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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도 ‘계급·계층 투표’ 뚜렷

손낙구 선배가 <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라는 책을 펴낸다고 한다. 그와 관련된 기사가 경향신문에 났는데, 많이 흥미로운 기사다. 1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책이기에 이를 누가 사볼까 싶지만, 의외로 관심을 갖는 이들이 꽤 있을 듯하다.책 내용의 핵심은 경향신문의 인터뷰 기사에 있다. 

 

손씨는 “지금까지 서민들이 부유층 지지 정당인 한나라당을 찍으면서 계급 배반 투표를 한다는 분석과 시각이 많았는데, 주된 경향은 아니었다”면서 “부유층은 열심히 계층 투표를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아예 투표를 안 하거나 야당을 찍는 식의 투표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유권자들은 철저하게 계급투표를 한다는 것이다. 주택소유자와 아파트가 많은 곳일수록 한나라당에 투표하는데, 이는 집값을 올리기 위한 합리적 선택의 결과이다. 그리고 셋방 사람이 많고 아파트 비율이 낮은 곳일수록 민주당에 투표를 하는데, 이는 집없는 사람들의 경우 80%가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하는 등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사는 곳을 '내 동네'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어 지역 정체성도 떨어지고, 투표율 또한 낮게 된다. 지방정치가 잘 안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손낙구 선배는 파악한다.

 

나름 의미 있는 분석이다. 게다가 거기에 들어간 손낙구 선배의 노력이 만만치 않으니... 한 동안 뜸하더니 이 책을 쓰려고 했나 보다.

 

그런데 이러한 분석이 조금은 일면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분명 서울에서 주택 보유 여부가 정치적 성향을 결정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가장 주된 요인일까. 그리고 서울, 수도권과 지방은 그 성향이나 변수가 분명히 다를 것이다. 지방에서 집이 있다는 자체는 큰 변수가 되지 않을 거라는 얘기다.

 

또한 연구의 함의도 조금은 이해하기 어렵다. 뉴타운정책이 민주당의 지지층과 어긋난다는 사실이 연구결과에서 드러났다고 치자. 그리고 자기 지지층이 진정으로 원하는 정책을 내야 하는 것도 맞다. 그렇다면 민주당이나 진보정당은 어떠한 주택 정책을 펴야 할까.

 

그 지지층들도 집을 얻게 되면 민주당을 버린다는 뜻인데, 민주당은 될수록 주택보유율을 낮추어야 하는 걸까.  그건 아닐 것이다. 결과가 맞다면 집 보유 자체가 지지를 결정하는 변수가 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구체적으로 그게 어떻게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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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강남이라도 대치1동·역삼1동 ‘표심’ 극명 (경향, 손제민 기자, 2010-02-07 18:28:50)
ㆍ집가진 사람들 ‘집값 상승’ 위해 여당에 투표
ㆍ이사 잦은 빈곤층, 야당 지지해도 선거 무관심
ㆍ한나라 ‘뉴타운 수혜’… 민주 정책방향 바꿔야

 
대치1동과 역삼1동. 두 동네는 이른바 ‘강남’에 속해 있다. 그러면 둘 다 부자 동네일까. 그렇지 않다. 손낙구씨가 쓴 <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에 따르면 서울 강남구 대치1동은 거주자의 88%(다주택자 16% 포함)가 주택을 소유하고 있고, 97%가 아파트에 산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강남 지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강남구의 역삼1동은 무주택자가 80%에 이르고,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6%밖에 되지 않는다. 혼자 사는 가구 비율도 대치1동은 3%이지만, 고시원과 원룸이 많은 역삼1동의 1인가구는 55%에 이른다. 두 동네는 부동산 자산 보유 측면에서 빈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셈이다.
 
그것이 선거정치에 갖는 의미는 분명해 보인다. 대치1동의 2004년 총선 투표율은 72%, 그 가운데 한나라당 지지가 64%였다. 반면 역삼1동에서는 유권자의 49%가 투표에 참여했고, 이 중 한나라당 지지는 41%에 불과했다. 당시 역삼1동의 민주+열린우리당 득표율은 43%로 한나라당을 앞섰고, 민주노동당 득표율도 13%에 달했다. 역삼1동만 그런 것이 아니다. 논현1동, 대치4동, 일원1동, 수서동 등이 아파트와 부동산 보유의 측면에서 본 ‘강남 속의 강북’이라 할 만하다. 투표 행태까지 역삼1동과 비슷하다. 이는 강남을 한 덩어리로 보았을 때에는 결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이는 서울 전체로 확대해도 마찬가지다. 서울에서 투표율이 가장 높은 잠실7동 등 10개 동네를 보면 평균 84%가 집을 가진 사람이고, 아파트 거주자가 98%다. 반면 투표율이 가장 낮은 논현1동 등 10개 동네는 집을 가진 사람이 26%, 아파트 거주자가 5%에 불과하다.
 
1인가구와 (반)지하 거주자는 투표율 상위 10개 동네에서 각각 5%, 1%에 불과하지만, 투표율 하위 10개 동네에서는 43%, 17%로 높다. 투표율 상위 10개 지역의 한나라당 지지는 2004년 총선에서 57%, 2006년 지방선거에서는 76%에 달했지만 투표율 하위 10개 지역은 한나라당 지지가 각각 32%, 58%로 상대적으로 낮았다. 투표율 상위 10곳과 하위 10곳의 선거권자는 각각 28만명, 29만명으로 비슷하다. 하지만 실제 투표자수는 19만명 대 13만명으로 6만명의 차이가 났다. 투표율이 낮은 동네가 높은 동네에 비해 6만표 만큼 민의가 덜 반영된 셈이다.
 
이러한 경향은 수도권 전체 1186개(실제 분석은 자료가 있는 1164개) 동네로 확대해도 똑같이 적용된다. 손씨는 이렇게 정리했다. “아파트가 많고 주택 소유자가 많은 부자 동네는 열심히 투표를 하고 대개 한나라당을 찍는다. 아파트가 적고, 무주택자가 많은 가난한 동네는 투표를 잘 안 하지만 하게 되면 민주당을 찍는다.”

 
부동산 보유 여부가 이런 투표 행태로 이어지는 데는 이사를 얼마나 자주 다니느냐가 중요 변수이다. 셋방 사는 사람들이 집 주인보다 이사를 더 자주 다닐 것임은 짐작 가능하다. 손씨가 인용한 2005년 인구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전국 가구의 절반 이상이, 셋방 사는 가구의 80%가 최소 5년에 한 번 씩 이사를 다닌다. 전 국민의 30%, 셋방 가구의 52%는 2년에 한 번씩 집을 옮긴다. 수도권은 더 심해서 2년이 지나면 셋방 가구의 절반을 포함해 동네 사람 3분의 1이 바뀌고, 5년이 지나면 셋방 가구의 82%를 포함해 동네 사람의 3분의 2가 바뀐다. 여기엔 뉴타운 재개발이 한몫한다. 단기간 내에 재개발로 상당수 주택이 아파트로 교체된 성동구에 지역구를 두었던 최재천 전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은 “불과 4년 만에 동네가 모두 아파트로 바뀌는 바람에 선거 조직 자체가 들어갈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최 의원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2004년 성동구의 아파트 비율은 57%였지만, 그가 낙선한 2008년에는 아파트가 70%를 넘은 상태였다.
 
손씨는 “셋방 사는 사람들은 2년도 채 살지 못하고 떠나니까 내 동네라는 관념이 생길 수 없고, 따라서 지방선거든 총선이든 지역에서 벌어지는 선거에는 관심이 없다”면서 “하지만 아파트와 자기 집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동네는 아파트 값을 올려줄 것이라고 믿는 후보를 찍기 위해 열심히 투표장에 나오게 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최근 몇년간의 선거를 두고 ‘강남지역은 계급 투표(한나라당 지지)를 하는 반면, 강북지역은 계급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이미지 수준의 분석은 틀린 것이 된다. 2008년 총선 결과도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심판의 연장이라는 측면 못지않게 서울의 동네별 인구, 주택 구성이 바뀌어버린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노무현 정부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뉴타운 재개발의 수혜자는 한나라당이었으며, 지금 같은 수도권 재개발이 계속 추진된다면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은 발붙이기 어렵다는 얘기가 가능하다.
 
▲어떻게 조사했나
2005년 통계청 인구주택 총조사부터 ‘타지주택 소유 여부’와 ‘거주 층’ 문항이 추가돼 자기 집을 전세 놓고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 통계가 잡히게 됐다. 손낙구씨는 이 자료를 행자부의 다주택 소유 자료, 선관위의 투표 자료와 대비하며 동네별 주택 소유 여부와 거처 종류를 나누고 투표율과 정당별 득표율을 견주어 비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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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계급·계층 투표’ 뚜렷 (경향, 손제민 기자, 2010-02-07 18:37:01)
ㆍ수도권 1164개 읍·면·동 ‘정치사회 지도’ 분석
ㆍ아파트 많은 동네, 투표율 높고 한나라 지지
ㆍ세입자 많은 동네, 투표율 낮고 민주당 지지

 
내 집을 가진 사람과 아파트가 많은 지역일수록 투표율이 높고, 그렇지 않은 지역일수록 투표율이 낮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또 주택소유자와 아파트가 많은 동네일수록 한나라당에 투표하고, 셋방 사는 사람이 많고 아파트 비율이 낮은 동네일수록 민주당(열린우리당 포함)에 투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돈 없는 서민들이 자신의 계급을 배반하고 한나라당에 표를 준다는 일각의 통념과 달리 유권자들이 철저한 계급·계층 투표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부동산 계급사회>의 저자 손낙구씨는 다음주 출간할 <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후마니타스)에서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1164개 읍·면·동별 주택 소유 실태와 투표의 상관관계를 분석해 이 같은 결과를 얻어냈다. 책에 따르면 2006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의 투표율 상위 20% 동네에서는 집을 소유한 사람 비율이 67%, 아파트 거주자 비율이 76%인 반면 투표율 하위 20% 동네들은 집을 소유한 사람이 37%, 아파트 거주자가 10%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투표율이 높은 지역에서는 한나라당, 낮은 지역에서는 당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득표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투표율 상위 20% 지역에서 각각 한나라당 64%, 민주당·열린우리당 27%, 하위 20% 지역에서는 한나라당 56%, 민주당·열린우리당 33%의 득표율을 보였다. 즉 집 소유, 아파트 거주 비율이 높은 동네에서 투표율이 높았고, 이 동네가 한나라당에 투표한 흐름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2004년 총선으로, 서울을 전체 수도권으로 확대해도 비슷한 흐름이 나왔다.
 
민주당·열린우리당은 무주택자 비율이 높은 동네에서 득표율은 높았지만, 한나라당에 비해 유권자들을 투표장으로 많이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한편 민주노동당 득표율은 주택 소유와 큰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 뚜렷한 지지 기반이 없는 것으로 해석됐다.
 
학력과 종교도 투표 행태와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투표율 상위 20% 동네 주민의 대졸 이상 비율은 65%, 투표율 하위 20% 동네는 43%였다. 종교 인구도 투표율 상위 20% 동네의 경우 59%였지만, 하위 20% 동네는 52%였다. 이런 투표 경향은 수도권 1164개 동네를 투표율 순서에 따라 20%씩 다섯 구간으로 나눴을 때 예외없이 단계적으로 나타났다.
 
정부의 2005년 인구·주택 총조사 통계와 역대 선거 투표 자료 등을 분석한 손씨는 “사람들이 부동산·학력 등에 따라 계층 투표를 해왔다는 것이 확인됐다”며 “민주당 등 야당은 한나라당을 따라갈 수 없는 뉴타운 같은 정책보다 자기 지지층이 진정으로 원하는 정책을 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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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방 떠도는 이들 삶 속에 진보 해법 있다” (경향, 김종목 기자, 2010-02-07 18:24:46)
ㆍ‘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 저자 손낙구씨 
 
손낙구씨(47)가 <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를 구상한 것은 서민들의 실제 생활을 반영하지 못하는 진보 정치·운동의 현실과 한계 때문이었다. 손씨는 “반지하 전세·월세방을 떠돌며 사는 이들의 삶을 들여봐야 한국 사회와 정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진보 정치·운동의 대안과 해법을 찾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주목한 게 읍·면·동 단위의 동네다. 미시 분석을 하자 통념과 다른 사실이 나왔다. 손씨는 “지금까지 서민들이 부유층 지지 정당인 한나라당을 찍으면서 계급 배반 투표를 한다는 분석과 시각이 많았는데, 주된 경향은 아니었다”면서 “부유층은 열심히 계층 투표를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아예 투표를 안 하거나 야당을 찍는 식의 투표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손씨는 전국의 3573개 동네 가운데 수도권의 1164개 동네를 분석했다. 손씨는 “수도권에 셋방 사는 사람들 중 80%가 2년에 한 번씩 이삿짐을 싸고, 집주인을 포함한 수도권 주민 가운데 3분의 2가 5년에 한 번씩 이사한다”면서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기에 ‘내 동네’라고 여기지 못한다. 동네정치, 지방정치가 제대로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손씨는 “이 책이 정치에 국한된 책은 아니다. 어느 동네에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자세하게 나와 있다”며 “우유 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영업에 꼭 필요하겠다’면서 책이 나오면 빨리 달라고 하더라”며 웃었다.
 
1631쪽의 방대한 분량. 손씨는 “한편으로 속시원하고, 한편으로 허전하다”면서 “읍·면·동별 통계를 내느라 고생한 통계청 공무원들에게도 감사드린다”고 했다. 그는 “수도권 이외 지역도 곧 분석할 계획”이라며 “앞으로 한국 사회를 더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부동산 계급사회>(2008)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손씨는 노동운동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활동가다. 1999년부터 2004년 초까지 민주노총 대변인을 지냈고, 심상정 전 의원 보좌관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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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생각한다 관련기사 모음

삼성공화국, 아니 이건희 제국에 대한 폭로.
쉽지 않았을 텐데... 다시 한번 삼성, 이건희 일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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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에 바랜 신화의 기록 (한겨레21 2010.02.05 제797호, 정혁준 기자)
[VS] 삼성 비자금 양심선언 사건 책으로 정리한 김용철 변호사…
감춰진 ‘황제경영’과 전략기획실의 전횡 다뤄

 
- 책을 출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 이건희 전 삼성 회장 일가와 가신들이 비자금을 조성하고, 그 일부를 검찰과 언론 등 국가와 사회 여러 분야에 뿌려 공적 기능을 무력화했다. 대부분의 비자금은 이 전 회장의 영속불변의 권력체계를 유지하고 확대하는 데 사용했다. 이게 삼성 비자금 사건의 핵심이다. 하지만 수사와 재판을 거치면서 대부분이 근거 없는 것으로 결론났다. 물론 일부 조세포탈과 배임에 대해선 유죄가 확정됐지만, 이마저도 4개월여 만에 대통령 특별사면이 이뤄졌다. 정사의 기록은 이렇게 끝났다.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내가 검찰과 법정, 언론에 말한 진실은 역사도 신화도 아닌 야사로만 전해지게 됐다. 내가 말한 기록이 야사로 남더라도 어떻게든 정리해서 진실을 남겨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책을 쓰게 됐다.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 무소불위의 전략기획실 얘기다. ‘난다 긴다’ 하는 임원들도 전략기획실 앞에선 꾸벅 죽는다. “여기 (전략기획)실입니다”라는 전략기획실 과장의 전화를 임원들은 거의 부동자세로 받는다. 삼성 전략기획실과 청와대 비서실 중 과연 어디가 더 셀 것 같나. 비교가 안 된다. 삼성 전략기획실의 파워가 청와대 비서실을 능가한다. 물론 나 역시 삼성에 있을 때 삼성화재와 삼성전자에 이름을 걸쳐두고 있었지만 그 회사를 위해 일한 적은 없었다. 오로지 이 전 회장을 위해 일했다. 이는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삼성에선 서비스 사장 하다 제조업체 사장 한다. 전문성은 전혀 상관없다. 이 전 회장에게 충성만 잘하면 승진한다. 삼성 같은 글로벌 기업에서 제대로 된 경영자 하나 키우지 못한다. 이 전 회장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해 잭 웰치 같은 뛰어난 경영자가 나오기 힘든 구조다.
 
- 이건희 전 회장이 사면을 받았으니, 면책을 받은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는데.
= 주로 그런 주장을 펴는 쪽은 자신들을 보수라고 일컫는다. 하지만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고 병역을 기피하는 보수가 있다는 말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들이 보수를 자처하는 것은 더 많은 이익을 챙기려 하기 때문이다. 삼성 비자금 사건은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부패와 반부패의 문제다.
 
- 검찰과 관련한 얘기도 많이 나온다고 들었다.
= 일본 도쿄지검 특수부와 우리나라 검찰을 비교해보자. 도쿄지검 특수부는 집권 민주당의 실세인 오자와 이치로 간사장의 정치 자금을 수사 중이다.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해서도 칼을 들이댄다. 하지만 우리나라 검찰은 죽은 권력에만 칼을 들이댄다. 이명박 정부의 친인척이나 삼성엔 손도 못 댄다. 물론 검사들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눈치를 안 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검사들에게 혁명가가 되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검찰 조직이 돼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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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게 정의'?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프레시안, 이대희 기자, 2010-01-29 오후 6:51:02)
[화제의 책] 김용철이 <삼성을 생각한다>를 쓴 까닭
  
가장 큰 관심을 불러일으킬 내용은 2부 '그들만의 세상'에 기록돼 있다. 김 변호사가 삼성에 입사할 당시부터 퇴사할 때까지 그가 보고, 듣고, 실행하고, 느낀 삼성그룹의 경영방식이 고스란히 수록됐다. 언론의 찬사를 집중적으로 받는 '총수 경영'이 실제로 어떤 폐단을 가졌는지, 이건희 전 회장의 독단적인 결정이 회사에 얼마나 큰 피해를 입혔는지, 비리로 얼룩진 이건희 일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가 글로벌 기업으로 뻗어나갈 삼성그룹 조직원들에게 어떤 부작용을 가져오는지 등이 세세한 에피소드를 근거로 소개된다. 특히 그는 삼성 경영 실무의 모든 것을 책임졌던 이학수 당시 그룹 부회장과 김인주 당시 사장과의 대화를 복기해 이들의 불법적 경영 행태를 고발한다. 김 변호사의 눈에 비친 그들은 이건희 일가의 이익이 곧 회사의 이익이며, 나아가 국가의 이익이라 믿는 사람들이었다.
 
총수 일가 보필이 그룹 최고 의사결정기구(구조조정본부)의 최우선 업무가 되다보니 실제 그룹의 미래를 열어가야 할 엔지니어, 전문경영인 등은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오직 그룹의 검은 돈을 관리하는 이들만이 가장 높은 보수와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조치이기도 했다. 내막을 아는 이들이 이탈해서 김 변호사와 같은 행동을 취하는 것은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황제식 경영이 과연 글로벌 삼성의 성장에 도움이 됐을까. 김 변호사는 "아니오"라고 말한다. 모든 결정을 총수와 구조조정본부 소수 임원이 하는 구조이다보니 계열사 사장들은 '얼굴 마담'이나 다름없었다.
 
삼성 노동자와 소비자들의 돈으로 만들어진 비자금의 또 다른 용처도 있다. 바로 이런 황제식 경영의 지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사용되는 '뇌물'이다. '떡값'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각계에 뿌려진 이 돈은 이건희 부자가 무죄 판결을 받을 때, 비자금을 조성할 때, 삼성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는데 큰 힘을 발휘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많은 사례 중 김 변호사가 직접 맡았던 에피소드 하나를 공개한다. "대법관에게 150만 원짜리 굴비 선물세트를 보낸 일도 있다. 당시 이학수는 내가 직접 전달하라고 했다. 그게 예의라는 게다. 그러나 나는 운전기사를 대신 보냈다. 속으로는 '대법관이 설마 삼성이 보낸 굴비를 받겠느냐'라고 생각했었다. 나중에 기사에게 들으니, 굴비 잘 먹겠다고 감사 인사를 하면서 받았다고 한다."
 
검은 돈을 주고받은 한국 사회 고위직은 모두 일종의 '패밀리'처럼 엮여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돈을 받지 않거나 양심에 따라 소신껏 소송을 진행해 삼성에 '찍힌' 검사들 일부는 불합리한 인사조치를 받으며 검찰을 떠나야 했다.
 
김 변호사는 주류사회에 접근하기 위해 한국인들이 집착하는 인맥 우선주의, 접대 문화 등을 꼬집는다. 그는 이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대신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로 주목한다. 그리고 해결의 실마리 역시 재벌의 투명성 제고로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내 생각은 다르다. 정의가 패배했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정의가 이긴다"는 말이 늘 성립하는 게 아니라고 해서, 정의가 패배하도록 방치하는 게 옳은 일이 될 수는 없다. 나는 삼성 재판을 본 아이들이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는 생각을 하게 될까봐 두렵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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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만 제 구실을 하면, 큰 문제는 없다" (프레시안, 성현석 기자, 2010-01-29 오후 6:51:07)
[인터뷰] <삼성을 생각한다> 출간한 김용철 변호사
 
온갖 흑색선전으로 인해 김 변호사가 입은 상처는 여전히 커보였다. 이번 책에서 충분한 해명과 반박을 담으려 했지만, 어떤 독자들이 보기에는 부족해보일 수 있다. 이런 지적에 대해 김 변호사는 "개인적인 면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 갖지 말아 달라"는 말을 거듭했다. "달을 가리키는데, 왜 손가락만 보느냐"는 말도 자주 했다. 서점 배포를 앞두고, 인쇄가 진행되는 내내 김 변호사가 걱정한 것도 이 대목이었다. "이번 책으로 흑색선전에 대한 해명은 할 만큼 했다. 그러니 이제는 제발 문제의 본질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게다. 그가 말하고 싶어 하는 '문제의 본질'은 뭘까.
 
바로 '부패'다. 온갖 인맥으로 끈끈하게 얽혀 있는 탓에 다들 그 심각성에 대해 둔감해져 있는 부패구조다. 그의 말은 이렇다. "부패에 너무 둔감해져 있는 세태가 안타까웠다. 책을 낸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렇다. 삼성에서 내가 겪은 일들은 이런 부패 구조의 아주 작은 단면에 불과하다. 내가 공개한 내용이 부패 구조의 전체라는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다. 다만 이번 책 출간이 전체 부패 구조에 대한 각성의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건희 전 회장은 세금을 탈루했을 뿐 아니라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보수 세력이 먼저 이 전 회장을 비판하고 나서야 마땅한데 현실은 달랐다. "나도 어쩌면 보수 세력일 수 있다. 사회에서 누린 게 많으니 말이다. 내가 이야기 한 것도 주로 보수적인 가치였다. 법을 지키자는 이야기니까 말이다. 그런데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이 나를 비난하고 나섰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우리 사회에 제대로 된 보수 세력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단지 부패 세력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조금 덜 부패한 세력이 이들과 맞서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부패 세력은 상대적으로 덜 부패한 세력에게 종종 '좌익, 빨갱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운다. 우스운 일이다. 둘 사이의 차이는 그저 부패한 정도 밖에 없는데 말이다. 그러다가 만약 통일이 되면, 부패 세력이 어떤 빌미로 덜 부패한 세력을 공격할지 궁금하다."
 
오랫동안 검사로 지냈던 그는 모든 일이 법과 제도를 통해 풀려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가 직접 겪은 일들이 법과 제도에 따른 공적 절차를 거치는 동안 깡그리 무시됐다. 그의 심경을 들었다. "검찰만 제 구실을 하면, 큰 문제는 없다. 법을 어긴 자들에게 적절한 처벌이 이뤄지는 것은 법과 제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이다. 그러나 한국 검찰은 그렇지 않다. '살아있는 권력', 또는 재벌처럼 '죽지 않을 권력'에 대해서는 그저 눈치만 볼 뿐이다.
 
이대로 가면, 법에 따른 공적 수사 절차를 아무도 믿지 않는 상태가 될 수 있다. 한마디로 후진국이 된다는 이야기다. 한국 검찰이 '거악'과 싸우기는커녕 '거악'과 결탁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거악'에 맞서려는 이들은, 결과적으로 검찰과 싸우게 된다. 검찰과 '거악'이 한 몸이 된 상태니 말이다. 이게 정상일까. 그렇지 않다. 정의를 좇는 이들이 국가기구를 적으로 돌리는 상황은 혁명 시기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일이 법과 제도에 따라 풀려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고, 이런 상황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책이 나오는 이 시점까지도 마음이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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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상가 갈 때 ‘이건희 전용기’ 내줘 (한겨레, 김남일 기자, 2010-02-01 오전 08:41:08)
김용철 변호사 책에 드러난 ’관리의 삼성’
삼성사건 재판장은 2002년 관리 대상
검사 처남 주식손실 보전해 준 적도
이 전 회장 “공짜제품 뿌려 경쟁사 망하게” 

 
2007년 10월 이른바 ‘삼성 비자금 의혹’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가 지난 29일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를 냈다. 이 책에는 ‘관리의 삼성’이 그동안 법원·검찰·국세청 등 권력기관을 상대로 어떤 형태의 로비를 펼쳤는지와 경영권을 세습하는 과정에서 증거 조작도 마다하지 않는 행태가 반도체 회로도처럼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김 변호사는 다시 들어도 충격적인 법조계 관리 실태를 털어놓고 있다. 그동안 언급되지 않았던 인사들의 실명을 그대로 써 논란도 예상된다. 한 예로, 참여정부 때인 2007년 김 변호사의 폭로 뒤 청와대 쪽에서 국세청장 후보 3명의 ‘검증’을 그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결론은 “모두 삼성의 관리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법관도 예외가 아니었다. “판사의 고교 동창인 계열사 부사장이 관리를 맡았다. 2002년에는 나와 부사장, 판사 셋이서 함께 골프를 치기도 했다”고 김 변호사는 밝혔다. 이 판사는 6년 뒤 터진 삼성사건에서 재판장을 맡았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매각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검의 수사 진도가 나가지 않던 당시, 지검장 집엔 삼성 관계자가 드나들며 선물을 갖다줬다는 내용도 실렸다. 삼성 관련 사건을 맡은 부장검사의 처남이 삼성증권에 투자했다가 본 손해를 삼성이 보전해줬다는 주장도 있다. 또 한 대법관에게는 150만원짜리 굴비세트를 보낸 일도 있다고 한다. 보내면서 ‘설마 받기야 하겠나’라고 생각했지만, 굴비는 반송돼 오지 않았다고 한다.
 
책은 이 전 회장의 제왕적 모습도 자세히 소개한다. 이 전 회장은 삼성 제품의 판매량이 경쟁사에 뒤처지자 ‘모든 가정에 삼성 에어컨과 냉장고를 공짜로 나눠줘서 경쟁사를 망하게 하라’는, 선뜻 믿기지 않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고 김 변호사는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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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김용철 변호사 신간' 온라인 기사 삭제 (프레시안, 김봉규 기자, 2010-02-02 오후 3:15:37)
네이버 등 포털 검색도 안돼…<경향닷컴> "본사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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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철 변호사 “삼성,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조직” -이건희 전 회장, 복귀 하나 안하나 영향력은 똑같아 (노컷뉴스, 2010-02-02 07:46, 진 행 : 양병삼 PD)
-삼성 비자금 공익에 쓰겠다? 말장난에 불과
■ 출 연 : <삼성을 생각한다>의 저자 김용철 변호사

 
▶양병삼 PD> 법조계 인맥 뿐만 아니라 언론계 인맥 관리, 이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 또 국세청도 마찬가지구요. 이런 데는 어떻습니까? 
▷김용철 변호사> 언론은 뭐 잘 아시잖아요. 광고량, 단가에 비례하지 않은 광고비 협찬, 이런 형식으로 해서 사실상 조직적인 관리를 하고 있고 그 다음에 뭐 구성원들 여러 보직을 담당하는 부장이니 차장이니 기자 여러분들한테는 사실 크지 않은 비용이죠. 그런데 단지 그런 부스러기 그걸로 관리가 되고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요. 건드리기 힘든 조직으로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고 그렇게 인식되지 않았습니까, 이제. 최근에 전해들은 이야기인데 삼성 같은 경우에는 홍보실을 폐쇄해야 하는 게 아니냐, 할 일이 없어졌다, 뭐 이런 우스운 얘기까지 돌던데요.
 
▶양병삼 PD> 삼성의 인맥관리 그 산물이기도 할 텐데요. 그러다 보니까 삼성의 로비력이라고 하는 부분 또한 막강하다고 알고 있는데.
▷김용철 변호사>특검같은 경우는 수사결과 조직적인 로비는 없었다, 이런 결론을 내렸는데, 제가 조직적인 관리를 일부 관여했던 사람이니까요, 나름대로 기준이 있지요. 그러니까 퇴직공무원에 대해서도 제가 책에서도 일부 썼는데 퇴직한 고위직공무원에 대해서도 공직에 다시 기용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포섭해두지요. 돈이죠. 결국은. 돈으로.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공정위 독점국장으로 뇌물로 구속되고 실형을 살았던 사람 이런 사람은 삼성전자의 감사로 채용을 하지요. 뇌물문제로 뇌물수수로 파면된 사람, 국세청 공무원, 삼성에서 세무대리인으로 사실상 쓰지요. 그런 것들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주는 싸인이기도 하지요. 부패, 독직으로 문제가 되더라도 우리가 보은을 하고 보호를 한다, 이런 싸인이지요. 또 대법관 중에 삼성카드 세금관련해서 삼성 쪽에 유리한 판결을 한 대법관 영원히 삼성에서 보은, 은혜를 갚지요. 그런 싸인을 보내기도 하고. 퇴직자에 대해서도 그럴진데 현직자들에 대해서도 여러단계로 검증을 해서 명문고, 명문대 출신으로 해서 성장가능이 있는 사람들 중심으로 해서 지속적으로 관리를 해 두지요.
 
▶양병삼 PD>현재 삼성하면 세계 초일류기업을 지향한다, 또 글로벌기업이다, 이런 얘기들 많이 하는데. 이런 브랜드 네임에 걸맞게 뭔가 바뀌어야 한다, 그런다라고 한다면 여러 가지 문제, 여러 가지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겠지만 어디에서부터 바뀌어야 된다고 보시나요?
▷김용철 변호사> 삼성에 바란다, 또는 뭐 어디 검찰에 바란다 이런 이야기가 참 어려운 것이 바뀔 수 없거든요. 예를 든다면 이씨일가나 가신 그룹이라고 할 수 있나요, 못 바꿔요. 탐욕으로 눈이 어두워져있는데 어떻게 바꿉니까? 저는 참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그 정도의 자본 그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왜 그렇게 비난받을 일, 부도덕한 일을 계속 저지르냐 이거지요. 존경받아도, 명예롭게 해도 될만한데, 그건 탐욕이거든요. 제가 딴 나라사람라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일을 하면서 이제 깊이 생각을 안 해보면 그렇게 될 수. 그래서 저는 삼성에 바란다, 이 소리 하고 싶지 않거든요. 안 변할 거니까요. 변할 가능성 없어요. 저는 그래서 경영쇄신안 나오면 아니 뭘 쇄신한다는 겁니까? 쇄신의 주체가 아니라 쇄신의 객체인데. 그 다음에 삼성이 예를 들자면 중앙일보 계열분리라고 대국민 선언을 몇 번을 했잖습니까. 실제로 그게 안 됐잖아요. 하다못해 비자금 얘기 나올 때도 뭐 유익한 곳에 쓰겠다, 사실 말장난인데 저는 뭐. 예를 들자면 우리 언론이 이건희 이 양반이 딸 손을 잡고 다녔다, 그거를 손잡은 모습을 찍어서 보도를 하고 그러던데 아버지가 딸 손잡은 게 뭐 그리 대단한 보도거리인가요? 그게. 그렇게 보도를 해주고 좋은 얘기를 해주고 경영복귀 이야기 하던데, 경영복귀...
 
▶양병삼 PD>복귀 하나 안하나 마찬가지다.
▷김용철 변호사> 마찬가지죠. 이 양반이 경영을 하는 게 아니고 책임을 지는 일이 없이 권한, 권력만 누릴 뿐인데. 지금도 인사문제랄지 사장단 인사 일괄적으로 인사되어 나오는 보도를 보면 누가 인사하는지 알 수 있잖아요. 일사분란하게 이 회사에서 저 회사로 발령을 누가 냅니까? 실질적인 권력을 그대로 행사하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별 의미가 없다는 거지요. 이게 삼성에 바랄 게 아니고 사실은 금융감독 기관이라든지 수사기관이든지 언론이라든지 사회 각 기능의 소속된 사람들이 제 역할하면 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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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삼성 내부 문서는 정부 보고문서와 거의 같았을까 (오마이뉴스, 10.02.01 20:34  구영식 (ysku))
김용철 변호사, <삼성을 생각한다> 펴내다
 
삼성의 지휘통제소(control tower)로 불리던 '구조조정본부'(구조본)의 공식문서에는 '이건희'라는 표현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대문자 'A'가 쓰였다. 이건희 전 회장 부인인 홍라희씨는 'A''로 표현된다. 이 전 회장의 자녀들도 'JY'(이재용), 'BJ'(이부진), 'BH'(이서현) 등으로 적었다. 이렇게 이름을 독특하게 적은 이유는 삼성 안에서는 이름을 직접 쓰는 것이 "불경스러운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김용철 변호사는 "봉건제 시절, 중국에서는 공문서에 황제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함부로 쓸 수 없었다고 한다"며 "그런데 이런 관행이 21세기 민주사회에서 버젓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삼성은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이나 먼 기업이었다. 이 전 회장의 이익 앞에서는 삼성의 이익도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삼성을 움직여온 비서실이나 구조본 등은 '참모집단'이 아니라 그의 '사조직'이나 다름없었다. "삼성 사장단 회의에 참석한 사장들은 회의 시작 몇 시간 전부터 물을 마시지 않는다. 소변이 마려울까봐서다. 이건희가 화장실에 가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도 화장실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사장단 회의에서 삼성 비리에 관한 검찰수사가 안건으로 올라오면 사장들이 일제히 충성맹세를 한다. 자신들이 회장을 대신해서 감옥에 가겠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도 삼성에 입사해 3개월간의 입문교육을 받았을 당시 1주일 내내 이건희 전 회장의 육성어록을 청취했다. "구조본 팀장회의에서 결정을 내릴 때 적용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였다. 이건희의 이익이 그것이다. 삼성의 이익과 이건희의 이익이 충돌할 때면, 늘 이건희의 이익이 우선이었다. 구조본 팀장들이 기업경영자가 아니라 이건희의 가신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그래서다."
 
김 변호사는 "이학수와 김인주가 삼성의 실세인 이유는 그들이 이건희로 통하는 '언로'를 장악했기 때문"이라며 "이건희를 수시로 만나 삼성 안팎의 문제를 상의하는 사람은 이학수와 김인주 뿐이었다"고 말했다. 삼성에서 19년간 근무한 김병윤 두레스경영연구소 대표도 "실제 삼성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이건희 회장이 아니라 이학수 사단"이라며 ""이학수 사단에는 인사와 관리·재무를 맡고 있는 인맥들이 포진돼 있어서 누구도 꼼짝할 수 없다"고 증언한 바 있다.
 
"삼성이 공무원 로비 전용으로 쓰는 안양 베네스트 골프장에서 나와 골프를 쳤던 어느 검사는 나를 가리켜 '전관(轉官)했다'는 표현을 썼다. 법원에서 검찰, 혹은 검찰에서 법원으로 옮길 때 썼던 표현이 '전관'이다. 공직사회 안에서 소속만 바뀔 때 쓰는 표현이다. (중략) 그런데 삼성 법무팀을 공직으로 여긴다면, 법원이나 검찰 혹은 다른 정부기관에서 일하던 공무원이 삼성 등 재벌로 옮기는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닌 셈이다. 공무원이 삼성을 위해서 일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어차피 공직수행이긴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실제 삼성은 자신들이 국가를 움직이고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김 변호사의 증언이다. "그들은 삼성 회장 비서실이 대통령 비서실을 능가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청와대 비서실이 삼성 비서실을 흉내내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삼성 내부 문서양식은 정부의 보고문서와 거의 같았다. 내가 공무원을 하다가 삼성에 가서도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삼성과 노무현 정부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 구조본 팀장회의에 '노무현 정부의 명칭'건이 올라왔고, 당시 회의에서 '참여정부'로 의견을 모았는데, 그것이 실제로 노무현 정부의 공식명칭이 됐다. 김 변호사는 "노무현 정부 정책 가운데 삼성에 불리한 것은 거의 없었고 대신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제안한 정책을 노무현 정부가 채택한 사례는 아주 흔했다"며 "노 전 대통령은 임기를 마칠 때까지 삼성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이쯤 되면 한국사회도 김동춘 교수의 지적처럼 '미국형 기업사회' 즉 "대기업이 정치권, 언론, 정부, 학계를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는" 사회로 진입하고 있음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김 변호사는 삼성의 또다른 실체를 "반도체 기술자 위에 있는 비자금 기술자"라는 비유로 꼬집었다. 삼성이 반도체와 휴대폰 등 제조업 분야의 성과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열매는 이 전 회장의 사조직인 '구조본의 임원'이 차지한다는 것.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구조다. 희생을 치르고 조직에 기여한 사람과 성과를 챙기는 사람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삼성 구조본에서 일해본 사람은 그 이유를 안다. 삼성에서 가장 높은 대우를 받는 사람은 뛰어난 기술을 개발해서 회사의 위상을 높인 사람이 아니다. 이건희, 이재용의 사적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대개 회사가 저지른 비리의 공범들이다. 삼성에서는 비리 공범이 돼서 수뇌부와 비밀을 나누는 사이가 돼야 높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 '반도체 기술자'보다 '비자금 기술자'가 위에 있는 구조인 셈이다."
 
김 변호사는 "삼성의 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반도체 기술자' '휴대폰 기술자'보다 이건희 일가를 위해 비리를 저지른 '비자금 기술자', 공무원을 타락시키는 '로비 기술자'들이 더 높은 대우를 받았다는 이야기"라고 지적했다. 삼성의 대표기업인 삼성전자의 성장에 큰 공을 세운 윤종용 전 부회장이나 반도체 신성장이론인 '황의 법칙'을 만들며 반도체 신화를 일구어낸 황창규 전 사장이 각각 상임고문과 상담역으로 물러난 것은 이러한 지적을 잘 뒷받침한다. 특히 최근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로 자살한 이아무개 삼성전자 부사장도 반도체 메모리 분야 최고 엔지니어였다는 점은 삼성의 조직문화와 관련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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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삼성 폭로는 야사로 남을 것이다" (오마이뉴스, 10.02.03 17:07  김종철 (jcstar21))
[인터뷰] <삼성을 생각한다> 들고 세상밖으로 나온 김용철 변호사
 
- 2009년 말에 이건희 전 회장이 사면복권되면서, 마치 삼성문제가 모두 끝난 것 같은 분위기가 있는데요.
"(고개를 흔들며) 정말 코미디야. 단군이래 이렇게 큰 규모의 탈세사건이 있었나? 유죄판결을 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 자신의 딸들 손잡고 유유히 웃는 모습이 대부분의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고 말야."
"자신들의 사적 이득을 위해 거대한 비자금을 조성하고, 이것으로 국가와 사회를 부패시키고, 검찰이나 법원 등의 공적기능을 마비시키면서 그들만의 문화와 기득권을 유지해나가도록 놔둬야 하는지 말야. 이건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지. 부패와 반부패인데도,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는 순간 빨갱이가 돼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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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김용철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 광고 대신하다 (미디어스, 2010년 02월 04일 (목) 10:01:52 도형래 기자)
삼성도 막을 수 없는 트위터 RT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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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왜 '아이폰'을 만들지 못할까?" (프레시안, 성현석 기자, 2010-02-03 오후 12:02:03)
[삼성 직원에게 김용철 책을 권하는 이유·①] 꼭두각시 사장들
 
기사 속 직원은 "(삼성은) 뒤늦게 A플랫폼을 기반으로 하는 제품 개발에 뛰어들었다. 왜 우리는 꼭 성공모델이 있어야 도전하는 것인지, 과연 우리가 진정한 1등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성공모델이 없으면 도전하지 않는, 보수적 기업문화가 삼성의 덫이라는 지적이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보면, 이런 문화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다. 이 책에 묘사된 삼성 계열사 경영진은 구조본(옛 비서실)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삼성 사장들은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날 직원들에게 오후 휴가를 주는 일조차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투자와 인사에 관한 결정은 말할 것도 없다. 아주 시시콜콜한 결정까지 구조본의 지시에 따라 이뤄졌다. 구조본에 유능한 인재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계열사와 동떨어진 곳에 있는 구조본 임원이 계열사를 제대로 이끌기란 쉽지 않다. 외국에서 성공한 사례를 찾아서 그대로 적용하는 경영 방식은 이런 상황과도 관계가 있다. 구조본이 모든 결정을 도맡는, 원격경영 구조에서는 권위 있는 매뉴얼을 구해서 계열사가 따르도록 하는 게 가장 편한 선택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런 방식이 부분적으로는 성공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더 이상 따라할 대상이 없어진 지금, 삼성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느냐는 말이다. 이 질문에 답을 찾는 게 삼성 경영진의 역할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전문경영인에게 중요한 결정을 맡기려 해도, 훈련된 경영인이 없다는 것. 유능한 경영인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면서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경영인의 소양을 닦을 수 있다. 모든 결정이 구조본에서 이뤄지고, 구조본은 오로지 총수의 눈치만을 살피는 삼성 식 경영구조에서는 계열사 경영진이 독자적으로 판단하면서 경험을 쌓을 기회가 없다. 삼성 그룹이 오랜 역사와 방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스타급 전문경영인은 많이 배출하지 못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김 변호사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런 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재무팀이 작성한 보고서 끝에 의견란이 있는데, 모든 임원에 대한 평가를 반드시 쓰도록 돼 있다. '임원 누구누구는 즉시 조치함이 상당하다, 사장은 연말에 재평가함이 상당하다'라는 식으로 쓴다. 여기서 조치나 재평가란 해고를 뜻한다. 구조본 재무팀은 그룹 계열사 사장이나 임원에 대해 목을 쥐고 있는 자리인 것이다.
 
예컨대 그룹 내 어느 화학 계열사 사장이 명절에도 출근해서 안전점검을 할 정도로 열심히 일한다고 하자. 그런데 재무팀이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다고 하자. 이런 경우, 재무팀에서 ''계장급 사장'이며, 리더십이 부족하다'라고 적어 보고하면 그만이다. 꼼꼼하게 실무를 챙긴다는 점을 거꾸로 비난의 근거로 삼는 것이다. 반대로, 사장이 굵직한 일만 챙기고 실무는 아랫사람에게 위임한다면? 역시 트집 잡을 방법은 많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자의적인 평가가 이루어져온 셈이다.
 
내가 재무팀에서 일하던 시절, 궁금한 게 있어서 소환하면 누구든지 바로 왔다. 이렇게 불려온 사람들은 사장에 대한 고자질을 밥 먹듯 했다 '어차피 사장은 회장이 파견한 사람일 뿐'이라고 여기므로 사장에 대한 충성심이 있을 리 없다. 충성을 바칠 대상은 오직 회장뿐인 것이다."
  
김 변호사 재직 시절, 구조본 재무팀은 비자금 조성, 불법 로비 등 비리를 주도했을 뿐 아니라 삼성 그룹 내 최고 실세 집단으로 군림했다. 재무 관련 부서가 전권을 휘두르는 구조는 지금도 여전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구조에선 당장의 수익성과 거리가 먼 지표를 개선하는 일에는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혁신을 주도하는 기술 리더십이 망가진다는 뜻이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삼성이 최근 수년 간 거둔 성공은 기술 리더십(technology leadership)에 기반한 게 아니라 신속한 대응(speed and agility) 덕분이었다"며 "그러나 결국에는 진정한 혁신의 부족이 수익성을 해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대해 삼성 측은 "통상 삼성전자의 연구개발비는 매출의 10% 수준이다. 이 정도면 결코 적은 게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런 반박에서도 '혁신'을 '연구개발비 지출'이라는 재무 지표로만 이해하는 태도는 반복된다. 충분한 연구개발비 투자는 혁신을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다.
 
<미디어 삼성>에 실린 "1등 기업의 함정"이라는 기사에 소개된 한 개발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우리는 뭔가 창조적 제품을 만들 필요가 없었고, 만들어서도 안됐다. 과거 다른 기업들의 성공 사례들을 좇는데 익숙하다보니 후발주자로서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기사에 소개된 다른 연구원은 "개발하다 보면 가끔 정말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런 아이디어를 내면 '뜬구름 잡지 말고 다른 걸 생각해 봐! 바로 시장에 낼 수 있는 걸로…'라는 반응이 나온다"라고 말했다.
 
신용인 박사는 "윗사람 지시 없으면 머리 안 쓰는 문화"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지나치게 엄격한 관리와 통제 문화가 창의적인 혁신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이다. 최인철 삼성전자 차장은 제도의 문제도 함께 지적한다. 직원의 창의성이 낳은 결과물에 대한 적절한 보상체계가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는 천지인 자판 발명으로 회사에 천문학적 수익을 안겨줬지만, 삼성 측은 그에게 고작 10만 원 조금 넘는 상여금을 줬을 뿐이다. 불법 로비, 비자금 조성 등에 가담한 이들이 누리는 혜택에 비하면 너무 보잘 것 없는 금액이다.
 
최 차장은 "과거의 삼성전자는 지금보다는 혁신을 장려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재무부서가 전권을 쥐면서, 모든 게 변했다. 철저하게 재무적인 지표로만 평가하는 문화가 일반화됐다. 이런 문화 속에서는 숫자로 표현될 수 없는 자산은 설 자리를 잃는다. 기술과 서비스의 혁신이 가진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게 된다. 혁신의 기풍은 사라지고, 위에서 할당한 재무적인 목표에 맞춰 쥐어짜는 일만 남는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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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부사장 자살이 남긴 숙제 (프레시안, 성현석 기자, 2010-02-04 오후 12:05:06)
[삼성 직원에게 김용철 책 권하는 이유·②] '관리'의 한계
 
'보통 체형에 유행을 타지 않는 정장 차림 남성'을 떠올리게하는 기업 문화. 이런 보수적인 문화는 삼성 자동차, e-삼성 등 그룹 차원의 치명적인 경영 실패에도 삼성이 견뎌낼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그러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우선, 너무 엄격한 관리 문화 속에서는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는 창조적 혁신이 어렵다는 점이 있다. 특히 총수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한 비서실,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치를 무시하기 쉬운 재무부서가 주도하는 관리 문화 속에서는 더욱 어렵다.
 
다른 문제점은 임직원이 느끼는 피로와 스트레스다. 너무 심하게 옥죄는 문화를 오랫동안 견뎌내는 것은 무리라는 이야기다. 최근 자살한 삼성전자 부사장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평균적인 '삼성맨'들이 느끼는 피로감은 이미 위험 수위다. 고려대 경영학과 장세진 교수 역시 '조직 피로감'을 삼성의 대표적인 문제점으로 꼽았다. 혹독한 취업난 속에서 삼성에 입사한 젊은이들이 금세 사표를 내는 경우도, 대부분 극심한 피로감이 원인이다.
 
삼성 임원들은 정기적으로 정밀 건강진단을 받는다. 직원들의 심각한 피로감에 대해서도 경영진이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임직원 건강 '관리' 차원에서 접근하는 삼성 식 해법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무노조 경영'이 문제다. 삼성에는 노조가 없는 탓에 관리부서의 임직원 쥐어짜기를 견제할 세력이 없다. 그리고 관리부서는 비서실(구조본, 전략기획실 등)이 지휘하는데, 비서실은 합리적인 경영판단보다 총수의 뜻을 앞세우곤 했다. 직원 입장에서는 굳이 할 필요가 없는데, 총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억지로 하는 일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이 대목에서는 더 큰 문제가 있다. 사무직, 연구개발직 등 이른바 '화이트칼라' 노동자와 달리, 생산직 노동자가 겪는 문제다. 이들이 겪는 것은 그저 피로감, 스트레스 정도가 아니다. '생존'이 위협받는 환경이다. 반도체 부문은 아니지만, 삼성 공장의 열악한 환경에 대해서는 김용철 변호사가 자세히 이야기했다.
 
"OJT를 받으면서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삼성전자 수원공장의 가전부문 조립라인을 꼽고 싶다. 여성 생산직, 남성 생산직이 컨베이어 벨트에 예속돼 두 시간에 10분씩 휴식하면서 꼼짝 없이 일하는 모습을 봤는데 혹시 배탈이 나더라도 화장실에 갈 수 없는 정도였다. 또 복도는 전등이 희미하여 앞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웠다. 화장실에는 손 닦는 수건이 없어서 자기가 갖고 있는 손수건으로 닦도록 돼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깨끗한 공장 풍경과 너무 거리가 멀었다. 일류 기업이라는 삼성 직원들이 이런 환경에서 일하는구나 싶었다. 북한에서 외부인이 구경하는 평양 거리는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지만, 실제로 주민들이 생활하는 곳의 환경은 엉망이라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외부에는 '지상천국'이라고 홍보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북한과 무엇이 다른가 싶기도 했다. 직원들이 기계 부품처럼 묶여 일하는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파서 오랫동안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같은 직장에서 본사 직원이나 관리직은 쾌적한 공간에서 대접도 받고 권세도 부리는데, 생산 현장에서는 해마다 생산성 향상 30% 구호 아래 경비를 줄이기 위하여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 내핍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렇게 고생해서 만든 텔레비전이 미국으로 적자 수출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3000억 원 대금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
 
지나치게 엄격한 관리 문화는 직원 경력 개발에서도 문제를 낳는다. 관리부서의 힘이 지나치게 세다보니, 전문성을 쌓는 쪽으로 경력 개발을 하는 임직원이 손해 보는 느낌을 갖는다는 것이다. 상당수 삼성 직원들이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삼성이 '세일즈 머신'에서 벗어나 '기술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다른 형태의 경력 개발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최근 자살한 삼성 부사장을 놓고서도 비슷한 설명이 있다. 연구개발 업무의 정점에 있던 삼성 부사장의 자살은, 삼성 조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연구조직 구성원들이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갖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삼성에서 관리조직이 지나치게 큰 힘을 갖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는 게다. 바로 '비리'다. "구조본에 있는 비자금 담당자는 계열사에 일정 금액씩 비자금을 할당했다. 경영이 어려운 회사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과거 삼성엔지니어링은 부실 규모가 1조 원에 달하고 수주 실적도 없어서 심한 적자에 시달렸다. 당시 이 회사 관리담당(경영지원실장)이었던 김능수가 '회사가 너무 어렵다'며 내놓을 돈이 없다고 버텼지만, 구조본은 그에게 위협하다시피해서 매년 50억 원을 받아냈다.
 
구조본 재무팀 관재부서에 있는 30대 초, 중반 과장들은 프랑스제 델시 청회색 초대형 여행용 가방에 들어 있는 현금을 수시로 본관 지하주차장에서 27층 비밀금고로 날랐다. 물론, 다른 직원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서 운반하지만 구조본 직원들은 대개 운반 장면을 보게 된다. 대부분 애써 눈을 돌리고, 못 본 척한다. 현금이 너무 많아서 운반하기 힘들 때는, 화물운반용 트롤리(trolley)를 사용하기도 했다. 비자금을 운반하는 관재파트 과장들은 주로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이었는데, 미래의 사장감으로 분류됐다."
 
이처럼 노골적으로 비자금을 만드는 구조에서 임직원 관리를 느슨하게 했다간 도저히 뒷감당을 할 수 없다. "로비 기술자, 비자금 기술자가 반도체 기술자보다 위에 있는 구조" 역시 필연적이다. 온갖 불법 행위를 저지르면서 '무노조 경영'을 고집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정상적인 노동조합이라면, 자신들에게 돌아오거나 회사에 재투자돼야 할 부(富)가 엉뚱한 곳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용납할 리 없다. 비자금이 사라지고 투명한 경영구조가 갖춰지지 않는 한, 감시와 통제 위주의 삼성 문화는 바뀔 수 없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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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식 '공포 경영', 언제까지 통할까" (프레시안, 성현석 기자, 2010-02-05 오후 4:28:49)
[삼성 직원들이 김용철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③] 기업 보안의 그늘
 
"삼성에서 도청에 얽힌 일화는 많다. 삼성이 관계사에 도청기를 설치하고, 그 회사가 그걸 잡아내는지를 검사한 적이 있다. 관계사의 보안 능력을 파악하는 절차다. 이런 일을 하다가 국가정보원으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국정원에서 운용하는 도청기에 자꾸 이상 전파가 잡힌다는 것이다. 국정원과 삼성이 경쟁적으로 도청하는 것이었다. 일상적으로 도청을 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도청을 막는 기술도 발달했다. 구조본에서 근무할 당시, 내 방 유리창에는 난반사 필름이 부착돼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레이저 광선으로 유리창 진동을 감지하는 도청 기술이 있다. 이걸 막기 위해 부착된 필름이다.
 
구조본 사무실이 있는 삼성 본관 26, 27층부터 회장 집무실이 있는 28층까지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녹음돼 기록으로 남겨졌다. 천장에는 카메라가 설치돼 있고, 에스원 당직자가 그걸로 늘 감시했다. (…중략…)
 
한 고위 임원이 회사 본관 1층 안내 데스크에 있는 여직원을 좋아한 적이 있다. 그가 여직원에게 보낸 메일에는 낯 뜨거운 내용이 잔뜩 담겨 있었다. 그 임원이 보낸 메일 가운데 문제가 있는 부분을 출력하니까, 100장이 넘었다. 노인식이 그걸 들고 와서 내게 보여줬다. 찬찬히 읽어보니, 그 여직원에게 보낸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당시 유행하던 아이러브스쿨 홈페이지를 통해 만난 초등학교 동창 유부녀와 주고받은 연애편지도 있었다. 실제로 그 임원은 일을 시키려고 보면, 자리에 없는 경우가 많았다. 안내 데스크에 있는 여직원은 다른 곳으로 발령 냈다. 그리고 그 임원은 계속 진급에서 누락시켰다. 그는 자신이 왜 진급을 못하는지를 모르는 듯했다. 결국 그는 회사를 떠났다."
 
여기서 더 감시와 통제가 강화된다면, 임직원들의 내면에는 어떤 감정이 자리잡을까. 바로 '공포'다. 언제든 도청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어디서 누가 감시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 이런 감정은 상당수 임직원들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삼성과 소니> 저자인 고려대 경영학과 장세진 교수는 "비서실의 역할이 너무 커지면서 삼성 구성원들이 비서실에 의해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로 인해 조직의 피로감이 높아지고 '공포 경영(fear-based management)'이라는 기업문화까지 생기고 있다"고 적었다.
 
지난해 말 이건희 전 회장 사면 이후, 삼성에 불리한 언론 보도가 뚜렷한 까닭 없이 삭제되는 일이 흔해졌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을 소개한 <경향신문> 기사가 온라인 판에서 삭제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이 SK텔레콤 측에 아이폰 도입을 유보해달라고 요청했다는 <한국일보> 기사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다. 집행유예 중인 이학수 전 삼성 부회장이 이건희 전 회장의 미국 방문을 수행했다는 <서울경제신문> 기사 역시 삭제됐다. 심지어 광고를 거절하기도 했다. 김 변호사의 책을 낸 사회평론이 주요 일간지에 광고를 내려 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총수 일가가 아닌 이상, 평생 '삼성 가족'으로 남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언젠가는 회사를 떠나야 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삼성과 어쩔 수 없이 부딪힐 수도 있다. 그 때도 법 위에 군림하는 삼성의 힘이 자랑스럽기만 할까. 그럴 리는 없다. 삼성 근무 시절 겪었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공포를 피할 수 없다.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뒤, 회사 측과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삼성전자 노동자들처럼 말이다. 그들 역시 한때는 '삼성 가족'임을 자랑스러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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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본의 국가지배 삼성을 보면 알게돼” (한겨레, 이세영 김경호 기자, 2010-02-04 오후 02:44:00)
‘삼성공화국’ 분석 박사논문 낸 이종보 연구원
“힘의 차이 간과한 민주주의, 불평등 지속시킬 뿐”

 
‘삼성공화국’이란 말이 회자되기 시작한 2005년 6월의 일이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로 집권 민주세력의 한계를 자인했다. 왜 세계가 찬탄해 마지않던 한국의 민주화는 한층 진전된 사회경제적 민주화로 이어지지 않고 삼성이라는 대자본의 지배로 귀결했는가. 이종보(37·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씨가 <민주주의 체제하 ‘자본의 국가 지배’에 관한 연구>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통해 규명하려는 것도 이 문제다. 말하자면 이 논문은 ‘삼성공화국’이란 현상을 국가·제도정치권·시민사회라는 민주주의의 제도 영역에서 진행되는 자본권력 대 민주화 세력의 경합과 각축이라는 틀을 통해 파헤치려는 시도다.
 
-왜 삼성에 주목했는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자본의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려면 삼성을 보면 된다. 강압과 매수라는 전근대적 전략에서 담론·이데올로기를 통한 동의 확보라는 선진적 수단에 이르기까지, 지배의 모든 전략이 삼성에게서 드러난다.”
 
-삼성의 지배전략이 제도정치권과 국가기구, 시민사회 영역에서 각기 다른 형태로 구사된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인가?
“선거를 치러야 하는 정치권에 대해서는 여야,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정치자금을 통해 포획하거나 관료와의 대립구도를 활용해 주변화시키는 전략을 취한다. 국가의 행정·사법 관료들 역시 매수·포획의 방식이 사용된다. 주목할 만한 건 대(對)시민사회 전략이다. 가능한 모든 전략이 동원되는데, 삼성 사회봉사단 같은 조직을 통해 시민사회의 비판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건 기본이다. 학계·언론계·시민운동단체 등에서 활동하는 주요 인물들에 대해선 임원 특채나 사외이사 기용, 기금지원, 상찬사업 등을 통해 유인·포획하거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기업 하기 좋은 나라’나 ‘2만달러 시대’ 같은 담론을 유포해 시민사회 내부의 동의를 확보하거나, 노조 세력에 대해선 강압과 파괴공작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엑스파일 사태나 경영권 편법승계에 대한 집요한 문제제기에서 보듯 대시민사회 전략이 전적으로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물론이다. 자본의 지배전략이 일방적으로 관철될 수는 없다. 민주주의 체제는 자본이 민중세력의 저항과 상호작용하면서 내적 긴장을 만들어내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지배블록과 저항블록의 모순은 심화되고 결국 정치·사회적 갈등은 의회의 영역을 넘어 사법기구로 확대된다. 최근의 ‘사법전쟁’이 이를 잘 보여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민주주의를 ‘테이블 민주주의’로 규정했다. 테이블 민주주의가 삼성공화국을 불렀다는 얘기인가?
“테이블 민주주의는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할 세력조차 대화 테이블로 끌어앉혀 개혁의 방향성과 방법론을 논하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한계를 꼬집기 위한 말이다. 이런 민주주의는 테이블상에 엄존하는 쌍방 간 힘의 차이와 불평등을 간과함으로써 결국은 지배와 불평등을 지속시키는 데 일조할 뿐이다. 방법은 하나다. 기존의 형식화된 민주주의의 틀을 넘어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결합을 통해 민주주의의 실질적 진전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래야 삼성공화국의 오명에서 벗어날 희망도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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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스티브 잡스의 성공은 호암의 가르침에서 비롯" (프레시안, 김봉규 기자, 2010-02-03 오후 12:44:09)
이병철 전 삼성 회장 탄생 100년, 재조명 기사 '봇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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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부끄럽지 않은가 (미디어오늘, 2010년 02월 05일 (금) 17:26:50 이재현(문화평론가))
김용철변호사 사건부터 '반올림'까지…비판 겸허하게 수용해야
 
삼성 비자금 문제를 폭로했던 김용철 변호사가 최근 펴낸 책 <삼성을 생각한다>의 일간지 광고가 ‘원천봉쇄’ 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삼성의 기업문화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다. 작년 연말부터 삼성 기업문화의 빛과 그림자를 잘 드러내주는 몇 개의 사건들이 있었다. 하나는 이건희 전회장의 외아들 이재용씨가 삼성전자의 부사장 겸 CCO(최고 운영 책임자)로 승진한 것, 둘째는 이건희 전 회장이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서 특별 사면 받은 것, 셋째는 얼마 전에 삼성전자의 부사장 한 분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것, 넷째는 삼성전자가 글로벌 1등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런데, 삼성의 조직문화는 기업의 상층부만 쥐어짜 온 것은 아니다. 아래도 쥐어짜 왔다. 이건희 전 회장이 특별사면 되던 날 아침에, 이종란 노무사라는 분이 불법 강제 연행된 사건이 있었다. 이종란씨는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삼성의 약점으로 공통적으로 꼽고 있는 것은 창의성과 혁신성 부족이다. 이런 점을 스스로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이건희 회장은 과거에 가족을 빼고는 다 바꿔야 한다고 아주 인상적으로 말한 바가 있다. 이건희 전 회장과 이재용 부사장에게 있어서,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그리고 고 이병철 회장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서 해야 할 일은 삼성에 대한 외부의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혁신과 창의로 가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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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먹이는 이건희" 낯뜨거운 이병철 100주기 보도 (미디어오늘, 2010년 02월 06일 (토) 07:25:51 조현호 기자)
 
5일은 고 이병철 전 삼성 회장 탄생 100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호암아트홀에서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 소식을 담는 데엔 모든 신문이 지면을 크게 할애했다. 중앙일보와 국민일보는 1면에 사진과 함께 기사를 실었고, 한국일보와 서울신문 등은 이건희 삼성 전 회장이 울먹였다는 대목을 기사와 제목(한국)에서 강조했다. 이밖에도 대부분의 신문들은 "정직해야 한다" "싸우지 말자" "삼성이 약해지면 도와줄 것"이라는 이 전 회장의 언급을 일종의 어록처럼 실어줬다. 남 잔칫상에 재는 뿌리지 말자는 뜻에서였을까. 체육대회 유치라는 명분으로 죄를 짓고도 재력과 권력에 기대어 4개월 만에 국민과 대중앞에 거리낌없이 등장한 회장님에 대해 한마디의 언급을 한 신문은 한 곳도 없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탄생을 이렇게까지 기념하는 행사가 우리나라에 얼마나 될까.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5일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 타냉 100주년 기념 행사장에 참석해 경영 복귀 가능성에 대해 "회사가 약해지면 해야죠. 복귀라기 보다 도와줘야죠"라고 말했다. 이 전 회장은 또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 거짓말 없는 세상이 돼야 겠다" "싸우면 절대 안된다" 등의 언급을 하기도 했다. 신문들은 이 같은 이 전 회장의 말을 제각기 해석해 크게 실었다. 사진은 이건희 전 회장과 동생 이명희 신세계 회장이 손을 잡으며 웃는 모습 등이 주로 실렸다.
 
가장 크게 실은 곳은 중앙일보였다. 1면 가운데에 3단크기의 사진과 함께 <이건희 전 회장 "회사 약해지면 도울 것">이라는 제목으로 비중있게 실렸다. 중앙(과 국민일보)은 사진 기사의 크레딧을 자사 기자 이름으로 달았다. 동아일보는 14면 머리기사 <삼성 창업자 고 호암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식.이건희 전회장 "사우면 경제도약 절대 못해">라는 기사를 통해 행사 소식 행사 전반을 소개하며 이 전 회장의 말을 옮겼다.
 
서울신문은 5면 머리기사 <호암 탄생 100주년 기념식 참석…이건희 전삼성회장의 화두/"경영복귀 아직은 빠르다">에서 "이 전 회장이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던졌다"고 보도했다. 이 전 회장이 인사 도중 감정이 복받친 듯 잠시 목이 메 말을 잇지 못했다는 대목도 기사에 넣었다. 한국일보는 아예 11면 머리기사 <'호암 탄생 100주년' 범 삼성가 한자리에…"아직 부족한 점 많다" 울먹인 이건희>에서 기사 문장에서부터 이건희 전 회장이 울멱였다고 보도했다. 세계일보도 11면 머리기사 <삼성 창업주 고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식 "호암 경영철학은 영구한 기업철학">을 통해 행사 소식을 크게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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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소 습격사건 2

 얼마 전부터 10년만에 다시 케이블TV에서 방영되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속편까지 나왔다. 전편이 그냥 신나게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수준이었기에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김숙현 기자의 리뷰를 보내 그건 아닌 모양이다. 물론 꿈보다 해몽이 낫다고 할 만큼 지나치게 지지발언이 과잉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주유소 습격사건>을 주목하는 건 배우들 때문이다. 당시에는 그저그런 이들이었지만, 지금은 상당히 유명한 배우들이 많이 출연했다. 그 만큼 캐스팅이 잘 되었다고 해야 하나. 거기에 출연했던 이들이 지금처럼 뜰 줄 누가 알았겠나.
 
사장 박영규, 노마크의 이성재, 페인트 유지태, 무대포의 유오성, 당시 아침 청소년 드라마에 나왔던 정준 정도는 당시에도 그럭저럭 했지만, 딴따라 강성진, 주유소 알바인 이요원, 철가방 김수로, 양아치 유해진, 김학철, 이종혁, 경찰 역의 이원종. 지금 다시 이런 멤버로 영화를 찍을 수는 없을 거다. 제작비 때문에...
 
한국에서는 드라마의 시즌제 또는 속편을 제작하는 게 어렵다고 한다. 전편이 별 볼 일 없으면 당연히 속편이 나오지 않을 것이고, 전편이 호평을 얻고 인기를 끌면 주연배우를 더이상 캐스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주유소 습격사건2>에서 박영규를 제외하고 모두 배우가 바뀐 것도 그러한 이유일 터이다.
 
내가 10년 전에 봤던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가장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는 장면은 양아치들인 유해진 패거리들이 '작은 사랑'을 부르는 장면이다. 딴따라 강성진의 강요에 의해 노래를 부르긴 했지만, 그 속에서 스스로 몰입되어 버리는 장면.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Shell이라는 그룹인데, 이 노래 외에 알려진 것이 없다. 노래 중의 여성 목소리는 Shell의 멤버인 김민경이라고 하고... 작곡도 Shell이 한 것으로 나오는데, 거기까지는 모르겠고...
 
보고 싶은 영화가 많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도 김숙현 기자와 비슷한 의견을 갖게 될지는 의문이지만... 다들 자기 생각대로 읽는 것이니 아무래도 상관 없겠지.
 
<주유소 습격사건 2>를 지지하는 이유 (프레시안, 김숙현 기자, 2010-02-06 오전 12:56:12)
[뷰포인트] <주유소 습격사건 2>에 대한 뒤늦은 리뷰
   

 

Shell - 작은사랑(주유소 습격사건 OST)

 

힘들고 외로울 땐 너의 그늘이 되어줄께

언제나 어디서나 내 숨결 느낄 수 있어

아무런 꾸밈없는 그런 사랑을 난 원해

사랑은 누구나 필요한 선물이잖아

 

제발 슬픈 눈으로 내게 말하지마

너의 맘까지 읽을 순 없잖아

내가 너의 곁에 있는게 아냐

항상 내 곁에 있는

 

너의 소중함을 몰랐던거야

눈부시게 기쁠땐 너의 하늘이 되어

온 세상 가득히 축복을 함께

너와 노래하고 싶어

내 작은 가슴에도 사랑은 있어

하나가 아닌 수 많은 의미되어

하나 둘 깨져버린 내 마음의 조각들을

니 맘속에 사랑으로 채우고 싶어

 

힘들고 외로울 땐 너의 그늘이 되어줄께

언제나 어디서나 내 숨결 느낄 수 있어

아무런 꾸밈없는 그런 사랑을 난 원해

사랑은 누구나 필요한 선물이잖아

 

우리 처음 만난 그 날을 기억하니

나를 영원히 사랑해 준다던

너의 그 약속을 잊으면 안돼

나도 너를 사랑해

 

힘들고 외로울 땐 너의 그늘이 되어줄께

언제나 어디서나 내 숨결 느낄 수 있어

아무런 꾸밈없는 그런 사랑을 난 원해

사랑은 누구나 필요한 선물이잖아

 

그대 내게 줄 수 없겠니

내가 준 것 보다

더 큰 사랑을 내게 보여줘

 

힘들고 외로울 땐 너의 그늘이 되어줄께

언제나 어디서나 내 숨결 느낄 수 있어

아무런 꾸밈없는 그런 사랑을 난 원해

사랑은 누구나 필요한 선물이잖아

 

힘들고 외로울 땐 너의 그늘이 되어줄께

언제나 어디서나 내 숨결 느낄 수 있어

아무런 꾸밈없는 그런 사랑을 난 원해

사랑은 누구나 필요한 선물이잖아

 

힘들고 외로울 땐 너의 그늘이 되어줄께

언제나 어디서나 내 숨결 느낄 수 있어

아무런 꾸밈없는 그런 사랑을 난 원해

사랑은 누구나 필요한 선물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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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서비스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이론적 검토(홍주환, 2003)

아래 글을 다시 보니 내용이 또 새롭다. 이와 관련된 글을 읽거나 글을 쓸 때면 왜 이런 글이 막상 머리에서 생각이 안나는지... 항상 관련된 논의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하는데...
 
홍주환. 2003. 이론적 논의: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이론적 검토. 신광영 외. 「공무원노동조합운동: 조직과 사회적 역할」.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생각나는 점 몇 가지 정리.
 
우선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는 지금의 상황에서 어떠한 함의를 가지고 있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남아공 사례보다 동유럽의 노동조합을 다룬 Ost(2002)의 논의가 흥미로울 듯하다. 오스트에 따르면 노동조합이 조합원들의 이해관계에 복무하기보다는 전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개입에 선차성을 두게 됨으로써 노동자들은 점차 노동조합에 무관심하게 되었고,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는 노동자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되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사회적인 문제보다 현장 내의 분할,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분리에 대해 좀더 고민이 요구된다. 비정규직 문제를 전체 사회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타당하겠지만, 이것과도 조금은 괴리가 있다.
 
‘작업장에서의 조합원들의 직접적인 문제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인 문제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운동의 명암을 좌우할 것이라고 한 점에 동의를 하나, 이는 지나치게 어려운 과제다. 
 
신사회운동과 노동조합주의를 연결시킨 대목은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다지 중요한 논의는 아닌 것 같다. 특히 한국의 현실에서는... 한국에서 신사회운동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는지도 의문이고, 지금도 있지는 않다고 본다. 순전히 서구의 논의.
 
노동조합운동이 지역주민의 대중적인 지지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이를 왜 깊게 다루지 않았는지... 사실 공공부문 노조는 전형적으로 각 지역에 조직을 가지고 있고, 지역밀착사업을 하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비단 공무원노조 뿐만 아니라, 전교조, 사회보험, 지방의료원 등이 그러하다. 여기에서 공공성의 계기를 찾아내면 좋았을 텐데...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은 처음부터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를 내포하고 있으며, 공공성의 정치는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운동이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의 합리적 핵심을 체현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주환 선배는 얘기한다. 우리끼리야 이를 수긍하지만, 대체로 이를 이끌어내기는 쉽지 않다. 실증적인 뒷받침이 필요한 지점이다. 이를 보편적인 인식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진전이라 할 것이다. 
 
아래의 지적은 지금까지 한 동안 간과하고 있었다. 공공성, 공공부문, 공공영역을 분석할 때 명심해야 하는 사항이다. 이걸 다시 생각하게 된 것만 해도 이 글을 읽은 의미가 있다고 해도 좋다.
현실적으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변화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경찰, 소방, 교육, 위생, 운동 등은 거의 대부분 사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이었으나 이제는 대부분 공적 기구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 변화는 비교적 최근의 일인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본래적으로 공적인 서비스” 또는 “공중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제공되어야 하는 서비스”라는 의미의 공공서비스 개념이 존재하는 것과 그것이 누구에 의해서 생산 및 공급되어야 하는가가 별개의 문제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Brill, 1989, 24). 
공공부문의 사회적 역할 또는 범위, 그리고 구조 변화는 시장의 실패, 국가의 실패, 시장의 복원/국가의 축소라는 일련의 과정, 즉 서구에서의 복지국가의 형성 및 쇠퇴, 신자유주의적인 정치경제의 전개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20세기 주요 국가들의 정치경제적 구조변화는 한편으로는 국가의 복지극대화 전략과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경쟁의 효율성 추구 전략이라는 두개의 커다란 축 사이의 주도권 싸움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Naschold, 1996). 
 
아직까지는 공화주의적 관점보다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이 현실을 설명,이해하고 비판하는 데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내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 이것은 전공이 행정학이라는 것에 기인하는 바가 클 것이다 - 공화주의적 관점에 친화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공적 영역의 성격 규명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국가를 공적인 활동의 일부로 봐서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 공적 영역을 계급투쟁의 장으로 보고, 여기에 어떻게 개입하고 바꿀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정치적 상황성”(political contingency) 개념에도 주목하자. 공공부문 및 공공서비스 노사관계가 정치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은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논의에서는 이 사실이 은폐된다. 사실 공기업 사유화는 그 무엇보다 정치적인 과정이 아닌가. 이에 대해서는 배병인 박사(2007)가 잘 논의하고 있다.
정치적 상황성 개념은 그것이 공기업의 전략 구성을 민간부문의 기업들에서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불확실하게 만들지만, 결국 그것을 통해서 공기업의 행위 논리가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Batstone, et al., 1984). 그리고 또한 그것은 공공부문 및 공공서비스 노사관계는 정치적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학교에서 얼굴을 볼 수 있는 주환 선배는 이 주제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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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환. 2003. 이론적 논의: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이론적 검토. 신광영 외. 「공무원노동조합운동: 조직과 사회적 역할」.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1. 들어가며
공무원의 노동조합 결성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반(反)노동조합 세력의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도 있었던 정부 또는 공공서비스 부문에서도 노동조합이 결성됨으로서 자주적(민주적) 결사의 원리가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자주적 결사체로서의 공무원 노동조합이 사회적 연대의 원리를 어느 정도 체현하는가에 있다. 사회적 연대를 부정하는 자주적 결사체는 사회의 진보적 발전에 역기능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운동을 이론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공무원 노동조합들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따져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노동조합운동론의 최근 동향
1)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social movement unionism)
90년대 들어서 전지구적 차원의 노동조합운동의 상황에 대한 토론 과정에서 사회적 노동조합주의 또는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에 대한 논의들이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대체적으로 사회운동적 노조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노동조합운동이 그 활동 영역과 대상을 노동조합 및 그 조합원의 틀에 가두지 않고 비조합원 노동계급 전체와 근로인민 대중으로까지 넓히고, 또는 좁은 의미의 경제적 이해관계의 문제들에서 나아가 근본적인 정치적, 사회적 이해관계의 문제들에까지 확대시켜야(outreach)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일국적인 차원의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에서 더 나아가 전지구적인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global social movement unionism)가 주장되기도 하였다(킴 무디, 1999; 피터 워터만, 2000; Robinson, 1993; Seidman, 1994; Nissen, 1999; Lambert, 2000).
* 일반적으로 노동조합운동의 사회운동적 성격을 강조하는 경우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social movement unionism)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나, 노동조합운동이 노동조합의 틀, 즉 조합원의 이해관계와 관련된 문제에만 활동영역을 협소하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틀을 넘어서 전 사회적인 문제를 노동조합운동이 포괄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고자 하는 ‘사회적 노동조합주의’(social unionism)와 개념상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은 그것의 사회적 기반인 공공부문이 사회적으로 특수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구조적으로 사회적 또는 사회운동적인 특징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운동이 공적 조직들(국가 또는 정부 기구들)에 기반하여 전개되고 있다는 특징이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을 공적인 의제들과 밀접하게 관련되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은 공적 이슈 또는 사회 전체의 문제를 자신의 이슈 또는 문제로 삼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노동조합주의 또는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를 본래적으로 그 특징으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Johnston, 1994; Ponak et al. 1995; 신광영, ; 홍주환 외, 2001).
이렇게 볼 때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노동조합운동이 사회적으로(또는 계급적으로 또는 대중적으로) 어떠한 위상을 차지할 것인가 하는 점과 관련되어 있다. 로빈슨(I. Robinson, 1993: 21)은 노동운동의 구성원들, 리더들 또는 그 지지자들의 도덕적인 헌신성이 노동운동의 발전에 중요하다고 보고 그 맥락에서 사회적 노동조합주의를 주장하는데, 그에 따르면 사회적 노동조합주의는 다음의 두가지 측면에서 “사회적”이다. 첫째로 사회적 노동조합주의는 전체 사회의 변화와 노동조합원이 아닌 다수의 이해관계 증진을 추구하기 때문에 스스로 정한 목표와 그에 대한 의무감의 적용 범위에 있어서 사회적인 것이다. 둘째, 현존 사회질서에 대한 도덕적 비판을 가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분파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소수 집단보다는 대부분의 근로 인민의 가치와 경험과 공감할 수 있는 비판을 결집해 내고자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다.
그런데, 노동조합운동이 조직률의 저하와 사회적 영향력의 약화라는 위기적 상황을 돌파하기 위하여 모색한 하나의 지향으로서의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운동의 내용은, 노동조합운동의 역사를 볼 때, 사실 그렇게 새로운 것이라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운동의 사회운동적 성격이 새삼 강조되는 것은 노동조합운동이 주로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한 경제주의적, 실리적 이익추구, 즉 노동조합의 “서비스 모델”에 몰두하면서 점차적으로 그 사회운동적 성격이 탈각되어 가고, 특히 정치, 경제, 사회적 조건이 기존의 노동조합 활동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방향으로 변화함에 따라서 노동조합운동이 전반적으로 위기상황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는 노동(조합)운동 내부 또는 노동자계급 대중 내부의 균열, 이질성, 잠재적 갈등 등이 외부적 상황 - 억압적 권위주의 사회(남아공이나 브라질과 같은 경우. Seidman, 1994 참조) 또는 사회주의적 전체주의적 사회(소련 또는 동구의 구사회주의와 같은 경우, Ost, 2002 참조) 등 - 에 의해서 감추어지거나 또는 억압되어 있는 상황 조건에서 비로소 가능하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그러한 상황 조건이 해소되는 경우 노동조합운동 진영을 하나로 묶어주었던 힘이 약화됨으로써 잠재되어 있던 내부 균열이 파열되어 다양한 세력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주장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면 더 이상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가 유지될 수 없게 된다.
von Holte(2002)는 남아공의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가 그것을 배태하고 있었던 바로 그 구조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즉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가 서 있던 구조적 조건이 침식됨에 따라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고 본다. 남아공의 노동조합은 단순히 노동자들의 계급 조직이 아니라 비계급적인 연대에 기초한 대중운동이기도 했던 것이다. 남아공 노동조합의 이러한 사회정치적 구조는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의 전투성과 생명력의 근거였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러한 사회정치적 조건의 급격한 변화(아파트헤이트에서 민주주의로)가 기존의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의 위기를 낳은 것이다(287-98).

Ost(2002)에 따르면, 동유럽의 노동조합들은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를 기본적인 특징으로 하였다. 이 동유럽판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는 노동조합이 작업장에서 벗어나 ‘사회운동’에 복무하도록 하였다. 결국 노동조합이 조합원들의 이해관계에 복무하기보다는 전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개입에 선차성을 두게 됨으로써 노동자들은 점차 노동조합에 무관심하게 되었고,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는 노동자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된 것이다. 조합원들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것에 우선적인 관심을 갖는 노동조합 활동, 노동조합의 서비스 모델이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가 노동에 유리할 것인지의 여부는 노동조합들이 스스로를 그 한 부분으로 생각하는 사회운동의 성격이 어떠한가에 달려있다”(37)고 할 때, 노동조합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회운동에 대해 조합원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는 별로 상관없는 것으로 판단하게 되는 경우라면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는 노동자들에게 좋을 것이 없는, 또는 오히려 부정적인 것이 되어 노동자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이다.
‘작업장에서의 조합원들의 직접적인 문제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인 문제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운동의 명암을 좌우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노동조합 그 자체의 특징에서 비롯된다. 노동조합은 운동과 조직의 모순적 결합체(Flanders, 1970) 또는 운동과 제도화의 긴장관계(von Holte, 2002: 298)로 간주될 수 있으며, 노동조합의 이러한 특징을 무시하는 경우 노동조합운동이 그 목적을 달성하기가 쉽지 않게 되는 것이다. 
 
2) 신사회운동과 노동(조합)운동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는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운동이 “개념적으로” 작업장 안에 매몰되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주의에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의 독특성은 운동과 조직의 결합체라는 노동조합의 모순적 성격에서 비롯되는 문제를 구조적인 수준에서 어느 정도 완화시킨다.
노동조합운동과 신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관심은, 과연 노동조합운동과 신사회운동은 서로 달라서 갈등적인 관계에 놓일 것인가 아니면 서로 (지향하는 바가) 같아서 협조, 호혜, 공생적인 관계에 놓일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만약 전자라면 노동조합운동은 노동조합운동에 적대적인 또는 갈등적인 또 하나의 큰 세력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어서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고 만약 후자라면 노동조합운동은 새롭게 등장한 지원세력을 맞이하여 더욱더 강력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사회운동의 등장은 시민사회의 활성화와 맥을 같이 한다. 여성운동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체제에, 생태환경운동은 자본주의적 발전의 반생태적인, 지속가능하지 않은 성장 경제에, 지역운동은 중앙집권적이고 위계적인 (국민)국가중심의 정치질서에, 반핵평화운동은 핵에너지와 전쟁가능성에 기초하고 있는 위험사회에 대해서 전혀 다른 대안을 추구하는 신사회운동의 핵심적인 흐름이다. 문제는 이러한 운동들이 기존 질서에 대항하는 그 만큼 노동운동 등 기존의 사회운동 및 정치역학과 갈등관계에 놓일 가능성에 있다.
시민사회의 활성화는 대체적으로 이전에는 잠재되어 있었던 사회구성의 다원적인 구조의 활성화, 즉 기존에 지배적이었던 의제에 의해서 억압되었던 사회적 의제들과 관련된 요구의 분출을 의미한다. 상황이 그러하다면, 노동조합운동에 부과되는 중요한 과제는 시민사회의 활성화 내지 신사회운동의 전개와 스스로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또는 다원화된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 것인가와 관련된다. 만약 ‘조직노동’(organized labor)이 이미 기존 질서의 한 구성부분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그에 따라 새로운 사회운동들에 의해 비판적인 토론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은 새로운 상황 하에서 노동조합운동이 (적극적인 의미에서)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신사회운동의 흐름이 노동조합운동에 대해 주는 함의는 노동조합운동을 여러 사회운동들 중의 하나인 것으로 ‘절대적으로 상대화’시키는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조합운동이 여전히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또는 진보적 사회발전으로의 지향에서 다른 ‘부문’운동들에 대해 우위를 점한다고 상정되는 경우조차도, 노동조합운동이 한 사회에서 고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매우 단순한 사실에서 출발한다. 특히 ‘조직노동’의 영역이 축소되고 있는 상황과 그로 말미암은 근로계급 대중 내부의 분화, 그리고 (좁은 의미의 전통적인) 노동 이외의 영역에서 새로운 운동 축이 활성화하는 상황과 그에 따른 운동들의 분화는 노동조합운동으로 하여금 자기 정체성의 확립 및 타자들의 정체성과의 접합(articulation) 가능성에 대해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운동은 최소한 “생존”을 위해서라도 사회적으로 고립되지 않아야 하고 따라서 연대의 틀을 확장시켜야 하는 바, 이를 위해서는 모종의 자기 변화를 위한 다양한 모색과 과감한 실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3) 요약 : 노동조합운동과 공공성 문제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는 노동조합운동의 지평을 확대함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재확립, 재강화하고자 한 중요한 흐름이지만,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는 그것의 ‘사회운동적’ 성격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경우 자칫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적 기초가 취약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 시민사회의 활성화와 신사회운동의 전개는 새로운 사회운동 공간의 확장으로 인해 노동조합운동의 공간이 상대적으로 협소해지는 한편 노동조합운동과 여타 사회운동이 서로 경쟁하는 위치에 놓일 가능성을 크게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노동조합운동이 지역주민의 대중적인 지지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노동조합-지역공동체의 호혜적인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노동조합운동이 조합원의 협소한 이해관계만을 대변하는 조직으로 그 기능이 축소되지 않고 지역주민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이해관계를 대변하거나 또는 그것을 위한 운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노동조합이 지역 주민의 삶에 뿌리내리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노동조합운동은, 일차적으로는, 작업장 또는 일터에서의 협소한 의미의 이익 실현에 소홀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지역공동체와의 유기적 관계 형성에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도록 하면서, 이에서 더 나아가, 직접적인 이해관계의 틀을 벗어날지라도 전체 지역공동체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제반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조직과 운동의 유기적 결합을 실현하는)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운동은 민간부문보다 공공부문이 구조적으로 유리하다. Johnston(1994)이 지적하였듯이,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의 의제는 그 자체로 공적 영역의 의제가 된다. 공공부문 노동조합은 조합원의 아무리 협소한 이해관계의 실현을 위한 의제를 제출하는 경우에조차 그것이 공적인 의제가 되는 구조적인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지역주민과의 유기적 관계 형성에 성공적인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운신의 폭이 유의미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은 처음부터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를 내포하고 있다. 민간부문 노동조합운동이 그 활동의 공적 성격을 외면하고 자신의 협소한 이익실현만을 위해서 ‘공장 문’을 굳게 닫을 수도 있는 반면,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의 경우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조건은 공공부문 노동조합이 협소한 자기이익 실현을 위한 활동에만 몰두할 수 없도록 함과 동시에 자기이익 실현을 위해서라도 공적 영역에서의 적극적인 활동을 추구하도록 한다.
 
3. 공공서비스(공공부문) 노동조합주의의 이론적 기초
공공서비스는 국가 또는 정부의 역할, 기능을 담당하며, 그 성격에 대한 검토는 국가가 사회 또는 시민사회와 맺는 관계의 성격 또는 국가 그 자체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국가-사회관계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공공성, 공공부문, 공공영역 등과 관련된 논의를 내포한다.
1) 공/사 구분의 문제
구체적으로 한 사회에서 공공부문이 무엇 또는 어디까지이고 민간부문이 무엇 또는 어디까지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공공부문이나 민간부문에 대한 완전히 합의된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관련되어 있다. 사회과학에서 이 문제는 공/사(public/private) 분리/구분의 문제와 관련되어 논의되어 왔다.
사회적 관계는 공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공적 생활(공동의 이익을 위한 공동의 부, 타자에 의한 관찰에 대한 개방, 사람들의 다양성과 그로 인해 초래되는 다양한 이해관계와 행위들에 대한 관용 등을 주요한 특징으로 하는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사적 생활(개별적/개인적이고, 주민들에 의해 통제되고, 격리되어 있으며, 가족이나 친구들과 관련된 은밀한 생활 영역)의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 생활과 사적 생활이 상호 고립되어 있지 않다. 즉 공적인 이해관계(public interests)가 사적 생활의 영역에 침투하고 반대로 사적인 이해관계(private interests)가 공적 생활 및 그 환경을 상당한 정도로 변화시킴으로써 양자의 구분이 불분명해지고 있는 것이 현대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관찰되는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Brill, 1989: 20; 고길섶, 2000).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여 사회과학 이론들은 일반적으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특정한 사회적 상황 하에서 그 자체로 변화하거나 또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으로 인식하여 왔다. Turkel(1992)에 따르면, 공/사(public/private)의 구분은 사회과학적 논의에서 매우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현대에 들어와서, 페미니즘(“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다”)과 좌파 이론(“민주주의 사회는 공적인, 사적인 제도, 담론 등이 통합된 사회이다”) 등에 의해서 공/사의 분명한 구분에 대한 이의제기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현실적으로도 기존의 공/사 구분이 더 이상 쉽지 않게 되었다. 특히 전통적인 공/사 분리적 사고의 결과인 국가/시장의 이분법적 사고도 현실적으로 공적으로 규제되지 않는 시장이 존재할 수 없고 또한 사적인 질서도 공적 규제 양식의 한 표현이라는 것이 점차로 분명해짐에 따라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된 것이다. 현실적으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변화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경찰, 소방, 교육, 위생, 운동 등은 거의 대부분 사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이었으나 이제는 대부분 공적 기구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 변화는 비교적 최근의 일인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본래적으로 공적인 서비스” 또는 “공중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제공되어야 하는 서비스”라는 의미의 공공서비스 개념이 존재하는 것과 그것이 누구에 의해서 생산 및 공급되어야 하는가가 별개의 문제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Brill, 1989, 24).*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 및 각각의 특징에 주목하는 논의는 다양하게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Weintraub(1997)은 이를 네 개의 큰 흐름으로 구분하고 있다. 첫째는 자유주의적-경제학적(the liberal-economistic) 모델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공공정책 분석이나 일상적인 법적, 정치적 논쟁에서 지배적인 담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공/사의 구분은 국가(state administration)와 시장경제의 구분과 관련되어 있다. 둘째는 공화주의적 또는 고전적 접근으로서, 이에 따르면 공적 영역은 정치적 공동체 또는 시민사회의 영역과 관련되어 논의되며 이것은 한편으로는 시장과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에 대응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셋째는 주로 사회사나 인류학 쪽에서의 공/사 구분 방식으로, 여기에서 공적인 영역은 유동적이고 다양한 형태를 하고 있는 사회성(sociability)의 영역으로서 주로 문화적이고 연극적인 관행의 분석 적용된다. 넷째는 페미니즘 분석들의 주요한 경향으로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구분은 가족과 그 외의 경제적, 정치적 질서의 구분과 관련되며 특히 시장경제가 공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구분을 고려할 때, 공공부문 및 공공부문 노사관계와 관련된 기존의 논의들은 주로 첫 번째의 모델 하에서 전개되어 왔다고 할 수 있으나, 최근 전개되고 있는 공공부문의 구조조정과 관련하여 대두되고 있는 논의들의 핵심은 오히려 두 번째의 접근 방법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정 시 특정 사회에서 특정한 부문이 ‘공공부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공적 영역에서의 담론 상황에 의거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공공부문의 사회적 역할 또는 범위, 그리고 구조 변화는 시장의 실패, 국가의 실패, 시장의 복원/국가의 축소라는 일련의 과정, 즉 서구에서의 복지국가의 형성 및 쇠퇴, 신자유주의적인 정치경제의 전개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20세기 주요 국가들의 정치경제적 구조변화는 한편으로는 국가의 복지극대화 전략과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경쟁의 효율성 추구 전략이라는 두개의 커다란 축 사이의 주도권 싸움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Naschold, 1996). 국가와 (시민)사회, 국가와 시장, 정치와 경제 등의 이분법적 설정을 두고 이루어져 온 논의들은 한편으로는 그 양자를 대립적으로 배치하는 것이었고(고전적 자유주의의 문제설정이 이에 해당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양자를 상호 밀접하게 연결된 것으로 설정하는 것이었다(공적 영역을 국가와 시민사회를 연결하는 매개자로 설정하는 하버마스 등의 논의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전자는 공공부문을 국가의 사회적 역할 및 기능과 관련된 공적 영역의 것으로, 그 외의 것을 사적 영역의 것으로 설정하는 한편 국가(또는 정부)로 대표되는 공적 영역이 최소화되고 민간의 자율적인 영역인 (시장으로 대표되는) 사적 영역이 최대화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후자는 반대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명확한 구분 가능성을 의문시하면서, 그것의 명목적인 구분을 전제로 하면서도,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상호작용, 특히 (국가를 주요한 제도적 구성요소로 하는) 공적 영역의 활성화 및 영역 확대가 필요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의 증대, 즉 복지국가 또는 혼합경제의 등장, 특히 이와 관련된 사회적 또는 공적 서비스 영역의 등장 및 확대는 이와 같은 전통적인 구분 또는 뚜렷한 분리를 실질적으로 어렵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Kaufmanm, 1991: 4). 그런데 실질적으로 한 사회에서 공공부문 또는 공적 영역의 지위는 사회의 영역별 배치 또는 그 역할을 둘러싼 제 사회세력의 갈등과 그것의 “잠정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국가와 시장의 관계, 국가와 시민사회와의 관계, 정치와 경제와의 관계 등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해당 사회의 제 집단들의 이해관계의 대립과 타협, 일방적인 강요 또는 상호간의 합의에 의해서 (비록 장기적일지라도) 일시적으로만 유효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관계 및 그것의 변형과 관련된 논의를 진행한 대표적인 학자로 J. 하버마스와 H. 아렌트를 들 수 있다.
우선 하버마스(2001)는 부르주아 공론장의 형성 및 발전 과정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상호 침투 경향을 논하고 있다. 국가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이 확대되면서 국가는 기존의 일상적인 기능을 넘어서 사적 부문에 속해 있던 제반 활동을 자신의 것으로 삼게 된다. 즉 “국가는 사인들에게 공적 임무를 위임하거나 기본 계획을 통해 사적 경제활동을 조정하거나 아니면 스스로가 생산자와 분배자로 활동하기 시작”(252)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근대(현대) 사회에는 공적으로 또한 사적으로 중요한 사회적 영역이 형성되고, 그 위에 세워진 국가 제도와 사회 제도들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라는 기준으로 더 이상 세분할 수 없는 하나의 단일한 기능복합체”(254)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이제 이 공적 영역은 “조직된 사적 이해관계”가 서로 경쟁적으로 침투하는 공간이 되고, 그에 따라서 공론장은 사적 이해관계가 조정되는 공간, 더 나아가 국가의 공권력에 대한 논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적 공론장, 즉 민주주의의 원리가 적용되는 공간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하버마스가 공적 영역의 형성, 발전, 변화 및 그것의 사회적 함의를 주로 다루고 있다면, 아렌트는 사회적 영역 또는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등장과 함께 공적 영역 및 사적 영역이 어떠한 방식으로 변용되었는가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렌트(1996)에 의하면, 본래 인간 생활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구분되어 영위되었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라는 구분은 가정과 정치적 영역의 구분에 상응”하는데, 이 때 사적 영역은 개인의 유지와 종족의 보존과 관련된 “경제”의 영역 또는 필연성의 영역으로서 “정치”의 공간 즉 자유의 영역인 공적 영역과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정치의 공간인 공적 영역에서는 힘과 폭력이 작용하는 영역인 사적 영역에서와는 달리 말과 설득을 통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공간이다. 그런데 근대의 출현과 함께 “사적인 영역도 공적인 영역도 아닌 사회적 영역”이 출현하였는데, 이 사회적 영역의 출현은 사적 영역의 관심사, 특히 경제 또는 필연성의 문제가 공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등장으로 인간 생활의 제반 과정이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서 공적인 영역의 문제가 되었다. “살기 위해서 상호의존한다는 사실이 공적인 의미를 획득하고 단순한 생존에 관련된 활동이 공적으로 등장한 곳”이 바로 사회인데, 이러한 특징을 갖는 사회에서 “공적”(public)이라는 말은 첫째, “공중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누구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그러므로 가능한 가장 폭넓은 공공성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둘째, “세계가 우리 모두에게 공동의 것이고, 우리의 사적인 소유지와는 구별되는 세계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사회(사회적인 것, 사회적 영역)의 등장은, 정치적 영역의 핵심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다양성을 본래적인 특징으로 하는 사적 개인들을 소멸시키는 경향이 있다. 즉 사회적인 것이 공적 영역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필연성의 영역에 속해있던 경제가 지배적 담론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고 따라서 공적 영역이 소멸할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하버마스와 아렌트의 공적인 것(공적 영역)과 사적인 것(사적 영역)에 대한 논의는 서로 논의의 초점이 다르긴 하지만 공적 영역의 의의 즉, 하버마스의 경우에는 민주주의적 공론이 이루어져야 하는 곳으로서, 아렌트의 경우에는 사적 이해관계의 침투로부터 보호받아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하는 곳으로서의 공적 영역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에서 공적 영역 또는 공공부문에 모아지는 사회적 관심을 적절하게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의 활동 공간이 공적 영역이라고 하는 점이다.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은 공적 영역에서 공적인 것을 다루는 조직, 제도의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조직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의 제반 활동은 그 자체로 공적 논의의 대상이 되고, 그 구성원들의 사적인 이해관계만을 추구하는 것이 처음부터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이 한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제반 담론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의 유무가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운동의 입지에 매우 중요하게 될 것이다.
 
2) 국가-시민사회 관계와 공공서비스(공공부문)
자유주의적 관점의 국가-시민사회 관계에서 국가는 시민사회를 보호해야 하는 것으로 설정된다. 자유로운 시민들로 구성되는 공간인 시민사회가 우선하고, 그로부터 나타나는 제반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서 불가피하게 국가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는 ‘유일한’ 장치이다(함재봉, 1995). 문제는 자유의 공간인 시민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설정된 국가가 주어진 권한 밖의 힘을 행사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자유의 공간인 시민사회가 우위에 있고 국가는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부수적인 역할만을 수행해야 한다.
맑스주의적 관점은 기본적으로 계급국가론적 입장에서 국가-시민사회를 바라보며, 시민사회는 계급투쟁의 공간이고 국가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기구가 된다. 이렇게 볼 때, 만약 공적 영역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한편으로는 지배계급이 계급지배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헤게모니 행사의 공간이, 다른 한편으로는 피지배계급이 계급지배에 대항하기 위한 대항헤게모니를 행사하려는 공간이 된다. 즉 공적 영역은 계급투쟁의 장이 되는 것이다.
공화주의적인 관점에 따르면, 공적인 영역은 자유의 공간이다. 공적인 영역은 자유의 공간인 시민사회를 보호하는 소극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공동체의 구성원들인 시민들이 공공선, 또는 공적 이익을 구성하고 추구하기 위해 논쟁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곳이다. 더욱이 그러한 토론의 공간은 시민들의 자기실현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개인적 또는 사적인 것들은 분명히 보호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공적인 노력에 의해서만 제대로 실현될 수 있다(Honohan, 2000). 이 때 국가는 공적인 활동의 일부가 된다. 국가는 공적 이익을 앞세워 사적인 영역을 규제하는 기구가 아니라 자유로운 시민들의 공적 토론을 통해서 ‘잠정적으로’ 규정되는 공적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 된다.
결국 각각의 관점에 따라서 국가의 사회적 역할 변화 또는 국가의 제자리 찾기에 대한 접근이 조금씩 또는 크게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과도한 개입주의적 국가를 고전적 자유주의 국가의 이상에 맞도록 강력하게 변화시키고자 한다. 공공서비스의 기존의 확대된 역할은 상당한 정도로 축소되거나 시민사회 영역으로 이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맑스주의적 관점에서는 국가가 지배계급의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투쟁(전복)의 대상이면서, 피지배계급의 이익을 보호, 확대하기 위한 보루가 될 수 있고 또 그렇다는 측면에서 투쟁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우 구체적으로 공공서비스는 시민사회에 대해서 모순적인 위치에 놓여 있는 것으로 설정된다. 공화주의적 입장에서는 공공서비스가 다원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시민사회의 공적 담론의 과정과 그 결과들을 수용하고 그것을 구체화하는 역할을 담당하면서도 공적 담론의 영역에 참여하기도 하는 것으로 설정될 것이다.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의 성격, 즉 국가권력의 강력함 정도와 시민사회의 활성화 정도의 상호관계의 양상에 따라서 공공영역의 성격은 차이를 보여왔다. 예를 들어 영국같은 경우 자유주의적 시민사회가 발달하여 공공영역이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담보함으로써 국가권력의 권위주의적 성격이 약화되었다면, 동아시아와 같이 권위주의적인 국가와 미발달한 시민사회가 결합된 경우 공공영역은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담아내는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국가에 의해서 장악되는 타율적인 공간이었다. 특히 한국의 경우 공공영역은 타율적 공공영역과 자율적 공공영역으로 이중적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시민사회의 성장은 자율적 공공영역의 확장과 타율적 공공영역의 축소,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의 극복, 포괄적인 의미의 민주화와 관련되어 있었다(신광영, 1994).*
* 김호기(1998)는 공공영역을 제도적 공공영역과 비제도적 공공영역으로 구분한다. 공공영역은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정치적 의사가 결집되는 사회적 영역”이며, 이때 제도적 공공영역은 국가와의 중첩영역이고 비제도적 공공영역은 시민사회와의 공공영역이다. 신광영(1994)의 경우에는 공공영역의 자율성 확보, 즉 타율적 공공영역의 축소와 자율적 공공영역의 확대가 민주화의 관건이 된다면, 김호기(1998)의 경우에는 제도적 공공영역과 비제도적 공공영역의 유기적 연계, 즉 제도적 공공영역의 시민사회에의 개방 및 국가의 비제도적 공공영역에의 개방이 관건이 될 것이다.

민주화는 시민사회의 형성와 활성화, 자율적 공공영역의 확장과 동시적으로 전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정치시스템이 민주화 이전으로 회귀하지 않는 한 공공서비스는 이제 더 이상 발전주의 국가가 보여주었던 방식으로 타율적 공공영역을 주도적으로 형성하기도 쉽지 않고 또한 자율적 공공영역을 억압할 수도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공공서비스가 공공영역에서 모종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공공영역의 행위자로 참여하는 길 뿐이다. 그리고 그 때의 공공영역은 자율적 공공영역일 터이다. 그리고 이것은 공공서비스가 사회운동의 목소리를 공공영역에서 같이 토론함을 의미한다. 공공서비스는 - 그것의 타율적 공공영역의 주도적 형성자로서의 기능을 논외로 한다면 - 사실상 국가와 시민사회를 연결시켜주는 매개고리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사회운동은 ‘국가의 구조변화(the transformation of the state)’를 위한 주요한 힘, 추동력으로 작용한다(Quadagno, 1992). 그것은 반드시 공적 토론의 시공간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통해서 국가-시민사회 관계의 성격을 방향지우고 그 관계의 변화를 추동해 나가는 중요한 매개체 또는 행위자를 필요로 한다. 그 중에서도 공공서비스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이 중요한 행위자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이 국가-시민사회 관계에 있어서 공공서비스의 위치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그 위에서 공공서비스가 진보적인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기여할 수 있다면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운동은 공공성의 확대 강화의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운동의 역할과 과제
1)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운동의 구조적 조건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운동론을 모색할 때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야 할 것은 공공서비스의 사회적 함의가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과 특히 최근 몇십년간 공공서비스의 사회적 지위가 계속적으로 변화하여 왔다는 점이다. 그것은 국가-(시민)사회 관계의 양적, 질적 변화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힐 수 있다.
우선 공공서비스에 대한 국가론적 접근의 필요성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국가의 경제적, 사회적 역할이 구체화되는 영역이 공공서비스이고 그것은 국가-사회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설정되는가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공공서비스에 대한 논의는 국가에 대한 논의의 틀, 특히 국가-사회관계에 대한 논의와 맥락을 같이 한다. 그리고 국가-사회관계라는 맥락에서 국가와 공공서비스를 바라보는 것은 국가의 제반 행위가 국가-사회관계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국가-사회관계는 계속적인 발전 및 변화하는 유기적인 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대처리즘 하의 영국은 국가-사회관계 변화의 급격한 모습을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다. 영국에서의 공공부문 구조조정과 민영화는 국가-사회관계의 구조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홍주환 외, 2001: 54-57).
국가-사회관계의 구조변화는 공공서비스의 공급과 관련해서 기존의 관점들 간의 경합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Naschold, 1996). 하나는 시장의 실패와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의 실패와 관련된 것이다. 전자는 복지국가론과 관련된다. 복지국가론은 국가가 공공이익을 위해서 복지를 극대화하여야 한다는 입장에서, 공공부문의 확장을 통해 공적인 사회보장을 적극적으로 실현하며 시장에 대한 정부 규제를 강화할 것을 주장한다. 서구의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 형태들이 복지국가론이 구체화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후자는 신자유주의 국가론과 관련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가 수행한 대내적 역할은 한편으로 경제활동의 기반을 구축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력의 재생산 기반 또는 사회복지제도의 기반을 확장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최근 30여년간의 국가 역할의 변화는 기존의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가 자유주의적 국가로 그 형태를 변화시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공공서비스 내지 공공부문의 구조변화는 국가-사회관계의 신자유주의적 개혁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국가-사회관계 재편은 민영화와 공공서비스 혁신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민영화는 국가의 시장에 대한 직접 개입을 철회하는 것이었으며 공공서비스 혁신은 공공서비스에 기존의 행정 개념 대신에 경영 개념을 도입하여 효율성을 제고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개혁도 결국 국가 실패 또는 시장 실패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며, 이것은 국가-사회관계에 대한 위의 두 관점 사이의 갈등이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적 소유와 그 처분권, 시장 메커니즘, 국가의 시장 규제 등의 전체적인 관계를 재조정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최소국가론이나 국가 개입주의의 문제점을 모두 극복하는 방식으로 국가의 역할, 즉 공공부문 및 공공서비스의 역할을 재조정하는 것, 이를 위해서 기존의 관료주의적 행정주의와 다른 한편의 공공서비스의 효율성 중심주의의 긍정적인 측면을 결합시키는 것 등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Naschold, 1996).
한국의 경우 기존의 국가주도의 경제성장 중심적 국가-사회관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됨에 따라서 국가와 시장의 관계는 국가의 “시장에 대한 개입이 간접적인 형태와 협상을 추구하는 형태로 변화”하고 이제 국가는 “시장의 질서를 지배하기보다 시장의 질서를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방향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김윤태, 2003: 321). 현재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운동은 기존의 국가-사회관계가 새로운 방향으로 변화하는 구조적 조건에 처해 있다. 소위 공공부문 “상시개혁체제의 구축”에 따라서 중앙정부 및 지방정부의 조직개편이 급격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성과 및 능력 위주의 인사제도가 도입되고 있다. 행정기관에 대한 경영진단을 추진하고, 책임운영기관 제도를 도입하는 등 공공서비스의 효율성 제고를 위한 제도개혁이 체계적으로 진행되는 한편, 성과주의 예산제도, 성과주의 급여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조직간 구성원간의 경쟁제도를 확산시키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인력 감축도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공공서비스 구조조정은 국가-사회관계를 시장중심적인 방향으로 재조정하는 것이었는바, 이것은 한편으로는 공공서비스가 어떤 사회적 함의를 가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의제를 제기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공서비스의 구조조정에 따른 공공서비스 종사자들 즉 공무원들의 노동조건의 변화와 관련된 의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운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논의의 근거가 된다. 특히 공공서비스의 사회적 특성은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운동이 노사관계를 통해서 공공서비스의 사회적 함의와 구체적으로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 기제의 모색을 좁게는 공공서비스 노사관계상의, 넓게는 전 사회적 범위의 의제로 삼도록 한다.
 
2) 공론장으로서의 공공서비스 노사관계 - “공공성의 정치”의 제도화
케인즈주의적 개입주의 국가나 신자유주의 국가의 “사회 관리 기능”이 의문시되고 있고, 따라서 국가 및 공공부문의 역할과 지위에 대한 사회적인 차원의 재조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하나의 공식 또는 공리로서의 ‘공공부문의 핵심 활동’이라는 개념이 더 이상 유용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것은 일종의 민주적 정치결정 과정의 결과로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분석적이고 경험적인 현대 과학의 여러 방법들을 동원하여 뒷받침하여야 하는 것이다(Naschold, 1996).
이제 필요한 것은 국가-사회관계의 성격과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공공서비스의 성격에 대한 사회적 토론이다. 무엇보다도 국가-사회관계의 성격에 대한 사회적 규정은 그 사회의 공공서비스 및 공공부문의 지위와 그 위에 서있다고 할 수 있는 공공서비스 노동조합 및 노사관계에 대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그것은 공공부문과 민간부문, 공공서비스와 그 수혜자 간의 유기적이고 균형있는 결합에 관한 밑그림을 제공하며, 이것은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운동의 목표설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된다. 공공서비스 개혁은 공공서비스의 사회적 함의에 대한 재규정을 의미함과 동시에 공공서비스 노동자들의 노동생활 조건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문제는 국가-사회관계의 전환이 국가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특히 노동배제적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한국사회의 통치구조 또는 지배구조에 대한 성찰적 논의가 생략된 것이었다는 점에 있다.
“정치적 상황성”(political contingency) 개념은 “각 공기업들의 목표와 그것의 운영 규칙, 정부 부처의 개입, 정당들의 정책, 대중의 여론, 여타 국가기구들의 요구, 그 공공기관이 생산하는 재화 및 서비스를 사용하는 공적 기구들 및 민간부문의 이익입단들의 제반 압력 및 요구 등”을 함축하는 개념으로서, 공공부문을 둘러싸고 있는 구체적인 조건들이 계속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는 상황을 의미하며, 서구의 주요 공기업들에서 노사관계 갈등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는 상황을 공기업들이 운영되고 있는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서 찾고자 했던 Ferner(1988) 등의 논의에서 등장하는 개념이다. 정치적 상황성 개념은 그것이 공기업의 전략 구성을 민간부문의 기업들에서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불확실하게 만들지만, 결국 그것을 통해서 공기업의 행위 논리가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Batstone, et al., 1984). 그리고 또한 그것은 공공부문 및 공공서비스 노사관계는 정치적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운동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국가-사회관계 변화의 방향과 내용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사회적 차원의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고 그것의 관철을 위해서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공공성의 정치”에 있어서 주도권을 잡는 것이 무엇보다도 관건이 된다.
공공서비스 노사관계는 공공성의 정치가 구체적으로 전개되는 다양한 영역들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공공서비스가 갖는 사회적 함의는 공공성의 정치의 결과라고 할 수 있지만, 공공성의 정치에 관련되는 제반 사회세력의 각축은 그것을 특정한 내용으로 고정시키지 않는다. 한 사회의 공적 영역은, 특히 민주화 이후 점차 확대되고 있는 자율적 공적 영역은 사실상 국가-사회관계의 형식과 내용을 시시때때로 규정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공적 영역과 공공서비스 노사관계 및 노동운동은 어떤 관계를 갖는가 하는가이다. 공공서비스 노사관계가 의제로 삼는 것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공적 형태와 내용을 취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 자체로 공적 영역에 발을 딛고 있다고 하겠다.
중요한 것은,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운동은 공적 영역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의제설정자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비로소 (비록 그것이 협소한 이해관계의 발로로 비쳐지더라도) 공공서비스 노동자들의 노동생활 조건의 향상을 위한 요구도 같이 의제로 삼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공공성의 정치는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운동이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의 합리적 핵심을 체현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특히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은 그 특성상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를 내포하고 있다. 결국 공공성의 정치는 사회적 의제를 자신의 의제로 삼도록 강제하는 제도적 틀 위에 있는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운동에게 중요한 전략적 지침이 되는 것이다. 단체교섭이라는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틀의 제한에 매몰되지 않는다면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은 노사관계의 제반 수준, 영역에서 자신의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사회적 의제를 자신의 문제로 지속적으로 전환시켜 제기할 수 있는 특수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은 공공서비스 노사관계를 둘러싸고 있는 정치적 상황을 공세적으로 주도할 수 있는 구조적 역량을 담지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운동으로서의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운동은 국가-사회관계의 매개적 위치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시민사회의 활성화된 자율적 공적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그 사회적 의제를 노사관계의 영역으로 유입시키고 이를 통해서 국가의 민주적 전환을 끊임없이 시도해가는 것을 자신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5. 결론
사회적으로 고립된 채로 공공서비스의 사회적 중요성을 무기로 삼아 협소한 자기이해에 매몰될 것인가, 아니면 공무원 노동조합들의 선언들이 주장하는 바람직한 공공서비스의 사회적 실현을 위한 주체로 자리잡을 것인가는 공무원 노동조합의 주체적 역량에 달려있다.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운동은 민간부문의 노동조합운동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운동과 조직’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데 있어서 유리한 구조적 위치에 있다.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운동이 어떻게 사회적 시민권을 확고하게 하는가는 공공서비스를 둘러싼 정치적 상황을 그에 유리한 방향으로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주체적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국가-사회관계의 매개적 위치에 있는 공공서비스가 공적 영역에서의 담론 의제를 자신의 것으로 하고 비권위적인 조정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이 조직의 전략적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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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리는 목소리 모아 봄을 전하자

이 노래는 또 몇 년 전 노래인가. 메아리가 1992년 신환제(신입생 환영제) 때 부른 노래인데, 원래는 노래모임 새벽이 부른 것이다.  그 때는 새내기들이 입학했다고 이런 행사도 했었구나. 지금도 하는건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즈음이면 이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다. 입춘인데도 봄은 커녕 갈수록 추위가 맹위를 떨치니 이 노래가 생각이 안날 수가 없다. 
 
제목은 '봄소식', 왠지 설레게 하는 단어다. 그리고 리듬도 경쾌하고... 하지만 실제 가사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여기서 봄소식은 중의적 표현인 셈이다.
  
가사 중에 "노동자의 하늘을 열다 쓰러진 형제여"라는 대목이 있는데, 나는 '쓰러진 동지여'로 알고 있었다. 오늘 다시 들어보니 '형제여'다. 하긴 그 당시 분위기로 봐서는 형제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사용해도 별 탈이 없을 때였으리라. 천만 노동형제 운운할 때였으니... 
 
그러고 보면 단지 전투적 노동운동의 쇠퇴나 학생운동의 몰락만으로 운동의 위축을 말하는 건 좀 거시기한 듯하다. 성평등이나 생태, 평화에 대한 마인드는 내가 아는 한 이 노래가 나오던 당시보다는 나아간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갑자기 김영훈 민주노총 새집행부가 성폭력 사건을 어떻게 다룰지 궁금해진다.
 
나에게 노래모임 새벽에서 부른 '봄소식' 버전은 없다. 아마 어쩌면 이 노래 자체를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의미에서...
 
나에게 봄소식은 뭘까. 나도 봄소식을 전하고 싶다. 
봄이 오기는 올까. '달자의 봄'이 생각나네. 쩝... 거기에는 '기적 같은 사랑'이 삽입되어 있던가? 

 

메아리 - 봄소식
 
아직은 추운 새벽 거리에 너와 나는 봄소식 전해야 하네.
입에서 입으로 귀에서 귀로 아직은 추운 새벽 거리에
조심 조심 조심 조심 봄을 전해야 하네
노동자의 하늘을 열다 쓰러진 형제여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평화를 빼앗은 저들에게
그 무력과 멸시 앞에 그 눈물과 절망 앞에
떨리는 목소리 모아 봄을 전하자 봄을 전하자
마주잡은 형제들의 두 손 어둠을 뚫고 마침내 우뚝서서
몰려오는 적들을 응시하는 얼굴들 그 메마른 얼굴들에 다가오는 봄소식
  
아직은 추운 새벽 거리에 너와 나는 봄소식 전해야 하네.
입에서 입으로 귀에서 귀로 아직은 추운 새벽 거리에
조심 조심 조심 조심 봄을 전해야 하네
노동자의 하늘을 열다 쓰러진 형제여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평화를 빼앗은 자들에게
그 무력과 멸시 앞에 그 눈물과 절망 앞에
떨리는 목소리 모아 봄을 전하자 봄을 전하자 봄을 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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