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 평전을 읽고
시|소설도 보고 남부군, 빨치산, 이현상, 태백산맥 View Comments
이현상 평전을 드디어 다 읽었다. 그동안 연구실을 왔다갔다 하면서 짬을 내서 읽다보니 하루에 읽는 분량이 보통 30페이지, 많으면 50페이지 정도밖에 되지 않아 시간이 꽤 걸린 셈이다.
사실 이 책은 사서 읽으려고 했는데, 학교도서관에 도서대출을 한 김에 이것까지 대출하여 읽게 되었다.
어디선가 보았던 이 책에 대한 평은 이현상 전기라는 것. 사실 내가 봐도 거의 일방적으로 이현상의 언행은 긍정적인 것으로 묘사되었다. 하긴 근 5년여에 걸친 빨치산 투쟁을 성공적으로 지휘한 그의 능력으로 보면 그렇게 묘사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그렇게 살아남은 신화적인 이의 전설이 남겨지는 것이겠지.
소설가 김성동 선생의 '남로당을 위한 변명'이라는 발문도 인상적이다. 체 게바라와 같은 공산주의 혁명가는 자본주의 상품으로 만들어버리면서 같은 공산주의 혁명가라도 이현상 선생 같은 이는 왜 상품으로 만들지 않는 것일까 하는 의문. 하지만 한국의 현실에서 아직도 빨치산은 완전히 복권되지 않았다. 아니 이명박 정부의 탄생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처럼, 이들의 복권가능성은 더 늦춰지는 것이겠지. 아직까지 이들은 위험인물이다, 북이 있는 한...
조선의 혁명가 이현상은 체 게바라보다 훨씬 뛰어난 빨치산 활동가였는지 모른다. 아마 그의 행적이 제대로 알려졌다면, 카스트로와 같이 자신의 과거를 빛내줄 동지가 있었더라면 아마 사정은 달랐겠지.
이현상 평전에는 지리산 빨치산, 남부군이 치룬 수많은 전투가 나온다. 내가 많은 그 당시에 있었다면 어떠한 선택을 했을까. 이 질문은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본 동생이 한 것이다. 그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나는 아무래도 산에 들어가서 빨치산과 같은 활동을 하진 못했을 것 같다. 소위 회색분자가 딱 맞다. 반드시 선택을 해야만 한다면? 그래도 그런 선택의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고... 김태준, 유진오 등의 삶도 참 안타깝다.
일상에서 내가 가진 조그마한 안락과 즐거움, 편안함은 포기할 수 있고, 조금 더 불편하게, 비판적으로 살아갈 수는 있겠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그만큼 무엇인가 가진 것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수많은 사람들은 산에서 죽어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이 바라던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이상을 지금 구현하고자 하는 게 올바른가. 그리 정치적으로 옳다고 볼 수만은 없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어록을 암송하면서 거기에서 삶의 원칙을 이끌어낸 그들에게 '다른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이현상이 여순반란사건에 대해 비판적이었다는 것을 평전을 읽으면서 알았다. 어릴 적 서가에 꽂혀져 있던 여순반란사건을 다룬 소설책을 읽으면서 지창수, 김지회 등의 이름을 처음 접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와 현대사 공부를 하면서 여순반란에 대해 다시한번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폭력을 통해 그것도 국군과 우익들에 비하면 소규모일지라도 민간인에 대해 학살을 저지르면서 어떻게 혁명을 말할 수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이현상의 원칙을 알게 되면서 나의 판단이 옳았음을 알게 되었다.
남한에서 빨치산은 가능하지 않았고, 이현상과 남부군의 투쟁은 어쩌면 무모한 싸움이었다. 자신들이 어떻게 죽을 줄 알았으면서도 스스럼없이 그 길을 갔다. 지금 시기에 그 빨치산의 현장은 어디일까. 인터넷일까? 글쎄다. 멕시코의 반군들도 이제는 시들해져 버리지 않았던가. 현실적인 영향력도 상실하였고... 책상에는 마르코스가 쓴 저작이 꼽혀 있지만, 나에게는 그냥 흥미거리일 따름이다.
파업을 통해 처음 그의 소설을 접했고, 이후에 경성 트로이카를 거쳐 이현상 평전까지, 안재성의 작품을 읽게 되었다. 이현상의 투쟁을 미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이러한 활동이야말로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북으로 올라갔던 빨치산들이 남부군을 결성하고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오는 장면이 있다. 남부군은 태백산 산정에서 1951년 새해를 맞았다. 거기에 나오는 한 대목.
서쪽으로는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산봉우리들이 구름처럼 널려 있고 급경사진 동쪽으로는 멀리 드넓은 동해바다가 펼쳐진 정상을 지날 때, 어디서부터인가 김순남이 작곡한 <태백산맥>이 시작되었다. 꼬리가 보이지 않게 길게 늘어선 대열에서 계속 이어지는 노랫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소리개벽 2집 '동지여 굳세게' - 태백산맥
태백산맥에 눈 내린다, 총을 들어라, 출정이다.
눈보라가 밀림에 우나 가슴 속에 피 끓는다.
높고 높은 산을 넘어 어둠에 묻혀서 사라진 길을 열고
빨치산이 영을 내린다, 원쑤를 찾아서 영을 내린다
동지들의 흘린 피를 헛되이 마라 출정이다.
공화국을 그리다 죽은 그 얼굴이 떠오른다
높고 높은 산을 넘어 어둠에 묻혀서 사라진 길을 열고
빨치산이 영을 내린다, 원쑤를 찾아서 영을 내린다 (영을 내린다 영을 내린다)
2절 가사는 책에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학부생 때 동아리에서 선배들에게 배웠던 노래이기에 기억을 하는 것이다.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정말 빨치산이 된 느낌이었는데... 소리개벽의 노래는 그 때의 그 감흥을 살리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하긴 이 노래는 NL적 감수성으로 부르면 안될 것 같긴 하지만...
폭력이 없이 변혁은 가능할까. 자본마저 '진보를 향한 열정'을 얘기하고, '아니다'라고 말하는 소신이 세상을 바꾼다고 하는 판에 이미 변혁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게 하지만, 내가 바라는 '변혁'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을 해본다.
올해 시간이 나면 지리산에 가봐야겠다. 여유가 있을까.
------------------------------
안재성, 불의의 세력과 사상에 대한 선전포고 (참세상, 안재성(소설가) / 2007년08월03일 11시33분)
[리얼리스트 작가 선언](3) - '이현상 평전'을 펴낸 소설가 안재성
세상에는 현실과 다른 헛소문이 떠돌곤 합니다. 리얼리즘 문학에 대한 괴담도 그 중 하나입니다. 벌써 십여 년 동안 여러 평론가들이 거듭해서 사실주의 문학의 죽음을 선언해 왔습니다.
진실보다는 자신이 세운 가설을 믿는 그들은 여전히 대중들에게 읽히는 것이 사실주의적인 작품들이라는 사실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관념적이고 사적인, 실험적인 작품들이 한국문학의 주류가 되었다고 진단하고, 그런데 도부지 이런 작품들이 팔리는 기색이 없으니까 이제는 문학은 죽었다고 과감히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진단하는 의사는 당장 돌팔이로 매장될 텐데 멋대로 문학 전체의 죽음을 언도하는 평론가들은 교수로, 학장으로 승승장구하니 참 요상한 세상입니다.
사실주의 문학은 죽었다
그들이야말로 80년대 후반기 겨우 십여 편의 장편 노동소설이 나왔을 때, 마치 노동문학이 한국 문학판을 점거한 듯 호들갑을 떨던 사람들이었음을 생각하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닙니다만, 그들이 오늘날 한국 문단의 거의 모든 문학상과 출판사를 장악하고 자신들이 세우는 가상의 잣대에 맞지 않는 작품들을 걸러내느라 열심인 꼴을 보면 혐오스럽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오늘 한국 문학의 진정한 문제는 평론가들의 요설이나 출판사의 상업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에 있습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가진 무수한 독자들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써내지 못하는 우리 작가들의 문제라고 봅니다.
문제는 작가다
요즘 문학상 응모작의 절대다수는 관념적이거나 사적인 글들로, 사회와 역사에 대한 고찰이 들은 좋은 작품을 발견하기는 매우 힘든 게 사실입니다.
설사 좋은 작품이 있다 해도 응모작의 주류인 관념주의적인 작품들 중에서 하나를 뽑겠지만, 진보적 이념을 가진 작품들이 대중에게 다가갈 만한 흡입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불특정한 특정 다수가 아니라, 적어도 인권과 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진 30% 정도의 진보적인 대중의 사랑조차 받지 못한다는 것은 심각한 결함입니다. 이는 명백히, 독자들을 흡인하지 못한 작가들의 능력의 한계이거나 혹은 판단의 잘못입니다.
별로 해보지도 못한 노동문학의 실패가 준 충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사실주의 문학을 부정하거나, 섹스나 폭력 같은 상업적인 기법들을 동원하면 읽히지 않을까 하는 얕은꾀에 빠져버리거나, 아니면 자기연민에 푹 빠져 너무나 무거운 주제를 너무나 무겁고 지루하게 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노동문학의 실패
무엇보다도, 작가들이 너무 게으른 건 아닐까요? 아무리 돈 벌려고 시작한 일이 아니더라도 작가로 등재한 이상, 혹은 문예운동가로 나선 이상 혼신을 다해 좋은 글을 쓰려 노력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뛰어난 글재와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시인, 소설가들이 생활을 이유로, 신변잡사들을 핑계로 거의 아무 작품도 쓰지 않고 술에 묻혀 세월을 보내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문학의 현실에 대한 장황한 진단을 하기 위해 이 편지를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 리얼리즘 작가들을 질타하기 위해 시작한 것도 아닙니다.
리얼리즘 작가의 자기반성
어떤 위대한 개인도 그것을 밑받침해 주는 토대가 없으면 일어설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유구한 한옥의 전통 속에 부석사 무량수전이 만들어지고, 석조건물의 전통 속에 콜롯세움이 만들어집니다. 에디슨이 조선 땅에서 태어났다면 뛰어난 대장장이에 불과했겠지요.
오늘의 문학 풍토 속에서 진정으로 인간과 사회에 빛이 되는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지리멸렬하게 무너져가는 진보적 리얼리즘 작가들이 활동할 공간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저급한 문학풍토에 치어 자포자기하고 있거나, 정도를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보겠다고 나섰다가 진흙수렁에 빠져있거나, 아니면 열의는 가지고 있어도 경험이 부족한 사람까지 포함하여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와 인권과 평화가 자리 잡기를 바라는 실천적 작가들이 하나가 되어 서로서로를 격려하고 가르치고 배우고 힘을 모아 싸워나가는 조직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싸우는 조직이 필요
이를 토대로 다시 활발한 작품 활동이 이뤄진 바탕 위에 우리 중의 누군가는, 혹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역사에 길이 남을 좋은 작품을 쓸 수 있겠지요.
이제 리얼리스트 작가들이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그 자체가 이미 관념주의 문학에 대한 경고이며 이 땅을 지배하려드는 불의의 세력과 사상에 대한 선전포고입니다. 민족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오만 잡다한 경향이 집합되어 있는 진보문학 진영과의 차별화입니다. 명백히 민중주의 문학운동의 복권이자 문학의 현실 참여에 대한 재 선언입니다.
현실참여문학의 재 선언
따라서 저는 기왕에 리얼리즘 문학을 했다 해서, 명망이 있거나 연배가 높다 해서 가입을 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70년대에 출판된 한국문학전집에 이름이 오른 작가 중 우리가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는지요?
명망이란 진실로 하찮은 것입니다. 우리는 작가들이 들어오고 싶다 해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좁은 문을 세우고, 꼭 필요한 사람들만을 선별하고 초청하여 들여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자신이 발전한다는 진단 이외의 예언을 결코 허락하지 않습니다. 어제는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오늘 이뤄지고, 또 오늘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내일은 현실이 되는 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리얼리스트 작가들은 질곡에 빠져버린 한국 문학을 되살리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이제 리얼리스트 작가들이 모여, 오늘의 문학판을 뒤집어 버리고, 문학사의 새로운 장을 열어 나갑시다! 그것은 꼭 필요한 일이고, 또 가능한 일입니다. 리얼리스트 작가들이여! 함께 합시다!
'한국의 체 게바라' 이현상 선생의 평전
이현상(1905~1953)의 생애가 [경성트로이카]의 작가 안재성에 의해 복원, 출간되었다. '한국의 체 게바라', '빨치산의 전설적 지도자', '남부군 총사령관'... 그를 지칭하는 수식어에 비하면 그의 행적에 관해 알려진 것은 사실 전무하다시피 하다.
남과 북으로 나뉘어 분단된 후, 반공이데올로기에 휘둘려 우리 현대사에서 철저하게 왜곡,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이현상. 분명한 것은, 그가 추구한 이상이 여러 가지 한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생전 그가 대항해 싸운 적들의 부당성을 희석시키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나아가 식민지 약소민족의 주권을 위해, 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인 일본과 미국의 침략에 저항하여 모든 것을 바친 세계적인 혁명가의 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실로 그가 이끈 유격대의 규모와 전적, 그리고 그 끈질김은 세계의 민중혁명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 이현상
그 자신이 노동운동에 투신하였거니와 일제 말기의 독립운동가들과 사회주의운동가들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왔던 작가 안재성은, 객관적이고도 논리적인 역사 인식에 바탕하여 누구보다 민족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던 우리 민족의 잃어버린 영웅 이현상을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있다.
최후의 빨치산 대장 이현상의 삶과 투쟁의 기록
이현상은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인 1905년 전북(현재는 충남)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에서 4남2녀 중 다섯째(4남)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전주이씨 양반가로 부친은 부농이었던 진사 이면배였다. 그는 중앙고보 재학 중이던 1925년부터 박헌영 등과 함께 공산당운동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1926년에는 6.10만세사건의 핵심인물로 지목되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27년 휴학 중 상하이로 건너가 망명 청년들의 모임 '한인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온 그는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1928년 8월 구속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일제 식민치하에서 총 12년간의 감옥 생활을 했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공산당 재건에 적극 가담하며, 남로당 연락부장, 간부부장을 맡아 활동하였으나 미군정에 의해 공산당 활동이 불가능해지면서 박헌영 등과 함께 월북한다. 1948년 다시 서울로 내려온 그는 빨치산투쟁을 위해 그해 11월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이후 그는 '조선 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으로서 지리산 등지에서 치열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며, 수많은 전설을 만들어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경상도,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 전역에 인공이 수립되자 부대를 이끌고 지리산에서 하산하여 낙동강전선 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으나 미군의 인천 상륙과 함께 다시 입산하여 빨치산 투쟁을 전개한다.
1951년 7월 그는 공식적으로 남한 빨치산 총사령관의 위치에 오른다. 그러나 1953년 북한에서는 한국전쟁의 휴전과 함께 남로당 계열이었던 박헌영, 이승엽 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된다. 그해 8월 6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열린 제5지구당 조직위원회와 결정서 9호, 9월 6일의 결정서 10호에 따라 제5지구당은 해체되고 위원장이었던 이현상은 평당원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빨치산 지도자로서의 모든 권한을 박탈당한다.
그리고 1953년 9월 17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의문의 총탄에 맞아 숨진 시체로 발견되어 화개장터 앞의 섬진강변에서 화장되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그는 평범한 키에 언제나 과묵하고 우수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대원들을 아끼고 매사에 솔선수범하는 지도자였으며, 남부군뿐 아니라 빨치산 모든 대원들로부터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
...이현상에게 더 잘 어울리는 호칭은 선생님이었다. 그 수많은 대원들이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려 갈구했던 그래도, 큰 바위처럼 기대고 싶었던 선생님이었다. 적군이라도 교전 중이 아닌 이상 절대 죽이지 못하게 하고, 동지의 주검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던, 눈보라치는 겨울 산중의 걸인 움막 같은 천막 속에서 추위에 떨며 홀로 책을 읽다가 스르르 지쳐 잠들곤 하던 영원한 선생님이었다. - 본문에서
그 어떤 일 앞에서도 화를 내는 일이 없고, 그 어떤 문제를 놓고도 장황하게 말하는 법이 없고, 당 이론에 관한 것이면 안 읽은 게 거의 없으면서도 토론을 즐기지 않았다는 분. 지쳐 쓰러진 대원의 짐을 손수 짊어지고, 대원들의 시체를 볼 때마다 땅속 깊이 묻어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유일한 반찬으로 마련된 고추장 한 보시기를 굳이 가져오게 해 손수 나뭇가지를 꺾어 일일이 찍어 먹였다는 분. - 조정래, [태백산맥]10권에서
일제시대, 조국독립의 일념으로 공산당운동에 뛰어든 이래, 평생을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간해방을 위해 투쟁하다 지리산에서 최후를 맞이한 빨치산의 전설적 지도자 이현상.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아니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혜택을 버리고 혁명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춥고 배고픈 산속에서 죽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젊은 시절을 바친 그의 여러 행적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빨치산 투쟁 전적만으로 그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잔혹하다.
인간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사랑, 약자에 대한 동정심과 인명존중의 정신이라는 거대한 수림 속에서 그것은 그저 작은 관목 한 그루일 뿐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그는 가장 고독하고 외로운 영웅이자, 자신의 삶을 불태운 비운의 혁명가였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민중혁명가
오늘까지도 이현상은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한편에서는 일제시대부터 해방 후까지 삼십 년 세월을 민족의 독립과 계급해방을 위해 투쟁한 전설적인 영웅으로 떠받드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비현실적인 이념에 경도되어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 공산주의자로서 그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 범죄시해왔다.
그러나 이현상은 한국 현대사의 격류를 건너갈 때 반드시 딛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전설적인 민중혁명가이다. 일제 치하에서는 모진 고문과 회유, 12년간의 옥살이에도 불구하고 단 한순간도 변절하지 않았으며 해방 후 더욱 가혹해진 탄압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느 누구보다 민족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던 철저한 사회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였던 그는 오직 민족의 독립과 자립을 위해 외세와의 투쟁에 모든 것을 바쳤던 진정한 애국자요, 영웅이었다.
지리산에서 고군분투하던 이현상의 모든 직위와 명예를 박탈했던 북한은 이현상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섬진강에 뿌려지자 다시 영웅으로 복권시켰다. 북한은 그가 죽기 전인 1953년 2월 날짜로 이현상에게 영웅 칭호를 내렸으며 지리산으로 영웅훈장을 보냈다고 발표했다. 1968년에는 평양 신미동에 조성된 애국열사릉에 이현상의 묘지를 제1호로 만들었다. 시신 없는 가묘였다. 이후 북한이 제정한 제1호 열사증을 추서 받았으며 사망 삼십칠 년 만인 1990년 8월에는 다시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60여 컷의 화보 속에는 1990년대 중반, 최초로 공개된 이현상의 직계가족들 사진도 수록하였다. 북한의 대표적인 월간지 중 하나인 [금수강산]에 수록되었던 것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양 방문 시, 안내를 맡았던 이현상의 막내딸 이상진을 비롯한 후손들의 현재 모습을 담았다.
김성동 선생의 발문은 [이현상 평전]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되살려준다. '남부군을 위한 변명' 이라는 제목으로 80매에 이르는 장문의 글에 담긴 우리 현대사의 아픔이 참으로 깊고 생생하다.
김성동 소설가의 발문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저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가 체 게바라는 알아도 조선의 혁명가 이현상은 모른다. 마오쩌둥,호치민,티토,카스트로, 그리고 김일성은 알아도 이현상은 모른다. 게바라를 넣어서 위에 든 반제국주의 혁명가들은 모두 혁명에 성공해서 자신들이 꿈꾸었던 새 세상을 열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아름답고 훌륭한 새 세상을 만들고자 30년 동안 밤을 낮 삼아 뛰어다녔던 불요불굴한 우리 조선의 혁명가 이현상은 그 꿈을 펼쳐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잘난 역사가들이 괄호 쳐버린 역사의 빈칸을 채워넣은 것이 작가 안재성이다. 이른바 역사가라는 이들은 이 엄청난 일을 해낸 작가 안재성에게 모자를 벗어야 한다. 그리고 따뜻한 위로의 말과 함께 박주일배라도 올려야 한다.
현기영 소설가의 추천의 말
삼천리 오대악 중에 유일하게 이성계의 등극을 반대하였다 하여 '불복산'이라고 불렸던 지리산은 조국 분단을 반대한 이현상 유격대의 항쟁으로 인해 또 한 번 '불복산'이 되었다. 민족 수난과 항쟁을 고스란히 보듬어 안은 지리산, 그 산의 얼굴을 닮은 이현상, 그는 우리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조정래 소설가의 추천의 말
우리의 비참한 식민지사와 서러운 분단사를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핵심인물 중의 한 사람이 이현상이다. 그의 평전이 출간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민족통일을 절반쯤 이루어가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자료 도움 - 실천문학사
---------------------------------------
"그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프레시안, 강양구/기자, 2007-08-15 오전 1:13:52)
[화제의 책] <이현상 평전>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저 라틴아메리카 혁명가 체 게바라는 알아도 조선의 혁명가 이현상은 모른다. 마오쩌둥ㆍ호치민ㆍ티토ㆍ카스트로, 그리고 김일성은 알아도 이현상은 모른다. (…) 아름답고 훌륭한 새 세상을 만들고자 30년 동안 밤을 낮 삼아 뛰어다녔던 불요불굴한 우리 조선의 혁명가 이현상." (소설가 김성동)
이현상. 낯설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5년간 빨치산을 이끌었던 그는 지난 50년간 남쪽에서 존재를 부정당했다. 1980년대 후반 집중적으로 나온 빨치산을 소재로 한 반공 소설, 실화의 등장인물로 잠시 '상품'이 되기도 했지만 금세 잊혔다. 2000년 6월,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김대중을 안내했던 이가 그의 막내딸이라는 사실이 화제가 되는 정도였다.
이렇게 완벽히 잊힌 이현상의 삶을 복원한 <이현상 평전>(실천문학사 펴냄)이 광복절을 앞두고 출간됐다. 21세기에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골수' 사회주의자의 삶을 되돌아보는 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을까? 왜 이현상을 '망각의 늪'에서 끄집어내느라 애를 써야 하는 것일까?
<이현상 평전>의 저자 안재성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수년간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정국을 연구하면서 '이현상'이라는 이름을 수도 없이 만났지만 따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이미 남한에 널리 이름이 알려졌고 북한에서도 영웅으로 등록돼 있는 이현상을 새삼스레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안재성이 이현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엉뚱한 이유 때문이었다. 1948년 10월 여수ㆍ순천에서 일어난 반란 사건을 추적하던 그는 순천에서 반란군이 살해한 이들의 숫자가 1700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맞닥뜨린다. 물론 반란군을 진압한다는 명목 하에 군인, 경찰이 학살한 3000명~7000명의 민간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숫자다. 그러나 그는 충격을 받았다.
"아득한 절벽을 만난 기분이었다. 아무리 그들이 반민족적인 패악을 저질렀다 해도, 혹은 개인적인 원한을 맺었다 하더라도, 아무 저항도 할 수 없는 포로들을 그토록 잔인하게 무더기로 학살할 수 있다면 이것은 정의가 아니었다. (…)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혁명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혁명은 증오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이런 안재성의 앞에 이현상과 5년 동안 지리산에서 함께한 생존 빨치산 대원이 나타났다.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이현상 선생님은 여순 사건을 봉기라거나 항쟁이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 수많은 인민과 혁명 역량을 훼손시킨, 크나큰 오류요 죄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이현상의 삶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현상, 타고난 혁명가
이현상의 삶은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삶과 많이 겹친다. 게바라가 의사로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해방을 위해 온몸을 던진 것처럼 이현상 역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풍족한 삶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독립운동의 길로 나섰다. 1926년 '6ㆍ10만세운동' 때 맨 처음 만세를 부른 이가 바로 22세의 이현상이었다.
"역사는 자신의 존재에 의거하지 않은 지식인 출신 혁명가의 나약함과 우유부단함에 관한 많은 사례를 보여준다. (…) 그러나 역사는 그 반대의 경우도 무수히 보여준다. 자기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없더라도 타인에 대한 애정과 정의감만으로 기득권을 버리고 변혁운동에 띄어들어 아낌없이 죽어간 사례들이다.
자신이 처한 부당한 현실에 분개하고 분노를 폭발시키는 일은 생존의 본능이지만, 타인의 고통에 분노하고 목숨까지 걸어 싸우는 일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인이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지식인이거나 노동자이거나 아무 상관없이, 타인에 대해 얼마나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성품의 문제였다."
이현상은 타고난 혁명가였다. 그가 평생 변절하지 않고 사회주의자로 살 것을 간파한 이는 바로 일본 경찰이었다. 학생 조직을 꾸리다 두 번째로 구속된 그를 심문한 일본 경찰은 이렇게 적었다. "일견 온순함을 가장하고 있으나 음험한 자로서 과묵하며 의지가 대단히 강고함. 극렬한 사회주의자로서 의지가 매우 강고하므로 '개전할' 가능성은 없음."
이현상은 193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한다. 감옥에서 만나 의기투합한 이재유, 김삼룡 등과 함께 1933년 1월 결성한 '경성 트로이카'와 4년7개월의 옥살이를 끝내고 나오자마자 1939년 1월 다시 결성한 '경성코뮤니스트그룹'은 싹이 말라버린 1930년대 국내 항일운동의 빛나는 이름이었다. (☞관련 기사 : "나의 '경성 트로이카' 친구들")
체포된 지 2년 만에 탈출한 이현상은 제3의 사회주의 항일운동 조직을 준비하던 중 해방을 맞는다. 해방된 지 사흘이 지난 1945년 8월 18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는 이현상, 박헌영, 이관술, 김삼룡, 이강국 등이 벅찬 감정을 안고 모인다. 그때만 해도 불과 10년도 안 돼 같은 민족, 같은 동지의 손에 대부분 목숨을 잃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1948년 10월, 이현상은 남조선노동당 간부부장의 자격으로 우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켜놓고 우왕좌왕하고 있던 여수, 순천의 반란군을 수습해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일제 강점기 때 그가 했던 12년간 감옥살이이보다 훨씬 더 험한 5년간의 산중 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의 나이 42세 때였다.
빨치산 생활을 하던 5년 동안 이현상과 그의 동지들이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던 기간은 단 18일. 한국전쟁 중 북진하던 미군이 비껴간 강원도 세포군 후평리에서 보낸 기간이었다. 나머지 기간에 이현상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덕유산, 백아산, 백운산, 소백산은 물론이고 전쟁 초기에는 낙동강을 건너 국군, 미군을 교란하는 역할까지 떠맡았다.
이 기간에도 그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았다. "이현상 선생님은 교전 중이 아닌 이상, 포로로 잡은 군인이나 경찰을 절대 죽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토벌대에 협조하다가 잡힌 민간인은 물론, 경찰 첩자로 산에 들어왔다가 잡힌 사람들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인정이 참 많은 분이었지요. 그것 때문에 나중에 온정주의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전쟁은 끝났는가?
1953년 9월 18일, 지리산 반야봉 남쪽 빗점계곡에서 이현상은 목숨이 끊어진 채 발견됐다. 경찰이 그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목에 여덟 발의 총알이 박혀 있었다. 그를 호위하다 열흘 전에 경찰에 잡힌 김진영, 김은석은 시신을 보자마자 털썩 주저앉았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죽여주십시오." 이들을 본 경찰은 지리산이 떠나가라며 만세를 불렀다.
이렇게 이현상은 비극적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껍데기만 남은 그의 시신은 부패하지 않도록 방부제를 넣은 후 서울 시내에서 '전시'되었다. 그의 시신이 지리산 인근 섬진강 백사장에서 화장된 것은 1953년 10월 8일, 죽은 지 20일이 지난 후였다. 그의 장례는 항일운동에 평생을 바친 그의 삶을 존중한 토벌대장 차일혁이 치렀다.
"이현상에게 더 잘 어울리는 호칭은 선생님이었다. (…) 적군이라도 교전 중이 아닌 이상 절대 죽이지 못하게 하고, 동지의 주검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던, 눈보라 치는 겨울 산중의 걸인 움막 같은 천막 속에서 추위에 떨며 홀로 책을 읽다가 스르르 지쳐 잠들곤 하던 영원한 선생님이었다.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아니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혜택을 버리고 혁명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춥고 배고픈 산속에서 죽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 인간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사랑, 약자에 대한 동정심과 인명존중의 정신이라는 거대한 수림이 없었다면 자기희생의 마음을 지켜갈 수 없었다."
비록 이현상은 지리산에서 운명했지만 그의 영혼은 반세기 동안 계속 현신해 왔다. 나이 어린 시다들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며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다가 결국 죽음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저항했던 허세욱 등으로…. 이현상과 동료들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역사의 빈칸을 채워넣은 안재성 <파업>의 작가 안재성(47). 안재성은 1986년 '노동3권 보장'을 외치며 분신한 한 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은 <파업>을 통해 한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 받는 소설가다. 정화진, 방현석 등과 함께 노동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던 그는 1990년대 초반 돌연 펜을 놓았다. 안재성은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돼 첫 수배를 당하는 것을 시작으로 구로, 사북, 태백 등에서 노동운동을 하면서 누구보다도 1980년대를 치열하게 살았다. 그런 그가 갑자기 '달라진 세상'에서 글을 쓰는 것이 쉽지 않았으리라. 그는 1990년대를 포클레인을 운전하며, 또 농사를 지으며 보냈다(☞관련 기사 : "2004년, 전태일이 살아 있다면…"). 그랬던 그가 2000년대 들어 한국의 근ㆍ현대사에 초점을 맞춘 글로 다시 돌아왔다. 특히 2004년부터 펴낸 <경성 트로이카>(사회평론 펴냄), <이관술 1902~1950>(사회평론 펴냄)은 이재유, 이관술, 김삼룡 등 그 이름조차 낯선 무명의 혁명가를 역사 속에서 불러내 큰 반향을 얻었다. 이번에 펴낸 <이현상 평전>도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관련 기사 : "그의 죽음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일까"). 소설가 김성동은 <이현상 평전>의 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역사가라는 사람들은 우리 조선의 혁명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 그 잘난 역사가들이 괄호 쳐버린 역사의 빈칸을 채워넣은 것이 작가 안재성이다. 이른바 역사가라는 이들은 이 엄청난 일을 해낸 작가 안재성에게 모자를 벗어야 한다." |
------------------------------------------------
[현대사 아리랑]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2008 12/16 위클리경향 804호, 김성동)
반란군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가다
평양 조선혁명박물관에 전시된 이현상 사진. |
박병률이 한 말이다. 박병률은 강동정치학원 원장을 설립 때부터 끝까지 지냈던 사람이다. 김국후 기자가 엮어낸 <평양의 소련 군정>에 나온다. 박병률은 말한다.
“평양에 있지 말고 남으로 내려가라”
“이들은 술자리에서 북조선의 최고지도자 문제를 놓고 입씨름을 벌였습니다. 김창만이 ‘곧 수립될 공화국에서 김일성 장군이 북조선의 최고지도자를 맡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순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현상이 ‘김일성은 인민무력부장 정도가 적당하고 최고지도자는 박헌영 선생이 맡는 것이 남북 인민들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이에 이상조가 ‘박헌영은 당파 싸움을 일삼는 종파주의자이기 때문에 지도자로는 절대 불가하고 빨치산 대장 출신인 김일성 장군만이 우리 조선을 이끌 수 있는 자격이 있다’며 맞섰습니다. 분위기가 험악해져 술자리는 패싸움으로 번졌고, 두 파는 강동정치학원에서 훈련용 총까지 들고 나와 서로 위협할 정도가 됐습니다. 이 패싸움은 즉시 소련군정 사령부에 보고됐고 소련 군정사령부는 중앙당 허가이에게 ‘진상을 조사한 후 엄벌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중앙당은 이들의 소련 유학을 취소하고 김창만 선전부장을 내각 간부학교 교장으로 좌천시켰으며, 이상조 간부부장을 군대로 발령하는 동시에, 이현상과 김삼룡은 평양에 있지 말고 즉시 남조선으로 보내라는 엄명을 내렸습니다.
당시 소련 군정은 이 사건을 ‘김일성파’와 ‘박헌영파’의 노골적인 대결로 보고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남조선으로 밀려 내려간 이현상은 지리산 등지에서 빨치산을 지도하던 중 김삼룡은 지하에서 남로당을 이끌던 중에 각각 총살당하는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좌천된 김창만과 이상조는 나중에 복권되기는 했지만 결국 숙청됩니다.”
남조선 빨치산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 4000여 명 빨치산 지도자와 빨치산을 양성하였던 강동정치학원은 1948년 1월 1일부터 1950년 6월 25일까지 2년7개월여 동안 존속하였다. ‘박헌영 학교’라고 불릴 만큼 남로당세가 강했던 곳으로, 평양 인근 평안남도 강동군 승호면 대성리에 있었다. 박헌영이 비서로 있던 조두원(조일명)·사법상 이승엽과 함께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와서 1박2일 동안 학원생들을 격려하고 갔다고 한다. 박헌영의 세 번째 부인이 되는 윤레나(윤옥, 조두원 처제)도 학원생이었다고 한다. “리승엽이 강동정치학원 원생들을 무장시켜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남로당 숙청 때 걸고 들어갔던 죄목 가운데 하나다.
이현상의 죽음을 보도한 1953년 9월 <동아일보> 기사. <실천문학사(안재성, 이현상평전) 제공> |
이처럼 엄혹한 때에 남로당 총책인 김삼룡과 간부부장 겸 노동부장 이현상이 중앙당이 있는 서울을 비우고 평양에 있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48년 4월 14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갔다가 7월 말까지 3개월 이상 머무는 것이니, 남로당 살림은 이주하·정태식에게 맡기고 모스크바로 유학을 가려 했다? 그렇다면 고통받는 노동자·농민과 그 고통을 함께 해야 된다는 볼세비키 규율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이현상이야 유격전술을 배워 남조선에서 유격투쟁을 벌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당수권한대행인 김삼룡은?
고보생 이끌고 시위 주도하다 투옥
중앙당이 있는 서울로 돌아온 김삼룡과 이현상을 기다리는 것은 반공이데올로기로 무장된 이승만정권의 경찰이다. 중요한 기밀서류 보따리를 들고 동가식 서가숙하던 남로당 중앙을 더 큰 곤경에 몰아넣는 사변적 상황이 일어나니, 이른바 ‘여순반란사건’이었다. 우익에서는 ‘반란’이라고 부르고 좌익에서는 ‘항쟁’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이현상이 죽기 전날까지 은신했던 곳으로 알려진 빗점골 아지트 자리. 1953년 9월 18일 경남도당에서 온 조직책을 따라 산을 내려갔다가 시신으로 발견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박영발·송시백 등과 지내며 제5지구당 해산 작업을 했다. <실천문학사(안재성, 이현상평전) 제공> |
“당적 죄악이며 당적 과오다.”
1948년 10월 22일 저녁, 순천역 앞에 도착한 이현상이 비통하게 부르짖었다는 말이다.
불바다를 이루고 있는 시내 곳곳에 널부러진 시신만 1000여 구가 넘었다. 이현상은 이 사태가 중앙당과 아무런 이음고리 없이 일으킨 커다란 과오로 보았다. 이승만 친일세력이 미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벌이는 제주도 양민 학살극에 동참할 수 없다는 민족·계급적 의분에서 일떠선 것이지만, 전략적 오류로 보았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완벽한 채비를 한 다음 객관적 정세가 임계점에 이르렀다는 과학적 판단이 섰을 때 일으켜서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 인민봉기인데, 하사관 몇 명이 주동하여 일으킨 우발적 사태였던 것이다.
무고한 인민대중의 희생과 혁명역량의 감소를 가져올 뜻밖의 사태 앞에 망연자실하던 이현상은 우왕좌왕하는 반란군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비록 씻을 수 없는 당적 과오와 당적 죄악을 저질렀지만 반란군들은 반드시 살려내야 할 가치가 있는 혁명역량들이었다. 수많은 인명이 살상될 시가전을 피하여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는 이현상 앞에 놓여진 것은 앞이 보이지 않는 가시밭길이었다. 승산 없는 유격투쟁이었으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조국해방과 계급해방을 위하여 30년 가까이 싸워온 불요불굴의 혁명가 앞에 놓여진 ‘고난의 행군’이었다.
남·북 어느 쪽에서 죽였는지 의문
평양 근교 혁명열사릉에 만들어진 이현상의 가묘. 1972년 사망한 부인 최문기가 여기에 합장되었다. <실천문학사(안재성, 이현상평전) 제공> |
지리산을 중심으로 5년 동안 벌였던 결사항전에 대해서는 안재성이 쓴 <이현상 평전>에 자세하게 나온다. 이현상이 지리산으로 들어간 것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것이었다. 남조선이라는 지리적 조건 자체가 유격대투쟁이 불가능하다. 중국공산당 홍군이 강서에서 연안까지 368일 걸친 2만5000리 대장정 끝에 마침내 정권을 잡았다는 것은 그만큼 땅덩어리가 광대하여 유격전을 벌일 공간이 많았다는 것인데, 이현상유격군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라고는 기껏 사방 800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가 가장 중요한 화력 자체가 비교가 안된다. 세계 최강 미군 비행기가 끊임없이 퍼부어대는 최신무기 네이팜탄 파편만 맞아도 숯덩어리가 되는 판인데 이현상유격대 주무기는 갑오년 김개남(金開南) 장군 때 쓰던 화승대에 기껏 삼팔식장총이었다.
불뫼, 곧 화산(火山)이라는 아호를 썼던 이현상이 열반한 것은 1953년 9월 17일 밤 8시쯤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죽음에 대한 참모습은 오리무중이다. 토벌대로 나섰던 경찰과 군인들이 서로 자기네가 사살했다고 훈장과 포상금을 받기 위하여 싸웠는데, 분명한 것은 경찰과 군 어느 쪽에서도 그를 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계급해방과 민족통일을 위하여 신 벗을 사이 없이 밤을 낮 삼아 뛰어다녔던 이현상을 죽인 것은 누구인가? 남로당 숙청작업의 일환으로 이현상을 제거하라는 조선로동당 특명 받은 지리산 빨치산 가운데 누구거나, 북에서 직접 내려 보낸 특수공작대가 저지른 정치이데올로기적 살해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열 방 이상 총을 맞은 이현상이다. 시신 윗도리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 있다. 보리수 열매로 꿴 백팔염주와 볼셰비키 혁명사였다. 향수 47.
이현상 동지 2014/09/23 10:55
이현상 선생의 빨치산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