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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저장이 안되다니...| 제멋대로 가는 길 (펌 사절)
2010년 03월 10일 21:48
어제 모님과 메신저로 얘기를 하다가 요새 내 블로그에 시사적인 글이 자주 업데이트되지 않아서 시사에 어두워졌다고 해서리 새벽부터 그 동안 모아두었던 기사들을 정리하고 최근 프레시안, 레디앙, 미디어오늘, 한겨레, 경향신문, 서울신문의 최근 며칠간 기사를 훑어본 후 필요한 기사들을 블로그나 행정학 카페에 올리려고 마음 먹었다. 사실 지금은 관료제론 강의안을 다 작성하지 못한 상태라서 시간 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논란이 되는 사안 중에 몇 개는 업로드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중에 텍스트파일 상태로는 편집이 되지 않기 때문에 티스토리블로그의 편집상태에서 몇 개의 주제들을 올려놓았다. 편집창을 4개 정도 띠워서 거기에 관련기사를 올려놓고, 강의안을 작성하다가 막히거나 졸음이 오면 그 때 마무리작업을 해서 이를 블로그에 올리면 되겠지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올려놓았던 주제는 전자발찌, 시간제근무/유연근무제/퍼플잡, 여성부의 여성가족부로의 개편, 낙태문제, 임금피크제/정년연장, 학교급식, 공공기관 선진화, 삼성관련기사 등이었다. 예전 생각으로 그렇게 올려놓으면 내가 창을 닫지 않는 한 글들이 그대로 남아 있을 거라 보았는데...
이게 왠 걸. 다 날라갔다. 저장이 된 것이 하나도 없고, 다 "제목을 입력해 주십시오"라는 가제만 남아 있다. 다시 창을 봤을 때 팝업창으로 떴던, "임시저장본이 있습니다. 불러오시겠습니까?" 여기에서 아니오가 아니라 예를 눌렀어야 되는 건가. 그 때도 화면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었는데... ㅠㅠ
어디서 복구할 수도 없고... 거의 4-5시간 정리해놓은 건데... 다시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런 걸 왜 하나 싶기도 하고... 괜히 구글 크롬을 썼다는 후회도 들고.... 그 때 그 때 정리를 했어야 하는데 싶기도 하고...
힘이 쭉 빠진다. 걍 집에나 가야겠다. 내 시간 돌리도...
구글 크롬 사용 중| ICT/인터넷/과학
2010년 03월 10일 19:03
전진 홈페이지 회원게시판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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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부터 연구실의 제 컴퓨터에는 구글 크롬을 다운 받아서 익스플로러 대신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 오류도 나지 않고 속도도 빠르고 괜찮더군요. 적응하느라 시간이 조금 걸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전진 홈페이지에 접속하려고 구글 크롬에서 주소를 치니 이런 메시지가 뜨더군요.
"죄송합니다. 이 홈페이지는 익스플로러(MSIE)에서 정상동작합니다!
모질라, 넷스케이프및 기타 브라우저로는 보실 수 없습니다"
전진 홈페이지가 익스플로러에 최적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웹 브라우저는 사용 불가인 줄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웹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이죠. 하긴 전진 뿐 아니라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에서 프라이버시나 웹 접근성, 인터넷 상에서의 진보에 대해서는 관심이나 노력이 부족한 것이 하루이틀의 일은 아닙니다.
민주노동당이 교사, 공무원의 당원 가입 문제로 공안에게 털리게 된 것도 사실상 웹 보안성이나 프라이버시 문제를 소홀히 한 원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대책은 제대로 나오고 있지 않구요. 소위 진보정당이라고 한다면 이런 분야에 대한 마인드를 제고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원칙은 말로만이 아니라 실천으로 구현되어야 합니다.
아무튼 지금 당장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추후에 조직 통합이나 새롭게 조직 재구성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전진 홈페이지 개편시 웹 접근성과 프라이버시 문제에서 신경을 썼으면 하네요.
아, 지금은 전진 홈페이지에 접속하기 위해 익스플로러로 들어왔습니다.
공장의 불빛, 이 세상 어딘가에| 길가다부르는노래
2010년 03월 08일 11:57


아침에 보니 이은진님의 레디앙 연재글 [노래 이야기③]에 <이 세상 어딘가에>에 대한 소개가 실렸더군요. 그래서 관련해서 예전에 네이버블로그에 올려놓았던 노래굿 '공장의 불빛' 관련글을 가져옵니다. 예전에는 '공장의 불빛' 동영상도 있었는데, 지금은 링크가 사라졌네요. 대신 참세상 겨울잡 프로에 있는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퍼오면서 여기에 mp3를 덧붙입니다. mp3는 모두 <밥, 자유, 평등, 평화>에서 담아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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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의 불빛 동영상 2004/11/20 12:27
어제는 밤에 공장의 불빛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도솔이가 소스를 알려주어서 70년대 무수히 복사테이프로 떠돌았던 것 중의 하나를 간신히 구해서 동영상으로 뜬 것이라고 합니다. 진보영상 전야에서 작업을 했다네요.
노래에 대한 자막이 나오긴 하지만, 화질이 그리 좋지 않아서 사람들이 꼭 유령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것은 도솔이와 공유한 부분입니다.
예전 참세상방송국 음악감상실에서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보았을 때에는 몰랐는데, 영상을 보니까 제작자인 김민기가 정말 엄청난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 노래굿이 나왔을 때였던 1978년에는 노래를 부르는 것조차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트윈 폴리오 등의 통기타가수들에 대해 냉소했던 것도 이런 것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아침이슬, 친구, 행복의 나라로와 같은 노래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엄청난 용기를 필요했습니다. 집회 자체가 쉽지 않았기에,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대중과 만나고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되었던 것이죠. 특히 김민기의 경우에는 포크음악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분야로 음악의 형식을 확대하는데, 그 과정에서 소재를 대하는데 있어서도 구체성과 민중성을 획득합니다.
서울대 노래패인 메아리에서 노래운동 15주년 기념으로 나온 노래책인 [메아리 10](1990년에 나온 것이니 상당히 오래된 비평이네요)에는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의 초기의 작품들이 주로 포크송의 기반 위에서 관념적인 주제를 다루던 것과 비교해 후기의 작품들은 민요적인 어법 속에서 민중적 삶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형식과 내용의 통일을 보여 주고 있다. 그의 1970년대 후반기의 변화과정의 절정은 노래극 '공장의 불빛'에서 나타난다.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중 가장 목적의식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소재에 대한 이전의 은유적이고 추상적이었던 접근방식이 아니라 '동일방직 사건'이라는 구체적인 소재로 노동자와 자본가간의 갈등을 구체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날카로운 현실인식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음악적으로도 구전가요, 트위스트, 흑인 영가, 남도소리, 풍물 등 다양한 음악적 요소의 사용과 강렬한 악곡과 가사의 적절한 사용으로 극을 이끌어감으로써 극의 통일성을 이루어내고 있다. ... 그러나, 이 작품 또한 그가 피할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현실에서의 발전적 전망의 부재에서 비롯하는 패배와 체념의 정서이다. 이것은 극 속에서 갈등이 가장 고조되어야 할 싸움과 패배부분의 침체와 결말에서의 막연한 이상에 대한 애틋한 소망으로 나타난다.
저는 지금까지 김민기에 대해 약간은 비판적으로 봤답니다. 소시민적 자유주의 내지 지식인적 관념성이라는 평가에 대체적으로 동의했던 것이죠. 그 뒤의 행보가 그리 마음에 든 것이 아니었고요. 그런데 이 노래굿을 보다 보니 이러한 김민기의 한계가 당시에는 현실에 대한 정확하고 진지한 반영이었다는 반론이 이해가 됩니다. 이를 통해서 대중성과 운동성을 획득했구요.
'공장의 불빛'에서 그가 표현했던 노동자들의 현실과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행동이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좌절, 그리고 그것을 딛고 서고자 하는 막연한 소망은 비록 승리에 대한 확신은 주지 못했지만, 그러한 현실 하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현실에 대한 뼈저린 인식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김민기의 노래가 가지는 현실성의 획득이 주는 감동은 오늘날까지 그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며, 그 의미 또한 오늘날까지 그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며, 그 의미 또한 오늘날에 맞게 재해석될 여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공장의 불빛에 나오는 노래들은 절반 정도는 들어본 적이 있는 것입니다. 오디오와 비디오는 확실히 다르네요. 영상을 편하게 살펴보시길... 노래굿 대본은 참세상방송국 음악감상실에 있습니다. 전체 또는 개별로 노래도 들을 수 있지요.
그리고 공장의 불빛이 재녹음, 재발매된다고 합니다. 어떤 식으로 나올지는 모르지만, 아마 원래 1978년도에 나왔던 것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겠지요. 하지만 그 의미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김창남 교수가 [노동과 세계]에 쓴 공장의 불빛에 관한 기사를 덧붙여 올립니다.
관련기사 1
[문화읽기] 공장의 불빛 (노동과세계 제309호, 김창남(성공회대 교수·신문방송학), 2004-10-25 18:11:54)
<공장의 불빛>이 새로운 편곡으로 다시 녹음되어 세상에 나왔다. 저 암흑과도 같았던 유신체제 말기 지하에서 은밀히 녹음되고 불법으로 유통되며 어느덧 하나의 신화로만 남아있던 이 작품이 지금 다시 세상에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 자체로 놀라운 사건이다. 1978년 겨울 이 음반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 음반의 리메이크가 지니는 의미를 한번쯤 무겁게 생각해 볼 것이다.
김민기가 만든 <공장의 불빛>은 흔히 70년대 노동운동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동일방직 사건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묘사된 노동현장의 모습이나 노동운동의 양상은 단지 동일방직 사건의 예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동일방직 사건으로 대표되는 70년대 민주노조 투쟁의 가장 일반적인 과정을 일견 스테레오타입으로 비쳐질 만큼 정형화된 인물과 사건들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런 까닭에 이 작품은 특정한 주인공을 중심으로 극적인 사건들이 벌어지거나 갈등의 구체적인 양상이 극적으로 묘사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편지-교대-사고-작업장-야근-음모-선거-싸움과 패배-해고와 새로운 결의'로 이어지는 극의 구성은 내적 필연성을 가진 극적 사건들의 연결이라기보다 노조 투쟁의 전형적인 과정으로서 배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이 보통의 연극이라면 이런 식의 구성은 전체적으로 작품을 앙상하게 하면서 감동을 반감시키는 결과를 부를 수밖에 없지만 <공장의 불빛>에서 그런 극적인 약점은 그다지 도드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장면 장면의 극적인 분위기와 갈등을 대사나 지문이 아니라 노래와 음악이 충실하게 표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대사가 진행되는 중간 중간에 배경음악이나 주인공들의 노래가 삽입되는 방식이 아니라 모든 대사, 등장 인물들의 심리묘사, 사건진행과 장면의 분위기까지를 모두 노래와 음악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보통의 뮤지컬보다는 오히려 오페라에 가깝다. 이 작품을 연극적인 맥락보다 음악적인 시각에서 보는 것이 더 중요한 까닭이 그것이다.
유신 말기의 얼음장같던 세월을 뚫고 나와 세상을 놀라게 했던 <공장의 불빛>이 지금 다시 새롭게 단장한 채 우리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지금 이 작품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4반세기 세월의 차이만큼이나 엄청나게 달라져 있다. 목숨을 걸만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시도였던 70년대 말과 달리 지금 <공장의 불빛>은 미디어의 관심 속에 조명된다. 한때 빨갱이 단체로 몰리기도 했던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와 몇몇 지식인들, 그리고 용기 있는 음악인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제작되었던 첫 번째와 달리 이번에는 적으나마 문예진흥기금까지 지원 받았고 버젓한 녹음실에서 제작되었다.
이 작품에서 그려졌듯 끝없는 패배와 좌절을 거듭했던 노동운동은 민주노총을 만들고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을 이룰 만큼 달라진 상황 속에 있다. 무엇보다도 20여 년 전 불온의 딱지를 쓴 채 아무런 공식적 활동도 할 수 없는 처지였던 작곡가 자신이 지금은 소극장운동의 주역이자 한국적 뮤지컬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젖힌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다. 이 모든 변화의 근저에 수많은 사람의 피와 땀이, 죽음과 좌절이, 고통과 고뇌가 자리하고 있음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어딘가에 <공장의 불빛>이 뿌려놓은 씨앗 하나가 보이지 않는 거름으로 자리 잡고 있음 또한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공장의 불빛>의 재녹음과 재발매는 이 작품이 더 이상 신화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우리와 대면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제 비로소 다시 현실의 맥락에서 재평가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그 현실은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선 21세기 탈근대적 현실이 아니라 저 엄혹했던 70년대의 현실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역사적 현실이다. <공장의 불빛>은 이제 비로소 역사가 된 것이다.
관련기사 2
2006. 6. 17
한겨레신문 2006년 6월 5일자에 실린 이용우님의 관련기사를 추가합니다. 물론 저작권 문제로 관련되는 부분 발췌...
‘혁명적 아티스트’ 탄생을 증명하다 (한겨레, 이용우, 2006-06-05)
한국팝의사건·사고60년 (54) 전설적 노래굿, 혁신적 콜라주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
이 시기 김민기의 진정한 문제작은 그가 직접 제작한 혁명적 불법 음반 〈공장의 불빛〉이었다. 경제성장의 그늘, 노동 현실과 노조 탄압을 적나라하게 그린 이 노래굿 사운드트랙은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 노래운동과 민중가요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앨범이 혁명적이었던 또다른 이유는 아예 사전검열을 거부하고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독자적으로 배급하면서 민중가요 음반의 미디어, 제작, 배급의 알파와 오메가를 선구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공장의 불빛〉은 1978년 송창식의 원효로 스튜디오에서 조원익, 배수연, 이호준 등 일급 세션맨을 초빙해 반주를 녹음하고 이화여대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서울대 ‘메아리’, 이화여대 ‘한소리’, 경동교회 ‘빛소리’ 등이 동참해 보컬 녹음을 하고 최종 믹싱을 거쳐 완성되었다. 이 모든 과정이 비밀리에 진행된, 온몸을 건 일이었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는 포크 스타일뿐 아니라 구전가요, 찬송가, 국악, 블루스, 로큰롤 등 다양한 형식을 한데 실험한 혁신적인 것이었다. 비록 음질은 조악했지만 그 안에 담긴 강렬한 메시지와 매력을 전염시키는 데 걸림돌은 아니었다.
〈공장의 불빛〉은 이제 김민기를 더 이상 ‘한국적 모던 포크의 기수’라는 틀에 한정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또한 신비롭게 포장된 저항음악의 투사로만 가둘 수 없는 다기한 음악세계를 지향하는 아티스트임을 알려주었다.
노래굿 "공장의 불빛"
참세상방송국 음악감상실
http://cast.jinbo.net/musichall/factorylight.html
참세상방송국은 이 전설적인 테이프를 소개하게 된 것을 기쁘게, 아니 스스로 감격스럽게 생각합니다. 그토록 목마르게 찾았던 이 테이프를 말입니다. 요컨대 이 작품은 정식으로 발매된 적이 없는 비합 복제판 음반입니다. 그러나 80년대 초엽부터 손에서 손으로, 마치 제의처럼 듣고 불리웠던 노래들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직접 이 테이프 전체를 들어본 사람보다는 그 '명성'과 함께 노래 몇곡이나 대본만을 접해 본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 작품은 소박하면서도 장대하고, 가장 노동자적이면서도 가장 고급스러운 양식과 내용으로 80년대 이후 민중음악의 방향에 대한 -- 김민기 본인이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 바이블이 되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뭐 이렇게 거창히 이야기할 것도 없습니다. 이 작품을 직접 들어보신다면, 20년도 더 된 이 음반에서 그 치열하고 숭고한 감성 못지않게 '동시대성'과 신선함을 함께 느낄 수 있으리라 확신하니까요.
"공장의 불빛"은 노래모음이지만 연극이기도 하고 오페라이기도 합니다. 정말 현대적인 오페라지요. 그러나 이 작품은 '노래굿'입니다. 그의 "아빠얼굴 예쁘네요"는 노래일기 혹은 노래극으로 명명되었지요. 비교해 들어보시면 이 '노래굿'의 의미를 쉽게 짐작하실 수 있을 터입니다. 물론 단지 형식의 뿐만 아니라 '굿'의 의미도 함께요.
각설하구요, 이 테이프에 대한 더 이상의 소개는 아래 이영미씨의 소개글로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1986년 한울출판사에서 나왔던 김창남 편, <김민기>에 실린 글 중 일부입니다.
. . . 1978년 제작된 "공장의 불빛"은 서울대 탈춤반 출신들의 모임이었던 '한두레'의 작업의 한 부분으로 기획된 것으로 애초부터 공연물로 구상되었고 그 구성에 있어 상당부분 공동창작이 이루어진 것 같다. 그러나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후원으로 카세트 테이프로 제작, 보급되고 그후 79년 2월 제일교회에서 채희완의 안무로 무대에 올려져 "공장의 불빛"은 공연물로서보다는 카세트테이프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 작품은 70년대 후반의 공연작품들이 대개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나 알레고리적인 상황설정으로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음에 비해, 동일방직사건이라는 70년대 후반 노동운동에 있어서의 중요한 사례에 입각하여 본격적인 노동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이것은 민중현실로 접근하려는 김민기의 70년대 후반 작품 경향의 정절을 이루고 있다. 특히 카세트 테이프라는 대중확산력이 강한 매체를 이용하고 뒷면에 반주음악을 실음으로써 대중적 확산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공장의 불빛"은 매우 전형적인 사건 전개를 가지고 노동문제에 접근하였다는 점, 악곡과 가사의 강렬함, 그리고 카세트테이프가 가진 놀랄만한 대중적 확산력으로 크게 화제가 되었고 그후의 여러 작업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 . .
0. 김민기 인사말
1. 편지
2. 교대 / 사고
3. 작업장
4. 야근
5. 공장의 불빛
6. 음모 / 선거
7. 두어라 가자
8. 이 세상 어딘가에1
9. 아침바람
10. 이 세상 어딘가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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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사람들
언니 : 조장
영자 : 고참조원
순이 : 갓 입사한 조원
옥이 : 갓 입사한 직원
사장
과장
비서
여자동료들
남자동료들
깡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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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인사말
편 지
언 니 미영이가 방학을 했겠군요
공연히 딴 마음 먹지 말고(기침)
꼭 고등학교에 갈 생각하라고 그러세요
뒤는 언니가 책임지고...... 책임지고......
* 전조(前組) 작업 종료 벨소리
교대 / 사고
언 니 모두들 자니? 일 나갈 시간
얼른 얼른. 교대할 시간
영 자 달도 없고 파리한 별빛
밤바람 차네 옷들 껴 입고
남자동료들 캄캄한 골목. 아무도 없다
하기야 한밤중에 다들 잘테지......
여자동료들 수위실
남자동료들 경비원 둘이
영 자 뱁새눈하고
여자동료들 노려다 보네
남자동료들 세타트 한 놈 난로에 졸고
여자동료들 수은등도 추워
순 이 파랗게 떠네......
남자동료들 시커먼 굴뚝 버티고 섰고
여자동료들 앙상한 가지
남녀 모두 무서워!
사 고
* 싸이렌 소리
언 니 아범이 일을 하다가 손을 다쳤어요
작업장
영 자 싸늘한 계단 새하연 회벽
언 니 회사에 다니다 보면(기침) 아주 흔히들(기침)
영 자 형광등 소리 진저리 친다
언 니 있는 일이예요(기침)
남녀 모두 기계소리도 잠시만 쉬고
언 니 아무...... 아무 걱정마세요(기침)
기술은 더 써먹을 수(기침)
남녀 모두 오늘밤도 하루 일터로 가네
언 니 없게 되었지만(기침)
좀 편한 자리라도(기침)
좀 수월한 자리라도 해줄지(기침)
남녀 모두 일터로 가네, 일터로 가네, 일터로 가네
언 니 몰라요(기침)
깡패들 (휘파람소리)
* 야간작업 시작 벨소리
[ 노래 : 공장의 불빛 ]
순 이 예쁘게 빛나던 불빛, 공장의 불빛
온데 간데도 없고 ?뿌연 작업등만
남녀 모두 이대로 못 돌아가지, 그리운 고향 마을
춥고 지친 밤 여기는 또 다른 고향
여기는 또 다른 고향
선 거
남녀 모두 미싱사 재단사 모여라
조합 만들어 세우자
우리도 이제는 안 속아
똘똘 뭉쳐서 해보자
여자동료들 우쭐우쭐 들먹들먹 신바람나네
남자동료들 우- 아- 우- 아-
남녀 모두 공돌이 공순이 모여라
노동조합 만들자
여자동료들 꽝꽝 만들어 높이 세워서
남자동료들 꽝! 꽝! 세워 세워 세워 세워
여자동료들 큰소리도 쳐보면
남자동료들 세워- 큰소리 큰소리 큰소리 큰소리
남녀 모두 사장님도 전무님도 인상 푹푹 쓰시고
작업장에는 웃음꽃이 활짝활짝 피네
딴따다다다 딴따다......
여자동료들 꽝꽝 만들어 높이 세워서
남자동료들 꽝! 꽝! 세워 세워 세워 세워
여자동료들 큰소리도 쳐보면
남자동료들 세워- 큰소리 큰소리 큰소리 큰소리
남녀 모두 딴따다다다 딴따다......
딴따다다다 딴따다......
여자동료들 세워 세워 세워 세워
깡패들 개같이 벌어랬다 돈만 벌어라
더러운 돈 좋아하네 돈만 벌어라
새 돈 헌 돈 따로 있나 돈만 벌어라
아무거나 시키세요 돈만 벌어라
인정 찾고 양심 찾고 개소리를 허덜 마라
정승처럼 쓰면 됐지 돈 벌어 돈만 벌어
아- 아-
여자동료들 세워- 아-
언 니 당신들이 뭔데 남의 일에 끼여들어서
난리야 난리가-
할 일 없으면 집에 가서
발이나 닦고 자라구-
깡패들 아-
여자동료들 아-
[ 노래 : 두어라 가자 ]
언 니 두어라 가자 몹쓸 세상
설운 거리여 두어라 가자
언 땅에 움 터 모질게 돋아
봄은 아직도 아련하게 멀은데
객지에 나와 하 세월도 길어
몸은 병들고 갈갈이 찢겼네
고향집 사립문 늙은 오매
이제 내 가도 받아줄랑가- 줄랑가-
여자동료들 힘들 내여 힘들 내
남녀 모두 힘 내여 힘 내
여자동료들 기죽지 말고 힘 내
남자동료들 힘 내여 힘 내
영 자 요대로 사느니 뒈져야지
남녀 모두 힘들 내여 힘 내
여자동료들 죽지는 말고 힘 내
남자동료들 힘들 내여 힘들 내
언 니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남녀 모두 불끈불끈 힘 내
불끈불끈 힘 내
[ 노래 : 이 세상 어딘가에 1 ]
남녀 모두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까? 있을까?
평등과 평화 넘치는
자유의 바닷가
큰 물결 물아쳐 온다
너무도 가련한 우리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 보아요
깡패들 아-
돈 벌어 돈만 벌어 돈 벌어 돈만 벌어......
옥 이 반반하게 생긴 년은 화냥질 가서
몸 망치고 쫓겨나면 어디로 가고
영 자 무식한 년 공장 와서 노조 만들다
쫓겨나면 어디메로 흘러간다냐
과 장 공고, 아래 사람들은 무단 결근자로서
사칙을 위반하였기에 퇴사 조치함.
아래.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여자동료들 우-
남자동료들 우-
[ 노래 : 아침바람 ]
여자동료들 아침바람 찬 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
우리 엄마 살아 생전
옆서 한 장 써주세요
남녀 모두 우-
[ 노래 : 이 세상 어딘가에 2 ]

이 세상 어딘가에
부르면 울게 만든 그때의 노래들 (레디앙, 2010년 03월 06일 (토) 11:00:21 이은진 / 문화활동가)
[노래 이야기③] <이 세상 어딘가에>…서정적 가사에 노동자 삶 담아
제가 대학에 입학한 후 처음 접한 민중가요들은 아주 서정적이고 고운 노래들이었습니다. 같이 어깨를 걸고 목 놓아 부르는가 하면, 혼자 흥얼거리다가도 울컥하고 무언가 치솟아 오르는 그 노래들. 70~80년대 초반 민중가요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사실 행진곡 풍보다는 바로 이런 서정적이고 고운 노래들입니다.
서정적이고 고운 민중가요
오늘은 그 중 한 곡인 <이 세상 어딘가에>를 소개하려 합니다. “노동조합은 근로자들의 권리입니다. 막연한 분홍빛 꿈에서 깨어나 우리들 스스로 찬란한 미래를 만들어갑시다”라는 낯선 멘트와 함께 들었던 김민기 씨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 의 마지막 노래가 <이 세상 어딘가에>입니다. 오늘은 '메아리'의 목소리를 통해 <이 세상 어딘가에>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음원 : 메아리 Origin2 중에서 (일천구백팔십년 여름 녹음, 98년 4월 복각)
<이 세상 어딘가에> (김민기 글, 곡)
필자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는 1984년이었습니다. 학원자율화 조치가 있던 해죠. 즉, 그 이전까지는 대학 내에 기관원들이 상주하며 학생들과 같이 수업도 듣기도, 벤치에 앉아 잡담도 나누며 감시를 했습니다. 그러다 돌변해 친구를 연행해 가기도 했고요. 집회 한 번 하기도 쉽지 않았고, 늘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했습니다. 경계를 늦추지 않았어야 했겠지요. 아마도 그 시절부터 약자나 줄임말들이 운동권 생존을 위한 문화로 유행한 게 아닐까 싶네요.
기관원과 함께 수업 듣던 시절
하지만 제가 대학을 들어가던 그 해부터는 기관원들이 철수를 해서 대중 활동이 좀 더 자유로웠습니다. 학내 집회도 자주 열렸고, '민주'와 '민중'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혜택(?)’으로 저는 대학에 입학해 노래 서클에 가입하며 활동하게 됐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시작된 서클 활동은 가히 '학과 공부를 하러 대학을 다닌 게 아니라 서클활동을 하러 다녔다’고 할 만큼 열성적이었습니다.
대학에서 처음 접한 민중가요들은 가사말도 낯설고, 멜로디도 대중가요와는 뭔가 다른 느낌이었지만 대체로 예뻤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서글펐습니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왠지 마음이 짠했고, 술자리에서 부르면 괜스레 눈물도 흘렀습니다. <이 세상사는 동안>, <이 땅의 축복 위하여>, <친구>, <영산강>, <약수 뜨러가는 길>, <진달래> 등이 주로 그러한 노래였습니다.
 그저 노래가 좋아서 매일매일 서클방으로 출석을 하던 어느 날, 이름도 없던 복제 테이프에 맞춰 상황극을 짜는 훈련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것이 바로 김민기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이었습니다. 동일방직 사건을 소재로 하여 78년 겨울에 만든 노래극 [공장의 불빛]은 서정적인 몇 곡의 노래들과 연극적 상황, 그리고 개사곡을 변주해서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김민기 노래극 '공장의 불빛'의 파격
그 당시 대학가의 노래패 공연은 대부분 통기타 한두 대로 연주를 하며 노래에 단순 화음 정도를 넣는 것이었는데, 이 [공장의 불빛]은 신디사이저와 드럼을 파격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공장에 들어와 저임금에 야근, 철야를 밥 먹듯이 하고, 그러다 산재를 당해도 보상 한 푼 받지 못하고 쫓겨 난 신세, 이들은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하지만 사측의 음모와 탄압에 부딪혀 좌절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래도 노동자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다시 힘을 추스릅니다. [공장의 불빛]은 고향에 편지를 보내는 여공의 목소리로 시작해 야간 교대, 사고, 노조동합 결성, 음모, 선거, 해고 등 전체가 19장면으로 이루어진 40여 분짜리 뮤지컬인 셈입니다. 여기에 삽입된 노래는 <공장의 불빛>, <두어라 가자>, <돈만 벌어라>, <야근>이며 <이 세상 어딘가에>는 엔딩곡으로 불리게 됩니다.
노래극의 시작과 끝부분 멘트에서 노동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지만, 그 속에서 접한 노동자 현실은 참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군대에서 불렸던 멜로디에 가사를 붙인 <야근>은 단순한 한 곡을 단조와 장조, 그리고 4박자와 3박자, 빠르기와 가창법 등을 달리해 마치 공연 한편을 보는 듯 한 느낌을 줍니다. 이 노래는 원래 ‘대령 중령 소령은 00000, 상사, 중사, 하사는 00000~~’ 하는 소위 ‘군대 사가’를 따서 변주한 곡입니다.
“서방님의 손가락은 여섯 개래요, 시퍼런 절단기에 싹둑 잘려서 한 개에 오만 원씩 이십만 원을 술 퍼먹고 돌아오니 빈털터리래… 사장님네 강아지는 감기 걸려서 포니타고 병원까지 가신다는데 우리들은 타이밍약 사다먹고요. 시다 신세 면할 날만 기다립니다.
그거야 순전히 댁 사정이죠 병 걸려 있으니까 그런 거죠. 묵묵히 참으면서 일만 하세요 윗분들이 다 알아서 해줄 거예요. 3년만 지내보면 알게 될 거다. 귀머거리 폐병쟁이 누구누군지…”(이 노래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민중가요에서도 타자화됐던 노동자
87년 이후의 노동가요는 구체적이고 진취적이며 또 강인한 노동자 상을 그려냈습니다. 하지만 당시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막막했습니다. 그렇기에 진취적이나 구체적인 희망과 투쟁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어딘가에>와 이 곡이 삽입된 노래극 [공장의 불빛]은 ‘다른 누군가에 의지하지 말고, 우리들이 스스로 만들어가자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살며시 두 눈 떠봐요. 밤하늘 바라봐요. 어두운 넓은 세상. 반짝이는 작은 별. 이 밤을 지키는 우리, 힘겨운 공장의 밤. 고운 꿈 깨어나면 아쉬운 마음뿐, 하지만 이제 깨어요. 온 세상이 파도와 같이 큰 물결 몰아쳐온다. 너무도 가련한 우리.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 보아요.” -<이 세상 어딘가에> 중에서
이렇듯 당시의 민중가요가 노동자의 이야기를 타자적 시각에서 이야기한데 반해 <이 세상 어딘가에>는 노동자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서정적이면서도 감성적인 가사와 멜로디이지만 그 어떤 곡보다도 노동자 스스로의 의지와 각성을 강조합니다. 노동자 삶은 무조건 강한 비트의 멜로디와 직설적인 가사만으로 전달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시를 쓰듯 부드럽고 아름답게도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 어딘가에>는 꼭 한 번 들어보면 좋은 곡입니다.
정치성향 진단| 진보정치로 가는 길
2010년 03월 07일 19:49


한겨레21에서 흥미있는 시도를 했다. 정치성향 좌표 설문 이 그것인데, 과거 폴리티컬 컴퍼스 모델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대략 번역한 내용이 인터넷에서 돌아다녔는데, 이를 공식화한 거다. 한겨레21은 지령 800호를 맞아 P&C정책개발원과 공동으로 한국의 여론주도층 52명의 정치 성향을 조사하면서 이 조사를 활용하였다. 이 폴리티컬 컴퍼스 모델은 인터넷 홈페이지에 접속해 62개 설문 문항에 응답을 하면 바로 자신의 정치 성향을 좌표 위에 드러내 보여준다. 아래는 한겨레21의 관련기사들이다.
멀찍이 달린 ‘보수주의 3인방’
시장·복지·대마초·사형이 성향을 갈랐다
신자유주의, 구한말 좌파의 재림
나는 시장 자유 -8.62, 개인적 자유 -6.30이 나왔다. 의외로 건전한(?) 편이다. 생각보다 그리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얘기다. 사실 이런 설문에 응하게 되면 특히 운동권 내지 자타칭 좌파인 경우 이를 의식한 대답을 하게 되지만, 나는 설문을 보면서 평소 내 성향이 어떠했는지를 떠올렸다. 아마 예전에 설문한 내용은 이보다는 더 정치적으로는 왼쪽, 자유주의쪽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정치인들의 조사결과가 흥미롭다. 소위 보수정치인들도 대부분 자유주의 좌파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서구의 조사결과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인데, 한겨레21의 설명이 어느 정도 답을 해준다. 즉 한국인들에겐 박정희식 국가 주도의 일체형 성장주의가 보수의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공병호 등과 같은 시장지상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한나라당 소속 정치인들조차 왼쪽으로 치우쳐 나타났다는 것이다. 국가와 시장의 이분법은 한국적 현실에서는 정치성향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함을 보여준다. 또한 개인의 자유와 관련해서도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관련하여 개인의 자유에 대한 요구가 강해졌기 때문에 이를 반영한 까닭에 서구보다 더 개인의 자유를 선호하는 쪽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보다 더 좌파적일 것 같지 않은 이들이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몇몇을 제외하고 이들이 결코 나보다 더 좌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원래 폴리티컬 컴퍼스의 경우 직접 응답하지 않은 정치인들에 대해서 그들의 연설, 정책 공약, 인터뷰, 의회에서의 투표 행위 등을 분석하여 좌파를 설정하였는데, 한겨레21에서는 여론주도층인사들이 직접 문항에 응답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그렇게 나타났다고 본다. 당위적인 인식하에 평소 행태와는 다르게 응답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여기에 나타난 것을 진보-보수의 스펙트럼을 제대로 드러낸 것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한편 김규항이 가장 왼쪽에 있는 것으로 드러났는데, 이것은 설문의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설문응답자의 면면을 봤을 때 당연한 결과라고 본다. 내가 보기에도 김규항이 가장 좌파적인 인사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설문응답자가 조금은 제한적으로 선택되었으며, 현실의 좌우구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 못함을 보여준다. 제도정치권은 몰라도 이보다 좌파적인 인사들이 분명히, 상당히 많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참세상 정도에나 조금 나타날 뿐, 소위 진보언론이라는 한겨레나 경향, 프레시안에도 잘 실리지 않는다. 이들이 활동을 하지 않아서 그러한가. 그건 아니다. 그 만큼 사회의 관심이 부족해서일 터이다. 물론 이들의 선전, 홍보의 역량이나 기술이 부족한 점도 작용하겠지만...
얼마 전 '관료제론' 첫 강의에서 강의 소개와 함께 일찍 강의를 마치고 학생 두명과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이런 저런 얘기 중에 그 중 사회복지사 일를 한다는 친구가 자신의 정치성향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해달라고 하였다. 자기 주변에는 민주당마저 빨갱이라고 하는 이들이 많은데, 정작 직장에서 일할 때 보니 괜찮다고 생각했던 상사가 민주당 지지자여서 혼란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선은 민주당 지지자마저 좌파로 인식되는 양상이 여전하다는 것이 아쉬웠고, 정치성향조사와 관련해서는 예전에 해봤던 폴리티컬 컴퍼스의 설문조사와 과거 선거 당시 경실련 등이 만들었던 정당선택프로그램이 생각났다. 그래서 후자의 경우 자신은 민주당 내지 한나라당 지지자이고 지지의 이유는 정책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이들이 정당선택 결과 민주노동당과 유사한 것으로 나와서 당황한 경우가 있었다는 말을 해주었고, 전자의 폴리티컬 컴퍼스의 설문조사를 찾아 줄 테니 설문에 응해보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래서 이번에 찾아봤더니 한겨레21에 관련기사까지 나온 설문조사가 있는 것 아닌가. 이를 이심전심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올해 지방선거도 있고 하니 관심도 제고할 겸 해서 이러한 정치성향 조사를 학생들에게 시켜보면 의미가 있을 듯하다.
사실 62개의 설문문항은 다른 나라의 것과 비교하기 위한 목적이면 몰라도 한국적인 현실에서는 수정될 필요가 있다. 특히 정치적인 좌우파 구분에서는 북한에 대한 태도나 한국에서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변수들이 포함되어야 하는데, 그 비중이 낮거나 없는 것이 한계인 것이다. 설문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신뢰도계수가 낮은 항목들을 빼고 좀더 적은 항목으로 조사를 해야 한다.
나아가 각 설문의 의미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일부 항목의 경우에는 정치성향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 것인지, 설문이 무엇을 묻는 것인지 응답자가 잘 파악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자의적으로 답변할 수 있고, 매번 다른 선택을 하게 될 수 있다. 과거의 응답결과가 다르게 나온다면 자신의 성향이 변화해서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설문문항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매우 그렇다'와 '그렇다'라는 정도의 차이를 묻는 항목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답변 경향도 사람에 따라 다르다. 극단적인 선택을 선호하는 이과 그렇지 않은 이 사이의 차이가 크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보완한다면 의미있는 설문이 될 수 있으리라.
여유가 되면 주변에 있는 행정학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설문에 응해보라고 권하고 그 결과를 취합해보고 싶다. 아주 재미있는 결과가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옆에 있는 후배는 아마 정신분열증에 가까운 결과가 나올 거라고 하는데, 이에 나도 동감한다. 관련되는 분야는 국가, 정부, 공공부문이고, 그 정당성을 옹호하거나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것인데, 다른 전공과는 달리 대부분 보수적인 성향을 띠면서 시장지향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행정학 석박사과정 학생들이 어떠한 정치성향을 드러내는지가 궁금한 것이다. 물론 각각의 개별 항목에 대한 답변내용도 궁금하다.
미국의 종말에 관한 짧은 에세이| 민주주의/국가론
2010년 03월 06일 18:07


미국 관료제의 역사를 정리하기 위해 미국 초기 공화정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2006년경에 닐 우드가 쓴 '미국의 종말에 관한 짧은 에세이'라는 책을 읽고 정리해 둔 것이 생각났다. 따로 파일로 있는 건 아니고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네이버의 행정학 카페에 있더라. 정리해둔 글을 다시 읽고 여기로 옮겨왔다.
2006.10.03 16:27
미국의 종말에 관한 짧은 에세이: 거세된 민주주의, 괴물이 된 자본주의
원제: 『미국의 참주정: 자본주의와 미국의 쇠퇴 Tyranny in American Capitalism and National Decay』(London: Verso, 2004)
닐 우드 지음, 홍기빈 옮김, 개마고원, 2004.
재미있는 책이다. 짧은 까닭에, 그리고 각주나 미주가 달려 있지 않은 에세이인 이유로, 단숨에 읽었다. 물론 3-4일 가지고 다니면서 읽은 것이니 좀 시간은 걸렸나.
이 책은 엘렌 메익신스 우드(Ellen Meiksins Wood)의 남편인 닐 우드(Neal Wood)가 지난 2003년 숨을 거두기 직전 탈고한 마지막 저작을 홍기빈이 옮긴 것이다.
이 책에서는 역사에 기록된 대제국들이 모두 몰락했고, 그 원인은 내부에서 비롯된 것으로, 탐욕과 민주주의라고 한다. 탐욕, 즉 화폐와 재산에 대한 욕심 자체와 이것이 사회 통합에 주는 영향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 그리고 민주주의와 그러한 물욕과의 관계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최근에 내 자신이 민주주의에 대해 관심이 많은 까닭에 목차를 보고 이 책을 집어 들었는데,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는데 도움이 되었다.
“고전 고대 이래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에는 탐욕과 민주주의란 모두 사회통합을 위협하는 파괴적인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등장하고 번성하면서 탐욕은 점차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마침내 아예 사회적 조화와 질서의 기초로까지 여겨지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라는 개념도 21세기 초입에 이르면 사회적 단결의 궁극적 목적이자 단결을 보장하는 장치라고 믿도록 되었다. ... 새 옷으로 단장한 탐욕, 그리고 본 모습을 알 수 없을 만큼 변형되어버린 민주주의의 개념이 합쳐져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심장과 혼이 태어났고, 디들은 자본주의 발전에 꼭 필요한 독특한 원동력이 되고 말았다.” (26쪽)
목차
1장 눈앞에 닥친 위험
2장 위장되고 정당화된 탐욕
3장 송곳니가 뽑히고 모습이 바뀌어버린 민주주의
4장 자본주의라는 참주정
5장 사회적 퇴락의 징조들
6장 미국 정치의 공허함
7장 대안적 사회는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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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 우드는 탐욕에 대한 종교적 경고에서 잘 드러나듯이 사회통합을 막는 암적인 요소인 동시에 자본주의 이전 시기에는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었던 ‘탐욕’이 18세기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 ‘이익’의 개념으로 변신하면서 역사발전의 동력으로 등장하는 것에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모습이 감추어져 있다고 지적한다.
닐 우드는 애덤 스미스가 왜곡 선전되어 왔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애덤 스미스는 상인들 및 제조업자들의 “얼토당토않은 질투심”, “인정사정 두지 않는 탐욕”, “독점을 향하는 정신” 등을 들어 “어느 쪽도 인류의 지배자가 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말하였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작동하여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을 조화시키는 것은 오직 특정 조건들이 갖추어질 때에만 가능하다고 명확히 밝혔다. ‘보이지 않는 손’(이 말이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에서 한 번씩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았다)의 작동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은 “완벽한 자유와 정의의 자연적 체제”라는 틀이 마련되는 것이며, 이러한 틀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자연적 체제’의 관건은 정부이며, 정부의 적극적인 활동이다. 상업사회에 있어서 정부는 사적인 경제활동이 훼방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이루어지도록 법을 강제해야 하고, 경쟁이 벌어지도록 보장해야 하며, 독점을 방지하고, 자유무역을 촉진하고, 또 동시에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계약의 효력을 보장하고, 부채의 지불을 강제하고, 어떤 개인이라도 다른 개인의 활동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정부는 또한 공공의 비용을 써서 인간·재화·원자재의 이동을 촉진할 수 있도록 공공사업·도로·항만·운하 등을 세우고 유지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손’을 지지할 ‘자연적 체제’를 창출하는 정부의 가장 중요한 궁극적인 역할은 모든 계급의 청소년들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대학과 각 교구의 학교들과 같은 공공기관들을 물질적으로 보조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공공의 이익을 목표로 하여 정부가 해야 할 일로, 정부는 소수만이 아닌 모든 시민들의 행복과 번영, 그리고 당연히 생산에 대한 소비의 우위를 달성해야만 한다.
따라서 스미스의 관점에 있어서 정부가 ‘보이지 않는 손’이 성공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환경을 조성하는 개입의 기능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55-56쪽)
닐 우드에 따르면, 애덤 스미스의 이런 주장은 장기적으로는 ‘신의 섭리’가 작동하여 노동자들의 부당한 고통과 어려움을 막아줄 것이기에, 정부는 최소한의 기능만을 가져야 하며, 경제에 대한 개입은 삼가야 한다고 하면서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신의 섭리’에서 우러나오는 장기적인 이익의 조화라는 개념을 가져다 놓은 에드먼드 버크에 의해 바뀌어졌다.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개입을 통한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는 스미스의 단서조항도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버크 이후 도덕적 낙인이 찍힌 ‘탐욕’이라는 용어는 중립적이고 비난의 뜻이 없는 ‘이익’, ‘자기이익’, ‘이윤’ 등이 사용되었다.
“19세기 이후 현재까지 경제를 작동시키는 원동력이자 개인들의 상호의존, 나아가 사회적 통합의 진정한 기반이라고까지 여겨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탐욕’이 아닌 ‘이익’이라는 말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인간행동 최악의 특징이며 사회질서 유지에 심각한 위협이라고 여겨왔던 탐욕은 이제 점잖은 옷을 차려입고 전혀 다른 것으로 변장하게 된 것이다. ‘탐욕’은 멋진 양복을 걸쳐 입고 ‘이익’의 개념 뒤에 숨어서, 탈선적인 인간행동은커녕 정상적이며 또 정당한 사물의 질서가 되었다. 이제 자본주의적 심성이 거침없이 달려 나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된 셈이다.” (62-63쪽)
민주주의에 대한 닐 우드의 견해는 경청할 만하다. 이것은 더글라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에 나오는 내용을 해설해놓았다고나 할까.
“아테네는 여자들이 모든 정치적 역할에서 배제되었고, 거류 외국인과 인구의 다수를 차지했던 노예들을 배제한 결점이 있었으나, 그 당시로나 그 후 오랜 기간의 시점에서 보더라도 모든 남자 시민들에게 가문·교육·재산·소득을 묻지 않고 완전한 정치 참여와 공직 취임의 권리를 보장한 특이성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민주주의란 “가난한 자들의 지배”였다. 아테네에서의 빈부 차이도 현재 우리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그리 과도한 편은 아니었다.
정치과정을 보자면,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모든 남자 시민들에 의한 직접지배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는 국가의 정책을 ‘주권적’ 의회에서 논쟁하고 거수투표로 결정하며, 주요 공직자들을 제비뽑기로 선정하고, 엄청난 규모의 민중배심원제도를 두는 등의 일들을 뜻한다. 의회에 참석하면 일당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가난한 시민들도 일자리가 없다고 해서 경제적 궁핍을 겪지는 않았다. ... 아테네인들에게 있어서 민주주의의 의미는 약하고 불행한 이들에 대한 동정심을 함축하는 것이었다.”(71-72쪽)
민주주의가 참주정을 막아주는 방패라고 찬양된 것은 상당히 최근의 일이다. 2세기 전까지만 해도 참주정을 두려워했던 대부분의 사상가들과 논평가들은 가장 목청 높은 민주주의의 비판자들이었다.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유명한 철학자들도 대부분 민주주의를 비판해왔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투키디데스, 크세노폰,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세네카 등이 남긴 민주주의에 대한 비난의 말들은 실로 방대한 양을 이루고 있고, 옹호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오래오래 살아남아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아테네인들의 실험을 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최근까지도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평결은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이었다.”(73-74쪽)
“이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전개된다. 민주주의, 즉 인민의 직접 지배는 사회적 부패를 증대시키고 도덕적 타락에 적합한 조건들을 창출한다. 민주주의 하에서는 가난한 하층계급이 국가를 지배하며, 그 힘으로 자신들보다 사회적으로 우월한 자들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킨다. 이 군중들은 돈과 재산과 권력과 지위를 놓고 서로 싸우고, 또 예전에 그들보다 위에 있던 자들과 다툰다. 탐욕과 야망으로 인해 시민들은 서로 성공하기 위해 기를 쓰고 싸움질에 돌입, 급기야 공동의 선(common good)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민주주의는 순식간에 ‘폭도들의 난장판’(mob rule)으로 변질된다. 부패와 갈등은 점점 더 심해지고 그 와중에 매력적인 인물이 나와 민중들에게 인기를 얻어 나라의 질서를 회복하겠다고 약속하는 일이 흔히 벌어진다. 그러나 그런 자도 민중들의 호민관으로 자리 잡아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하고 마침내 국가권력을 장악했을 때쯤에는 완전한 참주(tyrant)로서의 본색을 드러낸다.”(74-75쪽)
이렇게 항존하는 타락의 위협에 대한 해독제로 민주주의의 비판자들은 ‘사회적 건전성’을 획득하기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국가를 구조화하는 비전을 제시한다. 이는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것처럼, “사회적 신분의 차별을 뚜렷이 하여 법의 지배에 두는 국가, 궁극적으로는 유산계급이 지배하는 국가”였다. 그 기초를 이루는 것은 1인 지배, 소수 지배, 다수 지배의 형태를 결합시켜 군주정·과두정·민주정의 특징들이 서로 엮여 있어, 견제와 균형의 체제가 제도화된 ‘혼성 정체’(polity)였다. 이러한 ‘혼성 정체’를 통해 확립될 사회적 건전성이란 민주주의 사회에 만연한 부의 축적과 탐욕 대신 사회 전체가 넓은 의미에서의 교육, 그리고 사회적으로 우월한 유산계급이 베푸는 좋은 모범을 따름으로써 그들 지배계급이 규정하고 강제하는 바의 공공선을 좇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부의 틀에서 민중들은 최소한의 역할과 발언권만을 부여받게 되어 절대로 민주정에서와 같이 국가를 통제할 수 없게 된다.”(76쪽)
“미국 헌법의 아버지들은 민주정과 군주정에서 숨은 참주정의 가능성을 보고 특정한 혼성 정체의 형태를 옹호하는 열렬한 공화주의자로 변하였다. 헌법 초안자들의 목적했던 바는 민주주의가 아닌 공화국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들은 인민들의 직접지배나 모든 형태의 다수지배에 커다란 공포와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설계하고 제도화한 성문헌법에 나오는 정부 체제가 이념으로 내걸었던 것은 법의 통치, 견제와 균형을 제도화하는 권력분립, 상·하원 양원제 등이었는데, 이중 민중이 직접 선출하는 것은 오로지 하원뿐이었다. ... 이는 어떤 면에서도 전통적인 의미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음이 명백하며,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역시 그러한 것을 의도조차 하지 않았다. 미국헌법은 어떤 형태의 참주정도 예방하기 위한 천재적이고 정교한 실험으로, 사회적 건전성이라는 목표와 사회적 부패 방지, 그리고 유산계급의 안전을 결합시킨 저 유서 깊은 ‘혼성체’의 한 변형인 것이다. 정부에 있어서 민중들의 역할은 헌법에 의해 제한되었던바, 이것 하나만으로도 갓 태어난 미국을 민주주의로 부를 수는 없게 되었다. 이러한 미국헌법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갖추게 된 것은 오낸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다. 미국 헌법이 그 시작부터 민주주의 헌법이었으며, 따라서 미국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정부라는 것은 커다란 신화일 뿐이다.”(77-78쪽, 192-193쪽)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가 변화하게 된 것은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성장한 노동자들의 저항 때문이며, 이로 인해 미국헌법도 점차 민주화되었다. 하지만 이는 제한적 의미의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에 초점을 두어 절차로 정의할 수도 있고, 포괄적인 사회적 평등에 초점을 두어 내용으로 정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는 전자의 절차적 의미로서만, 즉 정기적인 자유선거로 뽑힌 인민들의 대표들에 의한 정부라는 의미로서만 규정되고 있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민주주의적 정부란 법의 지배, 견제와 균형을 위한 몇 가지 헌법적 구조, 복수 정당의 경쟁, 그리고 인신·재산·언론·결사·종교의 자유 보장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유민주주의’에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난다.”(79쪽)
“일반적으로 ‘다수의 지배’, 그리고 인민들이 어떤 형태로든 정부에 직접적인 역할을 맡는 것에 대한 모종의 뿌리 깊은 불신이 여전히 존재한다. 사회적 평등이라는 내용적 차원에서의 민주주의의 문제는 거의 논의조차 되지 않는다. 소득·재산·부의 불평등이 아찔할 정도로 치솟아 오르는 사회, 그래서 성장하고 있는 소수의 손에 점점 더 많은 부가 집중되고 있지만 도무지 개선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으며, 부자들 아니면 선거에 출마할 능력이 없는 그런 사회라면 과연 진정한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있을까? 일터에서의 민주주의 문제에 관심을 두는 이들은 더욱 적다.” (80쪽)
“사회적 권력의 분배와 관련된 내용적인 질문들은 완전히 무시된 채 개인의 권리나 자유의 보존과 같은 절차적인 측면에만 거의 전적으로 강조점을 두게 되면서, 민주주의라는 말의 의미는 이제 다수의 지배를 예방하고 억누르는 제도로 변질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100쪽)
나아가 민주주의의 내용을 자본주의 및 ‘자유시장’과 연관시켜 아예 똑같은 것으로까지 여기는 경우도 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공통점을 찾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관념화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자유시장은 이제 민주주의와 긴밀히 연결되었고, 아예 동일한 것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 자본주의란 개인 자유의 최대한의 신장이요, 특히 소비자들의 선택의 자유의 확장이며,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자유시장과 정부 개입의 최소화라는 생각은 권위 있는 발언자에게서도 결코 빠지는 법이 없다.
자본주의는 개개인들에게 최대의 자유 - 이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이름붙여졌다 - 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또 다른 특징으로 마구 떠받들어진 법적·사법적 평등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개개인의 능력을 위주로 하는 사회 조직양식이다. ...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는 민주적이며 평등한 무계급 사회이다. 게다가 항상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하고 있어서 영원히 성장하고 진보한다. 진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뚜렷한 표식이다.” (28-29쪽)
“하지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사실상 상극의 관계에 있다. 자본주의의 영리 기업들, 그 사무실과 작업장은 본질적으로 권위주의가 지배하는 장소이며 민주주의적 절차와 내용과는 심히 동떨어져 있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조직되고 운영되는 자본주의적 기업이란 사실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전형적인 자본주의 기업이라면 조직의 위에서 아래로 명령이 내려오고, 권력 피라미드의 아래층에 있는 이들은 질문이나 이탈 없이 그것을 집행한다. 물론 경영진이 하급자들에게 토론과 제안을 권장하는 일도 있고, 기업의 본질인 권위주의가 ‘팀 활동’이나 ‘팀의 단합정신’ 같은 구호를 끌어들여 사용함으로써 종종 본질을 흐리지만, ‘팀’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야말로 개인의 이해·의견·활동 등을 일하는 집단의 조화와 효율성에 종속시키고 협동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권위주의적인 것이다. 마차가 끄는 것이 말 몇 마리이건 팀 정신이 살아 있는 축구팀이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전자에는 채찍을 든 마부, 후자에는 코치와 주장이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적 기업에 ‘팀’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똑같은 공적인 관계를 일컬으면서도 불만을 달래고 기업의 권위적 구조를 슬쩍 감추며 노동력의 단결을 통해 더 충성하고 더 협력하여 생산성을 올리도록 채찍질하는 말장난일 뿐이다.”(81-82쪽)
“탐욕과 마찬가지로 한때 심한 질타를 받았던 민주주의가 이익 및 자기 이익이라는 새 옷 속에 숨어 있는 탐욕을 증진시키고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강화하고 추진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완결 짓는 매듭인 양 추가적으로 인정되고 찬양받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의 권위주의적인 관행을 은폐하고 합리화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21세기 초의 ‘민주주의’란 이제 구호에 불과한 것으로서, 자본주의 기업과 그 확장의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은폐하고 자본주의 기업이 정부와 정치마저 지배하게 된 것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눈속임으로 전락해버렸다.”(84쪽)
“민주주의는 종종 입헌주의와 법치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두 개념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존중되는 것들이지만, 이론적으로나 실제상으로나 민주주의 정부와 아무런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85쪽) “입헌주의가 예로부터 참주정에 대한 안전장치로 여겨져온 것은 타당하나, 민주주의는 입헌주의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입헌주의의 원칙들을 체현하여 참주정의 발호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 아래 둘을 동일한 것으로 놓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하다.” (100-101쪽)
“민주주의가 대충 정당화될 여지가 생긴 것은 민주주의가 이미 아주 결정적인 부분에서 이빨이 뽑혔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의 지배”라는 의미와는 거리가 멀게 된 민주주의는 이제 정부에 대해 각종 책략을 부리는 부유한 자본가들의 손에 꽉 잡혀 전혀 엉뚱한 모습으로 바뀌고 말았다. ... 민주주의의 절차적 측면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바람에 민주주의의 내용에 있어서 결정적인 성격이 뒷전이 되어버렸고 대중들에게나 식자들에게나 민주주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론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가장 중요한 경제적 기능은 자본주의에, 정치적 기능은 그 파트너인 민주주의에 배당하는 식의 기묘한 노동 분업을 통해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부하로 전락해버렸고, 자본주의의 정치적 반영물이 되어버렸다. 민주주의는 점차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다른 모습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사회적 평등, 정치적 평등, 심지어 법 앞에서의 평등(절차로서의 민주주의의 특징이라고 그렇게도 떠들어온)마저 내다버림으로써, 민주주의는 이제 완전히 거세된 것이다.” (85-86쪽)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영양실조와 주택 부족에 시달리며 제대로 된 치료도 받을 수 없는 사회에서 과연 민주주의 작동에 필요한 다양한 활동에 시민들을 참가시키고 또 그들에게 충성심을 불어넣어 민주주의를 번영시키는 일이 가능할까?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문제들이 논의되는 방식을 보면, 오로지 이런 저런 절차들과 제도장치들에 사람들이 따라주는가 아닌가의 관점에서만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한 절차 및 제도장치들이 작동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위와 같은 사회적 조건들이 과연 제대로 갖추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87쪽)
“미국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간격이 갈수록 넓고 깊게 벌어지는 불평등사회가 되어왔다. 민주주의에서 평등이 수평적 혹은 절대적 동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풍족한 자들과 가난한 이들 사이의 격차가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은 분명히 ‘1인 1표’와 ‘법의 통치’와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원칙 또한 부정하는 것이다. 경제적 권력이 소수의 손에 엄청난 양으로 집중되는 곳에서는 이들의 투표가 덜 부유한 대다수의 표보다 훨씬 더 큰 중요성을 가지며, 또한 부자들에게 적용되는 법과 가난한 자들에게 적용되는 법이 다르게 된다.
평등이란 절차상의 규정들 이외에는 민주주의와 아무 관련도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경제적 의미에서의 평등이란 이제 더러운 말이 되어버렸고, 재빨리 ‘자유’라는 말로 대체되어버린다. 평등이라는 말이 두드러지지 않도록 최대한 밀어넣는 이들은 이 ‘자유’라는 말을 통해 사업과 기업활동에 있어서 정부 개입과 통제를 받지 않을 자유, 재산획득의 자유, 시장의 자유, 소비자 선택의 자유 등을 의미한다.
물론 자유는 민주주의에 있어서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이다. 자유란 우리와 차이를 가진 모든 사람들을 향해 적극적이고도 정직한 관용을 함축한다. 하지만 이제 자유는 날마다 더 적은 숫자의 부자들이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이들의 숫자는 더 늘어가면서 그 격차가 벌어지는 사회에서는 본질적으로 공허한 개념으로 전락한다.” (179-178쪽)
제대로 발전된 체제로서 등장한 지 150년도 되지 않은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탐욕과 이기적 행위에 근거를 두면서 이를 ‘이익’, ‘자기 이익’ 등으로 바꾸어 민주주의라는 포장을 씌워 보편화시키고 제도화시켜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자본주의의 이념적 정당화와 사람들 마음속의 자본주의적 심성이라는 원동력은 예전에 사회적 질병으로 여겨지던 것을 그 정반대의 것으로, 즉 정치 공동체의 자연적 조건이요 사회적 건전성으로 변형시켜놓았다.
실로 역설적인 점은, 현실의 사회적 건전성을 재는 척도가 새롭게 바뀌는 바람에 새로운 형태로 지금 출현하고 있는 참주정이 은폐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발달된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문화라는 참주정으로,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속속들이 파고들어오는 이 새로운 형태의 참주정 앞에 가난한 자, 부유한 자, 약자, 강자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88-89쪽)
“종래의 참주정과 새로운 참주정의 주요한 차이 중 하나는, 새로운 참주정은 구체적으로 인격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예전의 참주정에서는 권력과 권위를 멋대로 휘두르는 자가 누구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업의 소유와 통제가 파편화되고 분산되면서 새로운 참주정의 진정한 건설자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조차 실질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자본주의적 기업에 들어간 사람은 누구나 그 개인적 성향과 무관하게 경쟁과 이윤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의 지상명령이라는 비인격적 존재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자본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비판적으로 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기들의 연금과 퇴직금을 고용주들이 쥐고 투자하고 있는 이상 꼼짝없이 자본주의적 질서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이 새 참주정의 놀라운 특징은 전체 체제에 우리 모두가 붙들려서 칭칭 엮여 있다는 점이다.” (105-106쪽)
닐 우드는 거세된 민주주의와 괴물이 된 자본주의에 장악된 미국이란 제국은, 긍정적 의미의 ‘외부의 공포’를 갖지 못한 로마제국이 멸망의 길에 들어섰듯이, 더 이상 어떤 경쟁자도 없는 유일의 초강대국이 됨으로써 스스로 종말의 싹을 잉태하게 되었다고 본다. 저자는 원래부터 부와 그에 따른 특권에 기반한 계급사회였지만 점점 더 그 성격이 강해지고 있는 미국의 빈부격차와 범죄율 등의 수치들을 낱낱이 들추며 그 징후들을 읽어내면서, 가장 주목할 것은 무엇보다 미국 정치의, 민주주의의 급격한 쇠퇴 혹은 타락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실업 관련 수치들은 선진 산업국들 중 가장 낮지만, 이는 상당히 진실을 숨기고 있는 수치들이다. 약 1,200만, 즉 전체인구의 5%가 실업 상태이며, 여기에 600만 명 정도가 ‘조건부’ 혹은 일시적인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약 1500만 정도가 수당도 없는 파트타임 직장이나 노동시간 단축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거기에 추가하여 300만 이상이 실업상태이지만, 수당지급 자격 미달이거나 일자리 찾기를 포기했다는 이유로 통계에 잡히고 있지 않다. 그리고 급속히 불어나고 있는 감옥에 있는 200만 이상의 사람들이 있다. 그리하여 실업, 파트타임 직장, 군대, 감옥 등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합칠 경우 전체인구의 10~15%에 달한다.”(118쪽)
“미국이 점점 더 부유해지고 제국주의적으로 되고 한줌의 부자들과 다수의 빈곤층으로 양극화된 계급사회로 변해가면서 동시에 시민들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은 악화되어 왔다. 인구의 15%인 4000만 명 이상이 1년 내내 충분한 의료보험 없이 살고 있으며, 의료보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무려 700만에 이른다. 반면 형편이 괜찮은 이들과 부자들은 자신과 가족들에게 가지가지 항목을 포함하는 값비싼 건강보험을 사적으로 구입하든가 직장에서 얻든가 한다. 빈곤선보다 나은 생활을 하는 가정에서도 18세 미만의 많은 아이들이 의료보험이 없는 상태다. 그리고 그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는 고용주들이 피고용자들의 부양가족에 대한 의료혜택을 삭감하거나 없애버리기 때문이다.”(124쪽)
닐 우드가 지적하는 미국사회의 소비주의는 우리에게도 낯설지가 않다.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본질 자체가 이제 구매충동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이는 어떤 소매 유통업체의 구호에 잘 드러나 있다.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우리는 데카르트가 옛날에 주장한 것처럼 우리의 합리성을 빌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생각도 정신도 없이 그 저 영원히 계속되는 구매와 돈쓰기의 광란에 온몸을 던지도록 프로그램된 행위 메커니즘으로 전락한 덕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인 것이다. 신문·잡지·TV·전화·광고전단과 우편물·인터넷 등이 힘을 합쳐 우리 일상을 거대한 시장판으로 만들어버린다.”
“상품은 사고 나면 금방 낡은 것이 되며, 옷에서 자동차와 컴퓨터에 이르는 유행의 변화는 최신 상품을 더 많이 더 많이 사고자 하는 욕망에 불을 지른다. TV나 라디오를 끈다고 해도 사방에 넘쳐나는 광고로부터 피하거나 숨 돌리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버스와 택시, 심지어 경찰차조차 꿈에 나올까 두려운 유치찬란한 색깔의 광고로 도배가 된 채 굴러다닌다. 정부의 지원 삭감으로 재정난에 몰린 대학들 중에는 기업 후원자를 찾아서 실험실은 물론 화장실, 강의동에까지 그 후원자의 이름을 그대로 붙이는 일도 종종 있다.”(141-142쪽)
소비주의에 비판에 더하여 삶의 속도에 대한 지적은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게다가 추석 연휴에 푹 쉬면서 재충전의 기회로 삼기보다는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을 처리할 기회로 여기면서 계속해서 일과 공부만을 생각하는, 지금의 나에 대한 따끔한 목소리이다. 지금 나는 메신저를 꺼놓았고, 연휴 때는 휴대폰도 꺼놓을 생각이다. 물론 괴로워도 슬퍼도 잘 울지 않는 캔디폰이기는 하지만...
“갈수록 가속도를 더하면서 거의 발광에 가까운 문화를 낳고 있는 미친 듯한 삶의 속도도 미국 생활의 특징이다. 만사를 잊고 떠나 쉬는 일은 아예 불가능하며, 심지어 잠시 일에서 풀려나 숨 돌리는 일조차 갈수록 힘들게 되었다. 노동은 갈수록 빨라지고 힘들어지고 있다. 휴식과 안정은 이제 사라질 위험에 처했다. 컴퓨터와 핸드폰으로 업무가 계속되면서 우리는 사무실을 떠나 집에 있는 시간도 계속 침탈당하고 있다.
이 새로운 ‘상호연결성’(interconnectedness)은 우리의 안식과 사생활을 파괴하고 있으며, 만사를 잊고 쉴 기회도 빼앗아가 버렸다. 각종 업무와 사회생활에 필수품이 되어버린 핸드폰 덕분에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건 항상 연결 상태에 있게 된다. 컴퓨터의 사용도 언제 어디에서든 긴장을 풀 수 없게 한다. 가뜩이나 쥐들의 경주처럼 되어버린 미친 듯한 속도의 삶을 더 악화시킨다.
친구와 동료들에게 편지를 쓸 때 먼저 충분히 생각을 정리하여 조심스럽게 초고를 잡는 것에서 시작하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아침부터 밤까지 이메일로 융단폭격을 하며 살고 있으며,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내는 그런 메일들은 거의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옮겨 놓는 수준이다.”(143-144쪽)
“미국인들의 차에 대한 애착, 그리고 대부분의 장소에 차를 몰고 가야 한다는 필요 등으로 인해 우리의 문화는 무수한 면에서 구조가 바뀌게 되었다. 차에 대한 이러한 병적인 집착은 미국 사회의 다른 특징들은 계급 분열, 폭력, 소비주의, 미친 듯한 삶의 속도 등을 떠받치고 또 부추기는 동시에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한 기둥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차량 밀도가 치솟으면서 기차 등의 다른 대중교통 수단은 재정지원도 줄고 심히 쇠퇴했다. 풍족하거나 안락한 수준의 생활을 하는 자들은 집단으로 도심을 탈출하여 교외로 나갔으며, 이로 인해 미국 도시의 구조에도 심대한 변화가 나타났다. 도시 주변의 시골은 넓은 고속도로와 입체 교차로 등으로 경관이 망가졌다. 커다란 쇼핑센터가 고속도로 주변에 도처에서 솟아올라 교외 거주자들의 소비욕을 충족시키며, 거대한 주차장이 그 열성적인 구매자들을 수용한다.
이 자동차 광증(car mania)”은 물리적·인공적 환경을 바꾸어놓고 사회생활을 변형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공해와 관련 질병, 범죄와 폭력, “신나게 차를 모는” 십대들, 숱한 교통사고와 사망자를 낳는 해로운 현상이다.”(144-146쪽)
“미국인들은 점점 쇼핑과 은행 업무, 이메일과 온갖 종류의 정보를 인터넷에 의존하고 있다. ... 분명해진 것은 인터넷을 통한 교육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이들일수록 단순한 정보의 취득을 사유와 사색, 비판적 판단 등과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것들은 다른 학생들과 교사들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 관계를 쌓으면서 계발하고 배양하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새로운 기술혁명으로 경제적 지구화가 크게 강화되기는 하겠지만, 노동시간 증가, 노동자들의 스트레스와 긴장의 증가에 수반되는 심각한 문제들도 있다. 어느 곳에서 날아든 메시지를 언제 사용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대단한 골치 아픈 문제가 되어 노동자들의 인내력과 기술을 심하게 갉아먹고 있다.”(151-152쪽)
미국정치의 공허함에 대한 닐 우드의 지적도 또한 미국화되어가는 한국의 정치에 시사점이 있다.
“최근의 연방선거에서 투표율이 이토록 저조한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시민들은 종종 부정직과 부패로 지탄을 받아도 그저 “임기응변의 능구렁이들”처럼 빠져나갈 뿐인 정치가들과 정치 자체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 또한 닮은꼴인 두 개의 정당을 놓고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유권자들은 과연 그 사이에서 뚜렷한 정책의 차별을 볼 수 있는가? 여기에서 무슨 진정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선거는 그래서 보통 출마자들의 인간성 경연대회로 전락하기 일쑤이다.” (182쪽)
“미국정치는 지난 몇 년간 국가적으로 심히 중대한 정치문제들에 대해서도 진지한 논쟁이 벌어진 적이 없다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충분한 자료와 정보에 기반을 둔 토론과 신속한 결단이 시급히 요청되는 국내 정치와 국제 정치의 근본 문제들은 무수히 많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정치가들은 핵심적인 문제들을 따지고 또 응수하는 그들의 책임을 저버리고, 대신 주변적인 문제들에 몰두하고 있다. 낙태, 안락사, 총기관련법, 군대 내 동성애자 등의 문제들은 물론 중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이 충분한 일반 의료보험 프로그램, 사회안전망과 주택의 확충, 빈곤 퇴치, 빈부의 격차 해소, 선거공영제, 인종 차별, 인권, 사형, NATO의 확장 등의 핵심적인 문제들과 과연 비교할 수 있는 것인가? 투표자들은 정치가들이 이 가장 중대한 문제들을 받아안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따라서 더 이상 이들에게 표를 던지는 수고 따위는 하지 않는다.” (186-187쪽)
“미국정치가 공허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시민들 생활의 많은 부분이 정치의 범위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경제’가 더욱 중요하며 점점 더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그 모든 인간활동과 모든 사회관계는 경제의 ‘법칙들’에 종속되어 있으며, 주택에서 연금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많은 사회적 기능들이 시장의 지배에 내맡겨지고 있다.
또한 자본가들에게 엄청난 이윤의 원천이 되도록 용의주도하게 부양되고 발달되어온 미국의 대중문화 생활에도 그 원인이 있다. ... 정치나 정치문제들로 대중들을 일어나게 하고 그들의 감정을 자극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나약하고 비겁한 대다수 현재 정치가들의 성격으로 인해 정치는 흥미도 없고 반복적이며 지루한, 결코 오락적이지 않은 것으로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중요한 정치 이슈들을 정말로 세밀하게 검토하고 열렬히 논쟁하는 이들이 워싱턴 중앙정부가 아닌 주 정부와 지방정부 수준의 좀더 좁은 범위의 대중들이라는 점, 교육·환경·교통 등과 같은 문제들에 진정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이들의 위원회 같은 곳이라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188-190쪽)
“미국 정치의 암담한 상태를 잘 보여주는 것은 기독교 우파가 전국적 차원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 빌리 그래험에 따르면, 미국은 이제 전 지구의 강대국이 되었는지라 악마의 주요 타깃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미국이 처한 여러 골치 아픈 문제들의 원인은 ‘악마’라는 것이다. 이 악마의 공격을 물리치고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모두 함께 종교로 돌아와서 기독교적 신념과 가치를 강화하여 우리 스스로를 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이러한 기독교 우파의 극단적인 보수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는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악마들이(주로 진보주의로 변장하여 나타나는데 최근 심각한 위협이 되도록 창궐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미국적인 소중한 가치들에 대해 공격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악마들과 맞아 싸우기 위해 이들은 미국 남부와 로스앤젤레스, 미국 북서부에 걸친 도시 교외지역 등에서 공화당 조직에 확실하게 침투했다.” (194-195쪽)
홍기빈의 역자 후기 「‘미국적 가치’에 대하여」에 이러한 내용들이 나름대로 정리가 되어 있다. 역자는 미국화가 진행되어 일상의 안팎으로 속속들이 미국적 가치와 섞여들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을 비판’하는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는다. “우리 존재에 대한 성찰, 그리고 그 존재의 일부가 되어버린 ‘우리 속의 미국’을 반성하지 않은 채 마이클 무어와 에미넴의 입심과 재치에 갈채하고 그저 부시와 네오콘에 대한 저주만을 입에 달고 다니는 행위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닐 우드가 취하고 있는 방법에는 미국적 가치에 대한 서양 정신사 전통으로부터의 내재적 비판,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 어떠한 결과를 낳았고 그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띄게 되는가에 대한 고찰, 그리고 문명 쇠퇴론의 문제의식이 들어 있다. 닐 우드는 미국 사회 모순의 뿌리로서 자본주의를 지목하는 그의 관점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있으며, 자본주의에 점령당한 미국문명이 급격한 쇠망의 길로 접어들 것임을 암시한다. 물론 여기서 ‘자본주의 미국 쇠망’의 메커니즘은 ‘정치적 맑스주의’의 특징을 반영하여 ‘시민 도덕(civic virtue)의 쇠퇴’라는 관점에서 접근되고 있다. 홍기빈은 단지 자본 축적이나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주제에 갇히지 않고,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퇴락이라는 도덕적 관점에서 미국적 가치와 그 퇴락을 비판하고 반성할 수 있는 보다 폭넓은 윤리적 정신적 관점을 담아내고 있다고 파악한다.
여기에서 ‘살루스트의 정리’ 즉 “외부의 적에 대한 공포가 국가 내부의 통합을 증대시킨다”는 원리는 살루스트가 당대의 사회적 불화와 도덕적 타락을 설명할 원인을 찾기 위해 로마의 과거를 연구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홍기빈은 9·11 이후 미국의 지배계급이 이를 변질시켰다고 파악한다.
원래 살루스트가 관심을 두었던 것은 로마 공화정 말기에 만연했던 정신적 타락을 막고 고상한 시민도덕을 소생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외적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면서 이를 사람들 속에 잠들어 있는 고상한 감정과 공동체정신을 소생시킬 원동력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전제로 하였으며, 이를 통해 도덕적 타락과 공화국의 쇠망을 예방하거나 최소한 그 속도를 늦추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지배계급은 그 정반대로 사람들의 정신적·도덕적 감각을 더욱 저열하게 마비시켜서 지배 체제를 위해 편리하게 조작 동원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었다. 살루스트의 정리를 그대로 따르기는 하되, 미국 전통 가운데 가장 논란의 여지가 많은 가치들을, 그것도 가장 단순 무지하고 사람들의 저열한 증오심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소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닐 우드는 마지막에 자본주의라는 참주정이 지배하는 미국에 대한 대안을 개락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좋은 얘기들의 집합체이다. 문제는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가 그러한 대안의 가능성을 향하는 길을 따라갈 의사와 능력이 있는가인데, 닐 우드는 변혁을 향한 의지만 있다면 그러한 목표들을 달성할 방법을 반드시 찾아낼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고도의 자기희생, 단호하고도 끈기 있는 단결행동, 엄청난 양의 땀방울 등이 요구되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가 개략적으로 그려낸 사회적 목표라는 것들은 인간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사회주의의 목표들이다. 인간들이 현재의 자기중심적이고 탐욕에 가득 찬 재산과 권력 확장으로부터 해방되려면, 자본주의의 참주정을 그러한 사회주의로 대체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그렇게 해야만 진정한 민주주의가 굳게 확립될 수 있을 것이다.”(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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