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급하게 써내려간 게 아닌가, 여겼던 몇 몇 대목을 지적해주는 좋은 글
레디앙에서 젊은 논자들끼리 학생운동에 관한 논쟁이 한참 진행되었다. 서로의 논점이 어그러져서 무슨 논쟁이라 이름 붙여야 할지 모르겠는데, 여하간 학생운동 얘기가 가장 많이 나왔으니 편의상 학생운동 논쟁이라 부르자. 이 글을 레디앙으로 보내지 않는 것은 내가 실패한 논쟁을 생산성 있게 바꾸겠다는 거창한 야심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좀 더 글을 편하게 쓰고 싶기 때문이고, 여기에 올려도 어차피 볼 사람은 다 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또래집단의 진보진영 비판에 난감해 하는 이유
처음에 논점으로 제기되었던 건 학생운동 문제는 아니었다. 조병훈의 최초의 글이 실린 것은 “진보 야!”라는 지면이었다. 이 지면은 진보진영에 대한 (주로 젊은 친구들의) ‘고언’을 싣는 자리인 것 같다. 이 지면에 대한 내 감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필요한 것 같긴 한데, 읽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무슨 문제를 얘기할지는 뻔한데 그 문제의 해결방법을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젊은 친구들이 진보진영에 대고 우리를 잘 받아들이려면 이런 게 필요했으면 좋겠다, 저런 게 필요했으면 좋겠다, 하는 얘기들을 듣고 있으면 종종 내가 소비자의 불만을 접수하는 서비스 노동자가 된 듯한 느낌이 들어 불쾌해진다. 그러니까 정신건강을 생각하면 안 읽는게 낫다.
그 친구들이 겪는 문제는 나도 겪는 문제다. 가령 이런 일이 있었다. 민주노동당 깨지고 진보신당 생길랑 말랑할 때 얘기다. 여의도에 분당하겠다는 좌파들이 우르르 모였다. 내 나이 그때 스물 여섯이었는데, 촛불시위도 나기 이전이었던 그때 나는 이 판에서 영원히 막내겠구나 생각하던 때였다. 내 위로 막내에서 두 번째 연령이 나보다 8살 연상인가 그랬다. 한 이십 명이 모여서 조개에 소주를 먹는데, 분당 과정에서 의견이 달랐던 두 패거리가 싸우기 시작했다. 이런 싸움, 해결 안 된다. 싸움이 해결이 안 되자 그들은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민중가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소주잔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언제쯤 내가 아는 노래가 나올까 시간을 재고 있었다. 한 시간 반쯤 지나니까 청계천 8가가 나오더라. 그래도 따라부르지는 않았다.
“이러니까 애들이 못 나오지.” 알고 지낸지 5-6년쯤 지난 어느 386 옆자리로 가서 그렇게 말을 붙였다. 그러자 “에이 뭘 어떡해. 적응해야지, 응?”이라고 답변하더라. “아니 이걸 뭘 어떻게 적응해. 맨날 들은 나도 지겨운데.” 투덜투덜했다. 그때 나는 고민했다. 아니, 도대체 이 상황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1) 70년대~90년대초 학번 운동권들이 민가를 부르는 것을 금지시킨다. → 저 두 패거리, 소주병 깨고 끝까지 싸우는 꼴을 보자고?
2) 내가 소주병을 깨서 지랄발광한 후 70년대~90년대초 학번 운동권들에게 20대를 향한 서비스 정신을 강요한다. → 일단 내가 먼치킨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낫살 쳐먹었단 이유로 활동가 뿐만 아니라 평당원들까지 감정노동자로 만드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3) 20대들을 모아와서 우리만 아는 민가를 부른다. → 일단 그럴 20대들이 없다. 그리고 우리만 알만한 민가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무엇보다 20대들을 모아서 민가를 억지로 외우게 한다면 그러고 있는 우리가 선배들보다 더 폭력적이다.
4) 우리 시대의 마지막 천재운동권 김민하씨가 일렉기타를 치고 옆에서 내가 “잔혹한 천사의 테제”를 부른다. → UCC로 찍어 올리기 전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실 찍어 올려도 아무 의미가 없다.
5) 이딴 더러운 정당은 내버려두고 20대들만의 조직을 만들어 기존 진보정당을 무력화시키거나 일신한다. → 내가 먼치킨이어야 가능하다. 사실 내가 먼치킨이어도 불가능하다.
6) 그냥 희망이 없는 진보정당 운동을 접는다. → 전반적으로 두루두루 검토해볼 때 이 쪽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인 것 같다.
문제는 이렇다. 윗세대에게 자기들 좋아서 하는 문화를 일신하라고 요구하려면 그들을 무슨 영웅적 주체로 만들어야 한다. 내가 타인에게 그렇게 과도한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가? 그런 요구는 사실, “이 조직이 마음에 안들면 마음이 통하고 문화가 맞는 20대들끼리 조직을 만들어 윗세대 진보들을 후려치세요.”라고 요구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요구다. 그런 요구 들으면 “아니 뭘 나더러 어쩌라고?”라는 말이 당신 입에서도 튀어나오지 않을까? 그리고 더 큰 문제, 20대들끼리는 공유하는 문화나 정서가 있을까? 뭔가 공통적인 것이 있어야 윗세대에게 이걸 배려해달라고도 요구할 수 있고, 혹은 우리끼리 뭉쳐서 윗세대에 대항하겠다는 기획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게 있지도 않으면서도 윗세대에게 뭔가를 해달라고 하는 건 결국 떼쟁이 심보 밖에 안 될 것 같다는게 내 생각이다. 상대방이 요구를 안 들어주는 게 문제가 아니라, 실은 우리가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거다. 우리만 아는 민가를 불러야 할지, 아니면 모두가 레이와 아스카 피규어를 들고 와서 레이파와 아스카파로 나뉘어서 싸워야 할지, 그도 아니면 대로변에서 똥을 싸야 할지 누구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면서 운동권에게 젊은이들에게 환대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좀 성립하지 않는 말이다. 일단, 여의도의 어느 날 풍경에서 묘사되었듯 운동권은 자기들끼리도 서로를 환대하지 않는다. 둘, 나는 20대들 역시 서로를 환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럼 결론은? 여기서도 불평은 들리고 저기서도 불평은 들린다. 나는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사람들에게 문제를 설명하고 서로가 참고 감내해야 할 부분이 있음을 말할 수밖에 없다. 학생당원들 일도 잘 안 하면서 무슨 말은 그렇게 많은지 죽겠다는 아저씨 세대에게는 ‘아니 그럼 진보정당이 청년세대에 씨도 안 뿌리면 나중에 어디 가서 수확하려고 그러냐.’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 청년세대에 대한 당의 무심함에 좌절하는 또래들에게는 ‘그래도 우리끼리라도 소통하고 힘 합쳐서 무언가를 자꾸 요구해야 당도 바뀌고 우리도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사람에게 당신 혼자 몸 불사질러 희생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으니까 각자에게 조금조금씩을 요구해야 하는 거다. 이런 귀찮은 일이 싫다면 정말로 당 접는 것 이외에 답은 없다.
조병훈, "왜 진보신당에 입당 안해?" 비평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9059
내 문제의식을 얘기했으니 이제 레디앙에 올라온 각 글에 대해 비평하겠다. 조병훈은 최근 글에서 “내가 현재 진보신당 지도부를 둘러싼 소모적인 논쟁을 비판하기 위해 기존 학생운동권의 몰락을 다루면서, 고려대 학생행진 등으로 나타난 좌파 학생운동조직의 사례와 각 부문 운동의 일부 밑거름이 되었던 학생운동권 출신 활동가들까지 무리하게 재단했던 것은 나의 불찰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이 구절은 조병훈의 최초의 글을 문제의식을 요약하고 있다. 그런데 불찰이라?
그런 것도 불찰일 수는 있겠으나, 사실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다. 학생운동권 활동가는 용가리 통뼈인가? ‘무리하게 재단’ 당하는 걸 거부하게. 재단도 많이 해야 솜씨가 는다. 그런 거야 서로의 경험을 맞춰보고, 인정할 건 인정하고 상호간에 인식의 발전을 이룩하면 될 일이다. 혼자 다 알면 대화를 할 필요도 없으니까.
내가 보기에 조병훈 글의 결정적인 문제는 그런 것은 아니다. 그의 글의 주제는 분명 “진보신당의 문제”다. 그걸 밝히기 위해 ‘기존 학생운동권의 몰락’을 다루었다고 본인도 밝혔다. 그러면 그의 글의 전제는 다음과 같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진보신당의 몰락의 원인은, (과거 진행된) 학생운동권의 몰락의 원인과 같은 차원에서 파악될 수 있다.” 이건 전혀 말이 안 된다고는 볼 수 없지만 갑론을박이 가능한 명제다. 가령 나는 이 명제가 반만 맞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진보신당의 구체적인 문제를 토론해야 할 시국에 이렇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맞는 것 같기도 한 명제를 들이미는 것은 냇가의 나룻배를 산 위로 올려 썰매를 타고 내려오자는 것과 비슷한 짓거리라고 본다.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흰눈이 내린...”응??? 진보신당 문제도 버거워 죽겠는데 지금 학생운동권이 왜 무력해졌는지를 토론해 보자고???
그래도 굳이 그런 작업을 하겠다면 그 전제의 근거가 무엇인지나 정연히 밝힐 일이다. 그런데 조병훈은 그런 작업을 생략한다. 본인의 머릿속에서는 너무나 명백한 일이었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남들과 소통을 하려고 나왔으면 남들이 동의하지 못할 주장이 무엇인지를 체크해보고 그것에 대해 설명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런 게 없으니 이후 논쟁이 진보신당 논쟁인지 학생운동 논쟁인지 밥인지 떡인지 구별할 수 없도록 되어 버렸다.
글을 통해 유추해 보자면 그 대담한 주장의 근거는 이것인 것 같다. “00년 이후 학번들에게 왜 진보신당 입당 안 하느냐고 물어보면 운동권처럼 보여서 싫다고 얘기하기 때문에.”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그 반응을 체크하는 것은 매우 존중받을 만한 자세다. 그리고 이런 반응들에서도 우리는 많은 것을 얻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반응이 진보신당의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낸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령 길거리에서 사람을 붙잡고 민주노총의 문제가 무엇인지 물어보자. 그 사람이 민주노총의 노동자 조직률이 낮다거나, 민주노총 교섭의 혜택을 보는 노동자 비율이 낮다는 얘기를 꺼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무슨 소린지도 모를거다. 그 사람은 그저 ‘민주노총이 강경한 파업을 일삼아서’ 그 조직이 위기에 빠졌다고 대답할 가능성이 제일 높다. 그래서 이것이 민주노총의 근본적인 문제인가? 트위터에서 정치에 관심있단 양반들에게 진보신당이 왜 어려울까요, 라고 물어보면 “5+4연대 탈퇴하고 노회찬이 완주해서” 그렇다는 대답을 들을 가능성이 제일 높다. 그래서 선거를 포기했으면 진보신당이 잘 되었겠는가? 이런 반응들을 듣는 것도 의미는 있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또 현재의 진보신당과 왕년의 학생운동권에 대한 조병훈의 ‘비교’는 학생운동과 정당운동 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 ‘근본적인 차이’는 개념적으로도 서술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실천적인 차원에서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런 부분이다. 현재 진보정당 운동에 대해 논하는 사람 중에 진보정당이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학생운동에 대한 갑론을박은 학생운동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주장까지 포함해서 전개되었다.
그 이유는 과거의 학생운동이 비정상적인 국면에서 정립된 비정상적인 방식의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이 맥락을 설명하는 것은 현재 진보정당 운동의 위기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핵심적인 부분은 아니다. 학생운동 사례와 진보정당 운동 사례를 유비적으로 겹쳐놓으면 논의가 어그러지는 건 그래서다. 여하간 1) 예비 엘리트집단이라는 대학생의 자기인식, 그리고 2) 다른 공간에선 사회운동이 거의 불가능했던 시대상황, 이란 특수맥락에서 ‘학생정치조직’의 역할인식과 활동이 가능했다고 정리해보자. 그리고 이런 이의 활동을 ‘학생 운동권’이라 불렀다고 생각해보자.
90년대가 들어선 후 문제는 학생운동이 더 이상 부문운동 중에서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학생운동이 도대체 부문운동이기나 한지도 불분명했다는 것이다. 이건 진보정당 운동의 위기 분석과는 별개의 맥락인데, (뭐 사회문제이기는 하니까 책 한권 분량으로 설명하다 보면 같이 엮일 수는 있겠다.) 조병훈의 글에선 그런 면이 드러나지 않는다.
조병훈의 스케치에서 드러나는 문제의식도 물론 이런 문제들을 포괄하고 있을텐데, 거듭 읽어봐도 너무 막연하다. 일단 학생운동을 1) 이념에 의한 정치운동과 2) 대학이라는 생활공간에서의 자치운동의 수준으로도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학생운동이 1)의 역할을 부여받을 수밖에 없었다면, 조병훈이 스케치한 90년대 이후에는 2)의 측면이 대두되어야 했다고 볼 수 있다. 1)을 부여잡는 이들은 “그런데 왜 그 짓을 밖에서 이념운동(혹은 부문운동) 단체에 들어가지 않고 하필 너희들끼리 캠퍼스에서 모여서 해야 해?”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왜 해체하지 않았는지를 분석하려면 ‘돈’ 얘기가 나오고 이는 양승훈이 하고 싶었던 얘기인 것 같긴 한데, 이건 이따 양승훈 글 얘기하면서 살펴보자.
조병훈이 스케치하는 ‘학생운동 몰락사’는 1)의 측면을 지키려던 이들이 쇠퇴하는 과정을 그리는 것 같다. 그리고 조병훈은 그 쇠퇴의 원인을 ‘운동권 정파의 폐쇄적 운영방식’이란 부분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그런 후 그 원인을 오늘날의 진보신당에 투영하여, 진보신당의 위기를 학생운동의 몰락이란 사건에 포개는 것일 게다.
문제는 자치운동을 옹호하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학생이념운동의 몰락은 학생운동권이 잘못해서 생긴 일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거역이었다는 거다. 그들의 입장에서 운동권이 할 수 있었던 올바른 선택은 학생운동권의 일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해산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게 옳은 일인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어떤 운동권은 그렇게 했다. 그래서 나는 조병훈이 학생운동 사회에서 자치운동을 옹호하고 있기는 한 건지, 그런 구별을 하고 있기는 한 건지도 의심스럽다. 그게 아니라 이념운동을 옹호하는 거라면, 조병훈의 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냥 막연히 ‘운동’이란 이름하에 묶이는 사회현상을 뭉뚱그려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념운동과 자치운동의 구별에 새로운 차원이 도입된 건 2007년 “88만원 세대론”이 히트친 이후 2008년 즈음에 ‘당사자 운동’이란 차원이 도입되고 나서다. 당사자 운동의 관점에서 ‘학생운동몰락사’를 재서술하는 건 유의미한 일이기는 하나, 십년 전엔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회문제의 틀거리로 당시 그들의 활동을 재단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덧붙여 조병훈의 글을 그저 ‘운동권 방식’에 대한 두루뭉술한 문제제기로 억지로 이해해 보려해도 문제는 남는다. 만일 조병훈이 바라본 문제가 서두에 내가 말했던 것과 비슷한 문제였다 본다면, 그런 문제는 진보신당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문운동 벌이는 시민사회단체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운동권’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물론 그 모든 것을 운동권의 유산이라 부르는 것도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렇게 보려면 조병훈의 글은 다시 쓰여져야 한다.
내가 보기에 운동현장에서의 세대론은 두 가지 정도로 나누어진다. 하나의 축은 70년대-90년대 초 학번과 그 이후의 대립항이다. 그 이후 세대 중에는 ‘활동가’가 된 사례가 거의 없다. 아직 초년생이거나 인턴십일 뿐이다. 다른 하나의 축은 그들 활동가 내부에서 보이는 70년대-80년대 초반 vs 80년대 중반-90년대 초반의 대립항이다. 개발새발 잡은 거라 엄밀한 건 아닌데, 하여간 그 내부에서도 앞선 세대 활동가는 젊은 나이부터 단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반면 그 이후 세대는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그 앞선 세대 활동가를 선배로, 상사로 모시고(?) 살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다.
이건 조직운용방식의 문제와는 좀 다른 것이다. 조병훈의 말이 옳다면, 학생운동 위기를 가속시켰던 그 90년대 학번 운동권들은 당이나 시민사회단체에 들어가서 잘 적응하고 살고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 그들도 조직에 들어가면 지금의 20대들과 비슷한 신세가 되는 까닭이다. 이건 어떤 기득권 세력이 자기들끼리만 알아먹는 언어로 토론을 하며 논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만)은 아닌거다.
조병훈은 글을 보면 ‘운동권이 싫어서 진보신당에 입당하지 않겠다는 청년’들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토론이 지겹다고만 하지 말고 그 토론이 무슨 의미인지 쉬운 언어로 풀어서 그런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 필요없다.’는 단언이 아니라 사람들의 견해를 만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교량이다. 그리고 이번 논쟁에서도 볼 수 있듯이, “논쟁이 쓸데없다.”는 사람의 글에서 정말 천하에 쓸데없는 논쟁이 생기는 경우도 다반사다.
조병훈의 문제의식, 학생운동권의 문제와 진보정당의 문제를 구성하는 공통된 문화적 프레임이 없다고는 보지 않는다. 내 경우는 큰 틀에서 이것들을 ‘활동가’ 주도 운동의 문제로 엮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문제는 남는다. 일단 학생운동의 문제를 훌쩍 넘어선 얘기고, 활동가들이 계속 활동하는 이유는 그들이 여전히 엘리트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운동하겠다는 후배가 없기 때문이라는 점이 있다. 누구에게도 희생을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한 내 최초의 문제의식이 기억나는가? 이런게 싫다면 말 그대로 당을 접는 수밖에 없다. 조병훈의 글에 대한 비평으로는 이쯤에서 줄이자.
학생운동권 몰락 문제와 활동가 주도 운동의 문제에 대해 개발새발 써놓은 글들이 있는데, 더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길 바란다.
2008/02/14 - [정치/분석] - 왜 학생 운동 조직은 20대로부터 멀어졌나?
2010/01/16 - [정치/정당] - [경향신문] 진보정당, 활동가의 종언
'기존 운동권'의 좌파 학생조직 출신 학생들이 각 부문에서 활동한 바에 대해서는 홍명교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과 시민단체 활동가의 차이는 무엇인가. 설마 좌파는 좌파 학생운동조직 출신이라는 등식이 홍명교의 논리 구조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정말이지 아니겠지.“ 가) 이념조직이 학교를 나와야 했고, 나) 자치조직으로서의 학생회가 더 강화되어야 했다면, 현재 학생운동의 문제는 가)는 대략 해결되었는데 나)는 전혀 길이 안 보인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에 대해서야 정치조직을 꾸렸던 학생운동권의 책임을 물을 수 있겠으나, 나)에 대해선 학생들 일반이 모두 책임져야 할 일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을 거다. 이렇게 구별하고 나면 ‘기존운동권’이란 허상을 공격할 방법은 사라진다. 적어도 기존운동권의 공과를 공격하면서 현재의 진보신당의 문제를 공격할 방법은 사라진다. 당시 학생운동조직은 스스로의 어떤 부분을 와해시켜야 할 입장에 처해 있었는데 그걸 현재의 진보신당에 투영했을 때 논의할 수 있는게 뭐냐고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홍명교, “무지한 반성이 '학생운동 위기' 지속시킨다” 비평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9078
조병훈의 글이 논리없이 스케치만 있다면, 홍명교의 글은 나름의 논리는 있는데 근거가 없다. 홍명교 글의 논리적 핵심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학생운동 몰락에 대한 조병훈의 해석은 그의 정치적 당파성과 협소한 정파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2)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실체도 없는 ‘기존 운동권’이란 대상을 호명하여 재미를 보아왔다.
3) ‘기존 운동권’이 없는 만큼 더 이상 ‘학생운동의 위기’도 없다. 십 년이 지난 ‘학생운동 위기론’을 지금 꺼내드는 거야말로 어쩌면 진보신당이 처한 진정한 위기, ‘이론적 안이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4) ‘위기’를 ‘부정적인 대상’(=운동권)이 지닌 도덕적인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
5) 조병훈이 운동권 정파의 폐쇄성을 문제삼는 이유는 뻔하다. 레닌주의가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이다.
6) 학생운동 주체들이 수많은 구조변혁을 이룩했고, 조병훈이 긍정적으로 보는 부문운동을 만들어 내왔는데, 그들의 폐쇄성을 비판하는 것은 결국 급진좌파정파에 대한 공격이 아닌가?
7) 그게 아니라면 조병훈은 어째서 진보신당 지도부의 폐쇄성을 비판하지 않는가?
8) 입당하고 선거만 하면 정치가 다인가?
이 글의 매력은 진위를 판별할 수 없는 보편적인 명제인 1)과 4) 같은 것 사이사이로 진위를 판별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명제인 2)와 3) 같은 것을 간간히 섞어서 ‘논리’를 전개하다가 불현듯 아무런 실천적 근거도 없이 5, 6) 7), 8) 같은 구체적인 단언으로 상대를 비판한다는 데에 있다. 이런 글은 그들이 평소에 읽는 사회철학자들의 글쓰기와 얼핏 보기에는 닮아 있어 멋있게는 보이겠으나, 그렇다고 그 학자들이 품고 있는 치열한 고민과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조병훈 글의 핵심적인 문제는 진보신당의 위기 문제를 학생운동의 몰락 문제로 치환해서 설명했는데, 그게 맥락에 닿는 말인지 누구도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오늘 니가 배탈난 이유는 어제 짜장면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인데, 그건 누구도 단언할 수 없는 얘기다. 여기에 대고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아니, 도대체 어제 짜장면만 먹은 게 아니라 짬뽕도 먹고 카레도 먹었고 오늘은 된장찌개도 끓여먹고 라면도 먹었는데 왜 하필 배탈이 짜장면 때문이란 거야?”라는 것이다. 그런데 홍명교는 이에 대고 근엄하게 선언한다. “문제는 짜장면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다. 짜장면을 자유주의적 방식으로 먹었기 때문이다.” 이게 3)에 해당하는 주장인데, 이쯤되면 코미디가 따로 없다.
물론 이는 ‘어쩌면’이란 부사가 보여주듯 홍명교의 핵심적인 주장은 아니다. 왜냐하면 홍명교는 조병훈의 최초의 문제의식, 그러니까 ‘진보신당의 문제’에 대해선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관심있어 하는 것은 오직 조병훈이 스케치하는 학생운동권의 몰락의 방식이며, 그 스케치 방식의 정파성이다. 그리고 그 정파성에서 그는 레닌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의 공격을 읽어낸 후, 여기서 다시 한발 더 나아가 진보신당의 문제도 여기에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그는 묻는다. “조병훈은 어째서 진보신당 지도부의 폐쇄성을 공격하지 않는가?” 물론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조병훈이 학생운동권의 부정적인 당파싸움(?)의 이미지를 현재 진보신당 진로문제를 두고 토론하는 이들에게 덧씌우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즉 조병훈의 학생운동권 비판은 진보신당 비판과 연결되어 있는 거다. 그런데 홍명교는 조병훈이 진보신당 지도부는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파적이라고 한다.(7) 좀 핀트가 어긋나 있다. 만일 조병훈이 진보신당 지도부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그건 조병훈이 왕년의 학생정치조직 활동가에 해당하는 위인이 진보신당 내부에서 다른 인물군에 비교된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정파성의 발현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조병훈이 진보신당 문제를 도외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어서 홍명교는 조병훈이 진보신당 문제를 얘기하려다 제대로 쓰는데 실패한 저 한편의 글만을 보고 “8) 입당하고 선거만 하면 정치가 다인가?”라고 묻는다. 좀 황당한 일이다. 글 한편만 보면 상대편에 대한 사상검증이 끝나는가?
홍명교의 주장 중에서 가장 올바른 것은 “4) ‘위기’를 ‘부정적인 대상’(=운동권)이 지닌 도덕적인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이건 어디다 갖다 붙여도 올바른 말이다. 만일 조병훈이 도덕주의적 비판을 한 것이라면, 조병훈은 옳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큰 문제는 조병훈이 도덕주의적 비판을 했는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조병훈은 정파 활동가 중심 학생운동의 구조적 협소함이 극복되었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던 것이 학생운동권 몰락의 원인이라 보는 것 같다. 이런 그의 시각은 ‘정파 소속 몇몇 활동가’의 성찰과 반성이 중요했다는 ‘도덕주의 비평’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적어도 다른 방식으로 전유하는 것이 가능하다. 애초에 구조의 문제를 지적했던 만큼 구조적 접근도 가능한 것이다.
이를테면 조병훈이 글에서 “그래서 학생운동권은 몇 명이 말아먹었고, 지금 진보신당도 지도부 몇 명이 말아먹었다.”고 선언했다면, 이건 구조적인 문제를 몇 몇 인자들의 도덕성 문제로 치환하는 도덕성 비판이다. 그런데 홍명교는 조병훈이 바로 그런 짓을 안 했다고 비판한바 있다(6). 어안이 벙벙하다.
그러면서 홍명교는 조병훈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이에 반해 진보신당의 20대 당원들께서는 자기 생활공간에서 얼마나 대중들을 열심히 만났는지 되묻고 싶다.” 이렇게 물으면 안 된다는 걸 아니까 저렇게 덧붙인다. “결국 나는 지금 다소 무리해서 위악적으로나마 ‘도덕주의적으로’ 묻는 것인데, 우리의 이런 질문은 끝이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끝이 없는 질문을 던진 건 외려 조병훈이 아니라 홍명교다. 사실인즉 홍명교가 그 위악성을 발휘하고 싶었기 때문에 조병훈의 주장은 도덕주의적인 것이 되어야 했던 거다.
홍명교는 “우리 운동권들은 구조적 변혁도 많이 했고, 그 후 생긴 부문운동들 여러 가지도 사실 우리 운동권들이 만든 거다.”라고 얘기한다.(6) 스스로 문제를 도덕적인 차원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문제를 그렇게 바꾸면 운동권이 운동권 이후 세대들에게 꿇릴 것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도 그거 안다. 근데 지금 그게 논점은 아니다.
전후맥락을 따져볼 때, “홍명교는 조병훈의 주장을 ‘도덕적 비평’으로 보아야만 했다”고 설명하는 게 올바른 일일게다. 왜냐하면 자신의 글의 구도를 이미 그렇게 짜놓았으므로. 아마도 본인의 경험 때문에. 그 심정 이해한다. 십 년동안 운동권이 동네북이었는데 한번쯤 팩 성질을 부릴 때도 됐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운동권을 만나보지도 못한 친구들이 ‘운동권 방식의 폐해’를 천연덕스럽게 논하는 세상에선 더 그렇다. 정파들 다 망하고 학교에 입학한 친구들이 어느 정파의 활동가를 자칭하는 세상에선 더 그렇다. 그렇긴 한데, 우리는 바로 그런 의미없는 ‘팩’을 볼 때 개인의 트라우마를 상상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런 식의 비난은 아예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조병훈씨 개인의 트라우마만 상상하게 할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건 홍명교에게 되돌려주어야 할 말인 것이다.
운동권이 구조적 변혁도 많이 했고 부문운동을 만들어냈다는 얘기는 도덕주의적 비평의 세계에선 의미가 지대하다. 그렇지만 다른 영역으로 넘어오면 별로 그렇지 않다. 상대편 논자는 “구조적 변혁을 많이 했지만 실패했잖아.”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부문운동 영역으로 넘어온 순간 그는 운동권의 조직논리가 아니라 부문운동의 방식에 적응하게 된 것이므로 얘기가 다르다.”고 하면 그만이다. 논리적으로만 본다면 그렇다. 실제로 조병훈은 이렇게 반론한다.
“대세를 잡고 있던 NL학생회 그룹이 폐쇄적으로 지도부를 지키는 선택을 했던 반면, 90년대 좌파학생조직은 홍명교의 말처럼 수 차례 자기 내부의 구조변혁을 통해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위하여' 진화했고, 더 많은 현장으로 진출했다.
이런 문제에 대해 반론하려면 조병훈이 학생운동을 대함에 있어 정치운동과 자치운동도 구별하지 않고 뭉뚱그려 논하고 있다는 점을 말해야 한다. 조병훈은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모른다. “90년대 좌파학생조직은 홍명교의 말처럼 수 차례 자기 내부의 구조변혁을 통해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위하여' 진화했고, 더 많은 현장으로 진출했다.”라고 스스로 말하지 않았나. 그말인즉슨 결국 학생운동조직이 스스로를 해산한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다는 거다. 그런데 조병훈은 지금 자기 논리구조 속에서도 올바른 그 선택의 결과를 보고 학생운동권이 망했다고 시비를 걸고 있다. 더 나아가 진보신당이 그것들이 망한 방식으로 운영된다고 시비를 걸고 있다.
하지만 홍명교는 조병훈의 비논리를 적시하지 못한다. 그러지 않고 그저 자신의 논리구조를 근거없이 나열하는데 급급할 뿐이다. 조병훈은 자유주의자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자여야 하니까! 홍명교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조병훈이 기존 운동권정파의 폐쇄성을 문제삼는 이유는 레닌주의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6) 이로써 홍명교는, 기존의 운동권 정파 중에 유독 레닌주의 정파만 폐쇄적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책임을 지게 된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사실 운동권 정파들의 조직원리는 다들 비슷비슷했다. 그 조직원리만 보고 그게 수령론의 반영인지 혹은 민주집중제의 반영인지를 감별하는 것은 경험자들에게 가능했던 일인지는 모르나, 오늘에 와서 중점적으로 논의할 문제는 아니다. 무엇보다 조병훈은 뭉뚱그려 운동권을 논했던 바, 차라리 어떤 이념도 공격하지 않고 이념집단 자체에 대한 혐오감을 보이고 있다고 공격했다면 더 맥락이 닿았을 것이다. 조병훈이 하필 레닌주의나 급진좌파 정파만 젓가락으로 골라내어 비평했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나?
홍명교의 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학생운동나 진보신당의 문제도 아니고, 조병훈의 비논리나 논리도 아니며, 한국 사회의 현실은 더더욱이나 아니다. 그저 그가 읽고 학습했을 텍스트들의 흔적과 편린일 뿐이다. 레닌을 열심히 읽고 논쟁의 현장에 뛰어들면 왠지 상대방이 '좌익소아병' 환자처럼 보이고, 지젝을 열심히 읽고 비평을 시작하면 왠지 삼라만상의 문제가 '자유주의자' 탓처럼 보일 것이다. 우리 그러지 말자. TV에 나오는 요리사가 하는 그대로 칼질하지 말고, 우리가 잡고 있는 생선이 광어인지 우럭인지 아니면 도다리인지 정도는 확인하도록 하자.
양승훈, “20대, 좌파, 학벌 그리고 돈” 비평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9123
이 글은 장황하고, 산만하며, 핵심이 없다. 이 글은 서두에 조병훈과 홍명교의 논쟁을 자유주의와 혁명적 맑스주의자의 대립으로 묘사하는데, 그건 조병훈의 운동권 조직 비판이 레닌주의 혹은 급진좌파정파 비판이라는 홍명교의 오도된 인식을 추인하는 것이다. 뒤이어 제시되는 문제는 ‘학벌’과 ‘돈’ 문제다. 말하자면 이렇게 투닥투닥대는 ‘운동권 정파 전쟁’(이 논쟁을 그렇게 정리하는 것 자체가 홍명교의 오류를 답습하는 얘기란 점은 이미 지적했다.)들이 ‘학벌’과 ‘돈’을 갖춘 ‘그들만의 리그’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인데, 맞는 얘기이긴 하지만, 이 논쟁 중에 튀어나와야 할 얘기인지는 모르겠다. 저 얘기를 좀 더 갈고닦아 이 논쟁에 개입한다면, “학생운동은 망한게 아니라 처음부터 유의미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이건 꽤나 재미있는 테제이긴 한데, 이 작업의 결말은 조병훈의 애초의 비평의 전제를 허무는 것이다. 물론 양승훈은 그런 일을 하진 않았다.
‘돈’ 문제 나왔으니 정리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다. 90년대 이후 학생정치조직이 스스로의 존재 이유에 대해 물음을 던졌고 ‘학생정치조직 해체’라는 주장까지 운위되었음은 이미 지적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학생운동권 몰락’과 ‘진보신당 위기’를 두루뭉실하게 포개놓는 조병훈 비평의 전제가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이런 맥락은 학생운동에 고유한 맥락이고, 곧바로 진보신당의 위기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맥락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몰락을 고민하고 있었던 섹터 얘기는 지금의 진보신당 문제와 관련이 없다. 우리가 지금 “진보정당 운동은 끝났으니 다 접고 민주당 안으로 집단입당해서 하나의 분파를 결성하자!”는 ‘주대환 테제’를 따를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확인해야 할 문제. 그러면 왜 학생정치조직들은 학생회 활동에 대한 확신이 없었으면서도 계속 탈정치화를 수반하면서도 학생회 선거에 개입했을까? 정답: 당선되면 돈이 나오니까. 돈 얘기 -끗-. 아마 홍명교가 본인의 글에서 하고 싶었던 얘기도 이런 문제였던 것 같은데, 이런 사정 역시 진보정당 운동에 대입할 수 없는 맥락인 건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진보신당더러 선거에 나오지 말고 현장으로 가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현장으로 가긴 가야 하지만, 선거에 안 나오는 건 정당조직으로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가 되니 말이다. 그런 얘기를 하려면 사노련이 되었든 노힘이 되었든 정당조직을 의도하지 않는 그런 쪽 단체들을 고민해야겠지.
홍명교, “내가 비판한 건 유령이 아니다” 비평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9156
이후로는 자신의 견해를 반복하는 드잡이질이 되어버려서 크게 문제삼을 부분들은 없는데, 홍명교의 이 글에선 몇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첫째는 ‘자유주의’라는 말의 오용에 대해서다. 홍명교는 ‘자유주의’적 원칙이 확립된 세상에서 탄생한 정치평론의 잣대를 그대로 들여와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것들을 ‘자유주의’라고 칭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지금 “한국 사회는 자유주의도 확립이 안 되었으니 일단 자유주의를 위해서 싸우자.”는 식의 단계론을 설파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계론을 설파하지 않더라도 있는 건 있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한국 사회의 경우 사회 전반적으로는 ‘자유주의’가 과소하되, 운동 진영의 일각에선 ‘자유주의’가 과도하게 실현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가령 스스로 좌파라 칭하는 이들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요구’보다 ‘표현의 자유’를 훨씬 더 중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현실사회주의의 전체주의적 오류에 대한 좌파들의 지나친 반성이 가져온 역편향일 수도 있겠고 한국 사회의 ‘미국화’의 한 단면일 수도 있겠다. 이런 부분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냥 모든 것을 자유주의라 얘기해버리면 진보신당에게 선거에 나오지 마라고 요구하는 저치들의 요구도 ‘자유주의적’인 것이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자유주의적 비평은 주류 기득권에 맞서 싸울 때 훌륭한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자칫 낙인을 찍는듯한 ‘자유주의’ 놀이가 “자유주의의 모든 것에 반대하지도 않으면서도 자신을 제외한 모든 정파를 자유주의자라 호명하는” 코미디로 전락할까 두렵다.
둘째는 ‘실용적 독해’에 대한 비판에 대한 것이다. 담론에 대한 이론적 독해와 실용적 독해가 따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존재하는 것은 이론의 함의에 대한 정확한 숙지와 그 이론이 적용될 사회문제의 맥락에 대한 면밀한 파악이다. 논쟁이 어그러지는 이유는 그저 이 두 가지가 파탄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지 누구는 실용적 독해를 하고 누구는 정치적 독해를 제대로 하기 때문은 아니다. 홍명교에게만 하는 말은 아니고 이 글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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