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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워낭소리'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려고 리뷰와 관련기사를 모으는 중.

 

1.

 

 

달군 - 불편하게 만들기

칸나일파 - 도쿄소나타, 워낭소리

잔물결 - 워낭소리

처절한기타맨- 모진소리, 워낭소리, 할매꽃

daybreak飛렴 - 워낭소리

 

라울 -  ,  독 05,  독 06

공돌 - 워낭소리

냐옹 - 워낭소리 낭팰세

나루 -  여름에서 겨울까지 본 영화들

            수익금 30% 기증보다 더 절실한 것아쉽지만 일단락,  연명을 부탁드립니다

몽상가 - 뒤늦게 워낭소리

 

하루 -  다녀와서,   큰 맘  먹고 워낭소리,   명랑한 밤길

449  -  비겁한 독립영화인, 비겁한 카메라

tnffo -  가족서사, 한국(여성)문학의 함정

홍지 - Beethoven Chronicle

울산까마귀 - 워낭소리

 

tinooo - 정리

염둥이 -  며칠 전 메모,  나에 관한 이야기2

처절한기타맨 - 워낭소리, 대통령의 영화되다

한판붙자 - 결국 일을 쳤구나

재원 -  그 영화

 

슈아 - 서울독립영화제에 초대과도한... (두 글의 입장이 많이 달라서 좀 당황스럽다.)

돌~ - 워낭소리에서 늙은 농촌, 농민을 보았다

달팽이 - 워낭소리

은수 - 워낭소리 한줄로 요약안됨

GreenMonkey - 소에 받힌 적 있는 아버지가 워낭소리를...

 

풀소리 - 워낭소리

유이 - 워낭소리

jineeya - 보물같은 삶의 이야기, 워낭소리

라디오레벨데 - 워낭소리 강추

크자 - 워낭소리

 

홍실 - 영화 세 편

뎡야핑 - 워낭소리

 

 

 

2. 언론 리뷰 및 관련기사

 

씨네21의 리뷰들 중에서는 허문영의 의견이 가장 공감이 간다. 

 

1) 씨네21 - [전영객잔] 환영으로 완성한 농촌 판타지 (정한석)

 

 

[전영객잔] 환영으로 완성한 농촌 판타지

글 : 정한석 | 2009.02.05

 

영상과 소리를 인위적으로 분리했음에도 끌어안고 싶은 <워낭소리>

 

 

새해 보신각의 타종식 현장을 중계한 KBS 방송이 왜곡보도 논란에 휩싸인 건 모두 아는 일이 되었다. 현장에 있지 않았으므로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데, 카메라의 앵글은 촛불을 들고 목소리를 높이던 군중을 교묘히 피해 찍었고 조작하지 않고서는 막는 것이 불가능한 현장음은 조작되었다고 한다. 그날의 현장에 있었던 문화평론가 진중권은 진보신당 게시판에 이에 관한 글을 남겼다. 그의 글의 요지는 “그것은 중계방송이 아니라 하나의 판타지물”이라는 표현으로 요약된다. 이것이 <워낭소리>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우리의 현실 경험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워낭소리>를 이 왜곡보도와 동일시하여 비판하려는 뜻을 갖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영상과 소리의 합일성이 실은 얼마나 쉽게 분리되고 이용될 수 있는지 동시에 그것이 분리되어 재결합했을 때 어떤 왜곡이나 충만한 정감 그 어느 것이라도 불현듯 일으킬 수 있는지를 예시하고 싶다. 새해 벽두의 이 사건은 <워낭소리>를 생각할 때 무관하지 않으며 나의 관심은 진중권이 아니라 그가 말한 판타지에 있다.

 

워낭 울리지 않아도 워낭소리가 나네?

 

사운드의 영화학자 미셀 시옹은 그의 저서 <영화와 소리>(민음사 펴냄)의 첫장을 우연히도 소와 음매 사이에 관해 설명하는 것으로 연다. 자크 타티의 영화 <트래픽>에서 트럭을 몰고 가던 한 남자가 초원에서 저 멀리 있는 희미한 물체를 얼핏 보았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은 그의 정확하지 않은 시야가 아니라 원근법을 깨고 귀에 가깝게 들려오는 음매라는 소리라는 것이다. 이때 소라는 기의는, 그러니까 저것이 소라는 것은 음매라는 소리의 기표로서 확실하게 지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영상과 소리의 조정에 관한 예이며 한편으로는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는지에 관한 예이기도 하다. 이것 역시 <워낭소리>를 말하는 데 무관하지 않다. 아니 무관하기는커녕 미셀 시옹은 다른 저서 <오디오-비전>(한나래 펴냄)에서 “영화는 영상예술. 환영(幻影)이라고? 물론. 그것 말고 뭐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 책에서 얘기하려고 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시-청각 환영”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나의 관심은 미셀 시옹이 아니라 그가 말한 시-청각 환영에 있다.

 

경상북도 봉화에 사는 한 노부부와 그들과 함께 세월을 살아온 마흔살 먹은 늙은 소를 주인공으로 한 이충렬의 영화 <워낭소리>는 이들 촌부의 일상적 모습을 특히 그들이 소와 함께 얽혀 사는 모습을 일종의 운명적 공동체로 보여주는 영화다. 이때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소가 등장하지만 할머니는 다소 다른 자리에 있고 할아버지와 소가 주된 주인공이다. 할아버지의 느리고 무너질 것 같은 걸음과 마흔살 먹은 소의 비틀거리는 걸음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줄 때, 얇게 휘어서 성치 않은 왼쪽 다리를 이끌고 논밭을 매는 할아버지와 숨쉬기도 곤란한 소가 함께 농사일을 할 때 그들은 흡사 하나가 된다. 결국 이 영화는 소멸하기 직전에 놓인 두 육신 중 하나가 먼저 떠나고 머지않아 또 하나가 곧 따를 것이라는 비정한 삶의 퇴장 순서에 대한 아름다운 마지막 기록이다. 이 점을 성실하게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워낭소리>에 배인 정감을 설명하는 길이 되겠지만 여기에는 사실 좀더 말해야 할 다른 문제들이 있다.

 

보신각 타종식의 왜곡방송과 미셀 시옹의 소와 음매 사이의 지적을 떠올릴 때 <워낭소리>가 정감을 일으키는 진원지는 단순한 이 서정적 묘사를 넘어서 다른 영역에 있다고 나는 느낀다. 전적으로 공감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지와 사운드에 가해진 이 영화의 인위성을 주목해야만 한다. 진중권이 말한 판타지와 미셀 시옹이 말한 시-청각 환영의 문제가 여기 있다. <워낭소리>는 판타지이며 환영의 영역에 있다.

 

이 점이 <워낭소리>의 전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초가 된다. 예컨대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올드 파트너’(Old Partner)이지만 한글 제목은 <워낭소리>다. 영어 제목은 영화의 내용적 면모를 따라 지어졌지만 한글 제목은 정감의 작동방식에 따라 지어졌다. 그 방울의 소리가 그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워낭은 소의 목에 걸려 있는 방울이고 할아버지의 소는 워낭을 차고 있으며 소리를 낸다. 그러니까 워낭이 울리면 워낭소리가 날 것이다. 혹은 워낭이 울려야 워낭소리가 날 것이다. 하지만 워낭이 울리지 않아도 워낭소리가 들린다는 것이 이 영화의 역전된 착상이다.

 

힘들어서 더는 농사일을 못하겠다며 이제 우리도 다른 이들처럼 농약을 치자고 할머니는 잔소리를 늘어놓고 할아버지는 소의 건강에 치명적이니 그럴 수 없다는 말로 둘러댄다. 밭에서 시작한 이 대화는 그들이 서로 갈라진 길로 나뉘어서 갈 때조차 이어진다. 그때 그들은 침묵하고 말하고 있지 않은데 대화는 외화면에서 이어진다. 그때 그 자리에서 말을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자리에서 녹음된 소리가 지금 그들의 모습 위로 들어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노부부가 소를 타고 논밭과 집을 오갈 때, 허름한 대청마루에 앉아 있을 때, 그들의 입은 조용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늘 화면 위를 흐른다. 혹은 다른 대화를 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우리가 듣는 내용은 늘 소에 관한 것이다. 만약 한 두 장면에서 이 방식이 고수될 때 그건 기능적인 선택이며 특기할 만한 사항도 아니지만 이 영화는 시종일관 집요할 정도로 그러하다. 그러니까 소리는 그때 그 자리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인식하는 것이 이 영화를 보는 첫 번째 방법일 정도다.

 

여기에 두 번째 종류의 출처없는 소리가 등장한다. 비판받을 만한 구석이 있지만 너무 노골적이어서 심지어 순박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이 인공적 소리는 농촌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거의 매 장면에서 들려온다. 후시녹음으로 들어갔을 것이 분명한 지저귀는 산새 소리, 구슬픈 뻐꾸기 소리, 온갖 종류의 벌레소리, 개구리 소리, 우리가 농촌이라는 곳에 관해 상상할 때 떠올릴 수 있는 거의 모든 소리가 들려오지만 그건 지금을 가리키고 있지 않으며 화면 안에 그 소리의 진원지는 없다. 그중에서도 워낭소리는 소가 움직이지 않아도 마치 환청처럼 지속적으로 들려온다.

 

영화 전체가 일종의 더빙판 같은 느낌

 

이렇게나 끈질기게 영상과 소리를 분리시켜 완성한 다큐멘터리가 또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영화 전체가 일종의 더빙판이라는 느낌까지 든다. 만약 이 영화를 볼 때 소리를 끄고 영상만 본다면 혹은 영상을 지우고 소리만 듣는다면 우리는 그때 서로 다른 두 버전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니 이때 영상이 행사하지 않는데도 이미 행사되는 소리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미셀 시옹은 SF영화 <스타워즈>에서 그 유명한 자동문의 문소리를 지적한다. 관객에게 열려 있는 문과 닫힌 문 두숏을 보여주고 그 사이에 문이 열릴 때 나는 푸쉿 소리만 들려주어도 관객은 스스로 문이 열렸다 닫히는 장면을 보았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말하는 “추가된 환영”일 것이다. <워낭소리>는 이 노부부가 오로지 소에 관해서만 말하고, 소와 함께 살고 있으며, 소와 함께 인생을 마감할 것 같다는 환영을 추가하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두 가지 비판의 입장이 있을 수 있다. 만약 다이렉트 사운드(영상과 소리의 활용은 유물론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 주의자들이라면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기극이다. 혹은 다큐멘터리의 진실성이 현실의 내밀한 포착, 즉 구성이 아니라 포착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라면 또한 <워낭소리>는 심각할 정도로 리얼리티가 어그러져 있어서 비판의 도마에 오를 것이다. 그것은 진실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맥락이다.

 

나는 <워낭소리>가 일반적인 다큐멘터리가 추구하는 진실을 포착하고자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실이 있다 해도 그건 우리가 생각하는 촌부의 세밀한 삶의 리얼리티- 이미 말한 대로 영상과 소리의 불일치로 리얼리티는 거의 소멸한다- 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의 구축만이 이 영화의 진실이다. 이 말의 절반은 비판이지만 절반은 옹호일 것이다. <워낭소리>의 목적은 자기 환영성의 완성에 있다.

 

환영성을 강력하게 만드는 몇 가지 것들이 있다. 말하자면 우선 관객이 이 영화를 기승전결로 이해하도록 유도하려는 내러티브의 고정점이 있다. 영화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누는 대화의 전부가 소에 관한 이야기로만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농사를 짓고 딸린 가족이 없는 노부부의 삶이 단조롭다고는 하나 그들의 삶의 대화가 전부 소에 관한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건 현실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거의 늙은 소에 대해서만 말한다.

 

대화가 전부는 아니다. 카메라가 인물을 담는 방식에서도 주체와 대상을 나누어서 한곳으로 집중하게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소를 보여주는 카메라의 시선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감독은 할머니가 영화를 좀 알고 할아버지는 사진을 찍는 줄로 알 만큼 몰랐다고 표현했다. 이때 영화에서 할머니는 늘 보는 사람이며 할아버지와 소는 늘 보이는 대상이다. 할아버지가 무언가를 본다면 그건 소를 보는 것이며 소에 대한 반응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 오가는 시선의 교환보다 할아버지와 소 사이의 시선의 교환이 훨씬 많으며 그리고 건너에는 그 둘을 보는 할머니의 시선이 있다.

 

또한 할머니는 카메라를 의식하며 말하지만 할아버지는 카메라를 의식하지 못하고 잡힌다. 말하자면 할머니가 카메라에 대고 액션을 하는 것이라면 할아버지는 대부분 카메라가 잡아내는 리액션의 상태다. 할아버지와 소가 눈과 눈, 발과 발이라는 육체적 환유의 관계로 묶이고 있을 때, 또한 할아버지의 갈라 터지고 굳은살 박인 워낭을 쥔 손,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 그것은 소의 늙은 몸과 머리로 자연스럽게 연관된다. 심지어는 그렇게 교차편집된다. 그러나 할머니의 육신은 그 어디에서도 그만한 클로즈업을 부여받지 않는다. 할머니를 영화 안에 화자로 심어두고 나머지 대상인 할아버지와 소를 보도록 하는 카메라의 방식이다. 그게 이 영화에서 할머니가 객관적 화자가 되고 할아버지와 소가 주관적 오브제가 되는 이유다.

 

리얼리티 강조한 <송환>과는 대척점에

 

이미 말한 것처럼 <워낭소리>의 환영에의 유지는 강박적으로 이미지와 사운드를 분리시킨다. 그리고 인물들을 주체와 오브제의 층위로 갈라놓는다. 그것들을 따라 이야기 안에 이야기를 진전시킨다. 이때 문득 궁금해지는 것은 그렇다면 왜 이 영화는 이런 방식을 동원하여 환영을 이토록 추구하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그것이 한편으로는 재현적 실패에 기인하며 또 한편으로는 극화에의 욕구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충렬은 물리적으로 충분한 재현을 하는 데 실패했을 수도 있다. 즉 사운드를 쓸 만한 장면과 이미지를 쓸 만한 장면을 서로 나누어 인위적으로 재결합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야기를 진전시킬 수 없을 만큼, 유용한 촬영분을 충분히 찍어두는 데 실패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중요한 건 거기에 보완심리가 작용했다는 거다. 나는 이 기술적인 실패를 보완하려는 욕구가 우선 이 영화의 환영성을 끌어낸 한 가지 계기라고 추론한다. 나머지는 한번 그렇게 들어선 환영을 끝까지 고수하려는 태도다. 그건 거의 극영화의 환영을 유지하려는 태도에 가깝게 다가가며 감독 자신에게 몇 가지 철칙을 안겨주는 것 같다. 이 점에 관해 비판이나 비난이 아닌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 김동원의 <송환>과 변영주의 <낮은 목소리2>의 한 장면을 말해도 좋을 것이다.

 

김동원의 <송환>에는 이 다큐를 유명하게 만든 대표적인 장면이 있다. 비전향 장기수 조창손 할아버지와 박영석 할아버지가 오랜만에 만났을 때 김동원은 그 둘의 대화에 마이크를 갖다 대는 것이 죄송스러워 끝내 그 둘이 대화하는 장면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그 순간의 리얼리티를 놓친 것이다.

 

김동원은 찍을 수 있는 것과 찍지 못할 것이 있으며 찍지 못한 것은 메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더 정확히는 왜 메울 수 없는지 설명하는 것 자체를 영화의 형식으로 변환하여 넣은 다음 역설적으로 그 장면을 복원하였다. 어찌됐든 그는 여기에 어떤 환영을 도입하는 대신 찍지 못한 장면(즉 듣지 못한 장면)의 실패의 기록을 남기기로 한 것이다. 그게 위대한 과정으로서의 다큐멘터리, 태도로서의 윤리적 다큐멘터리를 완성한다. 거기에서 환영의 개입은 자연스럽게 제거된다.

 

김동원의 <송환>이 얼마나 환영을 경계하는지는 비전향 장기수들을 다룬 다른 다큐에 비해 <송환>에서 그들을 영웅시하는 면모가 단 한 장면도 없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충렬의 경우는 그 반대일 것이다. 그는 말 한대로 아마 꼭 찍고 싶었던 장면을 김동원처럼 놓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김동원과 또한 다르다. 그는 보완의 과정을 거치기로 하였을 것이며 그걸 복원하기 위해 들여온 방편 중 하나가 바로 소리와 영상을 적절하게 분리, 재결합하는 것이다. 이 점이 자연스럽게 환영의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김동원이 조정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충렬은 조정의 가능성을 시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 “송아지가 날뛰어서 할아버지가 쓰러지는 장면을 느리게 잡은 이유는 뭔가”(<씨네21> 684호 ‘노인과 소가 있는 풍경 <워낭소리>’)라고 물었을 때 이충렬은 “그 상황이 벌어졌을 때 ‘어’ 하고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한테 뛰어들었다. 그냥 쓰면 내가 드러나서 하는 수 없이 슬로와 스틸로 편집할 수밖에 없었다”고 답한다. 늙은 소 대신 들여온 젊은 소가 새끼를 낳고 그 송아지를 길들이다가 할아버지가 송아지에 채여 넘어지는 장면에 대한 물음과 답이다. 그런데 이 답은 당연한 말 같지만 경우에 따라 이상할 수도 있다. 나는 이충렬의 답을 듣고 변영주의 영화를 떠올린다. 만약 변영주라면 이 장면에 대한 이충렬의 대답에 공감할 것인가.

 

비전문 배우 동원한 극영화인 셈

 

변영주의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2>에는 유명한 한 장면이 있다. 고랑에서 호박을 캐오던 할머니가 어쩌다 호박을 놓치자 갑자기 카메라 뒤에 있던 감독이 뛰어들어 그걸 주워 함께 걸어오는 장면이다. 감독이 이때 “할머니는 우리 영화에 어떻게 나왔으면 좋겠냐”고 물으면 “소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두고두고 이 다큐의 본질을 말할 때마다 말해져왔다.

 

이렇게 물어보자. 이충렬은 안된다고 생각하는 걸 변영주는 왜 된다고 생각한 것인가. 이충렬은 할아버지가 달려드는 송아지에게 넘어질 때 왜 자기가 그 안으로 뛰어들어간 것을 보여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반대로 변영주는 왜 프레임 안으로 갑자기 뛰어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인가. 여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 두 장면은 연출에 대한 지론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변영주는 잘 알려진 것처럼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에 맺어진 관계를 중요시하는 다큐를 찍었다. 변영주는 그러므로 카메라가 돌아가더라도 시급한 일이 있으면 그 안에 자기가 등장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환영을 깨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반면 이충렬은 어쩔 수 없이 자기가 드러난 프레임을 잘라내는 한이 있어도 극화된 환영성을 깨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환영을 깨고 관계를 인정할 것인가, 환영을 유지하기 위해 그 관계가 드러나더라도 배제할 것인가. 이충렬의 선택은 후자다.

 

<씨네21>의 질문에 대한 이충렬의 앞선 대답은 이 영화에 할머니를 제외한 그 누구의 인터뷰도 없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한다. 집에 가족이 찾아왔을 때 나는 이충렬이 자식들을 인터뷰하지 않았다고 믿기 어렵다. 단지 인터뷰는 진행되었겠지만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걸 넣는 건 다큐멘터리의 오래된 방식인데도 하지 않았다. 이유는 자기 자신이 화면에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물론 인터뷰를 넣지 않고 완성된 수많은 다큐멘터리가 있음에도 <워낭소리>의 경우는 누구의 인터뷰라도 극의 흐름을 깬다면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인상이 강하다. 극적인 구성을 깨기 싫은 것이다.

 

극적인 구성이라는 면에서 여기 한 가지를 추가할 수 있다. 이른바 극화된 시점숏이다. 영화에는 소가 음매하거나 푸르륵거릴 때 그걸 보는 할아버지의 시점숏이 있고, 그를 보는 듯한 할머니의 시점숏이 있다. 그러나 시선이 잘 맞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같은 자리에서 계획적으로 설계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말해준다. 전체 구성에 입각해서 편집상 시점숏을 만들어낸 것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시점숏이란 시선의 연속성에 헌신하며, 시선의 연속성이란 극영화가 환영적 완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고안된 방법인데 이 영화는 그걸 따르려고 한다. 다큐멘터리에서도 할 수는 있겠지만 미리 계산된 카메라의 약속이 아니면 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그것이 등장할 때 거기에는 극화함으로써 환영을 강화하겠다는 욕구가 있는 셈이다. 일반의 다큐멘터리에서 창작자가 대상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가 대두된다면 일반의 극영화는 대상이 대상과 어떻게 환영적으로 결합하는가에 축을 두는데, <워낭소리>는 후자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나는 이 영화를 비전문 배우들을 동원한 극영화라고까지 말하고 싶어진다.

 

사멸의 회한을 보았다면 제대로 본 것

 

“애초 떠올렸던 이미지들을 염두에 두고 집중적으로 재구성했다. 현실을 도려내서 보여주는 액티비즘의 관점에서는 비난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방식이 심성적으로 끌린다.”(이충렬, <씨네21> 앞의 인터뷰) 나는 이충렬이‘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진실한 삶의 현장을 낱낱이 포착하려 했다’라고 말하는 대신 위와 같이 말하는 태도가 솔직하고 현명해 보인다. 우리는 결코 <워낭소리>를 보고 노부부의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그리고 통일된 삶을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건 거짓이 될 것이다.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의 진실성이라는 연장선에 놓고 혹은 그 위반을 놓고 페이크다큐라고 비판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으며 더군다나 간편한 일이다. 하지만 내게 이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는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 하는 원론적인 질문이 아니라 우리는 당도한 환영을 매 순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인 것처럼 보인다. 이 문제는 좀더 심사숙고해야 하겠지만 나는 어색하지만 집요하게 도입된 환영의 선들을 따라 사멸 직전의 육신에 닿아본 이 영화를 일단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다. 여전히 몇 가지 방식에는 공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죽음의 그림자와 사멸에 대한 회한이 여기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그걸 보았다고 말해야 이 영화를 정말 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늙은 두 노인과 한 마리의 늙은 소라는 배우들을 출연시킨 농촌 판타지를 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2009년 벽두에 두개의 환영을 맞이하게 됐다. 하나는 새해 첫날 현실의 시간 속에서 공공연히 일어났으며 또 하나는 얼마 뒤 창작물로서 애매하게 찾아왔다. 이 두개의 환영 중 나는 전자에 분노하지만, 나머지 하나에는 잠시 망설인 다음 끌어안는다.


 

 

 

2) 씨네21 - [나의 친구 그의 영화]워낭소리여, 나의 신음소리여 (김연수)

 

 

[나의 친구 그의 영화] 워낭소리여, 나의 신음소리여

글 : 김연수 (작가) | 2009.02.12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쓴 농약이름 모자를 보며 가자와 용산을 떠올리다

 

 

결국 결론은 “신토불이,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일까? 샌드위치, 햄버거, 스테이크, 파스타…, 현지에서 먹는 양식이란 정말 기가 막힌 맛이리라. 하지만 그것도 한두번이지 두달하고도 몇주째 입에 넣다보면 그게 도무지 음식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런 걸 음식이라고 먹다니. 그런 독백이 절로 나온다. 그 지경이 되면 남의 나라에 있는 건 자신이면서 그 나라 전체가 글러먹었다는 듯이 투덜거리게 마련인데, 지난호에 실린 글을 보니 중혁군이 지금 딱 그 지경인 것 같다. 무슨 스포일러의 폭력이니, 고분고분 당하고 있지 않겠다느니. 역시 빨리 귀국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을 듯하지만….

 

순진무구한 초딩의 표정으로 울어버렸네

 

<워낭소리>가 개봉했다는 소식을 듣고 뭐, 그 정도, 그러니까 신토불이 의식을 고취시키는 다큐멘터리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럼에도 극장까지 가서 다큐멘터리를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안면이 있는 박봉남 독립 PD의 소개글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화면발이 받는 얼굴인지 그간 여러 다큐멘터리에 출연할 일이 있었는데, 그때 알게 된 분이다. 이분이 그 글에다 “아! 나는 75분 내내 숨을 죽이고 이 영화를 봤다. 아! 정말 훌륭한 작품이었다”라는 소감을 남긴 것이다. 이러니 어찌 극장에 가서 보지 않을 수 있을까? 더구나 내 다큐멘터리 인생 최고의 후회는 <푸지에>를 극장에서 보지 못한 것이니.

 

그래서 파주까지 가서 다큐멘터리를 봤다. 무조건 이 다큐멘터리를 보시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다. 표현에 인색한 박봉남 PD가 “아! 아!”라고 신음소리를 적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박봉남 PD는 어떤 경우에 “아! 아!”라는 신음소리를 내는지 모르지만, 나의 경우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특히 경제적 보상을 바라지 않고 뭔가를, 그것도 몇년에 걸쳐서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 이런 신음소리를 낸다. 다큐멘터리를 볼 때 문제가 있다면 내가 눈물을 너무 많이 흘린다는 점이다. 그건 내가 그런 다큐멘터리의 내러티브를 표면 그대로, 진심으로 믿기 때문이다. 나는 돈을 무시하는 예술가들의 진심을 의심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돈을 무시하는 한 그들은 진실을 말하게 돼 있으니까.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볼 때, 나는 참으로 순진무구한 초딩의 표정으로 곧이곧대로 내러티브를 따라가다가 끝에 가서는 울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 자바라·키타진·골자비…

 

솔직히 말하겠다. 그간 나는 영화산업을 혐오하던 사람이었다. 지난 몇년간 영화에 대해 한국영화계가 말하는 것은 오직 돈에 대한 말들뿐인 것 같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극장에 갔다가 내 몸에서 나올 만한 체액이라곤 위장에서 솟구치기 시작해 구강을 거쳐 턱으로 흘러내리는 걸쭉한 액체뿐이라는 걸 여러 번 확인했다. 내가 아는 좋은 감독들은 몇년째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그 걸쭉한 액체에 대해 어떤 변명도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돈에 대해서만 말할 때,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은 순수한 불만족일 뿐이다. 순수한 불만족, 그러니까 업자들의 불만족. 윤오영의 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에 나오는 노인처럼 이 세상에 ‘대운하 파던 업자’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그들은 항상 더 많은 돈을 원하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질 수 없으니까.

 

나는 경제를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무시하는 건 경제만을 얘기하는 자들이다. 그 사람들은 왜 경제만을 얘기하는 걸까? 그건 아마도 그 사람들이 말하는 경제란 자신들만 챙기는 돈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 다 같이 돈을 버는 문제라면, 그렇게 쉬지도 않고 경제만을 얘기할 리는 없다. 난 그 정도로 인간이 이타적이라고는 믿지 않으니까. 그러므로 돈을 거부하고 우리 모두 독립제작에 나서자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건 <워낭소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소가 먹을 풀을 길러야 하니까 할아버지가 농약을 치지 않자 할머니에게 지청구를 듣는다. 그럴 때조차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머리에는 ‘자바라, 키타진, 골자비’ 같은 글자가 적힌 모자를 쓰고 있다. 그 모자를 그들에게 씌운 건 농약회사들이다.

 

무조건 극장에서 돈을 내고 보시라

 

이게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다. 우리가 아무리 매매의 세계를 거부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미 그 세계 깊숙이 들어와 있다. 할아버지는 ‘안 팔아, 안 팔아’라고 소리 질렀고, 40살이 먹은 소는 죽기 바로 직전까지 겨울 동안 할아버지 내외가 불을 땔 수 있도록 나무를 해놓은 뒤에야 죽었다. 할아버지가 아무리 안 판다고 해도 우리는 끝내 할아버지를 설득해서 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나무를 잔뜩 해놓고서야 죽는 소를 우리는 이제 더이상 볼 수 없게 된다. 이 다큐멘터리가 개발의 논리에 밀려 사라지는 농촌의 정경을 다룬 작품일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자바라, 키타진, 골자비’는 무엇을 구매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세상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니 보시라. 무조건 보시라. 극장에 가서 돈을 내고 보시라.

 

그렇긴 해도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머리에 마을 이름이 적힌 모자를 씌워드리고 싶었다. 그 옛날 <전원일기>에서 유인촌이 쓰던, ‘양촌리’라는 글자가 인쇄된 모자 같은 걸. 종자처리중화제나 도열병방제제의 이름이 아니라, 아름다운 공동체의 이름이 적힌 모자를. 변하는 건 세상이 아니라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렇지 않은가? 대통령 한명 바뀌었을 뿐인데, 지금 우리는 아주 딴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또 다른 독립 PD 한명이 시리아에 가자고 했다. 거긴 위험하지 않아요? 내가 대답했다. 입국하기 어려울 뿐이지, 위험하지는 않단다. 만약 그게 가자 지구였다면? 절대로 안 갈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은 용산에서 철거민들이 불에 타서 죽은 날이다. 포털에 들어가니 메인에 ‘돌아온 그들 앞엔 부서진 집과 가족 시신뿐’이라는 제목이 보였다. 허겁지겁 클릭했더니 일방적으로 휴전이 선언된 가자 지구에 대한, 연민에 가득 찬 보수신문의 기사였다. 평소 국내문제를 다루던 논조를 보면 이스라엘을 극렬 지지해야만 할 텐데 자기 이익과 관계없는 딴 나라의 일에는 이처럼 상식적이다. 나도 모르게 용산을 다룬 기사인 줄 알고 클릭할 정도로 거기나 여기나 매한가지다. 제정신이 박혔으면 누가 가자 지구에 입국하겠는가? 중혁군도 그냥 유럽에 있는 게 낫겠다.

 

 

 

 

 

3) 씨네21 - [전영객잔] 심금 울리지만 껴안지는 못하겠다 (허문영)

 

     

 

[전영객잔] 심금 울리지만, 껴안지는 못하겠다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 2009.03.05

 

편집의 마술과 기만술 사이에서 <워낭소리>를 다시 평가함

 

 

몇주째 이 지면이 두 다큐멘터리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최초의 영화들이 기록 필름이었으며 카메라와 피사체의 관계가 텍스트 내적인 문제로 새겨진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는, 이야기에의 집중을 요청하는 극영화보다, 영화라는 매체의 기원 혹은 본성과 관계된 쟁점을 종종 더 명료하게 드러낸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24시티>와 <워낭소리>로부터 배우고 생각할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다. <24시티>는 두 차례 다뤄졌으므로 여기서는 <워낭소리>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려 한다.

 

좋은 가짜인가 나쁜 가짜인가의 문제

 

<워낭소리>의 극영화적인 장치들에 대해선 이미 정한석이 재론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정교하게 분석한 바 있다(688호). 그리고 나는 그 다음에 <24시티>의 페이크 다큐멘터리적 성격에 대해서 썼다(689호). 둘을 모두 유사 다큐멘터리 혹은 조작적 다큐멘터리라고 부른다고 해서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두 작품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은 ‘조작’의 지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24시티>의 조작은, 유명 배우가 현장 노동자로 분장해 구술함으로써, 관객이 인지하도록 기획되었다. 그러므로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그 조작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조작 안에서 무엇을 보고 들을 것인가의 결정을 요청받는다. 반면 <워낭소리>의 조작은 관객이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잊도록 기획되었다. 우리는 프레임에 등장한 이미지와 사운드가 그곳에 정말로 있었던 것처럼 느끼도록 유도된다.

 

스스로를 드러내는 조작은 정당하고 스스로를 은폐하는 조작은 정당하지 않은 것일까.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을 것이다. 편집과 사운드와 현장 연출이 전혀 없는 다큐멘터리는 상상하기 힘들다. 많은 사람들을 울렸던 다수의 방송 다큐멘터리들이 <워낭소리>보다 덜 조작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지아장커의 말대로 카메라의 등장으로 현실이 언제든지 왜곡될 수 있다면, 조작의 탈피란 근원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그 조작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슨 웰스의 <거짓의 F>의 유명한 대사 “이 세상에 진실과 허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있는 것은 좋은 가짜(good fake)와 나쁜 가짜(bad fake)뿐이다”를 인용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 ‘좋은’이 넓은 의미의 ‘감동적인’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 가짜는 ‘좋은 가짜’이다. <워낭소리>를 만든 이충렬 감독은 그렇게 믿는 것 같다. “연출이 얼마나 개입된 것인지를 문제 삼는 사람들이 많은데 중요한 것은 어떻게 표현되었느냐와 관객이 무엇을 느끼도록 하느냐가 아닐까요.” 이 작품을 보러 온 많은 관객도 그 견해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양식의 인지’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작품 앞에 섰을 때 그것의 양식에 대한 일정한 인지 없이 그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895년 최초의 영화를 보기 위해 그랑카페에 모여든 관객이 스크린에 도착하는 기차를 보고 혼비백산해서 뛰쳐나간 것은 그 인지가 전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의 관객이 많게는 수백명씩 죽어나가는 재난영화를 보고도 즐거울 수 있다면, 실제로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다큐가 실재의 기록이어야 한다는 ‘약속’

 

그런데 그 인지에는 일종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 그 약속은 창작가가 감상자에게 공식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약속이 지켜지기를 기대하고 그 약속 안에서 작품을 감상하며 그 약속이 깨졌을 때 혼란에 빠지거나 때로 배신감을 느낀다. 재난영화에서 실제로 사람들이 죽었다고 가정해보면 그 후유증을 짐작할 것이다. 좀더 간단한 사례가 있다. TV 오락프로그램인 <패밀리가 떴다>의 대본이 공개되었을 때 시청자 사이에 논란이 일었다. 그 프로그램은 ‘리얼 버라이어티’로 소개되었고 그것은 세밀한 각본 없이 출연자들의 즉흥적인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진 양식이라고 인지되고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그게 다 연기였던 말인가”라고 배신감을 토로한 사람들은 인지된 양식의 약속 안에서 그 프로그램을 즐겼던 사람이었다. 물론 “재미있으면 되지. 대본이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인가”라는 견해도 있었다. 이 견해는 <워낭소리>를 두고 “감동적이면 되지. 연출이 얼마나 개입되었든 무슨 상관인가”라는 견해와 통할 것이다.

 

누구나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어느 쪽이든 선택할 권리가 있다. 더구나 많은 ‘감동적’ TV다큐멘터리들에는 적용되지 않았던 엄격한 잣대가 애초에 방송용 다큐멘터리로 기획된 <워낭소리>가 극장에 걸렸다고 해서 갑자기 적용되어야 할 근거도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한쪽 편에 설 수밖에 없다. 반복하자면 이것은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약속의 문제이다. 다큐멘터리가 실재하는 삶의 기록이어야 한다는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물론 그 기록에는 작가의 주관적 반응도 포함된다. 사견으론 <송환> 이후 최고의 한국 다큐멘터리인 최하동하의 <택시블루스>는 택시기사인 작가 자신이 주인공이며 비루한 성매매에 자포자기의 태도로 이끌리는 충격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나는 그 약속 안에서만 시네마로서의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약속이 극영화와는 다른 경로로 진리의 지평을 향해 열려 있다는 점에서 원칙적으로 옳을 뿐만 아니라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실질적으로도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24시티>는 약속이 근원적으로 지켜질 수 없다는 자각을 전경화하며 자기만의 독법을 제시한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다큐멘터리의 약속, 어쩌면 그에겐 영화 그 자체의 약속에 대한 지아장커의 필사적인 질문이다. 그를 통해 지아장커는 역설적으로 약속을 지킨다.

 

리얼리즘에 충실할수록 환영성은 강화

 

그렇다면 <워낭소리>는? 이 특별한 다큐멘터리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단정하기에 앞서 그것의 방식에 대해 먼저 말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워낭소리> 역시 다른 독법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 독법은 너무나 혼란스러워 차라리 일정한 규칙이 없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물론 가장 중심적인 건 극영화의 독법이다. 이것에 관해선 정한석이 이미 세밀하게 지적했으므로(그는 “이 작품을 차라리 비전문 배우들을 동원한 극영화라고까지 부르고 싶어진다”고 했다) 여기선 한 가지만 덧붙이려 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10분쯤 지났을 때, 할아버지는 젊은 소를 사기 위해 소시장에 나온다. 할아버지의 정면숏 다음에 어떤 소의 숏이 이어진다. 그런데 카메라는 갑자기 빠른 패닝으로 약간 떨어진 곳의 소를 잡는다. 이것은 명백히 카메라가 할아버지의 눈이 되어 움직이는 주관적 시점숏이다(단순히 두 소를 보여주려는 의도였으면 이런 스위시패닝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시점숏은 등장인물의 시점과 관객의 시점을 일치시켜 동일시하도록 만드는 극영화의 방식이다. 별다른 기능이 없어 보이는 이 시점숏이 초반부에 등장했을 때, 나는 감독이 관객에게 이 영화를 극영화의 방식으로 보기를 권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태는 더 복잡하다. 다큐멘터리의 어떤 방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예컨대, 할머니의 인터뷰 장면들. 할머니는 카메라를 보고 할아버지와 소의 오래된 인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할머니의 진술은 장면이 바뀌어서 할아버지가 소와 밭을 갈고 있을 때도 계속된다. 그런데 그 말들은 묘하게도 할머니의 구시렁대는 혼잣말과 이어져 극영화의 방식으로 슬며시 이행한다. 게다가 할머니가 말하고 있지 않은 장면에서도 혼잣말이 나올 때는 방울이 흔들리지 않아도 방울소리를 내는 것처럼 어느 쪽도 아닌 일종의 환청이 된다. 할머니의 목소리와 워낭소리는 그 음원이 소리를 내지 않아도 우리 귀에는 들리는 것이다. 정한석은 이것을 환영성의 강화라고 표현했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망설여진다. 판타지는 말 그대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통칭하지만, 영화와 연관돼 말해질 때 환영은 현실을 재현한 이미지를 뜻하며 영화의 본질에 속한다. 현실적으로 보일수록 그러니까 방법으로서의 리얼리즘에 충실한 영화일수록 환영성은 더 강화된다.

 

따라서 할머니의 입과 목소리가 맞지 않을 때, 환영성은 오히려 훼손된다. 하지만 그치지 않는 워낭소리는 다르게 작용한다. 음성과는 달리 음향의 경우 음원과의 시청각적 동시성에 관객이 덜 주목하기도 하지만 방울이 눈에 띄게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를 내며 그것이 비교적 흔한 소리이기 때문에 새 소리나 바람 소리와 같이 일종의 주변음(앰비언스)처럼 들린다. 그러므로 워낭소리는 환영성을 해치지 않으며 때로 보완한다. 목소리와 소리에 관한 한 <워낭소리>의 방식은 엉성하고 뒤죽박죽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그것이 혼란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개별적 캐릭터이자 내레이터인 할머니가 자신의 심경을 효과적이고 때로 유머러스하게 전하는데다 필요한 정보를 적절하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관객은 방식의 혼재 자체로는 감상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 혼성적 양식(주로 방송 예능프로를 통해)에 익숙해 있는 것 같다.

 

차라리 ‘환청의 영화’라는 편이…

 

이 영화의 수사학이 있다면 그것은 환청의 수사학이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그러나 매우 조작적인 순간의 하나는 죽은 소를 묻고 나서 방에 누워 있는 노인을 비추는 끝에서 두 번째 장면이다. 화면 밖에서 워낭소리가 들리고, 끙끙 앓으며 눈을 감고 있던 할아버지는 눈을 뜨고 고개를 (아마도 마당쪽으로) 돌리려 한다. 우리는 노인이 귀가 매우 어둡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워낭소리에 반응하고 있다. 워낭소리는 정말 그때 울렸을까. 울렸다 해도 노인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까. 아마 그는 환청을 들었을 것이다. 주변음에 묻혀 있던 워낭소리는 이 장면에서 비로소 특별한 소리, 바로 소의 목소리의 환유로 관객에게 지각된다. 우리는 살아 있는 소가 울리던 워낭소리를 식별하지 못했지만, 소가 죽은 뒤 환청으로 비로소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 대목에선 <워낭소리>를 차라리 환청의 영화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이 영화에서 가장 수긍하기 힘든 것은 소의 눈물이다. 정확히 말하면 소의 눈물이 놓인 자리, 즉 편집의 문제다. 소는 두번 눈물을 흘린다. 한번은 할아버지가 소를 팔기 위해 소시장에 끌고 나가려 할 때이며 다른 한번은 잠시 뒤 소시장에서 소 거래인이 할아버지에게 소를 도로 끌고 가라고 소리칠 때이다. 나는 소가 코를 뚫을 때 눈물을 흘린다고 들었지만, 슬픔 때문에 우는지는 알지 못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이상하다. 소의 눈물장면은 두번 모두 소의 얼굴이 프레임을 꽉 채운 클로즈업 숏으로 커트된다. 이 편집은 할아버지와 헤어지게 된다는 사실에 소가 슬퍼했고 소시장에서 이젠 소 취급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더욱 슬퍼한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정작 소가 우는 숏에서 공간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과연 소는 그때 그 장소에서 눈물을 흘렸을까.

 

나는 그것이 정말 궁금하지만 감독에게 묻기 두렵다. 대답을 모른 채 나는 이 편집에 반대한다. 고백건대 내가 <워낭소리>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면은 바로 이 소시장 장면이다. 왜소한 80살 노인이 삐쩍 마른 40살 소를 데리고 와서 팔려고 한다. 사람들은 빈정대고 한 상인은 “이런 소 있으면 다른 소도 안 팔리니 빨리 데리고 가라”고 차갑게 쏘아붙인다. 이젠 고기값도 받을 수 없는 노쇠한 소, 30년을 함께 산 그 소를 더 먹일 기력조차 남지 않아 마지못해 시장에 끌고 온 병들고 휘어진 노인, 무지막지한 노동으로만 채워진 생의 마지막 문턱에 선 두 비루한 육체를 향한 세상의 냉소와 멸시. 우리는 노인과 소에겐 어떤 연출도 개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두 늙은 육체를 그 자리에 이끈 건 고단하고 힘겨운 삶 혹은 가혹한 운명밖에 있을 리 없다. 이 한없이 쓰라리고 슬픈 장면에 마침내 이르렀다는 사실만으로도 <워낭소리>는 비할 바 없이 소중한 기록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무표정에 인과관계를 덧입히지 마라

 

그러나 편집된 소의 눈물이 거기 놓이지 말아야 했다. 소가 정말 눈물을 흘렸다 해도, 그 장면은 편집 없이 그때 그곳에서 보여졌어야 했다. 이 편집은 정서가 풍부한 많은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슬픔을 전하는 데는 효과적일지 모르지만 편집의 마술이 동시에 기만술이라는 것을 아는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겐 이 영화가 이전까지 어긴 약속을 곧바로 상기시킨다. 정한석이 예리하게 관찰한 대로 이 영화에는 시선이 서로 맞지 않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상대 숏들, 그러니까 다른 시간대에 찍힌 것으로 추정되는 두 숏을 시간적으로 연속된 숏/역숏인 것처럼 이어붙인 장면들이 꽤 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시점숏과 마찬가지로 다큐멘터리의 방식이 아닌 극영화의 방식이다. 소의 눈물 숏이 과연 정말 그때 그곳에서 찍혔을까, 그 눈물은 정말 슬픔의 눈물일까, 하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떠오르는 의심은 약속을 어겨온 것에 대한 대가의 하나일 것이다.

 

또 다른 대가는 이 편집이 소시장 장면이 지닌 심원한 감정을, 상투적인 인과의 서사로 해소해버린다는 점이다. 노인과 소의 많은 공통점 중 하나는 그들의 무표정이다(노인은 한번은 사진 찍으면서 억지로, 다른 한번은 소 자랑하며 안쓰럽게 단 두번 웃고,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서 있기조차 힘겨운 몸으로 간헐적인 신음 외엔 어떤 불평도 없이 그들이 묵묵히 밭을 갈고 있을 때, 둘은 인간과 소의 경계를 넘어 운명적인 동반자처럼 보인다. 그토록 혹독한 노동의 세월을 다 보낸 그들을 맞이하는 시장에서의 비하와 멸시의 시선들 그리고 외로움. 좌절하고 슬퍼해야 마땅해야 할 그 상황에서조차 그들은 새겨진 듯한 무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다. 어떤 수사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릴 아득하고 뼈저린 무표정. 이때 곧바로 이어진 소의 눈물이 전시하는 즉각적 감정 노출은 이 비애의 심연를 돌연 패턴화된 감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마지막의 환청장면. 여기선 노인이 환청으로 짐작되는 워낭소리를 듣고 언덕에 홀로 앉아 상념에 잠긴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지만 그 수사학적 재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편집을 마찬가지 이유로 신뢰하지 못하겠다. <워낭소리>는 종종 심금을 울리는 순간에 이르면서도 다큐멘터리의 약속을 깨고 극영화의 편집으로 패턴화된 감정의 인과관계를 만들어내려 한다. 정한석은 이 영화의 많은 단점을 지적한 뒤에 “잠시 망설인 다음 껴안는다”고 썼다. 나는 반대로 거부할 수 없이 마음을 적시는 장면들에 흔들리면서도, 결국 껴안지 못하겠다.

 

 

 

 

4) 네오이마주 - [워낭소리]비극이기에 아름다운 로맨스 (빈장원)

 

     

 

[워낭소리] 비극이기에 아름다운 로맨스

필진 리뷰 2009/01/09 19:27 Posted by 네오이마주

빈장원

 

사랑은 비극이어라

 

사랑은 비극이다. 비극이기에 아름다울 수 있으며 눈물 흘릴 수 있는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극으로 시작해 비극으로 결말 맺는 참으로도 몹쓸 사랑이야기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만남 자체가 비극이었듯, 그들의 사랑 또한 죽음으로마무리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둘의 사랑을 아름답지 않았노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송희일의 장편 데뷔작 <후회하지 않아>의 두 주인공은 서로를 만난 것에 대해 한 순간의 후회가 없다. 사회라는 거대한 통념아래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을 나누는 그들의 만남 또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렇게 사랑이란 고통받고 슬퍼해야하며 죽음마저 감당해야 한다. 사랑은 비극이기 때문이다.

 

유사 관계망을 지닌<워낭소리>와 <쌍화점>

 

비슷한 시기에 본 <워낭소리>와 <쌍화점>은 장르는 분명 다르지만 너무나도 유사한 관계망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두 영화에 나오는 삼각관계망은 기존 우리가 익히 보았던 것과 조금씩 틀려 오히려 매력있다. <워낭소리>의 할아버지의 애정의 집착은 그와 더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할머니가 아니라 그가 부리는 소이다. 할머니는 매일 소만 생각하는 남편을 원망하며 자신의 인생을 한탄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 고생하는 건 생각지도 않으시고 소의 곁에서 떠나지 않는다. 

 

캐릭터가 다를 뿐 <쌍화점>의 구조 또한 비슷하다. 왕의 집착의 대상은 그를 보위하는 무사 홍림이다. 본연히 어여쁜 왕후가 곁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남자를 사랑하는 운명을 안고 태어난 왕은 왕후보다 홍림을 먼저 생각한다. 그런 왕후는 왕과 홍림의 관계를 맹렬히 비판하고 집착해야 당연하건만 별로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홍림과 세자 만들기를 위한 합궁 후에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음과 양이라는 육체는 속임도 없이 솔직하게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고 둘을 사랑하게끔 만든다. 그로인해 오히려 질투하는 사람은 왕이다. 왕은 어쩌면 <워낭소리>의 할머니와 닮아 있다. 오래송안 사랑했건만 사랑한 대상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른 곳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누구나 질투할 수 밖에 없는, 소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망울

 

<워낭소리>와 <쌍화점>은 그래서 비극적인 로맨스다. 이런 관계망 자체뿐 아니라 그들의 사랑이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왕과 홍림의 처절한 최후는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처럼 처참하다. 하지만 난 그들의 죽음을 바라보다 왕후이 눈물보다 <워낭소리>에서 늙어 죽어가는 소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망울이 더 애잔하게 느껴졌다. 말도 못하는 소 앞에서 할아버지 또한 아무말 없이 바라볼 뿐이다. 그러니 불만 가득 넋두리를 늘어 놓는 할머니의 함숨이 왕이 왕후와 홍림의 관계를 향한 질투보다 더욱더 강하게 와 닿는다. 자신보다 더 낭만적인 로맨스를 즐기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 아플까?

 

지독히도 비극적인, 그래서 아름다운 로맨스

 

소는 당연히 죽고, 남는 것은 할아버지의 사랑이다. 이 세상 어느 남녀, 불행하겠지만 어느 동성간의 사랑이 이보다 더 간절할 수 있을까? 할아버지는 '소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어야지'라고 말한다. 물론 그 말이 현실화되진 않는다. 현실은 현실이니까. 그래도 육은 살았지만 영은 죽어있으리라. 할아버지의 영혼은 소를 따라 저 세상으로 긴 여행을 떠났는지도 모른다. 소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겠다니? 생각해 보면 이 말은 멜로 영화 속에서 사랑하는 여인이 죽을 때 하는 대사다. 그것도 할아버지는 서스럼없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말하듯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마치 로미오의 죽음을 보고 자신도 생을 마감하는 줄리엣처럼. 사랑은 이런 것이다. 그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이 있고 설레여하는 사람이 있으며 종국엔 죽음도 있다. <워낭소리>는 감동을 주려는 다큐가 아니다. 인생을 보여주는 작품 또한 분명 아니다. 이것은 멜로 영화다. 지독히도 비극적인, 그래서 아름다운 로맨스다

 

 

 

5) 오마이뉴스 - 세상사 공존의 이유를 발견하다  (한상철)

 

 

 

<워낭소리> 세상사 공존의 이유를 발견하다

 

[오마이뉴스 한상철 기자]

 

 

경북 봉화의 팔순 촌로와 마흔살이 다된 늙은소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타리 영화 < 워낭소리 > 는 영화 평론가 정한석의 지적처럼 페이크 다큐멘터리에 가깝습니다. 다큐멘터리지만 사실은 의도적으로 특정사실 부문을 중심으로 영상과 스토리 자체를 편집한 영화란 뜻입니다.

 

< 인간극장 > 류의 프로그램이 출연자들의 삶의 연속선상에서 다양한 생활의 순간들을 기록한 것이라면 < 워낭소리 > 는 농부 최노인(최원균)과 그의 아내(이삼순), 마흔살 먹은 늙은소라는 삼자를 등장시켜 이들 중심의 이야기로 영화를 끌어가고 있습니다.

 

< 홍보도 전략이다 > 의 저자 장순욱은 PR기법 중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중에 하나가 '지그재그식 PR'이라고 말합니다. 신문에 다뤄진 내용이 이슈가 되면서 온라인이나 방송을 타고 다시 케이블에서 매거진으로 옮겨져 순식간에 이슈화되는 방법을 말하는데 < 워낭소리 > 는 1억원 남짓한 저예산의 독립영화에 불과하지만 '불통의 시대'란 시대적 기류를 타고 제작자들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지그재그PR에 성공한 운좋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워낭은 소의 목에 달린 방울을 말합니다. 영화 제목에서 말해주듯 워낭은 귀가 어두운 촌로와 늙은 소를 연결해주는 매개체입니다. 늙은소를 팔아버리자는 아내의 잔소리는 최노인의 귀에 들리지 않지만 워낭을 통해 늙은소가 전하는 진심을 최노인은 정확하게 알아듣고 있는듯 합니다.

 

40년 세월 주인과 함께한 영화속 '늙은소'는 사실상 노동력을 상실한 상태지만 자신을 믿어주고 위해 주는 주인을 위해 오늘도 논으로 밭으로 굼뜬 발걸음을 옮깁니다. 서로의 앙상한 몸이 힘겹지만 최노인에게도 늙은소에게도 함께하는 노동은 그들 존재의 이유입니다.

 

최노인이 장터에서 술에 취해 잠들면 수레에 몸을 실은 채 수킬로미터 떨어진 집으로 찾아오고 주인은 소를 위해 논이며 밭에 농약을 치지 않습니다. 늙은 몸을 이끌고 직접 소가 먹을 소꼴을 베지만 남들처럼 편하자고 사료로 소를 키우지 않습니다. 늙은소를 대체하기 위해 새로 들여온 젊은소가 늙은소에게 횡패를 부리면 기다란 막대기로 혼내며 애타하는 촌로의 사랑에 마음이 아립니다.

 

소의 평균 수명은 길어야 15년을 넘기기 어렵고 육우로 사용되는 소는 30개월 이내에 도축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주인공 '늙은소'는 기대수명을 넘겨 장수한 셈입니다.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주인의 속깊은 사랑과 보살핌이 주요했을거란 생각입니다.

 

영화는 참으로 담담합니다. 필름으로 촬영하지 않은 화면은 거칠고 영화속 촌노와 촌부의 삶은 투박하다 못해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영화흥행소식만을 듣고 세련된 영상미를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거친화면에 깜짝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담담한 화면전개와 연출되지 않은 촌노와 촌부의 대화는 후반부까지 변함없어 극적반전이나 대단한 클라이맥스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역시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친 화면, 연출되지 않은 모습 그대로면서도 영화는 충분히 감동적이고 울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 워낭소리 > 속에는 최노인의 진심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심하게 앓은탓에 앙상한 다리는 마흔살된 늙은소처럼 제대로 걷기도 힘들지만 최노인은 소를 의지삼아 기어서라도 농사를 짓습니다. 힘들게 농사짓는 주인 곁에서 눈을 껌뻑이며 주인을 지키는 소에서 오랜 친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아내와 9남매의 성화에다가 본인의 건강이 악화되어 더이상 늙은 소를 감당할 수 없어 맘에 없던 장터에 나간날 60만원에 사겠다거나 거저줘도 안사겠다는 흥정꾼들에게 500만원은 줘야 팔겠다고 큰소리 치는 주인의 마음에 영화의 주제가 담겨있습니다.

 

장터 술자리에서 한잔술을 앞에두고 술친구들에게 늙은소와의 추억을 말하는 최노인의 얼굴엔 아이처럼 행복한 미소가 가득합니다. 최노인은 늙은소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 싶었던게 분명합니다.

 

잃어버린 10년이니, 강부자니, 경제살리기니 정치인들이 지난 대선에서 던져준 말의 성찬들이 특정계층을 옹호하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책이란 사실을 확인하는데 1년이 걸리지 않은 요즘 < 워낭소리 > 는 그래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최노인은 농사를 위해서 그리고 불편한 다리를 대신할 단거리 이동을 위해서 그리고 재산증식을 위해서 '소'가 필요했습니다. 그의 목적은 이땅의 다른 농부들과 별반 다를바 없었지만 그의 마음가짐은 달랐습니다. < 워낭소리 > 의 영어 제목이 'Old Partner'란 사실에서 알수 있듯이 오랜세월 함께 공존할 친구로 소를 본것입니다.

 

바쁜 농사일 틈새로 새참을 먹는 시간 노인이 먹는밥, 한사발의 막걸리는 늙은소도 함께 먹습니다. 부족하지 않게 먹이를 주지만 너무 과하게 먹어 탈이 나지 않도록 새심하게 배려하는 최노인에게 늙은소는 죽마고우이자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동반자입니다.

 

노구에는 너무나 힘든 거친 밭일 , 쉴새없이 자라는 잡초를 다뽑기에도 늙은 몸은 힘들지만 소의 먹거리를 위해 최노인은 자신의 밭에는 전혀 농약을 치지 않습니다. 영화 후반부 한가득 땔감을 베어오던 촌로는 지치고 병든 소를 위해 짐을 나눠지고 소가 끄는 수레를 타지 않은채 함께 걸어 집으로 옵니다.

 

가난하고 병든몸이지만 9남매를 농사로 모두 출가시킨 촌로에겐 남들보다 뛰어난 학력도 재산도 없지만 소와의 공존을 통해서 함께 사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시끌벅적한 세상사 최노인이 몸으로 설파한 공존의 이유가 이 시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립니다.

 

다른사람보다 좀더 가지고 좀 더 앞서기 위해 비난하고 계략을 일삼는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공존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 워낭소리 > 는 청량한 산사의 풍경소리와 같습니다.

 

 

 

 

*워낭소리 위키 - http://ko.wikipedia.org/wiki/워낭소리

* 공식 블로그 - http://blog.naver.com/warnangsori

* 2009년 9월 24일에 발간한 책 '워낭소리'

 

- 알라딘의 책소개

 

 

*미디어스 - 네티즌 선정 최고작품 '워낭소리'

 

*미디어 오늘 - MB, 워낭소리가 뭔지나 아세요?

 

* 씨네21 - 일본에서도 워낭소리 울리네

 

* 프레시안 - 워낭소리 이충렬 감독, '영진위, 저질 개그했다'

* 링크하고 나서 - 2010년 9월 2일 덧붙임

 

 

진보넷 블로그에 있던 '워낭소리' 감상(소감? 후기? 영화평? 등등) 들을 다시 읽어보니, 불편하거나 의아했던 분들이 대부분이고 드문드문  좋은 영화라고 같이 보자고 강추하는 분도 있다. 독립영화를 제작하고 있거나 미디어 관련 일을 하는 분들 중에서 관련글을 두 개 이상 작성하면서 처음부터 의문이 있었던 부분을 조금씩 발전시키는 분도 있었다. 처음에는 이 영화에 대해 칭찬했다가 나중에 여러 사람들이 불편한 점을 지적하자 그제서야  처음부터 불편했다는 듯이 슬그머니 부정적인 평가를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독립영화를 만드는 이였는데도 그랬다. 이 중에서 '하루'의 글이 가장 인상적이었고, 가장 솔직하게 다가왔다.

 

워낭소리 이후 독립영화 관련기사들을 살펴보면,  일반 상업영화와 마찬가지로 관객수와 수상(특히 해외 유명 영화제) 여부에 의해 기사화되느냐 마느냐가 판가름되는 상황에 놓여있다. 이것은  '읽을만한 정보'를 철저하게 서열화해서 선택하는  언론의 생태에 의해 이미 예전부터 그래왔고 앞으로는 더 노골적으로 그러하리라고 예정되어 있었던 길이지만, 워낭소리가 만든 좋지 않은 영향력 중 하나일 것이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고, 와중에 한국독립영화협회에 여러 사람이 연명해서 정식으로 문제제기한 일도 있었는데 어떻게 마무리가 되었을까. 논란이 일던 게시판은 닫혔다. 이 협회의 회원이 아닌 이들은 , 협회에 직접 전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보내거나 만나거나 해야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볼 수 있다. 그래서 적어도 나는 그 결과를 모른다. 기자회견을 열어 대대적으로 밝혔던 '워낭소리 수익금 30%를 독립영화 발전에 기증' 한다던 호언장담은 어떤 방식으로 지켜졌나. 거기에 대해서도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다.

 

지금 독립영화계에서 '워낭소리'라는 어떤 영화(이 영화가 왜 독립영화인지 , 어떻게 그  많은 독립영화제에서 상영작으로 선정될 수 있었는지 정식으로 묻고 싶다.)가 왜 관객들을 불러모았는지 분석하거나  비판하려는 시도는 찾아볼 수 없다. 분명 정리하고 넘어가야할 내용들이 있으나 아무도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고영재의 프로듀싱을 받고자 하는 독립영화 감독들이 점점 늘어난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심사를 맡는 등 그의 영향력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한국독립영화협회의 사무총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작사 느림보'라는 개인회사를 운영해서 한 영화를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홍보하는 활동을 한 것은 아무도 문제삼을 수 없을만큼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당한 일이었던 걸까. 단지 내가 너무 멀리 있어서 자세한 소식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실제로 일어나야할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는 중인가. 답답하고 궁금하다.

 

 

2010/07/14 09:01 2010/07/14 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