, 재결합하는 것이다. 이 점이 자연스럽게 환영의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김동원이 조정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충렬은 조정의 가능성을 시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 “송아지가 날뛰어서 할아버지가 쓰러지는 장면을 느리게 잡은 이유는 뭔가”(<씨네21> 684호 ‘노인과 소가 있는 풍경 <워낭소리>’)라고 물었을 때 이충렬은 “그 상황이 벌어졌을 때 ‘어’ 하고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한테 뛰어들었다. 그냥 쓰면 내가 드러나서 하는 수 없이 슬로와 스틸로 편집할 수밖에 없었다”고 답한다. 늙은 소 대신 들여온 젊은 소가 새끼를 낳고 그 송아지를 길들이다가 할아버지가 송아지에 채여 넘어지는 장면에 대한 물음과 답이다. 그런데 이 답은 당연한 말 같지만 경우에 따라 이상할 수도 있다. 나는 이충렬의 답을 듣고 변영주의 영화를 떠올린다. 만약 변영주라면 이 장면에 대한 이충렬의 대답에 공감할 것인가.

 

비전문 배우 동원한 극영화인 셈

 

변영주의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2>에는 유명한 한 장면이 있다. 고랑에서 호박을 캐오던 할머니가 어쩌다 호박을 놓치자 갑자기 카메라 뒤에 있던 감독이 뛰어들어 그걸 주워 함께 걸어오는 장면이다. 감독이 이때 “할머니는 우리 영화에 어떻게 나왔으면 좋겠냐”고 물으면 “소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두고두고 이 다큐의 본질을 말할 때마다 말해져왔다.

 

이렇게 물어보자. 이충렬은 안된다고 생각하는 걸 변영주는 왜 된다고 생각한 것인가. 이충렬은 할아버지가 달려드는 송아지에게 넘어질 때 왜 자기가 그 안으로 뛰어들어간 것을 보여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반대로 변영주는 왜 프레임 안으로 갑자기 뛰어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인가. 여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 두 장면은 연출에 대한 지론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변영주는 잘 알려진 것처럼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에 맺어진 관계를 중요시하는 다큐를 찍었다. 변영주는 그러므로 카메라가 돌아가더라도 시급한 일이 있으면 그 안에 자기가 등장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환영을 깨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반면 이충렬은 어쩔 수 없이 자기가 드러난 프레임을 잘라내는 한이 있어도 극화된 환영성을 깨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환영을 깨고 관계를 인정할 것인가, 환영을 유지하기 위해 그 관계가 드러나더라도 배제할 것인가. 이충렬의 선택은 후자다.

 

<씨네21>의 질문에 대한 이충렬의 앞선 대답은 이 영화에 할머니를 제외한 그 누구의 인터뷰도 없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한다. 집에 가족이 찾아왔을 때 나는 이충렬이 자식들을 인터뷰하지 않았다고 믿기 어렵다. 단지 인터뷰는 진행되었겠지만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걸 넣는 건 다큐멘터리의 오래된 방식인데도 하지 않았다. 이유는 자기 자신이 화면에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물론 인터뷰를 넣지 않고 완성된 수많은 다큐멘터리가 있음에도 <워낭소리>의 경우는 누구의 인터뷰라도 극의 흐름을 깬다면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인상이 강하다. 극적인 구성을 깨기 싫은 것이다.

 

극적인 구성이라는 면에서 여기 한 가지를 추가할 수 있다. 이른바 극화된 시점숏이다. 영화에는 소가 음매하거나 푸르륵거릴 때 그걸 보는 할아버지의 시점숏이 있고, 그를 보는 듯한 할머니의 시점숏이 있다. 그러나 시선이 잘 맞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같은 자리에서 계획적으로 설계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말해준다. 전체 구성에 입각해서 편집상 시점숏을 만들어낸 것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시점숏이란 시선의 연속성에 헌신하며, 시선의 연속성이란 극영화가 환영적 완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고안된 방법인데 이 영화는 그걸 따르려고 한다. 다큐멘터리에서도 할 수는 있겠지만 미리 계산된 카메라의 약속이 아니면 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그것이 등장할 때 거기에는 극화함으로써 환영을 강화하겠다는 욕구가 있는 셈이다. 일반의 다큐멘터리에서 창작자가 대상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가 대두된다면 일반의 극영화는 대상이 대상과 어떻게 환영적으로 결합하는가에 축을 두는데, <워낭소리>는 후자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나는 이 영화를 비전문 배우들을 동원한 극영화라고까지 말하고 싶어진다.

 

사멸의 회한을 보았다면 제대로 본 것

 

“애초 떠올렸던 이미지들을 염두에 두고 집중적으로 재구성했다. 현실을 도려내서 보여주는 액티비즘의 관점에서는 비난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방식이 심성적으로 끌린다.”(이충렬, <씨네21> 앞의 인터뷰) 나는 이충렬이‘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진실한 삶의 현장을 낱낱이 포착하려 했다’라고 말하는 대신 위와 같이 말하는 태도가 솔직하고 현명해 보인다. 우리는 결코 <워낭소리>를 보고 노부부의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그리고 통일된 삶을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건 거짓이 될 것이다.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의 진실성이라는 연장선에 놓고 혹은 그 위반을 놓고 페이크다큐라고 비판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으며 더군다나 간편한 일이다. 하지만 내게 이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는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 하는 원론적인 질문이 아니라 우리는 당도한 환영을 매 순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인 것처럼 보인다. 이 문제는 좀더 심사숙고해야 하겠지만 나는 어색하지만 집요하게 도입된 환영의 선들을 따라 사멸 직전의 육신에 닿아본 이 영화를 일단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다. 여전히 몇 가지 방식에는 공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죽음의 그림자와 사멸에 대한 회한이 여기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그걸 보았다고 말해야 이 영화를 정말 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늙은 두 노인과 한 마리의 늙은 소라는 배우들을 출연시킨 농촌 판타지를 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2009년 벽두에 두개의 환영을 맞이하게 됐다. 하나는 새해 첫날 현실의 시간 속에서 공공연히 일어났으며 또 하나는 얼마 뒤 창작물로서 애매하게 찾아왔다. 이 두개의 환영 중 나는 전자에 분노하지만, 나머지 하나에는 잠시 망설인 다음 끌어안는다.


 

 

 

2) 씨네21 - [나의 친구 그의 영화]워낭소리여, 나의 신음소리여 (김연수)

 

 

[나의 친구 그의 영화] 워낭소리여, 나의 신음소리여

글 : 김연수 (작가) | 2009.02.12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쓴 농약이름 모자를 보며 가자와 용산을 떠올리다

 

 

결국 결론은 “신토불이,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일까? 샌드위치, 햄버거, 스테이크, 파스타…, 현지에서 먹는 양식이란 정말 기가 막힌 맛이리라. 하지만 그것도 한두번이지 두달하고도 몇주째 입에 넣다보면 그게 도무지 음식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런 걸 음식이라고 먹다니. 그런 독백이 절로 나온다. 그 지경이 되면 남의 나라에 있는 건 자신이면서 그 나라 전체가 글러먹었다는 듯이 투덜거리게 마련인데, 지난호에 실린 글을 보니 중혁군이 지금 딱 그 지경인 것 같다. 무슨 스포일러의 폭력이니, 고분고분 당하고 있지 않겠다느니. 역시 빨리 귀국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을 듯하지만….

 

순진무구한 초딩의 표정으로 울어버렸네

 

<워낭소리>가 개봉했다는 소식을 듣고 뭐, 그 정도, 그러니까 신토불이 의식을 고취시키는 다큐멘터리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럼에도 극장까지 가서 다큐멘터리를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안면이 있는 박봉남 독립 PD의 소개글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화면발이 받는 얼굴인지 그간 여러 다큐멘터리에 출연할 일이 있었는데, 그때 알게 된 분이다. 이분이 그 글에다 “아! 나는 75분 내내 숨을 죽이고 이 영화를 봤다. 아! 정말 훌륭한 작품이었다”라는 소감을 남긴 것이다. 이러니 어찌 극장에 가서 보지 않을 수 있을까? 더구나 내 다큐멘터리 인생 최고의 후회는 <푸지에>를 극장에서 보지 못한 것이니.

 

그래서 파주까지 가서 다큐멘터리를 봤다. 무조건 이 다큐멘터리를 보시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다. 표현에 인색한 박봉남 PD가 “아! 아!”라고 신음소리를 적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박봉남 PD는 어떤 경우에 “아! 아!”라는 신음소리를 내는지 모르지만, 나의 경우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특히 경제적 보상을 바라지 않고 뭔가를, 그것도 몇년에 걸쳐서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 이런 신음소리를 낸다. 다큐멘터리를 볼 때 문제가 있다면 내가 눈물을 너무 많이 흘린다는 점이다. 그건 내가 그런 다큐멘터리의 내러티브를 표면 그대로, 진심으로 믿기 때문이다. 나는 돈을 무시하는 예술가들의 진심을 의심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돈을 무시하는 한 그들은 진실을 말하게 돼 있으니까.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볼 때, 나는 참으로 순진무구한 초딩의 표정으로 곧이곧대로 내러티브를 따라가다가 끝에 가서는 울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 자바라·키타진·골자비…

 

솔직히 말하겠다. 그간 나는 영화산업을 혐오하던 사람이었다. 지난 몇년간 영화에 대해 한국영화계가 말하는 것은 오직 돈에 대한 말들뿐인 것 같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극장에 갔다가 내 몸에서 나올 만한 체액이라곤 위장에서 솟구치기 시작해 구강을 거쳐 턱으로 흘러내리는 걸쭉한 액체뿐이라는 걸 여러 번 확인했다. 내가 아는 좋은 감독들은 몇년째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그 걸쭉한 액체에 대해 어떤 변명도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돈에 대해서만 말할 때,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은 순수한 불만족일 뿐이다. 순수한 불만족, 그러니까 업자들의 불만족. 윤오영의 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에 나오는 노인처럼 이 세상에 ‘대운하 파던 업자’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그들은 항상 더 많은 돈을 원하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질 수 없으니까.

 

나는 경제를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무시하는 건 경제만을 얘기하는 자들이다. 그 사람들은 왜 경제만을 얘기하는 걸까? 그건 아마도 그 사람들이 말하는 경제란 자신들만 챙기는 돈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 다 같이 돈을 버는 문제라면, 그렇게 쉬지도 않고 경제만을 얘기할 리는 없다. 난 그 정도로 인간이 이타적이라고는 믿지 않으니까. 그러므로 돈을 거부하고 우리 모두 독립제작에 나서자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건 <워낭소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소가 먹을 풀을 길러야 하니까 할아버지가 농약을 치지 않자 할머니에게 지청구를 듣는다. 그럴 때조차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머리에는 ‘자바라, 키타진, 골자비’ 같은 글자가 적힌 모자를 쓰고 있다. 그 모자를 그들에게 씌운 건 농약회사들이다.

 

무조건 극장에서 돈을 내고 보시라

 

이게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다. 우리가 아무리 매매의 세계를 거부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미 그 세계 깊숙이 들어와 있다. 할아버지는 ‘안 팔아, 안 팔아’라고 소리 질렀고, 40살이 먹은 소는 죽기 바로 직전까지 겨울 동안 할아버지 내외가 불을 땔 수 있도록 나무를 해놓은 뒤에야 죽었다. 할아버지가 아무리 안 판다고 해도 우리는 끝내 할아버지를 설득해서 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나무를 잔뜩 해놓고서야 죽는 소를 우리는 이제 더이상 볼 수 없게 된다. 이 다큐멘터리가 개발의 논리에 밀려 사라지는 농촌의 정경을 다룬 작품일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자바라, 키타진, 골자비’는 무엇을 구매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세상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니 보시라. 무조건 보시라. 극장에 가서 돈을 내고 보시라.

 

그렇긴 해도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머리에 마을 이름이 적힌 모자를 씌워드리고 싶었다. 그 옛날 <전원일기>에서 유인촌이 쓰던, ‘양촌리’라는 글자가 인쇄된 모자 같은 걸. 종자처리중화제나 도열병방제제의 이름이 아니라, 아름다운 공동체의 이름이 적힌 모자를. 변하는 건 세상이 아니라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렇지 않은가? 대통령 한명 바뀌었을 뿐인데, 지금 우리는 아주 딴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또 다른 독립 PD 한명이 시리아에 가자고 했다. 거긴 위험하지 않아요? 내가 대답했다. 입국하기 어려울 뿐이지, 위험하지는 않단다. 만약 그게 가자 지구였다면? 절대로 안 갈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은 용산에서 철거민들이 불에 타서 죽은 날이다. 포털에 들어가니 메인에 ‘돌아온 그들 앞엔 부서진 집과 가족 시신뿐’이라는 제목이 보였다. 허겁지겁 클릭했더니 일방적으로 휴전이 선언된 가자 지구에 대한, 연민에 가득 찬 보수신문의 기사였다. 평소 국내문제를 다루던 논조를 보면 이스라엘을 극렬 지지해야만 할 텐데 자기 이익과 관계없는 딴 나라의 일에는 이처럼 상식적이다. 나도 모르게 용산을 다룬 기사인 줄 알고 클릭할 정도로 거기나 여기나 매한가지다. 제정신이 박혔으면 누가 가자 지구에 입국하겠는가? 중혁군도 그냥 유럽에 있는 게 낫겠다.

 

 

 

 

 

3) 씨네21 - [전영객잔] 심금 울리지만 껴안지는 못하겠다 (허문영)

 

     

 

[전영객잔] 심금 울리지만, 껴안지는 못하겠다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 2009.03.05

 

편집의 마술과 기만술 사이에서 <워낭소리>를 다시 평가함

 

 

몇주째 이 지면이 두 다큐멘터리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최초의 영화들이 기록 필름이었으며 카메라와 피사체의 관계가 텍스트 내적인 문제로 새겨진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는, 이야기에의 집중을 요청하는 극영화보다, 영화라는 매체의 기원 혹은 본성과 관계된 쟁점을 종종 더 명료하게 드러낸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24시티>와 <워낭소리>로부터 배우고 생각할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다. <24시티>는 두 차례 다뤄졌으므로 여기서는 <워낭소리>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려 한다.

 

좋은 가짜인가 나쁜 가짜인가의 문제

 

<워낭소리>의 극영화적인 장치들에 대해선 이미 정한석이 재론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정교하게 분석한 바 있다(688호). 그리고 나는 그 다음에 <24시티>의 페이크 다큐멘터리적 성격에 대해서 썼다(689호). 둘을 모두 유사 다큐멘터리 혹은 조작적 다큐멘터리라고 부른다고 해서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두 작품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은 ‘조작’의 지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24시티>의 조작은, 유명 배우가 현장 노동자로 분장해 구술함으로써, 관객이 인지하도록 기획되었다. 그러므로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그 조작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조작 안에서 무엇을 보고 들을 것인가의 결정을 요청받는다. 반면 <워낭소리>의 조작은 관객이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잊도록 기획되었다. 우리는 프레임에 등장한 이미지와 사운드가 그곳에 정말로 있었던 것처럼 느끼도록 유도된다.

 

스스로를 드러내는 조작은 정당하고 스스로를 은폐하는 조작은 정당하지 않은 것일까.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을 것이다. 편집과 사운드와 현장 연출이 전혀 없는 다큐멘터리는 상상하기 힘들다. 많은 사람들을 울렸던 다수의 방송 다큐멘터리들이 <워낭소리>보다 덜 조작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지아장커의 말대로 카메라의 등장으로 현실이 언제든지 왜곡될 수 있다면, 조작의 탈피란 근원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그 조작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슨 웰스의 <거짓의 F>의 유명한 대사 “이 세상에 진실과 허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있는 것은 좋은 가짜(good fake)와 나쁜 가짜(bad fake)뿐이다”를 인용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 ‘좋은’이 넓은 의미의 ‘감동적인’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 가짜는 ‘좋은 가짜’이다. <워낭소리>를 만든 이충렬 감독은 그렇게 믿는 것 같다. “연출이 얼마나 개입된 것인지를 문제 삼는 사람들이 많은데 중요한 것은 어떻게 표현되었느냐와 관객이 무엇을 느끼도록 하느냐가 아닐까요.” 이 작품을 보러 온 많은 관객도 그 견해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양식의 인지’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작품 앞에 섰을 때 그것의 양식에 대한 일정한 인지 없이 그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895년 최초의 영화를 보기 위해 그랑카페에 모여든 관객이 스크린에 도착하는 기차를 보고 혼비백산해서 뛰쳐나간 것은 그 인지가 전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의 관객이 많게는 수백명씩 죽어나가는 재난영화를 보고도 즐거울 수 있다면, 실제로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다큐가 실재의 기록이어야 한다는 ‘약속’

 

그런데 그 인지에는 일종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 그 약속은 창작가가 감상자에게 공식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약속이 지켜지기를 기대하고 그 약속 안에서 작품을 감상하며 그 약속이 깨졌을 때 혼란에 빠지거나 때로 배신감을 느낀다. 재난영화에서 실제로 사람들이 죽었다고 가정해보면 그 후유증을 짐작할 것이다. 좀더 간단한 사례가 있다. TV 오락프로그램인 <패밀리가 떴다>의 대본이 공개되었을 때 시청자 사이에 논란이 일었다. 그 프로그램은 ‘리얼 버라이어티’로 소개되었고 그것은 세밀한 각본 없이 출연자들의 즉흥적인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진 양식이라고 인지되고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그게 다 연기였던 말인가”라고 배신감을 토로한 사람들은 인지된 양식의 약속 안에서 그 프로그램을 즐겼던 사람이었다. 물론 “재미있으면 되지. 대본이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인가”라는 견해도 있었다. 이 견해는 <워낭소리>를 두고 “감동적이면 되지. 연출이 얼마나 개입되었든 무슨 상관인가”라는 견해와 통할 것이다.

 

누구나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어느 쪽이든 선택할 권리가 있다. 더구나 많은 ‘감동적’ TV다큐멘터리들에는 적용되지 않았던 엄격한 잣대가 애초에 방송용 다큐멘터리로 기획된 <워낭소리>가 극장에 걸렸다고 해서 갑자기 적용되어야 할 근거도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한쪽 편에 설 수밖에 없다. 반복하자면 이것은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약속의 문제이다. 다큐멘터리가 실재하는 삶의 기록이어야 한다는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물론 그 기록에는 작가의 주관적 반응도 포함된다. 사견으론 <송환> 이후 최고의 한국 다큐멘터리인 최하동하의 <택시블루스>는 택시기사인 작가 자신이 주인공이며 비루한 성매매에 자포자기의 태도로 이끌리는 충격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나는 그 약속 안에서만 시네마로서의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약속이 극영화와는 다른 경로로 진리의 지평을 향해 열려 있다는 점에서 원칙적으로 옳을 뿐만 아니라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실질적으로도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24시티>는 약속이 근원적으로 지켜질 수 없다는 자각을 전경화하며 자기만의 독법을 제시한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다큐멘터리의 약속, 어쩌면 그에겐 영화 그 자체의 약속에 대한 지아장커의 필사적인 질문이다. 그를 통해 지아장커는 역설적으로 약속을 지킨다.

 

리얼리즘에 충실할수록 환영성은 강화

 

그렇다면 <워낭소리>는? 이 특별한 다큐멘터리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단정하기에 앞서 그것의 방식에 대해 먼저 말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워낭소리> 역시 다른 독법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 독법은 너무나 혼란스러워 차라리 일정한 규칙이 없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물론 가장 중심적인 건 극영화의 독법이다. 이것에 관해선 정한석이 이미 세밀하게 지적했으므로(그는 “이 작품을 차라리 비전문 배우들을 동원한 극영화라고까지 부르고 싶어진다”고 했다) 여기선 한 가지만 덧붙이려 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10분쯤 지났을 때, 할아버지는 젊은 소를 사기 위해 소시장에 나온다. 할아버지의 정면숏 다음에 어떤 소의 숏이 이어진다. 그런데 카메라는 갑자기 빠른 패닝으로 약간 떨어진 곳의 소를 잡는다. 이것은 명백히 카메라가 할아버지의 눈이 되어 움직이는 주관적 시점숏이다(단순히 두 소를 보여주려는 의도였으면 이런 스위시패닝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시점숏은 등장인물의 시점과 관객의 시점을 일치시켜 동일시하도록 만드는 극영화의 방식이다. 별다른 기능이 없어 보이는 이 시점숏이 초반부에 등장했을 때, 나는 감독이 관객에게 이 영화를 극영화의 방식으로 보기를 권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태는 더 복잡하다. 다큐멘터리의 어떤 방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예컨대, 할머니의 인터뷰 장면들. 할머니는 카메라를 보고 할아버지와 소의 오래된 인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할머니의 진술은 장면이 바뀌어서 할아버지가 소와 밭을 갈고 있을 때도 계속된다. 그런데 그 말들은 묘하게도 할머니의 구시렁대는 혼잣말과 이어져 극영화의 방식으로 슬며시 이행한다. 게다가 할머니가 말하고 있지 않은 장면에서도 혼잣말이 나올 때는 방울이 흔들리지 않아도 방울소리를 내는 것처럼 어느 쪽도 아닌 일종의 환청이 된다. 할머니의 목소리와 워낭소리는 그 음원이 소리를 내지 않아도 우리 귀에는 들리는 것이다. 정한석은 이것을 환영성의 강화라고 표현했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망설여진다. 판타지는 말 그대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통칭하지만, 영화와 연관돼 말해질 때 환영은 현실을 재현한 이미지를 뜻하며 영화의 본질에 속한다. 현실적으로 보일수록 그러니까 방법으로서의 리얼리즘에 충실한 영화일수록 환영성은 더 강화된다.

 

따라서 할머니의 입과 목소리가 맞지 않을 때, 환영성은 오히려 훼손된다. 하지만 그치지 않는 워낭소리는 다르게 작용한다. 음성과는 달리 음향의 경우 음원과의 시청각적 동시성에 관객이 덜 주목하기도 하지만 방울이 눈에 띄게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를 내며 그것이 비교적 흔한 소리이기 때문에 새 소리나 바람 소리와 같이 일종의 주변음(앰비언스)처럼 들린다. 그러므로 워낭소리는 환영성을 해치지 않으며 때로 보완한다. 목소리와 소리에 관한 한 <워낭소리>의 방식은 엉성하고 뒤죽박죽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그것이 혼란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개별적 캐릭터이자 내레이터인 할머니가 자신의 심경을 효과적이고 때로 유머러스하게 전하는데다 필요한 정보를 적절하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관객은 방식의 혼재 자체로는 감상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 혼성적 양식(주로 방송 예능프로를 통해)에 익숙해 있는 것 같다.

 

차라리 ‘환청의 영화’라는 편이…

 

이 영화의 수사학이 있다면 그것은 환청의 수사학이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그러나 매우 조작적인 순간의 하나는 죽은 소를 묻고 나서 방에 누워 있는 노인을 비추는 끝에서 두 번째 장면이다. 화면 밖에서 워낭소리가 들리고, 끙끙 앓으며 눈을 감고 있던 할아버지는 눈을 뜨고 고개를 (아마도 마당쪽으로) 돌리려 한다. 우리는 노인이 귀가 매우 어둡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워낭소리에 반응하고 있다. 워낭소리는 정말 그때 울렸을까. 울렸다 해도 노인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까. 아마 그는 환청을 들었을 것이다. 주변음에 묻혀 있던 워낭소리는 이 장면에서 비로소 특별한 소리, 바로 소의 목소리의 환유로 관객에게 지각된다. 우리는 살아 있는 소가 울리던 워낭소리를 식별하지 못했지만, 소가 죽은 뒤 환청으로 비로소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 대목에선 <워낭소리>를 차라리 환청의 영화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이 영화에서 가장 수긍하기 힘든 것은 소의 눈물이다. 정확히 말하면 소의 눈물이 놓인 자리, 즉 편집의 문제다. 소는 두번 눈물을 흘린다. 한번은 할아버지가 소를 팔기 위해 소시장에 끌고 나가려 할 때이며 다른 한번은 잠시 뒤 소시장에서 소 거래인이 할아버지에게 소를 도로 끌고 가라고 소리칠 때이다. 나는 소가 코를 뚫을 때 눈물을 흘린다고 들었지만, 슬픔 때문에 우는지는 알지 못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이상하다. 소의 눈물장면은 두번 모두 소의 얼굴이 프레임을 꽉 채운 클로즈업 숏으로 커트된다. 이 편집은 할아버지와 헤어지게 된다는 사실에 소가 슬퍼했고 소시장에서 이젠 소 취급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더욱 슬퍼한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정작 소가 우는 숏에서 공간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과연 소는 그때 그 장소에서 눈물을 흘렸을까.

 

나는 그것이 정말 궁금하지만 감독에게 묻기 두렵다. 대답을 모른 채 나는 이 편집에 반대한다. 고백건대 내가 <워낭소리>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면은 바로 이 소시장 장면이다. 왜소한 80살 노인이 삐쩍 마른 40살 소를 데리고 와서 팔려고 한다. 사람들은 빈정대고 한 상인은 “이런 소 있으면 다른 소도 안 팔리니 빨리 데리고 가라”고 차갑게 쏘아붙인다. 이젠 고기값도 받을 수 없는 노쇠한 소, 30년을 함께 산 그 소를 더 먹일 기력조차 남지 않아 마지못해 시장에 끌고 온 병들고 휘어진 노인, 무지막지한 노동으로만 채워진 생의 마지막 문턱에 선 두 비루한 육체를 향한 세상의 냉소와 멸시. 우리는 노인과 소에겐 어떤 연출도 개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두 늙은 육체를 그 자리에 이끈 건 고단하고 힘겨운 삶 혹은 가혹한 운명밖에 있을 리 없다. 이 한없이 쓰라리고 슬픈 장면에 마침내 이르렀다는 사실만으로도 <워낭소리>는 비할 바 없이 소중한 기록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무표정에 인과관계를 덧입히지 마라

 

그러나 편집된 소의 눈물이 거기 놓이지 말아야 했다. 소가 정말 눈물을 흘렸다 해도, 그 장면은 편집 없이 그때 그곳에서 보여졌어야 했다. 이 편집은 정서가 풍부한 많은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슬픔을 전하는 데는 효과적일지 모르지만 편집의 마술이 동시에 기만술이라는 것을 아는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겐 이 영화가 이전까지 어긴 약속을 곧바로 상기시킨다. 정한석이 예리하게 관찰한 대로 이 영화에는 시선이 서로 맞지 않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상대 숏들, 그러니까 다른 시간대에 찍힌 것으로 추정되는 두 숏을 시간적으로 연속된 숏/역숏인 것처럼 이어붙인 장면들이 꽤 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시점숏과 마찬가지로 다큐멘터리의 방식이 아닌 극영화의 방식이다. 소의 눈물 숏이 과연 정말 그때 그곳에서 찍혔을까, 그 눈물은 정말 슬픔의 눈물일까, 하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떠오르는 의심은 약속을 어겨온 것에 대한 대가의 하나일 것이다.

 

또 다른 대가는 이 편집이 소시장 장면이 지닌 심원한 감정을, 상투적인 인과의 서사로 해소해버린다는 점이다. 노인과 소의 많은 공통점 중 하나는 그들의 무표정이다(노인은 한번은 사진 찍으면서 억지로, 다른 한번은 소 자랑하며 안쓰럽게 단 두번 웃고,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서 있기조차 힘겨운 몸으로 간헐적인 신음 외엔 어떤 불평도 없이 그들이 묵묵히 밭을 갈고 있을 때, 둘은 인간과 소의 경계를 넘어 운명적인 동반자처럼 보인다. 그토록 혹독한 노동의 세월을 다 보낸 그들을 맞이하는 시장에서의 비하와 멸시의 시선들 그리고 외로움. 좌절하고 슬퍼해야 마땅해야 할 그 상황에서조차 그들은 새겨진 듯한 무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다. 어떤 수사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릴 아득하고 뼈저린 무표정. 이때 곧바로 이어진 소의 눈물이 전시하는 즉각적 감정 노출은 이 비애의 심연를 돌연 패턴화된 감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마지막의 환청장면. 여기선 노인이 환청으로 짐작되는 워낭소리를 듣고 언덕에 홀로 앉아 상념에 잠긴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지만 그 수사학적 재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편집을 마찬가지 이유로 신뢰하지 못하겠다. <워낭소리>는 종종 심금을 울리는 순간에 이르면서도 다큐멘터리의 약속을 깨고 극영화의 편집으로 패턴화된 감정의 인과관계를 만들어내려 한다. 정한석은 이 영화의 많은 단점을 지적한 뒤에 “잠시 망설인 다음 껴안는다”고 썼다. 나는 반대로 거부할 수 없이 마음을 적시는 장면들에 흔들리면서도, 결국 껴안지 못하겠다.

 

 

 

 

4) 네오이마주 - [워낭소리]비극이기에 아름다운 로맨스 (빈장원)

 

     

 

[워낭소리] 비극이기에 아름다운 로맨스

필진 리뷰 2009/01/09 19:27 Posted by 네오이마주

빈장원

 

사랑은 비극이어라

 

사랑은 비극이다. 비극이기에 아름다울 수 있으며 눈물 흘릴 수 있는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극으로 시작해 비극으로 결말 맺는 참으로도 몹쓸 사랑이야기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만남 자체가 비극이었듯, 그들의 사랑 또한 죽음으로마무리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둘의 사랑을 아름답지 않았노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송희일의 장편 데뷔작 <후회하지 않아>의 두 주인공은 서로를 만난 것에 대해 한 순간의 후회가 없다. 사회라는 거대한 통념아래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을 나누는 그들의 만남 또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렇게 사랑이란 고통받고 슬퍼해야하며 죽음마저 감당해야 한다. 사랑은 비극이기 때문이다.

 

유사 관계망을 지닌<워낭소리>와 <쌍화점>

 

비슷한 시기에 본 <워낭소리>와 <쌍화점>은 장르는 분명 다르지만 너무나도 유사한 관계망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두 영화에 나오는 삼각관계망은 기존 우리가 익히 보았던 것과 조금씩 틀려 오히려 매력있다. <워낭소리>의 할아버지의 애정의 집착은 그와 더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할머니가 아니라 그가 부리는 소이다. 할머니는 매일 소만 생각하는 남편을 원망하며 자신의 인생을 한탄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 고생하는 건 생각지도 않으시고 소의 곁에서 떠나지 않는다. 

 

캐릭터가 다를 뿐 <쌍화점>의 구조 또한 비슷하다. 왕의 집착의 대상은 그를 보위하는 무사 홍림이다. 본연히 어여쁜 왕후가 곁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남자를 사랑하는 운명을 안고 태어난 왕은 왕후보다 홍림을 먼저 생각한다. 그런 왕후는 왕과 홍림의 관계를 맹렬히 비판하고 집착해야 당연하건만 별로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홍림과 세자 만들기를 위한 합궁 후에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음과 양이라는 육체는 속임도 없이 솔직하게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고 둘을 사랑하게끔 만든다. 그로인해 오히려 질투하는 사람은 왕이다. 왕은 어쩌면 <워낭소리>의 할머니와 닮아 있다. 오래송안 사랑했건만 사랑한 대상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른 곳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누구나 질투할 수 밖에 없는, 소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망울

 

<워낭소리>와 <쌍화점>은 그래서 비극적인 로맨스다. 이런 관계망 자체뿐 아니라 그들의 사랑이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왕과 홍림의 처절한 최후는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처럼 처참하다. 하지만 난 그들의 죽음을 바라보다 왕후이 눈물보다 <워낭소리>에서 늙어 죽어가는 소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망울이 더 애잔하게 느껴졌다. 말도 못하는 소 앞에서 할아버지 또한 아무말 없이 바라볼 뿐이다. 그러니 불만 가득 넋두리를 늘어 놓는 할머니의 함숨이 왕이 왕후와 홍림의 관계를 향한 질투보다 더욱더 강하게 와 닿는다. 자신보다 더 낭만적인 로맨스를 즐기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 아플까?

 

지독히도 비극적인, 그래서 아름다운 로맨스

 

소는 당연히 죽고, 남는 것은 할아버지의 사랑이다. 이 세상 어느 남녀, 불행하겠지만 어느 동성간의 사랑이 이보다 더 간절할 수 있을까? 할아버지는 '소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어야지'라고 말한다. 물론 그 말이 현실화되진 않는다. 현실은 현실이니까. 그래도 육은 살았지만 영은 죽어있으리라. 할아버지의 영혼은 소를 따라 저 세상으로 긴 여행을 떠났는지도 모른다. 소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겠다니? 생각해 보면 이 말은 멜로 영화 속에서 사랑하는 여인이 죽을 때 하는 대사다. 그것도 할아버지는 서스럼없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말하듯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마치 로미오의 죽음을 보고 자신도 생을 마감하는 줄리엣처럼. 사랑은 이런 것이다. 그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이 있고 설레여하는 사람이 있으며 종국엔 죽음도 있다. <워낭소리>는 감동을 주려는 다큐가 아니다. 인생을 보여주는 작품 또한 분명 아니다. 이것은 멜로 영화다. 지독히도 비극적인, 그래서 아름다운 로맨스다

 

 

 

5) 오마이뉴스 - 세상사 공존의 이유를 발견하다  (한상철)

 

 

 

<워낭소리> 세상사 공존의 이유를 발견하다

 

[오마이뉴스 한상철 기자]

 

 

경북 봉화의 팔순 촌로와 마흔살이 다된 늙은소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타리 영화 < 워낭소리 > 는 영화 평론가 정한석의 지적처럼 페이크 다큐멘터리에 가깝습니다. 다큐멘터리지만 사실은 의도적으로 특정사실 부문을 중심으로 영상과 스토리 자체를 편집한 영화란 뜻입니다.

 

< 인간극장 > 류의 프로그램이 출연자들의 삶의 연속선상에서 다양한 생활의 순간들을 기록한 것이라면 < 워낭소리 > 는 농부 최노인(최원균)과 그의 아내(이삼순), 마흔살 먹은 늙은소라는 삼자를 등장시켜 이들 중심의 이야기로 영화를 끌어가고 있습니다.

 

< 홍보도 전략이다 > 의 저자 장순욱은 PR기법 중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중에 하나가 '지그재그식 PR'이라고 말합니다. 신문에 다뤄진 내용이 이슈가 되면서 온라인이나 방송을 타고 다시 케이블에서 매거진으로 옮겨져 순식간에 이슈화되는 방법을 말하는데 < 워낭소리 > 는 1억원 남짓한 저예산의 독립영화에 불과하지만 '불통의 시대'란 시대적 기류를 타고 제작자들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지그재그PR에 성공한 운좋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워낭은 소의 목에 달린 방울을 말합니다. 영화 제목에서 말해주듯 워낭은 귀가 어두운 촌로와 늙은 소를 연결해주는 매개체입니다. 늙은소를 팔아버리자는 아내의 잔소리는 최노인의 귀에 들리지 않지만 워낭을 통해 늙은소가 전하는 진심을 최노인은 정확하게 알아듣고 있는듯 합니다.

 

40년 세월 주인과 함께한 영화속 '늙은소'는 사실상 노동력을 상실한 상태지만 자신을 믿어주고 위해 주는 주인을 위해 오늘도 논으로 밭으로 굼뜬 발걸음을 옮깁니다. 서로의 앙상한 몸이 힘겹지만 최노인에게도 늙은소에게도 함께하는 노동은 그들 존재의 이유입니다.

 

최노인이 장터에서 술에 취해 잠들면 수레에 몸을 실은 채 수킬로미터 떨어진 집으로 찾아오고 주인은 소를 위해 논이며 밭에 농약을 치지 않습니다. 늙은 몸을 이끌고 직접 소가 먹을 소꼴을 베지만 남들처럼 편하자고 사료로 소를 키우지 않습니다. 늙은소를 대체하기 위해 새로 들여온 젊은소가 늙은소에게 횡패를 부리면 기다란 막대기로 혼내며 애타하는 촌로의 사랑에 마음이 아립니다.

 

소의 평균 수명은 길어야 15년을 넘기기 어렵고 육우로 사용되는 소는 30개월 이내에 도축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주인공 '늙은소'는 기대수명을 넘겨 장수한 셈입니다.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주인의 속깊은 사랑과 보살핌이 주요했을거란 생각입니다.

 

영화는 참으로 담담합니다. 필름으로 촬영하지 않은 화면은 거칠고 영화속 촌노와 촌부의 삶은 투박하다 못해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영화흥행소식만을 듣고 세련된 영상미를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거친화면에 깜짝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담담한 화면전개와 연출되지 않은 촌노와 촌부의 대화는 후반부까지 변함없어 극적반전이나 대단한 클라이맥스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역시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친 화면, 연출되지 않은 모습 그대로면서도 영화는 충분히 감동적이고 울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 워낭소리 > 속에는 최노인의 진심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심하게 앓은탓에 앙상한 다리는 마흔살된 늙은소처럼 제대로 걷기도 힘들지만 최노인은 소를 의지삼아 기어서라도 농사를 짓습니다. 힘들게 농사짓는 주인 곁에서 눈을 껌뻑이며 주인을 지키는 소에서 오랜 친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아내와 9남매의 성화에다가 본인의 건강이 악화되어 더이상 늙은 소를 감당할 수 없어 맘에 없던 장터에 나간날 60만원에 사겠다거나 거저줘도 안사겠다는 흥정꾼들에게 500만원은 줘야 팔겠다고 큰소리 치는 주인의 마음에 영화의 주제가 담겨있습니다.

 

장터 술자리에서 한잔술을 앞에두고 술친구들에게 늙은소와의 추억을 말하는 최노인의 얼굴엔 아이처럼 행복한 미소가 가득합니다. 최노인은 늙은소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 싶었던게 분명합니다.

 

잃어버린 10년이니, 강부자니, 경제살리기니 정치인들이 지난 대선에서 던져준 말의 성찬들이 특정계층을 옹호하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책이란 사실을 확인하는데 1년이 걸리지 않은 요즘 < 워낭소리 > 는 그래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최노인은 농사를 위해서 그리고 불편한 다리를 대신할 단거리 이동을 위해서 그리고 재산증식을 위해서 '소'가 필요했습니다. 그의 목적은 이땅의 다른 농부들과 별반 다를바 없었지만 그의 마음가짐은 달랐습니다. < 워낭소리 > 의 영어 제목이 'Old Partner'란 사실에서 알수 있듯이 오랜세월 함께 공존할 친구로 소를 본것입니다.

 

바쁜 농사일 틈새로 새참을 먹는 시간 노인이 먹는밥, 한사발의 막걸리는 늙은소도 함께 먹습니다. 부족하지 않게 먹이를 주지만 너무 과하게 먹어 탈이 나지 않도록 새심하게 배려하는 최노인에게 늙은소는 죽마고우이자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동반자입니다.

 

노구에는 너무나 힘든 거친 밭일 , 쉴새없이 자라는 잡초를 다뽑기에도 늙은 몸은 힘들지만 소의 먹거리를 위해 최노인은 자신의 밭에는 전혀 농약을 치지 않습니다. 영화 후반부 한가득 땔감을 베어오던 촌로는 지치고 병든 소를 위해 짐을 나눠지고 소가 끄는 수레를 타지 않은채 함께 걸어 집으로 옵니다.

 

가난하고 병든몸이지만 9남매를 농사로 모두 출가시킨 촌로에겐 남들보다 뛰어난 학력도 재산도 없지만 소와의 공존을 통해서 함께 사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시끌벅적한 세상사 최노인이 몸으로 설파한 공존의 이유가 이 시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립니다.

 

다른사람보다 좀더 가지고 좀 더 앞서기 위해 비난하고 계략을 일삼는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공존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 워낭소리 > 는 청량한 산사의 풍경소리와 같습니다.

 

 

 

 

*워낭소리 위키 - http://ko.wikipedia.org/wiki/워낭소리

* 공식 블로그 - http://blog.naver.com/warnangsori

* 2009년 9월 24일에 발간한 책 '워낭소리'

 

- 알라딘의 책소개

 

 

*미디어스 - 네티즌 선정 최고작품 '워낭소리'

 

*미디어 오늘 - MB, 워낭소리가 뭔지나 아세요?

 

* 씨네21 - 일본에서도 워낭소리 울리네

 

* 프레시안 - 워낭소리 이충렬 감독, '영진위, 저질 개그했다'

* 링크하고 나서 - 2010년 9월 2일 덧붙임

 

 

진보넷 블로그에 있던 '워낭소리' 감상(소감? 후기? 영화평? 등등) 들을 다시 읽어보니, 불편하거나 의아했던 분들이 대부분이고 드문드문  좋은 영화라고 같이 보자고 강추하는 분도 있다. 독립영화를 제작하고 있거나 미디어 관련 일을 하는 분들 중에서 관련글을 두 개 이상 작성하면서 처음부터 의문이 있었던 부분을 조금씩 발전시키는 분도 있었다. 처음에는 이 영화에 대해 칭찬했다가 나중에 여러 사람들이 불편한 점을 지적하자 그제서야  처음부터 불편했다는 듯이 슬그머니 부정적인 평가를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독립영화를 만드는 이였는데도 그랬다. 이 중에서 '하루'의 글이 가장 인상적이었고, 가장 솔직하게 다가왔다.

 

워낭소리 이후 독립영화 관련기사들을 살펴보면,  일반 상업영화와 마찬가지로 관객수와 수상(특히 해외 유명 영화제) 여부에 의해 기사화되느냐 마느냐가 판가름되는 상황에 놓여있다. 이것은  '읽을만한 정보'를 철저하게 서열화해서 선택하는  언론의 생태에 의해 이미 예전부터 그래왔고 앞으로는 더 노골적으로 그러하리라고 예정되어 있었던 길이지만, 워낭소리가 만든 좋지 않은 영향력 중 하나일 것이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고, 와중에 한국독립영화협회에 여러 사람이 연명해서 정식으로 문제제기한 일도 있었는데 어떻게 마무리가 되었을까. 논란이 일던 게시판은 닫혔다. 이 협회의 회원이 아닌 이들은 , 협회에 직접 전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보내거나 만나거나 해야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볼 수 있다. 그래서 적어도 나는 그 결과를 모른다. 기자회견을 열어 대대적으로 밝혔던 '워낭소리 수익금 30%를 독립영화 발전에 기증' 한다던 호언장담은 어떤 방식으로 지켜졌나. 거기에 대해서도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다.

 

지금 독립영화계에서 '워낭소리'라는 어떤 영화(이 영화가 왜 독립영화인지 , 어떻게 그  많은 독립영화제에서 상영작으로 선정될 수 있었는지 정식으로 묻고 싶다.)가 왜 관객들을 불러모았는지 분석하거나  비판하려는 시도는 찾아볼 수 없다. 분명 정리하고 넘어가야할 내용들이 있으나 아무도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고영재의 프로듀싱을 받고자 하는 독립영화 감독들이 점점 늘어난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심사를 맡는 등 그의 영향력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한국독립영화협회의 사무총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작사 느림보'라는 개인회사를 운영해서 한 영화를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홍보하는 활동을 한 것은 아무도 문제삼을 수 없을만큼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당한 일이었던 걸까. 단지 내가 너무 멀리 있어서 자세한 소식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실제로 일어나야할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는 중인가. 답답하고 궁금하다.

 

 

2010/07/14 09:01 2010/07/14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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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은 잘 안들어가던 사이트 중 하나다. 최근에 자료 찾을 일이 생겨 자주 접속하게 되는데, 아래 소개한 글을 읽으면서 숨이 턱 막혔다. 회피하거나 비아냥대거나,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도록 스스로 억압했거나, 아무 상관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던 길고 긴 시간들이 아래 올라온 글들로 인해 수면 위로 다 올라와 버렸다. 괜찮다. 더 늦으면 안되지. 혼자 간직했던 기억들을 볕에 내놓고 나도 나름대로 먼지를 털어야겠다. 이런 글을 써올릴 처지는 아니니까 그저 조용히. 다만, 여성의 입장에서(혹은 학교 안에서 생협이나 부분계열 운동에 속했다고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어떤 사람들, 그리고 학교 밖에서 길을 냈던 사람들 중에서)누군가 한마디 더 해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다.

1.조병훈의 글 



"왜 진보신당에 입당 안해?"
[진보, 야!] 젊은 이들 입당할 맛 안나게 하는 논쟁

 

 

"당원이에요?" 요즘, 사람들을 만나면 적당할 때 정당에 가입했냐고 물어본다. 상대가 대부분 젊은 사람들 중에 정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에 제한되긴 하지만, 안 그런 사람들에게도 기회를 보았다가 슬쩍 물어보기도 한다. 지방선거 이후 정당에 대한 입장이 바뀌는 변곡점을 찾아보고 입당을 독려하려는 속셈인데, 유행까지는 아니지만 상징성 있는 그룹들이 입당을 고려하는 중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젊은이들과 입당

80년대에 태어난 젊은이들과 진보정당 입당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면 어느 당에 가입할 것이냐 하는 문제보다 정당 가입 여부가 더 중요한 질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전통적인 좌파들은 정치운동의 약화가 동구 사회주의의 붕괴를 본 좌파 운동권의 와해로 득세한 90년대 자유주의 계열의 운동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2000년대에 20대가 된 젊은 세대의 눈에 비친 사회에는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의 갈등이라기보다는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억압하는 기득 권력이 있었고, 이에 대항하는 그룹으로 노동운동 전통에 있던 운동권과 각 부문으로 나뉘어 활동을 시작했던 시민운동이 있을 뿐이었다.

기득 권력에 대항하는 대학 내 그룹이었던 이른바 '학생운동권'은 NL과 PD로 나뉘어 단과대와 총학생회를 잡으려고 경합하고 있었지만, 2000년대는 이미 이들에 대한 관성적 지지조차 신자유주의 경쟁의 바람에 의해 줄어드는 상황이었고, 학내 민주화나 다양하게 촉발된 지역, 혹은 부문별 시민운동의 요구가 새롭게 등장한 시기이기도 했다.

기존의 학내운동권이 권위를 상실한 것은 학생사회에서 제기된 두 가지 주요 문제에 대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IMF 이후 대학에 생존형 경쟁이 가속되면서 대학이 투쟁의 전위여야 하는가에 대한 보수주의 학생들의 전통적인 비난과 함께, 다양한 부문으로 분화된 저항운동의 요구를 학생회에서 포괄하지 못했다는 비난이 그것이었다.

두 가지 다른 진영의 비판이 학생사회의 민주화라는 어쩐지 미심쩍은 주장으로 학생운동권을 공격하는 형국이 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수배까지 받고 있던 지도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집행부 중심일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학내운동권으로서는 외부와 내부의 두 가지 저항을 해소할 여력이 없었고, 점차 기득 권력에 친화적인 '비권'들에 권력을 내주는 빈도가 잦아지다가 결국 잔류하던 기존 운동권도 '비권'과 같은 공약을 내걸지 않고는 학내 권력으로 생존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대학 운동권 권위 상실 이유

특히 두 번째 문제는 학생운동권이 지도부 중심 운영과 함께 학내의 또 다른 권위주의를 야기한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새로운 활동가를 재생산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이탈한 학생들은 학교 밖으로 활동영역을 바꾸어 '광역화된 부문운동'으로 분화되었다. 이 시기에 각 시민사회가 대학생이나 청년단위를 만드는 등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면서 '시민사회단체 인턴'이라는 특이한 유행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시민사회 인턴십의 경험을 대학에서 학점으로 인정하거나 기업의 취직 요건에 포함시킨 것은 자본을 위시한 기득 권력의 발 빠른 대응이었던 반면, 피해자 의식이 강했던 학생운동권은 이탈에 속수무책이었으며 이들을 '부르주아 자유주의 운동'이라며 오히려 격리했다.

당시 민주노동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정책연합 등을 위시한 연대활동을 이어왔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학생사회는 학내 학생회 집권을 목표로 하는 학생회그룹과 학생회그룹의 '꼰대로움'에 질려 대학 밖으로 자리를 옮긴 학생 개개인으로 분리되었다.

정치적 연대가 형성되는 것은 각 그룹이 동시에 '연대 필요'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대학에서 이루어진 저항적 학생들의 분리는 "학우대중의 지지가 줄었다"는 애매모호한 외부 요인 탓이라기보다는 학생운동권 지도부가 기득 권력과 자신 모두에게 비판적인 학생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구조변혁을 하지 않는 것이 이익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학생 운동권의 기득권 유지

  실제로 NL과 PD 사이의 경합에서 살아남은 학생운동권은 조직능력이나 학교당국과의 협상능력의 우위를 내세워 '등록금 투쟁'을 전문으로 하는 소수의 조직운동집단으로 생존을 유지했는데, 학생회 선거에서 패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비권'과의 차이가 희미해졌지만, 예의 비판적인 학생들이 학생회 선거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운동권 완장'은 유지됐다. 그러나 라이벌을 상실하자 자신의 세도 빠르게 줄어들었다.

다행인지 학생운동권의 몰락이 바닥을 칠 때 즈음 이명박 정권이 등장하면서 학생운동권과 학교 밖으로 흩어졌던 젊은이들의 '연대 필요'가 공유될 기회가 다시 생겨났고, 거의 동시에 등장한 20대 담론이 이론적 근거로 제공되었다.

구체적 배경으로는 학생회 선거에서 위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보수주의그룹에 대항하기 위해 뒤늦게라도 구조변혁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을 시작하는 한편, 자신이 선택한 부문운동 내에서 세대차별을 경험한 청년들이 자기조직화의 필요를 찾은 것이다.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문화 부문에서 활동하던 이론가나 활동가, 문화와 생태를 기치로 건 대학 총학생회 선본의 출현, 철거와 농성현장에 달려가는 음악가 등을 매개로 분리된 활동영역이 연대하기 시작했다. 2010년 두리반에서 열린 노동절 파티는 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런 움직임이 즉각 견고하고 강력한 연대를 보장하지는 않았다. 20대 담론에 대한 반응은 즉각 20대 내의 계급 차이며 문화적 차이에 따른 20대의 다양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20대가 다 같은 20대가 아니다'는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 연대를 방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뚜렷한 입장 차가 있을 때 연대의 필요와 가능성도 보다 명확하게 도출될 수 있다.

  20대의 전면적 연대

지금은 명박반대나 청년실업해결과 같은 다소 일반적인 목표를 공유하는 실정이지만 청년문제와 이어지는 구체적인 목표가 설정된다면 그 때가 이들이 전면적으로 연대하는 시점이 될 것이다. 이들에게 핵심은 '연합 우선'이 아니다. 공유할 만한 구체적인 목표나 정책위에서 나오는 전략이 중요하다.

덧붙여 주목해야할 것은 이들 서로간의 연대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들은 기존 학생운동권이 당시 새롭게 등장한 여성과 소수자, 환경, 평화, 문화 부문의 활동그룹들과 적극적으로 연합하는 대신 자기의 전통에 기대 수세적인 생존을 선택한 것이 결국 학생운동권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반성을 공유한다.

이를테면 이들의 연대는 공통적인 메커니즘이 만들어내는 더 다양한 문제에 저항하기 위한 연대이고, 필연적으로 새로운 지향을 요구한다. 조금 더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지지율이 올라간다거나 "대세를 위해 연대해야 한다." 따위의 수를 부리면 상대가 코웃음 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선거 후 진보신당을 둘러싸고 터져 나온 논의 중 어느 쪽이건 정권교체를 위해 정치 연대에 나서야 한다는 것을 원천 반대하는 것 같지는 않다. 어떤 식으로든 선거 연대는 필요하다는 동의에 기초해서 통합당으로 갈 것이냐 각각의 정당을 유지할 것이냐를 두고 논쟁하고 있는 상황인데, 워낙 작은 동네다 보니 서로 잽만 날리면서 우왕좌왕이랄까.

급기야 조용하던 분들까지 힘을 보태려고 가세하는 형국인데, 대부분은 해묵은 욕잔치가 되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통합론이나 독자론 모두 그다지 새로운 당원을 염두에 둔 논의가 아니라는 것이 더 답답하다. 솔직히 새롭게 입당을 고려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냉정하게 보면 지금 상황은 “이래서야 입당할 맛 나겠냐?”소리가 나오는 상황이다.

어쨌거나 2000년대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을 주로 만나다보니 대개 그들에게 “당원이야? 왜 진보신당에 입당 안해?” 라며 묻는다. 글쎄,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답을 내리시겠는가? (2010. 7. 5)

 

 

 2. 홍명교의 글

 

 

   무지한 반성이 '학생운동 위기' 지속시킨다
[조병훈 비판] “‘운동권’도 ‘위기’도 없다…정치 실종시킨 선거정치 문제"

 
 
이 글은 조병훈씨의 “왜 진보신당에 입당 안해?”라는 글에 대한 비판이다. 학생운동의 몰락에 대한 조병훈씨의 해석은 그의 정치적 ‘당파성’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지만, 일종의 협소한 ‘정파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 조병훈씨와 동일한 견해를 갖는 입장은 꽤 많이 접했지만 열에 아홉은 항상 진보신당 당원들이었거나, 스스로를 ‘자유로운 개인’으로 규정하는 것에 나름의 자부심을 갖는 것처럼 보였다.

4년 전인 스물네 살까지도 나는 어떤 학생운동 단위에서 활동했지만 저와 같은 입장을 대할 때마다, 그들이 스스로 ‘20대 일반’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결국 그들 역시 하나의 정파성을 띤 ‘그룹’으로 드러날 뿐이라고 생각했다. 본래 정치-행위란 ‘입장’을 중심으로 발현되고 밝혀지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그룹’은 표면적이건 표면 아래에서이건 생성될 수밖에 없다.

'일반'을 대변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그룹'이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실체 없는 유령을 자꾸 끌어들이게 되는데, 그건 다름 아닌, '기존 운동권'이다. 사실 이런 실체 없는 대상을 놓고 뭔가를 이야기한다는 건 굉장히 넌센스한 일이다. 아주 한동안 소위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이 실체 없는 대상을 반대급부 삼아 재미를 보아왔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럴까?

오늘날 조병훈씨가 ‘부정적인 것’으로서 호명하고 싶어하는 ‘대상’으로서의 '기존 운동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전국적인 규모에서 움직이는 안에서의 일군의 민족주의 학생운동 진영과 소수의 알튀세르주의의 이론적 논거틀에 친화적인 좌파학생운동 그룹, 진보신당보다는 좀 더 조직적인 사회당의 학생단위, 그리고 동아리 수준에 머무르는 여타의 수많은 그룹들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까 조병훈씨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호명하며 부당대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안이한 인식인가. 오히려 조병훈씨야말로 홀로 2000년대 초반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학생정치조직을 만들어 학생운동을 전개하려는 그룹들은 더 이상 90년대 후반 한총련 해소 논쟁을 경과하던 시기처럼 ‘학생운동 위기’ 담론을 나누지 않는다. 때로는 자조적으로, 때로는 자책하며, 또 한편으로는 암울하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더불어 소위 “학생운동 위기”담론은 그 위기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오랜 시간동안 지속된 바 있다. 그러나 더 이상 '학생운동 위기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존재하지 않는 것을 두고 이야기를 꺼낸 글에 대해 굳이 반박해야할까 나는 무수히 고민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아무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위기’란 뭔가 활발했던 시기를 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선언이지만, 이제 더 이상 그들은 학생사회에 존재하지도 않고, 따라서 지금은 ‘위기’라는 이름으로 명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리어 우리는 근간에 학생운동 그룹들이 소위 진보진영, 시민사회, 진보학계의 담론과 함께 어우러져 고민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그런데 참 황당한 것은 대체 10년 전 이야기를 왜 여기서 하는 것인가. 2001년쯤에 나왔을 법한 글을 말이다.

 10년쯤 때늦은 이야기

 어쩌면 바로 그 점이 오늘날 진보신당의 암울한 상태를 드러내는 게 아닐까? 이 ‘이론적’ 안이함! (나는 이것마저도 ‘공부하지 않는 게으른 활동가’의 오래된 전형이라고 비판하고 싶다.) 운동의 ‘위기’에 대한 협소한 인식과 분석, 그리고 실천에 대한 몽매한 부당대립. 만약 내게도 '기존 운동권'이란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러니까 항상 ‘부정적인 것’으로서만 호명되는 그 유령이 여전히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조병훈씨를 통해서였음을 고백하고 싶다.

수 년만에 나는, 조병훈씨를 통해 '기존 운동권'을 보았다. 그는 15년간 쌓여온 무수한 ‘학생운동 위기 담론’의 역사적 전개 자체를 몽매하게 뭉개버렸다. 만약 그가 ‘20대의 새로운 운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위기’ 자체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위기’ 자체를 오로지 '기존 운동권'이라는 유령의 책임으로 돌린다.

 그러나 어쩌면 ‘위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기’ 자체를 도덕적인 문제로 환원시키는 도덕주의자의 태도가 아무 사정없이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병훈씨는 학생운동의 위기가 흩어지는 개인들의 다양한 욕망을 살피지 못하고 차단된 정파들의 지도부(?)에 의해 자기변명과 옹호만 하려했기 때문에 확대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것은 ‘학생운동 위기’를 바라보는 몇 가지 원인 분석 중 하나로써 오랫동안 위기담론을 맴돌던 해석이다. 이 ‘도덕적 비판’은 ‘학생운동 위기론’이 제기될 때 가장 먼저 등장한 것으로, 오랫동안 학생운동 활동가들의 화두였다. 90년대 중반 이래 학생운동 진영에서 생산된 아주 무수한 텍스트들에서 그걸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유명한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이나 '한총련은 역사적으로 해소되었다!'부터 시작해서 거의 모든 대학의 교지들, 학생운동 그룹들이 펴내는 신문과 팜플렛 등등. 그러나 이 도덕론에 입각한 자기비판도 당대에 그들 각자에겐 아주 유효했겠지만 오늘날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더 이상 도덕적 반성의 주체도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아주 단순한 표층적 진리만을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피스톤 운동이랄까. ‘단절’없는 이런 순환이 지겹다. 언제까지 우리 주위를 맴돌 것이란 말인가.

 이제 도덕 반성의 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더불어 조병훈씨가 도덕주의적으로 매도한 '기존 운동권'의 폐쇄적 태도는 어느 조직에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폐쇄적이어서 그들이 망한 것이라면, 그건 오직 그들의 업보이고 그들이나 혹은 그들에 이어서 그 당파의 운동을 펼치는 후배들이 뒤집어쓴 과오로 남았을 뿐이다. 조병훈씨가 결국 조병훈씨 말처럼 그 범위에 수렴되지 않는 여러 ‘개인들’이 외부로 가서 나름의 흐름을 만들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그런 식의 비난은 아예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조병훈씨 개인의 트라우마만 상상하게 할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진정 중요한 건 다른 문제이다. 우선 어느 조직이든 원 외부에 존재하는 다른 시선이 보기엔 모두 ‘폐쇄적’이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은 부차적이고 지나치게 일반적인 문제이다. 진실은 이데올로기 자체이다.

조병훈씨는 대체 어떠어떠한 점에서 ‘폐쇄적’이라고 느꼈는지 말하지 않고 있다. 이런 입장은 뻔하다. 그는 기존 학생운동 그룹들 중 특히 ‘레닌주의적 당파성’을 견지하고 있는 그룹들에 대해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글에서 “학생운동권 지도부가 기득 권력과 자신 모두에게 비판적인 학생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구조변혁을 하지 않는 것이 이익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자신이 지닌 급진좌파그룹의 운동에 대한 반감을 다소 악의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그가 무지한 점이 몇 가지 드러나는데, 실제로 좌파학생운동은 자기 안에서 무수히 구조변혁을 가해왔다는 점이다. 실제로 90년대 중반에 제PD계열 중 일부가 한총련 주류의 ‘주체주의’에 대해 비판하며 그 질서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전국학생연대’를 결성하였고, 97년 한총련 사태 이후로 “한총련 혁신”을 주장하던 제PD계열이 한총련에서 모두 빠져나오며 ‘전국학생연대회의’라는 제 좌파 그룹 연대체를 결성한 바 있다.

또 그 밖에 얼마나 많은 구조변혁 ‘시도들’을 볼 수 있는가. 03년 전학협 일부의 학생회 해소론, 몇몇 단위의 학생회운동과 자치단위 운동의 병행 선언 등등. 무수한 시도들이 ‘위기론’과 함께 전개되어왔다. 물론 우리는 결과적으로 실패의 역사를 바라보고 있다. 만약 조병훈씨가 조금이라도 더 성실했다면 이 실패의 역사를 두고 면밀하게 고찰해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정도도 살피지 않고 초지일관 몽매했다.

 몰라도 너무 모르는 조병훈

 다시 '기존 운동권'의 유령에게로 돌아와서, 과거 변혁적 학생운동 그룹들의 ‘정치’는 강고한 이념적 단결을 전제로 펼쳐지며 그것이 전제되었을 때 그 정파의 ‘틀’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건 어느 나라를 가건 마찬가지이고, 그런 룰을 정하는 건 그 단체 자유이다.

 예컨대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입 가능한 조기축구회가 있는가 하면, 축구를좋아하더라도 매회 참가를 약조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만 입회할 수 있는 K3리그급 조기축구회도 있다. 우리 아버지는 축구를 못해서 우리 동네 조기축구회에 가입 못하시고 분통을 터뜨리며 옆동네에 가입하셨는데 그렇다고 우리동네 조기축구회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게 그들의 조직론이라는 것을.

 다만, 논쟁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오로지 그 조직론이 가진 정치 그 자체를 두고 가능할 뿐이다. 레닌주의자가 아닌 조병훈씨에겐 소위 '기존 운동권' 그룹들이 폐쇄적인 패권 집단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어쨌단 말인가. ‘조직론’을 두고 이론적으로 논쟁할게 아니라면 고작해야 조병훈씨는 우파적 비난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조병훈씨는 좀 더 자유분방하고 누구나 가입가능한 진보신당에 가입하신 것 아닌가.

 물론 나는 ‘민주집중제’라는 레닌주의적 조직운영 방식에 대해 여전히 고민이 많다. 당적 운동에 대해서도 명쾌한 해답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무엇이 보다 더 옳을 것인가, 합당한 방법인가에 대한 고민 때문이다. 만약 조병훈씨가 좀 더 근원적인 문제로 다가가서 레닌주의와의 전쟁이라도 선언한다면, 그에 따른 논쟁은 유효해진다.

 그러나 그는 기껏해야 ‘도덕적 비난’을 가할 뿐이며, 그마저도 지나치게 추상적이다. 무엇이 폐쇄적이었는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더불어 그는 '기존 운동권'이 다양한 부문운동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이야말로 얼마나 몽매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인가! !

 비정규노동자 지원활동을 하는 '기존 운동권'

 우선 예를 들어, 고려대의 경우 <오마이뉴스>나 <프레시안>에 아주 새로운 개인들이 한 것 처럼 보도된 무수한 활동들이 '기존 운동권'이 새로운 시각으로 발굴하고 기획한 투쟁들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요컨대 오늘날 고려대학생행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그룹은 과거에 활발하게 학내 미화원 노동자들을 만나왔다.

 02년부터 일군의 진보적 학생들을 규합해 ‘불철주야’(‘불’안정노동‘철’폐를‘주’도할꺼‘야’)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이를 중심으로 학내의 200여 명의 시설관리노동자들을 만난 것이다. 처음에 이 문제는 50만 원도 되지 않는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을 중심으로 회자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과 연계되어 이후에 노조 결성의 밑거름이 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뿐만 아니라 이들이야말로 오늘날 여전히 ‘여성주의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으며, 과거 생활도서관 운동과 같은 학회학술운동, 자치공간확보를 위한 운동, 학내 스타벅스 입주에 대한 반대 활동들 등 조병훈씨가 부당하게 호명하는 '기존 운동권'들이 무수히 변신을 꾀하며 얼마나 많은 ‘부문들’에서 활동했는지 하나하나 열거하기에! 도 입이 아플 지경이다.

 그리고 이에 반해 진보신당의 20대 당원들께서는 자기 생활공간에서 얼마나 대중들을 열심히 만났는지 되묻고 싶다. 결국 나는 지금 다소 무리해서 위악적으로나마 ‘도덕주의적으로’ 묻는 것인데, 우리의 이런 질문은 끝이 없지 않겠는가? 정말 이런 “너는 얼마나 잘했는데?”라는 식의 도덕주의가 위기의 본질을 보게 하는가? 얼마나 우스운가?

 그런데 조병훈씨에게 진보신당 지도부의 폐쇄성은 왜 비판대상이 아닐까? 그건 진보신당 지도부의 이데올로기가 자신과 동일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얼마 전 지방선거 전에 있었던 5+4회의에 참가한 진보신당 지도부가 보여준 기이한 협상의 태도, 그 과정에 있었던 폐쇄성, 선거시기 심상정의 몽매하고 독단적인 항복 선언, 노회찬씨가 종종 드러내는 정치엘리트적인 태도들, 이 모든 것이야말로 진정 ‘폐쇄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는 왜 그걸 비판하지 않는가.

 아마도 그는 모르고 나는 아는 것 같다. 그건 그가 진보신당 지도부의 이데올로그들과 입장을 같이 하기 때문이고, 반면 여전히 당에 가입하지 않는 좌파학생운동을 비판하는 것은 그들이 조병훈씨와는 다른 이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은 이념 선택의 문제

 그런 점에서 조병훈씨의 '기존 학생운동권' 비판은 조야할 뿐만 아니라, 비겁한 면이 있다. 나는 그 점을 도덕적으로 매도하고 싶지 않다. 다만, 위기담론을 면밀하게 살피지 못하고, 우리가 거처하는 ‘학생사회’라는 곳을 한때나마 강하게 휩쓸고 간 ‘저항 이데올로기’(대중적 학생운동)에 몰락 상황에 대해 ‘이데올로기 비판’으로서 응대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불성실함’을 부디 ‘공부’로서 채워주시라고 말하고 싶다. 조병훈씨처럼 학생사회의 위기상황이나 20대의 대중운동 따위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활동하는 ‘정당 활동가’마저 이렇게 몽매하게 굴면 어쩌란 말인가.

 그가 학생운동 활동가들과 어떤 관계맺음을 맺었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의 특수한 경험에서 근거한 특수한 분석이 단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언제까지나 ‘학생운동권’을 악의적으로 호명하며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자기 정치를 세워내려는 부질없는 노력을 하려는 것일까.

 “왜 진보신당에 입당 안 해?”라는 질문으로 환급되는 그의 ‘정치적 행동-플랜’이 담겨진 그의 글만으로는 그의 정치가 대체 무엇인지, 그래서 대체 무엇으로 진보신당에 가입하지 않는 20대들을 혹하게 할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매력적이지도 않다. 조병훈씨는 글에서 ‘학생운동권’을 몽매하게 비판하고 있었지만, 실은 자기 정치의 빈약함을 드러내고만 것이다.

 물론 그가 내세운 입장들 중 일견 타당하고 귀기울일만한 것은 분명 존재한다. 요컨대 두리반 51파티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나는 그 파티를 준비하거나 공연에 참가한 몇몇 친구들을 아주 좋아한다. 저항의 경로를 새로이 발굴하고 있는 그들을 계속 응원하고 싶다. 또 아주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연대론-일반에 대한 입장도 일견 동의한다.

 그러나 결국 그가 이야기하는 그의 정치의 내용을 열심히 찾아보니, ‘선거’와 ‘입당 권유’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여전히 운동이 이론과 실천, 학습의 트라이앵글로 구성되는 것이라면, 그의 학습은 부재하고, 실천은 ‘선거운동’이며, 조직은 ‘입당 권유’이다. 정치는 실종되었고, ‘피스톤운동하는 객체들’만 남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평소에는 입당 권유하러 다니고, 달력보다가 선거시기 되면 선거 얘기하면서 선거운동판 가서 땀 흘리면서 춤추고, 선거 끝나면 자조적으로 ‘선거평가’하고. 오, 이런... 믿고 싶지 않다! 정녕 이것이 진보신당 20대모임의 ‘정치’란 말인가? 나는 지금, 조병훈씨의 글에서, 오늘날 이 땅에 만연한 ‘정치’ 자체의 위기를 본다. (2010. 7 6)

 

 

 

3. '구르는 돌'의 글

 

 

2010년 07월 09일 16:42

 

 

[홍명교씨의 글에 반론]

새로운 학생운동, ‘자유주의로 내던져진’ 이들에게 주목하자

- 김예슬과 고시생은 한 끝 차이다!




일단 제 족보부터 까고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2003년에 대학에 입학해 2008년 여름에 졸업할 때 까지 전국학생연대회의/전국학생행진(전자는 후자의 전신입니다)에서 활동했습니다. 말하자면 홍명교씨와 족보가 같은 셈이죠. 제가 부득이 본명은 밝히지 않지만 글을 읽다보면 제가 누군지 아실겁니다.


처음 홍명교씨의 글을 읽고 들었던 느낌은 ‘불편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글을 계속 곱씹어보다가 든 느낌은 ‘익숙함’이었습니다. ‘불편함’은 너무 오랜만에 만나보는 이런 날이 곧게 선 글을 읽는 것에 대한 감정입니다. 잘못하면 그 날 끝에 베일 것만 같은 공격성이 조금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찾아온 익숙함은 언젠가 제 자신도 그랬을 법한 자신의 것과 다른 입장에 대한 ‘구별짓기’ 때문입니다. 저는 조병훈씨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그의 정치적 입장이 어떤 것인지 판단할 근거가 없지만, 그를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개념으로 가둬놓고 집중포화를 날리는 홍명교씨의 모습은 저 스스로 얼마 전부터 단절하고자 노력했던 익숙함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자유주의자 김예슬’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제 주변에서는 오히려 은어처럼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약간은 비아냥 섞인 말을 더 많이 쓰곤 했죠. 대강 어떤 조직에도 속하지 않으려고 하고, 자기 욕망에 따라서 ‘제 멋대로’ 활동하려는 이들을 부르는 용어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날 이 ‘자유로운 영혼’을 대표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김예슬씨라고 생각합니다. 김예슬씨는 얼마 전 발간한 책에서 “우리는 충분히 래디컬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자신이 학생운동을 하는 선배들과 함께 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학생운동 선배들은 진정 래디컬하게 살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홍명교씨는 이렇게 말하는 김예슬씨에게는 어떻게 대답할 것입니까? 그에게도 “당신이 말한 학생운동 선배라는 집단은 대상없는 실체다”, “세상 어느 조직이나 다 그렇다”, “좌파학생운동이 그 동안 얼마나 변화하려고 노력했는지 당신이 알기나 아냐?”라고 말씀하실 건가요? 아니면 김예슬 당신이 공부를 안 해서 그렇다고?


김예슬은 비판하지 말아야 할 성역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알기론 홍명교씨는 김예슬의 대학거부 선언이 있은 후, 그녀를 지지하는 대자보를 학내에 게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홍명교씨는 김예슬씨로부터 삶의 용기는 얻었지만,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하게 된 현재 학생사회의 ‘조건’을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사실 부족하나마 ‘저항의 공간’으로 기능해 왔던 대학의 역사를 되짚어 볼 때, 김예슬씨의 선언은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85년도에 적발된 위장취업자 수만 해도 321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위장’취업자인 것을 감안하면 실제 규모는 그것의 몇 곱절은 될 것입니다. 그 이후로 규모는 줄어들었지만, 홀연히 학교를 버리고 노동현장으로 뛰어든 이들의 행렬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한 학생이 자퇴 선언을, 그것도 공개적으로 해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것일까요?


저는 이것이 학생운동의 쇠퇴와 정확히 비례하여, 그 위기의 최종점에서 터진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학생운동이 대학사회에서 건강한 세력으로 인정받고, 그들이 이데올로기가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이었다면 김예슬씨는 자퇴가 아니라 대학에 남아서 ‘교투’를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투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김예슬씨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교투에 관심없는 전국 수백만의 대학생 전부를 ‘무지한 자유로운 영혼들’이라고 비난해야 합니다. 그 결과는 지금처럼 학생운동만 전국구 왕따가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홍명교씨를 비롯한 소위 ‘좌파’가 고민해야 할 것은 왜 좌파운동이 이런 진보적 자유주의자들마저도 이해시킬 수 없을 정도로 대중과 융합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반성입니다.



90년대 위기의 연장으로서 2000년대 학생운동


그것이 한총련의 주체주의를 비판하며 또 다른 결집의 공간을 만들었던 좌파학생운동의 역사를 반추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저는 그것이 결코 성공적이지도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이런 얘기는 특정 학생운동그룹 내부의 비공개 세미나를 통해서만 교육되는 ‘자기 집안 역사’ 아닙니까? 그걸 모른다고 상대방을 비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는 홍명교씨나 제가 경험했던 2000년대의 학생운동은 90년대 위기의 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특정 학생운동그룹의 문제가 아니라 8,90년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학생운동 전반(NL/PD 할 것 없이 모두 다)에 해당하는 문제이고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생운동권의 자리는 게토화 되었지만, 그것 때문에 “운동권의 위기는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음은 물론이고 위기의 여진은 계속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예전에 레디앙에 기고한 “2000년대 학생운동에 대해 말하기”에서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전두환-노태우 정권을 경과하면서 운동진영은 규모 있는 대중동원이 가능한 학생운동의 힘에 많이 의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대중적 학생운동은 필연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로 인해 ‘학회-써클’이라는 지적공동체를 통한 학생운동은 ‘학회-학생회’의 틀로 대체됩니다. 이제 3,4학년이 된 활동가들은 학생회 간부로 충원되어 자기조직의 이데올로기에 맞춰 조합조직으로서 학생회의 임무와 정치투쟁체로서의 학생회의 임무를 동시에 책임지게 됩니다. 교조주의라는 혐의가 덧씌워지긴 했지만 어쨌든 대학사회의 보편적 이념으로 자리잡고자 했던 맑스주의는 이제 특정 조직을 재생산하기 위한 도구(학생회 수권과 활동가 재생산)로 전락하고, 이걸 ‘대중성’이라는 이름 하에 억지스럽게 학생회의 조합주의와 결합시킨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적 교조성과 조야한 대중성의 엉성한 조합인데, 이것이 학생운동 이념 자체의 역동성을 감소시킨 것은 물론이고 90년대 대중-상업문화의 폭발로 상징되는 대중 이데올로기와 융합되지 못했던 것도 모두가 주지하는 사실입니다.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中 장석준의 글 “필요한 것은 운동이다 : 90년대 학생운동의 비판적 회고와 전망”에서 참고) 2000년대 학생운동은 홍명교씨가 말한 좌파학생운동의 무수한 구조변혁 실천들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홍명교씨도 어느 정도 동의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자유로운 개인’들은 그룹이 아니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이렇게 드러나는 방식으로 기존 운동권을 비난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위기 속에서 부유하며 학생운동 조직과 융합할 기회도 없고, 또 그래야 할 이유도 없는 사실상 ‘자유주의로 내던져진’ 사람들입니다. 홍명교씨 말대로 조병훈씨 같은 ‘진보적 자유주의자’가 그룹으로 보이는 것은 ‘사회적 대세’가 되어버린 자유주의가 다소 ‘진보적인 방식’(?)으로 표면화된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유주의로 내던져진 사람들을 흔히 ‘자기계발 주체’라고 부르죠.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 속에서 스스로 삶의 돌파구를 찾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에게 목숨을 겁니다. 그래서 자격증도 따고, 멘토링도 하고, 해외 봉사 캠프도 다니며 자기 인생의 금고에 자산을 채워가죠. 그런 면에서 저는 ‘자발적으로’ 자퇴를 선언한 김예슬씨나 ‘자발적으로’(?) 고시공부를 택한 신림동 고시생이나 한 끝 차이라고 봅니다. 김예슬씨의 선택이 소중하기는 하나, 그것이 예전처럼 ‘민중해방’이라는 거대담론을 내걸고 있는 것이 아니라 “꿈꾸는 것조차 꿈이 되어버린” ‘자기’를 둘러싼 현실에 대한 비관이기 때문입니다.


김예슬씨는 그렇게 학원, 어학연수, 자격증 등 전단지의 홍수 속에서도 ‘자기’ 답을 찾지 못하고, ‘자기만의’ 주관식 답을 찾아 뛰쳐나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오직 ‘자기’라는 좁은 틀로 후퇴한 것이 아니라, ‘나눔 농사터에 세워질 진정한 삶의 대학’을 만들겠다면서 나눔문화라는 단체에 들어가 더 넓은 공동체를 지향했습니다. 자기 주체적인 ‘선택’에 의해 대학이 아닌 더 큰 공동체로 나아간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운동의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촛불집회 이후 늘어나고 있는 소위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자유주의적 객관식 답안지를 넘어 자유롭게 새로운 영토를 개척할 수 있게 하는 것 말입니다. 이를 위해 학생운동을 비롯한 기존의 사회운동들은 강령수준의 입장을 반복해 제시하는 것을 넘어서, 대안적 삶과 경제를 스스로 구성해내는 운동을 통해 대중에게 그 본보기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대안사회의 이념이라는 것도 이런 미시수준의 실천과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형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게 진보정당 가입하라는 선동으로는 가능하지 않음은 물론입니다. 저는 조병훈씨의 글이 바로 이렇게 자유주의로 내던져진 이들에게 진보정당이라는 ‘당위’만으로는 함께할 수 없음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렇기에 홍명교씨가 조병훈씨의 글을 통해 자유주의자 비판을 수행한 것은 참으로 부적절해 보입니다.



몇 가지 사족


사족이지만 첨언하자면, 저는 학생운동의 거점이 학생회는 물론이고 대학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학생운동의 목적은 대안적 지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육연한이 생애주기 전체에 걸쳐 확장되고, 대학이 아니어도 자본의 교육을 통한 노동력 재생산이 얼마든지 이뤄지고 있는 현재의 ‘평생학습사회’라는 조건에서 대안적 지적 공동체가 꼭 대학 안에서 만들어져야 할 필요도 없고, 어떤 면에서는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 내부에만 천착해서는 삼성 반도체 노동자였던 故박지연씨처럼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이들의 문제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절대 소수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대학시절 가장 후회되는 일 하나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한 후배를 억지로 동아리연합회 학생회장에 출마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교직이수를 해서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학생회 선거를 하느라고 학점이 미달되서 교직이수를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비싼 돈 내고 교육대학원을 다닙니다. 얼마 전에 그 친구를 만나니 나중에 선생님이 된 후 대안학교를 만들고 싶다고 하더군요. 저는 괜히 농이나 치며 나도 그 학교 취직시켜 달라고 했는데, 마음 한편으로는 그 친구의 꿈을 함께 꿔주지 못했던 나의 왜소한 학생운동의 기억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의 학생운동은 이렇게 ‘다른’ 꿈을 꾸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장광설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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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에 투고함. 아직 게재되지는 않음.

 

관련 글 :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9078

 

 

 

4. 양승훈의 글 

 

  

20대, 좌파, 학벌 그리고 돈
[진보, 야!] 조병훈-홍명교 논쟁을 읽고…"자유주의자라는 유령"

 
 
‘자유주의’ vs ‘혁명적 맑스주의’?

 지금의 구도는 홍 명교의 글만 읽어보면 마치 ‘진보적 자유주의자’ 조 병훈과 90년대의 언어로 ‘대장정/전국학생연대회의 /행진’ 출신의 ‘혁명적 맑스주의자’ 홍명교의 논쟁처럼 보인다. 전통적인 ‘문건’에 익숙한 사람들은 홍명교의 글이 ‘정합적’이라며 ‘개념 글’이라고 추어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과연 그런가? 일단 조병훈이 ‘자유주의자’를 말할 때 ‘전통적인 좌파’가 ‘자유주의 계열의 운동’을 공격했다는 표현일 뿐, 그는 ‘자유주의’적인 어떤 것도 자신의 입장으로 이야기한 적이 없다. ‘다양한 부문 계열 운동’의 구체적인 ‘자유주의적’ 양상들을 언급하지 않는 이상 ‘자유주의자’라는 말이야 말로 홍명교의 말처럼 ‘유령’에 불과하다.

 그리고 홍명교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면 홍명교는 ‘자유주의자’ 범주 바깥의 운동, 예컨대 1990년대 <문화과학>과 ‘문화연대’ 그룹 같은 문화운동 진영, 반자본주의적 청년 생태주의자 ‘KEY’ 같은 좌파 생태주의자 그룹, 학생회 바깥에서 다른 방식의 ‘일상의 정치’를 말하기 시작했던 급진적 여성주의자들 등에 대해 ‘몽매’하다고 표현해도 억울하면 안 될 것 같다. “이런 입장은 뻔하다”라고, 그리고 “불만이 많았을 것”이라며 ‘도덕주의’라는 단어를 동원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도덕주의적 비난’에 대한 이야기가 되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진정성’ 이야기만 남는 것은 아닐까. 어떤 조직이 진정성 있게 ‘학우대중’과 함께 했냐며, ‘자본주의’의 회로를 타격했냐며 논쟁할 것인가?

또한 홍명교가 생각하는 ‘자유주의’가 무엇인지 너무나 궁금하다. 그 근거에 대해서 입증 책임은 오롯이 홍명교에게 있다. 그것을 엄정하게 밝히지 않으면 ‘드잡이’만 하자는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학생운동권의 정황에 대해서 ‘알고/모르고’가 쟁점이 된다면 학생운동권 바깥의 모든 사람은 아무 이야기도 할 수가 없다. “내가 겪어서 안다”라면서 이야기를 계속할 것인가?

 ‘메이저 캠’이란 말

 그런데 여기서 올 초 있었던 ‘김예슬 선언’이 생각난다. 아니 정확하게는 김예슬 선언을 조명하는 기성 언론의 기술하는 태도 말이다. 힐난하는 태도의 평가라며 욕을 먹었지만 ‘김예슬이 고대생이 아니었다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가 담겨 있었다.

 2000년대 초반 학생운동 선거와 관련한 ‘집계’를 해주는 사이트들(예컨대 http://stunet.jinbo.net-지금은 불통-그리고 다음 카페의 ‘학생운동’ 카페 http://cafe.daum.net/HAKSANG )이 있었다. 그 집계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식과 늘 다른 결과들을 보여주었다.

 좌파 그룹의 학생 운동권은 늘 몇 학교(예를 들어 부산대, 상지대)를 제외하면 서울 인근의 몇 개 대학에서만 총학생회든 단과대 학생회 선거든 출마하고 당선이 되곤 했다. 절대다수 학교에서는 NL(한총련-한대련)과 비권의 경합이었다. 그리고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어떻게 되었나? 서울의 5~6개 학교만 ‘좌파’ 운동권이 남아있을 뿐 다른 학교에서는 아예 찾아볼 수도 없었다. NL도 다수이긴 하지만 거의 소멸했다.

 여기서 운동권에서 흘러 다녔던 ‘메이저 캠’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매번 어떤 운동권들은 ‘메이저 캠’에서의 학생회 선거 승리가 중요하다며 이야기하곤 했다. ‘유의미한’ 다양한 운동권들의 선거가 가능한 학교는 몇 개가 되지 않았다.

 1993년 한총련 출범 이후 NL이 한 번도 총학생회를 하지 않았던 학교가 서울대밖에 없었다는 점은 흥미로운 점이었다. 즉 굉장히 보편적으로 들리는 ‘NL/PD’라는 구도조차도 사실은 특정 몇몇 학교에서만 유지된 경향이었을 따름이다.

 가장 ‘좌파적’인 성향을 유지하려면, 한국사회에서 가장 ‘좋은’ 학벌을 갖춰야 한다는 이야기도 경험적으로는 성립이 된다.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학생 운동가조차 거의 없다. 이렇게 보면 몇 학교의 학생운동 이야기를 전반적인 ‘학생운동사’처럼 1990~2000년대를 기술하는 것이야 말로 판타지에 불과하지 않을까. 얼마나 많은 지역적인 차이가 있는가. 게다가 대학 바깥의 젊은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라면?

 20 대의 정치화와 돈

 좀 다른 시선으로 20대 혹은 젊은이의 ‘정치화’라는 걸 이야기 해볼 수도 있다. 역설적이지만 ‘정치화’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위에서 언급했던 ‘메이저 캠’이 아닌 이상 기존의 ‘운동’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통상적인 ‘운동가의 자질’을 언급하자면 말이다.

 '헌신’적으로 대중들(학생이든 아니든)과 함께 뭘 하려면 늘 돈이 든다. 2000년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등록금은 인문계의 경우 200만 원을 조금 상회했다. 그런데 지금 2010년 대학생의 등록금은 500만 원에 근접하고 있지 않나.

 거기에다가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과 술 한 잔씩 마시고, 나름의 ‘정치적 활동’을 하기 위해서 드는 돈은 한 달에 얼마씩 들까? 1년에 드는 돈을 추산해 보자. 1000만 원에 조금 못 미치는 등록금과 ‘활동비’. 결국 활동비를 벌기 위해서는 휴학을 하고 알바 하면서 돈을 벌거나 학교를 다니면서는 알바나 과외를 뛰어야 한다.

 여러 가지 종류의 알바를 하면서 학교를 ‘온전히’ 다닐 수 있을까? 그나마 과외가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조건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과외를 할 수 있는 조건은 서울에서는 ‘메이저 캠’ 몇 군대에 다니는 경우다.

 한 주에 2시간씩 두 번을 한다고 했을 때 받을 수 있는 과외비는 40~50만 원 정도가 SKY 대학과 몇 군데 ‘상위권’ 대학을 다닐 경우이고, 이른바 ‘중위권’ 대학을 다닐 경우는 30만원 이내인 경우도 태반이다. 아, 물론 ‘운동’을 하지 않아도 과외를 하고, ‘운동’을 할 경우에도 과외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현실적인 조건으로 학생이라는 신분과 운동을 동시에 재생산하기 위해서 물적 토대를 가장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과외 아니었나? 그런데 한 건으로 쉽지는 않을 것 같고 최소한 2개의 과외는 뛰어야 하는 상황, 아니면 엄마한테 받은 용돈을 보태거나.

 물론 ‘물적 토대’를 만듦에 있어서 자기 손으로 벌 필요가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중간계급’ 이상의 부모가 있는 경우다. 5월 22일 있었던 '분개한 젊은 래디컬의 비명'에서 권용만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혁명은 엄마 돈으로!”라는 말을 비웃을 수 있을까?

 바디우를, 지젝을, 랑시에르를, 고진을, 발리바르를 읽었거나 말았거나 이 문제에서 아무도 자유로워지지 않았고, 그 강박은 대다수에게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구조적인 불안정 노동과 취업대란 상황에서 운동을 접고 고시나, 취업 준비를 선택하는 것도 어쩌면 필연적이었다.

 그래서 결국 2000년대 이후 20대의 ‘정치화’와 관련해서 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 아무도 말하기 쉽지 않았지만 ‘돈’이었다. 학생회비를 연대하는 단체들 때문에 쓰거나, 어떤 정치적 ‘행동’을 위해서 쓸 때마다 여기저기서 문제가 되었던 것도 ‘운동’을 위해서 쓸 수밖에 없는 ‘운동권’과, 그 돈을 ‘학생들의 복지’를 위해 쓰겠다는 비권(비운동권)이 선거에서 붙었던 것이다.

 조병훈이 말하듯이 결국 어떤 정파의 운동권이든 학생회 선거를 할 때에는 ‘비권’과 닮지 않을수 없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인 과연 ‘비난’이기만 할까? 그리고 이는 1985년 근처의 ‘학도호국단’을 철폐할 때의 학생회를 부활시키고자 했던 이들이 ‘운동’을 말할 때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기도 하다. (이와 레닌주의적인 조직론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으나 이는 기회가 되면 다음에 하겠다.)

 학생회의 ‘정치화’가 늘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학생회에 기반을 두었던 학생운동들이 분해되어가고 것도 이해되지 않나.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 학생위원회 같이 정당을 경유하거나, ‘행진’처럼 다른 방식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른 방식의 운동, 개인들 그리고 좌파의 정치

 또 젊은 세대들의 ‘운동’ 전반은 학교를 경유하거나, 혹은 하지 않으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학교에선 기존의 ‘조합주의’ 운동으로 불리면서 맹비난을 받았던 ‘생협’도 재편되기 시작했고, ‘생태주의’라는 이념들을 흡수하면서 더 급진화되기 시작했다.그리고 그 안에서 다른 방식의 ‘반자본주의’ 운동을 꿈꾸는 코뮨주의자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박가분을 위시한 ‘공동생활 전선’이 바로 그렇지 않나?).

또 다른 방향에서 ‘20대 당사자 운동’이랄지, 시민운동, 생태운동 계열에서 ‘급진화’되면서 등장하는 조류들도 있다. 그리고 이들은 ‘자립’이라는 측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이념적 ‘급진성’보다 엄마와 떨어진 상태에서의 생활을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이랄까. 그 이야기들이 구체적으로 나와 논쟁이 나오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게다가 기존의 ‘정치적인 것’ 바깥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기 계발하는’ 주체였던 개인들이 조금씩 변하는 경우도 있다. 2008년 촛불을 계기로 진보 정당에 들어온 젊은 ‘개인들’이 있다. 이들을 ‘진보적 자유주의자’라고, 노빠 출신이라고, ‘강남 좌파’라고만 할 수 있을까? 다른 명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많은 20대들이 진보신당 언저리를 많이 거닐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많은 경우 여러 경향들의 젊은이들이 5월 1일의 두리반의 경우처럼 마주치면서 다른 방향의 ‘정치’를 상상하고 있는 듯하다. (이 ‘정치’에 대한 규정도 다음 기회에 이야기했으면 한다.)

 ‘자유주의’ 유령을 잡을 때가 아니라, 전통적 방식의 이야기 바깥, 지금까지 나오지 않은 ‘급진적 정치’ 이야기들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보이지 않던 ‘몫이 없는 자들’의 이야기가 등장해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오히려 기존의 진보정당과 단체들이 그들의 ‘생태계’와 어떻게 관계 맺을지를 잘 모른다는 점에 있는 것 같다. 정확히는 학생운동권이 문제가 아니라 ‘윗세대 활동가’들이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 아닐까. 그들을 기존의 좌파 담론의 프레임으로 분류하고, 평가하며 꾸짖는 습관의 문제 아닐까.

 이미 새날은 왔는데 해가 뜨지 않은 것만 같다. 그리고 당 내부의 젊은이들에게 진보정당은, 각종 진보적 단체들은 얼마나 ‘환대’를 하고 있는가? 매번 ‘자립적이지 못하’다며 뒷담화와 앞담화로 ‘20대 개새끼론’등을 외치는 좌파 단체와 진보 정당의 지도부는 과연 자기 공간 안의 젊은이들에게 얼마의 활동비를 주고 있나?

 ‘헌신’만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는 ‘문화적 감수성’이 중요하다면서 얼마나 많은 ‘문화비’를 주고 있나? 엄마한테 ‘의존’하는 헌신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삶의 존엄에서 조금 비껴나간 활동가들의 저소득의 ‘찌질한 삶’을 포장하는 것은 아닌가?
 

 

 

5. 홍명교의 재반론

 

 

 [구르는돌 비판] 멜랑콜리한 주체의 목적론적 반성
  2010/07/09 18:41
 
 
이 글은 http://blog.jinbo.net/rollingstone/?pid=325 에 대한 비판이다.
처음에 레디앙에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9059 이 올아왔고,
내가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9078 를 통해 비판했더니,
http://blog.jinbo.net/rollingstone/?pid=325(구르는돌) 글과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9123(양승훈) 글이 올라온 것이다.
곧 나는 '레디앙'에 본 글과 함께 양승훈 글에 대한 재비판도 투고하였다.
 


구르는돌님은 굳이 ‘족보’를 밝히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저와 같은 학번이고 같은 ‘족보’(?) 안에서 활동하셨지만, 저는 구르는돌님이 누구인지 조금도 눈치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적 공유는 우리의 논쟁에서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 글을 읽고 불편했다니 안타깝습니다만, 이해는 됩니다. 구르는돌님이 글에서 ‘불편함’의 기억을 저 역시 갖고 있고, 안타까운 기억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전 그 글을 ‘자유주의자 일반’을 상정해놓고 쓰지 않았습니다. 어떤 분들에게 그렇게 읽히고 있히고 있다면, 제 글실력의 문제입니다만, 저의 비판 대상은 ‘조병훈씨’였음을 밝히고 싶습니다. 공연히 역사 자체를 자유주의적으로 소환하는 태도 자체에 대한 비판이지, 현상에 대한 비판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도덕주의’를 짚고 넘어간 것이기도 합니다.
 
김예슬과 고시생은 한 끝 차이라는 말도 동의하고, 학생운동이 그 흩어지는 자유로운 개인들을 포괄하지 못하게 된 실력 저하의 문제도 동의합니다. 일단 그 전에 우리가 과연 완전히 자유롭게 '주체'인척하면서 학생운동에 대해서 '회고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습니다. 10학번들의 시대에 03학번이 끼어드는 것은 위험합니다. 어쨌든 제가 비판하는 것은 학생운동 비판 자체가 아니라, 그러니까 학생운동을 비판해선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학생운동 비판을 왜 이상한 방식으로 하냐, 였습니다. 다시 읽어보시죠. 저 역시 학생운동 활동가일때, 내부에서 수도 없이 반성적 비판을 했지만, 어떤 지독한 정체 상태 앞에서 지난한 좌절을 겪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좌절에 대해 우리는 무수히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구르는돌님의 비판은 엇나간 데가 있습니다. ‘자유로운 영혼’과 ‘자유주의자’는 다릅니다. 제가 말하는 ‘자유주의’는 말 그대로 ‘리버럴리스트’입니다. 오늘날 ‘진보’인 척 하는 이들의 대다수가 자유주의자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은지 되묻고 싶은 것이고, 저는 그것이 우석훈이 아주 쉽게 당사자운동이 주체로서 호명한 ‘88만원세대’로서가 아니라, 저 자유주의자 우석훈이 우스꽝스럽게 몽매화시킨 자기 자신들의 ‘썩은 유산’을 떠안은 좀비가 된 자들의 이름으로 ‘자유주의’를 돌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두 가지 유산을 떠안은 채 우리들의 20대를 출발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대학사회에서 어느덧 마이너리티 문화가 된 ‘운동권-공동체’라는 유산이고, 두 번째는 ‘자유주의’입니다. 전자는 모두 우리들의 책임으로 떠안겨져 돌아왔고, 386세대는 이를 전혀 모르는 척하지요. 나는 그 불발된 명명이 얼마나 합당했었는지 묻고 싶은 것입니다. 도리어 우리는 부당하게 우리 자신을 깎아내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요. 나는 아주 종종 타인에게 상처주는 이기주의자였을지언정 ‘세련되지 못하고 너저분한 20대’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저 ‘패션좌파’담론은 괴이하게 ‘운동권’을 그 틀 안에 가두고, 그에 따르는 몇 가지 키워드는 항상 이런 것들입니다. “아직도 레닌을 읽냐”, “아직도 마르크스를 읽어?”, “왜 맨날 투쟁 투쟁 그러면서 팔뚝질을 한데?” 토가 나올 것 같습니다. 후자는 ‘자유주의’인데, 나는 저 무수한 분방한 개인들은 열렬하게 응원할지언정, 그들이 ‘자유주의’라는 유산마저 상속받으려 하는 것에 대해서는 온몸 다해서 막고 싶습니다. 제가 조병훈씨에게 던진 비판은 바로 이 지점에 있었으며, 그가 몽매하게 아버지-세대의 언어(자유주의적 비판)로, 학생운동 위기담론을 몽매화시키고, 분방한 개인들(혹은, ‘자유로운 영혼’?)을 이상한 지점으로 호명하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에 대해 보다 면밀한 이야기는 제가 오늘(7월 9일) 올린 양승훈씨 비판글에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어떤 조직에도 속하지 않으려고 하고, 자기 욕망에 따라서 ‘제 멋대로’ 활동하려는 이들”은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자의건 타의건 자기 바운더리를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를 부당하게 호명하지 말기 바랍니다. 쉬운 예로 자꾸 ‘자유로운 영혼’으로서의 김예슬씨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이것도 참 이상합니다. 그 분은 같은 과 후배였는데 자기 정치를 찾아 <나눔문화>에 가입해 열심히 활동해온 사람이었으며 학생운동을 생각하는 ‘활동가’였습니다. 다만, 유명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새로운 단체라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김예슬씨의 이야기는 제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귀기울일만 합니다. 저 역시 구르는돌님이 그랬던 것처럼 “진정 래디컬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혀 구르는돌님이 되물은 방식으로 말할 생각이 전혀 없고, 예전에 김예슬씨를 광화문에서 마주쳐서 레바논 파병에 반대하는 서명운동란에 싸인하고 반갑게 해후했듯이, 그의 삶도, 저의 달라질 삶도 긍정하고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구르는돌님이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추측한 점은 비판하고 싶습니다.
 
근 4년간(저는 2006년 가을 어느날 새벽, 고려대 총학생회실을 도망치듯 빠져나오며 학생운동과 멀어졌습니다.) 저는 꽤나 오랫동안 자기혐오와 좌절에 갇혀 암흑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른 학교를 오고, 군대를 갔다오면서 보니 더 이상은 옛 친구들과 가까이 지낼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그런 가운데서도 저는 제가 정치경제학, 사회과학보다는 인문학 공부와 영화 만들기에 더 많은 열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 한예종에서 미숙하지만 새로운 시도들을 모색해보고 있습니다. 또 386세대를 향해, 저 자신의 실용주의를 향해 되돌아보았고, 최근에 지속적으로 ‘진보진영’ 안의 자유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말을 쏟아내 왔습니다. 저 혼자 끄적이는 수준이지만 한겨레hook에서, 오마이뉴스 기사에서, 혹은 제 블로그에서 말이죠.
 
그런 점에서 저는 김예슬씨로부터 삶의 용기도 얻었고, 구르는돌님이 자의적으로 추측하는 것과 반대로 학생운동을, 사실은 저 자신의 20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가 ‘교육투쟁’에 가담하는 것과 ‘자퇴’를 선언하는 것 사이에 무수한 고민의 시간을 가졌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리고 학생운동이 얼마나 부족하기에 그런 흩어진 불만들에 응대하지 못하겠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르는돌님은 그 흩어진 욕망들을 잘못 호명하고 있는데, 그 흩어진 개인들의 욕망들은 ‘자유주의’가 아닙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해볼까요. 진보신당이 아직(그 당에 대해 일말의 애정이 있는 저는 ‘아직’이라고 말하겠습니다.) 떨치지 못하고 있는 의회주의, 선거주의는 저 개인들의 다른 이름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저 ‘개인들’을 말할 때 자유주의를 호명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며, 저 빠져나온 돌부리들이야말로 운동이 나아가야할 지점이라고 도리어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는 구르는돌님은 저에 대해서 일정 ‘편견’을 지닌 채 말하고 있으며, 사실은 저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유독 구르는돌님만 이렇게 ‘저’라는 사람 자체의 표면 자체를 부당하게 제 텍스트로 끌어들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아주 당당하고 자신감 넘쳐서 발언하고, 데모질한 것이 구르는돌님이 알고 있는 홍명교라는 인간의 전부이겠지만, 혹여나 저의 그 자신감 이면에 항상 내재된 자기혐오와 우울증을 알고 계신지 묻고 싶습니다.
 
학생회가 맑스주의와 어울리지 않았다는 생각이시군요. 저는 되려, 맑스주의를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고 싶고, 우리가 정말 “맑스주의자답게” 학생회운동을 했었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구르는돌님의 말은 핑계처럼만 들립니다. 사실 저는 “맑스주의다운 것”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만, 혹여나 우리는 그것을 역사의 어느 한 지점에 ‘정박된 것’으로서만 사고하고 있진 않습니까? 구르는돌님의 글을 보면 그런 생각 밖에 들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바, 우리는 ‘대중 이데올로기’에 대해 조금도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저는 구르는돌님처럼 2000년대 학생운동이 무수한 구조변혁 실천들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저는 좋은 구조 변혁 사례의 싹들을 봅니다. 오히려 구르는돌님의 반정립적 태도야말로 저 실패의 사례에 속할 것 같습니다만, 오늘날 학생사회에서 대체 그 누구가, 이주노동자와의 연대나 학내 시설관리노동자들과의 연대를 ‘실현’해냈는지요? 차라리 저는 저 모든 슬프고도 실패한 역사를 인정하고서라도 저 성공 사례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무릇 운동, 연대란 하나 하나의 ‘성공 사례’, 모종의 ‘증거’를 바탕으로 커나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구르는돌님은 “학생운동의 거점이 학생회는 물론이고 대학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고 말씀하시며 ‘20대 일반’에서의 정치를 말씀하셨는데 일견 동의하면서도 굳이 존재 조건으로서의 대학을 부정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이것은 객관적 조건입니다. 대학에 다니지 않는 이들의 영역에서의 운동도 절실하고, 학생운동도 아직은 20대 대중운동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많은 이들의 삶의 조건이자 배경이지 않습니까. 한 끝으로 몰고가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맨 끝에 첨부하신 개인적 경험담은 너무 멜랑콜리(melancholy)해서 참으로 듣고 있기 힘듭니다. 저야말로 과오로 얼룩진 학생운동을 했었지만, 그런 얘기는 그렇게 회고하듯이, 과거를 후회한다는 듯이 얘기하면 안 됩니다. 어느덧 예기치 않게 구르는돌님은 멜랑콜리하게 학생운동을 반성한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꼰대 선배의 모습으로 변신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채감으로 저 학생운동에 얘기한다고 한들 저 무수한 386세대들이 그렇게 하듯이 멜랑콜리한 태도를 보여주면 되겠습니까? 발터 벤야민에 의하면 그것은 역사 자체를 ‘진화주의’적인 것으로 보는 가장 근본적인 태도입니다. 과거가 원인이고, 현재가 결과이지요. 그리고 미래는 항상 ‘기대’를 품고 내다보는 창입니다. 왜 멜랑콜리해야하는 것이죠? 그것이 과거나 미래를 바꿔주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저는 구르는돌님이 보이는 이런 인과론적이고 목적론적인 태도마저 부정하고 싶습니다. 정말 우리가 같은 ‘족보’에서 활동하기라도 했었던 걸까요? 제가 보기엔 전혀 아닌 것 같습니다.

 

 

 

6. 양승훈의 글에 대한 홍명교의 반론

 

 


"내가 비판한 건 '유령'이 아니다"
386 자유주의 맞서, 20대가 할 일
[양승훈에 답함] 담론에 대한 실용주의적 독해를 비판하며


글을 잘 읽었고, 문제의식도 이해되었지만, 글이 너무 중언부언이라서 하나하나 다 집어서 종합적으로 말하기가 난감하다. (이런 말하기 참 미안하지만) <레디앙>에는 누구나 글을 올릴 수 있지만, 난독자이거나 자기 논리도 정리하지 못한 채 발설되는 글이어서는 안 된다.

일단 양승훈씨는 대체적으로 내 글에 대한 '비판' 성격으로 그 글을 썼는데, 내 글이 지목하고 있는 바에 대해선 전혀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그냥 다른 얘기하는 것 같은데, 돈 이야기와 운동권 학생회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일정 부분 내 생각을 자의적으로 '가늠'하면서 쓰기도 했다.

그래서 좀 황당하고, 왜 잘 읽어보려 하지 않았는지 되묻고 싶다. 그래서 참 난감한데, 일단 그가 댓글에서 스스로 그 글의 핵심 주제라고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 나머지 몇 가지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비판하도록 하겠다.

자유주의야말로 '아버지 세대'의 것

그는 마치 내가 전통적인 방식, 아버지 세대의 방식으로 이야기한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다소 엉뚱하다. 만약 편의상이라도 386세대에 대해서 그렇게 '아버지 세대'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내가 보는 아버지 세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유주의적'이다.

그들의 근본적인 멘탈은 91년을 경과하면서 '자유주의'로 기울었다고 생각한다. 소비에트연방을 사회주의의 고향으로 상정했기에 그 체제의 몰락이 자기 근본을 뒤흔든다고 생각했고, 91년 열사 투쟁의 심대한 후퇴 상황을 목도하면서 하나같이 절망했다.

물론 오늘날 '좌파 진영'에 제목소리를 내며 숨 쉬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말 그대로 '극소수'이며, 결코 '아버지 세대'를 대표하지 못한다. 내가 보는 바, '윗세대'의 멘탈을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하자면, 의심의 여지없이 '자유주의, 노사모, 반MB'이다.

이 지점에서 나의 심상정 비판도 삐져나온 것인데, 따지고 보면 최근에 그가 보이는 행보들은 이 주류 정신에서 한 치도 벗어나고 있지도 못하다. 나는 바로 이 정신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유령'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들을, 진보진영을, 혹은 시민사회운동판을 뒤흔들며 모든 의제를 좌지우지하는 게 바로 이 정신 아닌가. 나는 이 정신을 혐오한다. 이것과 완전히 단절해내지 않으면 새로운 세대의 운동도 없고, '진보정당 수권' 따위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적을 명확히 목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잃지 않은 가운데, 자기 안의 자유주의, 자기 밖의 자유주의와 싸울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자유주의 비판은 '아버지 세대의 언어'가 아니라, 되려 충분히 우리 세대의 언어가 될 자격이 있는 '언어'이다.

양승훈씨는 (필자가 쓴 글의)댓글에서 "자유주의’ 유령을 잡을 때가 아니라, 전통적 방식의 이야기 바깥, 지금까지 나오지 않은 ‘급진적 정치’ 이야기들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보이지 않던 ‘몫이 없는 자들’의 이야기가 등장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이야기했다.

아니, 자유주의는 유령이 아니다. 오늘날 자유주의는 실용주의, 실용적인 노선, 실용 전략, 당장 실행 가능 목표 따위의 이름으로 소환되고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MB만의 이념, 4대강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좌파 내의 실용주의들

예를 들어볼까. 심상정의 사퇴 논리는 얼마나 실용주의적이었는가. 또 저 유명한 '반MB전선'이라는 전략은 얼마나 실용주의적인가. 자기 정치의 내용은 모두 다 제거시키고 '실용주의'만 남은 것이다. 심지어 내가 거의 몇 안 되게 희망을 안고 투표했던 곽노현 교육감은 얼마나 실용주의적인 노선을 보여주고 있는가.

요컨대 이미 그것은 우리 안에 침투했다. 실용주의라는 철학, 자유주의라는 이념에 있어서 저들은 모두 한 패거리이다. 심지어 학생운동 위기를 둘러싼 근본 없는 '회고담'에서 우리는 얼마나 '위기'에 대한 '위기'를 연상시키는 실용주의적 담론을 목도하고 있는가.

위기를 바라 보는 조병훈씨의 태도는 실용적 독해를 노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 점에서 양승훈씨도 별반 다르지 않은데, 메이저캠 학생운동의 돈 문제 이야기를 하다가 김예슬 이야기하는 건 지나치게 편의적인 발상이다.

김예슬의 선언은 스스로 자기 존재 조건에서 제 나름의 저항 양식을 창출해내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되는 것이지, 대체 그게 왜 '고대생이니까 그렇게 주목받는 거지'라는 식으로 발현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이야말로 진상이고, 그럼 뭐 강남 살고 먹고 살기 편하니까 문화 비평도 하지, 라는 식으로도 말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참으로 안이한 '읽기 방식'이다. 나는 이미 이 전 글에서 그 모든 것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이야기 바깥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양승훈씨가 나의 첫 번째 글을 읽으며 그것이 마치 모든 '새로운 흐름들'에 대한 비판이라고 여겼다면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거나, 그가 잘못 읽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리반을 비롯한 흐름에 대해서 긍정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어쨌든 이 새로운 흐름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양승훈씨는 그것이 '전통적 방식의 이야기 바깥'이라고 말했는데, 설령 나의 세련되고 새로운 자유주의/실용주의 비판이 '전통적'이라고 느끼는 걸 취향으로서 인정해준다고 해도, 그들이 정녕 '이야기 바깥'인지는 의심해봐야 한다. 요컨대, 대체 '이야기 바깥'이란 게 어디 있는가?

최근 나의 일상은 이 '새로운 흐름'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데, 그럼 난 '이야기 바깥'인가? 그는 전반적으로 구조 안에 함몰된 태도를 보이면서, 구조주의적이진 못하다. '외부'나 '탈주' 운운하는 최신 철학 이념과 자기 안에서도 해명되지 못하는 뒤섞인 개념이 서로 혼동을 겪고 있는 것이다.

추상적인 말만 남발할 게 아니라, 잘 생각해야 한다. 이미 '이야기'는 우리가 '새롭다'고 말하는 저 '새로운 흐름'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오늘날 <프레시안>이나 <레디앙> 같은 좌파 성향의 인터넷 매체들 중 그 누구가 '학생정치조직'의 운동에 대해서 말하는가. 두리반이나 파티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은가.

올드한 찬양

그가 다소 매너 없게 신상적인 면에서 내 정치 스펙트럼을 규정하려고 해서 별 도리 없이 이야기하자면, 지난 3년 여간 확실히 나는 후자 쪽(소속 없는 개인들의 놀이터)에서 놀았고, 그들과 친하게 지낸다. 나는 과거에 다니던 대학에서 '전국학생연대회의' 활동가군으로 불리는 축에 속해 활동했지만, 양승훈씨가 말하는 '대장정'이 뭔지도 모르겠고, 심지어 학생행진 회원도 아니다.(만약 舊대장정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는 확실히 잘못 알고 있거나 ‘정보과 형사’스러운 짓을 하고 있다. 수정하기 바란다.)

오히려 그의 규정 따위가 정말 쌩뚱 맞게 느껴질 뿐이다. 그런 면에서 그야말로 올드(old fashionable)하다. 그러나 대체 그런 구분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오히려 나는 양승훈씨나 조병훈씨가 '새로운 흐름' 운운하면서 '대상'에 대해 다소 '도구주의'적으로 이야기하다가 지나친 환상을 갖고 있다고 느낀다.

그것이 대체 혁명적 흐름을 만들어주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섹시한 파티들은 이미 100년 전에도 있었고, 68년에도 있었다. 그것들이 섹시하고 재미있을지언정 여러분이 갖고 있는 저 '대상'에 대한 도구적 환상은 정말 섹시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다.

나는 그 '찬양'이 지겨울 지경이다. 찬양하기 전에 그냥 말없이 놀면 될 것을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찍이 90년대 중반에 학생운동의 PD 계열 일부가 이미 '저것'보다 더 섹시하게 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과거의 자료들을 확인해보기 바란다.)

그 당시 학생운동 문건과 자료들에는 무수한 문화담론이 있었다. 얼마나 풍부했었는가. 만약 아주 잠시 구질구질한 시기가 있었다면 2000년대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어쨌든 그 새로운 흐름에 대한 물신과 지나친 환상, 절대화가 대체 뭘 가져왔단 말인가.

나는 저 재미있는 놀이들과 그 놀이들의 주체들은 긍정할지언정 여러분의 망상은 지지하기 어렵다. 한동안 '패션좌파' 운운하던 우석훈의 제자들이 연세대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해서 얼마나 올드하게 놀았는지 나는 익숙히 들은 바 있다. (<유쾌한 반란>이었던가? 한 15년 전쯤 저 올드한 운동권들이 그런 식으로 놀았던 것 같은데!) 그 '망상'의 신화야말로 이데올로기적 전복을 방해하는 물신화된 도구주의의 '이데올로기'이다.

흔들리는 주체

돈 문제 이야기하는 건 일견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뭐 이상한 방식으로 논리를 정리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아쉬운 생각이 든다. 학생회 운동이 돈의 문제로부터 허우적댔다는 말은 맞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드러나는 문제들 중 하나였을 뿐 모든 것을 환원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원인은 되지 못한다.

그러면서 진보신당 언저리에 여러 개인들이 있다고 했는데, 나는 그들을 모두 싸잡아서 '자유주의자'라고 명명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양승훈씨의 오독일 뿐이다. 나 역시 부르주아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한동안 노사모 회원이었고, 오랫동안 자유주의자였다.

그나마 행운을 얻어 급격한 변화를 겪을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보적 자유주의자로서만 살았으리란 생각이 든다. 바야흐로 학생 대중운동이 망하니 개인들은 방황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나는 소속이 없다. 내 주위의 무수한 좌파적 견해를 지닌 친구들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새로운 흐름'이라고 운운하며 찬양하거나 지나친 환상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이 새로운 주체가 어떻게 하여 스스로의 삶들을 '정치화'시키는가를 주목하고 우리 각자도 실험해나가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바깥'에 대한 망상을 부디 버리길. '현실'에서 ‘이야기의 바깥’ 따위는 없다. 바깥의 경계에 다가서는 탈구조적 운동만이 있을 뿐이다. 그 운동 자체를 긍정하는 나는 그 '보잘 것 없는' 실험들의 중요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며, 그러지 못하고 자유주의적 포션과 실용주의적 시선으로 '과거'를 '과거'로서만 바라보는 행태를 갖는 것과 멜랑콜리한 망상을 갖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과거가, 정말, 끝났다고 믿는 것인가? 과거는 끊임없이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내가 말한 '유령'의 진정한 의미이다.

자립에 대해서

끝으로 다소 독해하기 어렵게 배열되었지만, 자립에 대한 양승훈씨의 고민의 뿌리 자체는 지지하고 싶다. 양승훈씨는 “새날은 왔는데 해가 뜨지 않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진보정당과 단체들이 젊은이들이 자립적이지 못하다고 비판만 하지 환대하고 있진 않다는 것이다. 저 윗세대가 20대에게 ‘헌신’만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환대 따위 별로 욕망하지도 않는다.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그것이란 말인가? 나에게 있는 욕망은 그저 저 ‘빨간색’이나 ‘주황색’, 혹은 ‘노란색’이나 ‘연두색’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이들 중 대다수를 점하는 멍청한 자유주의자 아저씨들을 끌어내리는 것뿐이다.

최근에 심상정 씨의 자유주의적 망상으로 가득 찬 토론회 기사를 보고 더욱 그런 생각을 굳히게 되었고, 만약 이 오래된 ‘위기’가 종지부를 고하기 시작할 수 있다면, 그들을 끌어내릴 주체는 다름 아닌 ‘젊은이들’이 되어야만 한다.

양승훈씨의 말처럼 그들의 훈수는 20대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고, 칭찬도 모종의 냄새가 느껴지기 일쑤다. 그러나 양승훈씨의 말은 어떤 갈구처럼 느껴진다. 돈을 달라는 것인데, 그건 너무 현실에서 많이 벗어난 투정처럼만 느껴진다.

그저 우리는 앞으로 꽤 오랫동안 가난하게 버틸 수밖에 없다. 김슷캇이라는 분은 ‘입당’보다는 ‘개드립’을 권하겠다는데, 오타쿠들의 ‘자위’가 지긋지긋한 나는 ‘개드립’은 추천할 수 없고, 차라리 ‘가난한 좀비들’이 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작년 겨울 군복무 중일때 나는 TV를 통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알려진 바에 의하면(<나는 전설이다> 감독 에디션) 좀비들은 사랑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떼거지로 달려가 저 합리적인 인간들을 습격하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사랑’을 위해 ‘자기 자신에게’ 헌신한다는 것이다.


    2010년 07월 12일 (월) 07:39:40

 

 

 

2010/07/10 11:04 2010/07/10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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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아닌 제천에서, 음악영화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부터

꼭 가고 싶었지만 결국 한번도 못갔던 곳, 가끔 생각날 때 마다 아릿하다.

해마다 꼬박꼬박 소식지가 오는데 며칠 뒤 서울에서 특별상영회를 한다니

친구들이라도 나 대신 한번 가보라고 굳이 여기다 올림.

꽤 유명한 프로그램이고, 미리 신청을 해야한다니 가보려면 서두르시길. 

 

2010/07/06 02:22 2010/07/06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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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 연애']에 관련된 글

 

할 말이 주르륵 넘쳐버린 어느날

망서리다가 편지를 보낸다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채 적지도 못하고

그냥,  잘 지내냐고 나도 잘 있다고 간단하게

보내고 나서 잊고 있다가 어느날 예기치 못한 곳에서

이를테면 엄마의 화장대 같은 곳에서

이미 오래 전에 왔던 답장을 발견한 느낌

망각의 삶 홈페이지에서 긁어온 글

작성한 날짜가 7월 5일

 

출처: 망각의 삶 -  '그 연애'에 대하여

 

 

조금 정신적으로 느슨한 것 같기도 하고…
무기력한 것인지, 여유있어진 것인지 조금 혼란스럽지만,
어쨌든 제 생애 처음으로 조금 편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 인 것 같아요.
뭘 하고 살지, 어떻게 살지 아직도 여전히 모르겠는 것이…

영화는 아주 많이 짧아 질 것 같고, 조금 다른 영화가 될 것 같아요.
이 영화가 그리 대단하지도 않고, 이 영화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그리
엄청나게 중요한 것도 아니에요…그저..소소하다고나 할까..
조금 자책을 섞어 얘기하자면 사소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연출자로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신감이나 자부심이 그렇게 없느냐 라는 지적을
누군가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주목하고 주장해야 하는….
세상의 많은 불합리와 부조리, 영화따위는 꿈도 못 꿀 힘든 현실에 직면해 있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먹다가 목에 걸리는 아주 작은 생선가시 정도의 문제의식만을 담고 있는
제 영화가 소소하다고 말하는 것이 그리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작은 영화가 세상의 틈새를 조금 채워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주축을 이루는 큰 돌은 아니니까요.
이 영화는…
저에게 있어 오래된 친구처럼 친근하고 가까운 존재라는 이야기밖에는 못하겠네요.

그럼에도 이렇게 재편집을 하는 이유는…
뭐랄까… 제 자신의 노력으로만 만들어졌다면 서랍속의 개인소장용이 되든,
책갈피에 끼워넣었던 나뭇잎들만큼 한때의 감상적인 산물이 되든 상관없겠지만…
영화라는, 내 이야기를 하기 위한 아주 이기적인 과정에,
자신들의 귀한 노력과 시간을 쏟아준 친구들의 그것만은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이라서요.
왜 그런지 모르지만, 전 그게 계속 마음이 쓰여요.
제가 지금 뭔가 할 수 있는데까지 더 해놓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요.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해서 말이죠.

사실, 상영기회를 얻지 못한 1년여의 시간동안은 제 영화를 전혀 다시 보지 않았어요.
이해받지 못하고, 동감받지 못한, 제 세계를 다시 들춰내게 될까봐 좀 무서웠던 것 같아요.
그 사이 제 앞에서 ‘니 영화는 안될 것 같다!’ 대놓고 말씀하신분은, 제 아버지뿐이긴 했지만.
사실 영화가 안 될 것 같은게 아니라, 제가 안될 것 같았어요.
그저 그렇게 주변만 맴돌다가, 아쉬움만 가진 채로 자신의 작업을 접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제 자신도, 제 영화의 제목처럼 그저 그런 감수성으로, 그저 그렇게 고군분투하다가,
고만고만한 작품들을 만들고, 그저그런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가,
그저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면서,흐지부지 이도 저도 아닌 인생을 살게 될까봐 두려웠어요.
뭔가 되지 않으니까 억지로 일상의 행복이나 찾으려고 하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혼란스러웠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느끼는 감정들이 어떤 것의 산물인지 몰라
당황하던 시간의 연속이었죠.

마음속의 여러 산을 넘어서 다시 본 영화는…다시 편집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점이 많았어요.
이야기가 여전히 재밌는 부분도 있었고, 캐릭터들도 정이 갔지만,
준비할 시간을 많이 가지지 못하고 찍었던 만큼 아쉬운 점도 많이 보이더군요.
아쉬운 점을 개선하고,내 이야기들을 어떻게 맥을 이어갈지가 재편집의 주요 고민이었습니다.

이제 편집은 거의 끝났고, 영화의 룩도 다시 만들고 있는 요즘에는
조금 마음이 편합니다.
나는 할만큼 했으니, 8월에는 소박한 휴가를 즐기리라 마음먹으며…
제가 사는 이 시간은, 그 누가 아닌 바로 제가 원해서 있는 것이니만큼
뭐든 즐겁게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복잡한 세상에…
우리가 타인을 모른다고, 그들의 삶이 없는 것도 아니고,
주목받지 못했다고, 이야기가 없는 건 아니며..
많은 사람이 느끼지 못했다고 의미없는 것은 아니죠.

이건 제 자신에게 하는 말 뿐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조금씩 일구며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많은 다른 작은 아티스트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비슷하게 갈등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그리 큰 도움은 되지 못하더라도,
세상과 자신사이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혼자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서로 따뜻하게 손은 잡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모두들 행복하시길 바래요.
영화가 다시 완성되면 만나요!

 

 

 

2010/07/06 00:43 2010/07/06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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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홈페이지 : 망각의 삶

 

 

처음에는 이런 영화였는데

 

완성한 지 좀 됐다.

어느 영화제에서 상영하나, 그 소식만 기다렸다

디비디를 한번 봤으니 리뷰라도 올릴까, 그러던 참에 연락이 왔다

- 다시 편집하고 있어요.

으응?

 

두 사람, 무척 꼼꼼하시다.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를 첫 상영하기 직전에 이분들이 트레일러를 제작했는데

미디액트에서 다같이 처음 보던 날, 연출자들이 조금 당황했다.

본 영화보다 때깔이 더 좋으면 곤란... 그래픽 구현 기술이 너무 높.... 메시지가 너무 심오...

암튼 너무 너무 공을 들인 결과물이었고, 부탁한 사람 입장에서는 죄송할 따름이었다.

그랬는데, 어라,  얼핏 보기에 허술해보이는 극영화 한 편을 완성했다

아니, 다시 편집한다고 했지.

편집 잘하는 거 다 알고 있으니 이제 고만하고, 어서 상영하시라

그리고 빨리 새 디비디 보내주셈.

아래는 공식 트레일러,  그리고 본인들이 소개한 '망각의 삶'

The Cell of 'The Romance' part 1. from igi 이기 on Vimeo.

(좀 더 큰 사이즈로 보려면 여기로. ) 

 

 

망각의 삶은…
이기와 비정이 지구를 구하려고 만든 팀입니다만…
결성한지 10년째....
그동안 지구를 구하는데는 소홀하고....

작품 만들기와 여러가지 영상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저희의 접근품목은.. 영화, 사운드, 모션그래픽...등...듣고 보는 모두 입니다.


저희가 원하는 것, 원하는 이유에 대한 고민과 실제적인 행동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여러 과정을 거쳐오면서 해가 거듭될수록,
<무언가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소통하고, 그렇게 살아가기>는

한밤중에 옥상 장독대에 올라 고물라디오로 우주에 전파를 쏘아올리는 것 만큼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임을....
주변의 것들과 저희 안의 것들이 알게 해주었습니다.
슬슬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어찌되었든…
이제까지 한 것들을 보듬고,
앞으로 할 것들에 대한 기대감을 키우면서 <망각의 삶>은 살아갈 것입니다.


2008. 2월 망각의 삶

 

Screening

2009

그저 그런 여배우와 단신 대머리남의 연애  / In house project

(연출/극영화/125분/비디오)

 

2004

Over / In house project

(연출/실험/6분/비디오)

- 2004 뉴미디어아트페스티벌

- 2005 서울국제실험페스티벌

- 2005 서울넷페스티벌 국내경쟁부문

Humming / In house project

(연출/실험/8분/비디오)

 

2003

Undenied / In house project

(연출/실험/6분/비디오)

침묵의 외침 / In house project

(연출/실험+다큐멘터리/15분/비디오)

- 2003 전주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비엔날레

- 2003 서울독립영화제

- 2003 인디포럼영화제

- 2003 인권영화제

- 2003 국제평화영화제

- 2003 EBS 열린다큐멘터리영화제

 

2002

Wake Up And Smell The Coffee / In house project

(연출/뮤직비디오/6분/비디오)

- 2002 레스페스트영화제 모션그래픽 뮤직비디오 부문

 

1998

In The Garden / In house project

(연출.촬영.편집/뮤직비디오/7분/비디오)

-제1회 m.net 뮤직비디오 공모전 우수상

707 / In house project

(연출/극영화/15분/16mm필름)

Collaboration / Commission

 

2009

프로젝트 아이 4.0 - DVD

/ Commission work

(DVD 제작 / 아트센타 나비)

프로젝트 아이 4.0 - 소리가 있는 아이들의 섬 Sound of [a:i] island

/ Commission work

(모션그래픽 - 전시 영상물, 메이킹 비디오 / 14분, 11분 / 아트센타 나비)

 

2008

/ Collaboration work

(모션그래픽/장편극영화/4분)

 

2006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 Collaboration works

(편집.모션그래픽/프로모션 비디오/4분/비디오)

소리 아이 프로모션 / Collaboration works

(편집.모션그래픽.색보정/프로모션 비디오/2분/비디오)

이준기 디지털 싱글 앨범 프로모션 메이킹 / Commission works

(편집.메인타이틀.색보정/프로모션 비디오/J&H 미디어)

 

2005

코리안 신드롬-중앙컬쳐밴드 ‘원’ / Commission works

(연출.촬영.편집.시각효과/뮤직비디오/Coree 뮤직)

 

2004

아물지 않은 상처들 / Collaboration works

(메인타이틀 디자인/다큐멘터리/여성부)

세계화의 수레바퀴를 멈추자 / Collaboration works

(메인타이틀 디자인/다큐멘터리/민중의 소리 제작)

돌속에 갇힌 말 / Collaboration works

(메인타이틀 디자인.색보정/다큐멘터리/나루 제작)

- 제4회 인디다큐페스티벌

- 제9회 수원인권영화제

-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

- 안양변방영화축제

- 제9회 인권영화제

- 제10회 인디포럼영화제

- 제7회 정동진독립영화제

- 2005 부산인권문화제

- 제10회 전주인권영화제

GameUFO 프로모션 비디오 / Commission works

(메인타이틀 디자인/(주) 웹패턴)

 

2003

Listening To The Voice Of A Wind / Commission works

(편집.색보정.메인타이틀 디자인/장편극영화)

-미국 San Jose Film Festival 초청

GameUFO 프로모션 에니메이션 / Commission works

(연출/에니메이션/(주) 웹패턴)

 

2002

억압의 사슬 / Collaboration works

(메인타이틀 디자인/다큐멘터리/여성의 전화)

 

2001

끝나지 않은 이야기 / Collaboration works

(메인타이틀 디자인/다큐멘터리/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1997

Repeater / Collaboration works

(촬영/극영화/15분/16mm필름)

-1998 인디포럼영화제

Talk ( Artist Talk / Lecture / Workshop )

 

2006~2009

한국영상자료원 KOFA영화학교

[촬영과 편집 실습 기초]과정 강사

 

2004~2005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험센터 [하자센터]

[뮤직비디오 프로젝트] 강사

 

2004

아카데미 정글

[디지털 영상 편집 제작]과정 - 애프터 이펙트와 영상디자인 강사

 

2001

한국미디어센타

[비디오 저널리스트] 과정 에프터 이펙트 강사

서강대학교 방송아카데미 [디지털 편집:프리미어 프로]과정 강사

 

2000

한겨레 교육문화센터

[뮤직 비디오 제작] 과정 디지털 편집:프리미어 프로 강사

 

Publication( CD / DVD / Book )

 

2005

창의적인 영상제작과 편집을 위한 ‘프리미어 프로 아트북’

(제우미디어 출판사)

Exhibition

 

2008

“이상한글" 전 (아트센터 나비)

- 거다란 잡식동물

(박영임(비주얼 디자인) + 김정민우(사운드 디자인)/실험비디오/12분)

 

2003

공공애니메이션 프로젝트 ImageAct 전 (일주아트하우스)

- 침묵의 외침

(연출/실험+다큐멘터리/15분/비디오)

 

 

2010/06/25 22:16 2010/06/25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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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천여성네트워크 여자만세

작품정보: 쇼킹 패밀리,  진옥언니 학교가다,  나는 엄마계의 이단아,   슈프로슬링

 

 

2010/06/25 20:34 2010/06/25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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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찾아서'를 보고 나서 다음 작품이 늘 궁금했는데 경순감독이 '쿠바의 연인'을 보내줬다.

디비디는 배급사에서 내줬고 소포는 경순이 보냈다고.  언제 한번 제대로 봐야하는데, 최근에 노트북이 디비디 재생 때마다 문제를 일으켜서 못보고 있다. 하는 수 없이 광고만 이렇게.

 

* * * * *

 

출처: 시네마테크 KOFA

보다 자세한 작품정보:시네마달

 

6월 26일 토요일 오후4시, 상암동 영상자료원, 무료 상영

 

<쿠바의 연인> 정호현, 2009|Documentary|Color|DV|93min
 
 
 

이 영화는 디자인과 대학생인 쿠바 청년과 다큐멘터리 감독인 한국 여성이 둘이 함께 살아갈 곳을 찾는 이야기다. 춤과 음악, 체 게바라, 유기농업, 도시농업 거기에 공짜 교육, 공짜 의료로 유명한 쿠바 속으로 들어가 살아보면서 쿠바 사회의 실제 모습을 차근차근 관찰한다. 지구상의 천국일지도 모르는 쿠바, 사람 살만한 곳인가? 또 쿠바 청년이 한국을 방문함으로써 한국이 폭탄머리 흑인에게 살만한 곳인지 직접 타진해 본다.

 

감독은 작열하는 태양아래 춤과 음악이 흘러넘치는 나라 쿠바에 도착한다. 교육도 공짜, 의료도 공짜인 이‘색시’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 감독은 아바나 대학에서 젊고 귀여운 쿠바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2010/06/25 20:02 2010/06/25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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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

 

 제10회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구애전 본선 진출작을 발표합니다.

 지난 2월 17일~5월 14일까지 진행된 공모기간에 접수된 작품 중

 영화제 부문 54작품, 전시제 부문 9작품 등, 총 63 편이 본선구애작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구애되는 작품은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에서 상영/전시되며,

 페스티벌 기간 동안 본심을 거쳐 최종 수상작이 선정됩니다.


 네마프2010의 구애작품은 다음과 같습니다.

=================================

 <영화 부문>

 이형석 '디지털 인터미디에이티드 스위밍'
 도미노 '습기-한 조각'
 김지곤 '오후3시'
 변지민 'Graffiti'
 조승준 '캐틀트럭'
 이지은 '그대로 멈춰라'
 이한아 '제3의방'
 송영국/이종민 '재'
 임덕윤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0.43'
 최미경 '놈에게 복수하는 법'
 늘샘 '미륵동 서커스'
 유지숙 '10년의 초상'
 정강 '말하다'
 서영주 'Left and Leave'
 정성윤 'On the planet'
 김민경 '오디션'
 박동현 '기이한 춤;기무'
 김은민 '내 청춘을 돌려다오'
 정호현 '쿠바의 연인'
 박용석 '테이크 플레이스'
 황선숙 '울음'
 안정윤 '공화국 찬가'
 김경묵 'SEX/LESS'
 김진영 '나를 믿어줘'
 옥민아 '끼니'
 박경미 '봄'
 민혜진 '기억은 왜곡된다'
 최진성 '저수지의 개들 take1. 남한강' 
 오롤로 'Love poem'
 타니가키 유리 'COLORS'
 조영직 '아마츄어증폭기 탄생설화'
 드보작 'Next day. Same time. Same place'
 이보라 '그럴 줄 몰랐어'
 Virginai Apicella 'Happy Birthday'
 Narelle Benjamin 'REALM'
 Marlene Millar/Philip Szpoper 'FORTIES'
 Nicolas Provost 'Gravity'
 Celilia Condit 'Annie Lloyd'
 Jem Cohen 'Long for the city'
 Federic Moffet/Katrina Chamberlin/James Kubie 'The Body Parlor'
 정지숙 '기다림, 설레임'
 장형윤 '내 친구 고라니'
 조수진 '보고 싶어요'
 전승일 '예산족 애니메이션 프로젝트'
 김형석 '아무도 모른다'
 김조광수 '친구사이?' 
 이란희 '파마'
 정소이 'Burning Paper'
 박형익/윤홍란 'Line'
 강지이 '소나무'
 Tijmen Hauer 'Talking Heads'
 Oliver Hockenhull 'Shot on Blood: Kozmikonic Electronica'
 Stuart Pound 'Not you again!'
 Sarah Shamash 'The Adventure of a Photographer'


 <전시 부문>

 김태희 'Touch and Touch Ⅱ'
 김웅현 '多運勞頭 다운로두'
 박병래 '고무줄놀이'
 최선영 '21세기 자원'
 차지량 '세대독립클럽'
 이창 'Recall for the missingpage'
 서진옥 '빨강 개복동에서 놀다'
 채훈정 'Dust'
 다이노 '심혼'
 
==================================

2010/06/15 09:21 2010/06/15 09:21

토론토 Toronto

from 자료실 2010/06/10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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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위키피디아 토론토

 

 야경은...서울도 이 정도는 되지?

 

서산에서 농사 짓다가 영어선생님이 된 친구와

안산에서 초등학교 사서선생님이 된 친구,

그리고 이사 오기 전, 기진맥진할 때

네이트온으로 드라마파일을 보내줬던 친구들에게

편지 대신 이 포스팅을 올림.

여기가 어떤 곳이냐고 너희 애들도 묻고 너희도 물었는데 내가 뭐 아는 게 없더라

그래서 가끔 온라인 백과사전을 찾아 본다.

 

* * *

 

총인구 : 토론토 시       2,503,281 명

             (토론토 CMA  5,113,149 명 )

                 (토론토 GTA  5,555,912 명)

 

Transportation

Main article: Transportation in Toronto

 

내가 막내동생을 만나려면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40분 정도 걸린다.

동생은 북쪽, 나는 남쪽

벤쿠버에 있을 때는 시차만 해도 세 시간이었고

한번 와보려면 비행기로 다섯 시간이던가...

그 때에 비하면 엄청 가까와졌지

 

 

 

아파트 바로 앞에 버스가 와서 지하철 역까지 몇 분만에 가는데

 

거기서 지하철을 타는 대신 전차 Street Car 로 갈아타기도 한다

한 30년 전에 한국에서 쓰던 토큰처럼 생겼는데

여기서도 토큰이라고 함

버스와 지하철, 전차에서 어디서나사용할 수 있다.

현금으로 차비를 내려면 3불,

토큰을 5개 이상 구입할 경우 하나에 2.5불

학생용/노인용, 성인용으로 구분하는 월 정액권도 있는데

가격이라든가 자세한 정보는 여기로.

 

 

 

전차는 버스랑 비슷한데 전기 동력으로 달리고

바닥에 레일이 깔려 있다

 

 

휠체어로 이동해야 하거나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려운 상황일 때

휠 트랜스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Culture

See also: Recreation in Toronto and Annual events in Toronto 

 

토론토 국제영화제는 칸느 다음으로 가장 영향력있는 영화제라고...소개하던데 한번도 못가봤다.

1976년에 설립, 78년부터 개최해서 올해가 32회라고 알고 있는데 해마다 9월에 열린다.

홈페이지는 http://tiff.net/

 

(전략)

...... The production of domestic and foreign film and television is a major local industry. Many movie releases are screened in Toronto before wider release in North America. The Toront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annual events for the international film industry.  

(중략)

.... Pride Week in Toronto takes place in late June, and is one of the largest LGBT festivals in the world. One of the largest events in the city, it attracts more than one million people from around the world. Toronto is a major centre for gay and lesbian culture and entertainment, and the gay village is located in the Church and Wellesley area of downtown. (The American television series Queer as Folk was filmed in the Church and Wellesley area.)

 

밴쿠버에 Davie st  가 있다면 토론토에는 위에서 말한 저런 거리들이 있고. 

 

Media

Toronto is Canada's largest media market,[53] and the fourth largest media centre in North America (behind New York CityLos Angeles and Chicago), with four conventional dailies and two free commuter papers in a greater metropolitan area of about 5.5 million inhabitants. The Toronto Star and the Toronto Sun are the prominent daily city newspapers, while the national dailies The Globe and Mail and the National Post are also headquartered in the city. Toronto contains the headquarters of the major English-language Canadian television networks, including the English-language branch of the national public broadcaster Canadian Broadcasting Corporation (CBC), the largest private broadcaster CTV, and the flagship stations of Citytv and Global. Canada's premier sports television networks are also based in Toronto, including The Sports Network (TSN), Rogers Sportsnet and The ScoreMuchMusic and MTV Canada are the main music television channels based in the city. The bulk of Canada's periodical publishing industry is centred in Toronto including magazines such as Maclean's,ChatelaineFlareCanadian LivingCanadian Business, and Toronto Life.

 

토론토 스타와 토론토 선은 글로브 앤 메일에 비해서 가십성 기사가 더 많고 조금 가벼운 느낌. 내셔널 포스트는 너무 완고해서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소수자에 관한 주 정부의 정책이나 여러 인권단체의 활동을 자주 스크랩해야하는데 현재로서는 글로브 앤 메일이 적당한 듯. TV 프로그램은 주로 CBC 뉴스를 본다. 아직은 몇 번 채널에서 어떤 프로그램을 틀어주는 지도 잘 모른다. 900번대에서 라디오 방송을 해주길래 아침에는 그걸로 음악을 듣는다. 클래식부터 50년대 60년대 그리고 최신 팝 음악까지 라디오 채널도 굉장히 다양한 편.

Demographics

 

올해 초, 각 일간지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것이, 2031년에는 캐나다 내의 소수인종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조사 결과였다.  그러면, 이렇게 애터지게 영어 배울 필요가 없겠네? 라며 농담을 했더니 한 친구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음, 그 대신에 스페인어랑 중국어랑 인도어도 배워야 파트타임 알바라도 할 수 있게 된다는 거 아닐까?  그런가...

 

(전략)

.....According to the 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 Toronto has the second-highest percentage of constant foreign-born population among world cities, after MiamiFlorida. While Miami's foreign-born population consists mostly of Cubans and other Latin Americans, no single nationality or culture dominates Toronto's immigrant population, placing it among the most diverse cities in the world.[68] By 2031, Toronto's current visible minority population will have increased to 63%, changing the definition of visible minority in the city.[74]

In 2006, people of European ethnicities formed the largest cluster of ethnic groups in Toronto, 52.6%,[71] mostly of BritishIrishItalian, and French origins. The five largest visible minority groups in Toronto are South Asian (12.0%), Chinese (11.4%), Black (8.4%), Filipino (4.1%) and Latin American (2.6%).[71] Aboriginal peoples, who are not considered visible minorities, formed 0.5% of the population.[71] (후략)

 

 

Christie 지하철 역 근처에 있는 토론토 시의 코리아타운.

시내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가면 North York 에도 코리아 타운이 있다.

 

 

Crime

The low crime rate[85] in Toronto has resulted in the city having a reputation as one of the safest major cities in North America.[86][87] For instance, in 2007, thehomicide rate for Toronto was 3.3 per 100,000 people, compared with Atlanta (19.7), Boston (10.3), Los Angeles (10.0), New York City (6.3), Vancouver (3.1), and Montreal (2.6). Toronto's robbery rate also ranks low, with 207.1 robberies per 100,000 people, compared with Los Angeles (348.5), Vancouver (266.2), New York City (265.9), and Montreal (235.3).[88][89][90][91][92][93] Toronto has a comparable rate of car theft to various U.S. cities, although it is not among the highest in Canada.[85] 

(뒷부분 생략)

 범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는 중. 특히 증오 범죄 Hate Crime 가 건수는 많지 않더라도 늘 끊이지 않고 있는데,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유대인에 대한 폭력이라고 한다. 의외였다.

 

 

Education

 

학교에 대해서도 언젠가 좀 더 자세하게 포스팅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여권과 운전면허증만 있으면 파트 타임 강좌를 내국인들과 같은 비용으로 들을 수 있고, 장애인이거나 육아로 인해 외출이 어려운 여성들을 위한 온라인 강좌 프로그램은 잘 마련되어 있는 편이다. 여기서도 대학생연합이라는 광범위한 규모의 학생 조직이 있고, 학교 내에서의 인종차별이라든가 소수자 폭력 문제, 지나치게 높은 등록금 등을 이슈로 집회를 열기도 한다. 밴쿠버에서는 UBC 와 SFU 등 4년제 종합대학의 풀 타임 학생들만  U-PASS (학생용 교통할인 카드)를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서 커뮤니티 컬리지(1년~2,3년 자격증 혹은 전문대 과정)  학생들이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한 결과, 올해부터 다같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들었다.

 

오늘은 너무 졸려서 여기까지. 

친구들아, 보고 싶구나.

 

 

 

 

 

2010/06/10 10:16 2010/06/10 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