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다큐'에 해당되는 글 7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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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유 (4) 2008/03/12
- 상상마당 2008/03/11
- 행사는 끝나고 (2) 2007/12/20
- 대선 관련 스크랩 2007/12/17
- 12월 17일 저녁7시 2007/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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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난방 상영회 후기 (1) 2006/08/24
- 방영취소 1주년 기념 (9) 2006/08/24
- 출연자, 스탭, 도움주신 분들 (8) 2006/08/22
- 영화 스틸 2006/08/22
- (15) 기억하겠습니다 (6) 2006/08/03
<돌 속에 갇힌 말>은 독립영화 웹스토어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위 사이트에서 <돌 속에 갇힌 말> 소개
http://shop.kifv.org/product/detail.html?shop_idx=125568196653
이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제작진과 만나서 1987년 상황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거나
인터뷰 촬영에 응하셨거나
자료를 제공하셨거나
조언을 주셨던 분들 중에서
혹시 DVD 가 필요하신 분은
언제든 연락주세요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docunaru @ 쥐메일 닷 컴
*이 포스팅을 3월 19일까지 맨 앞으로 올립니다
[돌 속에 갇힌 말], 오랜만에 상영합니다
푸석푸석한 영화 하나로 너무 오래 울궈먹지요? : )
'치유'라는 말은
제 일에서도 일상에서도 중요한 주제입니다
아픈 일을 겪은 여성들, 혹은 아이와 함께 영화를 보거나 만들면서
서로 속내를 털어놓고 치유할 수 있는 작업을 꼭 하고 싶거든요
언젠가는 뜻이 맞는 분들과 같이 그런 일도 해보고 싶습니다
이번 기획전에서 상영할 기회를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상영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좀 놀랐습니다
김동원, 김소영, 변영주, 여성영상집단 움 등 여러 분들이 직접 오셔서
워크샵도 하시고 이미 알려진 좋은 작품들도 다시 상영합니다
'역사와 치유'라는 주제를 놓고 좋은 이야기 많이 나누셨으면 합니다
멀리 있다는 핑계로 그 자리에 참여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다녀오신 분들은 후기 좀 올려주세요,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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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역사와 치유
기획상영전 : 3월 6일~19일
돌속에갇힌말 - 3월 7일 13:00
3월 11일 15:00
3월 19일 11:00
장소 : KT&G 상상마당 홍대앞
문의 : 한국예술종합학교 AT클리닉랩(02-746-9570)
다시 읽어봐도 입에 착 붙지 않는 말들
여전히 알맹이를 찾지 못해 겉돌고 있다.
겨우 이만큼 정리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다큐, 역사와 치유]기획전을 위해 월요일에 쓴 글
19일날 자료집에 실린다고 하는데 전문을 다 실어주실지는 모르겠다
쓰고나니 생각보다 길어졌지만 이미 약속한 날짜를 넘긴 터라 줄이지도 못했다
* * *
스스로, 그리고 더불어 치유하기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본다는 것
나루 (다큐멘터리 감독, 구성작가)
1. '돌 속에 갇힌 말'을 만들기까지
아버지는 잠꼬대가 심한 편이었다.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지만, 깊이 잠든 채로 찬송가를 2절까지 부르거나 옆에 누가 있는 것처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곤 했다. 발음이 정확했고, 한 시간 가까이 계속되는 경우도 있어서, 어쩌다 그런 모습을 발견하면 엄마와 나는 소리를 죽여 웃곤 했는데 내게도 그런 버릇이 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어릴 땐 기껏해야 꿈에 뱀이 나와서 소리를 지른다거나,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것에 불과했지만, 스무 살 이후부터 같은 방을 쓰던 친구가 들려준 내 잠꼬대는 예사롭지 않았다.
'때리지 마' 라거나 '내가 사람을 밟았어'라고 하거나 '안돼, 안돼'라는 말을 반복한다고 했다. 몸을 심하게 뒤척이면서 누군가를 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누가 머리를 내리찍기라도 하는 듯 두 팔로 감싼 채 완전히 웅크린 자세로 끙끙 앓는다는 것이다. 방 친구는 여러 번 바뀌었지만 내 잠꼬대는 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 서서히 없어지겠거니 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몸이 많이 피곤하거나 스트레스가 심한 날에는 어김없이 잠꼬대가 이어졌다.
어떤 악몽은 깨고 난 뒤에도 생생하게 기억나지만, 또 어떤 악몽은 나를 보호하느라 전혀 기억나지 않기도 한다. 그 잠꼬대를 불러온 나쁜 꿈은 매번 저절로 지워졌고, 덕분에 무서운 장면을 아침에 되풀이하지 않아서 좋았지만 늘 불안했다. 잊을만하면 되살아나는 그 꿈, 그 잠꼬대의 원인을 스스로 직면해야만 한다는 것이 숙제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식구들이나 친구들에게 자세히 말할 수 없었을 뿐,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87년 12월 16일, 그 날 내가 보고 겪은 것이 내 몸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말이다.
87년에 다녔던 대학을 중퇴하고 다른 대학에 다시 입학하게 되었을 때, 소설을 전공하게 된 나는 그 일을 글로 쓰고 싶었다.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죄명을 붙여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킨 사례는 너무 많았다. 단지 집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그 집회에 참가했다는 것만으로도 공권력을 휘둘러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굳이 그 일이 아니더라도 책으로 엮어 발표했거나 앞으로 책으로 써야할 사건들이 쌓이고 쌓인 시대를 살고 있었다. 그러나 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구로구청에서 일어났던 일에 관한 책은 찾기 힘들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단체의 활동가도 아니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통해 이름을 알린 사람도 아닌 나,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의 신입생이었던 나의 시선으로 그 일을 기록하고 싶었다. 그런데 말로 표현하지 못한 기억은 글이 되는 것도 거부했다.
93년 가을부터 구성작가로 일하면서 가끔 사석에서 그 날 있었던 사건에 대해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 묻곤 했다. 내가 거기에 있었다는 말은 못하기도 하고, 지나가는 말로 잠시 언급하기도 했지만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었다. 방송사의 심의에 걸리지 않겠나,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겠나, 그런 사건에 대해 일반 시청자들이 관심을 가지겠나...여러 가지 어려움을 거론하며 그 사건을 영상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999년 여름, 나는 비디오카메라 한 대를 구입했다. 그 해 겨울, 한겨레문화센터에서 비디오 촬영과 편집에 관한 강좌를 들었다. 직접 카메라를 들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까지 너무 먼 길을 돌아왔던 것이다.
2. '돌 속에 갇힌 말'을 만드는 동안
내 기획 의도는 87년 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였다는 점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구로구청에서 농성을 했던 사람들이 가진 상처를 돌아보자는 것이었다. 87년 12월 16일 오전, 선거를 한창 진행하던 시각,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투표함을 우송했던 트럭이 있었고 그 앞을 막고 해명을 요구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납득할 수 없는 변명으로 일관하다가 거센 비난만 받고 끝내 침묵했다. 선거에 참여하러 왔던 주민들과 사건 소식을 듣고 달려온 공정선거감시단원들,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농성을 시작했다. 그 날 거기 있었던 사람들,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던 사람들, 우리끼리라도 속을 털어놓고 그 일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한번 이야기해보자는 것이 직접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된 동기였다.
농성 이틀째 되던 날 구로구청에 들어가서 진압될 때까지 있다가 연행되었던 것이 내 경험의 전부였지만, 그런 나도 두고두고 그 장면들을 잊지 못하는데,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더 아프게 후유증을 겪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여전히 공권력의 횡포가 사라지지 않은 이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을까. 만약 그 사람들이 건강하지 못하다면, 먹고 사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어려울 만큼 힘들다면, 육신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다쳤다면 그 상처는 누가 어떻게 달래야하나. 그런 마음으로 보이지 않는 길을 더듬어 어렵게 만난 사람들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말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했다. 술에 만취해서 카메라를 거부하던 한 사람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들로 하여금 말문을 막고 있는 걸까.
당시 민심은 노태우에게 기울어 있었다. 평화민주당이나 통일민주당에서 선거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주민들을 선동해서 벌어진 일이다, 우발적인 농성이었고 그래서 처절하게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그 일을 다시 이야기한다고 해서 선거 결과가 바뀌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카메라를 들고 만난 사람들은 내 기획의도에 관심이 없었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차라리 박정희 정권 이후부터 지금까지 의문사한 사람들, 노동현장에서 군대에 이르기까지 옳은 일을 하다가 소리 없이 끌려가서 주검으로 돌아온 사람들에 관한 영화를 만들라고 했다. 그 일 이후 돌아가신 분들 중에서 대통령이 될 만한 인재가 있었는데 그 분에 대한 추모영상이나 만들어 달라고도 했다. 답답했다. 대화는 불가능해보였다.
농성에 참여한 인원이 만 명에 가까웠고 연행된 사람들만 이천 명이 넘었다. 과연 사람이 죽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고 사라졌을까, 그런 의문을 개인이 밝혀내긴 어렵지만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을 몇 명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 일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같이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람을 찾는 일도, 만나는 일도, 만나서 그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 일로 인해 장애인이 된 사람, 안기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겪어야 했던 사람, 감옥에서 큰 병을 얻어 결국 세상을 떠난 사람.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혹은 조직활동 자체에 회의를 느껴 숨어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10년 이상 찾아가지 못했던 구로구청 앞을 날마다 배회했다. 산책 나온 주민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대기도 했고, 수퍼마켓이나 복덕방 문을 열고 들어가 기억나는 것이 있으면 들려달라고 통사정을 하기도 했다. 한번 거절당하더라도 몇 번이고 다시 찾아갔고, 일단 연락이 닿은 사람들에게는 거듭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부탁했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 그 작업을 하느라 하던 일을 완전히 그만두어야 했고, 조그만 사무실을 열어 오로지 사람을 찾고 만나는 일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어떤 일이건 어느 곳에건 진심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덜 익은 진심은 그 사람들로 인해 조금 더 성숙한다. 그 지난한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에 내가 시작한 일이 엉뚱한 짓이 아니라는 위로를 받았고, 진작에 시도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은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느꼈다. 가장 중요한 건, 같이 한숨 쉬고 같이 기억을 더듬으며 같이 눈물 흘릴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 한 구석에 맺혀있던 응어리가 치유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가 겪었던 그 일이 '지우고 싶은 잔인한 기억, 떠올리기 싫은 지루한 악몽'으로만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 일은 이 사회가 지속적으로 행하고 있는 다양한 폭력 중 한 가지였을 뿐이며, 그런 일이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앞으로 함께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3. '돌 속에 갇힌 말'을 만들고 나서
증언을 수집하는 것과 영화를 만드는 것은 다르다. 누구든 카메라를 들 수 있고 인터뷰를 할 수 있지만, 그 결과물로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완성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영화는 논문이나 소설과 달라서, 각주나 세부묘사 없이 화면에 보이는 영상만으로 관객들에게 주제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주요소재가 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처음 접하는 사람들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세밀한 장치를 계산해서 편집과 수정을 거듭해야하는 전문적인 작업이다. 적절한 훈련도 없이, 논리정연하게 구성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단지 이러다가 이 세상에 대한 불신을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다급한 마음 하나로, 구성작가로 일했던 이력만 믿고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후회했다.
타고난 기계치였던 나는 컴퓨터를 만지면서 시행착오를 되풀이했다. 불쑥 나타난 나를 믿고 많은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여러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완성을 하고 싶었다. 성인들 뿐만 아니라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거리에서 독재타도를 외쳤던 87년, 그렇게 해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가 왜 노태우를 당선시켰는지도 궁금했고, 그 이후 이 사회가 과연 얼마나 민주화되었는지도 묻고 싶었다. 누군가는 그 날 그 일에 관해 말해야 한다고, 다같이 힘없고 겁많은 사람들이었지만 같이 힘을 모아 외쳤던 생각은 지금도 의미가 있지 않냐고, 우리가 틀려서 맥없이 진 게 아니라 국가권력의 힘이 너무 강했던 거라고. 혼자 중얼중얼 묻고 대답하면서 인터뷰를 조금씩 이어붙일 수 있었다.
편집을 하는 과정은 과거를 되짚는 시간이었다. 스무 살부터 지금까지 숙제처럼 놓여있던 그 날에 관해, 촬영하는 내내 자료를 찾아 사람을 찾아 서울부터 부산까지 헤매고 다녔던 몇 년에 관해,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일이었다. 왜, 무엇 때문에, 어떻게 우리는 아픈가. 이런 상처는 우리들만의 것인가. 비슷한 상처를 가진 다른 많은 사람들과 같이 한 번 더 서로 힘이 될 수는 없을까. 지쳐서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카메라 앞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후원금을 기꺼이 내주고 스텝으로 자원활동했던 여러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5년 만에 완성한 '돌 속에 갇힌 말'은 내 기획의도와 달라 보였고, 영화라고 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너무 많았다. 관객들 앞에 나서기가 두려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관객과의 대화는 내게 큰 힘이 되었다. 인터뷰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기억의 조각들을 맞추어보고 상처를 공감하게 되었다면, 상영을 마치고 나눈 대화는 치유의 다음 단계였다. 인권과 국가폭력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더듬거리는 감독의 메시지를 감독의 의도보다 더 명쾌하게 정리해준 사람들, 영화 속에 드러난 문제점과 모호한 주제를 구체적으로 지적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말문이 트였다. 몇 번이고 다시 진압 장면을 바라봐야하는 것과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던 맨 마지막 장면을 들어야하는 것이 낯뜨거웠지만, 대화를 거듭하다 계단이나 패쇄된 공간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덜어낼 수 있었다.
4. 두 번째 영화를 준비하며
2004년 10월, 인디다큐페스티벌에서 처음 관객을 만난 이후, 상영을 거듭할수록 화면에서 점점 더 많은 문제점이 보다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해서 사람들 앞에 나서기가 부끄러웠다. 좀 더 당당한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일을 계속 하고 싶었고, 계속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두 번째 작업을 기획했고 이번 주제는 '민중문화운동을 했던 네 여성이 오늘을 살아가는 방법, 그들이 꿈꾸는 미래'로 잡았다.
80년대 당시 민중가요와 마당극을 중심으로 대학가와 작업장에서 활발하게 전개했던 문화운동은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앞장서서 싸운 민주화운동세력의 주역이었지만, 그 안에도 성차별은 존재했다. 공연에서는 주인공이 될 수 있지만 단체 안에서는 늘 보조적인 역할을 맡아야 했던 여성들이 있었다. 그들은 군대를 제대한 남자선배들보다 더 권위적인 모습으로 변하기도 했고, 너무 여성적인 외양을 지녔다는 이유로 중요한 일거리에서 배제되기도 했으며, 연애와 결혼을 거치면서 가족을 돌보는 일에만 몰두해야 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20년,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여전히 살아남은 그 현장에서 여성들은 건강한가, 살만 한가, 행복한가 묻고 싶었다.
잊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는 많고, 독립운동 투사들과 빨치산 전사들의 삶을 다룬 영화도 많았지만, 80년대 이후 지금까지 한국현대사의 한 대목을 차지하는 그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어쩌면 '돌 속에 갇힌 말'보다 더 절박한 이야기가 그 속에 숨어 있을지도 몰랐다. 외면한 것이 있다면 다시 들여다 봐야하고, 소외시켰던 적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도 내 첫 번째 작업과 마찬가지로, 맺혔던 것을 풀어내고 답답했던 가슴과 머리를 서로 쓰다듬어 주는 과정이 되기를 바랬다.
두 번째 작업도 생각만큼 잘 풀리지는 않았다. 출연자들과 나 사이에서 독립영화에 대한 소통이 부족했고, 그들을 만나는 내 태도와 나를 만나는 그들의 시선 사이에서 메우지 못하는 거리감이 있었다. 출연자들과 감독이 가까워진다는 건, 어떤 사람과 내가 친구가 되기 위해서 다가가는 과정과는 달랐다. 어쩌다 우연히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주인공이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연락했고, 그들은 갑자기 일상에 뛰어든 카메라에 적응해야만 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들이 빛나던 시절로 기억하는 과거와 실제로는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고통과 위기로 기록되어 있는 객관적인 시점의 과거 사이, 피곤하지만 뿌듯하고 넉넉하진 않지만 대안을 찾아가고 있다고 믿는 그들의 현재와 그 길을 벗어난 어떤 이들이 직장과 가정에서 안정을 얻는 동안 제3자가 보기에 그들은 점점 궁핍해질 뿐인 현재 사이 , 그 어긋난 과거와 현재, 주인공과 제3자의 시선 사이를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는 고리가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두 번째 작업에서 부딪힌 여러 가지 벽은 내가 뛰어넘지 못할 만큼 높고 두터웠다. 일단 물러서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지난 일 년 동안 나는 한국을 떠나 이방인으로 살았다. 여행이 길어졌다. 귀국을 한 달 앞둔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물러섰던 것도 나를 치유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서둘렀던 것이다. 겉으로는 이제 시작이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이제 나도 뭔가 보여줄 수 있다는 지나친 자신감을 가졌던 건 아닌가. 촬영이나 편집기술도 늘었고, 다큐멘터리가 뭔지도 어느 정도 알았으니 찍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건 아닌가. 맨 처음 카메라를 사고 컴퓨터를 만지면서 완성만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그 때의 나는 어디로 갔나.
이번 작업에서 나는 당사자가 아니라 관찰자다. 질문하기 전에 먼저 듣고, 판단하기 전에 먼저 공감하면서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그림자까지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을 먼저 정해놓고 만났기에 그 거리감도 벽도 모두 내가 쌓은 것이다. 돌아가면 다시 만나야지. 서로 아픈 곳을 쓰다듬는 마음으로 만나서, 그들이 마무리하고 싶다고 할 때 욕심 부리지 말고 마쳐야겠다.
만들기 전부터 만든 이후까지 끊임없이 세상에 대해, 관계에 대해, 고통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다큐멘터리가 좋다. 제작비도 인력도 장비도 늘 부족하지만 주류 언론이나 유명한 영화제작사에서 하지 못하는 작업을 독립다큐멘터리 감독들이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과 보는 사람들이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사는 내내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치유하는 존재로 관계맺기를 바란다. 이 슬프고 아픈 세상에서 토닥토닥 등 두드려주는 친구처럼 좀 더 따뜻하고 희망이 담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
[다큐, 역사와 치유]에 관련된 글
상상마당이란 곳은 가본 적 없다
홈페이지도 오늘 처음 방문
입장료가 오천원이었구나
유료상영이란 건 알았는데 요금은 방금 알았다
*[역사와 치유]관련 페이지 - 상상마당
엇, 근데...가운데 있는 영화의 제목이...제목이...T.T
상영하면서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내 기억으론 세번째? 아니, 네번째?
오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니까
심지어 감독이라는 인간도 가끔 저러므로 오늘은 댓글 안달고 패스
근데 저렇게 써도 한글 문법에는 맞나?
[12월 17일 저녁 7시]에 관련된 글
촬영은 재영씨가 잘 했을 것이고
행사도 진지한 분위기에서 소박하게 잘 진행되었다고 한다
아무 것도 보태지 못하고 멀리서 이런 저런 잔소리만 전한 것이
두고 두고 맘에 걸릴 것이다
이번 일을 준비하신 분들이 [돌속에갇힌말] 디비디를 판매해주셨는데
계좌번호를 물어보시길래 '온라인 실명제'에 반대했던 사이트가 여럿 있으니
동지회 이름으로 후원하자고 말씀드렸다
서울에 계신 분들이 의논해서 잘 결정하시리라고 믿는다
선거결과는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극적인 반전 같은 것은, 기적이라는 것은
하루하루를 마지막날처럼 첫날처럼 살아왔던 사람들
기적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사람들에게만 찾아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들에게조차도 평생에 한번 올까 말까한 것이
반전이고 기적이었다
있는 힘을 다해 선거운동을 했지만 너무 참담한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선거에 무관심했던 사람들이나 의견을 달리했던 사람들을
아무리 원망한다고 해도 결과를 돌이킬 수 없다
지금까지 하려고 했으나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일,
앞으로 해야할 일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마음을 다지는 수 밖에 없다
대선을 전후해서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지인들,
그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몇 안되는 손을 모아 눈물로 치러낸 구로항쟁 동지회 여러분께
말없이 악수를 청하고 싶다
부디 건강하시길
살아가야할 날들이 여전히 길고 멀다
*참세상 (2007)
방법이 어찌되든 민주개혁세력 단일화하라 - 11. 19
지지선언 봇물 속, 문화예술인 '명의도용'? - 12. 5
유명연예인 38명, 이명박 지지 - 12. 6
'정-문' 단일화 무산, 재야세력 '문'에 격분 - 12.8
한국노총, 이명박 지지 - 12. 10
백무산 시인, 문국현 지지 선언 - 12.13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 이명박 지지 선언 - 12. 13
한국노총 조합 1천명, 이명박 지지 공개거부 - 12.14
재야 원로 34명 결국 정동영 지지 - 12.17
슬픔도 분노도 없이 담담하게 기억하기 위해서
틈날 때 마다 조금씩 스크랩 덧붙이기
이 글은 2007/12/13 02:29:35에 등록했고
행사 당일까지 블로그 첫 페이지에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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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부정선거항의투쟁’ 사건 20주년 기념행사
일 시 : 12월17일 (월) 19:00
장 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정동배제빌딩b동)
주 최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 관 : 구로항쟁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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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아주고 싶지 않은 사람은 점점 명확해지고
뽑아주고 싶은 사람은 드문 지금
선거 똑바로 하자는 이야기를 하실 듯 합니다
시간나시면 꼭 가보세요
가고 싶은데 가지 못하는 이 마음...
그리고 긴급제안있습니다
이 날 촬영해주실 분?
메일 보내주세요
수고비는 제가 드릴께요
*
촬영은 푸른영상의 재영님이 맡아주셨습니다
메일 보내주시고 같이 의논하신 모든 분께 감사드려요
[12월 17일 저녁 7시] 에 관련된 글.
20주년 행사를 준비하는 분들이 온라인 카페를 만드셨다는 건 알았는데
행사에서 상영할 영상물이 공개되고 있다는 걸 나중에 알고 당황했다
공개된 영상물을 확인해보니 타이틀은 행사에 맞게 수정되어있고
영화에 깔려있던 음악은 다른 음악으로 교체되었으며
영상물의 맨앞에도 맨뒤에도 이 영상물의 출처를 알리는 자막은 없었다
주최측에서 촬영, 삽입한 인터뷰 장면이 영화 사이에 들어가 있고
이 인터뷰에서 사용한 자막이 [돌속...]과 똑같이 디자인되어서
이것이 행사를 위해 추가한 장면인지 원래 영화에 있던 장면인지도 구분할 수 없다
급히 인터넷폰으로 전화를 드려서 일단 내려주십사 부탁을 드리긴 했는데
이런 일을 겪으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할 지 속이 탄다
[돌속에갇힌말]이 필요하다면 누구든 언제든 상영할 수 있다
영화에 출연한 분들이나 이 영화에 담긴 사건에 관련된 분들이 필요하다면
길이를 줄이고 다른 장면을 덧붙여 재편집을 한다고 해도 좋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좋다
상영장비가 노트북이건 TV와 비디오플레이어건 빔프로젝터건 상관없다
그러나 반드시 제작진과 사전논의가 필요하다
행사장에서 재편집한 영상물을 상영하는 것과 온라인으로 영상을 공개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공개하기 전에 서로 합의해야할 부분이 있을 것이다.
독립다큐멘터리, 혹은 영상활동가들의 영상물을 사용하려고 할 때
'쓰고 싶은 사람이 마음대로 활용해도 되는 영상'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한다
그 영화에 출연해서 속 이야기를 털어놓기까지 수없이 망서렸을 사람들의 인권과
감독 이외에도 후원자로 스탭으로 자료제공으로 힘을 보탠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음악도 자막도 녹음도 각각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창작한 결과물이라는 것까지 생각하면
영상물에 관련된 그 누구도 마음을 다치거나 피해를 입지 않도록 세심해야한다
조금만 더 신중하게, 그래야 이번 행사가 더 빛이 나지 않을까
올해 12월, 구로항쟁 2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다
대선을 앞둔 현재 지지율 1, 2위를 다투는 후보들은 당선 이후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괴롭고, 남은 후보들 가운데서도 표를 주고 싶은 사람이 없다. 후보 단일화는 말도 안되고, 그렇다고 선거를 무시할 수는 없고 먼 곳에 있는 나도 답답한데 다들 얼마나 속을 끓이고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몇 몇 뜻있는 분들이 20년전 대통령 선거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구로항쟁을 되짚어보는 일은, 87년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대선에 관해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과거, 현재, 미래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그 행사에서 [돌 속에 갇힌 말]을 30-40분 분량으로 재편집해서 상영하고 싶다는 것과 행사에 필요한 자금마련을 위해 홍보용 시디를 제작하고 싶다는 메일을 받았다.
도난사건을 매듭짓는 과정에 있다보니 결론을 내리는 데 며칠 시간이 필요했다. 결론은, 행사를 준비하게된 배경에 대해 공감하지만 재편집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행사장에서는 이 분들이 취합한 자료테잎으로 만든 다른 영상물이 활용될 것이다.
[돌속]에 넣은 당시 자료화면들은 구로항쟁 동지회에서 제작한 테잎에서 주로 발췌했으니 어설픈 다큐멘터리를 재편집하는 것보다는 원래 자료를 활용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행사는 날짜와 장소가 확정되면 다시 공지하기로 하고...
연락을 주신 분은 몇 년전 흔쾌히 인터뷰에 응하셔서 영화에도 출연했고, 중요한 자료테잎을 건네주셨던 분이기도 해서 이번 기회에 나도 힘을 보태고 싶었다. '구로항쟁 동지회'는 92년 이후 완전히 해소된 모임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그 이름으로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는 것도 반가운 일이었다.
직접 선거에 참여할 수도 없고 대선에 관한 영상활동도 할 수 없는 지금 이미 만들어진 영화를 가지고 이런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면 기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당시 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패배감이나 좌절감을 조금이라도 덜수 있고 여전히 해답이 나오지 않은 몇 가지 의혹의 실마리를 푸는 기회가 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나는 참여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을까.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걱정되는 세가지 문제가 있었다는 점이다. 준비하시는 분들과 내가 직접 만나서 의논할 수 없는 상황인 점, 행사의 취지에 맞게 재구성한 영상물에 출연자들의 이름과 얼굴이 그대로 노출될 경우 애초의 촬영의도와 다른 재사용에 관해 초상권을 비롯한 법적 분쟁 가능성이 있다는 점, 이 영상을 행사준비를 위한 모금활동에 사용할 경우 곤란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걱정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이메일을 보내신 분의 신념과 대선을 바라보는 의견을 신뢰하고 공감하면서도 발생가능한 모든 문제를 완전히 외면할 수 있을만큼 선뜻 참여할 수가 없었다. 나는 뭘 두려워하는 걸까.
두려운 건 없다. 어느 분이 초상권을 문제삼아 법적 대응을 한다면 옳고 그름을 가려 그 댓가를 치르면 된다. 이 영상으로 돈을 모은 것을 문제삼는다면 수익사업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면 된다. 그렇다면 뭘 걱정하는건가. 이게 참 설명하기 어렵다. 행사가 끝난 다음에야 그것이 단지 노파심이었는지 아니었는지가 확실해질 듯 하다.
지나치게 소심하다 싶으면서도 현재 내 마음은 그렇다.
당연히 내가 힘을 보태리라고 믿었을 그 분께 죄송하고 이런 일에 마땅히 활용되야할 영화인데 잘못 판단한 건 아닌지 마음이 편치 않다. [돌 속에 갇힌 말]이 내 것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고, 영화라는 것이 감독 개인의 것이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결론을 내리는 사람이 감독이어야한다는 건 참 답답한 일이다. 마음이 한없이 무겁다.
본문링크:피하지 않고 부딪힐 때......
피하지 않고 부딪힐 때 나는 성장한다
KBS 독립영화관으로부터 사과문을 받다
- <돌 속에 갇힌 말> 중에서
보름 전이었던 5월 25일, '독립영화관' 담당피디는 <돌 속에 갇힌 말>의 연출자이자 제작자였던 내게 이 작품을 방영하고 싶다는 제안을 했었다. 애초에 예정했던 방영일정은 6월 23일이었으나 심의를 거치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6월 9일로 앞당겨졌다는 것을 알았다. 5월 31일, '독립영화관' 홈페이지의 '미리보기' 게시판에서는 <돌 속에 갇힌 말>에 관한 소개글이 등록되었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한 방영예고 기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몇 차례 거듭 계약에 관한 문의를 하고 계약서 발송을 요구한 끝에 6월 8일, 방영 예정일을 하루 앞두고 계약서를 받은 나는 VOD 서비스(방영된 작품을 온라인에서 동영상으로 다시 보기)를 일주일 동안 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에 대한 조절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러나 계약서의 전문은 단 한 문장도 수정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행정업무를 담당한 한 피디의 입장이었고 계약은 체결되지 않았다.
6월 9일, <돌 속에 갇힌 말>의 방영계획을 당분간 보류하겠다는 통보를 받았고 나는 곧바로 KBS 본관으로 가서 담당 피디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계약서 미체결'로 인한 방영유보라는 답변을 되풀이했고, '독립영화관' 홈페이지에는 '축구 관련 프로그램의 긴급 편성으로 인해 정규 방송이 연기된다'는 요지의 간단한 공지가 등록되었다. 그 다음날인 6월 10일, 담당 피디 중 한 사람으로부터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방영을 취소해달라는 내용의 공문이 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그 공문의 내용을 보여달라는 내 요구는 거절당했다. 기관 대 기관의 일이므로 개인에게 공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날 이후 '독립영화관' 시청자 게시판에는 방영유보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밝히라는 시청자들의 항의글이 연이어 올라왔으나 13일이 되어서야 이에 관한 공식적 답변이 게재되었다. 계약서 미체결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공문으로 인해 방영이 유보된다는 내용이었다.
KBS 독립영화관 제작진이 공지한 <돌 속에 갇힌 말> 방영유보의 이유는 처음과 나중이 전혀 달랐으나 이에 관한 사과의 표현은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은 채로 '방영유보'라는 일방적 통보를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판단한 나는 한국독립영화협회(아래 한독협)를 통해 대응방안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두 차례 대책회의를 갖고 '독립영화관' 제작진과의 공식적인 면담을 요청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법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자문을 구하기도 했으나 소개받은 변호사의 입장은 부정적이었다. 2005년의 여름이 그렇게 맥없이 지나갔다.
2006년, 16인의 독립영화감독 및 미디어활동가들이 제작한 장편 다큐멘터리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에 참여했던 나는 몇 달 동안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러 투쟁현장을 찾아다녔고 영화가 완성된 후에는 전국에서 다양한 관객들을 만났다. 그 과정에서 그동안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미루고 미루었던 한 가지 사실에 직면했다.
일 년이 지난 일에 대해 지지를 호소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돌 속에 갇힌 말>에 출연한 분들이나 스탭으로, 후원금으로, 자료제공으로 다양하게 참여했던 많은 분들께 일일이 연락을 드리기도 민망했다. 2006년 6월 13일, 일단 블로그를 통해 'KBS 독립영화관 제작진의 사과를 받아야겠다'는 결심을 알렸다. 한독협을 통해 다시 면담 요청을 하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변호사를 다시 소개받았으며, 진보넷 블로거에서부터 고향친구에 이르기까지 조금이라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들에게 서서히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오마이뉴스, 미디어오늘, 한겨레, 참세상, 일다 등 온라인으로 기사제보가 가능한 여러 언론매체에 항의성명서와 관련일지를 발송했고 자주 드나들던 각종 인터넷카페와 홈페이지에 소식을 전하면서 초조하게 그 결과를 기다렸다. 6월과 7월은 제작비도 마련해야했고, 이미 제작중이던 두번째 장편 <우리의 노래를 들어라>의 1차 가편집을 완료해야하는 상황이었지만 도무지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작년에는 인권운동사랑방과 구로타임즈, 계간 독립영화, 씨네21(매주 '독립영화관' 방영작품을 소개하는 하단 박스기사를 통해 간단하게 언급되었다)에 방영취소에 관련한 기사가 실렸으나 올해는 그 어떤 매체에서도 이 일을 기사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초조했다. 과연 '독립영화관' 제작진의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이 일에 대해 공감하고 지지해줄 사람이 있을까?
한 달이 지난 7월 중순, 한독협 사무국장의 주선을 통해 면담을 하려던 계획은 기어이 좌절되었다. 한독협과 연락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오해가 발생했고 결국 혼자 이 일을 맡아야했다. 막막했지만 일단 담당 피디 두 사람에게 '방영취소에 대한 공식적 사과를 원한다'는 메일을 보냈다. 당시 '독립영화관'을 담당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아무런 답변이 없었고, 나머지 한 사람과 새로 합류한 한 사람이 답변을 보내와서 몇 차례 전화연락 끝에 면담일정이 잡혔다.
그 날 많은 지인들이 축하해줬고 연대서명에 동참했던 분들로부터 고생 많았다는 격려를 들었지만 어쩐지 껄끄럽고 씁쓸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 두 달을 건조하게 정리하는 지금도 기쁘거나 후련한 마음보다는 쑥스럽고 민망한 마음이 앞선다. 나는, 왜, 이렇게, 더디고 어리석은가. 자꾸만 자책을 하게 된다.
이미 오래 전에 진실은 왜곡되었고 농성 참여자들은 모욕을 당했다. 그 아픈 기억을 20여년 만에 또 다시 되풀이할 빌미를 내가 제공한 것이다. 방영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제작한 영화였고, 출연한 분들께 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 공개해도 좋다는 사전 허락을 받지 않았으므로 최소한 <돌 속에 갇힌 말>이라는 이 영화만큼은 처음 방영제의를 받았을 때 깔끔하게 거절했어야 했다.
내게 가장 큰 유혹이 되었던 방영료 칠 백 만원, 방영이 되면 이 사건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고, 그래야 풀리지 않는 여러 의혹들에 대해서도 보다 적극적으로 공론화할 수 있을 거라는 섣부른 판단, 사람과 조직에 대한 순진한 기대감… 이런 몇 가지 이유로 인해 나는 독립영화 감독으로서, 또 자본과 권력으로 끊임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이 사회에 저항하면서 살아가려는 한 사람으로서 결코 씻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조금 더 당당하기 위해서, 그리고 조금 더 날카로운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단 한 장면으로 남은 시절을 무한 반복 재생하는 어두운 삶으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서 이번 일은 내가 반드시 거쳐야할 통과의례였는지도 모르겠다. 사과문을 받기까지 지지해준 많은 분들과 초보감독을 믿고 어려운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많은 출연자들과 아무런 보상없이 스탭으로 참여하고 후원해주셨던 분들, 이 영화의 부족한 부분을 격려로 메꾸며 따뜻하게 바라봐주셨던 관객들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한 인간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감히 예상할 수 없는 숱한 사람들의 관심과 믿음이 필요하다. 나도 다른 사람의 성장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다음 작품을 통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 이것이 지금의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운동이다.
독립장편 다큐멘터리 <돌 속에 갇힌 말> 관련정보와 방영취소에 관한 보다 자세한 소식은 제 블로그 http://blog.jinbo.net/hyunhyun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링크:R-TV 영화, 날개를 달다 (동영상)
카메라를 든 사람들 -
한국독립다큐멘터리 감독들을 만나다 Vol.2
지난 방송에 이어서 한국독립다큐멘러리를 만들고 있는 감독들을 만나봅니다.
본의 아니게 음지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독립다큐멘터리 감독들
자신이 만든 작품에 대한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와 함께
"독립다큐멘터리"에 대한 의미를 찾아 봅니다.
1. <안녕, 사요나라>의 김태일 감독
Q. 역사를 다루면서 독립다큐와 방송다큐의 차이점
Q. 후배 감독들에게 하고 싶은 말
2. <학교 이야기>의 진경진 감독
Q. 학교문제에 대한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
Q. 작품이 다소 감정적이라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Q. 작품을 하면서 등장인물과 관계맺는 방식
3. <어느날 그 길에서>의 황윤 감독
Q. 환경에 대하여 작업을 계속하시는 이유는
Q. 작업을 하면서 힘든 점
Q. 환경을 주제로 다루는 방송다큐멘터리와 독립다큐멘터리의 차이점과 한계
4. <돌 속에 같힌 말>의 나루 감독
Q. 작업을 하게된 계기는
Q. 작업을 하면서 힘들었던 점
Q. "독립다큐멘터리"라는 매체로 작업을 한 이유는
5. <버스를 타자>의 박종필 감독
Q. 인물과 관계맺는 방식
Q. 작업을 하면서 힘들었던 점
6. <각하의 만수무장>의 영화제작소 청년 김경만 감독
Q. 기록 필름을 재구성하는 작업의 의미
Q. 작업을 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7. <농가일기>의 권우정 감독
Q. 수입개방,신자유주의와 관련해서 농촌문제가 많이 언급되는데 작업 방향은
Q. <농가일기>라는 제목이 낭만적인 농촌을 연상시킨다는 의견에 대해
8. <죽거나 혹은 떠나거나-이주노동자프로젝트>의 주현숙 감독
Q. 작업을 하면서 힘든점은
Q. 신작 '멋진 그녀들'은 어떤 영화인가
Q.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작품은
그리고 마지막 질문
독립다큐멘터리를 왜 하고 계십니까?
네오이마주 홈페이지 - www.neoimages.co.kr
기사 원문 - http://www.neoimages.co.kr/news/view/1028
다큐멘터리 특집 10
- [돌 속에 갇힌 말-구로구청 부정투표함 항의농성 사건]
영화는 ‘87년 이후 구로구청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는 감독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빠른 영상과 강렬한 음악이 관객을 긴장하게 한다. 구로구청에서 감독은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 영화는 ‘광주 민주화운동 만큼이나 중요했다’고 표현하는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항의농성사건을 과거에서 현재로 불러오고, 관객은 감독의 기억에 차근차근 접근하게 된다.
영화는 목적이 뚜렷하다. 그때 구로구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재현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히 혼란스럽기도 한데, 감독은 무엇을 먼저 말하고 무엇을 결론 내려야 하는지 괴로워하는 것 같다. 영화는 일단 구로구청 주민들의 인터뷰로 시작하지만 주민들은 ‘많이 싸웠다더라 데모가 컸다더라’ 식으로 사건을 희미하게만 추억할 뿐이다. 감독은 당시 데모에 참여했던 사람을 인터뷰한다. 어떤 사람은 일이 있은 후 서울을 떠나 몇 년 동안 칩거 생활을 했고 어떤 사람들은 알콜에 의지해서야 인터뷰를 응할 수 있었다. 그동안 파묻어놨던 어두운 기억을 끄집어내듯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말을 꺼낸다. 이제 영화가 혼란스러운 이유가 드러난다, 감독 역시 여전히 고통스러운 것이다. 다시는 되새기고 싶지 않은 기억을 되짚는 작업이 힘겨운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가장 고통스러운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그때는 87년 12월 16일 대통령 선거일이었다. 표 한 장에 10만원씩 주는 돈 거래가 오가던 부정선거가 이뤄지던 때였다고 사람들은 증언한다. 결정적인 사건이 구로구청에서 일어나는데, 빵 뭉치로 위장된 투표함이 봉고트럭에 실려 투표장을 나가려다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이에 항의하는 농성이 이뤄지고 대책위원회가 구성되고 부정선거의 현장을 알려야한다는 판단아래 6천여 명의 사람들이 모인다. 영화는 이 사실을 여러 인물의 인터뷰와 기록화면과 사진을 이용해 숨 가쁘게 추적한다. (개중에는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인 김희선씨나 유시민씨 같이 익숙한 얼굴도 있다) 영화는 이 증언 중에 거짓말도 있고 잘못된 기억도 있다고 반박하거나 때로는 인터뷰 대상을 공격하기도 한다. 이런 혼란이 존재하게 된 건 18일 새벽에 일어난 일 때문이다. 영화가 되짚기 두려워했던 그 처참한 순간, 그러니까 공권력이 투입돼 무자비한 진압이 이뤄진 순간 때문이었다. 몇몇 사람은 미리 소문을 듣고 빠져나갔지만 현장을 잘 모르던 어린 대학생과 지역 주민들만 남아있던 상태에서 무참히 진압이 이뤄졌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당시의 상황을 가장 적나라하게 전달한다. 검은색의 암전 속에서 우는 소리와 비명, 고함과 소란스럽게 부서지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오고,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의문이 떠오를 무렵 카메라를 들고 있던 사람이 전경을 피해 캐비넷 안에 숨어 있는 중이라는 자막이 등장한다. 이것이 20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영화는 수많은 질문을 풀어놓는다, 그때의 부정투표함은 어디 있을까, 그때 사상자는 몇 명이었을까, 지금 거짓말하는 사람은 누구이며,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많은 사람과 기록과 사진을 통해 재구성 하는데도 여전히 의문점은 남는다. 나중에 공표된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강한 의혹이 때문이면서, 또한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존재하는 육체적 정신적 상처와 후회와 죄책감 같은 감정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뒤섞이면서 우리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그 말들은 모두 돌 속에 갇혀있다.
영화와 당시 사건에 대해 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으시면 나루감독님의 홈페이지를 방문해보세요.
http://blog.jinbo.net/hyunhyun/
제목 : 돌 속에 갇힌 말-구로구청 부정투표함 항의농성사건 Words Kept In A Stone Sit-down Strike Against An Illegal Ballot In Guro Ward District
감독 : 나루
정보 : 2004 / DV / Color / 70min
본문링크:변하지 않는 국가폭력을 얘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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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링크:우리의 투쟁 속에 인간은 있는가?
우리의 투쟁 속에 '인간'은 있는가? 초청포럼'중구난방' 후기 |
현장에서 미래를 제123호 |
초보좌파 |
우리의 투쟁 속에 |
본문링크:19년이 지나도, 돌 속에선...
19년이 지나도, 돌 속에선.... 초청포럼'중구난방' 후기 |
현장에서 미래를 제123호 |
김경환 |
19년이 지나도, 돌 속에선 그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
2006-09-03 13:23:43 |
그 순간 세계가 보인다
우리가 잠시 만난 그 순간
너와 내가 나눈 표정과 말이
각자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를,
내가 촬영하고 구성하고 편집한 영화를,
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출연하고 함께 작업하고 후원해준 영화를
낯선 사람들 앞에서 같이 본다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불편함이 있다
관객으로서도 연출자로서도 만족할 수 없는 기술적인 숱한 헛점과
내가 고민했던 것이 지금도 앞으로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것과
내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덜 익어서 의도한 만큼 누군가에게 닿지 못하는 것과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을 '또' 봐야하는 것과
쏟아부을 곳을 찾지 못해 여전히 가슴 한 구석에 맴돌던 분노를 응시해야하는 것을 견디며
아직 말이 되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이 우웅우웅 떠도는 머리를 비우면서
어서 영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된다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에서 마련한 '중구난방 토론회' 가 두번째 열리는 자리였다
빔프로젝터를 빌리고 스피커도 잘 싸서 들고 갔는데
DV 데크에 필요한 리모컨을 안챙겼더니 화면에 타임코드가 뜬다
00:00:00 부터 70분 동안 계속 화면 오른쪽 상담에 프레임, 초, 분단위의 숫자가 표기된다
노트북을 급구해서 디비디로 틀어봤지만 중간에 멈추더니 꼼짝도 않는다
식은 땀을 흘리면서 하는 수 없이 타임코드가 뜨는 채로 상영을 했다
죄송해서 할 말이 없다 (그걸 70분 동안 암말없이 지켜보신 관객들, 감솨!)
한 십 분, 별다른 문제없이 진행되는 걸 보다가 옆방에 가서 맥없이 앉아있었다
부끄럽고 속상하고 한심하고...오늘은 불편한 감정이 몇 배로 늘어난다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빵집에서 빵을 몇 개 사들고 들어와 우적우적 삼켜보지만
별다른 진정효과는 없다
드디어 영화가 끝나고 토론회가 시작되었는데
'오늘은 좀...영화에 대한 질의응답보다
각자 자기 이야기를 해주었으면...'하는 바램이 있었다
그 마음이 서로 통했는지
중구난방 토론회라는 자리가 원래 그런 취지여서 그랬는지
간단한 질문과 답변 이후에
모인 분들이 저마다 자기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한다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서 좋았다
슬슬 불편했던 마음이 펴졌다
다리미같은 사람들, 다시 한번 감사!
초보좌파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해서 3개월 정직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한겨레 21에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리우스는 운동을 하다가 어느날 잠적(?)하고 모든 사람과 연락을 끊은 적이 있다
그러다 지금은 강의도 하고 책도 만들고 연구도 하고 싸움도 한다
한노정연의 한 연구원은 인천에서 문화운동을 조직하고 있다
토론회를 진행한 다른 연구원은 한때 다큐멘터리를 만들다가 지금은 접어두고 있다
그 연구원의 학교후배들 중 하나는 현재 학내 한 건물에서 점거농성을 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점거농성을 취재하거나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제일 나중에 온 분은 얼마전에 석사논문을 마쳤다
그들이 각자 영화를 보고 나서, 혹은 늦게 와서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영화의 제목이나 내용에서 연상되는 어떤 이야기를 한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모습, 내가 말하는 모습, 그들과 내가 누군가의 말에 반응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처음 만났거나 겨우 두 세번 만난 사람들이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고
그래서 긴장되기도 하지만 그래서 즐거운 거라고
'나'라는 한 개인이
'돌 속에 갇힌 말'이라는 영화로, 혹은 그 영화의 연출자로
주목받거나 대상화되는 것이 아니라
모인 사람들 중의 하나로 존재할 수 있는 자리여서 좋았다
영화는 그저 동기를 제공한 다음 적당한 거리를 둔 채 멀찌기 떨어져있고
'감독 나루'였다가 스무살 학생이었다가 철없이 나이만 먹은 선배였다가
그렇게 오락가락하면서 털어내고 뒤집고 내지르고 수용하는
다양한 경험을 맛볼 수 있다는 게 재미있었다
손님, 혹은 초대한 자
조직, 혹은 개인
진실, 혹은 거짓
옳거나 그르거나
이분법의 경계에서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것에 익숙했던 시간을 넘어가서
저마다 나름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구나
할 이야기를 좀 더 꼼꼼하게 준비할 걸 그랬나, 후회도 하면서 다시 그 시간을 돌아본다
두 시간 전에 미리 차를 몰고와서 짐을 실어주고 점심을 먹이고 데려다 주고
마음쓰고 돈까지 쓰면서 모임을 준비하신
리우스와 진행자에게도 감사를
또 놀러갈께요
드러누워보는상영회2 에 관련된 글
돌 속에 갇힌 말, 을 보고 나서
나는 뒷머리를 득득 긁으면서 이 짓을 했다
방영취소 1주년 기념 케잌자르기!
초를 안챙겼더니
리우스가 담배를 꽂았던 거 같은데...
그 날 찾아와서 같이 영화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고
격려도 아끼지 않았던 친구들, 이 무더위를 잘 견디고 있는지?
보고 싶소
가을이 오면 '팝의 여전사'로 3차 상영회를 합시다레
[KBS 독립영화관, '돌속에갇힌말' 방영취소 1주년(1)]
[방영취소 1주년(6) 사과촉구 성명에 동참하신 분들]
[방영취소 1주년(12) KBS 독립영화관의 사과문 초안]
[방영취소 1주년(14) KBS 독립영화관, 사과문 발표]에 관련된 글
KBS 독립영화관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아낸 일은
축하받을 일이나 기뻐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나라에서 독립영화는 제가 겪은 일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집요한 제도적 폭력과 야만적 횡포를 견뎌내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정부가 원하지 않는,
자본과 주류언론이 주목하지 않는,
조금 다른 생각을 담은 영화 한 편을 기획하고 제작하고 발표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했던 군부독재의 시대를 지나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아직 온전한 우리 것이 아닙니다
규명하지 못한 많은 사건들,
아직도 말이 되지 못한 많은 장면들,
우리는 여전히 '돌 속에 갇힌 말'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공정한 선거문화를 관리하고 조직해야할 '선거관리위원회'라는 기관이
국민의 볼 권리와 알 권리보다 조직의 명예실추 가능성에 더 연연하며
방송가능한 영화를 방영취소하도록 위협하는 공문을 통해
'선거관리'보다 '이미지 관리'에 더 민첩한 움직임을 보이는 현실에서
1년전의 방영취소 사건에 관해 공식적인 사과를 받는 것이 받지 못하는 것 보다는 낫고
아예 사과받을 권리를 포기하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하지만 개운하거나 홀가분하지는 않습니다
너무 오래 고민하고 너무 늦게 움직일 수 밖에 없었던 제 나약함에 대해
작년 6월부터 1년동안 어깨에 걸쳐져 있던 자책감이
조금은 덜어진 듯 해서 다행입니다
서로 오해하고 벽을 쌓았던 사람들끼리 마주 앉아
속내를 내보일 수 있었던 것도 다행입니다
그러나 그 단 한번의 만남이
'방송'과 '독립영화(혹은 대안적 영상활동)' 사이에 켜켜이 쌓인 앙금과 문제들을
말끔하게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언제쯤이면 자신의 입장과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날이 올까요
얼마나 더 지나야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세상이 될까요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어떤 해프닝,
단지 개인적인 갈등으로 비치는 어떤 상황의 이면에서
자본과 권력과 뿌리깊은 성별분업으로 인한 차별이나 소외를 감지할 수 있어야
우리가 원하는 '다른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예민하다고, 너무 앞서나간다고 누군가의 조금 다른 감수성을 지적하기 전에
그 누군가가 왜 날카롭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지를 듣고 이해하려는 감수성도
조금 더 예민해지고 조금 더 풍부해졌으면 합니다
1987년 12월 16일 서울 구로구청에서
부정의혹을 가진 대통령 선거 투표함 밀반출에 항의하며
참여한 동기는 저마다 달랐을지라도 자발적으로 농성에 참여했던 그 분들
불합리한 현실을 고발하고 진실을 규명하고자 했던 수많은 주민들, 학생들의 함성과
마지막까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피 흘리며 저항하던 장면을 잊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구호 외쳤다는 말 하지 마라, 농성하러 왔다는 말 하지 마라,
화염병에 불 붙였다는 말 하지 마라, 공정선거감시단이라고 말하지 마라
구청에 들어온 시간과 들어온 방법과 잡힌 시간에 대한 시나리오를 짜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진술서를 쓰게 할테니 알리바이를 정확하게 기억해라...
악몽같은 진압이 끝나고
등짝에 군화자국을 업고 줄줄이 복도에 꿇어앉아 앞 사람 엉덩이에 얼굴을 묻고 있을 때
진압봉으로 맞아가면서도 저를 보호하기 위해 끈질기게 속삭이던 그 분의 목소리
잊지 않겠습니다
그 사건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책임을 회피하고 진실을 왜곡하던 사람들과
술기운을 빌지 않고서는 입을 열 수 없었던 한 노동자와
2년동안 거절하던 인터뷰를 승락하며 눈물 글썽이던 또 다른 노동자와
오랫동안 잊고 싶었던 기억을 되살리느라 고통스러워했던 양원태님과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꼭 완성해달라고, 혼자서 고생이 많다고 격려했던 그 분들과
제대로 보상받지 못할 노동력을 기꺼이 제공해준 여러 동료들과
5년 동안 완성을 못하고 쩔쩔매는 초보감독에게 후원금을 보내주신 많은 분들과
여러 가지 결함에도 불구하고 상영작으로 선정해준 여러 독립영화제 심사위원들과
제가 미처 정리하지도 발견하지도 못한 의미를 부여하고 널리 알려준 친구들과
작년 6월 방영취소 이후 즉각 기사를 쓰고 해당 게시판에 항의글을 올렸던 분들
잊지 않겠습니다
문자를 받자마자 선뜻 변호사를 소개해준 보라돌이
두서없는 이야기를 꼼꼼하게 읽고 조언해주신 문건영 변호사님
대책없이 일을 벌였는데도 곧바로 동참해준 '돌속' 스탭들과 '우리의 노래를 들어라'의 주인공들
한 달 동안 꾸준히 동참해준 그 많은 진보넷 블로거들과 네이버의 사토와 명제와 성희언니
직장동료를 35명이나 설득해서 지지자 명단을 만들어온 그 친구
게시판에 관련글을 올리자마자 그 내용을 그대로 기사화했던 '울산노동뉴스'
울산에서 수고했던 연정씨와 미희, 대전에서 수고했던 도끼님, 그리고 여해연 친구들
메일 한 통을 받자마자 단체명의로 동참하신 '인권운동사랑방'
구로지역에서 신속하게 연대서명을 조직했던 수정씨와 경동 선배
빨간눈사람 홈페이지에 관련글을 올리고 쇼킹한 스탭들을 모았던 경순
반드시 방영해야한다는 조언을 이메일로 보내주셨던 '망각의 삶'
태준식, 이마리오, 슈아, 알엠, 노치를 비롯한 여러 독립영화 감독님들
잊지 않겠습니다
잊지 말아야할 그 장면들, 잊을 수 없는 그 많은 사람들을 기억하는 동안
저는 아마도 조금 더 의미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애쓰면서
조금 덜 부끄럽게 살아갈 수 있겠지요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KBS 독립영화관의 '돌 속에 갇힌 말' 방영취소 1주년을 맞아
관련일지와 항의성명을 읽어주시고 연대서명하셨던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독립영화관 제작진의 사과문은
제가 받아낸 것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받아낸 것입니다
이 일이 단지 누구를 돕고 누구를 지지하는 일이 아니라
그저 누구를 질책하고 누구를 책임추궁하며 몰아세우는 일이 아니라
관련되었고 관심가졌던 모두가 같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이자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들을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이기를 바랍니다
저마다 한가지씩 의미를 가지는 일이었기를 바랍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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